- 계시록 설교

[스크랩]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4장

에반젤(복음) 2021. 12. 27. 05:36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4장

시온산의 십사만 사천 (계 14:1-5)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십사만 사천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인정받는 설은 제한된 144.000명의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죄인을 선택하시고 얼마든지 부르셔서 자기의 종 즉 소유로 삼으신 신구약의 구원 받은 무리의 총수를 말합니다. 계 7장에서도 다루었지만 셀 수 없이 많은 흰옷 입은 무리가 환난의 연단을 통해 변화 받은 면을 강조한 것이라면(7:14), 십사만 사천은 성령의 인침 즉 사람 편에서 보면 구원의 진리를 확신함으로 구원 받은 면을 강조한 것입니다(7:3,4,5).

 

궁금한 것은 7장에서 십사만 사천에 대해 기록했는데 14장에서 또 다시 나타난 이유입니다. 두 기록을 비교해 보면 7장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에 인 맞은 자라는 말씀만 있지 자세한 설명이 없는 반면, 14장에서는 “처음 익은 열매”(4절)라 한 것처럼 진리에 서서 장성한 원숙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7장에서 14장을 거치는 동안 많은 은혜의 결실이 바로 14장의 모습입니다.

 

특히 11장 두 증인을 통해 양육을 받은 결과가 십사만 사천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있는 표가 있어 죄의 인격인 666의 표를 이긴 자들임을 시사합니다. 그 증거로 십사만 사천은 죄인의 상징인 사람들 가운데 선택을 받아(계14:4) 높이 되신 예수와 함께 하늘의 시온산에 서서 누구도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소리로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고 누리는 흠이 없고 영광스런 무리라는 점에서 양육을 받는 우리 성도들이 바라볼 목표요 이상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양떼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세우는 일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힘쓸 최선의 사역입니다.

 

구체적으로 십사만 사천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1.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계 7장에서 다루었듯 히브리인들의 숫자개념으로 볼 때 144,000은 교회의 상징인 구약12지파✕신약12사도✕충만수1000(롬11:25)을 곱해서 나온 수입니다. 12는 하나님의 완전수 3에, 땅의 수 4를 곱해서 나온 부름 받은 선택의 수입니다(엡2:18-20). 그러므로 이들은 144.000이라는 제한된 숫자의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죄인을 선택하시고 얼마든지 부르셔서 자기 백성 삼으신 신구약의 총수를 가리킵니다.

 

2.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보라”라는 낱말은 그동안 준비해온 결과를 전격적으로 공개하는 감탄사입니다. 그들이 하늘 높이 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섰다는 것은 성도는 예수와 함께 하늘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여기 “함께”란 용어는 “안에”라는 용어와 함께 바울서신에서 그리스도의 공로의 특징을 의미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함께 부활했으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된 자라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3. 예수 안에서 승리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하늘의 시온산의 배경이 되는 지상의 시온산은 높은 지형에 위치해 있으며 온갖 고초 가운데 다윗이 왕이 되어 첫 번째 수도를 정한 곳으로 최초로 다윗의 왕적 권위가 인정된 곳입니다. 또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으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시온산에 섰다는 것은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과 승리와 영광을 누리고 있음을 말합니다(시24:3-6). 그러므로 십사만 사천은 낮은 죄인의 자리에서(계14:4) 선택을 받아 예수의 복음을 믿음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늘에 속한 그 은혜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7장의 십사만 사천은 6장의 일곱 인재앙 직후에 나타난 삽경으로 성경이 열려 복음을 깨닫고 확신하기 시작한 시점이라면, 14장의 십사만 사천은 진리 안에서 양육을 받아 666을 비롯 온갖 장애를 다 이겨낸 승리의 사람들입니다(히3:6).

 

4. 그들은 세속에서 벗어나 변화된 자들입니다.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앞 장에서 다룬 666의 표를 이긴 자들임을 시사합니다. 즉 666이 세속화로 짐승화 된 죄의 인격과 삶이라면 여기 144,000의 이마에 있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란 먼저 그의 소유라는 뜻임과 동시에(4절)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성화된 인격들임을 보여줍니다.

 

5.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2절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계시록에서 여러 소리가 났는데 소리의 위치는 소개하는 내용에 따라 달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십사만 사천이 내는 하늘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즉 그들은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였습니다.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꼭 사망 이후를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삶을 살아갈 때 하늘에 속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3절에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 오셨으나 땅에 속하지 않으신 예수님과 같습니다(요3:31-32, 요3:34).

 

6. 그들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자들입니다.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문자대로라면 해변의 밀려오는 파도나 장엄한 폭포소리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 절은 좀 더 깊은 걸 알려 주고 있는데 성경에서 물은 말씀이나(엡5:26) 성령을 상징합니다(요7:37-39). 즉 많은 물소리는 곧 은혜와 진리로 충만함을 가리킵니다(계1:15, 요1:16-17). 그러므로 144,000은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그의 충만함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7. 아버지를 닮은 거룩한 자들입니다.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다음은 큰 우렛소리와 같았는데 우렛소리는 계4:5에 나오듯 보좌에 계신 엄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하실 때 그 엄위하신 모습과 같습니다. 이들이 아버지의 엄위하신 모습을 닮았다면 그 상대는 원수들에 대한 것입니다. 죄와 세상과 마귀에게 엄위한 모습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원수요 성도의 원수입니다.

 

8. 그들은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하늘에서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 소리가 요한의 듣기에는 거문고 타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거문고는 찬양하는 악기로서 성령의 감동의 상징입니다(왕하 3장). 그리고 물소리 같은 베이스나 엘토, 그리고 뇌성 같은 테너나 소프라노와 같이 장내가 떠나갈 것만 같은 큰 화음의 거문고 타는 소리는 밀려오는 감동의 파도와 폭풍을 연상시키기에 알맞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 편 이 구원의 즐거움은 체험 유무를 떠나 진리에 서서 예수 안에서 주신 아버지의 사랑과 그 은혜를 생각하며 그런 밀려오는 감정으로 그리고 해와 같이 밝은 얼굴로 찬양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것이 지상에서 믿음으로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는 비밀입니다.

 

9. 그들은 예배가 생활화된 자들입니다.

 

3절 “그들이 보좌 앞과” 하나님 앞을 보좌 앞이라 표현한 것은 보좌는 다스림의 상징으로 통치를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과 및 하나님의 다스려 주심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 다스려 주심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다스려지고 삶이 다스려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를 사람 편에서 보면 그 주권을 높이고 그 주권에 순복하고 충성했음을 의미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배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늘 정규예배와 생활예배로서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10. 그들은 복음적인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네 생물과” 그들은 네 생물 앞에서도 새 노래를 불었습니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구룹천사이기도 하고, 사복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성경학자들이 사복음을 분류하면서 마태복음을 사자복음, 마가복음을 소복음, 누가복음을 사람복음,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이 네 생물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복음의 풍성함을 아는 그 복음적인 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이 주는 그 교훈적 핵심은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시되 영원한 영광과 함께 구원하신 은혜를 날마다 찬양하시기 바랍니다(시50:23).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율법이 아닌 복음의 사람 만들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다했습니다(갈4:19).

 

11. 그들은 교회의 양육을 받은 자들입니다.

 

장로들 앞에서” 이 말씀은 장로들에게 찬양한다는 말이 아니라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에 대해서 교회지도자들의 수고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종에는 사도 목사 교사 선지자 능력을 행하는 자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왜 그 많은 명칭 중에서 장로였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장로는 사도 중에서도 나이 많아 일생 교회를 위하여 수고를 많이 했고 성경기자가 될 만큼 말씀과 은혜에 있어서 원숙한 하나님의 종들을 가리킵니다(요일2:13, 벧전5:5). 그들이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교회와 성경의 온전한 지도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엡4:11-12).

 

12. 그들은 복음의 수준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여기 새 노래란 이미 계5:9-10에 24장로들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거기 나타난 새 노래의 내용은 다름 아닌 어린양의 피로서 구속 받은 구원의 노래입니다. 지도자의 표상이 된 장로들의 노래를 이들이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영적으로 장성했고, 그만큼 진리 안에서 굳게 섰고, 그만큼 그 결과로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13. 그들은 믿음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십사만 사천이 구원의 총수를 상징한다면 그들 중에는 천상의 성도도 있겠지만 4-5절을 보면 현재적으로 죄에서 승리하는 등 지상성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부를 수 없는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일반 신자들이 ‘하나님 구원해 주세요.’식의 이방인 수준이라면 십사만 사천이 부르는 찬양은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복음의 진리에 서서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는 복음에 선 내용 자체가 다른 찬양입니다. 그리고 내용을 알기에 찬양의 감격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며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천상에서는 체험하며 부르는 찬양이지만 지상에서는 칠흑 같은 상황일지라도 믿음으로 부르는 찬양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부르다 보면 시인함으로 구원을 얻듯 지상에서도 그 은혜를 누립니다. 이 감격에 넘치고 성령충만한 찬양은 은혜를 받은 자밖에는 부를 수 없습니다. 이전 점에서 찬송가의 가사를 복음적으로 더 명확히 하면 좋을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줄 알지만 성자에 대한 찬양의 비중이 너무 커서 성부 성령에 대한 찬양도 많았으면 합니다.

 

14. 그들은 강하고 담대한 사람들입니다.

 

4절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문자대로만 본다면 그들은 남성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남자에게 하는 교훈은 여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며(마5:28),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남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고전16:13) 담대한 믿음을 가진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성령 받으면 대장부처럼 담대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처럼 십사만 사천을 남성형으로 표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담대한 믿음이 아니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보혈의 공로를 믿고 양심의 자유를 얻고 당당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담대함으로 예수 안에서 이루어주신 성결 성화 영화까지도 믿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심령은 냉냉하고 늘 넘어지는 상태인데 진리의 복음에 선다는 것은 담대한 믿음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15. 하나님만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에 대한 추가적인 의미입니다. 간음이란 육체적 간음과 마음적 간음 그리고 이교나 우상 그리고 세상과 벗된 것이 간음입니다(약4:4). 이런 점에서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원주의 역시 인정할 수 없습니다.

 

16. 십자가 지고 주를 따라가는 믿음입니다.

 

4절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여기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표현했는데 어린양은 우리를 피로 사신 구속의 주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는 것은 구속주이신 예수님의 뒤따른다는 의미와 아울러 죽는데까지를 암시한 말씀으로 그 길이 심히 좁고 험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이루셨으므로 이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가 아닌 자기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 지고 거기까지 가는 자라는 것을 시사한 표현입니다(마16:24). 혹은 예수와 함께 죽고 살듯 믿음으로 그 구원의 과정을 밟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17. 예수의 복음과 오순절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사람 가운데 라는 말씀은 사람이 그러하듯 죄악의 비천한 자리에서 속량함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원숙한 열매에 이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열매는 오순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순절은 보리나 밀의 첫 곡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 이 날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장성한 믿음인 천국의 알곡이 되었습니다.

 

이런 알곡이 되려면 겨울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율법으로서나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신앙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도 있다고 믿는 다원주의로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진리를 약화시킬 뿐 아니라 바른 기독교 신앙에 바로 서지 못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방송설교자나 대교회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어 오직 예수 신앙이 자취를 감취게 될지 모릅니다.

 

신앙의 겨울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부족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이 증가하면 은혜는 따라옵니다. 그렇지 않고 체험을 강조하다 보면 잘못되기 쉽고 특정한 체험이 없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을 비정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체험에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수준을 오순절에 맞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심령에 봄이 옵니다(아2:10-13).

 

그리고 알곡이 되려면 추위 뿐 아니라 봄의 건기를 통과해야 하듯 건기에 할 일은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입니다. 건기는 대개 하나님의 침묵, 임재 체험의 결여 및 환난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연단 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경배의 분량이 차게 됩니다(시57:4). 무화과로 보더라도 “처음 익은 열매”는 가을에 달려 겨울을 통과하여 이른 봄에 따는 봄 무화과로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무화과라는 점에서 역시 연단을 시사한 말씀입니다.

 

18.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들이 하나님에게도 속하고 어린 양 예수님께도 속했다는 것은 1절에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소유란 선택 받은 자라는 뜻이라면(사43:1), 어린 양에게 속한 자란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존재라는 의미입니다(요17:6). 사람 편에서 볼 때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19.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 받는 자들입니다.

 

5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입에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먼저 언어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 마음이 진실하고(마12:34-35) 또 온전하다는 것입니다(약3:2). 그런데 입의 말 중에 특히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개념을 넘어 삶의 어떤 순간에서도 불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과 그 복음을 시인하며 살았음을 시사합니다. 현실과 사실을 말한다고 모두 진실은 아닙니다. 현실보다 말씀이 더 진리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말하시기 바랍니다(벧전4:11).

 

20. 하나님께 온전한 자로 인정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흠”이란 제사적 용어로 구약에서 제물을 취할 때 결격 사유가 없는 짐승을 의미했습니다(레22:21-23). 흠이 없음은 하나님의 기쁨이 될 만한 제물이란 의미입니다. 그들은 흠 없는 어린양과 같았습니다.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대해서도 썼습니다(엡5:26-27). 본래 흠이란 다 좋은데 부분적인 결격사유가 있을 때 흠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이 작은 부분까지 처리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고 하나님을 닮은 원하시는 수준을 의미합니다. 사랑을 품으면 완전해집니다(롬13:8, 롬13:9-10). 그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그 거울에 비추어 약점을 발견하여 더욱 새로워지시기 바랍니다.

 

 

세 천사의 공중복음 (계 14:6-12)

 

마지막 일곱째 나팔이 시작됨과 동시에 또 다른 세 천사가 공중을 날아가며 여러 메시지를 전합니다. 세 천사의 메시지를 받을 대상은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들입니다. 공중과 땅, 뭔가 대비된 느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왜 세 천사일까요? 3은 완전수라는 점에서 무언가 완전을 요구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답부터 말씀드리면 한 마디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하늘의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계시록의 메시지는 다양한 관점에서 반복되거나 발전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신18:9-14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9절) 하시면서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절)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도 완전을 요구하셨습니다(창17:1). 그 완전은 하나님의 완전이라기보다 세상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마5:43-48).

 

 

패역함에서 구원 (계 14:6-7)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세상의 패역함 가운데서 구원을 받아야 할 이유는 무얼까요?

 

1.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6절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첫째 천사가 날아가는데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공중을 날아갑니다. 8장에서는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라 했는데 여기서는 천사가 날아갑니다. 같은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들 앞에서 비행 시범을 보이면서 따라오기를 바라는 그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처럼 성도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골3:1-3). 공중은 통치의 자리입니다. 공중을 사탄에게 내어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계12:7-9을 보면 용이 하늘에서 내어쫓깁니다. 사탄의 공중권세는 불신자였을 때를 말합니다(엡2:2). 이제 우리는 높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사탄의 머리를 밟은 것입니다(딤후2:10, 빌3:20). 그러므로 천사의 공중복음은 성도는 예수 안에서 세상을 이긴 자이므로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성도는 땅에 속한 자로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이들이 복음의 대상인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란 문자적으로는 지구에 거한 자들이지만,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들이라는 보충설명을 부언한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던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처럼 아직도 하나님을 떠나 세속에 속해 있는 자들입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이라 했듯 바벨탑 백성은 민족이 다르고 종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나라가 다릅니다. 즉 성도는 하늘 사람들인데 아직도 믿음 부족으로 땅의 속성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고전3:3). 도저히 서툴고 적응하지 못해서 살 수 없어야 합니다. 천사가 롯의 가족을 이끌어 소돔에서 대피시켰듯이 어서 자기 정체에 대한 확신 가지고 패역한 장망성에서 떠나시기 바랍니다(행2:40).

 

3. 세상은 진노 아래 있고 무너질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이 영원한 복음을 예수 복음 말고 무슨 독특한 복음인 줄로 확대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상대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이 땅의 썩고 불타고 사라질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지 말고 하늘의 신령하고 영원한 것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요일2:17, 고전3:14-15). 장차 망할 성 즉 장망성(將亡城)을 떠나는 기독도(基督徒)처럼 세상에 머물지 말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계18:4).

 

어느 조직신학 교수는 바로 사는 것에 무관심한 체 구원 받았다고 자부하는 한국교회를 지적하면서 '칭의론은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라는 다소 강한 표현을 썼지만, 현실은 보혈의 확신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 세 천사의 경고는 죄에서 떠나라는 외침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베드로가 "패역한 이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2:40) 외쳤습니다.

 

4. 두려운 심판과 아울러 피할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7절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 이 말씀은 세속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살게 하는 비밀이기도 합니다.

 

먼저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음성은 아기자기한 사랑의 음성이 아닙니다. 거룩을 요구하시는 엄위한 음성으로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듯 느껴집니다(레11:45).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죄를 떠나는 비밀이기도 합니다(고후7:1, 잠16:6, 막9:42-48, 마10:28). 에녹이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 두려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유1:14-16).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추가 주문을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있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하셨고 또 하실 것인데 그것을 누리는 방법은 쉬워서 믿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 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롬10:9-10). 그것은 바로 예수의 복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30-31, 히2:10-13). 복음 안에서 성도는 이미 거룩한 사람입니다(고후5:17, 롬8:1). 그러므로 이 믿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 뿐 아니라 성령을 주셔서 거룩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문자적으로는 심팜이지만 성경에서 시간이나 때의 긍정적 의미는 늘 은혜의 날과 함께 쓰였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재림이지만 현재적으로는 성령의 임하심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악은 물론 슬픔과 탄식도 달아납니다(사35:10, 고후6:1-2, 욜2:30-32).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해 주심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하셨습니다. 마치 죄로 인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우리 심령을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엡2:10, 고후5:17, 시51:10).

 

그런데 창조의 하나님께 4종류의 수식 즉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강)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셨을까요? 이처럼 예수 안에서 창조하신 새 모습을 감사하며 경배할 때 오는 다양한 은혜를 암시합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면 “하늘”이 열립니다. 또 “땅” 즉 마음이 옥토가 되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가 맺힙니다. 그리고 “바다”의 풍부와 부요가 다가오듯 온갖 은혜와 은사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물들의 근원”이라 했듯 성령의 강수가 한없이 솟아나옵니다(겔47:1-5, 요4:14).

 

 

세상의 정체 (계 14:8-12)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본문은 둘째 천사의 선언과 셋째 천사의 경고인데 그 내용은 우리가 세상에 머물러서는 안 될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선교의 정의가 따로 있지만 관점을 달리하여 정의한다면 사탄의 나라가 멸망당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선교요 선교적 목표입니다. 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 방법은 그들의 마음속에 겨자씨 같은 복음을 심어 큰 나무가 되고,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게 하듯 하늘 생명으로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목표요, 선교의 목표입니다.

 

먼저 세상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1. 세상은 예수 안에서 무너진 성입니다.

 

8절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본문은 둘째 천사가 첫째 천사의 그 뒤를 따라 날아가면서 외친 말인데 여기서 세상에 대한 정체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복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즉 패역한 세상이 무너졌으니 이 복음만 믿으면 충분히 이 세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복음입니다.

 

이 말씀이 주는 느낌은 먼저 무너질 수 없는 거대한 성이 무너졌다는 것, 그리고 이미 무너졌다는 것, 그리고 무너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멸망은 로마의 멸망보다 더 큰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기독화 된 로마의 멸망의 허탈감과는 달리 세상의 멸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안겨 줍니다.

 

여기 무너졌다는 말의 원문은 문법적으로 부정과거형입니다. 부정과거형이란 과거에 한번 딱 일어나고 끝나버린 것, 즉 행동이 연속되지 않는 단회적 사건, 단순과거형을 부정과거형이라고 합니다. 이 부정과거형을 두 번에 걸쳐서 반복하고 있는데, 즉 2는 증거의 수로서 바벨론이 상징하는 즉 세상의 무너진 짐은 성취된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 반복함은 드디어 무너졌구나 춤추고 박수치며 환영하는 이미지를 풍깁니다.

 

죄악이 불야성을 이룰 만큼 죄악으로 미혹하고 통치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멸망으로 인도하던 세상은 예수 안에서 무너졌습니다. 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양과 고행과 도덕과 종교를 갖지만 해결하지 못한 것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살아있는 듯 여전하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리고성과 같이 말씀과 성령으로 다 무너지고 말 도성입니다.

 

바벨론에 대해 교황이다 뭐다 학설이 분분하지만 그 모든 학설을 포용하면서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계시록에서 바벨론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세상의 악이란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을 거역한 거대한 악입니다. 역사 속의 바벨론이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하고 욕보이고 하나님의 도성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고 잡아갔듯 세상 바벨론은 쉬지 않는 악입니다.

 

마28:18에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하신 말씀은 이미 내 손에 붙여진바 되었다는 승리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불신앙과 사조와 풍조, 비기독적인 요소, 이방종교, 공산주의 등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이셨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확신 가지고 성령으로 일어나면 악들은 발바닥의 재와 같을 것입니다.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갈6:14). 놀라운 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혔지만 세상 역시 우리를 대하여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갈6:14).

 

그러므로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강력하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방심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가나안 정복처럼 차지해야 할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교와 성령의 부흥이 임하면 세상의 문화까지도 급변할 것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하면 성령이 임하시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도 나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세상도 나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2. 세상은 큰 권세와 영광을 가졌었습니다.

 

큰 성 바벨론”, 역사 속의 바벨론을 보면 바벨론은 BC 3000년 이전에 정착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유명한 왕은 함무라비(BC1792-1750)로서 엄격한 법전을 편찬했고, 느브갓네살 1세 (BC 1124-1103)는 바벨론을 수도로 삼았고, 신바벨론은 제국은 BC 625년 시작 느브갓네살 2세 (BC 605-562) 때 최고 전성기를 누려 앗수르를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이때가 주전 580년이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이 거대한 제국과 아울러 거대한 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바벨론성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하나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으로 술을 마시면서 하나님을 능멸할 때 하나님께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보내서 그 성을 함락시킵니다. 고레스는 유브라데스강 상류를 막고 물줄기를 360갈래로 돌려 물이 줄어들자 술에 취한 바벨론성을 일거에 정복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큰 성 바벨론과 같습니다. 계시록에서 큰 성이란 물리적인 면보다 그 만큼 미혹력이 강력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에 빠뜨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이 지배하지 않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고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바벨론의 해자의 물줄기를 끊고 대신 말씀과 성령의 물줄기를 보내야 합니다. 예수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기도해서 이 땅에 성령의 운동이 일어날 때 아무리 강성한 세상도 무너지고 맙니다(대하7:14).

 

3. 세상은 사람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합니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바벨론을 "먹이던 자"로 의인화합니다. 이 구절에 나타나듯 지독한 놈입니다. 그리고 “모든 나라”는 넓게는 국가이지만, 좁게는 각인의 마음입니다. 성도를 “나라와 제사장”이라고 한 것도 비슷한 용법입니다.

 

그리고 "음행"이란 육신적인 음행도 포함되지만 특히 세상을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신부의 정절을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약4:4, 엡5:5-7). 그리고 “진노의 포도주”란 포도를 수확하여 포도주 틀에 붓고 사람이 올라가서 짓밟듯 인정사정이 없듯 세상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던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고통 (계 14:9-12)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세속에서 기쁨을 얻는다면 그것은 저주이지 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화인 맞은 양심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세상이 주는 양심의 고통은 깊은 절망과 사망과 극렬한 지옥불과 같이 고통스럽습니다. 율법적 신앙의 초보에 머물러 있을 때 그 고통을 비로소 느끼기 시작하는데 넓게 보면 우리를 회개와 복음으로 인도하시려는 연단의 과정입니다(시32:4-5, 시119:71). 그러나 이런 심령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생활도 사역도 불가능합니다. 본문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율법 아래서 아직 육신을 따라 세속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이요 고통인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불같은 양심의 고통은 누가 당하나요?

 

1. 이 고통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당하는 고통입니다.

 

9절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라는 뜻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일지라도, 혹은 베드로와 같은 제자일지라도 그런 의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입니다(계14:12, 계18:4, 벧전5:8-8). 왜냐하면 불신자처럼 신앙양심이 없는 경우 고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즐거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양심의 고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가 당하는 고통과는 다릅니다.

 

양심에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초보적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통해 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씀 안에서 자라 속죄의 복음으로 그 양심을 평안하게 할 수 있지만 옛사람까지 못 박으신 십자가 복음을 알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양심은 아벨처럼 하나님을 향해 그 피 값을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세상을 따라가는 아합 시대의 백성들처럼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있다면 하늘은 놋이 되어 비는 물론 이슬조차 주지 않듯 심령은 마르고 견딜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삼년 반 동안 계속 되었는데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은혜만이 그걸 종식시켜 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 하나님과 세상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을 버리자니 지옥 갈 것 같고 신앙 안에서 살자니 끝없는 절망입니다. 신앙양심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고통을 신자는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기까지 이 과정이 아주 위험한 과정입니다. 지나친 정죄에 빠져 사탄에게 잡힐 수도 있고, 진리를 찾아 방황하다가 이단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2. 이 고통은 마음과 육체를 따라 사는 자가 받는 고통입니다.

 

9절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여기 짐승은 육신을, 그의 우상은 육신이 동경하는 탐욕을 말합니다(계13:14-15, (골3:5-6)). 그리고 이마는 인격, 손은 행위, 그러니까 아직도 죄를 벗어나지 못한 죄의 인격과 행위, 즉 육신에 속한 자를 가리킵니다. 표를 받은 자에게만 고통이 있는데 표는 인증을 암시합니다. 그러니까 넌 세상사람, 넌 육신적인 사람, 넌 사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사는 자에게 고통이 임합니다(벧후2:10-14, 딤후3:1-5, 딤전6:10, 사1:5-8).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룩함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심히 좁은 문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지도자가 필요하며 그 복음을 온전히 믿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신득의 교리를 날마다 입 버릇처럼 말하고 전하면서도 정작 그 진리에 서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거룩함에 이르려고 하고 조금만 잘못해도 양심의 가책으로 영적 삶은 완전히 봉쇄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666표를 받는 자의 고통은 바로 누구든 아버지 사랑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지 못하고 세상을 따르는 자가 받는 고통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이 고난은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경감되지 않습니다.

 

10절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여기 "그도"라는 낱말 속에 이 고난은 누구도 피할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진노의 포도주란 포도주 틀을 밟는 그 모습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연상시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을 잔으로 표현했습니다(마26:27, 마26:39, 시66:10-12). 그런데 포도주를 만들려면 밟기만 합니까? 누르시기도 하십니다(시32:4-5).

 

그리고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포도주는 물에 희석해서 마시는데 희석하지 않으면 도수가 높아서 매스껍고 취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이처럼 징계 속의 심령의 고통은 물론 마음을 쉴 틈조차 없습니다. 그 일을 양심과 율법이 대행하고 있는데 이들의 칼날은 조금도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이 고통을 아는 자만이 자기 의로움을 희석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을 온전히 의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양심이 더 예민해질 때가 있습니다.

 

1. 거룩한 대상을 가까이 할 때입니다.

 

거룩한 천사들 앞과”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다고 했는데, 정의를 집행하는 천사라는 의미도 되겠지만, 하나님께 붙이는 수식인 거룩을 천사에게 붙인 것은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나름대로 거룩한 대상이라 생각할 때 정죄감을 느끼거나 때로는 타오를 만큼 예민해집니다. 잊고 살 때는 모르다가 하나님 앞에 나간다든지 강단에 선다든지 심방이나 안수기도한다든지 신령한 사람을 만난다든지 이처럼 거룩한 대상을 가까이 할 때 자신을 돌아보면서 심령이 더 예민해지고 정죄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때로는 성경을 보다가 더 심해기기도 하는데 성경에서 예수님과 그 복음보다 율법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2. 양심의 표준이 높을 때입니다.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어린양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대속주이심을 강조한 표현인데 어린양 앞에서 이런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불신자라면 모르지만 신자에게도 그럴 수 있을까요? 이 역시 뭔가 교훈을 주시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도덕적인 표준으로 생각하여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 앞에 그만큼 믿음의 반응을 하지 못했다고 정죄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송구한 마음 갖는 것은 좋지만 율법적으로 적용하여 정죄감을 갖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이는 양심의 표준이 너무 높아서 그 정죄감은 율법을 범했을 때보다 더 할 수 있습니다. 산상보훈처럼 표준이 높은 말씀을 율법적으로 대했을 때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정죄감은 하나님을 사랑하던 중세기 성도들이 많이 겪은 영적 시험입니다.

 

3. 보혈공로를 담대하게 적용하지 못할 때입니다.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에 대한 다른 관점입니다. 어린양 앞에서 고난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나를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신 그 복음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적용하지 않거나 혹은 적용하면서도 담대히 적용하지 않을 때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정죄감을 피하지 못합니다. 양심의 정죄감이 커서 보혈의 은혜를 알면서도 적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혈의 공로는 담대해야 누립니다. 예수 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어떤 면에서는 자녀로 뻔뻔하리 만큼 담대하게 주의 공로를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히4:16, 롬5:1-2). 그것이 건강한 자녀의 모습입니다. 회개 후에 보혈을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선 풍성한 보혈의 공로를 누리지 못합니다. 회개 전에도 회개하면서도 회개 후에도 보혈의 공로에 서시기 바랍니다.

 

4. 완전주의적으로 지나친 결벽함 때문입니다.

 

11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여기 밤낮 쉼을 얻지 못했는데 지옥에서는 마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고통측면에서는 일반적이지 않는 현상입니다. 시30:5에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한 것처럼 양심의 고통일지라도 잠을 자거나 잊어버리면 잠잠해집니다.

 

다만 지나친 결벽증을 가진 완전주의자들은 병적이라 할 만큼 자기 성찰이 지나쳐 주야로 쉼을 얻지 못합니다. 완전주의 상징인 욥이 주야로 환난과 질병의 고통을 당했던 것처럼(욥1:5-6) 정죄감에 의한 마음의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의로우려는 율법적 결심이 가져온 실패입니다. 이 고통이 더 심해지면 마음이 더 옥죄어지고 끝 없는 절망감과 아울러 뜨거운 유황불과 같은 것이 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죄를 처리하는 방법을 모르면 이처럼 심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진실로 의로우기를 원한다면 우리 허물을 영원히 용서하신 보혈과 나아가 옛사람을 못 박은 십자가 복음을 믿고 날마다 경외하며 살 때 성령으로 주어지는 복음적 의를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믿음에 서시기 바랍니다(롬4:3-5).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누림보다 사고파는 논리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의식전환이 시급합니다.

 

어떻게 정죄감에서 승리할까요?

 

1. 끝까지 진리를 고수하시기 바랍니다.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으니” 여기 인내는 단순히 참는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에 서서 끝까지 고수하며 확신하거나 실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눅8:15, 약1:2-4, 고전15:1-2, 히10:36-38).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뒤로 물러가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고수가 약속하신 구원과 은혜와 복을 누리는 것이요, 정죄와 사탄을 물리치는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12절의 말씀은 이 인내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교훈입니다.

 

2. 이웃 사랑을 자기에게도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인내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다가 정죄의 수렁에 빠졌는데 계명을 지키라니 무슨 말일까요? 그런데 율법의 계명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곧 아버지의 계명이요 예수님의 계명이기도 합니다(요15:10). 그 계명은 예수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요일3:23). 그런데 원수까지도 용서하면서 왜 자기는 용서하지 않을까요? 나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함으로 나를 실족시켜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듯 나를 불같은 시험에 빠지게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3. 그리스도의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인내로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예수는 죄에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강조했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과와 죄의 옛사람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저주까지도 다 지셨습니다. 나아가 예수와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 복음 진리에 굳게 서서 인내로서 견지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진리는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우리들도 동일하게 누리는 것입니다(롬4:23-24, 롬 5:17-19).

 

이 속죄는 십자가에서 단 번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입니다(히9:12). 이 피의 공로를 믿는 것이 우리 양심에 뿌리는 것이요 바르는 것입니다. 보혈의 공로는 우리를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여 영원히 의롭게 하신 죄 사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히9:12, 단9:24). 칭의의 확신은 경건하지 못했어도 믿고 회개하기 전에도 중에도 후에도 믿으시기 바랍니다(롬4:5-8, 히9:13-14).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남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 (계 14:13)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성도의 죽음은 아버지의 집에 가는 것이기에 복이 됩니다(요14:1-2).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육체의 죽음 말고 또 다른 복 있는 죽음을 소개합니다. 시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하신 말씀에 그 힌트가 있습니다.

 

복 있는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죽음입니다.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하늘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고, 기록은 성경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용어입니다(마4:4,7,10). 그런데 기록하라고 하심은 중요하다는 의미와 함께 성경이 강조하는 그 죽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복된 죽음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육체가 죽는 임종, 다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의 옛사람의 죽음, 다음은 하나님과 그 말씀에 순종는 자아의 죽음입니다. 잘 길들인 짐승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내 뜻을 내려놓고 말씀에 순복할 줄 아는 온유와 겸손과 충성의 죽음입니다. 이것 예수님께서 모범 보이셨고(빌2:5-8), 바울도 잘못될까봐 자기를 쳐서 복종시켰던 그 죽음입니다(고전9:27).

 

2. 지금 죽어야 할 죽음입니다.

 

지금 이후로” 문자 그대로 본다면 오해가 따를 본문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자금(自今) 이후로” 스스로 지금 이후라 하여 스스로 지금 죽는 죽음임을 강조했습니다. 지금이니까 오늘 지금 내일 지금 그러니까 항상 죽는 죽음입니다(고후4:11). 자아의 죽음에 대한 대표적인 용례는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한 말씀입니다. 여기 “죽는다”는 헬라어 ‘아포드네스코’는 현재 능동태 1인칭 단수형으로 지금 혹은 매일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꺾고 순종하는 혹은 죽을 각오로 맡기신 사명에 임하는 그런 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3. 주 안에서 죽는 죽음입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여기 주 안에서 죽음이란 주님의 뜻 안에서 죽는 죽음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가 아니라 현재형인 죽는 자라 했습니다. “죽는 자”는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로서 매일 죽는 죽음, 즉 말씀에 순종하는 자아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야생마가 훈련을 통해 주인의 뜻에 반응하는 명마로 탄생하듯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다듬어진 마음이 잘 죽은 것입니다. 이런 자는 진실로 복된 자입니다.

 

4. 온전히 죽는 죽음입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번에는 성령께서 화답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수고를 그치고 죽으려면 온전히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참지 못하고 방황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아직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성령께서 등장하신 것은 내가 죽지 않고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실 수 없고 슬퍼하시고 소멸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가 내 안에서 살고 성령께서 사십니다.

 

5. 내가 죽어야 할 죽음입니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즉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이 그들의 행한 어떤 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행위의 주체가 그들 곧 우리들입니다. 행함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더니 무슨 행함일까요? 그것은 내가 죽는 순종의 죽음은 고도의 내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순종함으로서 죽는 자아의 죽음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를 길들이시는 하나님의 연단도 추가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 철저히 낮아지고 순종하며 감사하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두 종류의 추수 (계 14:14-20)

 

본문에 두 종류의 추수가 나타납니다. 흔히 14-16절이 신자의 추수라면 17-20절까지는 불신자의 추수를 가리킨다고 말하지만 깊이 살펴보면 두 가지가 다 신자의 추수입니다(요4:35). 추수하시려는 방향과 분야가 다를 뿐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농경의 배경에 부합하고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즉 14-16절은 여름의 보리나 밀의 추수를, 17-20절은 가을의 포도추수를 가리킵니다.

 

두 가지 추수는 모두 하나님 백성 추수에 대한 예표이며, 이 두 가지 추수를 마친 후 그것을 저장한 후 천국생활을 예표하는 수장절을 지켰고, 더구나 포도 추수를 마친 직후 수장절을 지켰다는 점에서 포도추수가 불신자일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는 죽정이도 아니요 가라지일 뿐입니다(마3:11-12).

 

 

천국의 알곡 만들기 (계 14:14-16)

 

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천국의 알곡을 만들려면 예리한 복음이 필요합니다.

 

1. 오직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14절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여기 인자 같으신 이는 인성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인자라는 표현을 쓰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인 직분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흰 구름은 배경으로 보아 구름 타고 오시는 재림의 풍경이라기보다 마 17장에서 희고 빛난 구름이 나타나 모세와 엘리야 등의 사람들을 덮어 오직 예수만 보이게 했던 그 구름으로(마17:5)),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하신 하늘의 음성이 이를 입증합니다. 눅9:36에도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와의 대화 역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것이었고(눅9:31), 모세와 엘리야는 성경의 별명인 모세와 선지자 즉 성경을 상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은 성경의 결론과 같이 구원자는 오직 예수요, 예수 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보여줍니다(행4:12). 이런 확고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 천국의 알곡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원주의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타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로 온전함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계속 길을 찾는 중이거나 허무를 외치며 죽어가는데 그런 타종교를 구원의 다른 한 길로 인정해 주는 타락한 신학자들이야 말로 천국 가는 길을 혼란케 하는 자들입니다. 차별금지법으로 오직 예수 증거가 타종교를 폄훼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되는 시대가 온다면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엄청난 박해와 장애가 될것입니다.

 

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여기 금 면류관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합니다. 금 면류관은 24장로들도 썼지만(계4:4), 여기는 인자 예수가 쓰신 면류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주되신 왕권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요,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 왕이시라는 뜻인데, 이처럼 오직예수와 아울러 그리스도 나의 왕이심을 믿고 그의 통치를 받기 위해 그의 발아래 순복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내 가왕 되어 입술로만 주여가 아니라 섬기고 따르시기 바랍니다(눅6:46). 이는 바울의 복음 전파의 제목이기도 하고(고후4:5), 베드로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신앙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그가 비로소 천국백성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마16:15-17).

 

3. 분명한 구원의 진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두 추수의 공통점은 모두 예리한 낫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예리한 낫은 구원 얻기에 합당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즉 나를 위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심을 믿는 확실한 구원의 복음이어야 합니다(롬10:8-9).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 있다는 고백이 예리한 낫입니다. 나아가 예수 없이는 살 수 없고 어떤 가운데서도 예배와 기도 찬송 등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는 살 수 없고 핍박을 받아도 예수를 부정할 수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은 알곡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오직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섬길 자를 찾았다는 것이고, 그 권위와 말씀에 따를 뿐 아니라, 찬양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황제숭배가 성행했지만 이것은 지나친 것이요, 그 영광은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돌려야 합니다. 그래서 계시록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곳곳에서 찬양하고 있습니다(계11:15,17-18, 4:9, 5:13, 7:12). 늘 받들어 순종하고 찬양하면 그의 다스리심이 평안과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악의 시험도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오직 예수라는 고백과 다스리심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라는 확고하고 예리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예리함이 없이는 참된 알곡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를 시인하는 다원주의로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요14:6, 행4:12, 벧전1:22-25). 율법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이 누리고 있는 성과가 무엇이관데 우리가 그들을 시인합니까?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구원 얻는 진리를 말하고 노래하고 전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믿어 자기에게 적용하는 법을 몰라 방황합니다. 교리적 틀은 마련됐지만 예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직접 가르쳐 주신 것과 같이(마6:9-13) 예를 들면 예수 피는 이렇게 믿으라는(롬4:1-3, 5:1-2, 히4:16) 등 적용관계를 자세히 알려주는 예리한 가르침이 필요합니다(전12:11).

 

천국의 알곡 만들려면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15절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다른 천사가 예수님께 추수를 요청하기 위해 성전으로부터 나왔는데 추수와 관련된 천사가 왜 성전에서 나왔을까요? 성전과 추수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리고 성전에서 나오되 “성전으로부터”라 하여 출발하는 암시하는 그런 표현을 썼을까요? 이 천사의 모습에서 뭔가 추수와 관련된 것이 나온다는 의미를 풍깁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생수입니다(겔47:1-2). 즉 예리한 말씀과 아울러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열매를 맺히지 못합니다. 소성강의 강가에는 나무들이 달마다 12가지 새 열매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성령의 생수는 예수 믿고(요7:37), 나아가 성전생활이 시사하듯 날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통해서 주어집니다(시84:10, 시42:1-2, 시84:1-4, 행1:13-14, 눅24:54). 특히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하루 3번씩 기도했습니다. 이런 전통은 본받아야 할 좋은 전통으로 모두 이 습관을 가진다면 세계를 복음화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2. 구속의 진리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천사가 성전에서 나왔는데 천사가 어찌 성전에 대한 진리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성전은 곧 예수님에 대한 예표요, 십자가 복음진리의 모형입니다. 이처럼 성전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구원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이방인이었던 사람이 할례, 신양으로 치면 예수 믿어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성전의 담을 넘어 제사장의 뜰에 들어올 수 있고, 번제단에서 속죄의 확신과 물두멍에서 말씀으로 씻음을 받아 양심의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성전 안에 들어와 떡상의 말씀생활, 분향단의 기도생활, 일곱촛대에서 성령으로 변화생활 등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통해 시은소의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천국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지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열리듯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회복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천국 알곡 백성이 아름다운 모습니다.

 

3. 추수의 일군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15-16절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천사가 직접 추수하지 않고 예리한 낫을 가지신 예수님께 추수해 달라고 부탁하듯 기도하시기 바랍니다(마9:36-38). 그리고 추수의 일군이란 복음을 가진 신약의 일군입니다. 아볼로와 같이 요한의 세례만 알아서는 추수의 일군이 되지 못합니다. 추수의 일군은 성령의 일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추수를 위해서, 추수의 사역자들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할 때 아름다운 결실을 맺습니다.

 

 

포도추수와 연단 (계 14:17-20)

 

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본문은 이스라엘의 두 종류의 추수가 그 배경으로 알곡 추수에 이어 포도추수에 대한 말씀입니다. 알곡추수의 추수꾼이 예수님이시라면 포도추수는 천사입니다. 두 방향에서의 성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즉 전자가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오늘 말씀드릴 후자는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연단을 통한 성화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1. 거룩한 제사장을 목표로 합니다.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천국에는 성전이 없다는데(계21:22) 천사가 성전에서 나온다 한 것은 환상의 조합을 통하여 어떤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알곡이든 포도든 성전에서 나온 천사들에 의해 진행되는데 그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성전은 밤낮 하나님 섬기는 곳입니다(계7:15). 그러므로 신앙훈련의 목적이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 하려는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하늘의 성전이 강조되고 있는데 이처럼 성전에서 제사장들처럼, 천국의 성도들처럼 하나님 경외하는 삶이 잘 되어야 알곡이 됩니다(벧전2:1-5, 히12:9-13).

 

2. 연단 역시 말씀을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17절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절과 흡사한데 공통점은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예리한 낫을 가진 자가 여기서는 천사라는 점이 다릅니다. 그런데 예리하다는 표현이 3번이나 강조됩니다. 포도 추수에 예리한 낫이 강조되는 것은 연단 역시 말씀 떠나서 역사하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예리한 낫은 깨닫는 말씀입니다. 연단이란 행동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연단을 받을 때 하나님의 의도를 충분히 깨달아야 합니다(약1:5-6). 연단의 목적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히4:12). 하솔왕 야빈이 쳐들어왔을 때 바락(징계) 장군이 여사사 드보라(꿀벌 즉 말씀)와 함께 싸워서 대승을 거둔 것과 같습니다(삿 4장).

 

3. 열심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18절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이 불을 주관하는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 천사는 불을 다스리는 천사, 그러니까 스랍천사입니다. 이 천사의 등장은 또 다른 교훈을 위해서입니다. 열심의 교훈입니다. 성전에 불이 있는 제단은 번제단과 분향단 등 두 곳인데 여기 제단은 두 곳을 다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향단의 불은 반드시 번제단에서 옮겨와야 하기 때문에(레16:11-12) 불을 다스리는 천사는 번제단과 분향단을 오가는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은 사 6장에서 이사야를 거룩하게 하던 제단의 불, 즉 정화의 불이요, 성령의 불입니다(사6:6-7, 사4:3-4). 그러기 위해서 성전에서 기도했던 이사야처럼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했던 120문도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연단이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딤전4:5, 롬12:11).

 

그리고 성전에서 타오르는 두 불 즉 번제단은 헌신을 상징하고,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두 제단 모두 몸과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바쳐 하나님을 열심히 경외하는 자가 거룩해지고 알곡이 됩니다(롬6:13-16). 마치 가을에 포도를 짓밟아 포도주를 만들 듯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려 경배하지 않을 수 없도록 훈련시키십니다(히12:11-12).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인들이 성경을 배우고 다니엘이 목숨 걸고 하루 세 번씩 기도했던 것처럼 주일성수와 정한 예배 외에도 정해진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이 충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참 알곡으로 성장하게 도와줍니다.

 

4. 그러나 말씀 안에서 열심해야 합니다.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불 다스리는 천사가 예리한 낫을 가진 천사에게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외칩니다. 그러니까 불 더하기 낫입니다. 그리고 큰 음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열심이 말씀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과 아울러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고전4:20). 잘못해서 신비주의 악령이나 이단으로 끌려간다면 사탄의 잔치밖에는 더 되지 않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다는 것을 기억하고(잠4:18-19),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5. 진실로 회개함으로 알곡이 됩니다.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여기 포도송이를 땅의 포도라고 했는데 땅은 타락 이후 저주 아래 놓여 재림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된 심판의 대상입니다(벧후3:7). 그런데 여기 땅은 물리적 땅이라기보다 하늘과 반대 개념인 세상이나 죄나 육신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포도송이는 그 땅의 소산이므로 죄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포도송이라 했듯 죄를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스’ (άμαρτίας)인데 복수형입니다. 원문으로 보더라도 죄란 다발입니다. 이처럼 마음속의 갖가지의 죄악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땅의 포도송이가 익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처리 받기 위해 나타난다는 의미와(창15:16), 아울러 자신이 죄인임을 심각히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실로 회개함으로 알곡이 됩니다.

 

6. 고난이 연단의 손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진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납하시지만 죄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롬1:18, 골3:5~6, 시7:11-13). 아간에게처럼 숨겨진 죄를 찾아내시는 것처럼 우리의 약한 속성을 해결하기 원하십니다. 여기 "던지매"는 지옥에 던진다 했을 때 쓴 용어입니다. 이처럼 연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벗어나지 못합니다. 포도주 틀을 큰 틀이라 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역과 연관이 되어 있는 낱말입니다. 즉 예수 믿고 성령 받아 변화되라고 밟는 것이지 달리 밟는 것이 아닙니다(신8:2-6). 그러므로 눈앞에 나타난 현실만 보고 어리석게 원망하거나 다투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연단하신다는 큰 틀의 관점에서 봐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욥19:21, 욥23:10, 슥13:9). 그리고 포도주 틀에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고, 농부의 거친 발에 짓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오로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시139:7-12). 겸손히 그 뜻에 복종하시기 바랍니다(벧전5:6).

 

7. 내가 사라지고 예수만 나타내길 원해야 합니다.

 

20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여기 성 밖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골고다 언덕을 연상시킵니다. 골고다 언덕은 우리 죄를 처리하시기 위해 대속의 주께서 고난 받으신 곳입니다. 우리들이 대속의 십자가는 질 수 없지만 자기 십자가는 지고 여기까지 따라와야 합니다. 그래서 밟혀서 포도 알갱이가 보이지 않듯 내가 사라져야 합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안의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고후4:10-11, 빌1:20-21).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징계란 내 게으름에서 죽고 불신에서 죽고 세상에 대해서 죽으라는 것입니다.

 

8. 내 주관대로 사는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문자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포도주 틀에서 피가 났다는 말도 그렇거니와, 얼마나 피를 흘렸으면 그 피가 말굴레 높이로 1,600 스타디온 즉 300km나 퍼져나갔겠습니까? 말굴레는 말을 어거하는 장치로 연단이란 바로 자아를 제어하는 장치임을 보여줍니다(시32:9, 약3:3). 내 고집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9. 철저히 훈련받으시기 바랍니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1,600은 히브리적 사고로 보면 연단수 40을 제곱한 (40×40) 수로서 철저한 연단을 의미합니다. 40도 강도 높은데 40을 제곱했다는 것은 불 같은 연단입니다. 신앙훈련을 어설프게 생각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과 불순종으로 일관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듯(고전10:5-11) 일생 연단으로 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앙훈련으로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고통만 생각하고 원망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듯(고전10:5-11) 깨닫지 못하면 결실도 없이 연단만 받다가 마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특공대와 같이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 사도들을 모본 삼고 그 믿음에 이르도록 자라시기 바랍니다(벧전2:21, 마1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