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스크랩]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6장

에반젤(복음) 2021. 12. 27. 05:43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6장

부어지는 일곱 대접 (계 16:1-21)

 

일곱 대접재앙에 대한 견해를 보면, 대환난의 후삼년 반에 일어나는 극한 환난이라, 혹은 대환난 전 신자는 올라가고 유대인과 불신자들이 당하는 재앙이라, 혹은 알곡 성도를 다 거두어 가신 후의 찌꺼기와 같은 사람들이 받는 재앙이라, 혹은 대환난 시대가 끝날 무렵에 일어날 대 재앙으로 보는 등의 견해가 있습니다. 대부분 물리적 재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런 견해는 본문에 전제되어 있는 복음의 힌트를 참고하지 않는 세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장입니다.

 

본 대접 재앙은 출애굽 사건이 그 배경으로 되어 있어 단순한 재앙이 아닌 구속사적인 바탕에서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앙의 집행이 시종일관 거룩한 성전의 음성에 의존되고, 성도와 선지자들의 피를 취한 자에 대한 심판 즉 세속에 대한 심판이 암시되어 있고(16:6, 6:9-10), 구속의 상징인 제단이 확증하고, 여러 곳에서 회개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지 않은 자의 복, 거룩의 복을 강조함이라든지, 세속의 상징인 큰 바벨론이 무너짐 등 그런 재앙 아닌 재앙입니다. 이게 신앙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즉 대접재앙은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묵상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변화를 묘사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완악한 인간은 자발적으로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려하지 않기에 대개는 징계적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 십자가 환경의 시련 가운데서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묵상하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다가온 환경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부당하다 여기지만 점차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변화를 묘사한 것이 일곱 대접재앙의 내용입니다. 계21:9에 대접재앙을 가진 천사 중 하나가 어린 양의 아내를 소개했듯 대접재앙의 목적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되기에 합당한 사랑의 성숙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깨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절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이 구절만 가지고도 내용의 힌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 익명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암시하며, 큰 음성이니 그 음성만으로도 구원이나 영적인 변화와 같은 하나님의 큰 관심인 무엇인지 짐작이 가며, 성전에서 났으니 거룩과 관련된 음성이며(고전3:16-17), 하나님의 진노이니 악이 심판 받는 재앙이요, 일곱 대접이니 완전케 하시는 고난의 쓴잔이요, 땅에 쏟았으니 좁은 의미에서 우리 인간의 마음에 쏟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대접재앙은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1. 희생적 사랑을 깨달으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에 견딜 수 없습니다.

 

2절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나더라” 여기서 666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죄인의 마음이고, 우상숭배자는 세상을 동경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 우리의 잘못 때문에 맘 아파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어떤 말씀과 징계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이런 깊은 회개는 없었는데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생겨난 회개의 모습입니다(고후7:10-11). 그러나 죄를 슬퍼하는 것이지 사탄이 주는 정죄감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2. 십자가 사랑은 세상에 대한 관념을 바꿉니다.

 

3절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문자대로라면 바다에 핵폭탄이 터진 걸로 보이지만 이 말씀 역시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열린 말씀으로 신령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본 재앙은 물이 피가 되었던 모세의 이적을 연상시킵니다. 바다가 피바다가 됨으로 그 안의 생물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바다가 세상이라면 피바다는 죽음의 세상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 세상에 대한 관념이 달라집니다. 바다가 피가 되고 그 안의 생물도 죽었으니 이제 바다는 온갖 부요와 풍요와 생명이 아니라(사60:9) 죽음과 빈곤이 되었습니다. 즉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내 영혼을 빈곤하게 하고 죽이는 죽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세상 때문에 우리 영혼이 얼마나 고통 받았습니까?

 

3. 십자가 사랑은 생각과 지식까지도 변화시킵니다.

 

4-7절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이르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셋째 대접은 강과 물 근원에 쏟아지고 그 물들이 피가 됩니다. 환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강 뿐 아니라 물의 근원까지 피가 되어 흐릅니다. 물은 말씀인데 피로 변했으니 여기서는 좋은 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을 인간의 생각이라고 한다면, 물의 근원은 인간적 지식입니다. 이것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게 했듯 우리를 시험 들게 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생각과 비진리적 지식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많은 해를 끼쳤고 시험에 들게 했습니까?(롬8:7) 그리고 이 악하고 무식한 우리의 생각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소 고난을 받았음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고전2:8).

 

그리고 "물을 차지한 천사"란 물이 귀한 중동지역에서 물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많은데(창26:15-22, 삼하2:13), 물을 차지했다는 것은 전에는 빼앗겼지만 이제는 차지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즉 십자가 사랑의 감화로 전에는 세상적인 생각만 붙들었지만 이제는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신령한 지식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존재를 들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숙원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이어지는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한 말씀처럼 우리 성도의 거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의 어리석은 생각을 처단하기를 그토록 원하셨습니다(잠19:25, 잠22:15).

 

7절에도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제단을 의인화시켜 말하는 장면인데 왜 제단이 등장합니까?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 때문입니다. 거룩만 강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를 핀 숯으로 거룩하게 한 제단이 연상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성결의 은총은 입술은 물론 생각과 지식까지도 새롭게 하십니다(골3:10).

 

그리고 거룩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을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로 부를까요? 주 하나님이라는 호칭에는 우리의 주되신 유일하신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전에는 우리와 세상이 주였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호칭에는 그동안 불가능했지만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독생자를 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셨고(롬8:3-4), 성령을 주셔서 온전히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롬8:4-6). 하나님은 왕의 마음까지도 움직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잠21:1).

 

4. 십자가 사랑은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품게 합니다.

 

8-9절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넷째 천사의 대접은 해가 몇 배로 강해져 사람을 해하는 장면인데 이 말씀을 해석하는 힌트가 있습니다. 이런 대접을 받고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주님께 예배하고 영광 돌리는 대접입니다.

 

성경에서 해는 부정적으로는 시험을, 긍정적으로는 하나님이나 은혜(시84:11, 눅1:78-79, 마4:16, 시72:5-17, 시89:36, 시84:11) 등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해를 하나님으로 볼 때 해가 권세를 받아 사람들을 태운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가깝게 살게 되었고 또 자기를 삼키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리킵니다(요2:17, 고후7:11, 고후5:13-14). 이처럼 십자가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품게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9절) 않는 자들이 시사하는 바는 우리 중심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온전히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데 우리 육신은 사실 피동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열정 앞에 육신도 복종하지만 마음의 열심이 사라지면 육신은 그만 두고 딴 짓을 추구할 자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견인차의 역할을 하는 중에도 우리는 육신의 게으름이나 소극적인 마음과 방탕 혹은 지나치게 고무되어 곁길로 가는 등 계속하여 경계하고 싸워야 할 부분입니다(고전9:27, 잠26:13, 고전6:20). 이처럼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면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심을 품게 됩니다.

 

5. 십자가 사랑은 더 이상 육신적으로 살지 않게 합니다.

 

10-11절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어두워진 짐승의 왕좌는 잠시 짐승처럼 되었던 바벨론의 느브갓네살과(단4:28-33), 왕좌에 앉아서 하나님을 능멸하다가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벨드사살이나(단5:1-31), 거룩한 성전에 미워하는 우상을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인 시리아의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연상시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에게도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려는 짐승 같은 육신이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흙으로 지어 큰 틀에서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만(창2:7, 19), 은혜 받으면 육신적으로 살지 않게 됩니다(롬8:9). 그러나 육신은 여전히 육신입니다. 나아가 육신은 고통만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거나 원망하고 비방하고 대들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짐승의 왕좌나 그 통치를 받던 하나님을 비방하던 백성들이나 넓은 의미에서는 같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아직도 육신이라는 적을 한 몸에 담고 살아가지만 이제는 육신적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고후5:15).

 

6.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천국을 사모하게 합니다.

 

12-14절 “또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당시 중동에서는 겨울 우기가 끝나면 강물도 줄고 땅도 말라 전쟁하기 좋은 때가 오는 계절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동방과 서방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유브라데를 큰 강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거나 문맥에서 보듯 쉽게 건널 수 없음을 내포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강을 건너 서방인 가나안에 온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동방에서 서방으로 건너오는 길이 예비됩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으면 사랑하는 주님 곁에 가까이 가고픈 것이 성도의 소원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생겨난 것은 좋은 일입니다. 돌이켜 볼 때 유브라데 강을 건너기 어려웠던 것처럼 전에는 몸을 벗고 천국을 소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깊은 만남을 통하여 죽음도 아무렇게나 여길 수 있는 사랑이 생깁니다(아8:6).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된 것처럼 주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것까지는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13절에 “또 내가 보매” 연달아 새로운 계시가 주어집니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귀신의 영들이 이 열린 환경을 이용하여 동방의 왕들을 미혹하여 연합군을 만듭니다. 이 전쟁을 가리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16절에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키는데 아마겟돈을 정복하려는 전쟁입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어떤 의미냐 하면 사랑하는 주님을 속히 만나는 천국의 소망이 커진 것은 좋은데(빌1:20-24, 히2:14-15), 너무나 좋기 때문에 육신의 감정도 덩달아 날뛴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없이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왕들이 수없이 아마겟돈을 정복하려고 했듯이 이제는 마음을 모아 주님과 함께 거하려는 소망으로 가득 찹니다. 소망이 잘못은 아니지만 사탄이 틈탈 수가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13절)왔다고 한 것처럼 사탄의 미혹이 있습니다. 개구리 같은 영이란 미혹의 반복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거짓말도 정치나 언론에서 백 번, 천 번 하면 그걸 사실과 현실로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이적을 행했는데 하와에게 그러했듯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보이는 미혹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을 미혹하듯이 천국의 소망이 생길 때 우리 육신도 감정에 날뛰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도 버리고 사명도 버리고 신비에만 깊이 심취해 삶이 엉망이 되고 어느덧 사탄이 틈을 타서 사이비교주가 되기도 하는 등 시험에 빠집니다. 악령은 물론 성령으로 시작해도 신비에 빠지면 악령으로 끝나는 것이 신비주의의 함정입니다.

 

변화산에서 하나님 나라와 주의 영광을 보고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집짓고 살자던 제자들과 같습니다. 천국은 소망하되 바울의 고백처럼 지상의 사명도 못지않게 크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겟돈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역사상 20여회 이상 일어난 것처럼 천국소망이 생기면 천국이냐 이 땅이냐 번민합니다(빌1:20-24). 마치 625 전쟁 때 백마고지를 차지하려는 치열한 전투로 고지의 주인이 10일 동안에 24번이나 바뀌었던 것처럼 아마겟돈에 20회 전쟁이 일어났으니 아마겟돈의 주인이 아마도 수백 번 이상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랑은 그만큼 죽음도 두렵지 않게 소망을 준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잠시 아마겟돈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아마겟돈은 히브리어로 “므깃도 산, 무리들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이 므깃도 계곡에 장차 2억의 군대가 모여 전쟁할 것이라고들 하는데 최후의 전쟁터라고 하니까 대단한 곳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므깃도는 나사렛에서 남서쪽 18km 되는 지점에 있으며, 므깃도는 샤론평야를 굽어볼 수는 있지만 불과 20~50미터 높이로 낮은 작은 언덕에 불과할 뿐 산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한 곳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현대전의 양상을 모른 주장일 뿐 아니라 2억의 군대도 없거니와 있어도 비좁아서 2억의 군대 중 0.1%인 20만 명이 서 있기도 불가능합니다. 이곳은 동서교통로가 교차하여 군사 무역 면에서 중요하게 여겨져 이곳을 차지하려고 역사상 20여회 이상의 큰 전쟁이 일어난 곳으로 본문에서 비유로 사용된 것이지 문자적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바로 이어 성도의 신앙 자세를 고취시킵니다. 15절에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진정한 재림신앙이란 주의 날이 가까웠다고 동심하거나 자기 임무를 중단함이 아니라(살후2:1-2) 주님이 오실 때 부끄럼이 없도록 준비하며 바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잘못된 재림신앙으로 생활을 등지고 모여 기도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안 됩니다.

 

7.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면 마음이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17-21절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마지막 일곱 번째 대접재앙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마지막 순간에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던 그 때의 광경이 연상됩니다(요19:30, 마27:51-52). 예수님 앞에 죽으심 외에도 부활과 승천과 성령 보내심과 재림 등이 남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의 공로를 누구도 돌려놓을 수 없고 어린양으로 하실 수 있는 일은 모두 완수하셨기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완성도 여러 과정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 고난의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골3:14, 고후10:3-5, 엡4:13-14).

 

ㄱ. 그 때부터 생각을 사탄에게 내주지 않습니다.

 

17절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그동안 대접을 쏟은 장소를 보면 첫 번째는 땅에 쏟았고, 두 번째는 바다, 셋째는 강과 물 근원, 넷째는 해, 다섯째는 짐승의 왕좌, 여섯째는 유브라데 강, 마지막 일곱째는 공중에 쏟았습니다. 하늘이라고 하지 않고 공중이라 한 것은 사탄의 활동영역을 암시합니다. 영적세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공중은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생각은 사탄에게 무방비로 내어주었던 영역이었습니다. 이걸 다스리지 못한다면 믿음의 완성은 없을 것입니다. 시험은 있을 수 있지만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달음으로 우리의 생각이 더욱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골3:9-10).

 

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18절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이처럼 은혜 받은 마음에도 천둥번개가 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죄가 이렇게 두려운 줄 알게 됩니다(전5:7-8). 그리고 땅이 큰 지진 역시 하나님이 두려워 죄를 짓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ㄷ. 이젠 세상을 하나님의 원수처럼 여기게 됩니다.

 

19절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바벨론성은 느부갓네살이 건설한 것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이론상으로는 무너질 수 없는 성이었지만 바벨론 왕이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다가 바벨론은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될 만큼 세상 역시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했고 많은 사람들을 넓은 길로 실족하게 했으며 온갖 시험거리로 성도를 괴롭혀 왔는지 하나님의 철천지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세 갈레로 갈라짐은 완전히 찢어짐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그러나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 안의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빌3:7-9). 미혹이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 세상에 대해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ㄹ. 완악한 마음이 온유한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만국의 성은 당시 모든 나라마다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은 매우 배타적입니다. 이처럼 은혜 받으면 빗장을 걸었던 마음도 열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웃에게도 마음의 빗장을 풀어야 주님께도 인도할 수 있습니다.

 

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게 되습니다.

 

20-21절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대접의 잔을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이라 한 것은 우리의 악에 대한 노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각 섬도 없어지고” 섬은 육지에서 멀어 외롭습니다. “산악도 간 데 없더라.” 산악은 높고 험하여 접근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섬도 산악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더 이상 힘들지 않고 기쁘다는 말입니다(마22:37-40). 신앙생활의 최고의 장애는 바로 우리 마음이었습니다.

 

ㅂ. 나는 감추고 하나님만 나타나기를 갈망합니다.

 

21절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출 9장의 우박재앙과, 수 10장의 태양이 머무르고 달이 머물렀던 아모리와의 전쟁 시 쏟아졌던 우박이 그 배경입니다(수10:11). 얼마나 큰 우박이든지 무게가 한 달란트(34kg) 크기의 우박이 하늘에서 쏟아집니다. 큰 우박 앞에 최고의 복은 숨을 곳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의 사랑을 깨달으면 나는 숨기고 예수만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ㅅ. 이루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21절 하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이제 완성의 시점인데 대접재앙의 마지막까지 악인이 남아 있다니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했어도 육신을 벗고 천국에 들어가기까지는 넘어질 가능성은 언제고 잠재해 있습니다. 새롭게 되었다 할지라도 섰다 하는 순간 넘어집니다. 자만하지 말고 근신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실 것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