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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5장

에반젤(복음) 2021. 12. 27. 05:37

복음으로 본 요한계시록 15장

대접재앙의 서론 (계 15:1-8)

 

계 15장은 마지막 재앙인 7대접재앙의 서론입니다. 인재앙도 서론이 있었고(계5:1-14), 나팔재앙이나(계7:1-8:5), 7번째 나팔에서도 서론이 있었듯(계11:15-19), 마지막 7대접 재앙도 서론이 있습니다. 이 세 재앙 모두 시작하기에 앞서 환상이나 찬양이나 영광 등으로 그 재앙의 성격과 목적과 결과를 미리 알려줍니다.

 

일곱 대접재앙의 해석의 키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 하신 고난의 쓴잔에 있습니다. 즉 대접재앙이 전개됨에 따라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고 주를 위한 삶으로(요14:20-21, 요일4:12,13,16) 바뀌어가는 것이 대접재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2절)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 즉 구원의 노래를 불렀듯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정욕 등에서 벗어나 유리 바다에서(2절) 말끔히 씻었다는 점에서 대접재앙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금 같이 나오도록(욥23:10) 온전하게 하는 은혜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골3:14).

 

구체적인 방법은 말씀의 묵상과 시련을 통한 몸의 체험입니다. 지혜로운 처녀처럼 평안할 때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마음으로 깊이 묵상하지 않는다면(히12:2-3), 주님은 십자가적 환경을 조성하여 그 고난을 몸으로 느끼도록 하실 것입니다(히5:8-9). 그 때가 대부분은 임종을 앞둔 때인데 이것이 대접의 은혜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정결한 자녀와 신부의 모습으로 천국에 입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대접재앙은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시는 성화적 은혜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대접재앙이란? (계 15:1-4)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일곱 대접재앙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늘의 이적입니다.

 

1절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하늘의 큰 이적은 해를 옷 입은 여자를 계시할 때도 쓰였습니다(계12:1). 대접재앙이 성도로 하여금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자로 만드는 훈련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대접재앙이 주는 고난의 힌트처럼 자기 십자가 지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며 그 공로를 믿을 뿐 아니라 그 고난의 사랑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 마음 역시 더 이상 죄에 머물 수 없이 하늘의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하늘사람으로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한 이적입니다.

 

2. 큰 이적입니다.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 큰 이적이란 홍해가 갈라지고 해와 달이 멈췄던 그런 이적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이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이적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요20:30-31). 그런 관점에서 그의 은혜를 받아 그리스도를 닮는다면 역시 큰 이적입니다(눅15:7, 히2:3).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을 주의 나라에서 가장 귀한 자리에 앉히려고 청탁하자 맨 먼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0-23) 물어 보셨던 것처럼 7대접재앙은 예수 닮은 큰 사람으로 만드는 큰 은혜입니다.

 

3. 이상한 이적입니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 이상하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이처럼 고난과 박해에 대해서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기 쉽고(벧전4:12-14, 약1:2-4), 기도의 내용과 반대로 전개되는 현상도 있을 수 있어 놀라거나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함을 감사하면 하늘의 큰 상이 있습니다(벧전2:19-20).

 

4. 다른 이적입니다.

 

다른 이적을 보매” 그 동안의 이적과는 다름을 가리키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구할 때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과 같습니다(마12:38-40). 우리에게 적용하면 요나의 3일처럼 살았으나 죽음과 같은 이적입니다. 거물급 죄인들의 회개간증으로 떠들썩하다가 머지않아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는데 다른 이적, 즉 진정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5. 마지막 이적입니다.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여기 “마치리로다”의 헬라어 ‘에텔레스데’ (έτλέσθη)는 ‘완성하다, 성취하다’를 의미하는 ‘텔레오’ (τέλέω)의 예언적 부정 과거 수동태로 마지막 심판을 종결짓는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목적의 성취와 완성의 의미가 있습니다(빌1:6, 9-11). 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달음으로 세상에 맘 두던 삶이 지난 날로 족하게 되고(벧전4:3) 악에 대해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대접재앙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불 섞인 유리 바닷가에서 찬양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렀는데 마치 홍해를 건너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던 것처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접재앙은 문자 그대로 재앙이 아니라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은총입니다.

 

1. 강력한 정화작용입니다.

 

2절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이 바다는 정결케 하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에다(계4:6) 불을 더한 불이 섞인 유리 바다입니다. 불은 연단이나 심판의 상징입니다(벧전4:12-14). 물로 씻어도 깨끗한데 불까지 가세하면 강력합니다(시119:67, 시119:92-93).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 강력한 정화의 작용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탐욕은 나의 원수로 바꾸어질 만큼 강력한 마음입니다.

 

2. 육신적으로 살지 않게 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이들은 13장에 나오듯 약 3가지 즉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까지 이긴 자였습니다. 이미 설명했듯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육체의 정욕을, 그의 우상은 육신이 추구하는 세상적인 것들입니다(골3:5-8). 그의 이름의 수는 666으로 6은 히브리적 숫자 관념으로 사람의수 짐승의수라는 힌트를 주셨듯(계13:17) 창조의 엿새째 창조물이 연상되는 수입니다. 즉 세상적이요 육신적이요 마귀적인 모든 죄악의 총체로서 이마에 받는 표는 죄악의 인격을, 오른손에 받는 표는 죄악된 행위를 각각 상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달으며 온전히 회개함이 이르게 됩니다.

 

3. 거룩함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유리 바다 가에 서서” 이 유리 바다는 성전 앞에 있는 씻음의 놋바다와 홍해를 건넌 구원의 무리들이 찬양했던 그 두 사건이 합해진 내용입니다. 홍해사건이 씻음의 세례의 상징임을 확실히 알려줍니다(고전10:1-2). 그런데 “서서”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견고히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나타냅니다. 전에는 구원하신 복음을 알아도 세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믿음으로 자기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았는데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서려고 합니다(고전15:1-2).

 

4. 하나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임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 14장에도 나왔지만 거문고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악기로서 성령의 감동과 임재의 상징입니다(삼상16:23, 왕하3:15-16). 그런데 그냥 거문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문고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아는 자는 늘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그리고 보통 찬양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5. 쓰실 수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그냥 모세의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입니다. 이 말씀은 미디안에서 모세의 연단과 애굽에서의 구원의 내용이 합해진 내용입니다. 모세의 미디안 40년은 내 생각과 내 방법이 죽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3~4절의 짧은 노래 가운데 “주”라는 용어가 무려 7회나 나타나고, 주를 암시하는 하나님 왕 오직 등의 용어까지 합하면 10회 이상 나옵니다. 7은 완전수로 나는 사라지고 주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면 사탄이 제안하는 내 방법은 내려놓고(마4:1-11) 주의 방법으로 쓰임 받을 뿐 아니라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서 살게 됩니다(롬14:8).

 

6.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사합니다.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어린 양은 1년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양으로 무고하게 나의 죄를 대신했다는 점에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양의 노래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데속의 은혜와 아울러 독생자를 주신 아버지의 사랑과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구주 예수님의 그 고난을 생각하며 부르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이처럼 대접재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은혜입니다.

 

7. 하나님만 제일로 섬기게 됩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그들은 하나님을 “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는 헬라어로 “큐리오스”로서 “주인”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주권 및 소유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신적인 유일성과 아울러 우리가 섬김과 사랑의 대상이 오직 한 분이심을 가리킵니다(출20:2-4). 하나님이라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제일로 삼지 못했는데 고난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부를 수 있게 됩니다(고후6:14-16).

 

8.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곧 전능하신 이시여.” 이 명칭은 '엘샤다이'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가능하게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유리 바닷가에서 구원을 찬양하면서 전능하심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이처럼 불가능하게 보였던 거룩한 삶이 하나님의 임하심으로 비로소 가능해졌음을 보여줍니다(막10:24-27).

 

9. 풍성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합니다.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이 말씀의 배경은 출 15장으로 홍해 건너편에서 출애굽의 은혜를 찬양했던 내용과 같습니다(출15:11). 복음의 확신과 그 결과인 구원의 실재를 누리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이처럼 고난의 사랑에 동참할 때 더욱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마5:10-12, 벧전1:8-9, 벧전5:12-14). 질고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더 깊이 만나주십니다.

 

10.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만국의 왕이시여” 만국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의 마음 전체를 뜻합니다. 전에는 부분적으로만 드렸지만 이제는 만국의 왕으로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시119:67, 71). 반대로 바벨론에 의해 만국이 무너졌다는 말씀도 있는데(계18:3) 세상으로 인해 마음 전체가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11. 비로소 주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의 길은 메시아로서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가신 탄생 준비 사역 고난 부활 승천 등의 의롭고 참된 길을 말합니다(사40:3).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 줌을 거부할 때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마3:15) 하셨듯 주의 길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의로운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을 성취하시는 참된 진리의 길이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랑을 깨달음으로 주님이 가신 길에 대한 감사와 아울러 그 뒤를 따라가며 받은 은혜가 심히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 역시 내포되어 있습니다(마5:11-12).

 

12. 하나님이 두려워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4절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십자가 고난은 한 편으로는 죄는 반드시 벌하시는 공의롭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았지만 이젠 그러하지 않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히12:28, 창20:11).

 

13.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서 살게 됩니다.

 

영화롭게 하지 아니 하오리이까” 과거에는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고 신앙생활마저도 내가 은혜 받고 행복하고 형통하기 위해서 했지만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으면 하나님 제일주의가 되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갈2:20).

 

14.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됩니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이전에는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이젠 달라졌습니다. 광야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모습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즉 자기 잘못을 알지 못한 나쁜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수여는 인간이 어떤 자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미가 있습니다(갈3:19, 롬3:30). 그러나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부터는 오직 주만 거룩하시다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15. 하나님을 영원히 경배하게 됩니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다란 의로운 일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었듯 이제 성령의 은혜로 구속의 실재를 누리게 되어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문맥적으로는 앞으로 전개될 일곱 대접재앙을 가리킵니다. 문자대로만 본다면 대접재앙으로 다 죽고 어떻게 만국이 와서 경배합니까? 그러므로 대접재앙을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접재앙의 준비 (계 15:5-8)

 

5.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6.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8.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본문은 대접재앙이 시행되기 직전 상황입니다. 대접재앙을 준비하는 천사들과 네 생물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강한 소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모범이 되시기 위해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케 되셨습니다(히5:8-9, 벧전2:19-21, 벧전4:12-14). 그러므로 고난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거나 우리에게 다가온 십자가 환경 속에서 진실로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깨달아 그 고난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신앙이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초대교인들처럼 고난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긴다면 어떤 시험도 다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행5:41).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1. 온전한 믿음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5절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증거의 장막이란 증거궤 즉 법궤가 있는 지성소를 일컫는 명칭입니다. 여러 명칭 중 증거의 장막이라 한 것은 약속의 확실성, 즉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따르는 그 은혜의 확실함을 시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큰 고난 혹은 임종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을까 의심하기 쉬운데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사랑을 확신하기를 원하십니다.

 

2. 마음이 활짝 열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여기 증거의 장막의 장막이 열렸다는 것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져 둘이 하나가 됨으로 장벽 없이 사라졌다는 말씀입니다(요14:20, 막15:37-38, 히10:20).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이미 열린 장막이 이제야 또 열리는 모습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휘장이 갈라졌지만 본문에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 열리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을 멀리 했던 우리 마음의 휘장도 사라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육신적인 일에 분주하여 하나님을 멀리 했거나, 보혈의 공로에 굳게 서지 못해 하나님께 다가가지 못했거나,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게을렀던 마음 등도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 마음의 휘장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간격이 영원히 처리되기를 원하십니다.

 

3. 온전히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6절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여기 성전은 장막이 열렸기에 하나 된 지성소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천사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거룩한 지성소에서 나오는데, 완전수 7에 해당하는 일곱 대접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천사가 지성소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시는 지성소의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이고, 그리고 7이 완전수라는 점에서 대접을 통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난의 큰 사랑을 묵상하고 깨달으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온전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약1:2-4).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온전히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다해 섬기시기 바랍니다.

 

4. 왕 같은 제사장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성전에서 나온 일곱 천사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천사는 성도나 제사장이 아니어서 세마포를 입거나, 왕도 아니어서 금띠를 띠는 것이 아닌데(계1:13) 왜 이런 모습일까요? 그것은 대접재앙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무엇인데, 세마포와 가슴의 금띠를 합하면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즉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깨달아 온전한 믿음 가운데 왕처럼 마음을 다스리고, 흰옷을 넘어 맑고 빛난 세마포처럼 더욱 거룩해지고, 날마다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난 중에 있거나 고난의 사랑을 깨달을 때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봅니다.

 

5.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7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네 생물은 여기서는 4복음서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네 생물 중의 하나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는 것을 보아 복음서에 입각하여 대접재앙을 진행할 것을 지시합니다. 복음서란 먼저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군 줄 알고 믿어서 구원을 받고, 다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모본을 통해 하나님 섬기는 훈련을 배우고, 이렇게 배운 기도와 찬송 등 하나님을 섬김을 열심히 해서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것처럼 대접재앙의 과정이 하나님 열심히 경외하도록 하는데 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6.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영원한 속성을 알려주심 뿐 아니라 그 대접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어떤 마음이 담겼음을 시사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진노가 가득히 담겼다고 했듯이 하나님의 소원은 악을 영원히 미워하시고 성도가 영원히 거룩하기를 원하시는 그런 의미입니다.

 

7. 온전한 임재와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7-8절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마치 솔로몬 성전을 헌당할 때와 같은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한 모습입니다. 이처럼 고난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여 거룩한 성전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과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의 영이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시지 않게 되었듯이(창6:3), 반대로 이제는 우리가 진실로 회개함으로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대접재앙은 하나님의 임재 및 신랑 예수와 고락을 함께 할 만큼 우리의 사랑이 성숙해져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그 목표로 합니다(벧전1:6-7, 살전4:17). 그러므로 에녹처럼 주님과 함께 동거 동행 동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온전케 하는 성경을 늘 묵상하고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고난을 깨닫기를 원하여 기도할 뿐 아니라 성흔이 생기도록 깊이 깨닫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비로소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