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4)-참되시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1)-구모영 장로

에반젤(복음) 2021. 8. 30. 07:24
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4)-참되시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1)  
                                                    
지난번까지의 강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자연계시적 지식”과 특별계시적 지식인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칼빈의 논증에서는 (1)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2) 그가 참되게 알려져 있다는 것, (3) 그러나 그에 대한 참된 지식이 죄 때문에 불가피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그릇된 반응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이 참된 지식을 인간은 영원히 핑계할 수 없다는 것, (5) 그리고 창조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이 일치한다는 점, (6) 또한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씌어진 것으로 그 저자가 누군가와 상관없이 실제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역사성과 무오성 및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번 강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갖게 되었지만, 좀 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을 위하여 칼빈은 제11장과 제12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형상물을 섬기는, 특히 교황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한 후에, 제13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예배와 영광을 독점적으로 받으실 분이라는 점과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논증하고 있습니다. 본 강의는 13장 서론까지 언급하고, 삼위일체론의 사실상 본론인 그 나머지(13.7-29)는 다음 강의시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제11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1. 예배에서의 형상(形像)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11.1-4)
   (1) 하나님은 가시적(可視的)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금하신다(11.1). 참되신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하고자 할 때에는 특별히 하나님을 우상과 대립시키고 있다. 칼빈의 제2계명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며”(출 20:4)라는 말씀을 따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들려는 욕망은 야수적인 우매함이라 지적하고, 이러한 우매함이 전 세계를 붙잡고 있다고 비판한다.(1) 따라서 그는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불경건의 허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다”고 지적하였다.
   (2) 하나님을 조형적(造形的)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11.2). 모세의 신명기(4:15-18)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서인 이사야서(사 40:18-20, 41:7, 29, 45:9, 46:5-7), 그리고 누가가 적은 사도행전(행 17:29)에서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라는 바울사도의 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형상, 조형물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들은 마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조형물을 만드는 것이라 오해할 수 있으나 정작 이렇게 만들어진 형상과 조형물은 오히려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뿐이다.”이라고 지적하였다.
   (3) 신적(神的) 임재의 직접적인 표징도 형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11.3).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구름과 연기와 화염(신 4:11) 속에서, 그리고 성령이 한번은 비둘기 형태로 나타나셨지만(마 3:16), 이러한 표징들은 모두다 인간의 교육을 위해서 적절히 고려된 것이며, 동시에 그의 불가해한 본질을 인간에게 명백하게 말해 주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형태로 신격(神格)의 상징을 세우려고 하는 어떠한 구실도 유대인에게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하나님은 율법 하에서 속죄소로부터 그 권능의 임재를 보여 주셨는데, 이 속죄소는 그 마음이 감격하여 자기를 초월하게 될 때, 하나님을 가장 잘 응시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즉 그룹은 그들의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었으며, 속죄소는 휘장으로 둘러싸였고,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출 25:17-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상화를 좋아하는 교황주의자 무리들에 대하여 칼빈은 “하나님과 성자(聖者)들의 조상(造像)을 옹호해야 한다는 광란의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였다.
   (4) 형상과 화상(畵像)은 다 같이 성경과 반대된다(11.4). 이사야 선지자는 “어리석은 자들은 동일한 나무로 자신들을 따뜻하게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고기를 굽거나 삶기도 하며, 또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 자들이다”이라고 책망하였다(사 44:12-17).(2) 따라서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 죄이다. 그리고 무한하시고 불가해하신 하나님을 5척의 키로 축소시키려는 것으로, 이보다 더 부당한 일을 없을 것이다. 사실 우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권위가 있을 수 없다(사 2:8, 31:7, 37:19; 호 14:3; 미 5:13).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형상만이 아니다. 화상 역시 동일하게 조상(造像)인 형상 못지않게 금지되어 있다고 칼빈은 지적한다.

2. 성경의 교부들의 주장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오류를 논박함(11.5-7)
   (1) 우상에 대한 성경의 판단(11.5). 그레고리우스(Gregorius)는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하였지만, ‘우상의 도는 나무뿐’이며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스승이라’고 한 예레미야선지자(렘 10:8)나 하박국선지자(합 2:18)의 말을 살펴보면 이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라서 교황주의자들의 “우상은 책”의 역할을 한다는 지적은 당연히 예언자들에 의하여 정죄 받아야 할 일이다. 유대인들이 예배한 분은 오직 유일하신 참되신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2) 교회의 교리도 우상에 대하여 달리 판단한다(11.6).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가사적(可死的)이다”라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주장한 락탄티우스(Lactantius)와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글은 물론, “형상에게 예배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 형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명백하게 말한 어거스틴(Augustinus)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A.D 305년경 엘비라(Elvira)종교회의에서 제정된 제36장의 내용, 즉 “교회당 안에 화상이 있어서는 안 되며, 예배를 받든가 찬양받아야 할 것이 벽에 거려져서도 안 된다.”라고 기술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칼빈은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 이외의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3)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물(形像物)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11.7). 교황주의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형상물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하는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만든 성자의 화상(畵像) 혹은 조상(彫像)은 가장 음란한 실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울사도의 말과 같이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을(롬 5:10), 충분히 또는 진실하게 배웠다고 하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十字架像)을 교회의 도처에 세웠겠는가?

3.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과 예배 부패의 기원이 된다(11.8-16).
   (1) 형상의 기원 : 유형적인 신격(神格)에 대한 인간의 욕구(11.8).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創始)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을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한 것으로 꽉 차 있어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해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에 완전히 젖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한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이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물들을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어 왔다.
   (2) 형상물의 사용은 마침내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다(11.8). 유대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 32:4),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손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 않았다(레 26:13). 그러나 이것들이 그들을 바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뻔뻔스럽게 동의하여(출 32: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금송아지에서 볼 수만 있다면, 해방자(解放者)이신 하나님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인간들은 형상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물며 유대인들도 그랬는데 이방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함은 물론 점점 그러한 행동에 무감각해지게 되어 거기에 무슨 신적(神的)인 것이 있는 것처럼 완전히 감탄하게 됨은 물론 그것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3)교회에서의 형상물(形像物) 예배(11.10). 형상을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는 경우 결국은 형상물이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거스틴도 이점에 대하여, “우상(형상)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사람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물론 그들은 형상물을 결코 신이 아니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예언자들은 그들이 목석(木石)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 2:27; 겔 6:4f.; 사 40:19-20; 합 2:18-19; 신 32:37). 칼빈은 이러한 일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지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같이 행해지고 있다는 지적을 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4)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11.11). 교황주의자들은 교묘하게 구별함으로써 이를 회피하려 한다. 즉 그들은 형상물에게 표시하는 존경을 형상물에게 봉사(dulia)하는 것이라 말하고, 형상물을 예배(latria)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 곧 영광이라는 것이 조상(彫像)이나 화상(畵像)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형상물의 봉사자일 뿐 예배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5) 예술의 기능과 한계(11.12). 칼빈은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까닭에 이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각이나 회화에서도 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두 부류 중 전자는 교육하며 교훈하는데 다소 유익이 있으나, 후자는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교회 내에 장식되어 있는 대부분이 후자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에 칼빈으로서는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6) 교리가 순수하고 건전할 때에는 교회가 형상물들을 거절하였다(11.13). 우리가 만일 초대교회의 권위에 감동을 받고 있다면 종교가 아주 번창하고, 순수한 교리가 유세하던 약 500년 동안, 기독교회에는 일반적으로 형상물들이 없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성직의 순수성이 점점 쇠퇴하여 감에 따라,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그 형상들이 소개되었다. 사도 요한은 우상 예배뿐만 아니라, 우상 그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을 지키라고 경고하지만(요일 5:21), 교회당 안에 형상물들이 세워지자마자 소위 우상예배의 표준이라는 것이 세워졌던 것이며, 이러한 일은 결국 교회의 신성을 해치는 것이었다.
   (7) 니케아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11.14). 칼빈이 말하는 이 니케아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소집했던 가장 유명한 회의가 아니라, 이레네 황후(Empress Irene)의 명령과 그 후원 하에 A.D 787년에 개최된 회의로, 이 회의에서 교회당 안에 형상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3)
   (8)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오용(誤用)(11.15). 교황주의자들은 예배에 대하여 논의할 때에는 야곱이 바로 왕을 축복한 것(창 47:10), 야곱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창 47:31; 히 11;21) 한 것, 야곱이 스스로 세운 돌비에 기름 부은 것 등을 들추어낸다(창 28:18)(다만 칼빈은 구절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특히 칼빈에 의하면 미라(Mira)의 감독 데오도시우스(Theodosius)는 형상물을 숭배함에 있어 어떠한 의심도 제거하기 위하여 그의 부감독의 꿈에 의하여 형상물 숭배의 타당성을 확신하였는데, 그는 마치 그것을 직접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나 되는 것처럼 신중히 다루었다고 한다.  
   (9)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무서운 주장(11.16). 형상물에 대한 예배의 정당성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해졌고, 급기야는 황제의 상 앞에 분향한다고 하면 성자(聖者)들의 상에는 더욱더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부언한다. 특히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의 감독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형상물을 경건하게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는 생명의 원천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똑같이 예배와 영예를 이 형상물에 드릴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제12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하나님만이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 종교는 우리를 유일신이신 하나님께 결속시킨다(12.1)
   (1) 수수한 종교와 미신을 구별하는 기준은 “성경이 유일신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 명칭만 가지고 논쟁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속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다른 것에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는 사실”이라고 칼빈은 지적한다.
   (2) ‘종교’를 의미하는 헬라어인 유세베이아(eusebeia, εὐσέβεια) 역시 정당한 예배를 뜻한다. 키케로(Cicero)는 종교(religion)라는 말을 relegere라는 라틴어에서 끌어내고, 참된 것은 성실하게 숙고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은 이 말을 ‘방종’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경건’이란 확고한 기반위에 서기 위하여 적절한 한계 안에서 스스로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고 보았다.
   (3) 종교의 의의가 무엇인가라는 논의는 그만두더라도 칼빈에 의하면 모든 시대에서 종교가 언제나 허위와 오류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은 일치된 사실이라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도 하지만 질투하시며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 때문에, 인류로 하여금 공의의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합리적인 예배를 제정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에, 첫째는 신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자신이 그들의 유일한 율법 수여자가 되게 하신 것이요, 둘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당연히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규범을 제정하신 이 두 가지 내용을 포함시키셨다. 율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뒤에서 논하겠지만, 우선 칼빈은 여기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한 굴레가 인간에게 씌워져 저들로 하여금 악한 예배에 빠지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만 기억하자고 말한다. 특히 수세기 전부터 이 세상을 떠난 성자(聖者)들을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로 높여져서, 하나님 대신에 영광과 기도와 찬양을 받게 하는 행태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실로 혐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차이점이 없는 구별(12.2)
   (1) 교황주의자들은 라트리아(latria 예배)와 둘리아(dulia, doulia 봉사)를 구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천사와 사자(死者)에게 드려도 아무 죄가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고안하였다. 그러나 칼빈에 의하며 그들이 성자에게 돌리는 영광은 실로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과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2) 칼빈은 어원적인 의미에서 latria와 dulia는 헬라어인 라트레이아(latreia, λατρεια)와 두레이아(douleia, δουλεια)에서 온 말로, 라틴어로는 각각 ‘예배’라는 쿨투스(cultus)와 ‘봉사’라는 세르비투스(servitus)로 대신할 수 있다. 그런데 ‘두레이아’라는 말이 봉사를 의미하고 ‘라트레이아’는 예배를 의미한다는 말이지만, 칼빈에 따르면 봉사가 예배보다 범위가 크다고 본다. 즉, 존경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를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자에 대한 봉사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보다 더 넓은 지경을 갖고 있어, 칼빈에 의하면 결국 교황주의자들에 따를 때 하나님보다 오히려 성자에게 더 큰 것을 돌리게 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즉 그들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형상물에 대하여 봉사는 것은 구별하고 있지만, 그들이 구별하고 있는 양자의 개념은 사실상 차이가 없기 때문에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3. 형상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이다(12.3).
   (1) 고넬료가 베드로를 향하여 엎드려 절하자 이를 금하였던 것과 같이(행 10:25), 세속적인 경의와 달리 그것이 종교라는 형식에 따라 일단 예배 행위와 결합하게 되면 형상물에 대한 설령 봉사라는 dulia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latria라는 예배와 구별하려고 든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2) 칼빈은 제11장과 제12장의 결론으로 제12장 말미에서 다음과 같은 글로 정리하고 있다. “경건의 의식이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에 드려지게 될 때에, 그것은 곧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미신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태양과 별들, 그리고 우상을 위해 고안해 냈다. 다음에는 야심이 뒤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은 것으로 썩어 없어질 인간을 장식하고 신성한 것은 모두 더럽히고 말았다. 그리고 최고의 존재를 예배하는 원리가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호신, 저급신들, 혹은 죽은 영웅들에게 아무 차별 없이 제물을 바치는 일반적인 습관으로 되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큰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하나님만이 독점하고 있는 것을, 수많은 우상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제13장 성경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1.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사용한 술어(13.1-6)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13.1).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일반 대중의 망상을 일축할 뿐만 아니라 세속 철학의 그 교묘한 이론을 논박하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실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육적인 상상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메소포타미아의 Audius(372년 사망)와 같은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같이 눈과 코와 입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무지한 인간들에게 하나님 당신을 알리기 위한 방법일 뿐이며, 결코 하나님이 인간과 같은 모양과 성격을 지닌 것이 아니다.
   (2) 하나님 안에 삼위(三位)가 계신다(13.2).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상과 좀 더 정확히 구별하시기 위하여 또 다른 특성을 보여 주시는데, 이는 하나님 자신이 홀로 한 분이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三位)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위’(位)(4)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칼빈은 사도가 성자를 가리켜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5)(히 1:3)라고 한 말로 볼 때, 틀림없이 성부를 성자와 다른 어떤 실재(subsistentia)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휘포스타시스(hypostasis, 위격 혹은 본체로 번역함)(6)라는 말을 본질(ousia/ essentia, substantia)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것은 (마치 밀초위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성부의 실체substance를 재현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은) 조잡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해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essence)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모든 것을 완전하게 포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자가 하나님의 본질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다만 성자 안에 성부의 휘포스타시스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성자 안에 있는 바로 그 휘포스타시스가 성부 안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으며, 또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성자에게도 휘포스타시스(the Son's hypostasis)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자를 성부와 구별시켜 준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7) 칼빈은 이와 같은 이론을 성령에도 같이 적응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곧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성령을 성부와 구별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이 본질의 구별은 아니다. 그 이유는 본질을 다양화 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사도의 증거를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께는 ‘세 본질’(三本質)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 위’(三位 three hypostases)가 있는 것이다.(8)
   (3)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주는 말이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13.3). 칼빈에 의하면 이단자들은 ‘위’라는 표현에 대하여 불평을 토하고 까다로운 사람들은 그 말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것이 외래어이기 때문이라든가 또는 진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라 보는 비판자도 있지만, 그 반대로 진리를 쉽고 명확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 용어사용을 비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13.4). 진리를 왜곡시키는 무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와 같은 ‘신기한 용어’도 유용하다 즉, 칼빈은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동의하는 척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아리우스에 따르면 결국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게 되는데, 이러한 오류에 대하여 고대 교부들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ὁμοούσιος 동일본질)라는 말로 그의 잘못된 주장을 배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사벨리우스(Sabellius)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데 불과하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 하나님을 단일신론적 형태로 변질시킴으로써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고대 교부들은 사벨리우스의 이와 같은 오류에 대항하기 위하여,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단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13.5). 신학적 용어를 사용할 필요성은 있으나 이러한 용어의 지나친 논쟁으로 인하여 주객이 전도되는 것은 경계했던 것이 칼빈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잊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특히 그는 힐라리(Hilary)가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인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이들 명칭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 역시 용어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은 다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라는 용어의 필요성(9)과 한계성을 모두 인정하였다. 따라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다는 점과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본질’(essence)이 하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10)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의미(13.6). 따라서 칼빈은 용어 자체에 대한 논의는 이제 중단한다. 그 대신에 문제 자체로 들어간다. 그는 “내가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essence)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의미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는 다른 무엇을 뜻하는 말이다.” 본질이란 단일하다.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심이라”(요 1:1)라는 사도 요한의 이 말 속에 분명히 본질은 단일성(essence as a unity)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실재의 관념이 명백해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본다.

[특강 4 정리]

기독교강요(上) 제11장과 제12장은 십계명 중 제2계명을 바로 지킬 것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특히 교황주의자들은 봉사(dulia)와 예배(latria)를 구분하고 형상물에 대하여 경배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가 일종의 봉사로 볼려고 하지만, 칼빈은 봉사라는 개념이 예배보다 더 넓은 개념이라는 점과 말이 봉사이지 사실상은 예배라는 점에서 단호히 거절합니다. 특히 교회당 내에서 형상이나 화상을 두는 것은 예배에 도움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며, 왜곡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거부합니다. 단지 이러한 형상이나 화상 그 자체가 교육을 위한 것까지 거부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상이나 화상은 역사적인 것만 인정하였습니다. 즉 그는 조각이나 회화에서도 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두 부류 중 전자는 교육하며 교훈하는데 다소 유익이 있으나, 후자는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교회 내에 장식되어 있는 대부분이 후자의 부류에 속하기 때문에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13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하여 논의하고 있는데, 삼위일체 신학에 있어 칼빈의 공헌은 지대하다고 평가됩니다. 특히 제13장에서는 본질과 본체, 위격을 언어적인 차원에서 명확히 분석함은 물론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제13장 7절 이하에서는 성자의 영원한 신격, 성령의 영원한 신격,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반삼위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을 하고 있습니다(이 부분은 다음 달 특강 내용임). 다만 제13장 서론에서 칼빈을 통하여 얻은 삼위일체의 언어적 개념론은 성삼위 하나님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로서의 ‘동일본질성’ 혹은 ‘동질성’을 지니면서도 그 위격(persona) 또는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로서는 각각 고유한 특징에 의하여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즉 실재(subsistence)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이와 같은 표현은 앞으로 더 분명히 밝혀지겠지만, 우선은 아리우스파나 사벨리우스파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형태론적 단일신론에 대하여 분명한 오류를 지적한 것이며, 아타나시우스와 니케아회의를 거쳐 삼위일체론이 정립된 것을 더욱 명확히 하였다고 평가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의 성자에 대한 ‘아우토테오스’(스스로 하나님이심)(self-existens, autotheos)라는 논의는 워필드가 말한 바와 같이 참으로 이단을 잠재울 수 있는 탁월한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삼위일체론은 결국 구원론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한 탁월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구모영장로 2011년 5월 29일 주일 오후예배 특강자료).

...............................................................  각주  ............................................................................................
(1 칼빈은 페르시안인들은 태양을 숭배하며 별들을 신들로 형상화하였고, 애굽 사람들은 동물이라는 동물은 모두 하나님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만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의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하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보다는 현명한 것처럼 보인다고 Tyre의 Maximus 말을 인용하였다

(2) 칼빈은 에피큐러스학파의 시인 Lactantius가 쓴 시 “한 때 나는/ 무화과나무의 줄기, 쓸모없는 나무 조각이었네./ 공장(工匠)은 나를 걸상으로 만들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신(神)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네”를 인용하면서, 이교도 시인마저 이러한 행동을 조소(嘲笑)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3) 샤를마뉴 대제(Charlesmagne, Carolus Magnus)의 이름으로 나온 반박서가 있다. 이 반박서에는 당시 니케아회의 참석했던 자들이 형상물의 정당성을 보증받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칼빈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1)라는 말씀을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정관(靜觀)함으로써 알게 된다”고 까지 했던 것을 지적하였다.

(4) 칼빈은 삼위일체의 개념 중 ‘위’(person)이라는 표현은 라틴교부들에 의하여 사용된 것으로, 이를 직역하면 ‘실재’(subsistentia, subsistence)라는 말로 부를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의미로 ‘실체’(substance)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6세기 이후에는 ‘위’와 관계된 개념인 ‘휘포스타시스’를 substantia가 아닌 subsistentia라는 용어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위’라는 말을 좀 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프로소파(prosopa, 얼굴)라는 용어도 사용하였는데, 이 말을 라틴어로 표현한 것이 persona인데, 이 persona라는 말은 ‘얼굴’, ‘용모’, ‘가면’이라는 의미에서 점점 ‘인격’이라는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5) 영어성경은 이 부분을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KJV, NIV, NASB), the very image of his substance(ASB), the true image of his substance(Bible in Basic English), the expression‎ of his substance(Darby's English Translation), the figure of his substance(Douay Rheims), is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Weymouth New Testament), the impress of His subsistence(Young's Literal Translation)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우리 성경의 경우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현대성경),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공동번역),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개역한글, 개역개정)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하에서 설명하겠지만 고전적 내지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에 가장 가깝게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본체”라고 풀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6) 우리 성경 히브리서 제1장 3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본체’라는 용어는 헬라어 hypostasis(ὑπόστᾰσις)를 번역한 것으로 혹자는 이를 본질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경과되면서 persona 라는 ‘개별자’로 정착되어 왔다. 이에 반하여 본질이라는 개념은 헬라어 ousia(Οὐσία)라는 개념으로 라틴어로는 substantia 혹은 essentia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래서 초대교부들은 삼위일체를 ‘Three Hypostases in one Ousia’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필자도 칼빈과 같이 본체와 본질을 구별하여, 위격(persona)을 본체의 관념과 연관 지어 그 용어를 사용코자 한다.

(7) 칼빈이 헬라 정교회에 속한 교부들의 글과 서방 어거스틴파의 저술들을 연구하여 각각의 공헌을 종합하고 체계화하여 제시한 삼위일체 이해의 핵심은 삼위일체 안에서 각 위격들은 ‘스스로 하나님이심’(아우토테오스, autotheos)이라는 것이다. 워필드 박사는 삼위일체 교리를 일별하는 두편의 논문들에서 칼빈이 성자의 ‘아우토테오스’를 주장하므로서 삼위일체 교리를 정확하게 그리고 생동감있게 정립하는데 탁월한 기여를 했다고 강조한다. B. B. Warfield, “Calvin's Doctrine of the Trinity," Calvin and Calvin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31), 189-284. idem,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 in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2), 59: "In particular, it fell to Calvin, in the interests of the true Deity of Christ-the constant motive of the whole body of Trinitarian thought-to reassert and make good the attribute of self-existence (autotheos) for the Son. Thus Calvin takes his place, alongside of Tertullian, Athanasius, and Augustine, as on-e of the chief contributors to the exact and vital statement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Triune God.

(8)우리 성경 히브리서 제1장 3절의 ‘본체’와 관련된 칼빈의 기독교강요 13.2의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한 문언은 다음과 같다. “When the Apostle calls the Son of Go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Hebrews 1: 3,) he undoubtedly does assign to the Father some subsistence in which he differs from the Son. For to hold with some interpreters that the term is equivalent to essence, (as if Christ represented the substance of the Father like the impression of a seal upon wax,) were not only harsh but absurd. For the essence of God being simple and undivided, and contained in himself entire, in full perfection, without partition or diminution, it is improper, nay, ridiculous, to call it his express image, (charakter.) But because the Father, though distinguished by his own peculiar properties, has expressed himself wholly in the Son, he is said with perfect reason to have rendered his person (hypostasis) manifest in him. And this aptly accords with what is immediately added, viz., that he is "the brightness of his glory." The fair inference from the Apostle's words is, that there is a proper subsistence (hypostasis) of the Father, which shines refulgent in the Son. From this, again it is easy to infer that there is a subsistence (hypostasis) of the Son which distinguishes him from the Father. The same holds in the case of the Holy Spirit; for we will immediately prove both that he is God, and that he has a separate subsistence from the Father. This, moreover, is not a distinction of essence, which it were impious to multiply. If credit, then, is given to the Apostle's testimony, it follows that there are three persons (hypostases) in God.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1장 3절에 대하여 "his person(hypostasis)"가 아니라 ”his substance"라고 쓰거나 “his subsistence"라고 쓰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번역서에서는 ”the stamp of the Father's hypostasis"라고 쓰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성경상의 본체라는 말이 과연 바르게 사용된 것일까? 칼빈의 히브리서 1장 3절과 관계된 해석을 살펴보면, 본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원적인 측면에서 이 ‘본체’를 ‘위격’과 같은 말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다수 확인되고 있어 우리 성경의 번역상 다소 검토가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 본체를 위격과 같은 말로 사용하고 있는 곳으로는 J.Calvin, 영․한기독교강요(성문출판사, 1990), 235쪽(hypostasia equivalent to essence 본체 혹은 위격을 본질과 동일하다고...), 279쪽(three persons or hypostases 세 분의 위 혹은 위격); J.Calvin, 기독교강요(상)(생명의말씀사, 1994), 204쪽(하나님께는 세 본체가 있는 것이다) 혹은 234쪽(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subsistence가 존재한다); Douglas F.Kelly(나용화역), “참되시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in:David W.Hall/Peter A.Lillback, A Theological guide to Calvin's Institutes, 칼빈의 기독교강요신학(CLC, 2009), 121쪽(Surely we infer from the apostle's words that the very hypostasis that shines forth in the Son is in the Father. 우리는 사도들의 말로부터 성자 안에서 빛나고 있는 그 본체가 성부 안에도 있다고 확실하게 결론짓는다/ 다만 나용화교수는 essence(본질)을 '실체'로 번역하고 있는데 실체는 substance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essence는 본질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삼위일체론의 권위자라 볼 수 있는 총신대 차용배교수의 改革敎義學(삼위일체론)(총신대학출판부, 1990) 231쪽 이하에서는 우리 성경의 본체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 안에 세 휘포스타세스(hypostases) 곧 ‘자존하는 인격’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제13장 2, 3항의 검토를 통하여 “persona(위격) 혹은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ᾰσις)가 서로 동질(ὁμοούσιον)이란 용어들이 유용하게 사용되어지고 또 사용되어져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휘포스타시스’를 우리 말 성경처럼 ‘본체’로 이해할 것이 아니고 ‘위격’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232쪽). 결론적으로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는 위격, substance가 아닌 subsistence, 그리고 오해의 소지는 있으나 본체라는 말로 사용이 가능하다. 그리고 어원상 히브리서의 ‘휘포스타시스’와 빌립보서 2:6의 ‘모르페’(μορφῇ)는 달리 사용되고 있으나 많은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히브리서의 ‘휘포스타시스’를 빌립보서의 ‘모르페’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오류를 범함으로 인하여 결국 히브리서상의 원어 해석상에서도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9) 칼빈은 삼위일체 용어정의에 한계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특히 그는 아리우스와 사벨리우스의 삼위일체론이 허구임을 비판하면서, 삼위일체론의 사실상 당위성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즉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되었으며 시초가 있다는 점에서 시정을 부정하는 논거를 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을 구별하기 위한 명칭이 아니라고 봄으로써 사실상 형태론적 단일신론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비판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도 분명 언어의 한계가 있음에도 논의의 필요성은 분명히 하고 있다.

(10)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라틴어판에서 불어판으로, 그리고 영어판으로 번역되었으며, 또한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은 우리 글로 번역된 것이거나 아니면 영어판이 일반적이다. 신약성경의 원어는 헬라어이고,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라틴어(Vulgate)로 그리고 영어로, 그리고 우리 한국어로 역시 번역되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히브리서 제1장 3절에 사용된 말들을 비교해 본 바 있지만, 언어가 가지는 어의(語義)의 폭으로 인하여 신학이라는 도그마를 정립하는데 필요한 본질, 본체, 위격, 실체, 실재 등 다양한 용어들이 객관화 되었다고 보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은 칼빈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이라는 도그마에 대하여 언어사용의 신중성은 강조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그 한계를 무시한 채 마냥 개념놀이에 매달릴 수 없음을 칼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용어들이 아무런 간계(奸計) 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더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고 지적하였던 것이다(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