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I / IV 강의자: 송 다니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유럽 세미너리. 2010년 가을학기. Version 1.01) Simplitutio: Institutio (made) Simple! 본 정리록의 특징: ·본문 이해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은 표현들은 직역을 피하고 간단한 표현으로 바꾸었다.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긴 단락은 짧게 요약했다. ·중요한 부분은 최대한 의미를 살려서 의역하였다. 괄호 부분은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추가한 부분이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곳에서는 중복되는 설명을 생략했다. ·독자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해 당시 칼빈시대의 상황을 설명하고, 현대신학과 현대교회에 연결하여 기독교강요가 현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다루었다. ·본 정리록은 Otto Weber의 독일어 번역을 토대로 하였다. 이것은 20세기 중엽에 번역된 것으로 불어, 영어 번역보다 훨씬 현대어로 번역되었으므로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하다. 불어와 영어 번역본은 직역이 많아서 대체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라틴어는 여러 가지 번역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문제성이 있는 것은 원문과 불어와 영어 번역을 각주에 첨부하였다. 불어가 중요한 이유는 칼빈의 모국어라서 그가 이해하는 바를 불어로 정확하게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 정리록은 심플리투치오(간단한 기독교강요)라고 한다. 번역서를 읽는 것보다 심플리투치오를 읽는 것이 이해가 훨씬 빠르도록 구성하였다. 이것을 공개하는 이유는 독자가 기독교강요를 쉽게 접근하여, 종교개혁 신학의 이해를 돕고자하는 데에 있다. 먼저 심플리투치오를 읽고 다시 기독교강요 번역서를 읽으면 기독교강요를 두번 읽는 것보다 이해가 더 잘 될 것으로 희망한다. 혹시 독자가 번역이 잘못된 부분을 발견한다거나, 좋은 의견이 있으면 필자에게 연락을 해 주면 감사하게 생각하며 반영을 하겠다. 필자는 독자의 도움으로 심플리투치오를 계속 보완해나갈 것이다. 기본적인 것: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강요만큼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많지 않다. 이 책은 개혁신학(장로교)에서는 불멸의 교과서이다. 정통 개혁신학은 칼빈 이후로 여러 가지 면에서 발전을 보았으나, 칼빈을 기본적으로 떠나지 않았다. 기독교강요를 전부 공부하여 숙지하게 된다면 신앙의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되는 것은 물론이며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게 된다. 신학 서적, 신앙 서적에 기독교강요는 자주 인용된다. 기독교강요를 알고 있으면 쉽게 인용문을 확인하고, 혹은 문맥에서 올바른 인용이 되었는지, 혹은 올바로 해석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칼빈의 신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고 할지라고, 칼빈의 저작을 읽어본 적이 없으면, 들은 것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도 않는다.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강요를 공부하면, 그의 신학이 머리에 정리가 되어서 좋다.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만큼 튼튼한 학문적 훈련을 바탕으로 사고를 많이 하고 (그들은 전부 스콜라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생명의 위협 가운데서도 열정적으로 삶 전체를 바쳐 신학 연구를 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글에는 깊은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고민이 묻어난다. 우리는 이들의 삶을 머리속에 떠올리며 이들의 글을 대해야 한다. 기독교강요는 원래 신교의 믿음이 이단이 아니고 성경적이라는 것을 변증 하려는 목적과, 신자들을 위해 기독교의 근본되는 가르침을 간단하게 서술하려는 목적에서 쓰였다. 칼빈 자신도 조국 프랑스로부터 박해를 받아 쫓겨나서 이곳저곳을 방랑하고 다녔으며, 고국에서 수많은 신자(위그노)들이 박해를 당하고 순교를 당했다. 그러므로 기독교강요는 박해의 원흉인 프랑소와 왕에게 긴 헌사와 함께 헌정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차차로 기독교강요를 증보하였다. 이번 학기는 제1권 신론을 공부하게 되는데, 한 학기 동안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기독교강요 신론을 매스터하고자 한다. 예습, 복습을 잘하고 2차 자료들을 많이 읽을 것. 수업을 잘 따라오면 그간 성경이나 신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이 많이 정리되고, 사고하는 훈련을 통하여 생각이 깊어진다2). 최근에 발간된 독일어로 된 칼빈 입문서로는: 1) Johannes Calvins Theologie – Eine Einfuehrung. Georg Plasger. V&R 2) Johannes Calvin. Leben und Werk des Reformators. Christoph Strohm. 플라스거는 지겐 대학교수로서 독일에서 흔하지 않은 칼빈 연구가의 한 사람이다. 위에 소개된 책은 칼빈 신학 입문서로서 매우 좋다. 가끔 등장하는 성서비평적인 입장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 그의 조직신학적인 입장은 건전한 편이다. 그가 주축이 되어서 운영되는http://www.reformiert-online.net/ 은 매우 유익하다. 단지 성서비평적인 내용은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쉬트롬 교수는 하이델베르크의 교회사 교수로서 훌륭한 강의로 명성이 높은 사람이며, 칼빈 연구가로서 개혁주의 신학자이다. 나름대로 새로운 각도로 칼빈의 생애와 신학을 잘 정리함. 두 권 모두 읽기가 어렵지 않고 책값도 저렴하다(10-15유로) 인터넷에서 내려받아서 볼 수 있는 자료: 간단하고 명료하게 (한글로) 작성된 기독교강요 입문서로서는 개혁 아카데미 원장 장관섭 교수의 글이 있다. http://shoppingm.tv/happy/ („메인 메뉴“의 „개혁주의 신학“에) 독일어로 된 것으로서는 Diener-Wyss가 쓴 것이 있다. 이 두 가지는 필자가 학생들에게 메일로 보내 준다. 기독교강요의 원제: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기독교강요를 라틴어, 영어, 불어로 볼 수 있는 곳: http://www.kirs.kr/opera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 독일어판: http://www.calvin-institutio.de 한국판 무료: www.aspire7.org/english/picture/기독교강요1559한글판.hwp. 이것은 아직 필자가 읽어보지 않았다. 한국판은 번역 시에 주로 영어를 참조했기 때문에 불명확한 부분은 독자가 직접 라틴어를 참조해야 하고, 혹은 독일어를 참조하면 좋다. 독일어가 영어보다 학술어로는 훨씬 정확하다. 칼빈 공부를 위해서는 한국에 도움이 되는 웹사이트가 무수하게 많다. 참고: http://calvinschool.net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80장(章)이다. 각 권, 장마다 제목이 붙어 있다. 각 장은 다시 작은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따라서 기독교강요를 인용할 때에는 페이지로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표기한다: II,3,2(2권 3장 2항). 독일 칼빈 신학자 Otto Weber가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항 마다 전부 소제목을 달았다. 이 소제목은 기독교강요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유익하다. 이 소제목은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 있고,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번역본에도 붙어 있다. 본 강의에서 이 소제목을 모두 소개하며 번역은 강의자가 주로 Otto Weber의 독일어 번역을 한국어로 번역하였으며, 필요한 경우 라틴어, 영어 불어를 참조하였다. 한국어 번역판으로는 „생명의 말씀사“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출판된 것 등이 있다. 생명의 말씀사 판에는 소제목이 붙어 있어서 본문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번역에는 적지 않은 오류가 있다. 유익한 주석이 많고 인용구절의 출처를 자세하게 표기한 것이 장점이다. „크리스챤 다이제스트“판은 필자가 읽어보지 않아서 평가를 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다고 들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다른 번역판들이 있으나 필자가 읽어본 바가 없다. 2009년 고영민 박사(백석문화대학 총장)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했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번역을 했다기보다는, 원본과 번역서를 비교해서 번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전어 박사가 아닌 한 기독교강요를 정확하게 번역할 수 없을 것이다. 고전어의 문장은 해석의 가능성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오역의 위험을 면치 못한다. 고전어 학위를 가지고 신학을 공부한 분이 기독교강요를 라틴어에서 직접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우리는 기독교강요를 훨씬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요령 일단 분량이 방대하다. 독일어 판은 1000쪽이 되고, 한국 판은 2000쪽이나 된다. 모두 4권 80장(章)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첫권인 신론을 잘 공부하면 나머지는 무난하게 공부를 할 수 있다. 신론은 모두 1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5부분으로 나누어 진다(칼빈이 나눈 것이 아니다). 이렇게 5부분을 나누어서 공부하면 신론이 끝난다. 정통 개혁 조직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신론은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사역이다. 칼빈은 이것을 기독교강요 1권 13-18장에서 다룬다. 1-12장에서는 기본적이고 서론적인 문제를 다룬다. 기독교 강요는 한 문장이라도 쉽게 지나갈 수 없다. 집중해서 읽고, 필요하면 반복해서 읽으며, 멈추어 깊이 묵상해야 한다. (à) 표시는 보통 필자가 설명을 하기 위해 덧붙인 경우이며, 또한 의견은 각주를 사용하였고, 긴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상자 안에 설명을 했다. 긴 배경 지식을 요구하는 곳에서는 „기독교강요 보조자료“ 파일을 만들어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다. 끝으로 존 맥닐의 기독교강요의 서문을 인용한다: 칼빈의 걸작품들을, 그것이 저자의 정신이 정교하게 조합된 교의학적 논리구조로 합성된 일종의 효과적인 공장과 같다는 선이해를 가지고 이해하려는 사람은, 곧장 자신의 가정이 도전당하고 박살 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식별력이 있는 독자는 칼빈의 작품 속에는 그의 지성만이 아니라 그의 영적이고 감정적3)인 전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 칼빈은 전문적인 신학자라기보다는 조리있는 사고를 하는 천재성을 소유했으며, 자신의 신앙에 관련된 것들을 저술해 내려는 충동에 순응한, 진지한 종교적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기독교강요를 신학대전이 아니라 경건대전으로 명명했다. 그의 정신적 에너지의 비밀은 바로 그의 경건에 있었다. 그것의 열매는 그의 경건을 대략적으로 묘사한 그의 신학이다. 그의 과제는 이 책의 원제목인 „경건과 구원교리를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의 총체“였다4). 한눈에 보는 칼빈의 인생 1509: 1509,7,10 놔용에서 출생 (Noyon, Picardie). Jean Cauvin. 1523 – 1528: 파리에서 College de la Marche, Kollegium Montaigu 에서 공부함. 콜레기움 몽떼귀는 당시의 명문대. 스콜라 철학(신학)대학. 에라스무스, 그리고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공부한 곳. 1528 – 1533: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당시의 명문대 오를레앙에서 법학공부. 이 사이에 당시의 관습대로 파리와 부르쥬에서도 공부함. 1533: subita conversio (갑작스러운 회심) 1533: 니콜라스 콥 (Nicolas Cop) 사건. 콥이 만성절(11월 1일)에 스콜라 철학의 본거지인 소르본느 대학의 학장 취임사에서 혁명적 연설을 함. 칼빈이 연설문 작성에 기여함. 내용은 „궤변신학을 벗어나서 개혁신학으로 가자!“ 콥과 칼빈은 체포를 피하고자 급히 도주함. 1533 – 1534: 앙굴렘(Angoulême)에 있는 친구 띠에(Louis du Tillet) 집으로 피신함. 신학연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여 기독교강요 1판의 초안을 작성함. 친구들에게 이것을 낭독함. 1534 – 1535: 4월부터 여러 도시를 돌아다님. 먼저 신교도의 피난처인 네락(Nerac)에 가서 불란서 종교개혁의 선구자 파버 스타풀렌시스(Faber Stapulensis)를 만남. 5월에 고향으로 가서 봉록포기 신청. 1535년 1월에 인쇄업으로 유명한 바젤에 도착. 1534: 벽보사건. 1534,10,17에 가톨릭 미사를 비판하는 벽보사건으로 전 프랑스에 신교도 핍박이 시작됨. 프랑소와 1세가 이 사건을 국왕 존엄 훼손죄로 받아들임. 1536: 1536년 3월 기독교강요 1판 발행.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머리말에 프랑소와 왕에게 프랑스 신교도들을 변호함. 1536 – 1538: 제네바 체류. 하루만 묶어 가려고 했으나 그곳에서 개혁을 하고 있던 Guillaumme Farel에게 거의 강제로 붙들림. 1535의 시의회 결정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교가 된 곳. 따라서 많은 문제가 있었던 곳. 1536: 교회법(„Article“)과 교리문답서 작성. 1537초에 시의회에 교회법 제출. 엄격한 법으로 인해 불만자가 많았으나 시의회에서 교회법을 인준함. 교회법에 포함된 신앙신조에는 모든 시민과 거주민이 맹세를 하도록 함. 반대에 부딪힘. 1538년 2월 선거에서 개혁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시의회에 다수를 차지하게 되어 파렐과 그를 시에서 추방함. 1538 – 1541: 스트라스부르크 체류. 이곳은 부쩌가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하는 독일 지역. 칼빈은 그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이 시기에 종교개혁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됨. 1539: 기독교강요 2판 발행(6장에서 17장으로 대폭 증보. 완결판은 80장으로). 1540: Idelette de Bure와 결혼. 1540/1541: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 종교회의에 참가하여 독일 종교개혁자들을 사귐. 1541 – 1564: 제네바에서 2차 사역 . 1541: 시의회의 초청으로 오랫동안 주저한 뒤에 자기 의사에 반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제네바로 다시 돌아감. „나는 나의 심정(heart)을 주님께 희생제물로 드립니다(파렐에게 보낸 편지)“ 1541: 시의회에서 지정한 6명과 함께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함: 4직임과 2기관. 4직임: 목사, 장로, 교사, 집사. 2기관: 가르침의 문제를 담당하는 목사회와 교회를 다스리며 치리하는 콘시스토리움. 이곳에서는 시 전체의 예절과 규칙을 감시함. 시의회에 고발을 할 수는 있으나, 재판권은 없다. 1542: 제네바 교리문답. 1549: 아내 Idelette de Bure 병사. 1549: Consensus Tigurinus. 쮜리히의 불링어와 성찬식 문제에 합의를 봄. 1553: 세르베투스의 사형. 1555: 시의회 선거를 기점으로 비로소 교회가 시의회로부터 공식적으로 독립됨. 제네바의 교회 정치가 칼빈이 의도하던 바대로 이루어짐. 그전까지만 해도 교회에서 시의회 동의없이 공식적인 죄인에게 성찬을 거부할 수가 없었음. 1559: Institutio 최종판(5판), 제네바 아카데미(academia) 설립. 칼빈이 50세 생일 선물로 비로소 시민권을 획득함. 1564: 55세로 병사. 제1권 목차 창조주로서 하나님 인식 (De Cognitione Dei Creatoris) [하나님 인식과 자기인식]5) 제1장: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제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제3장: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 제4장: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와 사악함에 의해 질식되고6) 부패하였다. 제5장: 우주 창조와 그 지속적인 통치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달된다7). [성경의 권위] 제6장: 창조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인도와 가르침이 필요하다. 제7장: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증거에 의거한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모독이다. 제8장: 성경의 신빙성을 확증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성적인 증거가 있다. 제9장: 성경을 무시하고 단지 직접적인 계시에 의존하는 열광주의자들은 경건의 모든 기초를 파괴한다. [우상숭배] 제10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참 하나님을 모든 이방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 제11장: 하나님을 가시적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죄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참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다. 제12장: 하나님께서는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위해 우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제13장: 성경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신다는 것을 창조 시로부터 알 수 있도록 가르친다. [창조와 섭리] 제14장: 성경은 창조에 관한 기록에서부터 참 하나님과 모든 거짓 신들을 분명한 특징들을 통해 구별한다. 제15장: 인간의 창조: 인간 정신의 능력, 하나님의 형상, 자유의지, 인간 본성의 원초적 순결. 제16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유지하시고 보호하시며, 섭리로써 모든 작은 부분까지 다스리신다. 제17장: 이 섭리의 가르침을 잘 적용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할 수 있다. 제18장: 하나님께서는 불신자의 행위도 사용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시고자 그들의 생각을 바꾸신다8). 그러나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은 비난을 받을 수가 없다. I.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식9) (1-18) De cognitione Dei creatoris / The knowledge of God the Creator/ Qui est de cognoistee Dieu/ Von der Erkenntnis Gottes als des Schöpfers.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 이 단원의 중요성: 신인식의 문제는 인류의 시작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논의되는 주제이다. 이 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다룬다. 자연신학과 자연신학의 한계를 다루며, 과연 성경의 계시가 없는 신인식이 가능한가를 다룬다. 더 나아가서 간접적으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없는 신앙이 가능한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오늘날에도 매우 시사성 있는 주제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며, 종교 다원주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한번 검토해본다. I,1: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I,1,1 자신이 누군지를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지혜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것이 지혜10)의 근본이다11). - 하나님과 인간 중에 누구를 먼저 알아야 하는가? 이것은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환되면서 증가되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 자신을 진정으로 알게 되고, 자신을 알면 다시 하나님을 그만큼 더 알게 된다. 그러면 그는 새롭게 깨달은 하나님의 지식을 근거로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된다. 이렇게 순환되면서 인식이 계속해서 커진다. 그림: - 우리는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12)? 1.은사(축복):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며 움직이기“(행17:28) 때문에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다13).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고, 우리의 은사도 하나님 안에서 나왔다. ·우리가 받은 은사(생명뿐만이 아니라 햇볕과 비, 먹는 것, 입는 것 등)는 모두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며, 이것을 생각하면 자연히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2.인간의 비참함. ·우리의 비참함은 어디에서 왔는가? 아담의 범죄에서 왔다. ·비참함은 어떤 것인가? 첫째로: 무지, 허영심, 연약함, 배고픔, 둘째로 타락과 부패. 이것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과 추함이 드러난다. ·우리가 이 연약함을 깨달을 때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혜, 진정한 능력, 덕, 넘치는 선함과 넘치는 의. -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과 자신을 깨달을 때만이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모하여 찾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산다. I,1,2 하나님이 누군지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 인간은 본래 교만하고 위선적이다. 죄에 대해서 눈이 어두워서 스스로는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때만이 자신의 무지와 죄가 드러난다. 그전에는 자신도 쓸만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차차로 지나쳐서 자신이 하나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게 된다14). - 인간은 덕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이므로 어느 정도 도덕적으로 산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완전한 의와 완전한 지혜와 덕을 요구하신다. 인간은 이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만 자신의 부족함과 비참함을 깨닫게 된다. I,1,3 하나님의 존엄15) 앞에 선 인간 - 신자는 하나님의 현존16)을 체험할 때마다 두려움으로 떨며 땅에 엎어진다17).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존엄 앞에 서야만이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깨닫는다.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므로 죽어야 한다“ (삿13:12; 사6:5)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38장)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창18:27) - 하나님 인식과 자기 인식은 순환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지식을 먼저 다루고 다음에 후자를 다루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2장부터는 하나님 인식을 먼저 다룬다. I,1에서 칼빈이 인간의 비참함과 인간의 교만, 위선을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것은 종교 개혁자들의 확고한 출발점이다. 그는 더욱이 늘 스콜라 신학자(인간의 자유의지)와 인문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된 인문주의는 인간의 사고 중심을 인간이 차지한다. 인문주의는 인간을 발견한 시대이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인간을 강조한다. 따라서 르네상스에 조각과 그림에는 인간의 나체가 많다. 따라서 칼빈은 인문(인본)주의를 맹렬하게 공격한다. 즉 르네상스-휴머니즘은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 반면, 칼빈은 인간의 무능력, 추함, 교만, 위선을 강조한다. 이것은 21세기까지 계속되는 두 사상의 싸움이다. Humanism은 또한 그리스 철학을 부활시켰다. 우리가 소크라테스 복음이라고 하는 것, 즉 „인간은 선을 알기만 하면 선 자체를 위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18)“는 생각이 지성인들의 사이에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 특히 루터가 로마서 7장에서 발견한 복음, 즉 „죄에 빠져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과 극명하게 대조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는 에라스무스를 격렬하게 공격함으로써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를 확연하게 구분하였다. 피코의 „인간 존엄성에 대하여“에서 발췌 번역. „너는(아담) 모든 제한에서 벗어나서 너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너의 성품을 스스로 빚어 나가라. 나(하나님)는 네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모든 세상을 다 볼 수 있도록 너를 세상의 한복판에 세워놓았다. 네가 조각가처럼 너 자신을 네가 원하는 대로, 너 자신의 능력대로 형성할 수 있도록,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로도, 지상의 존재로도 짓지 않았다. 따라서 너는 짐승으로까지 타락할 수도 있고, 너의 의지에 따라, 위로는 신적인 존재로까지 거듭날 수가 있다“ I,2: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I,2,1 하나님 인식이란 하나님을 실제로 두려워하는 것이다. - 하나님 인식이란 단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 인식이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19)과 경건20)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경 없이도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은혜로운 아버지로 깨달을 수가 없다. 즉 하나님 인식은 두 가지21)가 있는데, 하나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인식이고, 다른 하나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 인식이다. 전자는 일반 계시의 범주에 속하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구속주 그리스도에 대한 특별계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룬다. -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를 무한한 권능으로 유지하시며, 지혜로 그것을 다스리시며, 자비로 참으시며, 보호하심으로 지켜주실뿐 아니라 지혜, 빛, 의, 권능, 공의, 참된 진리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원인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22)“ -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서 기대해야 하며, 그분에게서만 찾아야 하며 모든 것을 그분의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을 의식함23)으로써 우리는 경건심을 갖게 되고, 종교는 여기에서 싺튼다. - 경건심이란 사랑과 복합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 인간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으로 양육 받고 있다는 것과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만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모든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지 못한다면, 그는 결단코 하나님께 진정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자신을 넘겨드리지 못할 것이다24). I,2,2 하나님 인식은 사고 유희가 아니다 - 따라서 하나님 존재와 본질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연구하는 것은 사고 유희에 불과하다. -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분의 본성에 맞게 살 수 있는가이다. -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합당하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그분께만 모든 감사를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 인식이 왜 필요한가? 우리가 하나님 뜻에 맞게 살기위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잘 모르면 올바른 기도를 할 수도 없다) -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는 이유: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창조주의 마땅한 권리에 순응하여 그분의 명령에 복종을 해야 한다. 우리의 생명은 그분이 주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행실과 계획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의 법칙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완전히 타락한 것이다25)“ -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것을 알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매달리고, 신뢰와 확신을 하나님께 두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부패성이 인간의 지각을 가로막아서 하나님을 올바로 찾지 못하게 한다. - 경건한 마음은 어떤 신을 꿈꾸어서 만들어 내지 않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한 분이며 진정한 하나님께로만 돌린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 그리고 나타내시는 그대로 믿는 것에 만족한다26).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숭배한다. 그러나 단지 소수만이 하나님을 올바로 두려워한다. 도처에 허식적으로 예배가 드려지고 있으며 진실한 마음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드물다. - 정리: 하나님 인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뜻의 순종에 귀착해야 한다. 이것이 경건(두려움과 사랑)이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하여 자신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넘겨드려야 한다. I,3: 하나님에 대한 지식(하나님 인식)은 인간 안에 본성적으로 심겨져 있다. I,3,1 이러한 자연적 은사의 본질 - 인간 정신이 타고난 본능에 의해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심판 시에) 하나님을 몰랐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자신의 신성을 알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시듯이 이 깨달음을 항상 새롭게 해 주신다. 이것은 나중에 심판의 근거가 된다27).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종교의 씨앗 (semen religionis): 아무리 무지하고 야만적인 종족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종교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우상숭배가 이것을 증명한다. - 정리: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신존재증명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I,3,2 종교는 인간의 자의적인 발명품이 아니다 칼빈이 20세기에 기독교강요를 집필했다면 그는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루드비히 포이어바하나 칼 막스의 예를 들었을 것이다. 고대 로만 그레코 문화에서나 칼빈의 시대에도 매우 소수이지만 무신론자는 있었다. 에피쿠로스 학파도 칼 막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지배자들이 사람을 정부에 예속시키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이 없다면, 사람이 종교를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칼빈은 매우 현명한 반론을 제기한다. - 따라서 모든 인간은 어렴풋하게나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 이것의 증거로서 그는 양심을 든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양심은 항상 불안하다. 양심의 불안에서 잠시 놓이는 경우는 술에 취해서 잠이 들 경우인데, 그나마 꿈속에서 고통을 당한다. I,3,3 실제적인 무신론은 불가능하다 - 그러므로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간의 마음에 파괴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 디아고라스28)와 그의 동료들의 무신론: 그들은 인류가 수백 년간 믿어왔던 모든 것을 희롱하였다. - 칼빈의 반론: 그러나 그것은 단지 절망에서 나오는 쓰디쓴 웃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에 양심이라는 벌레가 매우 고통스럽게 파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 키케로의 낙관론: 세상은 발전하고 종교는 시간이 갈수록 완성된다. - 칼빈의 반론: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이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멸하고 하나님 경배를 부패시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 결과는 인간에게 신 의식이 점점 더 커진다. 따라서 신 의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필요가 없고 애써서 습득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 플라톤의 예: 영혼의 최고의 행복(summum animae bonum: 영혼의 최고선)은 하나님과 비슷해지는 것이라고 함. I,4: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지와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되고 부패하였다. (이전 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본성에 심겨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인간은 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가? 이 지식은 인간의 무지로 질식되고 부패함) I,4,1 미신 -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주셨다. -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경험이 증거한다(논리적인 증명이 필요 없다). - 이 씨앗을 간직하고 키우는 사람은 100명 중 1명이 될까 말까 하다. 그러나 이것을 열매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à 인간 모두가 멸망할 운명에 처해있다29). - 모든 불신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미신에 빠지는 사람.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 - 의도적이 아니라 무지로 말미암아 미신에 빠지는 사람은 죄가 없지 않은가? 그들이 눈이 먼 것은 교만한 허영과 완고함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그들도 죄가 있다. - 그들의 허영과 교만은 그들이 하나님을 더 이상 깊이 찾지 못하도록 한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영된 사고 유희에 빠진다. - 그래서 하나님이 자연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들이 오만하게 상상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낸다. - 따라서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도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30). - 롬1:22 „스스로 지혜있다하나 우준하게 되어“ à 자연계시의 한계. 인간은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결국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자연계시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불신자의 심판: 그들의 불신을 변명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어진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으로 스스로 하나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자가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더욱 경배하도록 한다. ·또 한 가지를 든다면,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약간이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서 국가의 법과 질서를 지켜서 인류가 쉽게 멸망하지 않도록. I,4,2 하나님에게서 의식적으로 돌아섬 -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이 말씀은 인간이 자연의 빛(자연계시)을 끄며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I,4,3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종교의 씨앗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신으로 빠지는데, I,4,1에서 미신으로 빠지는 경우와 I,4,2에서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는 두 가지 경우를 보았다. - 미신에 빠지는 경우는 자신이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경우인데,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미신을 정당화시키는가? - 대답: 자신의 신앙의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신다! à 지성이면 감천이다. -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이유: 진정한 신앙생활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계시되어 있는가? 말씀에, 그리고 율법에. 율법에 우리가 살아야 할 지침이 나타남31). - 종교적 열심의 문제를 주제로 토론해 볼 것32). - 락탄티우스33): 진리를 따르지 않는 종교는 올바른 종교가 아니다. I,4,4 위선 - 위선자의 정의: 하나님을 멀리하면서도 가까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à 그 결과는 넘치는 종교생활.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말씀을 매우 순종하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다34). - 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35). - 스타티우스36): 두려움은 세상에서 먼저 신들을 만들었다. -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벌하기 위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심판대가 사라지기를 갈망한다37). - 그들의 진퇴양난(어떻게 해서 위선이 생기는가?): ·심정적으로는 심판을 해야 하는 하나님과 싸운다. 즉 마음으로는 지옥이 없다고 한다. ·머리로서는 심판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심판을 두려워한다. à 그 결과 자신이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고자 열심히 교회생활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을 부패시키며,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저촉하게 된다38). - 이러한 사고는 필연적으로 위선39)을 낳는다: 겉으로는 종교인 생활을 하고 내부적으로는 성령의 훈육(Zucht)을 순종하지 않고 육의 음성에 따라 산다. 이러한 위선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도망하고 있으면서도(Sein),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Schein)40). -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전 생애에 걸쳐서 „늘“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거룩한 삶과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 그러나 위선자의 삶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하나님을 대담하게 반역하고, 헌금(열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한다. ·무가치한 의식들을 만들어내어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한다. - 마음에 새겨진 종교의 씨앗은 이러한 사람에게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그들이 잘 될 때에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떤다. ·그러나 절망에 빠지게 되면, 이 절망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하고,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된다. à 이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억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이 위선이다41). I,5: 우주 창조와 그 지속적인 통치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달된다. - 전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의 무지와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되고 부패되었다고 했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인간에게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I,5,1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자신을 증거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 - 자연계시의 위력: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42)) - 하나님은 a)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주었을뿐만 아니라 b)우주의 전 창조 속에 자신을 계시하셨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 세상의 정교한 질서는 우리에게는 거울과 같으며, 이 거울을 통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1): 천체는 모든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같다. 이 언어로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며,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임을 증거한다. à 따라서 아무도 자신은 하나님을 몰랐다고 주장할 수 없다. I,5,2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밝히 드러난다. - 과학을 탐구하면 할수록 하나님 지혜의 비밀이 더 드러난다. - 갈렌(BC2세기의 해부학자)이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탁월하게 조사하였다. à 칼빈의 학문에 대한 긍정이 여기에도 보인다: 신자는 열심히 과학을 탐구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한다. I,5,3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최상의 증거이다. - 한 옛 학자가 인간을 소우주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밝게 나타나서 하나님을 부인할 수가 없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저를 생각하시며“ (시8:4) - 바울은 장님도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각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내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깨닫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행17:27) - 하나님을 알기 위해 다른 것을 볼 필요도 없이 단지 자기 성찰만 하면 되는데, 이러한 시도조차도 안 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 - 사도 바울이 인용한 아라투스(Aratus)의 말: „우리가 그의 소생이다“(행17:28). 이렇게 이교의 시인들도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러한 탁월성을 부여했으므로 그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르네상스와 인본주의의 문제: 바로 이러한 인간의 탁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 그러나 그들은 칼빈이 앞에서 강조한 자기인식(죄)에는 도달하지 못함. 여기에 죄를 가볍게 보려는 그들의 의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가톨릭에서 인간을 지옥과 연옥의 교리를 통한 협박으로 인간의 양심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실제로 사람을 교회의 종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성인들이 고전을 연구하며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고자 한 시도는 이해할 만 하다 . I,5,4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인간이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을 대항한다 -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몸소 입고 있는 인간이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한다. - 이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일하고 계심을 깨닫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신성의 표시를 본인이 원하든 원치않든 간에 깨닫기 마련인데, 이것을 부인하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모든 것은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 마음속에 비치는 분명한 하나님 인식을 땅에 묻어버린다. - 이러한 인간의 탁월성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에 사용하는 사람(특히 철학자)을 비판함: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키는 스토아학파들: 범신론.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 학파 BC 300년, 제논. 전쟁으로 말미암아 폴리스 제도가 불안해질 때 나옴(알렉산더 대제). 범신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에테르(Aither)라고 하는 원불(Urfeuer)로 부터 나와서 생성됨(기독교와 같은 창조주가 없음. 유물론적 요소가 있다). 모든 물질(휠레)에 신적인 이성(Logos)이 들어감(beseelt). 따라서 신은 우주 밖에 초월해 있지 않고 사물에 내재하고 있다. 인과성, 운명, 섭리의 철학: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정확한 인과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따라서 운명을 받아들이고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럼에도 자유의지와 책임의 사상이 후세대에서 발전함. 그리고 윤리학도 있다: 인간은 정신을 통해 로고스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도를 닦는다.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훈련, 감정이 동요되지 않는 영혼의 평온을 통해 지혜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며 또한 이성적이고 신적인 세계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stoische Gelassenehit라는 말이 나옴. à 운명 사상과 윤리학은 서로 모순된다. 절대적인 운명 사상에는 선과 악의 구분이 필요가 없다. 세계 동포 사상. Cosmopolitan. 폴리스를 벗어나 전 세계인을 생각함.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회의주의자와 비슷한 시기에 에피쿠로스에 의해 시작됨. 이 세 학파의 공통점은 개인의 행복, 혹은 영혼의 안식(Seelenheil)을 갖는 것이다. 그리스어로는 오이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라고 함. 이 세 학파는 행복을 얻는 방식이 각기 다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 세상에서 이 기쁨(Lust)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함. 내세를 부정함. 죽음과 함께 영혼도 멸한다. 그러나 Lust 를 극대화하는 방법으로서 Hedonismus를 택하지 않음. 인간의 욕심의 충돌은 오히려 기쁨을 줄어들게 함. 영혼의 평안을 침해하는 모든 것을 피하거나 극복한다: 이러한 것은 정욕, 두려움, 고통 등에서 올 수 있다. 그들은 매일, 가능하면 매 순간을 즐기며 삶의 기쁨을 키우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즐거움을 방해하는 요소는 두려움인데, 그것은 신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따라서 그는 신이 없으므로 인간사에 간여하거나 인간에게 분노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당시 그리스 신의 문제). 칼빈이 열정적으로 고대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르네상스를 통해 고대 철학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은 대체로 기독교의 절대성을 비판하였다(Pico della Mirandola, Francois Rabelais…) I,5,5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동 - 인간에게는 탁월한 영혼의 능력이 있다(영혼의 신성): 추리력, 기억력, 발명능력… - 인간에게는 영혼불멸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창조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이 신적 존재이면서도 자신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 능력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데 어찌 심판자가 심판을 안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감시하시고 통치하지 않겠는가? 1)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모든 것을 창안해냈다고 생각하는 경우. 2) 하나님이 아닌 것을 어떠한 우주의 원리라고 주장하는 경우(스토아 비판):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비밀스러운 혼 주입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은 악하고 독신적이다. 이들은 다음의 버질의 시를 좋아한다: 최초에 한 영(Logos, Weltseele)이 있어 이것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먹인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beseelen). 이 영으로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이름다운 새들 그리고 빛나는 대양 밑의 생선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했다. à 스토아의 범신론이 어떻게 자연과 신을 동일시 하는가를 알 수 있다. I,5,6 창조주는 자신이 주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지닌 신적인 능력을 관찰할 때마다 한 분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만을 신뢰하며 그분을 경배하며 그분께 기도하도록 만물을 이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왜냐하면 우리 안에 신성의 흔적인 놀랄만한 은사를 향유하면서도, 은혜로 이 모든 것을 주신 창조주를 잊는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거대한 우주를 지탱하시며, 천둥을 일으켜 하늘을 뒤흔들어 놓으시며, 번개로 모든 것을 소진하시며, 불꽃으로 대기를 태우신다. - 따라서 이것은 신자나 불신자가 모두 하나님의 윤곽을 깨닫게 하며, 그분의 권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성을 생각하도록 한다. I,5,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 지금까지는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은 인류를 다스릴 때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à 섭리(I,16-18에서 섭리론을 자세히 다룬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방법을 통하여 인자와 은혜를 베푸신다. -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를 두신다. 하나님은 매일 분명한 표적을 통해서 경건한 자에게는 자비하심을, 불경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느끼도록 하신다. 그들의 죄악을 명백하게 처벌하신다. - 또한 경건한 자에 대해서는 „자신이 무죄자의 보호자요 변호자이시며, 선한 사람을 축복하셔서 그들의 생활이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궁핍함을 도우시며…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 그러면 사악한 자가 벌을 받지 않고 경건한 자가 불행을 당하고 핍박까지 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형벌을 연기하기 때문이다. (의인이 불행을 당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칼빈이 여기에서 언급을 하지 않는다) à 악인을 심판하시고 선한 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변함이 없다. I,5,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 생활을 지배한다 - 하나님은 인간사가 잘 돌아가도록 배려를 하신다.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는 바른길로 인도하시며, 궁핍하고 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 또한 악한 자들을 벌하신다. - 세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표시이다. 특히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준다. 경건한 자들은 여기에서 기뻐할 수 있는 근거를 알게되고, 불경한 자들은 입을 다물게 된다. 인간은 극장(Theatrum)에 앉아서 하나님이 펼치시는 파노라마를 구경하는 자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보고 믿음으로 들어오는 자는 거의 없다. - 하나님은 불경한 자들을 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난다. -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로 모든 것을 최선으로 이끄시며 모든 것을 최상으로 다스리신다43). I,5,9 우리는 하나님을 사변을 통하여 찾을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을 연구해야 한다. - 하나님을 아는 데에서 생각의 유희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에 대해 고찰한 것은 비록 적은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나 뚜렷한 것이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자비하심을 쉽게 알 수 있다. -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받아들여서 우리 안에 머무르고 열매를 맺어야 하며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권능을 통해서 계시하시며, 우리는 그 권능을 우리 안에서 느끼며 그분의 선물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 한층 더 깊은 감동으로 들어가야 한다. -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자처럼 신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사변으로 기울어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에 눈을 돌려야 한다. - 어거스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와지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주시해야 한다. à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무리 연구를 해 보아도 이것은 공허한 사변으로 끝난다. 이것을 칸트가 밝혀냄: 하나님의 존재를 연구하는 것은 순수이성의 영역 밖이다. 그러나 칸트는 성경의 계시를 부인함. 기독교는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다. 칼빈은 6장부터 이것을 밝힘. I,5,10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자연과 인간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자극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각성시켜주어야 한다. -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자비와 엄격함은 단지 서곡에 불과하며, 이것은 내세에서 완성된다. 경건한 자가 능욕을 당하고 악한 자가 행복하게 사는 경우는 너무도 많다. - 어거스틴: „만약 공개적으로 형벌이 현재 모든 죄에 대하여 가해진다고 하면, 최후 심판에 남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신국론I,8) 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 현세에서도 상을 주시고 벌을 가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죄과에 대해 공정하게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므로, 내세에서는 반드시 이것을 하신다. - 모든 하나님의 작품에서 마치 그림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이 뚜렷하게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나가고 진정하고 완전한 행복을 찾도록 초대되고 자극된다. 즉 이러한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갖는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셨으며, 우리에게 그분의 의와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증명하셨는가를 깊이 생각을 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à 자연계시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를 더 깊이 탐구해서 하나님을 알아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I,5,11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신과 영원한 왕국을 매우 명백하게 보여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러한 분명한 증거에 대하여 항상 눈이 어두워서, 이것들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우주의 아름다운 구조와 질서를 보면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위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맹목적인 운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경건하고 가장 신중한 플라톤까지도 (신적인 이데아의 영향이 미치는) 우주가 둥근 구형이라는 생각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렇게 탁월하고,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지도적인 사람도 방황하고 비틀거리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은 어떻겠는가?44) I,5,1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미신과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 - 따라서 온 세상을 덮고 가득 채우는 오류의 진창이 여기에서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해력은 미궁과 같아서 국민마다 나름대로의 오류에 빠지고, 각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우상을 만들었다. 무지와 흑암에다가 뻔뻔함과 경솔함이 결합하여 하나님 대신에 각기 우상이나 유령을 만들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여러 철학자의 문제: 스토아, 애굽의 신비주의 신학, 에피쿠로스 학파. - 에피쿠로스 학파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유: 이들은 가장 현명한 사람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의견의 불일치와 심지어는 천박하고 어리석은 가르침 때문이라고 보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신을 탐구하기 위해 사람은 공허하고 어리석게 자신을 괴롭힌다고 주저없이 추론하였다. … 왜냐하면 불확실한 신들을 날조하여 끝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I,5,13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 순수한 하나님 경배(religio)를 날조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자신의 생각을 좇는 자는 모두 필연적으로 여기에 빠지게 된다 à 모든 사람이 우상 숭배자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사람을 하나님을 배신한 자라고 선언하신다. - 바울은 에베소 사람이 복음을 통해 참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도 없이“ 지내던 자였다고 한다(엡2:12-13) - 소크라테스까지도 사람은 누구나 조상으로부터 받은 의식과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의 관습에 따라 신들에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명령한 아폴로의 신탁을 예찬하였다고 한다45). I,5,14 인간은 스스로 올바른 하나님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우주 전체가 등불을 켜서 창조주를 환하게 비추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11:3):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은, 이렇게 보이는 것들에 의해 잘 계시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내적인 계시를 통해 조명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à 믿음은 인식의 수단이다!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는 길은 믿음뿐이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조명. - 따라서 자연계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게 하는 역할을 한다. I,5,15 우리의 무능이 문제이다 - 우리가 본래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할 능력이 없을지라도 이 무능력은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변명할 수가 없다. - 왜냐하면 우리 양심이 항상 우리의 (하나님을 찾는 데에서의) 게으름과 배은망덕을 고소하기 때문이다. - 3가지의 변명과 그 변명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 ·우리는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 말 못하는 피조물이 매우 큰 목소리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볼 눈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너무 분명하게 보여주시므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정신 박약이다: 이성이 없는 모든 피조물이 우리를 가르쳤다고 주장할 것이다. - 그에게 심겨진 하나님 지식의 씨앗이 열매맺지 못하고 곧 죽는 것은 인간의 잘못에 기인한다. -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보여주는 이러한 증거만으로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관찰을 통해 하나님 지식을 얻자마자 진정한 하나님을 떠나고 머리로 지어낸 꿈과 환상을 하나님 자리에 세우며,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다른 곳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 정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조(피조물)에 계시되었다. 인간은 자신을 아는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인간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계속 순환되면서 인식이 깊어진다. 인간을 안다는 말은 르네상스의 인간관과는 달리 인간의 비참함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계시로는 하나님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은 특별계시인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à 20세기의 Emil Brunner와 Karl Barth의 논쟁.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가능한가? Karl Rahner.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 스토아 철학. 범신론: 만물은 신의 연장이다. 인격적인 신을 부정함. 오늘날의 보편적인 신관. 종교비판이 불가능한 이유는?: semen religionis때문에. 19세기의 종교비판(Religionskritik): Ludwig Feuerbach, Bruno Bauer, Karl Marx… 칼빈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스도보다 하나님이 더 강조된 인상. 따라서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바라보고 경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김. 과학의 발전과 같은 적극적인 세계관.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한다. 루터에게는 죄인의 칭의가 중요하다. 이로써 그는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놓았다. [성경의 권위] 본 단락을 공부한 후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성서비평이란 왜 불가능한 것인가를 논증할 수 있어야 한다. 좀 더 자세히 공부를 원하는 사람은 필자의 번역, 에타 린네만의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와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구약 학자나 신약 학자에게 통용되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성경에 있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에타 린네만: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129쪽. 부흥과 개혁사. 제6장: 창조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의 인도와 가르침이 필요하다. I,6,1 하나님께서 실제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뿐이다 - 하늘에서나 땅에서 모든 사람의 눈에 선명하게 비취는 광채는, 인간으로 하여금 배은망덕의 대한 일체의 변명을 못하게 한다. 모든 사람을 같은 죄책 아래 두시기 위해, 피조물에 자신의 임재를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인간의 무능력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선포하시고자 자신의 말씀의 빛을 주셨다. à 자연계시의 문제는 구속주를 뚜렷하게 계시하지 못한다. - 그런데 이 특권을 하나님께서 더 가깝고 친밀한 교제를 위해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이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울타리(말씀의 계시) 안에 넣으시고 보호를 하셨다. - 노인에게 아무리 좋은 책을 주어도 읽지 못하기 때문에(자연계시를 통하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 읽을 수 있도록 안경을 쓰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안경(성경)을 주신 것이다 . -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구속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특별한 계시는 필요불가결하다. I,6,2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셨는데, 이들은 이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신하였고, 가르침이 그들 마음속에 새겨졌다. - 이 가르침이 자손 대대로 남겨질 수 있게 되고자 공적인 기록이 되게 하셨다: 모세가 족장의 이야기와 율법을 기록함. 그래서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후에 선지자들이 율법을 해석하도록 하셨다. (선지자들의 임무는 예언을 하는 것보다는, 율법을 해석하는 것이다!) -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은 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의 방법을 가르치는 데에 주력하셨다.(율법 수여와 율법의 적용) - 성경의 두 종류의 가르침.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로서 믿음과 회개를 가르친다 à 성경의 주된 가르침.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과 거짓된 일군의 우상들이 혼동되지 않도록, 명백한 특징과 표시로써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시고 계속해서 세상을 통치하시는지를 잘 묘사한다.(칼빈에게 중요한 점) à 루터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내어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세웠다면, 칼빈은 중심이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졌다. 루터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이고, 칼빈에게는 하나님 영광이 중신이다. 따라서 개혁신학은 신론이 중심이 됨. -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속에서 찬란한 사역을 보지만, 더 깊은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인간이 참된 종교의 빛을 받으려면 마땅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가르침으로 시작을 해야 하며,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아무도 참되고 구원을 주는 교리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없다 à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단순히 느끼는 것과, 직접적이고 인격적으로 말씀을 듣는 것은 매우 큰 차이이다. 후자는 매우 구체적이다. -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에 대해 증거하시고자 하는 것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진정한 인식(cognitio)의 시작이 된다. à 순종이 인식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다. 칼빈은 말씀에의 순종을 강조함. I,6,3 성경을 떠나면 오류에 빠진다 - 인간은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는 습성과, 쉽게 오류에 빠지는 경향 때문에 문자로 된 말씀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가르치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말씀을 사용하셨다.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충분한 효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말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빠르게 전진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목적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6:16) 하나님의 광채는, 우리가 말씀의 끈으로 인도받지 못하면 우리는 미궁에서 허우적거린다. -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말씀)이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오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근절되지 않는다. à 인간은 든든한 말씀의 끈으로 인도를 받아야 하며, 말씀은 머리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와야 한다. I,6,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할 수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7-8). 자연계시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의 특별한 학교라는 것을 말하고 계신다. à 여기에서 율법, 교훈, 계명이라는 말로 율법이 상당히 강조됨. 율법이 왜 중요한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이 율법안에 계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자신이 아무리 하나님을 많이 섬겼다고 생각해도 이것은 허사이다. 창조의 계시는 하나님의 율법을 정확하게 계시할 수 없으므로 꼭 성경이 필요하다. 교회 밖(타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인간은 타종교의 신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선행이나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선행과 사랑을 하는 방식도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규정을 해 놓으셨다. 따라서 성경을 모르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 인간의 마음은 연약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께로 나올 수가 없다. 제7장: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증거에 의거한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모독이다. (전 장에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특별계시인 성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면 성경 66권은 누가 결정을 하였는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I,7,1 성경의 권위는 교회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성경이 먼저인가 교회가 먼저인가의 문제. 성경은 누가 결정했나? 1. „교회가 결정했다“: 이것은 가톨릭의 주장. 정경 66권 외에도 다수의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킴. 성경 외에도 전통을 성경만큼 중요시 한다. 2. 하나님이 주신 것을 교회가 확정했다: 신교의 주장. - 교회가 성경을 결정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칼빈의 반증. ·하나님의 영원하고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46). ·영생에 대한 일체의 약속(성경)이 사람의 판단으로 결정될 수 없고, 또 그 판단에 의존할 수도 없다. ·우리의 신앙이 그런 불완전한 인간의 권위에 의존할 수 없다. (실제로 외경의 내용은 정경보다 훨씬 권위가 떨어진다) I,7,2 교회는 성경을 근거로 설립되었다. - 사도 바울: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2:20) à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이므로,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 그들의 가르침이 권위가 있었다. 이 가르침은 성경이 됨.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도 형성되었다. I,7,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으로 내세울 수 없다. - 이들은 일반적으로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으로 세운다: „나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감동됨이 없이는 복음을 믿을 수 없다47)“. 이 말은 어거스틴은 마니교도들에게 한 것으로서, 사람이 전후 문맥을 보지 않고 이 말을 기만적으로 인용을 한다. - 어거스틴 말의 의미: ·교회의 권위는 출발점의 역할을 한다: 내가 믿음에 대해 전혀 모를 때는 교회의 권위를 인정해야만 복음을 확실한 진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스도를 전혀 모를 때에는 먼저 사람의 말을 들어야하지 않는가? ·따라서 어거스틴은 여기에서 경건한 자의 신앙이나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교회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증언이 불신자들을 이러한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복음의 확실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교회의 동의나 판단에 맡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말미암아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게 되고,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는 복음의 신앙을 준비하는 인도자가 된다. à 교회가 성경을 정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회를 규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교회가 성경대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가 있으며 또한 감시를 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계속 개혁해나가는 교회이다“ I,7,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 강하다 - 3가지 중요한점: ·우리는 모든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면, 성경의 가르침을 믿을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성경에서 인격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에서 최고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의 비밀스러운 증거를 통하여à 성령의 내적 증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I,5.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하여 감동과 권유를 받아 성경을 아주 고상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데까지 이를 수가 있다(딤전3:15). 그리고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의 신령함, 교훈의 효험, 문체의 웅장함, 모든 부분의 내용상의 일치성, 내용 전체의 목표(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 인간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을 밝혀 주는 충분한 내용 전개, 이 외에도 많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점들 그리고 성경의 전체적인 완전성 등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입증해 주는 논증들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무오한 진리요,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이해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이다(요일2:20,27, 요16:13-14, 고전2:10-12, 사59:21). - 그렇다면 객관적인 증거는 없는가? ·아무리 현명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이 파렴치하게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한, 성경의 교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명백한 표시를 하게 된다. à 이것은 수없이 많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리고 곧 성경의 모든 책들이 모든 다른 자료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이 맑은 눈과 건전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높은 위엄이 즉시 우리의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가 뻔뻔스럽게 저항을 못하게 하고 순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나 논쟁을 통해 성경이 믿을만한 책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어리석다. - 불신자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가르쳤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가 모든 증명을 훨씬 능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만이 자신의 말씀 안에서 자신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해 인 쳐지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 (Erleuchtung)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의심을 제거할 수 없다. à 기독교 변증의 경계선: 기독교 변증은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를 믿도록 설복하는 시도가 아니다. 믿음은 성령님의 일이다. 변증은 단지 기독교의 믿음이 불합리한 것이 아니며, 높은 정신과 윤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지나친 변증의 시도는 성령의 역사를 가릴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의 문제점은? - 성경에는 신화적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불트만, 역사비평신학).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기사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그 기사를 제거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1) 가나의 혼인 잔치는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 신화에서 빌려온 것이다. 2) 창조 이야기는 고대 바빌론 신화에서 차용한 것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부정합. -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다(신정통주의 – 칼 바르트) I,7,5 성경의 자증(自證)성 - 내적으로 성령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자는 성경(의 진정성)을 고수한다.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한다. 따라서 성경을 증거와 (불완전한) 이성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또한 성경은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통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성경을 확증시켜야만 성경이 우리를 올바로, 그리고 진지하게 감동시킨다. 이것은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게 한다. à 성경 자체의 존엄성(객관성)과 성령의 증거(주관성), 이 두 가지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믿게 한다. - 따라서 성경은 비록 사람이 기록을 하였지만, 성경이 하나님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단과 생각은 이 사실에 종속시켜야 한다. - 우리는 말씀이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므로, 그리고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엄이 살아서 역사 하시므로, 이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힘이 우리의 지식과 의지를 동원하여 말씀의 순종으로 불을 지피게 하며, 이 능력은 인간의 모든 의지와 지식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강하다. à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성경에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설복하시고 역사 하시는 힘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을 수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야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진정으로 깨닫고 회개하여 삶을 바꾸어 나간다. 성경을 의심의 눈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처방할 약이 없다. -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인 치시는 신앙만이 올바른 신앙이다(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게 될 것이다“(사54:13). 이것은 회복된 교회의 모든 자녀에게 주신 약속이다. 하나님은 구별해 낸 선민에게만 이러한 특권을 주신다. - 우리가 세상에 신자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그 반대로 „하나님의 비밀은 그것이 주어진 자 외에는 아무도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마13:11참조)는 말씀에 유념하자. à 이러한 생각들이 예정론과 연결된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됨. 따라서 신자는 무리해서 성경을 변증할 필요가 없다. 억지로 사람을 믿게 할 필요도 없고, 심리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성경을 변증하는 자는 말씀 자체의 능력을 믿고 말씀으로 변증할 것. 세속 사람이 비웃은 것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제8장: 성경의 신빙성을 확증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성적인 증거가 있다. (성경의 신빙성에 대해서 우리는 단지 성령의 증거하는 주관성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성경 자체의 존엄성도 중요하며, 인간이 만든 문서 중에서 성경과 비교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I,8,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48) - 성경에 대한 이러한 확신이 인간의 모든 판단보다 높고 강력하지 않은 한, 성경의 권위를 논증으로 수호한다든가, 교회의 확신에서 찾는다든가(가톨릭), 혹은 어떤 다른 방편으로 이 권위를 보장시키려는 시도는 무익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초가 놓여있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는 항상 불확실한 체 남아있을 것이다. -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설복당하여 읽으면 깊은 비밀이 열리며,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무한히 감탄하게 된다. ·우리가 성경에서 다른 책들과는 다른 독특성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존엄성을 받아들이며 읽는다면, 우리 마음에서 확신하지 못하던 구절들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연구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게 될 것이다. o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질서 있고 아름답게 서술되어 있는지. o가르침이 인간적인 것이 전혀 없고 그 기원이 항상 하나님이라는 것. o성경의 모든 부분이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있다. o그 외에도 많다. - 성경의 특징은 표현된 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내용의 숭고함에 있다. ·천국의 숭고한 비밀이 인간의 비천한 언어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만약 성경이 놀라운 웅변으로 장식되어 있다면, 불신자들은 성경의 능력은 단지 웅변의 힘에 있다고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세련되지 못하고 거친 표현의 단순성이 변론가들의 모든 기교보다도 더 큰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성경의 진리의 힘이 너무 강력하여 아름다운 수식적 표현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한 말: „신앙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고전2:5)에 있다. 그의 설교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2:4) 한 것이다. ·진리는 외부의 도움49)에 의존하지 않고, 진리는 스스로 자증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 - 성경 자체의 자증 능력에 대해서 ·데모스테네스, 키케로, 소크라테스, 플라톤등과 같은 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그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며 기쁘게하고, 감동을 준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당신이 원하든 원치않든 간에, 내용이 살아있고 당신의 마음속 깊이 뚫고 들어오며, 우리의 골수에 자리를 잡기 때문에, 조금 전에 읽은 이 변론가나 철학자들의 능력이 성경을 통해 받은 깊은 인상들에 의해 거의 사라진다50). ·즉,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말씀은 인간의 모든 재능을 능가한다. I,8,2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니라 내용이다 - 성경의 다양한 표현 방식 ·선지자들 중 어떤 이들의 문체는 매우 섬세하고 우아하며 화려하기까지 해서, 세속적인 저자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그러나 목자 아모스나 예레미아, 스가랴의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는 조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먼저 말했던 성령의 위엄을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느낄 수 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훌륭한 수사법도 이용을 하시며, 시골적인 목자의 표현도 이용하신다. - 성경의 내용에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가르침들로 가득차 있다. - 이것은 선지서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누구 하나라도 인간의 지혜를 훨씬 넘어서지 않는 사람이 없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맛이 없다고(무미건조하다고) 하는 사람은 맛을 모르는 사람이다. à 성경을 읽으며 이러한 것을 수없이 체험해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수없이 감탄하고,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심을 확고하게 느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흘러나와야 한다. I,8,3 성경은 매우 오래전에 쓰였다 -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교부들도 많이 다룸51). - 다른 모든 저작자들보다 훨씬 앞선 모세는 자신의 가르침(창세기)은 긴 전승을 통해 받은 것이므로 성경이 나이에서 다른 책보다 훨씬 뛰어나다. I,8,4 모세의 예가 보여주는 성경의 진실성 - 칼빈이 제시한 4가지 증거: ·칼빈은 요세푸스의 „아피온에게 대항하여“(Against Apion)를 언급함: 요세푸스도 이 책에서 모세 율법은 이교의 법률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며, 더 공의롭고 인도적이라고 한다52). 그리고 오래전부터 여러 백성 사이에서 매우 유명했다고 한다. ·모세가 자기 조상 레위의 악행을 기술함으로써 자기 지파에 영원한 오점을 남겼다53): 창49:5-6.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조상이 전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였고, 자기 지파 사람으로부터 심한 미움을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자기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사악한 불평을 기록하였다(민12:1). 그는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었으면서도 자기의 아들을 제사장 자리에 앉히지 않고 낮은 자리에 떨어뜨림. (I,8,5 – I,8,10에서는 이적과 예언에 대한 반대설을 논박함) I,8,5 이적은 하나님의 종(보내심을 받은 자)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 모세가 언급하는 많은 찬란한 이적들은, 단지 그가 공포한 율법과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다54). - 모세가 체험한 기적 몇 가지만 들면: ·율법을 선포할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출34:29) ·사방에 번갯불이 번쩍이며 우뢰와 여러 가지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고 나팔소리가 들려오되 사람이 부는 나팔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출19:16) ·고라, 다단, 아비람과 그 악당 전체의 무서운 파멸로써 모세의 권위가 기적적으로 변호되었다는 것(민16:24) ·그가 막대기로 물을 치자 당장에 물이 솟았다는 것(민20:10-11) ·그가 기도를 하자 만나가 내렸다는 것(민11:9) - 모세는 이러한 많은 기적을 통해 백성에게 그의 가르침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확증하였다. I,8,6 모세의 이적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55) - 기적의 보도에는 백성의 과실이 동시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만약 백성이 기적을 체험하여 겸손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모세의 보도를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 만나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많은 백성을 장기간동안 먹일 수가 없었다. - 모세를 제거하기 위해 온 백성이 거만하고 무례하게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소수의 무리가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도우셨다. 모세가 속임수로 그들의 횡포를 피한 것은 아니었다. à 이적이 없었더라면 그 많은 사람, 더욱이 불평을 잘하는 사람을 오랫동안 광야에서 먹일 수도 없었고, 인도할 수도 없었다. I,8,7 인간의 모든 예견에 반대해서 성취된 예언들 -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나온다는 예언: ·야곱이 유다 지파의 최 우위를 예언함. ·이것을 전승받아서 모세가 400-500년 후에 모세 오경에 기록함. ·그 후 또 400-500년 후에 이 예언이 이루어짐56). - 이방인도 하나님의 언약 속으로 들어온다는 예언57)(창49:10). 이 예언은 그 후 약 2000년이 지난 후에야 성취가 되었다. I,8,8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말씀을 확증하셨다 - 이사야: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갈대아와 동맹국으로서 안전하고 평화로울 때에 유다는 파괴되고 갈대아의 포로가 된다고 예언함. ·그는 해방에 대해서도 예언함. 고레스라는 이름을 들면서(사45:1) 100년 후의 일을 예언함58). 그는 고레스가 유대인 포로를 귀환시킨다고 했다. - 예레미아: 백성이 잡혀가기 전에, 포로 기간이 70년이라는 것과, 그들의 해방과 귀환에 대해서도 예언함(렘25:11-12; 29:10) - 다니엘: 600년 이후에 있을 일을 예언함. I,8,9 율법의 전승은 믿을 만하다 - 당시의 성서비평자들: ·자신의 날카로움을 보이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공격하면서 떠들어대는 바보들이 있다. ·모세나 예언자들의 이름으로 읽히고 있는 책들이, 진짜 그들에 의해 쓰였는지를 누가 증명할 수 있는가 한다. ·더 나아가서는 모세가 실존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을 한다59). - 칼빈의 대답: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가 진짜 살았는지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은 그러한 미친 사람을 채찍이나 회초리로 때려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적적으로 보존되었다. ·율법서가 제사장의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잠시 묻혀 있었으나, 경건한 왕 요시아가 그것을 다시 발견한 후부터는 대대로 계승되어 왔다60)(왕하22:8; 대하34:15). ·요시아가 이것을 공포할 때, 율법이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일반 대중이 널리 알고 있었고, 또 당시에 유명하여 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역사비평은 합리주의 영향을 받아서 18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칼쉬타트는 1520년 최초로 모세 오경, 사무엘서에 대해 저자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문학비평을 시작함61). 그는 에스라서, 다니엘서의 부분도 문제 삼음. 그 후 마시우스가 1574에 여호수아 주석에서 처음으로 편집이라는 말을 사용함. 그러나 본격적인 비판은 18세기에 시작되었다. 역사비평의 아버지는 Semler(1725-1791)이다. 칼빈은 칼쉬타트의 논문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당시까지는 성서비판자들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이들을 경계하고 비판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성서비판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I,8,10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이적적으로 보존하셨다 - 구약이 잘 보존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심. - 안티오쿠스62)가 모든 책을 불태우라고 명령했음에도(마카비전서 1:56-57) 불구하고 박해가 수그러들자 즉시 그 책들이 나타남. 하나님께서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폭군 하에서도 성경을 건지심. - 또한 율법서와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의 교리, 곧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오시리라고 하신 그 교리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최대의 적인 유대인들을 통해서 보존하셨다. 그들은 자신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을 우리가 읽도록 마련해 주었다. I,8,11 신약 성경의 내적인 힘 - 세 사람의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단순하고 평범한 문체로 서술하였다. - 거만한 사람은 가르침의 중심에 관심이 없으므로 이 단순함을 경멸한다. 이 사실을 보더라도 복음서 기자는 하늘의 비밀을 이야기하며, 이것은 모든 이성을 초월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진정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1장을 읽기만 해도 부끄러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세 복음서의 중심부분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는다면(그들은 매우 놀랄 것이다)! - 요한복음… - 바울과 베드로… - 마태… - 베드로와 요한은 어부 출신이며 무식한 사람이었고, 그들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정도로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니었다. - 이 개(犬)들이 사도들에게 성령께서 임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불신하도록 내버려두자. 그러나 위와 같은 사실은, 사람 사이에서 전에는 무시당하던 사람이, 갑자기 하늘의 비밀에 대해 그렇게 훌륭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성령께 배웠다는 사실을 큰 소리로 증거하고 있다. I,8,12 성경은 항상 모든 반발을 이겨내었다 - 교회마다 일치된 성경의 가르침이 있다: 성경이 공포된 이후 그 많은 백성이 장구한 세월을 걸쳐서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을 해왔다. - 성경을 없애려는 노력을 이겨왔다. ·사단과 온 세상이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성경을 없애고 인간의 기억에서 사라지기를 시도했으나, 성경은 종려나무처럼 승리하였다. ·거의 모든 궤변학자, 능력있는 변론가들은 이러한 일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 이렇게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성경에 저항하고 성경을 공격했음에도 아직까지 건재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 서로 공통점이 전혀 없는 지구상의 여러 국민들이 (성경을 통하여) 서로 거룩하게 연대하며, 다른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이렇게 일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몹시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I,8,13 그러나 진정한 증거는 성령의 증거이다 - 순교자의 피도 성경의 권위를 증거한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성도들의 피로 확증되고 증언된 그 가르침을 우리는 어떠한 확신을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순교자들은 일단 그 가르침을 받아들인 후에 (그 가르침을 부인하지 않고 고백하며) 주저하지 않고, 용감하고 대담하게, 아니 큰 기쁨으로써 죽음을 맞이하였다. ·우리에게 이렇게 분명한 보증을 통해 전해진 것을 우리는 분명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성경이 이렇게 많은 증인들의 피로 인 쳐졌다는 것은 평범하고 단순한 증거가 아니다. 특히, 가끔 광신자가 하듯이 광신적인 열심으로서가 아니라, 확고하고 끈기가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열심을 가지고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를 당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 성령의 증거: ·지금까지 열거한 모든 증명은 성령의 증거에 미치지 못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권능과 신성을 성경 안에 계시하시지 않으면, 앞에 열거한 모든 증거가 성경을 믿게 하는 데에 이바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신뢰가 성령의 내적 증거에 근거할 때만 비로소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지식에 도달하게 한다.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내적 증거를 가질 때만이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증명을 필요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명하고자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이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지적한바, 경건과 영혼의 평안이 선행되어야 인간은 이러한 것을 이해할 수가 있다고 말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63). 제9장: 성경을 무시하고 단지 직접적인 계시에 의존하는 열광주의자들은 경건의 모든 기초를 파괴한다. [성경의 적은 교회 내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비평학은 교회 내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무서운 적은 열광주의자(은사주의자)들이다. 오늘날의 순복음 교회] I,9,1 열광주의자들은 부당하게도 성령을 그들의 증거로 내세운다 - 열광주의자들 – 성경 대신에 성령!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류를 넘어서 광란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다. ·최근에 무모한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교만하게도 성령충만한 교사로 자처한다. ·그들은 성경 읽기를 무시하고, 그들에 의하면, 말씀을 따르는 자들은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조롱한다64). - 칼빈의 반론 ·성경의 가르침을 유치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멸시할 정도로 그들은 높은 자리에까지 올려놓은 그 영은 도대체 어떤 영인가? ·만약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면 그것은 가소로운 눈속임65)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다른 영으로부터 조명되지 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을 가르친 이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라는 것을 가르친 적이 없고,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저술한 성경에서 보듯이 말씀을 크게 경외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 = 성령 = 성경. 이들은 그리스도와 성령, 말씀과 성령을 분리시킴) ·사59:21 „…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사야는 성령에 의해서와 같이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선지자가 떨어질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을 이 악한자들은 부끄러운 가증함으로 분리시켜 놓은 것이다. (성령, 하나님 말씀, 성경, 그리스도의 영은 서로 일치한다) ·바울은 삼층천에 다녀온 후(고후12:266))에도 율법과 선지자들을 연구하기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디모데에게도 성경 읽는 것에 착념하도록 권고하였다(딤후3:1667)) ·그들은 성령이 시대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악마적인 광란이다. ·결국 그들은 주님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이 아닌 다른 영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I,9,2 성령은 성경과 일치할 때(만) 인정된다 - 만약 어떤 영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우리에게 다른 가르침을 강요하면, 이 영은 마땅히 사기와 거짓된 것으로 의심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악마도 빛의 천사의 얼굴로 나타날 수 있다(고후 11:14). -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게 만물이 예속되어 있는바, 그 영이 성경에 예속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68). 그러나 사단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자신을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신다69).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다. 그래서 그분은 변화하실 수도, 자신과 다를 수도 없다. 자신을 성경에서 나타나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그렇게 머무르실 것이다. I,9,3 말씀과 성경은 나뉠 수 없다70) - 열광주의자의 공격: 당신들은 죽이는 문자를 섬긴다(고후3:671)) (열광주의자, 은사주의자들은 대부분 반율법주의자들이다. 반율법주의자들이란, 고후3:6과 같은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삶의 지침으로 삼지 않는 자들을 말한다. 많은 한국 교인들이 실천적 반율법주의자에 속한다) - 칼빈의 반론: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거짓 교사와 싸우는바, 이들은 율법을 그리스도 없이 가르치며, 이로써 신자들에게 새 언약의 축복을 가로막고 있다.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대로 자신의 율법을 신자들 속에 두시며 그들의 마음에 새기신다고 하셨다(렘31:33). 율법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분리시키고 단지 귀로만 듣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곳에서는, 물론 문자는 죽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은 그것을 듣는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율법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새겨지면, 또한 그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면, 그 율법은 „영혼을 변화시키고 그 우준한 자를 지혜롭게 하는“(시19:7) 생명의 말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같은 구절에서 자신의 설교를 영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3:8). 이 말의 의미는,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자신의 진리와 굳게 결속되어 있으므로, 사람이 자신의 말을 경외심과 존경심으로 영접할 때에만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말씀 자체는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확증되지 않으면, 우리 안에서 확신을 주지 못한다72)는 나의 앞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 말씀의 확실성과 자신 영의 확실성을 상호 결합시키셨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성령께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오실 때 비로소 우리는 마음속에 말씀과 확고하게 결합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성령님을 그의 형상에서, 즉 말씀에서 인식할 때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영접한다. -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모두 진리의 빛을 잃게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영의 조명을 나누어주시는 기관(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임함)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도들 안에 거하셨고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그 영 외에는 다른 영을 알지 못하며, 그 영은 그들을 끊임없이 말씀을 듣도록 부르시고 계신다. [우상숭배] 신론의 중심인 삼위일체, 창조와 섭리에 대한 교리는 13장부터 시작하는데, 10-12장은 이 가르침을 준비하고 있다. 제10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참 하나님을 모든 이방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73). I,10,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교리 - 지금까지 배운 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와 만물에 명백하게 나타나지만(자연계시), 우리에게는 그의 말씀에서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계시된다는 것이다. - 앞으로 우리가 연구할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에서 계시한 것(자연계시)과 똑같이 성경에서도 그대로 계시하셨는가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속주, 혹은 중보자로서 계시하신 것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창조주로 계시한 것만 먼저 살핀다. -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을 어떻게 다스리시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74). à 창조하신 은혜로운 성품과 다스리시는 은혜로운 성품이 일치하는가이다. I,10,2 성경에 나타난(특별계시)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에 나타난(자연계시)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한다 -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의 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75)“ 출34:6-7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하나님의 (형이상학적인)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76),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으로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 인식이 살아있는 경험으로 나타나며, 과장되고 빈 사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진리와 같은 것이다. 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러한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사는 것을 말한다. -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이와 똑같이 표현했다. 시편 145편을 읽어보라. 특히 5절: „주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의 기이한 일들을 나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여기에 자연계시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 예레미아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위와 같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의미는 같다.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9:23-24). 이 세 가지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다: ·자비하심: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달려있다. ·심판: 모든 행악자에게 그의 삶에서도, 그리고 죽어서도 심판이 행하여진다. ·의: 하나님의 의로서 신자를 보존하시며 자애로우심으로 축복하신다. à 하나님의 다른 성품도 이러한 3가지 성품에 포함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시므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심판을 하시고 의롭게 다스리신다. -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뚜렷하게 흔적을 남기신 것 같이,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식도 같은 목적을 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고, 다음에 하나님을 신뢰하게 한다. 또한,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완전무결한 삶과 거짓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동시에 그분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게한다77). I,10,3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다. 이것은 이교들에게도 계시되어 있다. - 성경은 우리를 단 한 분인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도하고자, 모든 이방의 신들을 배척하였다. -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에서나 알려졌으며 경배를 받아왔으나,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진정한 종교는 날조되어서 수많은 신들이 경배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유일한 신에게 만족하는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말을 단수로 사용하였다. - 예를 들어 어거스틴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홀로 통치하심에 대하여“를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저술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많은 증거를 들어서 증명을 하려고 했다. - 그러나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허영된 마음으로 잘못된 상상에 빠져 잘못된 길로 갔으며, 결국 그들의 인식이 어두워져서 그들이 본성적으로 유일한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은, 단지 그들이 심판대에서 변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가장 현명한 자들일지라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신들을 찾고 그들의 도움을 구할 정도로,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고 어리석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주피터, 머큐리, 비너스, 미네르바. - 이러한 이유에서 하박국은 먼저 모든 우상들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합 2:20) 찾으라고 하셨다. 이것은 신자는 자신의 말씀에 계시하신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다른 신도 영접해서는 안 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한스 큉과 세계 에토스(Weltethos) 한스 큉(Hans Küng, 1928-)은 한국에도 방문한 바 있고, 그의 저서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그는 가톨릭 신부로서 튀빙엔 대학교수 재직 시 교황 무오설을 비판하는 책을 발간하여 바티칸으로부터 제재를 받아 1979년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수많은 책을 집필하였고, „Weltehos“를 창립하여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학자로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그가 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종교관을 간단히 요약해본다. 기독교는 오늘날까지도 중세의 세계관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해 현대인으로부터 신빙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는 그의 저서 „하나님은 존재하는가“(1978)에서 기독교 신학은 계몽주의, 종교비판, 무신론자와의 대화와 논쟁을 해서 인정을 받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기독교 신학은 계몽주의 철학적 인식을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학에도 적용을 시켜야 한다. 역사비평방법이나 자연과학 결과도 신학에서 수용해야 한다. 큉은 다른 종교와 다른 세계관을 인정하며 기독교에 상대적인 우선권을 두었다78). 종교평화와 세계윤리 그는 종교 간 대화의 추진을 지지하며 종교를 3종류로 나눈다: - 근동의 예언 종교: 유대교, 기독교, 회교 - 인도의 신비 종교: 힌두교, 불교 - 극동의 지혜 종교: 유교, 도교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종교평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종교들이 기본적으로는 – 십계명과 같이 – 비슷한 윤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다른 종교의 공통적인 가치를 의식할 때만이 계속적인 평화가 유지된다고 믿으므로, „세계윤리 Project“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세계윤리는 대체종교가 아니다. 단지 인간의 행위에 대한 구속력 있는 가치요, 척도요, 규칙이다. 종교 간의 대화에서는 참여자는 각 종교 고유의 전통을 중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각자의 위치는 대화의 과정에서 변모79)에 열려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큉은 신앙의 내부관점(Innenperspektive)과 종교 과학적인 외부관점(Aussenperspektive)을 구분한다: 내부적으로 볼 때에는 그 종교인에게는 자신의 종교만이 진정한 종교이다: 큉으로서는 기독교. 그러나 외부에서 볼 때에는 다른 신을 통하여 한 가지의 목적에 이르게 하는 여러 가지 구원의 길이 있다. 즉 외부 관점에서 볼 때에는 여러 가지 진정한 종교가 있다는 것이다80). 그러므로 자신의 절대적인 진리의 척도에 천착하고있는 종교와는, 진정한 대화의 길은 막혀있다.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은 세계평화, 이웃사랑, 비폭력, 화해와 용서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참조: 독일 비키페디아. 2010. 10월 à 각자 한스 큉의 생각을 비판해 볼 것. 필자의 한스 큉 비판: 1. 오늘날 독일에서는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근본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공격을 받는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기독교 박해이다. 한스 큉은 이러한 풍조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그의 생각은 매우 인본주의적이다. 결국 다원주의를 반대하는 진정한 기독교는 무시당하고 배척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기 때문에, 이미 많은 신자가 압박을 견디지 못해 변절되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풍조는 계속될 것이다. 종교적 다원주의로 문을 여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가 성서비평이다. 2. 한스 큉은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다. 그의 윤리종교는 칸트로부터 물려받았다. 그의 세계평화 개념도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Zum ewigen Frieden)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3.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인간은 왜 예수님을 통해야 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갈 수가 없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5)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3:18) 4. 따라서 한스 큉이 원하는 „세계평화, 이웃사랑, 비폭력, 화해와 용서“의 해결은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5.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 신자는 결코 에큐메니칼 운동에 찬성할 수 없다. 이것은 교만도, 무지도 고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길이기 때문이며 사람에게 이 길만을 제시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그들을 구하는 길이다. 만약 우리가 타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구원의 길을 막는 것이다. 제11장: 하나님을 가시적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죄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참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다.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양심을 매우 날카롭게하여 철저히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상숭배라는 말을 혐오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거룩하심을 충분히 체험한 후에도,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며 경배를 하였다. 이것은 신자라 할지라도 얼마나 쉽게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필자의 견해로는 우상숭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들은 많지 않다. 우상숭배는 거듭난 신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찾아드는 불청객이며, 늘 자신을 말씀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본 장을 통하여 우상숭배의 정체를 잘 배워서 이 문제에 매우 예민해져야 하며, 삶에서 모든 우상을 제거하도록 해야 한다. I,11,1 하나님은 자신을 가시적 형태로 표현하시는 것을 금하신다 -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 것: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20:4 - 형상화된 신: ·페르시아: 태양 ·여러 이방인들: 별 ·애굽인: 동물 ·그리스인: 인간 I,11,2 하나님을 형태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 신 4:15-18: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는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 이사야는 분명히 가르쳤다: 사람이, 형체가 없는 분을 물질로써,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형상으로, 영을 영이 없는 무생물로, 무궁하신 하나님을 한 조각의 나무나 돌, 금으로 나타내고자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위엄이 부당하고 부끄러운 환상으로 더럽혀진다(사40:18-20; 41:7,29; 45:9). - 사도 바울도 이러한 식으로 비판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는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17:29) - 이방인 세네카도 이와 비슷한 의견이다: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고자 가장 나쁘고 가장 천한 물질을 사용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 신들에게 인간의 형태를, 어떤 이들은 야수의 형태를 입혔으며, 또 어떤 이들은 남녀 혼성의 형태로, 어떤 이들은 몇 개의 다른 몸으로 형태를 입히고 그것들을 신이라고 불렀다. 만약 이런 것들이 생기(生氣)라도 얻어서 우리와 마주치게 된다면, 아마 괴물로 여겨질 것이다81).“ - 우상숭배자(가톨릭 측)의 변명: 하나님의 상을 만드는 것이 금지된 것은 단지 유대인이 미신으로 떨어지는 경향 때문이었다. à 그러나 이것은 천박한 변명에 불과하다. 정리: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여기에서는 다른 신을 말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물질로 표현되지 않는다.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으로 표현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I,11,3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면 안 된다. (성경이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도 좋다는 단서를 제공하는가의 문제) -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신의 임재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것처럼 나타나신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표징은, 단지 백성을 가르치시고자 적절히 고려된 것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분의 본질의 불가해성82)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83). - 즉, „구름의 연기와 화염“(신4:11)은 하나님의 하늘의 영광이 나타내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이것은 더 가까이 파고들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 따라서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그의 기도를 응답받지 못하고 단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라는 말씀을 받았다 à 하나님은 형상이 없어서 얼굴을 보여줄 수가 없다. - 하나님이 때때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장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계시의 서곡이었다84). 따라서 유대인들이 이것을 구실삼아 하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 하나님은 율법시대에서는 속죄소85)에서 자신이 임재하심을 보여주셨는데, 속죄소의 구조를 살펴보면: 그룹은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고 있으며, 이것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다(출25:18-22). 그러므로 이 그룹의 예를 들어, 하나님과 성인의 상을 만들 것을 옹호하는 것은 명백한 광란이다. 이것은 단지 그룹들이 날개로 속죄소를 가려서 인간의 눈과 의식이 하나님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 이사야 6:286)에서도 스랍들은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이것은 하나님 영광의 광채가 너무나 강렬해서 천사들도 직접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교황주의자들87)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샘으로부터 맹렬하게 솟아오르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었다. 이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우상을 숭배하고자 하는 경향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배워서, 죄를 유대인에게 전가하고 스스로는 죄에 대한 허황한 유혹에 빠져 죽음의 잠을 자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정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타나시면서 동시에 항상 자신을 감추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이것을 구실로 해서 하나님을 형상화한다. I,11,4 형상과 화상은 성경에 위배된다 - „열방의 우상은 은과 금이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다“(시135:15). 선지자는, 우리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신은 어리석은 형상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모든 우상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리석게도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우상에게 돌린다. - 이교 시인 Horace의 시: „나는 한때 무화과 나무 그루터기, 별 쓸모없는 나무 조각이었다. 목수가 나를 걸상으로 만들까, 아니면 다른 무엇을 만들까 망설이다가 차라리 신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à 이렇게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매 순간 숨을 쉴 때마다 생명이 그만큼 소멸해져가는 인간이, 자신의 재간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명예를 죽은 나무조각으로 옮기고 있다. - 무한하고 불가해한 하나님을, 5척의 키로 제한한다고 하는 일보다 더 부당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경험적으로 볼 때, 이러한 끔찍한 도착은 자연질서에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본래의) 것이다. - 또한 화상(畵像)도 조상(彫像)과 같이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희랍인들(동방정교회)의 어리석은 변명이 부당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I,11,5-7 형상은 laymen’s book인가? I,11,5 형상에 대한 성경의 판단 - 대 그레고리88)가 말한 바 있는, „그림은 무식한 자들을 위한 책89)“이라고 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표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a) 그러나 성경은 달리 가르친다 - 성경은 달리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예레미아는 나무(우상)는 단지 쓸모없는 일만 가르치며(렘10:3), 하박국은 우상은 거짓말의 선생(합2:18)이라고 가르칠 때에는, 인간이 형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일반적으로 추출해낼 수 있다. - 형상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단지 책 대신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교황주의자들은 선지자들의 우상숭배 금지 가르침이 단지 이스라엘이 형상을 미신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à 성상숭배를 옹호하는 매우 그럴듯한 이론. I,11,6 b) 그와는 달리 가르친 교부들이 있었다 - 락탄티우스와 유세비우스는 소멸되는 존재만이 형상화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불멸이다) - 어거스틴은 형상에게 예배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형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도 가증한 일이라고 했다. - 이것은 306년에 엘비라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으로서 36장에는: „교회에는 그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사람이 경배해야 하는 것이 벽에 걸려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다. - 어거스틴은 이교도 바로(Varro)를 인용해서 말한다: 하나님께 대해 인간이 저지를 첫 번째 오류는 우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형상으로부터 양식을 얻으면서 힘차게 성장한 데에 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하고 없어지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형상의 우둔함과 그의 부적절하고 불합리한 모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멸시되기 마련이다. 정리: 기원전부터 많은 이방인들도(주로 철학자) 형상 숭배를 비판한 것을 알 수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우상숭배는 눈에 뜨이지 않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보이지 않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계속 양분을 흡수해서 자라게 되어 나중에는 정말로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까지가 우상숭배인지를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다. 따라서 누구나 우상숭배에 빠지기 쉽다. 또한 자신의 우상숭배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의 우상숭배를 날카롭게 통찰하고 이것을 비판할 수 있는 진정한 선지자(교사)가 필요하다. I,11,7 c)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물도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 교황주의자들이 수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형상은 „평신도를 위한 교과서“라는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이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성인의 화상이나 조상은 가증스러운 음란의 상징이다. 누가 그들을 본받으라고 한다면, 그는 몽둥이로 맞아야 한다. - 이들이 동정녀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교회에 있는 형상물들은 수치스럽고 음란하게 옷을 입고 있어서, 창녀촌에 있는 창녀들이나 그를 능가할 것이다90). d) 만약 교회가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면 (무식한) 평신도는 없었을 것이다. - 이러한 방법이 백번 양보해서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에서 자신의 백성이 그러한 바보짓을 통해서 배우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단 하나의 공통된 가르침을 제시하고 그분 말씀의 설교와 성사를 통해 교육을 받기를 원하신다. - 교황주의자들이, 너무 무식해서 형상으로만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평신도라고 불리는 사람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바로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로 인정하셔서 자신의 천국의 가르침을 허락한 자들이며, 자신 나라 구원의 비밀로 교육을 할 것을 원하는 자가 아닌가? - 오늘날, 형상(평신도 책)없이는 배울 수 없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무식해진 것이 그들을 교육하기에 적합한 (성경의) 가르침을 빼앗은 데에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91) - 사도 바울은 증거한다: „복음의 진정한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눈에 그려졌다“, 즉 우리의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갈3:1). 그런데 교회 도처에 나무와 돌, 은과 금으로 만든 수많은 십자가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à 형상 대신에 복음의 설교! -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갈3:13),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시어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히10:10), 자신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시며(계1:5),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을 진실하게 설교했다면, 이러한 것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천 개의 십자가보다 이 한 가지를 통하여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à 무식한 백성은 형상으로 밖에 가르칠 수 없다는 논거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I,11,8-16: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형상의 사용은 예배(경배) 부패의 기원이 된다 I,11,8 화상의 기원 - 우상의 기원에 대해서는 잠언이 잘 말해주고 있다. 즉, 우상의 기원은 죽은 자를 기념하고 명예롭게 하려고 한 시도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그 결과로 죽은 자를 그의 기억 속에 미신적으로 높이게 된 것이다92). - 그런데 이것이 인간에게 잠재하는 우상숭배의 경향을 부추기는 횃불의 역할을 하였지만, 이것이 그러한 악의 원천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것과 같이, 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해 형상을 만들고자하는 생각이 들기 이전에 이미 우상이 있었다. 예를 들어 라헬이 아버지의 우상을 훔친 것으로 보아서 우상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악덕임을 알 수 있다. -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정신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우상을 만드는 공장임을 알 수 있다. 노아의 홍수 이후 새 세상이 되었으나 인류는 얼마가지 않아서 자신의 욕망대로 우상을 만들어 냈다. 데라와 나홀도 아브라함을 낳기 전부터 우상숭배를 하였다(수24:2) - 실제로 인간 정신은, 교만과 뻔뻔스러움이 가득 차서,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하나님을 머릿속에 상상해 낸다. - 이러한 악에 새로운 악이 더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속으로 생각한 하나님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즉, 인간 정신은 우상을 만들어 내고, 인간의 손은 그것을 형체로 만들어 탄생시킨다. à 칼빈은 여기에서 머릿속에 있는 우상과 이것이 형상화된 우상을 명백히 구분한다. 일단 우상이 형상화되면, 이것을 본격적으로 숭배하게 된다. - 우상숭배의 기원은 이스라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출32:1 이하),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곁에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 곁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은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그 많은 기적을 통해 직접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들 곁에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93). 즉 그들은 그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는 형상을 보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인도했던 하나님으로 인정을 했다. - 우리 일상의 경험도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우리는 자신과 같은 허상을 재빨리 만들어, 어리석게도 이것이 하나님의 상인 것처럼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항상 불안해한다. - 세상이 창조된 이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이러한 맹목적인 욕망에 굴복하여, 스스로 형상물을 만들어서 그들이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포이어바하의 투사이론94)(Projektionstheorie):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소원의 총화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 소원, 이상을 하늘에 올려 보내면, 하늘에서 그가 올려 보낸 그대로의 신을 보낸다. 즉 욕망을 투사하면 하늘에서 욕망을 충족시킬 신이 내려와서, 그는 그 신을 경배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신을 창조한다 (창 1:27의 반대). 그의 이론은 칼빈이 수없이 강조한 말의 표현만 바꾼 것이다. 인간이 신을 창조하기는 하지만, 왜 구태여 형상을 만드는가? 아마도 자신의 소원이 그 형상처럼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인간의 가장 강력한 원초적인 의지는 자신의 기대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 보이는 우상을 만들게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때부터 우상을 숭배하였다. 우상숭배가 약 천 년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자 하나님은 그들을 바빌론의 포로로 만드셨다. 이스라엘은 이때부터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에 오셨을 때에는 우상숭배는 이스라엘에서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단지 우상을 가시적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모두 내면에 우상을 만들었다. 그들의 우상은 명예욕, 물욕, 국수주의, 광신적 메시아 신앙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I,11,9 형상을 사용하게되면 우상숭배에 빠진다 - 이러한 형상을 만들게 되면, 숭배가 따르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형상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형상을 경배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마음과 눈이 우상에게 매이게 되어 거기에 무언가 신적인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경탄하게 된다. -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자마자, 여기에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95). 인간은 스스로 만든 하나님의 상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만큼 그렇게 어리석다. 이렇게 되면 경배는 당연히 따라온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셨다. - 그러면 사람이 단지 형상을 경배하든지, 아니면 형상에 들어 있는 하나님을 경배하든지에는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형상을 경배하면 어떤 핑계를 대든지 간에 이것은 항상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 우상숭배자들의 이의 제기: „우리는 형상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단지 형상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을 경배한다) - 칼빈의 반론: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은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끌어 내셨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 않았다. „이것이 너희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이다“라고 아론이 말했을 때, 그들은 아무런 겁도 없이 이에 동의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계속해서 소유하기를 원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단지 그들은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안에서 그들 앞을 인도하시는 것을 보기를 원한 것이다. ·이교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대로 바꾸지만, 마음속에서는 항상 같은 신을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나 돌로 착각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한 신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신을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 많은 신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에게 물으면, 그들은 서 있는 형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거하는, 보이지 않는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 결론적으로 말하면,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은 모두 우상숭배를 할 때는, 내가 앞에서 한 말과 같이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영적인(정신적인) 이해에 만족하지 않고, 형상을 통해 더 가깝고 확실한 것을 잡으려고 한다. - 일단 그들에게 자신이 만든 우상이 마음에 들면, 그들은 끊임없는 속임수로 미혹되어 하나님께서 그 형상 안에서 그의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영원한 하나님을 이러한 형상 안에서 경배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I,11,10 교회에서의 형상물 경배 - 이러한 일은 옛날이나 있었지, 요즘 그러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파렴치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우상 앞에서 엎드리는가? 왜 하나님에게 하듯이 그들에게 소원을 말하는가? 어거스틴이 한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도할 때나 예배할 때에 형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형상이 그의 소원을 듣고 있다는 믿음이나, 혹은 그가 기도하는 대로 들어준다는 희망으로 차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어거스틴 시편 113편 주석) - 또한 그들은 형상마다 우열을 두어서 경배에도 차이를 둔다. - 또한 형상을 눈으로 보고자 먼 순례의 길로 가야 하는데, 자기 집에 그러한 형상들이 많이 있지 않은가? - 오늘날에도 형상물을 얻기 위해 살육 전을 벌인다96). -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게 나무와 돌과 간음한다고 가르쳤다(렘2:2797)).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 매일 행하여지고 있다. 이들은 나무와 돌 안에 있는 하나님을 육적으로 경배를 드리는 독신을 행한다. I,11,11 교황주의자의 어리석은 핑계 -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도 표현을 구별함으로써 이러한 비판을 회피하려고 하는데, 형상에게 드리는 경배를 형상 섬김(Idolodulia)이라고 표현하면서, 이것이 형상숭배(Idolatria)라는 것을 부인한다. - 이러한 섬김은,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고도, 조상이나 그림에게 돌려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즉 그들은 형상을 섬기는 것이지 형상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섬김과 숭배와 차이가 있는 것인가? 그들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증명하려고 애써도,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는 것을 합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한다. - 즉 형상을 숭배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이 숭배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며, 간음자와 살인자가 자기 죄에 대해 다른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죄책을 면하는 것이 아니다. I,11,12 예술품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 나는 물론 절대로 어떠한 상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미신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이 예술은 순수하고 올바로 사용되기를 요구하고있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이익을 주신 것이, 오용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거나 더우기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지 않기 위함이다. -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리고 이렇게 한다면 틀림없이 그의 영광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엄은, 인간의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서기 때문에 천박한 조형을 통해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 I,11,13 교리가 순수하고 능력이 있었을 때에는 교회가 형상물을 거절하였다 - 교회는 처음 약 500년 간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때는 교회가 매우 번창하고 올바른 가르침이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 형상은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가 매우 타락했을 때 비로소 화상이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만약 형상들이 좋고 이로운 것이라면, 교부들이 그것을 왜 진작 교회로 들여오지 않았을까? 이들은 이것의 위험성을 미리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교회에서 금했을 것이다. - 어거스틴: 형상물을 숭고하고 높은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이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은 없다 하더라도 생명 있는 지체와 감각 있는 것과 흡사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들이 살아서 호흡하는 것처럼 보인다98)“ I,11,14 니케아 공의회(787)에서 형상물을 허락함 - 니케아 공의회(787)99): 이 공의회는 콘스탄틴 대제가 소집한 공의회(313)가 아니라, 이레네 여황제의 명령으로 소집된 공의회로서, 교회 안에 형상물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경배까지 하도록 결정했다. 오늘날, 형상물을 옹호하는 자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인용한다. -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칼 대제(Charlemagne)의 이름으로 쓰인 형상숭배에 대한 반박서를 보면, 형상숭배를 옹호하는 자들의 논리가 소개되는데, 이것은 가관이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동방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인간은 형상(화상, 조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시4:6)를 들어서 형상을 우러러보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했다. I,11,15 성경 본문을 엉뚱하게 오용함 - 경배의 문제를 논할 때 형상경배를 옹호하기 위해 예를 드는 것: 야곱이 바로를 경배한 것(창47:10)과, 야곱이 막대기를 경배한 것(47:31)과 야곱이 자신이 세운 기념 돌을 경배한 것이다(창28:18) - 미라(Mira)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이 문제에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형상 경배의 정당성을 그의 부감독의 꿈을 통해서 옹호했는데, 그는 이 꿈이 마치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인 것처럼 말하였다. I,11,16 형상물에 관련한 공의회에서 나온 하나님 모독적이고 무서운 주장. - 나는 이제, 가공할만한 신성모독의 표현들이 용감하게 그들의 입술 밖으로 나왔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혐오스러운 심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저항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모리움의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화상을 경배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에게 파문을 선언하였다. ·다른 어떤 사람은 당시의 희랍 교회가 겪는 재난은 형상을 경배하지 않는 탓이라고 하였다. ·콘스탄티우스 감독은 자신이 이 형상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은 경배를 드릴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이처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하고, 마니교도와 마르키온 교도와 같은 이로 낙인을 찍었다. ·동방교회 사절인 요한은 형상숭배를 거절하는니 차라리 도시에 창녀구역을 만드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이단 중에서는 사마리아인이 가장 나쁘고, 사마리아인보다 더 나쁜 사람은 형상경배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끝으로 그들의 익살극을 멋지게 마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구를 첨가하였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소유하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매우 기뻐하여라100)“ 제12장: 하나님께서는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위해 우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 I,12,1 참 종교는 우리를 단 한 분의 하나님께 묶는다 [진정한 하나님 경배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율법대로), 하나님 한 분만 경배하는 것이다] - 하나님 인식이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차가운 생각의 유희가 아니라, 하나님 경배를 그 결과로 가져온다. 그리고 하나님은 올바로 경배되어야 한다. - 그리스어 유세베이아(경건)이란, 신에 대한 올바른 경배를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는 어둠에 헤매면서도, 신을 섬기는 데에서 분명한 법칙이 있어야 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경건이란, 보이는 것 아무것이나 붙잡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경계선 내에서 곧은 길을 올바로 가는 길이다. ·미신이란 말은 주어진 법칙과 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무언가를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무익하고 허영된 것을101)) 쌓아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사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일반적으로 종교란 오류 때문에 부패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각없는 열심히 행한 모든 것은 가치가 없다. -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며,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시며, 자신을 인간이 생각해낸 신과 혼동해서 경배하면 복수하신다고 하셨다(출20:5).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올바른 경배로 인도하시기 위해 경배의 방법을 제정하셨다. 하나님께서 다음의 두 가지를 율법에 요약하셨다: 1.하나님은 먼저 신자에게 자신이 그들의 유일한 율법제정자임을 분명히 하신다. 2.그리고서 규칙을 제정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규칙에 따라 경배를 받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의 뜻에 맞게 경배를 받는 것이라고 하신다. - 나는 지금 여기에서 단지 율법에 대한 가르침의 일부분만 언급하는데, (모든) 율법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잘 못 경배하는 일이 없도록 분명한 한계를 정하는 것이다. -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신성에 관계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귀속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예를 빼앗은 것이고, 하나님 경배는 더렵혀진다는 것이다. - 여기에 미신이 어떠한 속임수로 이러한 일을 하는지를 주의하여보자. 미신은 눈에 뜨이도록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놓아두고, 그 주위에 많은 작은 신들을 허용하여 단지 하나님께 속하는 영광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102). - 이것은 교회에서 성인들을 만들어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하나님 대신 그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만 숭배하고 있다는 인상만 줄 뿐이지, 실상은 여러 신을 숭배하는 것이다. I,12,2 같은 것을 (거짓되게) 구별하는 가톨릭 - 교황주의자들이 경배(latria)와 섬김(dulia)을 구별한 것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천사나 죽은 자에게 돌려주어도 죄가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고안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자들에게 드리는 경배(그들이 섬김이라고 표현하는 것)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 결국 그들은 언어유희를 통해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고 한다. 성경에서는 위 두 개념이 구별 없이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은 경배와 섬김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는다) I,12,3 우상숭배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피조물에 돌리는 것이다. - 갈4:8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에서 사도 바울이 라트리아라는 말 대신 둘리아를 사용하였다고 해서, 갈라디아인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라트리아를 사용할 곳에 둘리아를 사용함으로써 똑같이 둘리아도 정죄된다. - 고넬료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행10:25). 그는 초신자가 아니었다. 그가 베드로 앞에서 엎드려 절한 것은, 그가 베드로를 하나님께 경배하듯이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그에게 이것을 적극적으로 금지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었든가? - 이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 피조물에 조금이라도 전가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이 하나님 경배와 인간의 경배를 결코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단 한 분의 하나님을 가지려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한 푼이라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것은 하나님만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아멘!!!) - 그래서 스가랴도 교회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에 분명히 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이 될 뿐 아니라, 단 하나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하셨다(슥14:9).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상과는 아무것도 공유하시려고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정리: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 하나님께서 가장 금하신 계명이 우상숭배이다(제2계명). 그러나 이스라엘은 항상 우상을 숭배해왔으며, 이것은 국가적 멸망(북이스라엘 9 지파는 완전 멸망, 남유다는 바빌론 포로)을 가져왔다. 이때에 그들의 우상은 형상으로 나타났다. - 바빌론 포로 이후 유대인의 우상숭배는 더이상 형상숭배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의 우상은 무엇으로 나타났는가? - 예수님은 우상숭배를 새롭게 정의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우상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모두 우상숭배자이다. 인간은 항상 무엇을 섬겨야 한다. 그런데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우상을 섬긴다. 따라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없다. 맘몬은 하나님 외에 인간이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확대해석을 할 수 있다. - 사도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우상숭배를 규정했다: 음란한 자, 더러운 자, 물욕이 있는 자. 엡5: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이상에서 종합하면, 우상숭배란 신자의 삶이 하나님의 영(말씀)에 의해 영위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육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우상숭배이고, 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악덕이다(갈5:16-21). 칼빈의 가르침대로 인간의 생각(마음)이 우상을 만드는 공장이다. - 예수님이 시작하시고 사도들이 가시적으로 세운 교회에 몇 백 년 후에 공식적으로 우상이 들어왔다. 교회에 형상이 세워지고, 차차로 마리아, 성인 숭배가 시작된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전부 우상으로 보았다. 머릿속에 있는 우상이 형상화되었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이다. 따라서 가톨릭은 공식적인 우상숭배의 종교이다. -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세운 신교에는 우상숭배가 없는가? 교회에 우상이 없을 수가 없다. 우상은 항상 교회에 침투하기 때문에 이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포이어바하도 간접적으로 인간은 우상을 섬기는 존재, 혹은 모든 종교는 우상(자신의 생각)숭배라고 했다. 교회는 단지 신자가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의를 주고, 우상숭배가 공식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이다. - 오늘날 한국교회의 우상숭배는 무엇인가? 비 성서적인 가르침은 모두 우상숭배를 촉진한다. 특별한 은사 받을 것을 강조한다든가, 돈과 명예를 얻도록 부추기는 것과 성장을 강조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전형이다. 따라서 이러한 곳은 교회에서 우상숭배를 장려한다고 볼 수 있다. [삼위일체] 제13장: 성경은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신다는 것을 창조 시로부터 알 수 있도록 가르친다. 정통교리를 믿는 신자들은 삼위일체를 믿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단락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이 단락은 매우 중요하다. 1. 성서비평을 받아들이면, 예수님 동정녀 탄생이 부인되고 예수님의 선재성, 하나님 되심이 부인됨으로 당연히 삼위일체의 교리가 무너진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 성서비평이 알게 모르게 상당히 넓고 깊숙이 들어왔으므로, 말로는 삼위일체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부인하는 사람이 많다. 2. 칼빈이 삼위일체 교리를 매우 자세하게, 그리고 정열적으로 다루는데,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이 일을 하는 제네바에서도 반 삼위일체 그룹들이 그를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이 그룹들의 세력이 확산되고 있음을 예견했다. 특히 세르베투스는 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책들을 발행하고, 이들을 매우 심하게 공격하며, 인문주의자들 사이에서 공감을 얻어가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그들과의 논쟁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에는 교리 문제가 있으면 시의회가 결정을 했으므로 논쟁 당사자들이 공개 토론을 해야만 했다. 3. 대적자들은 상당히 날카롭게 삼위일체에 대한 반론을 제기했으므로, 이들의 반론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질 수 있는 의문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여기에 칼빈이 성경적인 대답을 주므로 우리의 의문이 해결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논리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 대적자들의 질문에 합리적인 대답을 해야만 했으므로, 이에 칼빈은 합당한 답변을 찾기 위해 노력을 했다. 혹자는 칼빈이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103), 이러한 당시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삼위의 구분을 강조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적들로부터 삼위일체를 부인한다고 시의회에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 5. 칼빈의 삼위일체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은 항상 삼위로 존재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홀로 역사하시지 않고 삼위로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삼위의 구분은 업무분담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의 관계로 이해한다 à 관계적 삼위일체론(어거스틴). 6. 독일 국가교회와 독일 신학대학의 삼위일체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이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므로 필자가 „기독교강요 보조자료“에서 별도로 다루었다. 이곳에서는 간단히 다룬다. 7. 끝으로 본 장을 공부하면서, 예수님과 성령님의 하나님 되심을 다시 확인하고, 그분께 마땅한 경배를 돌려드리는 것의 중요함을 깨닫기를 바란다. 그리고 칼빈이 성경 말씀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는가를 배우기를 바란다. (1부.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들: 1-6) I,13,1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으며104), 영적이다. - 성경이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으며, 영적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 대중의 미신(망상)을 일축할 뿐만 아니라 세속 철학자들의 하나님 본성에 대한 교묘한 가르침을 논박하기에 충분하다. -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척도로 하나님을 측량하려는 시도를 무산시키며, 영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세속적이고 육적으로 상상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이 게으르고 우둔하여 땅에만 붙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세상을 떠나 하늘을 바라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à 여기에서 칼빈은 삼위일체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먼저 이야기한다. 삼위일체라는 표현을 찾고자 많은 교부들이 오랫동안 고심해왔다. 비록 이 말이 완벽한 표현은 아니지만,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하다. - 칼빈은 세 가지 부류의 하나님 관을 비판함: ·범신론(스토아 학파): 우리가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다. 세상의 모든 부분에 신성이 침투해 있다. ·이원론(마니교): 하나님과 악의 세력이 힘에서 거의 균등하다. 이들도 성경을 인용함. 칼빈의 반박: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유일성)과 능력의 무한함을 부인한다. ·신인동형동성론: 하나님은 육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은 입과, 눈, 귀, 손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반박: 부모가 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식을 우리의 약한 수용능력에 적응시키고105) 계신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매우 낮추셨다. I,13,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한 분이면서도 삼위로106) 서로 다르게 간주되도록 계시하셨다. - 우리가 이 삼위를 분명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을 파악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단지 빈 개념만 우리 머릿속에 떠돌아다닐 뿐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세 분이라든가 하나님의 본질이 삼위로 나뉘어있다는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간명하고 알기 쉬운 정의를 찾아야 한다. - 위(位)란 무엇인가? 1) 위라는 말은 인간이 지어낸 말이라고 비난을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2)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하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아들과는 구분되는 존재양식(subsistentia)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히1:3의 여러 번역: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KJV: Who being the brightness of his glory, and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NIV: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루터: Er ist der Abglanz seiner Herrlichkeit und das Ebenbild seines Wesens 불가타: qui cum sit splendor gloriae et figura substantiae eius 그리스어 성경: ὃς ὢν ἀπαύγασμα τῆς δόξης καὶ χαρακτὴρ τῆς ὑποστάσεως αὐτοῦ 3) 존재 양식(subsistence, Seinsweise)은 본질(essentia)과는 다르다. 하나님은 나뉠 수 없는 한 본질이시지만, 세 가지의 존재양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4) 아버지는 자신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아들과는 구별되므로, 아들 안에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 양식(hypostasis107))을 아들 안에서 보이도록 나타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아들이 아버지의 광채시라는 표현이 매우 적합하다. 즉 아버지께서 자신의 존재 양식을 가지고 계시며, 이것은 아들 안에서 나타내신다. 성령님에게도 이와 같은 이론을 적용시킬 수 있다. 5)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본질에 적용을 시키면 안 된다. 삼위의 본질은 하나이다. 단지 존재 양식만 다를 뿐이다. 표현들 정리(종으로 열거된 표현은 모두 같은 개념. 즉 본질, essentia, ousia, substantia는 같은 의미) 본질 위(位) 특성 essentia 존재 양식 삼위는 특성이 구분됨 ousia hypostasis proprietas substantia subsistentia(subsistence) persona(라틴어)=prosopon(그리스어. 복수는 prosopa) = Person, person Seinsweise(Wesensart) 그리스어 프로소폰(복수는 프로소파)은 라틴어의 페르조나이다. 원 의미는 얼굴, 가면이다. 가면이란 연극배우가 극 중 인물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가면이다. 즉 제우스 신을 나타내려면 배우가 제우스 얼굴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이 마스크만 바꾸어 나타났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고대 신학자들은 이 표현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사용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persona라는 말을 과감하게 사용했다108). 그 대신 설명을 덧붙였다. 오늘날에는 persona(person)의 의미가 바뀌면서 더 큰 어려움이 왔다. 즉 person은 오늘날 인격을 나타내는 말인데, 세 인격이 하나의 하나님이라고 잘못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person을 생각할 때에는 항상 위, 혹은 존재양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요약: 특성이 다른 3위가 한 본질의 하나님이다. 삼위의 하나님은 각기 특성이 다르지만 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 최종확정은 381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una substantia, tres presonae/ mia ousia en trisin hypostasesin 위에 다르게 표현된 말들을 사용하여 연습을 해 볼 것. I,13,3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주는 말이므로 허용되는 표현이다 - 이단들은 „위“라는 말에 대해 개처럼 짖어대고(비난), 어떤 사람은 어리석게도 이 표현이 인간이 고안해 낸 말이라고 해서 배척하는 사람이 있다. - 그러나 삼위(성부, 성자, 성령)가 모두 성경에 나오며, 각 위가 완전한 하나님 이시라는 것, 그러나 여러명의 신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증거하고 확증하는 것을 단지 해설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들을 배척하는 것은 사악한 일이다. 성경의 진리를 분명하고 쉽게 표현하기 위해 성경 외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à 삼위일체의 가르침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에 나오지 않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I,13,4 교회가 거짓 교사를 폭로하기 위해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을 필요로 하였다 - 이러한 새로운 용어들은 특히 온갖 핑계로 진리를 피해가려고 하는 적에 대항하여 진리를 주장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이다. 미끌미끌한 뱀들을 용감하게 붙들어서 밟아버리지 않으면, 이들이 갖은 술책으로 교묘하게 빠져나오므로, 순수하고 건강한 가르침을 저해하는 이러한 적들을 패주시키는 것이 우리의 주된 임무이다. - 삼위일체 교리는 교부들이 자발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반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이다. 이들이 더 이상 교리를 혼란시키지 않도록 나름대로 논리적이고 완벽한 교리를 만들었다. 1) 아리우스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지만, 피조된 하나님이라고 했다. 즉 그리스도는 시초를 가진다. 그가 피조물이므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고 가르쳤다. 이에 니케아 신조(325)에서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 본질)라는 표현이 탄생하였다. 즉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본질이 같다는 의미이다 à 중요한 점은 삼위일체의 논쟁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이 확정됨. 2) 사벨리우스(아리우스보다 약 100년 전의 사람)는 양식론을 주장함: 한 하나님이 세 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남. 하나님은 성부로서 천지를 창주 하신 후에, 성자로 인간이 되시고 부활 승천하심. 그 후에 성령으로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심. 그래서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의 교활함에 일격을 가하기 위해 참 교사들이 한 하나님 안에서 세 특성의 존재가 인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한 하나님 안에 삼위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à 삼위의 개념은 독재론을 피하기 위해서 나왔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의 존재의 구분을 무시하고 한 하나님 밖에 없다고 주장하므로 이것을 독재론이라고 한다. I,13,5 교리적 표현의 한계성과 필요성 - 우리가 꼭 용어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단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과, 이 세 분이 서로의 특성에 의해 구분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우리는 이 용어들을 잊어버려도 된다. 이 문제를 가지고 싸운 교부들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고, 그들 개인적으로도 일관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1)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를 라틴어로 표현했을 때, „consubstantialis“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즉 성부와 성자는 같은 실체(substantia, substance)라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는 실체보다는 본질(essentia)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 2) 따라서 제롬(히에로니무스)은 다마수스(로마 감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substance)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모독이라고 했다. à 올바른 비판이다! 실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3) 그러나 힐라리는 자신의 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substantia, substance)가 있다는 말을 수없이 사용하였다. (언어를 잘 못 사용하여 세 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세 실체가 있다고 함) 4) 그러나 제롬은 hypostasis(위)라는 말을 분명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그는 말하기를, 한 하나님이 세 hypostasis로 계신다고 말한다면 여기에는 독소가 숨어 있다고 했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싫어하는 동방의 비숍들을 고의적으로 비방하기 위해 그럴듯한 구실로 모독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공정하지 못하게도, 세속에서도 본질(우시아)이라는 말은 „위(hypostasis)“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5) 어거스틴은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히포스타시스(희랍어)라는 말이 „이런 의미로는“ 라틴 교부들에게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 교부들이 그들의 관습대로 사용한 말을 그대로 허용하면서, 자신은 또한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라틴 교부들의 용어 사용에서의 실수(히포시타시스를 잘 못 사용한 것)를 용납하였다. 6) 또한 어거스틴은 언어적 혼란이 야기한 문제를 겪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러한 중대한 문제를 논의하기에는, 인간의 언어가 빈곤하기 때문에 히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이 말은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설명한 말이 아니라, 단지 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삼위이신가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자 사용된 말이다. I,13,6 가장 중요한 개념들의 의미 - person(위)은 존재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 고유함을 지니고 있으나, 상호 간의 관계성 속에 있는 실체이다. - 존재 양식(subsistentia)이라는 말은 본질(essentia)이라는 말과 다르다. 세 존재 양식은 상호 간에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각의 특성에 의해 구별된다. 이 관계라는 말은 여기에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정확한 명칭 없이 단순하게 하나님이라고 말 할 때에는 이 이름이 아들, 성령, 아버지에게 모두 해당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이들이 비교될 때에는 특성이 두 분을 구분한다. -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person의 특성은 서로 교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시(예를 들어 낳으신 분)는 성자에게 사용될 수 없다. (2부.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7-13) I,13,7 „말씀“의 신성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이 말씀이 단지 공기 속으로 던져진, 일시적이고 빈 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 말씀은 지혜로서, 이것은 하나님 곁에 계신 분이며, 모든 계시의 말씀과 예언이 이 지혜로부터 나온다109). 베드로의 증거(벧전1:11)에 따르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말씀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낳으신 분으로서, 단지 육신으로는 아직 구약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 그리고 예언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그들을 말하게 하신 영은 „말씀“의 영이었으므로, 이 „말씀“은 진정한 하나님이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모세도 창조기사에서 이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즉 그는 말씀이 창조의 매개자였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각 창조 사역에서 „…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피조물)의 형상에서110) 분명히 반영되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하신 것이다. - 사도들도 세상이 성자를 통해 창조되었으며, 모든 피조물은 성자의 능력의 말씀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하였다(히1:2).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이 성자의 명령이며, 자신이 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솔로몬도 지혜는 만세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만물의 창조 시에,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함께 하셨음을 나타낸다(잠8:22-23111)) - 요한은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으로서 하나님 곁에 계셨으며, 말씀을 아버지와 함께 만물의 기원으로 기술하고 있다(요1:3). -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계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예를 갖는 것처럼, 하나님 존재로부터 나온 말씀 자체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즉, 변하지 않고, 항상 동일한 분으로서 하나님 곁에 머무르시며, 스스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은 모든 계시의 근원의 자리를 차지하신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다. 그런데 말씀을 신화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I,13,8 말씀의 영원성 - 여기에서 몇 마리의 개들이 짖기 시작한다. 말씀의 신성은 공개적으로 비판은 못 하고, 그로부터 영원성을 박탈한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를 위해 입을 여셨을 때에 비로소 말씀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112). - 그런데 이것은 그들이 경솔하게도 하나님의 존재에 변화가 생겼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태초부터 하나님은 창조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약1:17).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비로소 말씀을 하셨다면, 그전에는 하나님 안에 말씀이 없었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잡소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특정한 시각에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이 그전에 없었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므로, 말씀은 벌써 이전에 있어야 한다. -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한다(요1:1). 그러므로 말씀은 시간이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존재하였다. 이로써 말씀의 영원성과,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것과 신성이 증명되었다. I,13,9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시45:6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이곳에서는 왕을 하나님으로 부르는데, 이 왕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중세의) 유대인 주석가들은 여기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엘로힘)은 세속권력113)이라고 한다. 그러나 피조물을 위해 영원한 보좌가 세워진다고 하는 구절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시편 45는 왕의 결혼식 송가이다. 그 왕은 누구인가? 그가 외국의 공주와 결혼하므로 솔로몬과 아합이 물망에 오를 수 있지만, 시편에 묘사된 것으로 보아 그들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어떠한 왕도 이곳에 묘사된 왕과 맞지 않으므로, 그 왕은 메시아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그곳에 등장하는 신부는 교회이다. 신약에서 특히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된다(고후11:2; 엡5:31-32; 마22:2이하; 계19:6-9).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의 언약관계는 결혼관계로 묘사된다. 칼빈이 여기에서 예를 든 6절은 하나님의 지배를 노래하는데, 이것은 고대 오리엔트의 단순한 지배자의 신격화를 넘어서서 영원한 다스림을 노래하며, 지금 오실 영원한 왕은 하나님과 같은 분을 나타내므로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이 그분을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하나님으로 나타냈으며, 하나님에게만 속한 최고의 권력을 가진 분으로 묘사된다: „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9:6) - 예레미아: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다…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렘23:5-6114)) I,13,10 구약에서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 하나님(야훼)께서 여러 번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삿6,7장(기드온의 부르심): 어떤 천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렸다. ·삿13:16(삼손의 탄생):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난 천사도 하나님(그리스도)이다. 그 천사는 그들의 제사를 받음. 원래 천사는 제사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노아는 그 천사가 하나님인 것을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삿13:22)라고 외쳤다. 또한 그가 천사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내 이름은 기묘니라“고 하셨다. - 세르베투스의 반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나 조상들에게 나타난 적이 없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천사가 경배를 받았다. - 칼빈의 반론: ·교부들은 벌써 이 최고의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이미 그때에도 그리스도는 일종의 중보자의 역할을 수행하셨다고 한다. 말씀이 아직 육신이 되지 않았지만, 말씀은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시기 위해 중재자로 내려오셨다. 이와 같은 사람과 친밀한 교재를 위해 천사라는 칭호로 불리셨다. ·호세아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는 야곱과 천사와의 씨름을 서술한 후에,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12:5)고 하였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다고 하였다(고전10:4). 왜냐하면, 영원하신 말씀은 그의 성육신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성취될 그 직무의 본보기를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사야 25: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여기에서 자신의 백성을 도우시기 위해 또다시 일어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눈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명백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된 이 표현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밖에는 해석될 수 없다115). ·말3;1 말씀116)은 위의 이사야 말씀보다 더 분명하다: „또 너희가 구하는바 주가 갑자기 그의 (자신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말라기는 당시에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주(메시아)가 성전 안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말라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하는 성전은 지고하신 유일한 하나님께만 봉헌된 것이다. 이 사실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항상 경배했던 같은 하나님이라는 결론이 나온다(성전이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속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I,13,11 사도들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신성 -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 중요한 것만 추려본다. - 먼저, (구약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가르치는 계시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은 특별히 주목할 만 가치가 있다.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그(만군의 여호와)가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사8:14)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한다(롬9:32-33117)) ·사도 바울은 또한 „우리가 다 그리스도118)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자백하리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45:23(„…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119)“)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격이다. ·칼빈은 그 외에 선지자들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를 연결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설명이 불충분한 것 같아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소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인용한 몇 구절로서도 그리스도의 신성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 요일5:20: „그(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니라“ - 빌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I,13,12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닫게 된다면, 그분의 신성은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을 때(요5:17), 우리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고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눈이 먼 것이다. -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함께 세상을 다스리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직무도 수행하셨는데, 이것은 피조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자니“(사43:25)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것은 하나님 모독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죄사함의 전권을 소유하심을 선언하실 뿐 아니라, 이적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선언을 인정하신다는 것을 증명하셨다(마9:6) I,13,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해 입증된다 -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난다. - 사도들도 많은 이적을 행하였지만, 그들은 능력을 이양받은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행하셨다. - 복음서 기자들이(마10:8; 막3:5)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문둥이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행3:6)라고 말하였다. - 그리스도는 구원을 받은 자가 아니라 구원 그 자체이며, 구원을 주시는 분이다.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신앙과 소망은 하나님께만 두는 것이다. 피조물에 신뢰를 둔다면 이것은 하나님 모독과 불경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과 소망의 대상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증명한다. -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일 뿐 아니라 기도의 대상이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32).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므로 그분이 „주님“(구약의 야훼120))이심이 분명하다. - 스데반도 죽기 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행7:59) (3부. 성령의 신성에 대하여: 14-15) I,13,14 성령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 창조에 대한 모세의 분명한 증거: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이 말씀은 성령께서는 아름다운 세상을 그분의 능력으로 유지하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아름답게 장식되기 이전에, 혼돈된 물질들도 돌보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 „지금 주와 그의 영께서 나를 보내셨느니라121)“(사48:16)의 말씀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파송하실 때에 성령과 함께 최고의 권능을 행하심을 알 수 있다. - 성령께서는 무소부재시며(온 우주에 편재하시다), 세상의 만물을 유지하시고 양육시키시며 생명을 공급하신다. - 그분은 자신의 힘을 만물에 불어 넣으셔서 모든 것에 본질, 생명, 움직임을 부여하는 것을 볼 때 그분은 분명히 신성이 있다. - 그러나 죄인이 썩지 않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은 이런 생물들이 생성되고 성장하는 것보다 훨씬 고귀하므로 그분에 대한 평가는 더 높여져야 한다. 그분 자신이 자신 본유의 능력으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 - 그분은 중생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영생의 창시자이다. - 즉 성자에게와 똑같이 성령께도 하나님이 하시는 특별한 기능이 주어졌다. 피조물 중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되지 못하지만(롬11:34), „성경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2:10). 성령은 지혜와 말의 재능을 주시는데(고전12:10),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러한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하셨다(출4:11).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안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게끔 하신다. - 우리의 칭의도 성령의 역사이다. 능력과 성화와 진리, 은혜, 그리고 우리가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로부터 온다. - 모든 은사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성령님이다. 사도 바울: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 즉 성령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이요 그 창시자이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느니라“(고전12;11) - 만약 성령께서 하나님의 존재양식(인격적 존재)이 아니라면, 그분이 선택을 하신다든가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매우 명백하게 신적 능력을 성령께 돌리고, 그분이 고유의 존재로서 하나님 안에 계심을 보여준다. I,13,15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 - 성경은 성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하나님이란 명칭을 사용한다. -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다(고전3:16-17; 6:19; 고후6:16). 이 사실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성전으로 선택하신다고 자주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 사도 바울은, 한 번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고, 또 한 번은 성령의 전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완전히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곧 성령이시다) -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꾸짖을 때, 그가 „성령을 속였다“고 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였다“고 했다. (행5:3-4) - 이사야가 만군의 여호와가 말씀하셨다고 하였으나(사6:9), 사도 바울은 말씀하신 분이 성령이라고 한다(행28:25-26122)) - 선지자들이, 그들이 말하는 것은 만군의 여호와 말씀이라고 하는 곳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이를 성령의 말씀이라고 하셨다(참조: 벧후1:21). 이것으로 볼 때, 모든 예언의 근원은 성령님이심이 명백하다. - 하나님께서 백성의 목이 곧은 것 때문에 도전을 받았다고 노하시는 곳에서 사63:10123)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근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 마지막으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은 성령의 신적 위엄을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며, 그 위엄을 훼손하고 범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4부.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16-20) I,13,16 하나 되심 -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서 자신을 한층 더 분명하게 계시한 것 같이, 자신을 그리스도 강림사건에서 삼위로 더 친밀하게 계시하셨다. - 좋은 예로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 믿음, 세례를 매우 밀접하게 묶었기 때문에(엡4:5)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결되게 하였다: 믿음이 하나이므로 하나님도 한 분이라는 결론이 나오고124),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 즉 우리가 세례를 통해 한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하나님을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 그리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하실 때는, 이러한 엄숙한 선언을 통해 믿음의 빛이 벌써 완전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이다(이 선언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성자의 하나님 되심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심). 왜냐하면 이 선언은 아버지와, 아들, 성령으로 분명하게 나타나신 한 하나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다. - 이것으로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 존재에는 삼위가 계시며, 삼위는 한 분 하나님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 세례도 (세 가지 세례가 아니라) 하나의 세례이므로, 신자는 단 한 하나님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그분만을 믿어야 하는데, 그리스도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명하셨으면, 이것은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 한 믿음을 갖는 것을 의도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아버지, 아들, 영이 한 하나님이라고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 하나님이 한 분이시면, 말씀(성자)과 영(성령)도 하나님의 본체인 것이다. 아리우스파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성자가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그리스도는 피조된 신이다) I,13,17 삼위 - 반면에 성경은 아버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영을 구분한다. - 그러나 이 비밀이 너무 깊어서 우리가 이 차이를 생각할 때 큰 경외심과 신중함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 이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125)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매우 적합하다고 보겠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쌓이지 않고는 하나를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하나에 돌아오지 않고는 삼위를 나눌 수 없다“(거룩한 세례에 관하여) - 우리도 삼위를 셋으로 분리시킨 후에 즉시 하나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아버지, 아들, 영이라는 명칭은 실제적인 구분이며,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을 그분의 활동에 따라 붙여주는 별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126). - 그런데 이것은 구분일 뿐이며 분리가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다룬 것처럼, 아들이 아버지와는 서로 구분되는 특성127)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말씀은 하나님 곁에 계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 곁에서 자신의 영광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보내신 자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구분은 성육신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들은 먼저 독생자로서 아버지의 품에 계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요14:26; 15:26)고 하심으로써 성령과 아버지의 구분을 언급하셨다. 그리스도는 때때로 성령님을 자신과도 구분하셨다. 예를 들자면: „내가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요14:16) I,13,18 아버지, 아들, 영의 구분 - 성경에 보면 아버지는 사역의 시작이며 만물의 근원이 되시며, 아들은 지혜요 충고이고, 질서 있게 분배하시는 분이며, 성령께서는 능력과 활동이 돌려짐을 볼 수 있다. - 물론 아버지의 영원성이 아들과 영의 영원성이기도 하며, 영원성에는 먼저와 나중이 구분되지 않지만, 아버지가 첫 번째요, 다음은 아들이요, 그다음은 영이라는 순서가 있다는 것은 쓸모없는 빈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자동으로 먼저 아버지를 보고, 그다음에 그분에게서 나오신 지혜와, 마지막으로 아버지께서 작정하신 것을 실천하는 능력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아들은 단지 아버지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가지게 되며, 영은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서 나오신다. 로마서 8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바: 같은 영이 한 번은 그리스도요,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이“(롬8:9)의 영이라고 한다 - 베드로도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었다고 증거한다(벧전1:11128)). 그런데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분은 아버지의 영이었다고 한다. I,13,19 아버지와 아들, 영과의 관계. -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의 완전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바로 이러한 구분으로 말미암아 아들은 하나님과 함께 한 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리고 영도 아버지의 영이고 동시에 아들의 영이므로 영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증명된다. 왜냐하면 각 위(person, hypostasis)는 완전한 신적 성품과 또한 각기 특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 아버지는 전적으로 아들 안에, 아들은 전적으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요14;10)을 통하여 알 수 있다. - 어거스틴은 „구별을 의미하는 이 칭호들은 그들의 실체(substantia)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상호 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한 실체이기 때문이다(어거스틴, 편지238) -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이 구별을 매우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으로 불리고,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들로 불린다. 또한 아버지는 원래 하나님으로 불리며, 아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라고 불린다. 즉 그분이 아들에 대해 아버지시면 그분은 아들이 아니고,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아들이라고 불리면 그분은 아버지가 아니다. 원래 아버지라고 불리고 원래 아들이라고 불리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다(어거스틴 시편68) -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를 고려하지 않고 아들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분은 자존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일이며, 그를 유일한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아버지는 아들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에 관하여“의 제 5권에서 이러한 생각을 자세히 펼쳐나갔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깊은 숭고한 비밀을 뚫고 들어가서 공허한 사변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는 어거스틴이 진술한 삼위의 관계를 규정한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안전하다. I,13,20 삼위일체의 하나님 (정리) - 그러므로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만족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음의 중요한 것을 기억하자. -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이것은 우리가 세 person(위)이 단 하나의 본체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이름이 각 특성을 지칭하지 않을 때는, 이것은 아버지 뿐만 아니라 아들과 영도 지칭한다.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성 속에서 등장하면, 이것은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이때 우리는 위(person) 사이에 구분을 둔다. - 각 위의 특성이 서로간의 순서를 나타낸다면, 아버지는 시작이고 근원이다. - 아버지, 아들, 그리고 영이 동시에 언급될 때에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특별히 아버지께 적용된다. – 이것을 통해 존재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순서가 유지된다. 그러나 이 순서는 아들과 영의 신성을 조금이라도 손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주장하는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선지자들의 주님(여호와)이라고 증거하는 곳에서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항상 존재의 단일성을 생각해야 한다. - „주님“(여호와)이라는 이름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여기에서 주라는 이름이 여호와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단지 중보자 역할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경박하고 유치하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두 분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우리는 하나님과 아들 사이의 비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인의 관습대로 사도들은 하나님께 „여호와“라는 명칭 대신에 „퀴리오스“(주)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 사도 바울이 주님께 기도할 때 이것은 베드로가 요엘서에서 인용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기도한 것이다: "누구든지 주(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 욜2:32) - 사도 바울은 자세한 규정을 하지 않고 기도를 한 다음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덧붙였다(성부인지 성자인지 구분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끝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 (5부. 反 삼위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21-29) 5부에서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역할 때 삼위일체의 공격자들로 말미암아 얼마나 고심을 하였는가가 잘 나타난다. 그는 여러 명의 적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허점을 지적하며 삼위일체를 방어한다. 이곳은 우리가 삼위일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칼빈이 이곳에서 교부들을 많이 인용한 이유는, 그들이 주로 교부들의 인용을 들어서 삼위일체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교부들을 올바로 해석하고 인용했으며, 그들이 잘못 인용한 성구를 잘 해석함으로써 효과적인 방어를 했다. 325 니케아 신조에서는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동질(호모우시오스)이라는 말로 표현함으로써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381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를 완성하였다. 니케아 신조를 통해 아들과 아버지와의 동질의 신성이 확인되었지만, 적지 않는 비숍과 학자들이 이것을 마음으로 따르지 않았다. 381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니케아 신조를 확인하고 성령님의 논의까지 확정하여 삼위일체의 교리를 완성하기까지 많은 혼란을 거듭했다. 이곳에서 다음과 같은 파들이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유노미우스파, 유독시우스파, 반아리우스주의, 사벨리우스파, 마르셀파, 포티누스파, 아폴리나리스파. 이들은 비숍이나 학자들이었으며, 대부분 아리우스파의 변종이었다. 이것을 볼 때 당시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 후 중세까지는 비록 카타르파와 같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이 있었으나 삼위일체의 논의가 공식적으로는 잠잠했다. 르네상스를 거쳐서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서 반 삼위일체론자들이 나타났다. 그중에서 가장 맹렬하게 공개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비방한 자가 세르베투스(양식론, 단성론 주장)였고, 그가 화형을 당한 후에 그와 생각을 비슷하게 하는 자들 중에서 소시니(유니테리안)가 가장 뛰어났다. 그는 반 삼위일체주의로 영향력있는 교회를 세운 (폴란드에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성장하였다. 그들의 합리적인 기독교는 17세기 계몽주의와 19세기 성서비평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들의 교회는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오늘날 반 삼위일체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단체는 여호와 증인교이다. 그러나 이들은 세르베투스나 소시니와같은 인본주의자들의 사상과는 다르다. I,13,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든 사람에게 대한 경고 - 사단은 우리 신앙의 뿌리를 뽑고자 모든 시대에 걸쳐서, 한편으로는 아들과 영의 신적인 본질과, 다른 한편으로는 각 위의 구분에 대해 커다란 분쟁을 선동해 왔다129). - 사단이 거의 모든 세기에 불경한 사람을 선동하여, 그를 통해 이 문제로 정통적 교사를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에도 타다 남은 불에 새로운 불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여기에서 이러한 사람의 도착된 광란을 반박하는 것은 중요하다. - 지금까지 내가 가르친 것은, 주로 배우려는 사람을 인도하는 데에 있었지, 완고하고 싸움을 즐기는 사람과 논쟁을 벌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동안 조용하게 소개한 진리를 불경한 자들의 모든 비방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 우리는 말씀을 연구할 때, 말씀의 숨겨진 비밀 앞에서 냉정하고 신중하게 사색을 해야 한다. 특히 이 부분에서 이것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우리는 생각이나 언어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것을 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130). -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자신의 잣대로 측량하려고 하겠는가? 그는 태양이 어떠한 몸체를 가지고 있는지도 정확하게 모르는 주제가 아닌가? 그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 조금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본질을 자신의 힘으로 (성령의 도움 없이) 캐내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닌가? -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교부 힐라리우스에 따르면, 하나님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유일한 증거자시며, 인간은 단지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그대로 따라가며, 그분의 말씀 밖에서는 어떠한 지식도 찾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도를 받으려고 한다. - 한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 아들, 영의 구분을 깨닫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과 불평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사람이 자신의 호기심을 따라가다가는 미궁에 빠지게 되므로, 하늘의 계시 말씀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결론: 자신의 호기심이나 지적 욕구를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 말씀(계시)을 따라가자! I,13,22 세르베투스가 삼위일체를 거부한다 - 오늘날 세르베투스와 그와 동류의 여러 사기꾼이 등장해서 새로운 속임수로 모든 것을 혼란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그들의 속임수를 검토해보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 - 세르베투스에게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너무도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두 „삼위일체론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이들을 모두 무신론자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의 모든 모욕적인 언사에 대해서는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 그가 생각해낸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삼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셋으로 나뉜 한 하나님131)을 생각하는 자며, 이 삼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단일성에 반대되기 때문에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위(位, person)는 실제로 하나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우에 따라 우리에게 자신을 표현하시는 외적인 관념이다. ·애초에는 말씀이나 성령이 동일한 것이었으므로 하나님 안에 위의 구별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이래로, 다른 영도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하나님 곁에 있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이며, 이데아(관념)의 모상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그림자이다. 세르베투스는 그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장함으로써 이 두 위의 하나님에게서 신성을 빼앗았다: 신성의 분배량에 따라 아들과 영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들어 있으며, 그 같은 영이 우리 안에, 그리고 나무와 돌 안에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서 들어 있다고 하였다132). ·위(位, person)란 단지 하나님 영광의 보이는 형체에 불과하다133). 여기에 대한 칼빈의 반론: 말씀(Logos)이 세상의 창조 이전에 이미 계셨다고 사도 요한이 말하는 것은(요1:1), 그가 말씀이 단지 관념이나 영광의 보이는 형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말씀은 존재 양식이며, 단순한 하나님의 외관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한 명의 보이는 아들을 선택하심으로써 자신을 눈에 보이게 계시하였다. 반론: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신성은 단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 아들로 결정되었다는 데에 있다. ·칼빈이 가장 망측하다고 생각한 것은, 세르베투스가 아들과 하나님의 영을 모든 피조물과 혼합시킨 것이다. 이는 만물은 하나님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신자의 영은 하나님과 같은 영원성과 하나님과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인간의 영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도 하나님의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I,13,23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다 - 세르베투스가 빠진 이러한 늪에서 또 하나의 비슷한 괴물134)이 올라왔다. 몇몇 악한들은 세르베투스의 광란으로 야기된 수치를 피하고자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기는 했지만, 그 근거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버지만이 홀로 하나님이므로 아들과 영을 창조하셨고, 자신의 신성을 그들에게 주입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본래적 의미에서는 아버지 만이 하나님이다. - 이 내용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논의가 되었으므로 요약을 생략한다. I,13,24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성부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 성경에서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이 경우 모두 아버지만 의미한다는 반대자들의 주장은 많은 구절을 통해 쉽게 반박될 수 있다. - 생략….. I,13,25 삼위는 모두 신성을 소유한다 - 우리의 적의 오류는, 하나님 안에 세 명의 존재가 각각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존재들은 하나님의 한 부분씩 차지하는 셈이다. -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본질상 한 분이며, 따라서 아들과 영의 본질은 낳으신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물론 아버지께서 순서상 처음이시고,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당연히 신성의 시작이요 근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히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을 하지 않는 한은 낳으신 분이 아니다135). - 그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결국 4위를 가르친다고 헛소리한다. 즉 한 본질에서 부분으로 나누어진 세 위(person)와 본질 그 자체까지 합하면 4위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설명할 것. - 그러나 우리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위는 본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위를 구분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는 한 본체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 만약 위가 본체와 분리가 되는 것이라면 반대자들의 주장이 옳다. 그렇다면 이것은 (각각의 분리된) 세 하나님의 일체가 되며, 이것은 한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지니고 계신 세 위들의 일체(삼위일체)가 아니다. 이것이 그들의 무미건조한 질문, 즉 하나님의 본체가 삼위일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협력하였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이 된다. 그들은 우리가 마치 세 하나님이 한 본질에서 나왔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러한 잘못된 질문을 던진 것이다. - 그들은, 만약 우리가 한 본질에서 세 하나님이 나왔다는 생각을 거부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없는 삼위일체를 주장한다고 무식한 소리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체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각 위는 이 한 본질 없이는, 혹은 이 본질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신격(Gottheit)은 자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들을 하나님으로서 자존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며, 단지 그의 위(person)에 대해 말할 때에는 성부로부터 오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본체는 시작이 없으나 그의 위는 하나님 안에서 시작이 있다. I,13,26 성육하신 말씀이 아버지께 복종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르침을 부정하지 않는다 -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본래적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신격의 시작이므로 아버지에게만 하나님의 명칭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순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하신 말씀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가 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말씀하실 때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계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자신의 위엄이 감소한 것이 아니다. 그분이 자신을 비웠다고는 하지만(빌2:7), 그가 창세 이전에 성부 곁에서 가지셨던 영광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잠시 천사 이하로 낮추셨다고(히2:7,9)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분은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에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자신도 그에 속하는 신격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가 사도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기 때문이다“(요16:7; 14:28)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영원한 신격과 관련하여 자신이 아버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일종의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말씀으로서, 자신이 하늘의 영광을 소유하고 계신 분으로서 신자들을 이 영광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있는 자신에게서 볼 수 있는 영광의 정도는 하늘에서 보이는 자신의 완전한 영광의 광채와는 구분이 되기 때문에 아버지가 더 높은 위치에 계신 분이라고 하셨다. -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로만 이끄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에게도 이끄시고자 오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아버지께만 한정시키고 아들에게는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다“(요1:1)라고 말한 것은, 누구도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못한 이류의 신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신을 날조한 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된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를 성부의 신격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들은 유일한 하나님이 아닌 신(이 등급의 신 = 성자)이 참된 신인 것처럼 착각하며, 이입된 신성136)이라는 말이 그들이 꾸며낸 새로운 허구가 아닌 것처럼 착각한다. I,13,27 적대자들은 이레네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 삼위일체 가르침의 반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네우스의 많은 구절137)을 수집하였다. - 그런데 이레네우스의 논쟁의 대상자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주장한 바보 같은 사람 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하나님도 계시된 적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영광을 돌린 그 하나님이라는 것을 자주 주장한 것은 조금도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 이차에 우리는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주장한다. 만약 누가 그분은 성부였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격을 옹호할 때 우리는 아버지의 신격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네우스의 의도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저서 3권 6장을 읽어도 논쟁은 종식될 것이다. 그의 주장은: 진정한 유일한 하나님은, 성경에서 분명히 구분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바로 논쟁의 초점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선지자와 사도들에 의해 „하나님“이라고 불리워졌다고 주장한다(III,9) - 그는 그다음에, 주님이시며 왕이시며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하나님에게서 어떻게 자신의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논쟁한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에 자신의 낮추심에 관련해서 설명한다138). - 다시 조금 후에 아들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시요, 모세의 손을 통해 율법을 주신 분이요,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분이라는 것을 주장한다(III,15). 이것을 보면 적대자들이 이레네우스를 얼마나 잘못 인용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 그는 또한 IV,9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함께 유일하신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I,13,28 터툴리안의 말을 근거로 하는 것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 그들이 터툴리안을 그들의 옹호자로 삼는 것도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는 표현방법이 때때로 거칠고 모호하기도 하지만, 가르침의 중심 부분에서는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성자)은 순서에 따라 존재하며, 하나님은 본체(substantia)의 단일성을 통해 한 분이시고, 이 단일성은 활동(사역)의 비밀 안에서 삼위일체로 배열이 된다. 즉 삼위의 존재는 지위가 아니라 차이에 따라, 본질이 아니라 형태에 따라,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위의 순서에 따라 배열된다. - 그는 프락세아스를 대항해서 싸웠다: 하나님이 삼위(person)로 구별이 되지만, 그것 때문에 몇 명의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프락세아스가 갖은 환상의 나래를 펴서 그리스도는 동시에 아버지가 되어야만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삼위를 구분하기 위해 매우 노력하고 있다. 이 와중에서 그가 말씀과 영은 전체의 한 부분이라고 한 것은 거칠게 표현한 것이지만 용서를 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 표현을 본체(substantia)에 적용을 시킨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순서와 각 위에게 해당하는 사역(dispensatio)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 이 정도로써 파렴치하게도 터툴리안의 권위를 빌려서 순진한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사람에게 반발을 하고자 한다. I,13,29 교회의 인정을 받은 모든 교부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확증하였다 - 고대 교부의 저서를 면밀하게 검토한 사람은 누구나 이레네우스의 가르침이 그 이후에 등장한 사람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져스틴139)은 교회의 초기 교사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가르침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일치한다.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기를, 그와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유일한 하나님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님을 암시). 그런데 교부 힐라리우스도 같은 말을 했고, 더 나가서는 „영원은 아버지께(만)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가 아들로부터 하나님의 본체를 박탈하려고 그런 말을 했겠는가? 그럼에도 힐라리우스가 그들의 (잘못된) 주장의 옹호자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여기저기에서 그의 말을 수집해서 그것을 증거로 내세우는 파렴치한 사람이 있다. - 이그나티우스140)의 말을 인용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가짜 서신141)에서 인용한 것이므로, 그들은 먼저 그 문서들의 진정성을 증명해야 한다. - 고대 교사들 사이에 서로 일치가 있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는 이미 교회의 인정을 받고 있는 학자들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을 옹호할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 이 악한들이 가장 미워하는 어거스틴은 교부들의 저작을 얼마나 면밀하게 연구하고 그것들을 존경하는 태도로 다루었는가? 그는 그들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왜 그가 달리 생각을 해야 하는지의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삼위일체의 논의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애매모호한 것이 있으면 들추어내어 논의를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들이 반대하는 그 교리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이견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믿고 있었다. - 이상의 나의 고찰을 통해, 지금까지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 믿음의 순수성을 왜곡하고 어둡게 하려는 사단의 시도가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을 경건한 독자는 깨닫기를 바란다. 내가 이 가르침의 중심부분을 성실하게 설명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고 골치 아픈 논쟁에 가담하지 않으려면 그들의 호기심을 제어해야 한다. 무분별한 사변을 즐기는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 나의 임무는 아니다. 내가 교회를 세우는 데(건덕)에 애를 쓰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많은 것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창조와 섭리] 제14장: 성경은 창조에 관한 기록에서부터 참 하나님과 모든 거짓 신들을 분명한 특징들을 통해 구별한다. [1부 6일간의 창조 사역: 1-2] I,14,1 우리는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넘어서는 사변에 빠지면 안 된다 (계시에 머물러라! à 계시의존 사색) - 하나님께서 창조 역사를 성경에 기록하신 이유가 있다: 우리가 창조에 관한 확실한 지식이 없어서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교회의 믿음이 창조신앙에 확고히 서서 다른 신을 찾지 않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만을 기반으로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은 이교도의 창조 신화에 빠진다. ·혹은 철학자들의 공허한 사변에 넘어간다: 하나님은 세계정신이다142). - 창조역사에는 시간이 표시되어 있으므로 신자들은 끊이지 않고 연속되는 햇수로 거슬러 올라가면 만물의 기원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은 시초가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원과 뚜렷하게 대조시키시고, 우리가 영원성에 대해 경탄을 하게 하신다. - 육천 년 전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그전의 수많은 기간에 하나님이 심심하셨겠다고 조롱하는 사람에게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겸손을 시험하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감추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 못된다143). 어느 뻔뻔스러운 사람이 어느 노인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이전에 무엇을 하셨는가하고 묻자, 그는 호기심 많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시고 계셨다고 대답하였다144). - 성경은 안경과 같아서 우리의 희미하고 무기력한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며,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방지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에는 꼭 성경이 인도하는대로 따라가야 한다145).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계선(울타리 = 성경)을 주셨다. 우리의 생각은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이 울타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이 울타리 안에서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세상의 영광스러운 광채로 가득 채울만한 것들이 충분히 있다. I,14,2. 6일간의 사역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준다 -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에 아니라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하루를 안식일로 정하심으로써, 우리가 일생 이 창조사역을 바라보고 경탄하게 하셨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이러한 것을 잘할 수 없으므로 안식일 하루를 정해 믿음의 순종으로 하루를 거룩하게 함으로써,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바라보며146) 찬양해야 한다. - 순서대로 질서 있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부성애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세상에 모든 좋은 것을 가득 채우신 후에 아담을 창조하셨다! 만약 그분이 황량하고 빈 땅에, 혹은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 아담을 창조하셨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복에 관심에 없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해와 별의 운행을 조정하시고, 땅과 하늘과 물에는 생물로 채우시고 풍부한 과실로 식량을 주실 때에, 앞을 내다보시며 열심히 일하시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책임을 다하시는 아버지처럼, 우리에 대한 자신의 선하심을 보여주셨다. [2부 천사론: 3-12] I,14,3 하나님은 만유의 주시다 - 인간의 본질에 대해 자세히 논하기 전에 먼저 천사에 대해 잠시 언급을 하고자 한다. 이 논의는 많은 잘못된 (특히 가톨릭) 가르침을 반박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 모세가 창조기사에서 천사를 다루지 않은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이해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의 단순한 이해력에 적응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천사를 하나님의 봉사자로 언급한 것을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 마니교도들은 하나님과 악마라는 두 원리를 고안해 내었는데, 하나님은 선의 기원이요, 악마는 악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원성과 자존성(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만 속한 하나님 고유의 속성이므로, 악마가 원래부터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그에게 이러한 속성을 부여한다면, 악마도 신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에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등한) 지배권을 부여한다면147),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에 있는가? - 마니교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선이신 하나님께서 악한 존재를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48). - 그러나 인간이나 악마의 악함과 모든 죄악은 악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인간 안에 악이라는 실체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악함이 나온다. 타락 전에는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지혜와 의가 드러나지 않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었다(사단도 훌륭한 존재로 지어짐). 니케아 신경도 이 사실을 인지하여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말할 때, 보이지 않는 것에서도 (영적 세력) 언급했다. I,14,4 우리는 천사에 대해서도 사변에 빠질 것이 아니라 성경의 근거를 연구해야 한다 - 천사들(사단을 포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규정된 하나님의 종으로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모세는 „천지와 만물149)이 다 이루니라“(창2:1)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더 자세히 들여다 볼만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 별들 외에 보이지 않는 천군 천사가 며칠째에 창조되었는지를 따질 수 있겠는가? - 즉, 우리는 모든 기독교의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겸손과 소박함의 규칙을 떠나서는 안 된다: ·첫째 규칙은: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알려진 것 외에는 감추어진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야기하거나 생각하거나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둘째는,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늘 건덕150)에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서 명상해야 하며, 호기심에 빠지거나 쓸모없는 것을 탐구하는 데에 마음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를 진정한 경건과,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올바른 신뢰와 삶의 성화에 대해 가르치려고 하시므로, 우리는 이러한 지식으로 만족해야 한다 à 성경(신학)공부의 목적을 잘 생각해 볼 것. - 따라서 우리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떠나 천사의 성질과 계급, 그들의 숫자에 대해 가르치는 공허한 사색을 떠나야 한다. 신학자의 임무는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과 확실한 것과 유익한 것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강화151)시키는 데에 있다. I,14,5. 성경에 나타난 천사의 명칭 - 천사는 하늘의 영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명령을 수행하시기 위해 그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러한 명칭(천사= 보냄을 받은 자, 심부름하는 자)이 주어졌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기 위해 중개인이나 심부름을 하는 자로 사용하신다. - 그들이 천군이라고 불리는 것은(눅2:13), 그들이 근위병처럼 왕을 옹위하여 왕의 이름을 장식하며, 군인처럼 그들 대장의 몸짓에 따라 즉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이 심판대에 오르실 때, 하나님 앞에서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서 있다고 하였다(단7:10) - 그들의 명칭: ·주님께서 자기 손의 권능과 능력을 그들을 통하여 나타내시므로 그들은 권세라고 불린다(엡1:21; 고전15:24). ·하나님은 세상에서 그들을 통해 자신의 명령을 시행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정사(政事), 권세, 주관하는 자(골1:16; 엡1:21; 고전15;25)로 불린다. ·보좌(골1:16)라고도 하지만, 이것은 달리 해석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제외될 수 있다. - 몇 명의 고대 교부들이 아브라함, 야곱, 모세와 또한 다른 이들에게 나타난 천사가 그리스도였다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창18:1; 32:1, 28; 호5:14; 삿6:14; 13:22). - 그러나 천사 전체를 두고 말할 때에는 그들에게 „신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곳이 몇 군데 있다. 그것은 놀랄만한 일이 못된다. 왜냐하면 왕들이나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도 신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훨씬 분명하고 능력있게 나타내는 천사들에게 신이라는 명칭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정리: 천사의 다른 명칭은 천군, 권세, 정사, 주관하는자, 보좌, 신. I,14,6. 신자의 보호자이며 조력자인 천사 - 천사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관리하고 나누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 경비를 보며, 우리를 변론하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우리가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 다음의 두 성경 구절은 먼저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께 적용이 되고, 그다음에 모든 신자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시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시34: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보호하려고 하시는 자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 이 말씀이 실제로 적용된 예는: ·천사가 도망가는 하갈을 위로하고 여 주인 사라와 화해를 하라고 한다(창16:9) ·아브라함이 천사가 길을 인도할 것이라고 그의 종 엘리에셀에게 약속했다(창24:7)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기를, 자신을 모든 악에서 구하신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도 축복하기를 원한다고 했다(창48:16) ·한 천사가 이스라엘의 병영을 지켰다(출14:19; 23:2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들의 적으로부터 구원하실 때, 하나님이 천사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구원자를 일으키셨다(삿2:1; 6;11; 13:3 이하) ·천사가 그리스도를 섬겼고(마4:11), 두려워하실 때에 함께 했다(눅22:43) ·천사들이 여자들에게 그의 부활을 알려주고 제자들에게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선포하였다(마28:5,7; 눅24:5; 행1:10) - 천사들이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단과 우리의 모든 적들과도 싸우며,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책벌을 수행한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예루살렘을 포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의 앗수르 군사를 쳤다(왕하19:35; 사37:36) I,14,7. 수호천사들이 있는가? - 각 신자에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한 명의 보호천사가 배정되어 있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분명한 것은 다니엘이 페르시아의 천사와 그리스의 천사를 언급한 것은(단10:13,20; 12:1), 천사가 국가나 지방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어린이들의 천사들이 항상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하셨는데(마18:10152)), 이것은 어린이의 안전을 위해 위탁받은 천사가 있음을 의미한다. -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각자의 천사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한 천사가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천사가 같이 우리의 안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회개가 필요없는 99명의 의인보다, 회개를 하고 돌아온 한 죄인에 대해 모든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했다(눅15:7). - 따라서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을 안다면, 개인을 위한 수호천사가 있는지를 논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I,14,8. 천사의 계급, 수와 형태 - 천사의 수와 계급에 대해 더 정확한 진술을 하고자 하는 자는 성경에 확실한 근거를 두어야 한다153). 다니엘은 미가엘을 가리켜 „대 군주“라고 부르고 있고(단12;1), 유다는 그를 천사장(유9)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나팔 소리와 함께 사람을 심판의 자리에 모으는 자가 천사장이라고 했다(살전4;16). 그러나 누가 이상의 몇 구절을 근거로 천사들의 존귀의 정도를 결정지으며, 특징과 계급을 구분하며 각자에게 그들의 직분을 배정할 수 있겠는가? -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나는 두 이름, 즉 미가엘과 가브리엘, 그리고 토비트서에 등장하는 라파엘까지 고려한다면(토비트12:15), 그 이름은 우리의 약한 이해력 때문에 구분이 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 천사의 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는 12군단 이상(마26:53)이라고 하셨고, 다니엘은 „천천이요… 만만이며“(단7:10)라고 한다. - 형태에 관해서는, 영적인 존재는 형태가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 이해의 정도에 맞추어 그룹이나 스랍들을 날개를 가진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번개처럼 빨리 우리에게 도움을 주러 올 수 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 더 자세한 질문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야 완전히 계시가 되는 비밀에 속하는 것으로 믿고, 지나친 호기심으로 이것 이상으로 나가는 만용을 삼가야 한다. I,14,9. 천사는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다 - 천사는 섬기는 영(히1:14)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순종의 봉사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며, 그분의 자선을 이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여러 일들을 시행하도록 하신다. - 생략 - I,14,10. 천사에게는 신적인 영광이 속하지 않는다 - 이제 우리는 또 한가지 미신에 대항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선한 것이 천사들 활동의 덕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광을 천사에게 돌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단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 그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백 년 이래로 천사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광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다. - 사도 바울이 이 문제 때문에 신도들과 싸우지 않았는가? 그들은 천사를 그리스도와 대등한 관계로까지 높였다. 그래서 그는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보다 높으신 분이며 그분이 그들이 받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라고 매우 준엄하게 가르치고 있다(골1:16,20). 천사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 물론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광채가 빛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놀라서 실수로 그들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께 속한 것을 그들에게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요한이 계시록에서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다음과 같이 천사의 소리를 들었다: „나는 …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19:10) I,14,11. 하나님은 천사를 사용하시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사용하신다 -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자하심을 보이시고 우리의 안녕을 보살피시는데 있어서, 직접 자신의 권능으로 행하시지 않으시고 천사를 사용하시는가? 이것은 어떠한 필연성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에는 천사들을 사용하시지 않고, 스스로 사역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하지 않으신다. - 즉 하나님께서 천사를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위로하시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확신을 강화시키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신다는 약속 하나님으로 충분한 것이지만, 우리가 많은 위험이나 조급함, 많은 적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연약하여지고 공포와 절망에 빠지기 쉽다. 이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그분의 은혜를 거두에 가신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약속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위험이 우리를 위협하든지 간에 우리의 안녕을 보살피는 무수한 보호자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 우리가 하나님만이 우리의 보호자라는 약속을 받고도 계속하여 „도움이 어디에서 올꼬“하고 도움을 찾는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관용과 친절로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모습으로) 도움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큰 은사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서는 엘리사 종의 예를 들겠다: - 그가 시리아 군이 산 전체를 덮은 것을 보고, 도망갈 길이 없음을 알자 자신과 엘리사가 죽게 된 것과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그의 눈을 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그는 곧 자기와 엘리사를 보호하는 불 말과 불 병거, 즉 무수한 천사들이 산 전체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왕하6:17). 그가 이것을 보자 힘을 차리고, 바로 전에 보기만 해도 죽을 것만 같았던 적들을 대항하여 무시할 수 있었다. I,14,12. 천사는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 그러므로 천사들의 직무에 관해서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확실하게 하고 우리의 희망을 하나님께 두게 하려는 목적을 섬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세우신 천사 때문에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 아브라함의 종은 천사의 보호를 받으면서도(창24:7) 천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기도하며, 아브라함에게 주님의 자비하심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창24:7).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누어 주고자 그들을 자신의 능력과 선하심의 전달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며, 우리가 우리의 신뢰를 하나님과 천사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신 것도 아니다154). [3부 악마론: 13-19] I,14,13. 우리 원수는 얼마나 위험한가? - 성경은 왜 마귀에 대해 가르치는가? 이것은 우리가 그의 술책과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음모에 주의를 하고, 우리가 강한 무기로 무장해서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이 적에게 저항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사단은 누구인가? ·이 세대의 하나님이요(고후4:4)155), 이 세상의 왕(요12:31156))으로 불리고, 강한자요(마12:19) 공중의 권세잡은 자이다(엡2:2157)) à 사단의 능력. ·삼킬자를 찾아다니는 표호하는 사자이다(벧전5:8158)): 그가 하는 일은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짓게하여, 타락시키는 일이다 à 사단이 하는 일. - 사도들이 사단을 이렇게 묘사하는 이유는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용감하게 사단에 대적(반항)하라는 의미이다. -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으로(인간적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왕, 어둠의 왕과 악한 영들에게 대항하는 것이다159)“(엡6:12)라고 한다. 그래서 바로 다음 절에는 우리가 그 위험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무장을 하라고 한다. - 사단은 매우 대담하여 늘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고, 능력이 뛰어나며, 교활한 술책에 능란하며, 지칠줄 모르는 열심을 가지고, 민첩하며, 모든 종류의 술책에 능하며, 우리를 늘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방비 상태와 게으름에 빠졌을 때 적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고, 우리가 늘 대적할 수 있도록, 우리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용감한 정신으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160). - 우리의 이러한 사단과의 싸움은 우리가 죽어서야 끝나는 것이므로, 성경은 우리가 끝까지 인내하도록 경고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연약하고 싸움에 지혜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에게 충고와 힘과 용기와 무기를 제공하시기 때문이다. I,14,14. 악의 왕국 - 성경은, 우리가 이러한 싸움을 더 능력있게 수행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고무하기 위해, 우리의 적이 소수가 아니라 대군이라고 말한다. - 즉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었고(막16:9), 한 군단의 악령이 한 사람을 점령했다고 한다(눅8:30). 이것을 통하여 볼 때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적들과 싸워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태만에 빠져있을 겨를이 없다. - 그런데 사단이나 마귀가 자주 단수로 언급되는 것은, 의의 왕국에 대적하는 하나의 악의 지배(왕국)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교회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음과 같이, 불신자의 무리와 불경 자체도 그들을 지배하는 그들의 왕과 함께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라고 말씀하셨다161). I,14,15. 화해할 수 없는 싸움 -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 이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 이 영광을 소멸시키고자하는 사단에게 모든 힘을 기울여 대항해야 한다162). 사단은 어디에서나 하나님과 우리의 대적이므로, 이 사실은 우리가 끊임없이 사단과 대항해서 싸우도록 우리의 마음을 불붙여준다.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려고 한다면 – 이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왕국을 무너뜨리려는 사단과 타협할 수 없는 전쟁을 해야 한다. - 또한 우리가 구원에 가장 마음을 두고 있다면163), 우리는 늘 교묘한 간계로 우리를 멸망시키고자 애쓰는 자에 대해 안심을 한다거나 휴전 협정을 맺을 수가 없다. 그리고 창세기 3장에는 사단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그는 인간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순종을 거부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빼앗고, 인간을 파멸로 빠트린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그를 „원수“(마13:28)라고 불렀으며, 그는 영생의 씨앗을 멸망시키기 위해(마13:25) 가라지를 뿌리는 자라고 한다. - 요약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는 태초부터 살인자요,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그의 모든 행동에서 체험할 수 있다(요8:44). 왜냐하면, 거짓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여 싸우며, 어둠으로 빛을 덮으며 인간의 마음을 오류 속에 가두어버리며, 증오를 일으키며,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게 한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고 인간을 영원한 파멸로 잡아끌려는 것이다164). I,14,16. 사단은 하나님의 타락한 피조물이다 -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그의 악한 본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타락에서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타락과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스스로 심판을 불러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지금의 악한 모습 그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거짓말을 하면 제 것으로 한다고 하시며(요8:44), 그 이유도 말씀하신다: 그는 진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가 진리에 서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처음에는 진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시며, 그를 거짓의 아비라고 부르신 것은, 자신이 가져온 멸망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다. - 우리는 사단에 대해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 그가 타락하고, 타락의 이유와 방법, 시기, 타락의 과정에 대해 불분명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데, 쓸모없는 이야기로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은 성경의 위엄과 맞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덕(德)이 되지 않는 것은 가르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우리에게는, 사단이 창조시에는 하나님의 천사였으나 타락했으며, 다른 존재를 파멸시키는 파멸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단의 성질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유익하므로 베드로와 유다는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벧후2:4).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다6) I,14,17. 천사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 - 사단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여서는, 그리고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단이 하나님께 거역하고, 하나님과 싸운다고 해서, 사단이 하나님과 대등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165). - 욥기에서 보면,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나왔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감히 어떠한 일도 완수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욥1:6; 2:1). 아합이 속임을 당하게 되었을 경우에도 사단은 거짓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들어갔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시고, 사단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다(왕상22:19-23 이하166)) -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사울을 괴롭힌 여호와의 악신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마치 회초리로 벌을 받는 것처럼, 불경한 왕의 죄가 사단에 의해 응징되었다(삼상16:14; 18:10) 사단과 영 불화의 영: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삿9:23) 거짓 영: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왕상22:19-23) 생각을 어지럽게하는 영: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어지러운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을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The LORD has poured into them a spirit of dizziness: NIV)(사19:14) 양심을 흐리게 하는 영: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사29:10) - 다른 곳에서는 애굽인들이 당한 재해는 악한 천사들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시78:49167)) - 사도 바울은 일반적으로 불신자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했는데(살후2:11), 바로 전에는 이를 사단의 역사라고 불렀다(살후2:9168)) - 결론적으로 분명한 것은: 사단은 하나님의 권능하에 있으며, 하나님의 손짓에 따라 그는 어쩔 수 없이 순종하게 되어있다. - 물론,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과 반대가 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사단의 의지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루는 사역의 결과에 대한 것이다. 그는 물론 그의 악한 의지로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권능의 고삐로 그를 단단히 붙들고 계셔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시는 일만 하도록 하신다. -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원치않게도 창조주를 순종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대로 그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I,14,18. 승리의 확신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귀신들을 지배하시므로, 그들이 신자들을 믿음의 싸움에서 괴롭게 하도록 하시며, 신자들을 기습하고 여러 모양의 습격으로 불안하게하고, 싸움에서 곤경에 빠뜨리고, 자주 피곤케 하고, 혼란케 하며, 두려워하게 하며, 때로는 상처를 입게 하시지만, 그들은 신자들을 이기지도 못하고 억압할 수도 없다. - 그러나 악령들은 불신자들을 정복하여 그들의 영과 육을 지배하며, 그들은 모두 노예처럼 모든 수치스러운 행위를 하게 한다. -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러한 악령으로 말미암아 불안해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권고에 주의해야 한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5:8-9). -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이러한 투쟁을 해야 했다고 고백을 한다: 그의 교만을 억제하기 위해 그에게 „사단의 천사“가 주어졌다고 한다(고후12:7). 그러므로 이러한 훈련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공통된 것이다. - 사단의 머리가 상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은 그리스도에게 관계가 되는 것이고, 그와 함께 그분의 모든 지체들에게도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사단에 의해 정복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때로 불안에 빠지지만 다시 힘을 차려서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큰 타격에 못이겨 넘어지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나고, 상처를 당해도 죽지 않는다. 즉 그들은 일생 힘든 싸움 가운데에 있지만,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것이다. - 물론 우리는 패배할 때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의로운 복수를 하시고자, 그를 한 동안 사단에 내어 주어 그가 사단의 사주를 받아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삼하24:1169)) ·그리고 사도 바울은 사단의 올무에 걸려있는 자들에게 까지도 아직 죄사함의 희망이 있다고 보았다(딤후2:25-26170))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창3:15의 메시아 약속이, 우리가 아직 싸워야하는 이생에서도 효과를 나타내서171), 이 싸움이 끝난 후에 완전히 성취된다고 한다(롬16:20172)) -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는 이러한 승리가 늘 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왕은 그분께 어떠한 해도 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의 지체인 우리에게는 이 승리가 부분적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를 항상 연약하게하는 육신을 완전히 벗어버릴때,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완전하게 입을 때, 그 승리는 완전해질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단을 이기셨으며, 그의 모든 세력을 타파하여 그가 교회에 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셨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매 순간 수백 번 짓밟혔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연약하고, 사단이 이처럼 강력한데, 우리가 우리 인도자의 승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의 다양하고 교활한 공격을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시고, 단지 불신자와 불경한 자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 그래서 성경은 사단이 그리스도에 의해 쫓겨날 때까지 세상을 소유한다고 한다(눅11:12). 그리고 그는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의 생각을 혼미하게 하신다(고후4:3-4173)). - 그리고 그는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서 역사하신다고 한다(엡2:2). 불신자들은 모두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에 이 말은 사실이다. 이들은 그들의 아비 마귀로부터 나왔다고 한다(요8:44).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고 있는 것처럼, 불신자들은 사단의 형상을 지니므로 사단의 아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요일3:8-10174)) I,14,19. 마귀는 인간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재이다 - 자, 이제 우리는 천사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일으키신 영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천박한 철학을 반박하고자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단이란 우리의 육신이 우리에게 주는 나쁜 감정이나 혼돈된 생각에 불과하다고 수다를 떠는 사람에게도 반박을 해야 한다175). - 마귀(더러운 영)가 실재한다는 성경의 증거: ·본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변절한 천사(유6) ·그리스도와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를 사단의 자녀(불신적 유대인)와 비교함(요8:41176); 요일3:10) ·사단은 처음부터 죄를 지었다(요일3:8) ·천사장 미가엘과 마귀와의 싸움을 언급한다(유9) - 하나님께서 마귀들을 심판한다는 구절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보여준다: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8:29)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2:4) [4부 창조의 올바른 이해: 20-22] I,14,20. 창조의 위대함과 부요함 - 이제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극장(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감탄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감상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눈을 돌리는 곳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이것들을 창조하셨는지를 경건한 마음으로 상고한다면, 이것은 믿음을 위한 최상의 증거(성경 = 특별계시)는 아닐지라도, 자연질서에 따른다면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을 올바른 믿음으로 깨닫기 위해서는177)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세가 우리에게 잠깐 보여준 세계 창조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à 자연계시는 특별계시로 들어가는 통로이다. 우리는 특별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더 자세히 배울 수가 있다. - 창조계시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무(無)로써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 후에 짐승과 무생물을 창조하셨고, 이것들은 한량없이 다양하면서도 놀라운 질서로 서로 구분이 되며, 각기 종류에 따라 특성으로 구분하시고, 각자에게 임무를 주시고, 그들이 살 장소와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멸절당하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 보존되도록 섭리로 보존하신다. -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그를 아름답게 장식하시고 많은 훌륭한 은사로 축복하셨으며, 그를 그분의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만드셨다. 내가 여기에 더 자세히 언급하는 것보다, 독자가 창세기를 통하여 좀 더 자세하게 배우는 것이 좋겠다. I,14,21.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하나님의 창조를 어떠한 관점에서, 그리고 어떠한 목적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이미 다른 곳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으므로, 지금은 본 장에 관계되는 것만 몇 가지 언급하려고 한다. -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 능력, 의와 선하심이 하나님의 작품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 어떠한 표현도, 미사여구도 그와 같은 위대함에 근접할 수 없다. -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이러한 거룩한 명상에 잠기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피조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한 지혜와 의, 선함과 능력을 스쳐가듯이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진지한 마음으로 하여,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이신 것을 아는 참된 신앙이란,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통해 계시하신 능력과 선하심을 감사하지도 않고 생각없이 스쳐가고, 또한 쉽게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과, à 감사! ·둘째로, 그가 이것을 마음속에 깊이 깨닫고 자신의 삶에 적용할 방법을 아는 것이다 à 신뢰! - 첫 번째 것에 대해 좀 더 생각을 해 본다면: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들을 질서있게 정렬을 하셨을 뿐 아니라, 한 무리는 고정시키시고 다른 한 무리는 움직이게 하셨지만, 그들이 궤도를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신 그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야말로 어떤 예술가 신가를 우리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별들의 운행을 기묘하게 조성하시어, 밤과 낮, 달과 해, 그리고 계절을 구분하셨고, 날의 길고 짧음을 잘 조절하셔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셨다. ·그 외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인간이 세상의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을 들어서 설명을 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고 큰 각종의 사물과 생물이 세상에 수없이 많이 있듯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과 그분의 선하심과 지혜를 나타내는 표시와 증거가 그만큼 많이 있기 때문이다. à 신자는 삶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대 자연을 보며 하나님의 창조를 감탄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주일에도 일어나야 한다. I,14,22.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볼 때 절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과 신뢰가 우러나와야 한다 - 둘째 것은 믿음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제정해 놓으신 것을 알 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우리 자신에서와,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은사에서 느낄 때, 우리는 그분만을 신뢰하고, 그분께 구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만드셨다는 사실을 창조의 순서를 통해 보여주시려고 하셨다. -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은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완벽하게 창조하는 것은, 그분에게는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하시는 것과 똑같이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엿새 동안의 창조를 통해,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 부성애적인 배려를 나타내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 무한히 자비하신 아버지의 섬세한 보살핌을 의심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망은 이겠는가? - 우리가 출생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넘치게 준비하신 것을 알고서도, 우리가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혹시나 한번이라도 우리를 떠나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면서 불안에 떤다는 것은 얼마나 믿음이 없는 행위인가? - 더욱이 창1:28에 보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예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빈말로 우리를 속이려고 하신 것이 아님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결핍이 없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부를 때마다, 우리는 동시에 그분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것을 권능으로 관리하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의 신실함과 보호 속으로 받아들여져서 양육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단지 그분에게서 받을 것을 기대하고, 우리에게 구원에 필요한 것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는다는 것을 신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단지 하나님에게만 두어야 한다. -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든 필요하다면 우리의 시선을 단지 하나님께로만 돌려야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좋은 것은 그분이 주시는 축복으로 인식하고, 그분께 감사함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à 이 부분은 특별히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일을 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풍족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의 길이란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가장 험한 길이요, 가시밭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제15장: 인간의 창조: 인간 정신의 능력, 하나님의 형상, 자유의지, 인간 본성의 원초적 순결178) I,15,1.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순결하게 지으셨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 -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 지혜, 선하심이 가장 잘 나타나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꼭 알아야 할 두 가지 사실은: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창조되었는가? à 인간 본래의 모습 ·우리가 아담의 타락 후에는 어떻게 변했는가? à 인간이 타락한 모습 - 우리가 끔찍한 파멸로 말미암아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부패하고 또한 원래의 상태와 멀어졌는가를 알려면 먼저 우리 본래의 고결한 인간성에 대해, 즉 우리가 애초에 어떠한 모습으로 창조되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 또한, 내가 앞에서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하여 자세히 지적했을 때, 하나님이 이 악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도 변호해야 한다. 우리의 육은 모든 핑계를 동원하여 자신의 죄과를 남에게 전가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악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변증해야 한다: ·불신자들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악한 것에 하나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이 벌을 받게 되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께 항의하여,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죄과를 하나님께 돌린다. ·또한 경건한 언어로 인간의 고귀함(신격)을 강조하면서도, 그들의 부패의 책임을 인간의 본성에 돌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 모독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179).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인류의 본성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그러면 처음부터 이러한 모든 변명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해주신 순결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다루게 될 것이다. - 그전에 또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야 교만이 꺾인다. 인간이 자신이 부분적으로는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할 수가 없다. I,15,2. 혼180)이 육체와 다른 점 - 인간이 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 혼이란 비록 피조된 것이지만 불멸의 것이며, 인간에게 있어서 고귀한 부분이다. 혼은 때때로 영181)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혼이라는 말과 같이 등장하면 서로 다른 의미가 있고, 혼자서 등장하면 혼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실 때에 하나님께 자신의 영(프뉴마)을 맡기시고(눅23:46), 스데반도 그리스도께 자신의 영을 맡겼다(행7:58). 이것은 혼이 육신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그들의 보호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 혼이 실체이며 불멸하는 것이라는 증거: ·어떤 사람이 혼을 영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호흡, 혹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에 불어 넣은 능력이라서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성경 전체를 볼 때 어리석은 잘못이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흑암 가운데서 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빛은 완전히 꺼지지 않아서 영원성에 대한 의식은 아직 남아있다. 왜냐하면 양심은 선과 악을 구분함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역할을 하므로, 이것은 인간 혼의 불멸성에 대한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혼이 실체가 아니라 단순한 운동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설 수가 있으며, 자신의 죄책을 확신하여 공포에 떨 수가 있겠는가? ·또한 육체는 혼에 부과되는 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가 없고, 다만 이 벌은 혼에만 해당된다. 그러므로 혼은 자신만의 실체가 있어야 한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사실이, 이 보이는 세계 이상을 생각해낼 수 있는 영은 불멸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한다. 왜냐하면 영이 없는 존재(짐승이나 식물)는 생명의 근원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182)은 놀랄만한 은사로 가득 차 있으므로 이것은 인간에게 신적인 것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은사들은 모두 혼의 불멸에 대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이성이 없는 짐승에게 있는 감성은 자신의 육신을 벗어나지 못하며 기껏해야 자기 옆에 있는 사물에게만 미친다183). 그러나 인간의 정신184)은 유연하여 육체에 갇혀 있지 않으므로 하늘과 땅을 탐구하고 자연의 신비를 찾아내며, 이성과 기억력으로 과거 수백 년간의 문명을 파악하여 다시 정리를 하고, 과거로부터 미래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육신과는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혼이 육과 완전히 구분이 된다는 증거: ·혼이 육신과는 구분이 되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면,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할 리가 없다: 우리는 흙집에서 살다가(욥4:19) 죽으면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고 썩어질 것을 벗어버린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 자신이 생전에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또한 사도 바울이 신자들에게 육과 영의 온갖 불결한 것으로부터 정화시키라고(고후7:1) 경고하는 것은, 죄의 영역이 거하는 두 영역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혼이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혼이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벧전1:9). 그리고 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그의 명령과 „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는 그의 가르침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히13:17에서는 목자는 하나님 앞에서 신도들의 혼에 대해서 변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신도의 혼을 보살피는(감시하는) 자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은 죽일 수가 있어도, 혼을 죽일 수가 없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옥에서 몸과 혼을 벌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다(마10:28; 눅12:5) I,15,3.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 -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을만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창1:27) 말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외형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지만, 그 형상의 본래의 처소는 혼이다. - 일반 짐승들은 눈이 밑을 향해 있으므로 주로 땅만 바라보지만, „사람은 얼굴을 들고 하늘과 별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는 시인 오비디우스의 말처럼,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외형과도 관계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나는 문제 삼지 않겠다. 그러나 이렇게 외부적 특성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영적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 - 오지안더는 하나님의 형상을 혼뿐만이 아니라 육신에게도 적용을 시킴으로써 하늘(혼)과 땅(육)을 혼합하였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인간 안에서 그들의 형상을 나타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지안더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취하셔야 할 육신이 창조 당시 인간의 육신의 모형이 되었을 것이다185). 그렇다면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가 성령의 형상이라는 것을 오지안더는 어디에서 찾아낼 것인가(그는 그리스도가 성령의 형상이라는 자신의 잘못된 주장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중보자의 위격(person, hypostasis)에서 완전한 신성의 광채가 분명히 나타나는데, 삼위의 순서상 앞서는 영원하신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현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아들은 성령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아들과 영의 구분은 없어질 것이다. 오지안더 (Andreas Osiander; 1498-1552) 오지안더는 1520년부터 뉘른베르크의 목사로 재직하였으며, 루터의 영향으로 여러 동료들과 함께(화가 알브레히트 뒤러 포함) 뉘른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말년인 1549에 몇 년 전에 설립된 퀘니히스베르크 대학에 부임됨. 그는 바로 그 후에(1550)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여 루터 진영에서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켰다: 인간의 칭의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으로 인간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만이 인간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리스도가 인간 안에서 거함으로써 인간은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의 의는 믿음을 통해 인간 안에 심겨진다고 함. 따라서 의는 믿는 자가 실제로 소유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간에게 거하게 되므로 인간이 의롭다는 의미이다. 앞으로도 오지안더에 대한 칼빈의 공격은 계속되는데, 오지안더의 이러한 기본적인 생각을 알고 있으면 칼빈의 공격의 초점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멜란히톤을 위시한 대부분 루터 학자들은 오지안더가 칭의와 성화의 구분을 없애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선행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고 공격했다. 그들은 루터가 가르친 대로 전가된 의를 주장했고, 이것이 루터 정통의 공식 교리가 되었다: 칭의란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imputare)된 것이다. 그 대신 자신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전가된 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 논쟁은 1550 -1566까지 격렬하게 진행이 되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루터 진영이 분리되었다. 그러나 1566 이후에는 그의 주장이 사라지게 되었다. 루터 사후에 루터 진영에서 일어난 이러한 종류의 격렬한 논쟁은: 1. 아디아포라 논쟁(1548-1552) 2. 마요르 논쟁(1552-1558) 3. 신인협력설 논쟁(1556-1560) 4. 오지안더 논쟁(1550-1566) 5. 2차 성만찬 논쟁(1552-) * 정통시대 - 종교개혁자들의 사후에 소위 정통시대가 도래한다. 정통시대란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학문적(과학적)인 방법으로 체계화 시킨 시대를 말한다. - 순결한 진리(정통)를 지키고자 이것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중요한 일이다. 체계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진리는 수많은 잘못된 가르침의 공격을 받기 때문에, 많은 토론과 투쟁을 거쳐서 성경의 가르침이 체계화된다. 이단에 대해 단단한 아성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체계화는 반드시 그 대가를 요구한다. 체계화의 문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을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하나의 체계 속에 가두는 것이다. 과학적인 신학이란 이성과 논리가 만들어낸 전문용어와 방법론으로 빈틈없는 논리 체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묶이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에 신학의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 - 이러한 문제 외에도 루터교는 루터 사후에 학자들끼리 심각한 싸움을 벌였다. 위의 5개 논쟁이 그 예이다. 루터교는 이러한 내부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내부적으로 정비하여 다시 힘을 차린 가톨릭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였으며, 개혁파 측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 루터는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구하는 „거지“ 심정으로 신학을 했다. 이 점은 칼빈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신학은 책상에서 나온 찬 신학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었고 또한 신앙이었다. 그러나 2세 신학자들은 삶보다도 논리적 사고를 중요시했다. 이것은 사치스러운 사고 유희에 빠지는 위험을 수반한다. -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정통의 필요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인식하여, 정통을 연구하고 핵심을 지켜나가되 지엽적인 문제로 논쟁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신학을 해야 할 것이다. - 또한 „형상“(imago)과 „모양, 혹은 비슷함“(similitudo)의 개념에 대해 상당한 논쟁이 있는데(창1:26186)), 주석가들은 이 두 개념에 차이를 두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차이가 없다. 히브리인들은 반복을 사용하여 같은 말을 두 번 사용하는 언어 습관이 있으며, 또한 인간이 하나님과 비슷하므로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이다. - 그러나 오지안더는 영혼만이 아니라 아담 전체가(육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담이라는 이름은 그가 만들어진 진흙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건강한 이성을 가진 독자라면 이러한 생각은 무익한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죽어야 할 존재라고 해서 영혼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고 해서 그의 육신이 이성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혼 만으로가 아니라 흙으로도 구성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나는, 육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오지안더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인간이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성질은 (육체를 포함하여) 모든 다른 피조물을 훨씬 능가하는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애초에 가졌던 순결함과 연관짓는다. 즉 그의 분별력은 완전한 것이였고, 그의 감정은 이성과 일치되였고, 그의 모든 정서는 가장 잘 조절되었으며, 그의 탁월한 은사로 말미암아 그의 창조주의 영광이 잘 드러났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자리 잡은 곳이 주로 감정과 마음, 혼과 그 성품에 있다고 할지라도, 육체를 포함한 그의 어떠한 부분에서도 그 광채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 세상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해주지 않는 곳은 없지만, 우리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은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훨씬 능가하는 영광이 있음을 의미한다. I,15,4.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된 인간에게서 찾을 수 있다 - 이제, 인간이 시초에 탁월한 성격을 가졌으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거울의 구실을 하였는데, 그것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즉 그가 과거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야겠다. 이 형상은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회복된 인간으로부터 가장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담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형상이 그로부터 완전히 소멸되거나 파멸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남아있는 것은 매우 왜곡된 것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면, 우리 안에서 회복이 시작되며, 이 회복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원래의 진정한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므로, 이러한 이유에서 둘째 아담이라고 불린다. - 중생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골3:10187)에서 새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에 맞게 새롭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 맞게 그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였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4) -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러한 갱신을 어떠한 의미로 가르쳤는지 살펴보자. 첫째로는, 깨달음(인식)을 말하며, 둘째로는 진정한 의의 거룩함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하기 전에는 (진리의) 비췸을 받은 영에서, 순수한 마음에서, 전 인격적인 완전함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암시만 하고 있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된 (거듭난) 인간은, 그가 창조될 때에 가졌던 본질을 찾는다는 것이다. - 고후3:18의 말씀도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 수 있다: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며, 우리는 그분의 모습과 같아져야 하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진정한 경건과 의와 깨끗함과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닐 정도로 새롭게 되어야 한다. à 이 가르침은 성화론의 기초가 된다. - 그런데 사도 바울이 남자만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이며(고전11:7), 여자는 이 위엄과 명예에서 제외하고 있다는 것은, 문맥으로 보아 정치적(사회적) 질서에 국한하는 것이 분명하다. - 우리가 언급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영원한 생명(소멸하지 않는 영혼)에만 관계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사도 요한이 „태초에 영원한 말씀 안에 계셨던 생명은 인간의 빛이라“(요1:4)고 말할 때에는 이것을 증거한다. 그는, 인간이 단지 다른 피조물과 같은 일반적인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빛을 가지고 있음을 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이로써 그는 동시에 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이고 있다. - 그러므로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이 원래 인간 성질이 지녔던 탁월한 지위이며, 이것은 아담 안에서 그가 타락하기 이전에 밝게 빛나는 것이였으며, 그 후에는 부패하여 거의 지워졌기 때문에 남은 것은 혼란과 어지러워짐과 오염뿐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이제 영으로 거듭난, 선택받은 자에게 부분적으로 다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완전한 광채는 하늘나라에서 발하게 될 것이다! I,15,5. 인간의 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창조되었다 - 좀 더 나가기 전에 마니교도들의 망상을 공격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세르베투스가 이러한 망상을 다시 소개하려고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고(창2:7) 하는 곳에서, 마치 무한한 신성의 한 부분이 인간에게 흘러들어간 것처럼, 그들은 혼이란 하나님 본체의 유출이라고 생각한다. - 이러한 사단적인 오류를 반박하기란 쉬운 일이다. 만약 인간의 혼이 하나님 본체의 유출이라면, 하나님의 본성은 변화와 정욕뿐만이 아니라, 무지와 저속한 정욕, 연약함 등 모든 악덕에 매여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만큼 불안정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혼은 서로 반대되는 생각으로 갈팡질팡하며,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산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자주 무지로 말미암아 실수하여 지극히 작은 유혹에도 넘어진다. 우리가 알기에는 우리의 마음은 늪과 같고 모든 불결한 것의 잠복소이다. 인간의 혼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다든가, 신성의 은밀한 유출이라고 말한다면, 이 모든 (악하고 연약한) 것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사도 바울이 아라투스의 말을 빌려서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17:28)고 말한 것은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성질이 그렇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은사를 부여하시는 한에서 그렇다. -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혼에 새겨졌을지라도, 그는 (유출된 것이 아니라)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천사도 마찬가지이다. 창조는 하나님 존재의 유출이 아니라 무로부터 피조된 것이다. 영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바이고, 그가 육체를 떠나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본체(substantia)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오시안더도 이것과 비슷한 헛소리를 했는데,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본체적으로(실제로) 우리 안으로 들어올 때만이,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자신의 영의 능력으로 우리를 자신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188). - 사도 바울이 형상의 회복에 대해 언급할 때, 그는 하나님의 본체(Substantia)가 인간 안으로 들어와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이 성령은,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본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분명히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I,15,6. 혼과 그의 기능 - 혼의 본질을 규명함에 있어서 철학자들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플라톤 외에는, 혼이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혼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은 영혼의 능력과 기능을 지나치게 현세 생활에 연관시켜서, 영혼이 육체를 떠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했다. - 혼은 형체가 없고, 특정한 공간에 갇힌 것은 아니지만 육체를 거소로 해서 거기에 거주한다. - 혼은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기를 주고, 각 기관을 목적에 맞게 적절히 사용할 뿐만 아니라(손, 발을 사용), 삶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바, 단지 이생의 의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자극을 준다. - 후자는 인간의 타락으로 별로 뚜렷하게 인지되지는 않지만, 그 흔적은 악덕한 사람에게도 새겨져 있다. 인간의 명성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이 어디에서 오겠는가? 이것은 수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그들이 의를 존중하고 지키기 위해 태어났다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다 – 여기에 종교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현생에서 사후의 삶을 위해 노력하도록 지음 받은 것과 같이, 그에게는 물론 여기에 대한 깨달음이 심겨져 있다. -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완성되는 행복을 인간이 몰랐다고 한다면, 그는 지성(intelligentia)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혼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그럴수록 그는 자신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게 된다, - 사람에게는 감성적인 혼과 사고하는 혼의 두 가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이 비록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증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주장을 거부한다. 그들은 육신의 기관의 활동과 혼의 이성적 부분이 늘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 그 자체는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이성의 생각과 결정이 서로 충돌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은 본성의 부패에서 온 것이므로 혼이 둘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이다189). - 나는 이 기능에 대해서 세밀하게 연구하는 일을 철학자들에게 맡기겠다. 우리에게는 경건의 덕을 세우기 위해 간단한 설명으로 충분하다. 이들이 이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진리이며, 알아서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꼭 알아야 할 것이며, 그들은 매우 능숙하게 연구 결과를 내어 놓았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철학 연구를 금하고 싶지 않다. 신학과 철학 문제 칼빈이 철학을 금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철학에 의존하지 않았다. 루터는 철학을 정죄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저주받은, 거만한, 무뢰한 이방인“이라고 비난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주 나리스토텔레스(Narristoteles: Narr는 독일어로 바보라는 의미)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이 루터 정통에 들어왔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개혁파 정통도 자유롭지 않다.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은 철학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여 „철학사는 인간의 지혜의 역사로서 이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를 불의로 막은 것이다… 철학은 독립 학과로 자리를 잡으면 안 되며 비판의 한 부분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불행하게도 기독교에 나타난 황금송아지들은 충성한 이방 철학에 의해 준비가 된 것이다“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64쪽. 에타 린네만. - 이러한 이유로 나는 먼저 오감(五感)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플라톤은 오 기관이라고 부르기를 선호하였다. 이 기관은 모든 대상(오감을 통해 받아들인 것)을 하나의 그릇에 담는 것처럼 공통감각(sensus communis, sensorium)에 전달한다고 한다190). 그다음에는 상상력(phantasia191))이 따르는데, 이는 공통감각이 느낀 것을 판단하며, 그다음에는 일반적인 판단을 하는 기관인 이성(ratio)이 따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성192)(悟性)이 따른다. 이것은 이성이 대충 판단한 것을 집중적으로 시간을 가지고 바라본다. - 오성, 이성, 상상력 등 이 영혼의 3가지 기능에 상응하는 세 가지 욕구 기능이 있다: 첫째로는 의지인데, 이것은 오성과 이성이 제시한 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 둘째로는 이성과 상상력이 제시한 것을 붙잡는 분노이며, 셋째로는 욕망으로, 이것은 상상과 오성이 던져준 것을 붙잡는다. -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이론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지나치게 붙들리면 안 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 이론이 확증된 것이 아니므로 이로움을 주기보다는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어떤 학자들은 혼의 성질을 달리 구분한다: 스스로는 이성이 없지만 이성과 이성의 인도를 따르는 욕구적 성질과 이성과 연관이 있는 이성적 성질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나는 여기에 크게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 나는 영혼의 기본 능력을 오성과 이성, 욕망으로 나누는 것도 반대하지는 않겠다(아리스토텔레스). - 그러나 우리는 영혼의 기능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구분을 하려고 한다. 철학자들은, 혼을 욕망과 오성193)으로 구분을 하고, 이것은 각각 다시 둘로 나눈다: ·관조적 오성과 실천적 오성: 그들은 한편으로는 오성을 관조적이라고 한다. 그가 인식으로만 만족하고 행동으로 옮길 욕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성을 실천적이라고 부르는데, 그가 선과 악을 인식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의지를 다양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선하고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도 포함된다. ·욕망은 다시 의지와 정욕(concupiscentia)으로 나뉜다. 이 경우에 의지라는 말은 욕구가 이성에 복종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욕구가 이성의 울타리를 넘어서 방종에 빠질 때는 격정적인 정욕(pathos)이 된다. 철학자들에게 공통된 점은 인간에게는 이성이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는 기능이라는 것이다. I,15,7. 혼의 근본적 기능으로서의 오성과 의지 - 그런데 철학자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간 본성의 타락에 대해서는 모르므로,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약간 벗어나야 한다. 그들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 두 가지 성질을 서로 혼합하는 큰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혼에는 두 가지 성질, 즉 오성(intellectus194))과 의지(voluntas)가 있다고 확정하자. ·오성의 임무는 대상을 식별하여 그것을 각각 시인하든가, 시인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à 판단. ·의지의 임무는 오성이 좋다고 인식한 것을 선택하고, 그가 버린 것을 거절하고 피하는 것이다(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à 실행.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좀 더 세분한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단지 오성이 혼의 지배자요 인도자이며, 의지는 항상 오성의 손짓을 바라고 있으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데에서 오성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 - 그런데, 이성이 의지를 인도하는데에서 우리 이성의 능력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논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는 단지 혼은 두 가지 능력, 즉 오성과 의지 외에는 다른 능력이 없다는 것만 확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성(sensus)을 오성의 하부 기관으로 본다(감정의 활동이 선행되어야 오성이 판단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이것을 구분하여 (서로 대립시켜서) 감성은 쾌락을, 오성은 선을 추구한다고 한다. 따라서 감성의 활동은 정욕과 쾌락을 낳고, 오성의 활동은 의지를 낳는다고 한다. I,15,8. 자유의지에 관하여 -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혼에 오성(mens195))을 주셨으므로, 인간은 오성을 통해 선과 악, 의와 불의를 구분해내고,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하여 그가 마땅히 추구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들은 이 능력을 지도력이라고 불렀다. - 여기에다가 하나님께서는 의지도 주셨는데, 의지의 기능은 (오성이 구별한 것을 시행할 수 있도록) 결정을 하는 것이다. - 최초의 인간은 이러한 탁월한 은사로 장식되어, 그가 지닌 이성과 지성196), 총명과 판단력은 지상생활을 영위하는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행복을 생각하도록 지음받았다. - 여기에다가 선택의 능력을 주셔서 욕망을 조정하고 모든 감성적인 움직임을 통제하여 그의 의지가 이성(ratio, reason)의 지도에 완전히 일치하게 되었다. - 인간은 이러한 원래의 완전한 상태에서 자유의지를 소유하였고,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영생을 보존할 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예정을 논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성질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 즉 아담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타락을 했으므로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원래의 무흠 상태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구적인 인내심을 부여받지 못하여 그의 의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쉽게 타락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고, 이것뿐 아니라 마음과 의지는 완전한 순결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모든 감성적 기관197)은 그에게 순종하게 되어 있었다. -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커다란 어둠이 인간을 둘러쌌고, 철학자들도 어둠 속에서 헤맨다.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축물을, 흩어진 파편 속에서 균형잡힌 구조물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들이 꼭 붙들고 있는 원리는, 만약 인간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들은 또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한 대로 이루어 나가지 못한다면, 덕과 악덕의 구분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만약 인간에게 (타락이라는) 변화가 없었더라면, 그들의 생각은 옳다. 그러나 이 철학자들은 인간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따라서 그들이 하늘과 땅을 뒤섞어서 생각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고백하면서도 비참한 영적인 상태에 빠져있는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찾아내려고 한다면, 즉 철학자들의 생각과 하늘나라의 가르침을 절충하려고 한다면, 그는 계속 헤맬 수밖에 없으며 하늘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땅에도 닿지 못할 것이다. -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게 되겠지만, 지금은 단 한 가지만 확정하려고 한다: 인간은 그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그의 자손과는 완전히 달랐다. 혼의 성질은 올바르고 건강하였으며 의지도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 물론 어떤 이들은, 아담의 의지에 약점이 있었으므로 늘 실수할 가능성이 었었다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모든 능력을 갖춘) 그의 신분을 고려할 때, 그가 어떠한 핑계도 들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없고, 저지르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 인간을 만드시지 않았느냐고 반문을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시고 싶은 만큼 주실 수 있는 재량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을) 지속력198)을 주시지 않으셨는지는 그분의 섭리 속에 감추어져 있다. 제16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유지하시고 보호하시며, 섭리로써 모든 작은 부분까지 다스리신다. I권의 마지막 부분인 16-18에서 섭리론이 다루어진다. 개혁신학에서 섭리의 요소로서 3 가지를 든다: 1) 보존(conservatio):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유지, 보전하시는 것. 2) 통치(gubernatio): 정해진 목표를 따라 이끌고 가셔서 하나님의 계획을 확실하게 성취시키심. 3) 협력199)(cooperatio): 하나님이 피조물과 협력하심.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협력을 주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능력과 서로 통하여 후자를 파멸하거나 흡수함이 없도록 한다. 칼빈의 섭리론은 하나님의 통치가 강조되어 있다. 우리가 16-18장 공부를 하면서 중요한 점을 요점적으로 잘 정리해야 한다. I,16,1 창조와 섭리는 분리되지 않는다 - 하나님이 세상을 단숨에 창조하시어 자신의 사역을 마치시고 세상을 더이상 돌보지 않으신다는 생각200)은 차디차고 쓸모없는 생각이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계속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의 생각과는 달라야 한다 à 하나님이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적극적으로 운영하신다! - 비 신앙인도 세상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신앙인들은 그들과는 달리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적극적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안다“(히11:3)는 사도의 말씀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 à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막연하게 알지만 우리는 이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므로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섭리를 모르면, 비록 창조를 마음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고백한다는 인상을 줄지라도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à 우리가 창조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창조물을 섭리하시는 것을 모른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 인간이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지만,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정지하면, 이것은 육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며, 육신의 생각이 훨씬 더 나아가면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작품을 보존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것은 일반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육신의 생각은, 만물을 유지함에서 하나님께서 시초에 세상에게 부여한 능력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 그러나 믿음은 더 깊이 들어간다. 왜냐하면 믿음은 만물의 창조주께서 또한 세상을 항상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것까지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이 운영되는 것은 단지 일반적인 운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을 하찮은 참새까지라도 특별한 섭리하에 유지하시고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이다(마10:29) - 이것은 다윗의 예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말하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섭리가 계속된다고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라고 먼저 말한 후에 다음의 말씀을 덧붙이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시33:13). 그다음에 나오는 구절도 같은 의미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지한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다윗은 창조와 섭리를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다. - 세상 모든 사물이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영감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철학자들도 가르치고 있으며, 인간 정신이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과 모든 경건한 자들이 깨달은 그 높은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27-30) - 철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행17:1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을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진지하게 감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부성적인 은총으로부터 나오는 그분의 특별한 배려를 깨닫지도 못할 뿐 아니라 전혀 맛보지도 못한다 à 칼빈이 창조와 섭리 신앙을 강조한 것을 잘 배워서 우리도 실제적 삶에 잘 적용해야 한다. I,16,2 우연은 없다 - 일반 사람의 생각과 성경 가르침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위해, 우리는 말씀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섭리가 행운이나 우연이라는 말과는 반대가 됨을 깨달아야 한다. - 만사가 우연히 일어난다는 것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공통적인 신념이었고, 오늘날까지도 거의 모든 사람을 지배하는 신념이지만 이것은 섭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 만약 대양에서 갑작스러운 광풍으로 파선을 당했다거나, 집이나 나무가 무너져서 압사를 당했다거나, 어떤 사람이 광야를 헤매다가 먹을 것을 발견하거나, 표류 중이던 배가 항구에 기항하여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면했다고 하자. 인간의 이성은 이 모든 사건을 우연에 돌린다. -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고 가르치신 것을 배운 사람은,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에 따라 지배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무생물은 각각 본연의 특성을 부여받았지만,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손이 이끄시지 않고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만큼만 그것들에게 효력을 부여하시며, 하나님의 자유로운 목적에 따라 이런 일 저런 일에 적절하게 사용하신다. - 피조물 가운데 태양만큼 놀랍고 빛나는 능력은 없다. 그가 지구 전체를 그의 광채로 비추고 있는 것 외에도 수많은 기능이 있다. 그가 그의 온기로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을 유지하고, 그의 빛으로 지면을 풍요롭게 만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태양을 맹목적인 자연현상으로서 매일 돋았다가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그의 부성적 은총을 늘 새롭게 기억할 수 있도록 그분께서 태양의 운행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에 태양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과(수10:13), 히스기아 왕을 위하여 태양의 그림자가 십도 물러갔다는 것(왕하20:11)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서는 매우 다양함을 보여주고 있는데(기간이 해마다 조금씩 다름),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새롭고 특별한 섭리가 매년, 매달, 매일을 지배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I,16,3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섭리가 있다 -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자신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주장하시는 동시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를 원하신다. 이 전능이란 물론 궤변학자들이 생각해낸 공허하고, 게으르고, 거의 잠든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그것은 늘 깨어있고 활동적이고 늘 일하시는 전능을 가르친다. -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한 번 결정하신 수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강과 같이, 무질서한 운동에 질서있는 길을 잡아준 것 같은 전능이 하니라, 전능은 개별적이고 모든 특수한 운동에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모든 것을 하실 수는 있으나 가끔은 일을 중단하고 한가하게 앉아 있는다든가, 혹은 그가 미리 정해놓은 자연법칙의 일반적인 법칙을 토대로 계속 운행되도록 방임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늘과 땅을 자신의 섭리로 움직이시고 자신의 뜻이 없이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조정하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것이다. 시편165:3에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은 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확고하고, 잘 계획된 것이라고 한다. - 따라서 신자는 불행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손안에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명령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며 위로를 받는다. 즉 하나님의 인도가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 적용이 되므로, 이것은 자연의 운행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고 하는 것은 유치한 착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운행을 자연법칙201)(lex naturae)에 위임하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이러한 좁은 경계선 안에 국한시키려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예를 빼앗고 매우 유용한 통찰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늘과 땅과 물의 움직임에 예속되었다고 한다면 (자연의 노예) 인간보다 비참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이중 축복을 받는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께서 무궁무진하게 축복을 하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닫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하늘과 땅을 소유하시고, 모든 피조물이 그분께 순종을 하고자 그분의 손짓을 기다리고 있다. ·둘째로, 그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분의 뜻에 복종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를 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사단을 그의 모든 졸개들과 그의 갖은 흉계와 함께 고삐로 잡고 계신 것과 같고, 우리의 구원에 해가 되는 모든 것도 그분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알고 있어야 우리는 우리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느끼는, 억제할 수 없는 미신적인 공포를 진정시킬 수가 있다 à 이 가르침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사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여 불안에 떨지 않고,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생각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 - 피조물(인간, 재난)이 우리를 위협하고 두려움을 심을 때, 우리는 마치 그들 자신이 우리를 해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겁을 먹는 것을 나는 미신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러한 미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피조물에는 이러한 본유의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에 따라 움직이므로,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원하셔서 결정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I,16,4 섭리의 본질 -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섭리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여유 있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주도하셔서 모든 일을 이끌어 나가신다는 것이다. 즉 눈으로만 관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제물을 마련하시느니라“(창22:8)라고 말한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을 예견하신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를, 혼란되고 난감한 일로부터 항상 해결책을 주시는 분의 뜻에 맡긴다는 의미이다. -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섭리란 하나님의 활동202)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섭리를 단순하게 예지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래도 이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하면서도 „다른“ 능력(천상의 존재)과 함께 다스리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그런 다스림을 말하는 사람보다는 조잡하지는 않다. -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그의 각 부분은 일반적인 운동(예를 들어 자연법칙)으로 인도하시고 운행하시되, 각 피조물의 활동은 특별히 지도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이것도 허용할 수 없는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피조물의 우발적인 운동에서나 인간이 그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에 따라 이것, 저것을 마음대로 행하는 것에, 하나님의 일반섭리가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구분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인간에게 운동력을 불어넣어 주셔서, 인간이 이 능력을 통해 그의 본성에 따라 활동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결심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세상과 인간의 운명과 인간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림을 받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를 구분할 수 있는가?] - 이제 나는, 하나님이 단지 일종의 모호한 운동력이라고 하면서 그분에게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박탈하는,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분의 무한한 지혜로 다스리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거부하는, 매우 널리 퍼져있는 이 주장을 반박하고자 한다. - 이러한 생각은 단지 말로만 하나님을 통치자로 만들며, 실상은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빼앗기 때문이다. 통치란 자신이 지배하는 것을 특정한 질서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 만약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배하셔서 자신이 자연에 부여한 질서를 유지하실 뿐 아니라, 자신이 모든 피조물을 특별하게 보호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나는 그들이 사용하는 „일반“섭리라는 말을 부인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각 종류의 생물이 영원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숨겨진 자신의 본능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번 명령하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성구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준다고 볼 수도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는지라“(행17:28)의 사도 바울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1:3)라는 말씀이다. - 그러나 이러한 것을 구실삼아서 성경 구절이 분명하게 증거하는 „특별“ 섭리를 어둡게 하려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꼭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개개의 사건을 조정하시며, 모든 것은 그분의 특별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의 의미이다. [성경이 입증하는 특별 섭리에 대한 교리: 5-7] I,16,5 하나님의 섭리는 개개의 사건도 지도한다 - 하나님께서 운동에 시작만 주시고, 그 후에는 만사가 자연적인 성향에 따라 움직이는대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행로와 임무를 부과하신대로, 그리고 그들에게 어떠한 법칙을 부과하신대로 낮과 밤, 겨울과 여름이 바뀌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만약 모든 것이 항상 순탄한 행로에 따라 같은 법칙으로 움직인다면 앞에서 가정한 것이 옳다. 즉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한 달이 지나면 다른 달이 오고, 한 해가 지나면 다른 해가 오는 것이다. - 그런데, 만약 과도한 더위와 가뭄이 모든 결실을 태우고 때아닌 폭우가 곡식을 망치게 하고, 우박과 폭풍이 갑작스러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닐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과 그분의 심판이 이러한 것을 통해 표현됨을 알아야 한다. 한 해가 풍년이 들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궁핍과 기근은 하나님의 저주와 복수의 표시이다. - 하나님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이슬과 비로 땅을 적실 때마다 이것을 통해 자신의 은총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으며(레26:3-4; 신11:13-14; 28:12), 또 하늘이 그의 명령으로 철과 같이 굳어져서 비가 내리지 않고(레26:19), 곡식 밭이 충해와 다른 재앙으로 손상을 입게 되며(신28:22), 우박과 폭풍우로 전답이 해를 당할때마다(사28:2; 학2:17), 이것들은 하나님의 분명하고 특별한 표시라고 말씀하셨다. -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비 한방울이라도 하나님의 명령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도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마10:29). 하나님께서 새들의 비행도 특별한 계획에 따라 조정하신다면, 우리는 마땅히 선지자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113:5-6) I,16,6 하나님의 섭리는 특히 사람에게 해당한다 - 그러나 세상이 특별히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생각할 때 이 점을 위주로 사색을 해야 한다: ·예레미아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보자: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10:23) ·솔로몬은 말하기를: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20:24) -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 본성의 성향에 따라 움직이게 하시지만,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이 움직임을 주도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말은 인간에게 자신의 길에 대한 결정권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레미아와 솔로몬은 인간의 능력뿐만아니라 결정까지도 하나님께 돌리기 때문에, 위의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 다른 곳에서 솔로몬은 이러한 인간의 오만한 생각을 훌륭하게 책망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마치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인도함을 받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정하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는 말 조차도 할 수 없는 불쌍한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하게도 가소로운 바보짓이다. -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 없이는 세상에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내기위해, 성경은 전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만약 나무의 가지가 부러져서 지나가는 사람이 맞아서 죽였다면 이것은 분명 우연으로 간주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반대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이는 자의 손에 내어 주셨다“(출21:13) - 제비를 뽑을 때 운명에 맡기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것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제비뽑기에 사용하는) 돌이 자기에게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는 것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어난다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완전히 우연이라고 말하는 것도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잠16:33). - 다음과 같은 솔로몬의 가르침도 이와 같은 내용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잠29:1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자리를 정해준대로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섞여 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솔로몬은 모든 인간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눈을 감지 않으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에게 인내를 하라고 명하신 것을 기억시키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짐을 벗어버리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의 „청교도와 자본주의 정신“ 비판 청교도와 자본주의 정신을 연결하는 막스 베버의 이론은 오늘날 비판을 받고 있다. 필자가 후에 막스 베버의 이론과 이 비판서들은 소개하고자 한다. - 이처럼 다른 한 선지자도 이렇게 세상적인 사람을 책망했는데, 그들은 어떤 이는 매우 비천한 자리에 있고, 어떤 이는 높임을 받는 것을 인간의 수고와 운명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재판장의 직무를 벗어 버릴 수 없어서, 어떤 이들은 높임을 받고, 다른 이들은 멸시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75:6-7) I,16,7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에서 일어난 일도 주관한다 - 그리고 개별적인 사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일반적으로 증거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폭풍을 일으키셔서 자기 백성에게 많은 새들을 보내 주셨다(출16:13). 또한 요나를 바다에 던지시려고 강한 폭풍우를 일으키셨다(욘1:4). - 하나님께서 세상을 운영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은 사람은 이 현상들은 통상적인 흐름을 벗어난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겠다: 하나님의 특별한 결정이 없이는 어떠한 바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하나님께서 구름과 바람을 자신이 원하시는대로 주관하시며, 이 가운데서 자신의 권능이 그곳에 임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자기 사자(보냄이)로 삼으시고 불기둥을 자신의 사역자로 삼으시고, 구름을 자신의 수레로 삼으시고 바람의 날개를 타고 다니신다“(시104:4)는 말씀이 사실이 아닐 것이다. - 이처럼 바다에서 강한 바람으로 거센 파도가 일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증거하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시107:25) - 인간에게는 본래의 생식 능력이 주어져 있지만, 어떤 이들은 자식이 없고, 어떤 이들은 자식으로 축복받은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태의 열매는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이다(시127:3) - 인간이 음식으로 양육된다는 사실보다 더 평범한 사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땅의 소산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일 뿐 아니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신8:3)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사람을 양육하는 것은 가득찬 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축복이기 때문이다. - 만약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우리에게 음식을 주시지 않는다면,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도 전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가장 훌륭한 가장으로서 자녀를 양육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그분께서 모든 육신에게 필요한 음식을 주신다고 했다203)(시136:25) -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34:15),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34:16)라는 것을 듣는다. 우리는 이 두 말씀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쓰일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원하시는대로 사용하신다. 우리가 여기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의 질서를 유지시키시기 위해 피조물에 하나님의 일반 섭리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따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이다. à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 자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I,16,8 섭리의 가르침은 스토아 철학의 숙명론과 다르다 - 섭리의 가르침을 미워하는 자는 이것이 스토아 학파의 숙명론과 같다고 비방한다. 어거스틴도 한 때 이러한 비방을 받았다204). 그러나 스토익의 운명이라는 것은 인과의 영속적인 관계에서 오는, 그리고 자연에 내재한 확고한 연결고리에 기인한 필연성을 말한다. -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배하시고 운영하시는 분이며, 그분의 지혜로 그분이 하실 일을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고, 그것을 그분의 권능으로 수행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천지와 무생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의지까지도 지배하시어,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목표를 향하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 어거스틴도 일반적으로 가르치기를, „만약 사람이 행운에게 의미를 둔다면, 세상은 우연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에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고, 섭리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하며,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명령 없이 일어난다는 주장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런 원인이 없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의 가능성205)이라는 말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이 왜 그분의 의지를 그렇게 행사하시는지를 물어서도 안 된다고 하셨다. 그는 때때로 허락(permissio)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의 가장 으뜸이 되고 첫째 원인이므로, 단지 그분의 명령이나 허락이 있어야 무엇이든지 일어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말의 의미는 할 일 없이 구경만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기에도 하나님의 활동하시는 의지가 역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I,16,9 사건의 참된 원인은 우리에게 감추어져있다 -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하나님의 높은 섭리를 깨닫기에는 너무 둔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구분을 해줄 필요가 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확고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우연“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사와 인간사가 우연의 지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은 당연히 신자의 마음속에서 없어져야 한다. - 그러나 그 질서와 원인, 목적, 사건의 필연성 등은 대부분 하나님의 섭리 안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어서 우리에게는 우연적(운명적)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력과 판단력에 따라서 그렇게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 한 예로, 한 상인이 신뢰할 만한 사람의 보호를 받으며 산에 들어갔다가 부주의하게도 일행을 잃고 헤매이다 강도를 만나서 살해를 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수명을 예견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확정하셨기 때문이다(욥14;5). 그러나 이성적으로 본다면 그 모든 것은 우발적인 사건일 것이다. - 신자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는 분명히 이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서 우발적인 사건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것은 옳다. 그럼에도 그는 그 „우연“을 통해 한번 정해진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치 않을 것이다. - 미래에 일어날 우발적인 사건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미래사는 우리에게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우연한 불행이 닥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견 하지 않으신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확고한 확신을 마음에 가져야 한다. - 우리에게 우연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사물을 움직이시고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서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인정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기본 원칙을 늘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동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로 보아야 한다. -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것은, 비록 일의 성격상 필연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틀림없이 일어난다. 우리가 잘 아는 예로서는 그리스도의 뼈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분의 뼈가 부러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뼈를 부러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요19:33-36). 여기에서 우리는 학자들 간에 상대적(이차적) 필연과 절대적 필연을 구분하거나, 혹은 이에 상응하여 조건적으로 필연적인(즉 중간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 사건과 (하나님의 명령과 뜻에 근거한) 절대적인 필연성 사이를 구분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 아드님의 뼈가 부러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지만, 그가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뼈가 부러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을 섭리를 통해 제한하셨다. 제17장: 이 섭리의 가르침을 잘 적용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할 수 있다. I,17,1 하나님의 길(섭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 인간의 정신이 자주 공허한 사고 유희에 빠지는 성향 때문에, 섭리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해 어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이 어떠한 목적으로206)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섭리를 가르치는지를 잠시 설명하려고 한다. -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4 가지): ·첫째로,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사와 마찬가지로 미래사(현재)와도 관계가 있다. ·둘째로, 섭리는 매개체를 사용하기도 하며, 그것 없이도 이루어지고, 혹은 매개체에 반해서 모든 것을 이룬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어떻게 보호 통치하시는가,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감시하시기를 원하시는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를 원하신다. ·한 가지를 추가한다면(넷째로), 하나님의 섭리가 펼쳐지는 전 과정에서 부성적인 은총과 자비, 혹은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이 분명하게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 원인은 우리에게 감추어져있기 때문에, 인간의 운명은 자연의 맹목적인 충동에 의해 좌우된다든가, 혹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지고 공놀이하시듯 장난을 치신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용히 정신을 차리고 배우고자하는 자세를 갖추면, 우리는 그 결과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로 자신의 자녀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인내를 가지도록 교육을 하시고자, 혹은 죄악된 성품을 개선하시며, 탐욕을 억제하고 자기부인을 시키시고, 또한 나태에서 일으키신다. 또한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불경한 자의 음모와 술책을 좌절시키신다는 것이다. à 섭리의 가르침에서 4가지 중요한 점: 1) 미래(현재)에 관련이 있다(인간 삶의 전 과정에 관계함). 2) 매개체를 사용 가능. 3) 교회가 중심. 4) 원인이 감추어져 있다. 결론: 신자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중요하다. - 불행의 원인을 우리가 알 수가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원인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있다고 믿어야 하며, 다윗처럼 찬양을 해야 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시40:5) - 왜냐하면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항상 우리의 죄를 생각해야 하고, 그 책벌이 우리를 회개로 자극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자를 그의 죄과에 맞는 보응을 하신다는 생각보다도,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를 인정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맹인으로 태어난 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보라: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그에게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불행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무죄한자를 그렇게 무자비하게 괴롭히신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기를, 만약 우리가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이 이적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분의 감추어진 섭리를 존중하여, 그분의 뜻이 만사의 가장 공정한 원인이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 아무리 천둥과 번개와 폭풍으로 하늘이 어두워져서,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일지라도, (그것은 국지적 현상일 뿐이며) 하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같은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야 한다: 세상에 있는 혼란이 우리의 모든 판단력을 앗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의와 지혜로 모든 이 움직임을 질서있게 이끄시며 올바른 목적으로 인도하심을 믿어야 한다. Theodizee Frage (theodicy, 변신론, 辯神論, 신을 변명해 주는 것, , θεός + δίκη)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세상에 왜 악과 불행이 존재하는 가를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신이 전능하시고 선하시다면, 왜 세상에는 악이 승리하는 것 같고, 또한 인간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신의 선하심을 변호하려는 시도이다. 이 질문은 고대부터 있어왔으나, 어거스틴이 „악은 실체가 아니라 단지 선이 결핍한 것“이라고 가르친 것이 컨센스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17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악(고난)이 하나의 실체로 간주되었다. 라이브니쯔(Leibniz)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이 개념(Theodizee)을 만듦. 변신론의 문제는 신이 인간 앞에서 적절한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신학의 중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 옮겨가면서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어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을 해야 한다. 따라서 루터는 변신론을 하나님 모독이라고 비판했다. „속박의지론“에서 „숨겨진 하나님“(Deus absconditus)의 개념으로 대답을 했다. 칼빈은 바로 윗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분의 감추어진 섭리를 존중하여, 그분의 뜻이 만사의 가장 공정한 원인이라고 생각을 해야 한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내가 왜 지금 아무 죄 없이 이렇게 고난과 불의를 당해야 하는가? 왜 내 남편, 혹은 아내, 혹은 아들이 갑자기 죽어야 하는가?....“ 고통속에서 수많은 질문을 하나님께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가지밖에 없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아멘! I,17,2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갖추어야 할 올바른 자세는, 우리가 지금 자신을 지으신 이요,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음을 생각하고, 이에 합당한 겸손한 자세로 두려움과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à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가져야 할 합당한 자세: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겸손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오늘날 많은 개가 이 가르침을 물어뜯으며, 혹은 짖어대며 공격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이성이 명령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이신론). 또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매우 뻔뻔스럽게 우리를 비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적혀있는 율법에만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세상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207). - 섭리의 가르침이 마치 우리가 고안해낸 것처럼, 마치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가르침을 인식하도록 도처에서 분명하게 보이시고 있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공격하는데, 성령께서는 무수한 표현방식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계신다. -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통치하실 권리가 있으므로, 우리가 비록 이해를 못 할지라도 우리는 이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분의 뜻이 우리에게 유일한 의의 척도가 되어야 하며 만물의 가장 의로운 원인이 되어야 한다. 이 섭리는 만물을 다스리며, 비록 원인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고 할지라도 이 섭리로부터는 선한 것만 나온다. I,17,3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책임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과거의 불행을 이유로 하나님께 불평을 하지 않을 것이며, 호머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가멤논208)처럼 자신의 죄를 신에게 돌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 죄가 없다. 그것은 제우스가 내린 운명 탓이다“ - 리코니데스는 플라우투스(Plautus, 고대 로마의 희곡작가)의 희곡에서 말하기를: „신이 주동자였다. 나는 신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원치 않았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리코니데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연구하고 배웠더라면,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그것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동시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에는 어디라도 좇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섭리)과 인간의 책임(율법) 사람들은 섭리론과 운명론을 착각한다. 따라서 아가멤논과 리코니데스는 사람의 잘못을 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으므로 율법을 어기는 것은 분명히 인간이 잘못한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이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이 문제를, 인간이 하나님의 뜻(율법)을 행하여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함으로써 간단히 해결하였다. 이것을 잘 알고 있으면 I,17장은 이해하기가 쉽다. - 불경한 자들(Libertins)은 어리석게도 이에 항거하여, 하늘과 땅을 혼합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을 시간을 정해놓으셨으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가 없으며, 모든 대비책은 쓸모없는 일이다“. 즉 강도를 피해 안전한 길로 간다든가, 병이 나면 의사를 부른다든가, 약을 복용한다든가, 건강을 위하여 부담이 되는 음식을 삼가며, 쓰러져가는 집에 이사 가기를 꺼리는 것…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고 하므로 의미가 없는 일이다라고 한다. - 그리고 그들은 신자의 기도도 잘못된 것이며 무익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영원 전부터 결정해 놓으신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들의 미래를 위한 모든 계획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시고 미리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와 모순된 것이라고 하여 쓸모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발생한 일은 자신이 분명히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려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고 한다. - 예를 들어 살인자가 선량한 시민을 죽였다고 하자.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누가 훔치거나 간음을 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예견하시고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섬긴다고 해서, 모든 범죄는 미덕이라고 한다. Libertins(자유주의자들) 칼빈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도 많은 고난을 받았다. 그들은 스위스 여러 곳에 등장한 범신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서 선과 악의 구분을 흐리게 하였다. 자신을 스스로 영적인자들(Spirituels)로 칭하였고 그들은 도덕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라는 명칭을 얻었다. 칼빈은 1544에 뇌샤뗄 목사들의 청원을 받고 자신의 지지자인 나바라(Navarra) 여왕에게 „Contre la secte fanatique et furieuse des Libertins qui se disent Spirituels“ (스스로 영적인자라고 부르는 미친 광신자 집단 자유주의자 분파에 대항하여)라는 소책자를 보내었다. 지금 칼빈은 기독교강요 I,17, 3 이후에 이 책자에서 인용하여 그들에게 반론을 펴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들의 문제는 분명한 윤리적 강령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신자들 안에서 거주하시며 그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로 신자들은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늘 이끌리어 살므로, 율법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보살핌이 결정론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을 본다. 즉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시어 그것을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1546초에 자유사상가들이 제네바에도 나타났는데, 그들은 주로 칼빈을 몰아내어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기를 원한 사람이었다. 제네바의 최고 귀족에 속하는 아미 뻬랑과 칼빈과의 싸움은 유명하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칼빈은 적대자에 의해 제네바의 독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칼빈이 제네바에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명망과 인격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시의회 의원도 아니었으며 1559까지는 제네바 시민권도 소유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는 몇 번이고 제네바에서 쫓겨나갈 수 있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I,17,4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조심성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는다 - 솔로몬은 인간의 미래사를 논하면서, 인간의 계획과 섭리를 쉽게 조화시켰다. - 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손에 지배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착수하는 그런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그는 또한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 이것으로 솔로몬은, 우리가 자신을 돌보며 우리가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에 한계를 제정하시고, 우리가 자신의 생명을 잘 돌보도록 위탁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성과 그 수단도 주셔서 생명을 보존하게 하시고,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위험을 벗어나도록 조심성을 주시고 방비 대책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 -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의무가 주어져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명령하셨으면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하고, 방비책을 주시면 그것을 사용해야 하고, 우리에게 위험을 먼저 보여주시면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 그들이 이의를 제기하기를 „그러나 내가 당하는 모든 위험은 운명적인 것이므로 어떠한 방책도 도울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그 위험을 극복하도록 방편을 주셨으므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 위험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으로 이미 결정이 되었으면 우리는 주의하지 않아도 위험을 피하게 되어 있으므로 위험에 주의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행이 당신을 운명적으로 덮치는 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당신에게 조심하라고 하신다. - 이러한 바보들은 이렇게 명백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데, 즉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섬기기 위해, 조심하고 경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부주의와 게으름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과하신 재난을 스스로 불러들인다. 자신을 살피는 조심성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협하는 위험을 피하지만, 바보는 부주의하여 죽음을 당한다. - 그러나 어리석음이나 신중함이 모두 섭리의 도구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미래사를 우리에게 감추시는데, 이것은 미래사를 불확실한 것으로서 우리가 그에 대해 대항하게 하시고, 그것이 극복되거나 아니면 모든 대책보다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나 당할 때는 당할지라도 대항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준비하도록 하기위한 것이다. -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우리는 항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우연히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위해 우리의 준비(사역)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I,17,5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악함을 무죄로 만들지 않는다 - 이들은 또한 그릇되고 경솔하게도 과거에 일어난 사건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일어나는 모든 것은 섭리에 의한 것이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도둑이나 간음이나 살인도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함께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묻는다: „그렇다면 어느 도둑이, 하나님께서 빈곤으로 벌하시려 했던 사람을 약탈했다면, 그 도둑은 왜 벌을 받아야 하는가? 주께서 생명이 끝나도록 작정한 사람을 죽인 사람이 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러한 범죄자가 하나님의 뜻을 섬긴다면, 어째서 그를 처벌해야 하는가?“ - 그러나 나는 바로 앞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섬긴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악한 본능을 좇는 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자신의 악한 욕망을 섬긴 것이다. -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배워서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에 매진하는 사람이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그러한 가르침을 배울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을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에게 명하신 것(율법) 뿐이다! -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여 결정한다면, 이것은 순종이 아니라 무시이며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약 하나님이 이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악을 행하겠는가? 그분은 우리에게 결코 이것을 명령한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정욕의 요구에 빠져서 우리가 확고한 의지로 하나님의 뜻에 반항한다. 그들은 또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악행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명령을 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무한한 지혜로 악한 도구를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 이제 그들이 내린 결론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를 살펴보자: 그들은 악행이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 일어났으므로, 하나님이 벌을 하지 않고 눈감아 준다는 것이다! 도둑과 살인자와 다른 행악자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정에 따라 그들을 통해 심판을 수행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범죄가 처벌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그들이 어찌 하나님을 자신의 악행과 연루시키며 그들의 악행으로 하나님의 의를 가릴 것인가? 그들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의 양심을 더럽힌다. - 그러므로 악인이 악행의 원인이고 악행의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자신의 뜻대로 그러한 도구를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분께 어떠한 책임도 돌릴 수가 없다209). I,17,6 하나님의 섭리는 신자에게 위안이 된다 - 그런데 우리가 섭리를 경건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명상을 하면, 이러한 비방과 미친 헛소리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경건이란 바로 이러한 거룩한 명상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 하심으로 발생하고,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사의 최고 원인임을 항상 지각하지만, 2차 원인(causas inferiores)을 또한 무시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어떤 일이든지간에 그에게 선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다. - 신자에게 사람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뿐만 아니라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다. 일반 인간에 대해서는 선인이든 악인이든 간에 그들의 모든 결정이나 의지, 시도나 능력은 모두 하나님 손안에 있으며, 그분이 원하시는대로 움직이며 또한 원하실 때에는 제재하시는 그분의 선한 의지에 달렸음을 그리스도인은 알 것이다. -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그리스도인의 안전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약속은 수없이 많이 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55:22)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5: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시91:1)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슥2:8b) ·„나는 너의 방패요“ (창15:1)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49:15) - 성경이 가르치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시91:12) 그들의 길을 그만큼 열심히 지켜주신다. - 우리는 앞에서 (I,16,4) 일반섭리를 주장하는 자들의 의견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피조물을 특별히 돌보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이 „특별한“ 돌보심을 깨닫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마10:29). 그리고 이 말씀을 바로 다음과 같이 적용하셨다: 우리는 참새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받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더 확대 적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머리털까지도 세신다는 것을 확신하라고 하신다. 하나님 뜻이 아닐 때는 우리 머리털 하나라도 빠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나는 지금 인간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자신의 거하실 곳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교회를 다스릴 때 아버지로서의 배려를 이러한 표현으로 확증하신 것이다. I,17,7 하나님 섭리의 유효성 - 하나님의 종은 이러한 약속과 좋은 실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다는 가르침을 염두에 두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움직이신다든가, 아니면 그들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악심을 제거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에게 호의를 가진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애굽인들의 눈에도“(출3:21)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적들의 사악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쇄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때때로 그들이 이성을 잃게 하시어 올바른 것을 못하게 하신다. - 예를 들어, 그분은 아합을 속이고자 사단을 보내어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거짓으로 채우게 하셨다(왕상22:22). 혹은 젊은이들의 권고를 통해 르호보암이 실수하게 하여, 마침내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자신의 왕국을 빼앗기게 되었다(왕상12:10,5). - 때로는 그들에게 분별력을 주시지만 매우 놀라거나 낙심하게 하시어 그들의 계획한 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하신다. 간혹 그들에게 자신들의 정욕과 광기가 자극하는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경우도 있지만 적시에 그들의 강포를 제거하시어 그들이 계획하는 것이 성취되지 못하게 하신다. -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치명적이 될 뻔했던 아히도벨의 전략을 사전에 분쇄하였다(삼하17:7,14).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자기 백성의 안녕과 구원을 이루도록 인도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사단까지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을 감히 시험하지 못함을 본다(욥1:12). - 이것을 깨닫는 자는 성공의 때에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고통의 때에는 인내를 갖지 않을 수도 없으며, 장래에 대한 큰 확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무엇이든지 자신의 소원대로 이루어질 때에는 , 그 도움이 사람을 통하여 오든지 사물을 통하여 오든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 그는 마음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나에게 돌리시고 그들을 나에게 인도하셔서, 그들이 나를 위해 하나님의 선하신 도구가 되게 하신 분은 분명히 주님이시다! I,17,8 하나님의 (선한) 섭리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모든 역경에서 돕는다 - 이러한 사람이 역경에 처하게 되면, 그는 즉시 마음을 하나님께 향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인내와 진정한 마음의 평온함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요셉이 계속 형제들의 배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더라면, 그들에 대해 결코 형제의 정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악행을 잊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온유와 관용을 베풀게 되었으며, 그들을 다음과 같이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들이 나를 애굽으로 팔아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이곳에 먼저 보내어 당신들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오“(창45:7 이하 요약).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욥이 자기를 괴롭힌 갈대아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었더라면, 그는 즉시로 복수의 마음이 불탔을 것이지만, 그는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고 다음과 같은 훌륭한 말로 자신을 위로하였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1) ·다윗은, 시므이가 욕설과 돌팔매질로 자신을 모독했을 때, 그의 눈을 인간에게 돌렸다면 그의 부하들을 명령하여 복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므이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이것을 할 수가 없었음을 알았으므로 부하들을 진정시키고 말하였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삼하16:10b) ·다윗은 다른 곳에서도 자신의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억제하였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39:9). ·분노와 성급함에 대해 이러한 말씀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 그래서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하나님의 섭리를 명상하는 것을 배운 사람은 틀림없이 많은 것을 성취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 그것을 원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고통을 참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그분의 뜻을 반항함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올바르고 유익한 일 외에는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사람에 의해 부당하게 상처를 입는 경우 우리는 그들의 사악함을 잊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의 고통을 강화시키고, 우리의 마음에 복수심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것을 꼭 붙드는 것을 배워야 한다: 적이 우리에게 악행을 저지른 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그 불행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믿음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받은 악에 대해 보복하지 않게 하려고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6;12), 영적인 원수, 곧 사단에 대한 것(엡6:11)임을 상기시켰다. 우리 마음에 솟구치는 복수심을 진정시키는데 가장 유용한 교훈은, 하나님 스스로 사단과 모든 불경한 자에게 대항하여 싸우려고 무장하시고, 우리의 인내를 연단시키시기 위해 경기의 심판자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불행이나 재난이 인간의 간섭없이 일어날 때는, 우리는 율법의 가르침을 생각해야 한다: 모든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며,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저주이다210)(신28:20이하). 그리고 우리는 다음의 무서운 경고를 두려워해야 한다: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레26:23-24) I,17,9 제2 원인을 무시하면 안 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자는 제2 원인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은혜를 준 사람을 하나님 은혜의 사역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게 감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대로 최대한 감사하기를 힘써야 한다. 간단히 말해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 하나님을 제1 원인으로 생각하고 그분을 찬양하여야 하지만, 은혜를 베푼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자신의 실수로 손상을 입었을 경우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또한 이것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가 병에 걸렸을 때 자신이 치료를 잘하면 살 수가 있었음에도 이것을 게을리해서 죽었다면, 그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의 책임은 그에게 있다. ·살인이나 절도의 경우에도 두 가지 면을 다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악이 동시에 나타났다. - 특별히 미래사에 대해서 이와 같은 이차 원인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얻을 수 있는 사람의 유익한 도움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의 도움을 구해야 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한, 다른 사물들도 하나님 섭리의 도구로 여기고 사용을 할 수 있다. - 그는 자신의 사업이 성공할 것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면에서 최선의 길로 인도함을 알지만 – 그는 자신의 이성과 심사숙고로 이룰 수 있는 한, 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열심히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결정에 있어서 자신의 생각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올바른 목표를 향하여 가야 한다. 그리고 그는 외부의 도움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안심하고 있으면 안 되며, 그것이 없다고 해서 두려워 떨어서도 안 된다. 그의 마음은 늘 하나님께 향해 있어야 하며, 현실을 보고 영향을 받아 이 관점을 놓치면 안 된다. - 이렇게 요압도 전투의 결과가 하나님의 손과 그분의 뜻에 있음을 알았지만, 그는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였으며,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삼하10:12) -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고 있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피조물에 둘 수 있는 모든 잘못된 확신을 멀리 할 수 있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마음도 항상 확신으로 가득 차서 우리를 둘러싼 모든 위험에 직면해서도 그 위험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I,17,1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 없이는 우리의 삶은 견딜 수 없는 짐이다 - 여기에서 경건한 사람의 측량할 수 없는 행복이 입증된다. 우리 인간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악은 셀 수 없이 많으며, 항상 죽음이 그 속에 도사리고 있다. 우리의 육신은 수천 가지의 질병의 온상으로, 몸속에 질병의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질병을 키우고 있다. 인간은 움직일 때마다 파멸의 그림자가 따르며, 그의 삶은 죽음과 어우러져 있다. -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신뢰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를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우리를 죽인다고 협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배를 타면 나와 죽음의 사이가 한 발자국의 거리에 있는 것 같고, 말을 타면 한 발만 틀어져도 당신은 죽는다.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도 지붕 기왓장의 수만큼 위험도 많다. - 당신의 집도 언젠가는 불에 타서 없어질 수 있으므로 화재가 당신을 일생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 밤에는 집이 무너져 깔려 죽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밭도 우박과 서리, 가뭄과 그 밖의 재난으로 피해를 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위협을 당한다… - 인간은 이러한 불안 속에서 매우 비참해져서, 그의 머리 위에 항상 큰 칼이 걸려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지친 마음으로 불쌍하게 반죽음이 되어 살아야 한다. - 당신은 그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물론 그 말이 옳지만, 당한 사람의 예를 볼 때에 우리에게도 그런 불행이 일어날 수 있고, 우리의 삶도 예외가 아니라는 경고를 받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런데 이와 같은 두려움보다 더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고상한 인간을 맹목적인 운명의 공격에 내버려 두셨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만약 인간이 운명의 지배하에 내 던져져 있다고 가정할 때 느껴야 하는 그 비참함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I,17,11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한다 - 그러나 경건한 자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자마자, 그는 그를 지금까지 누르고 있던 무서운 불안과 공포뿐만이 아니라 모든 근심으로부터 해방이 된다. 이것은 그가 우연의 횡포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을 담대하게 신뢰하기 때문이다. - 그가 새로이 깨달은 위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권능으로 모든 것을 보존하시고, 모든 것을 명령과 손짓으로 지배하시고, 또한 그분의 지혜를 이용하시어 자신의 결정 없이는 어떠한 일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에 위탁한 신자의 위로는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한, 물이나 불이나 칼이 자신을 해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시91:3-6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 그러므로 성도는 이러한 기쁜 확신을 하게 된다211): ·시56:4: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간이 나에게 어찌하겠는가?“ ·시27:1: „주께서 나를 도우시니 내가 왜 두려워하겠는가?“ ·시27: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에 다닐지라도“ ·시71:14: „나는 내가 소망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리라“ - 그들의 이러한 확고한 신뢰는 어디에서 왔겠는가? 그들은 모든 것이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어디에서나 주께서 역사하시고 계신 것을 알고, 또한 그분이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복이 사단이나 행악자에 의해 위협을 받을 때,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함으로써 힘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힘이 빠질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다음의 것을 생각하면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 불경한 자들의 무리와 함께 하는 사단은 하나님의 의해 사방으로 굴레가 씌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악행을 결정할 수 없고, 계획한 것을 실행할 수도 없으며,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 실행을 위해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쇠사슬에 묶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적으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게 하시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향하게 하시므로, 분노가 그들 마음대로 폭발하지 않도록 정도를 조절하시고 방향을 돌리신다. - 사도 바울이 어느 곳에서는 자신의 여행이 사단의 방해를 받았다고 말하고(살전2:18),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달려있다고 말했다(고전16:7). 만약 그가 방해가 사단에게서 왔다고만 말했다면, 마치 사단이 하나님의 계획을 뒤집을 수가 있는 것처럼, 그는 사단에게 지나친 권능을 부여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주권자시며 모든 여행길이 그분의 허락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며, 사단은 일을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과 지시가 있어야지만 무슨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이와같이 다윗은, 인생이 바퀴가 돌아가듯 늘 뒤바뀌는 변화무쌍한 것임을 깨닫고, „내 시간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31:16)의 말씀에 피난처를 찾았다. 그는 시간이라는 말을 단수로 사용할 수도 있었겠으나 복수를 사용한 것은, 인간의 처지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가, 그리고 어떠한 변화가 오든지 하나님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말하려고 하였다. - 이러한 이유로 르신과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해 군대를 연합하여 왔을 때, 그 군대가 온 지방을 멸망시키고 불태울 것 같은 불붙는 횃불처럼 보였지만, 선지자는 겨우 조금 연기가 나는 정도의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사7:4)라고 불렀다. - 이처럼 애굽의 바로도 권력과, 강함과 거대한 군사력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자신은 바다의 악어로 비유되고 그의 군대는 물고기로 비유되었다(겔29: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군대를 낚시로 집어서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끌어가겠다고 말씀하신다. -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이상 길게 논하지 않겠다. 신자가 주의를 기울인다면, 섭리를 모르는 것이 최대의 비참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I,17,12 하나님의 „후회“에 대하여 - 이것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했다고 본다. 이것은 물론 신자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가르침에 국한되었고, 단지 신자를 위로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이다. 허영된 사람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는 어떠한 것도 중요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을 만족시키고자하는 시도 조차도 없어야 한다. - 그러나 성경의 몇 가지 구절은,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위에서 논한 것에 반하여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필연성이 없는 곳에서는212) 형편에 따라 변화된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창6:6). ·사울을 왕으로 만드신 것을 후회하심(삼상15:11). ·백성이 회개를 하면 자신이 결정한 징계를 철회하신다고 하셨다(렘18:8). -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 니느웨 사람에게 40일 후에 니느웨가 멸망한다고 경고하셨지만, 그들이 회개를 하자 벌을 내리지 않으셨다(욘3:4,10). ·히스기아에게 이사야를 통해 죽음을 선고하셨지만, 히스기아의 눈물과 기도를 보시고 생명을 연장시키셨다(사38:1,5). - 이러한 구절을 근거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작정으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으시고, 각자의 공로에 따라서, 아니면 그분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인간 수명의 연수와, 이런 저런 일을 결정하신다고 한다. - 하나님의 후회에 대해서는, 우리의 실수, 무력함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는 것처럼 후회도 하나님께 돌릴 수가 없다. 누구든지 미리 알고 있는 것을 나중에 후회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분이 미래를 모르시거나, 사건을 피하실 수 없거나, 혹은 조급하고 경솔하게 결정을 하시고 바로 그다음에 후회를 하신다고 생각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성령께서 의미하시는 바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후회“가 언급되는 곳에서(삼상15:11), 하나님께서는 후회를 하는 인간과 같지 않기 때문에, 후회할 수가 없다고 하신다(삼상15:29). - 우리가 이곳에서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같은 장에서 두 표현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우리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 보기 좋게 해결되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다는 말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바로 그 이후에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삼상15:29) 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다. 이곳에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불변성이 선언되었으므로 이 말씀은 상징적이 아니다. - 이렇게 인간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질서는 영원한 것이며, 후회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적까지도 이러한 하나님의 불변성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발람은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다음과 같이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3:19) I,17,13 성경은 인간의 이해력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후회“를 말한다 - „후회“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다른 일반적인 표현과 다를 바가 없다213). 즉 우리는 연약하여 숭고하신 하나님에 미치지 못하므로, 그분에 대한 서술은 우리에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해력에 맞추어 져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때 그분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그분은 내적으로는 동요가 되지 않으시지만, 죄인들에 대해서는 분노하신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감정의 동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때마다 그분이 우리에게 분노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 방식은 인간의 경험세계에 적용하는 표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그러므로 우리는 „후회“라는 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과 행동을 변개하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신의 불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변개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개선하는 것이고, 이 개선은 후회에서 나온다. 따라서 „후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서 무엇인가를 수정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렇다고해서 하나님의 작정이나 하나님의 뜻이 변경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심정이 변한 것도 아니다. 변화가 사람의 눈에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분께서 영원 전부터 예견하시고214), 옳다고 생각하시고 작정하신 것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계신다. I,17,14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확고하게 수행해 나가신다 - 성경의 거룩한 기록이,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에게 멸망을 선포하신 후에 용서하신 것과, 히스기아에게 죽음을 선고하신 후에 다시 생명을 연장하신 것을 보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하나님의 결정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위협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위협은 이미 결정된 확언처럼 들리지만, 결과로 보면 무언의 조건이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 그렇지 않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에게 도시의 멸망을 예고하기 위해 요나를 보내셨겠는가? 그분은 왜 이사야를 통하여 히스기아의 죽음을 예고하셨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예고를 하지 않고 이들을 심판하실 수가 있지 않았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이 멸망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멸망을 면하게 하고자 그들이 회개할 것을 원하셨던 것이다. - 즉 요나가 니느웨는 40일 내에 멸망한다고 예언한 것은,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히스기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위협으로 사람을 회개로 인도하셔서 그들의 죄가 불러들인 심판을 모면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 또 다른 예로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했다고 그를 꾸짖으셨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창20:3). 아비멜렉이 변명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창20:7).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변상하려는 마음을 주시려고 그의 마음을 먼저 심하게 흔드신 다음에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셨다! - 다른 구절도 이러한 의미로 해석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선포하신 것을 실행하시지 않았다고해서 먼저 하신 작정을 취소하셨다고 보면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용서하시고자하는 사람을 위협을 통해 회개로 이끄심으로 자신이 영원 전에 결정하신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이사야의 말은 진실임이 입증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의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14:27) 제18장: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의 행위도 사용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시고자 그들의 생각을 바꾸신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하나님은 비난을 받을 수가 없다. * 칼빈과 그의 적들 칼빈은 그의 예정론 때문에 많은 공격을 받았다. 본장인 18장은 마지막 판인 1559판에 새로이 증보된 것으로서 그때까지의 예정론 논쟁의 결과가 들어 있다. 예정론의 큰 과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느 정도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이다. 자칫하면 기계론에 빠진다. 18장은 칼빈이 예정론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가 잘 나타난다. 이곳에 나타난 그의 가르침은 주로 카스텔리오에 대한 반박 및 답변에서 나온 것이다. 칼빈은 예정론에 대해 카스텔리오 외에도 볼섹과 트롤리에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215). 칼빈의 일부 거친 표현은, 그도 그들의 거친 공격에 의해 상처를 당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은 당시의 문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표현들이다. 루터는 칼빈 이상으로 상처를 받았고, 말년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그들이 당시에 종교개혁적인 가르침을 지키고자 마음을 다해서 삶으로 싸운 것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얄팍한 생각으로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비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카스텔리오 대 칼빈, 혹은 폭력에 대항한 양심“ 1936에 발행된 쉬테판 쯔바이크(Stefan Zweig,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의 소설 „카스텔리오 대 칼빈, 혹은 폭력에 대항한 양심“은 카스텔리오편에서 칼빈을 비판하였다. 그는1933의 히틀러의 권력장악 이후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한 당시의 유럽의 파시즘을 염려하며 쓴 글이다. 이에 그는 암묵적으로 칼빈과 제네바 정부 비판을 통해 히틀러와 그의 정권을 비판하였다. 인본주의가 팽배한 현대에는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사람은 카스텔리오와 쯔바이크를 동조한다. 쯔바이크의 글이 편파적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 양심 (자율적 양심, 신율적 양심) 양심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가치판단 기준(법, 규칙, 도덕, 세계관)에 따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기관이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무엇을 훔쳤다고 한다면(내 행동), 양심(기관)이 도덕(가치판단기준: 훔치지 마라)에 따라서 나를 정죄한다. 양심이란 말은 신약에서 30번 등장하는데, 예를 들면: 선한 양심: 행23:1; 딤전1:5;19; 벧전3:16;21; 히13:18 깨끗한 양심: 딤전3:9; 딤후1:3 꺼리낌 없는 양심: 행24:16 신자들에게는 양심이 관계하는 것은 하나님 명령이다. 그의 양심은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지를 항상 지키고 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이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황제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라는 황제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었다. 그의 자신의 양심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가톨릭의 비리를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듣지않고 양심의 소리에 순종했다. 그 양심의 소리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와 카스텔리오와 같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자율적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더 나가서는 성경의 다른 말씀까지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을 시도하였다. 해석의 중심에는 새롭게 이해된 인간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으로 사고한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싸움, 칼빈과 카스텔리오와의 싸움, 신학적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와의 싸움은 오늘날에도 모습만 바꾸어서 계속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칼빈과 히틀러, 제네바 정부와 나찌 정부를 비교한 쉬테판 쯔바이크는 두 가지의 오류를 범했다: 1.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했으므로 선한 양심을 가졌다. 물론 그가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216). 그러나 히틀러는 말씀(혹은 어떤 높은 규범)에 따라 행동했는가? 그의 양심이 기준으로 삼은 법이 있었는가? 2. 칼빈은 제네바 정부의 시의원도, 집행관도 아니었다. 그는 제네바 시민이 된 것은 삶의 후기였다. 칼빈은 실제적인 권한이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이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하고 재판을 하는 권력자였다. I,18,1 단순한 „허용“이 아니다 - 하나님께서 사단과 모든 불신자들을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조정하시고 이끄신다는 구절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대두된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악행)을 통해 역사하시면서, 어떻게 그들의 범죄에 의해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시는지,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일하시면서도 모든 죄책을 면하실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그의 종으로 사용하시는 사람을 벌하시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것이다. - 이것은 우리의 육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행위“와 „허용“의 구분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사단과 불신자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행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을 이루도록 조절하시고 또한 자신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이 삼가해야 할 것은, 이러한 비난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비진리로 변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217). -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명령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행한 행위에 대한 책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모순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 그러나 하나님 자신이 „내가 한다“라고 명백하게 말씀하심으로써 이러한 궤변을 물리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밀한 명령 없이는 아무 일도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이 미리 결정하셔서 은밀하게 인도하시지 않으면, 자신이 아무리 심사숙고 한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성경에서 수없이 많은 증거가 확증하는 것이다. - 앞에서 우리가 인용한 시편 말씀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115:3)은 명백하게 인간의 모든 행동과 관계되는 말씀이다. 이사야 45:7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진실로 전쟁과 평화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면, 하나님께서 모르시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동안, 인간이 자신의 맹목적인 충동대로 행동한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 몇 가지 특별한 예를 들어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밝히려고 한다: 1) 욥의 예: ·우리가 알거니와 욥기 1장에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천사처럼, 사단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왔다. 그는 비록 천사와는 다른 방법으로, 그리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나왔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단이 경건한 욥을 공격하는 것이 단순한 (하나님의) 허락으로 보이지만, 욥이 한 말로 보아서 이 사건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1:21). 사단과 사악한 도둑들도 이러한 (욥의) 시험을 섬기는 자에 불과하다. ·사단은 이 경건한 자를 절망 속에 빠트려 그의 분노를 일으키게 하려고, 스바 사람을 오게 하여 그의 재산을 잔인한 방법으로 약탈하였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빼앗으신 분은 하나님 이시라고 하였고, 자신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가난한 자가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혹은 사단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도모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키를 붙들고 계시므로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도록 이끄신다. 2) 아합의 예: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아합왕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기를 원하셨다. 이에 사단이 자기가 봉사를 하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모든 선지자의 입에 거짓 영이 임하게 하라는 분명한 임무를 주어 그를 보내셨다(왕상22:20,22) ·아합의 눈이 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일진데, 이것은 „단순한 허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상일 뿐이다. 심판자께서 일이 이루어지게 하고자 종들을 명령하시고, 이 일을 수행하라는 임무를 준 것이 단지 „허용“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3)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죽인 것: ·유대인은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였으며, 빌라도와 그의 병사들은 그들의 광적인 욕구를 따랐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엄숙한 기도에서, 모든 불경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권능과 계획을 좇아 수행하였다(행4:28218))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이미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행2:23) 이라고 설교한 것과 부합된다. 그는 여기에서, 태초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이 행한 것을 미리 아시고 의지로서 결정하셨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였다. ·다른 구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처럼 이루셨느니라“ 4) 압살롬의 예: ·압살롬은 아버지의 후처를 범하여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추악한 죄를 범하였다(삼하16:22).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자신의 처사라고 하셨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삼하12:10-12) 5) 바빌론과 앗수르 침공의 예: ·예레미아는 갈대아 사람이 유대에서 행한 모든 잔인한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였다(렘1:15; 7;14; 50:25). 이러한 이유로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워졌다(렘25:9).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손짓(사7:18), 그분의 나팔소리(호8:1), 명령과 지시(습2:1)가 불신자를 전쟁으로 자극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사람을 자신의 진노의 막대기요(사10:5), 손으로 휘두르는 도끼라고 하셨다. ·거룩한 도시가 파괴되고 성전이 무너진 것은 자신의 사역이라고 하셨다(사28:21). 6) 다윗의 예: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하나님의 명령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므로써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삼하16:10b) ·그는 하나님을 공의로운 심판자로 인정한 것이다. - 성경에 기술된 역사를 볼 때, 일어나는 사건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이 반복된다. 예를 들어 10 지파의 배반과(왕상11:31), 엘리 아들의 죽음(삼상2:34)을 비롯해 무수한 사건이 그렇다. 성경을 잘 배운 사람이면, 내가 간략하게 몇 개의 증거만을 제시한 것임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대신에 단순한 허용이라는 말을 지껄이는 자들에게는 이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조용히 않아 계셔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을 기다리고 계시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I,18,2 하나님의 자극이 인간에게 어떻게 일어나는가? - 하나님께서 인간 마음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은밀한 움직임219)에 대해서는, 솔로몬이 왕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이 된다고 본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잠언21:1) -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마음에 의도하는 것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인도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방향으로 된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활동하지 않으신다면, 다음과 같은 말씀은 잘못된 것이다: ·겔7:26b: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이며220)“ ·욥12:24: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 하나님이 놀라게 하시면 인간은 두려워 한다(레26:36)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말씀은 여기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 다윗이 사울의 진영을 몰래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적들에게 잠을 내리셨기 때문이다(삼상26:12). - 자주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말씀은 이 사실을 매우 분명히 증거한다. ·사29:4: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시고 ·신28:28: 저들을 쳐서 현기증이 나게 하시고 ·사29:10: 잠자는 영으로 저들의 눈을 감기시고 ·롬1:28: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시며 ·출14:17: 저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 - 많은 사람은 이 말씀도 „허용“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께서 유기된 자(버림받은 자)들을 포기하셔서, 그들이 사단에 의해 현혹되는 것을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분명히 밝히시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어리석어진다는 것이다(롬1:20 이하) -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며 굳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왜곡되게도 이러한 표현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들은 바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는 말씀을 근거로, 완악하게된 것의 원인은 바로 자신의 의지라고 말한다221)(출8:11). 물론 이 두 가지 주장 모두가 옳다. 즉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충동을 받으면 행동에 옮기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 나는 그들의 항의를 그들을 공격하는 데에 사용하고자 한다: „완고하게 되는 것“이 단순한 (바로가 자신에게 하는) „허용“을 의미한다면, 반항하고자 하는 충동도 바로의 마음에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로가 자신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는 것을 단지 허락하였을 뿐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궤변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즉“(출4:21)이라고 말씀하신다. ·모세도 가나안 주민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은 싸우러 나갔다(수11:20)고 하였다. ·어떤 한 선지자도 같은 말을 하였다: „또 그 대적들의 마음이 변하게 하여 그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들에게 교활하게 행하게 하셨도다“(시105:25) ·이사야서에서도 하나님께서 신뢰할 수 없는 백성(이스라엘)에게 앗수르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탈취하고 노략하게 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사10:6).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불경하고 목이 곧은 백성을 가르쳐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도록 하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앗수르 사람을 강제하여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시려는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분명해진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결정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단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불경한 자들을 벌하시지만, 사단은 하나님의 자극을 받아서 자신의 일을 하며, 단지 그에게 주어진 것만 할 수 있다.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을 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한다(삼상16:14). 이것은 사울의 광란은 하나님의 공정한 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기 위함이다. - 또한 사단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한다고 말한다(고후4:4). 이것은 혼미케하는 힘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와서 진리를 따르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거짓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어디에서 오겠는가? „만약 선지자가 거짓으로 말하면 내가 그를 속였는니라“(겔14:9)라는 말씀이 이것을 분명히 밝혀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롬1:28) 그들의 악한 정욕에 사로잡히게 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복수의 제일 근원이며 사단은 단지 대행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이 문제에 대해서는 2권에서 자유의지와 속박의지에 대해서 다룰 때 다시 한번 논의하게 되므로, 나는 이곳에서는 필요한 만큼만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뜻이 만사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분의 섭리는 인간의 모든 계획과 실행을 인도하여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신자들에게만 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불경자들도 복종하도록 강요한다. I,18,3 하나님의 의지는 단일하다 - 지금까지 나는 성경이 분명하고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논하였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말씀에 주저하지 않고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으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그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고 가장하면서 할 말은 다하여, 그러한 태도로 겸손하다는 칭찬까지 받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권위를 (겸손하게 보이는) 작은 한 마디로 대적하는 것보다 더 교만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의 겸손하게 가장된 말투: „그런것 같아 보이지 않는군요“, „이 문제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 - !222) 그들이 진리를 공공연하게 모욕한다면, 이것은 하늘을 향해 침을 뱉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 그런데 그들의 뻔뻔스러운 교만은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다: 모든 세대마다 이 (예정의) 가르침에 대해 미친 듯이 짖어대는 불경한 자들이 항상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께서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고 „자신(다윗)이 하나님의 판결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은 공정하시다“(시51:6)는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윗은 어떤 사람의 어리석음을 비난하였는데, 이들은 파렴치하게도, 더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과 논쟁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을 정죄할 권능이 있다고 말하였다. - 마지막으로 이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두 가지 주요 비판에 답하고자 한다. 첫째 비판은: - 만사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는 두 가지 상반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은 자신의 율법에 금지된 것이 시행되도록 그의 은밀한 계획에서는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비판은 간단히 해결된다. 내가 여기에 대답을 하기 전에 독자에게 다시 한번 주지하는 것은, 이러한 궤변은 내가 아니라 성령님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다음의 구절을 예로 든다:) ·성령께서는 경건한 욥에게 다음과 같은 고백을 불어 넣으셨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욥1:21). 그가 강도들에게 약탈을 당했을 때 그들의 불의한 행동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채찍임을 인정한 것이다. ·엘리의 아들이 아버지를 순종하지 않은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였음이었더라“(삼상2:25)고 말한다. ·또 다른 선지자는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3) 라고 외친다. à 하나님께서 상반된 두 의지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 하나만 가지고 계신다. - 이 비판자들이 하나님의 소극적인 허락에 의해 일어났다고 하는 모든 일도, 나는 그들의 의견에 반해서 하나님께서 이 일들의 창시자라는 것을 성경 말씀을 들어서 충분하게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빛과 어둠을 창조하시고 평안과 환란을 지으시므로(사45:7), 그가 행하시지 않으면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신다(암3:6). - 누가는 헤롯과 빌라도가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과 계획대로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바를 행하기 위해 하나가 되었다고 말한다(행4:28).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박히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이유로 스스로 분열되어 싸우지 않고, 변하지도 않으며,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마치 안 하시는 것처럼 가장하지도 않는다. - 하나님의 뜻은 하나이지만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같은 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편으로는 무엇(악한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원하시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223)! - 바울은 이방인의 (구원으로의) 부르심을 감추어진 비밀(엡3:9224))이라고 말하면서, 곧이어서 그 안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엡3:10)가 나타나 있다고 첨가하였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이 금지하신 것이 행하여지도록 원하실 수 있는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면,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딤전6:16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이라고 불리는 것, 곧 흑암으로 둘러 싸여있다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225). - 그러므로 모든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은, 어거스틴의 다음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때때로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선한 의도에서 원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착한 아들이 그의 (악한) 아버지가 죽지 않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죽기를 원하신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선한 뜻으로 원하시는 것과, 인간이 악의로 원하는 것이 일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악한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죽기를 원하는데, 그가 죽는 것을 하나님도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원하고, 후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자기도 원한다. 그럼에도 착한 아들의 경건한 마음이 비록 하나님의 계획과는 일치되지는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더 일치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땅히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아버지가 악할지라도 계속해서 생존하는 것), 그리고 반면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뜻(악인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인간 의지를 너머서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주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의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한 뜻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226). - 어거스틴은 이 말을 하기 조금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락한 천사가 모든 유기된 자(구원을 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함으로써 타락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손상을 입힐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행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하나님의 사역은 크시도다. 모든 것은 그분의 (선하신) 뜻에서 나온 것이로다! (참조 시111:2227)) 왜냐하면, 놀랍고도 형언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뜻이 아니면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으시고, 전능하신 그분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실 수 없다면, 선하신 그분께서 악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228)“ 결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하나님 뜻에 반대가 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적극적인 허락)에서 나온 것이다! I,18,4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불경자들의 행위를 사용할지라도 하나님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의 비난: - 만약 하나님께서 불경자들의 일을 사용하실 뿐 아니라, 그의 계획과 마음까지도 인도하신다면, 하나님은 모든 악의 창시자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을 수행한 것뿐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이므로 이들이 정죄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명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는 다음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의 첩들과 간음을 행하였을 때(삼하16:22229)), 하나님께서 이러한 수치스러운 행위를 통해 다윗의 간음죄를 벌하려고 하셨다. 이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악한 아들에게 단지 아버지를 벌하기 위해 근친상간을 명하신 것이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도 이렇게 이해했다: 그는 시므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신을 저주한다고 고백한 것은, 그가 시므이의 순종을 찬양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님의 채찍으로 받아들여 참을성 있게 그 징계를 받아들이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확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심판으로 작정하신 것을 불경자들을 통해서도 수행을 하시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변명할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230). 그들은 전력을 다해서, 그리고 정욕에 따라 하나님의 율법을 저촉하는 것이다. - 사람이 자신의 사악함으로 행한 것이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분의 은밀한 작정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는, 여로보암이 왕으로 선발된 것의 예를 통해 매우 잘 드러난다(왕상12:20231)). 한편으로는 백성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떠났고, 다윗의 집을 배신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경솔함과 어리석음이 벌을 받은 것이다. 다른 면으로는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이 왕이 되는 것을 원하신 것을 알 수 있다. - 호세아서에 모순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바로 이 경우를 말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아시지도 못하며 원하시지도 않는데 그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하시며(호8:4), 다른 면으로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심으로 여로보암을 왕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셨다(호13:11). 여로보암이 왕이된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과, 그가 하나님에 의해 왕이 되었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 여로보암이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과, 그가 하나님에 의해 왕이 되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조화를 시킬 수 있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멍에를 내팽겨치지 않고는 다윗의 집을 배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망은을 이러한 방법으로 벌하시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자유이다(왕상11:11232)). -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배신을 원치 않으시지만, 다른 목적을 품으시고 배신을 원하셨다는 것을 보게되는데 이것은 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여로보암은 모든 사람의 예상과는 달리 왕이 된 것이었다. -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들로부터 왕국의 일부를 빼앗기 위해 대적을 일으키셨다고 성경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왕상11:23233)). 여기에서 독자는 두 가지 사실을 주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한 왕의 통치를 받을 것을 원하셨다. 그런데 왕국이 둘로 나뉘어진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분열된 것은, 하나님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선지자는 이러한 것을 전혀 모르는 여로보암에게 예언과 기름 부음을 통해 왕이 될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 이 사실을 모르셨다거나 원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가 없다. - 그러면서도 백성의 변절은 정당하게도 정죄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뜻에 반역하여 다윗의 집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 후에 르호보암이 거만하게 백성의 청원을 무시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 아히아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왕상12:15).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거룩한 하나(통일)가 분열된 것이며, 솔로몬의 아들 열 지파가 갈려나간 것이다. - 이와 비슷한 다른 예를 들고자 한다: 백성이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협력까지 하여 아합왕의 이들들이 살해당하고 그 후손들이 멸절당했다(왕하10:7). 이에 예후는 하나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진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엘리아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를 도와준 것을 꾸짖고 있는데 그것은 올바른 일이다: „너희는 의로운가?234) 내가 내 주를 배반하여 그를 죽였거니와 이 사람을 죽인자는 누구냐?“(왕하10:9) - 한 가지 사건에서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의가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은 내가 이미 앞에서 밝힌 적이 있다. 어거스틴의 대답을 보면, 여기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다: 성부가 성자를 내어 주셨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유다는 주님을 (대제사장에게) 내어 주셨다고 할 때, 그들이 (성부, 성자, 유다) 행한 동일한 일에 그 일을 한 목적이 서로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의롭고 인간(유다)은 불의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 만약, 사람이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나님이 충동하여 그 일을 했을 때,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거스틴의 다른 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자신이 원하신 바를 이루시며, 그들은 그들이 행한대로 보응을 하시니, 누가 그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235)“ - 유다의 배반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아드님을 내어 주셔서 죽게 하셨다고해서, 그의 범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잘못되었다. 반대로 유다에게 구속사역의 명예를 돌리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되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 것은 매우 옳다고 하겠다: 이 심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었으며 무엇을 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를 물으신다. 이것으로 그들의 계획과 의지를 심판하려고 하신다. - 이러한 심판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자신의 이해력을 초월한다는 이유만으로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는 이 가르침(칼빈이 지금까지 강조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가르침)을 무시하는 태도로 불평을 하는 것이 과연 용서를 받을만한 일인지를 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모든 것을 예외 없이 겸손한 열정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그러나 뻔뻔스럽게도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떠들고 있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길게 반박을 할만한 가치가 없다. 제 I 부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매우 강조하였다.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은 기독교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발견한 복음이다. 그러나 많은 인문주의자가 이 가르침을 흔들어 칼빈을 끈질기게 공격했다. 제네바 시당국에 고소를 하기도 하고, 여러 책자를 통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므로, 칼빈은 합리적인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가 기독교강요에서 그들에 대해 다소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것은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다. I부 끝 -------------------------------------------------------------------------------- 1)번역 오류가 발견되거나, 중요한 부분이 누락된 것이 발견되면 수정하면서 Version의 수를 높혀 갈 예정이다. 2)필자는 한국에서 기독교 강요를 7번 읽은 집사님을 만났다. 그분은 교회에서 이것을 가르친다. 그만큼 기독교 강요는 신자들에게 애독된다. 3)기독교강요를 읽으면서 칼빈의 감정 표현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지나친 표현도 있다는 것을 필자도 인정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을 전복하고자, 칼빈을 갖은 고소와 비방으로 괴롭혔던 일부의 인본주의자들과의 싸움을 생각한다면, 그의 억양된 감정을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강요의 연구를 통해 칼빈의 인간성을 새롭게 발견하여, 그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4)McNeil판 기독교 강요 11쪽. 존 헤세링크의 „개혁주의 전통“ 최덕성/ 본문과 현장사이. 62쪽에서 재 인용한 글. 5)괄호에 들어있는 새로운 제목은 필자가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장들을 그룹으로 묶어서 설명한다. 6)I,4 Eandem notitiam partim inscitia, partim malitia vel suffocari vel corrumpi. 라틴어판에서는 질식되었다는 말이 독일어판에는 억압되었다(unterdrueckt)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사악한 의지가 강조되었다. 7)I,5 Dei notitiam in mundi fabrica et continua eius gubernatione lucere: 계속해서 비춘다. 8)et animos flectere ad exequenda sua iudicia. flectere라는 말은 „구부리다, 바꾸다“라는 의미이다. 9)cognitio는 지식이 아니라 인식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한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깊은 관계를 맺는다“라는 의미이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인식으로 번역을 하면서도 문맥에 따라 지식이라는 말로도 번역하였다. 10)Wisdom, Weisheit 11)잠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12)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생각해 볼 것. 13)만물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경을 통해 주신 확실한 지식이다. 이러한 계시를 떠나서는 만물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만물의 근원에 대해 처음으로 체게적으로 생각한 철학 학파는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 학파(탈레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14)중세 때에는 감히 인간이 하나님과 견주지 못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때에 인간이 계속해서 자신을 발전시켜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나왔다(Pico della Mirandola: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칼빈은 초기에 인문주의자였기 때문에 지성인들 사이의 이러한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17세기에 데카르트는 인간 중심의 사고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으며 이것은 독일 관념론(헤겔의 철학)에서 꽃을 피웠다(메피스토텔레스가 파우스트에게: „너는 하나님처럼 되리라“) 15)maiestas, majesty, Majestät(Hoheit, Erhabenheit) 16)presence, Gegenwart 17)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어떠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CCM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닌지?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정통 시대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강조되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도 함께 강조되어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룬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을 주로 두려운 분으로 보는 중세의 하나님 관을 벗어났다.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서구 사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서서히 물러났으며, 신학적 자유주의를 통해 기독교는 문화적 기독교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은 신학에서 제외되었다. 한국인의 하나님 관은 아직도 주로 한국인 재래의 신 의식이 재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올바로 두려워하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18)이 복음은 오늘날에 까지도 큰 영향력이 있다. 계몽이라는 말은 이러한 생각을 근간으로 한다. 19)religio: 근심, 종교적 감정, 종교심, 경외심등 폭넓게 사용되는 말이다. Otto Weber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번역하였음. 20)pietas, piety. Frömmigkeit, eusebeia(그리스어). 경건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결합된 두려움이라고 칼빈은 정의한다. 이것은 지식의 전제 조건이다. 하나님에 대한 건전한 두려움은 신앙의 필수조건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참된 경건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그 결과로 한다. 21)duplex … cognitio: 하나님에 대한 이중 인식(신학 전문용어). 신자만 이 두 가지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22)세상을 상당히 긍정하는 칼빈주의 근거가 여기에도 보인다.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개선을 하는 의미에서는 칼빈주의가 두 왕국을 구분하는 루터주의보다는 적극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가르침을 조화롭게 수용해야 한다. 23)Sensus, Wahrnehmung 24)they will never yield up their whole selves to him in truth and sincerity. 이러한 표현에서 칼빈 신학의 중심을 볼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한다. soli deo gloria! 25)칼빈 신학의 특징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지만, 또한 율법의 제 3용도를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이 신자에게 실제적인 삶의 지침을 준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부분은 나중에 상세하게 다룬다. 철학자의 하나님의 문제는 자신이 만들어낸 하나님 인식에 따라 율법을 인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율법에 삶의 지침을 나타내셨다. 26)지금 칼빈은 인간은 원래 자연계시를 통해서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마땅히 알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중에 가르친다. 자연계시만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 학지는 20세기에서 에밀 부룬너이다(신정통주의자). 지금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읽어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와, 둘째로 특별계시인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아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가이다. 27)이 문장만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 단지 심판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지나치게 악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8)디아고라스, 테오도레,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의 동시대 인물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신랄하게 공격함. 이들의 무신론은 당시 신들의 부도덕하고 불완점함을 전제하고 있었으므로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이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을 생각해서 이들을 비판함. 칼빈은 여기에서 이 궤변학자들이 신자체를 거부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29)이러한 칼빈의 인식은 모든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적인 것이었다. sola gratia 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인간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것이 예정론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이다. 30)몇 백 년 후에 포이어바하가 비슷한 말을 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었다. 31)칼빈은 율법을 매우 중요시 함. 이것이 개혁신학을 다른 신학과 구분하는 하나의 특징이다. 32)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열심이 없어서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고 대부분 열심의 과열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십자군 운동, 극렬 회교도의 자살폭탄. 한국교회는 유래없이 종교에 열심이다. 그리고 유래없이 타락했다. 신앙생활의 초점은 하나님과 자신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로 올바른 열심이 나온다. 33)3세기의 기독교 변증가. 34)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문제. 35)하나님의 심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위선자를 양산할 수 있다. 36)1세기의 버질에 버금가는 유명한 로마 시인. 37)이러한 생각이 발전되면 „심판은 없다“로 귀착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심판이 있을 수 없다. 계몽주의 이후로 이러한 생각이 발전함. 심판과 지옥은 전근대적인 사고로 치부함. 오늘날 독일에서 지옥을 말하는 사람은 전근대적인 사람으로 간주된다. 38)외부적으로 율법을 저촉하는 것은 이미 내부가 부패해서 그것이 결과로 나오는 것이다. 39)vorgetäuschte Gottesfurcht: 위선적 경건. 40)위선이란 존재(Sein)와 외관(Schein)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41)필자의 견해로는 타종교에서는 위선에 대해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만 유독 위선을 크게 고발한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하나님에게서 온 참 종교임을 말해준다. 신을 섬기는 데에는 열심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는 열심이 아니라 마음을 드려야 한다. 온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종교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기독교에 종교는 극성하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드물다. 42)이 구절은 자연계시를 주장하기 위해 잘 인용이 된다. 43)그러나 실제는 그런것 같지 않다. 그러면 칼빈은 지나친 낙관주의자인가?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 만큼 세상이 공의롭게 돌아가지 않는 것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종교개혁 2세대의 사람으로서 세상이 알마나 무질서하고 악한 것인지를 충분히 체험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최적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통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문화와 역사는 계속 발전한다는 문화개신교의 낙관론자나 헤겔적 변증법주의자는 아니다. 그의 낙관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 그의 이러한 믿음의 영향력을 통해 특별히 박해받고 수없이 순교를 당한 위그노들에게 큰 희망과 위로를 주었다. 44)인류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현명한 플라톤의 예를 듬으로써 아무도 성경의 계시 없이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45)크세노폰의 Memorabilien에서(소크라테스에 대한 기억). 그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였음. 철학자이며, 군인, 역사가. 46)만약 가톨릭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그들이 성경을 50권이나 100권으로 결정해도 그것이 옳다고 했을 것이다. 실제로 가톨릭의 성경은 외경을 포함하기 때문에 66권을 넘는다. 47)„마니교들의 기본 서신에 대항하여“ 5장 48)중요한 내용이라서 필자가 거의 완역을 하였다. 49)변론술이나 과학적인 증명… 50)성경의 저자 중에서 당대의 석학이나 당시 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다. 사도 바울은 당시 유명한 교육도시인 다소에서 중학교 정도를 졸업하고 바리새 교육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온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로만 그레코의 대학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다(대학에서는 본격적으로 변론술을 가르침). 그의 스승 가말리엘은 유대의 석학이었으나 당대 제국의 석학은 아니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변증술을 어디에서 배웠을까? (그의 서신에서 그는 당시의 변증법을 사용함). 다소에서 조금 배우고, 가말리엘로부터도 조금 배운 것 같다. (바리새인들도 변증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아볼로나 당시의 변론가들에 비해 변론술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중요한 점은, 성경은 하나님과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인위적인 변론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나 성경의 다른 저자들도 당시의 수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했지만, 당시의 변론의 특별한 기교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진리는 스스로 증명하기 때문에 변론의 기교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51)타티안은 모세가 호머나 다른 저작자보다도 훨씬 이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논증에 사용함. 52)이 주장은 근대의 고고학의 발달로 옳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예를 들어 함무라비 율법은 모세 율법보다 몇 백 년 앞선다. 모세 율법은 당시 근동 율법의 형식에 따라서 제정되었다. 오늘날 모세 율법과 근동의 율법들이 비교됨. 내용에 있어서는 모세 율법이 훨씬 더 공의롭고 인도적이다. 53)„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54)기적이 하나님의 율법과 가르침이 정말로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을 확증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좀 더 큰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케한다는 칼빈의 가르침은 의미가 크다. 일반적으로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는 관심이 멀어지고 더욱 기적에 매이게 되어 삶이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지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55)오늘날 역사 비평에서는 이 문제를 매우 간단히 처리한다: 출애굽은 없었다는 것이다! 있었다고 해도 고작 몇십명이 넘어온 것뿐이다. 56)역사 비평에서는 이 기록이 다윗이 왕이된 후 몇 백 년이 지나서 쓰여졌다고 주장함. 57)„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방인)이 복종하리로다“ 58)역사 비평학에서는 예언을 부인하므로, 이 부분을 아사야의 저작으로 보지 않는다. 제2 이사야(40-55장)라는 이름을 만들어냄. 56-66장은 제3 이사야 작품이라고 한다. 간단히 말해, 성경의 예언 기록은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이것을 예언이라고 꾸며서 기록한 것이다. à 성경은 날조된 것이다!!! 59)칼빈 당시에도 모세의 실존을 의심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19세기에는 역사적 고증이 없다는 이유로 다윗의 실존까지도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고고학의 발달로 다윗왕이 고증되었다. 60)역사비평가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신명기가 요시아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함. 61)Hans-Joachim Kraus „Geschichte der historisch-kritischen Erforschung des Alten Testaments“. 2e, 28-31쪽. 이것은 역사비평의 교과서이다. 62)176-164 BC에 유대를 다스린 시리아 왕. 유대를 헬라화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반대자를 처형함. 성전을 더럽힘. 이에 마카비 반란이 일어났다. 63)„믿음의 유익에 대하여“, 18 64)칼빈은 제네바에 나타난 소위 Libertins(자유사상가)들에 의해 많은 괴로움을 당했다. 이들과의 싸움과 논쟁은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그들은 주로 르네상스 –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건전치 못한 사교춤, 오락을 즐기며, 간음과 이혼을 관용하는, 즉 하나님의 율법을 벋어나는 풍습을 제네바에 들여오려고 하였다. 이들은 반기독교인들이 아니었고, 교회에 출석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들 중에 성령을 빌미로 하나님의 율법을 넘어가 자유사상가들의 생각을 지지하는 자들이 있었다. 교회사적으로 어떤 것을 빌미로 삼아 성경을 넘어서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려는 집단을 열광주의자들이라고도 한다. 65)Verblendung 66)„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67)„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68)하나님의 종은 성경에 예속되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예속된다는 말과 같다. 한국의 많은 이단 단체들의 예. 69)성경이 없으면 영 분별을 할 수가 없다. 70)이 부분은 중요한 대목이니 주의해서 공부할 것. 율법의 효용성에 대한 가르침. 71)„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2)이것은 신앙의 주관적인 면으로서 중요한 하나의 측면이다. 말씀은 절대로 객관적이므로, 신자는 당연히 기본적인 가르침은 언제, 어디서나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누구든지 시기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성령의 감동 감화가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나의 지성과 건전한 이성을 사용하셔서, 내가 말씀을 잘 이해해서 인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를 지도하신다. 따라서 신자는 성령의 감화가 없이 분위기에 휩쓸리거나, 목사의 말이라고 해서 억압적으로, 혹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73)이 제목은 엄밀하게 보면 3항에만 해당한다. 1,2항에서는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요약하면서, 자연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이 같음을 역설한다. 74)우리는 앞에서 1-5장에서는 피조물에 계시된 하나님을 배웠고, 6-9장에서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배웠다. 75)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즉 실제로 인자를 천대까지 베푸시며, 악을 3-4대까지 보응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1000:3의 비율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얼마나 인자하신가를 나타내는 수사학적 표현이다. 76)아리스트텔레스의 하나님: 1) Immens(연장이 없다. 즉 무한하다), Incorporal(몸이 없다), Immortal(죽지 않는다. 영원하다), Incomprehensible(불가해하다), Infinite(끝이 없다). 2) omni-scientia(전지), omni-presentia(무소부재), omni-potentia(전능), omni-benevolentia(전선). 중세 스콜라 신학에서 이것을 받아들임. 이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 살아계셔서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죄인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중세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것도 이해를 할만 하다. 77)믿음, 즉 경건이란 우리가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한 삶을 살고 하나님 말씀을 거짓없이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은 결코 „무흠의 신자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때,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 성결한 삶을 살게 되며, 또한 이것을 힘써서 이루라는 것이다. 그는 죄가 없는 완전한 삶을 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78)이것은 모든 종교인이 자신의 종교가 가장 우월하다는 생각을 해도 좋다는 허용적 의미이다. 79)Transformation은 종교학과 다원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자신을 변모해나가는 능력이 있어야 종교는 살아남을 수 있으며, 전체에 적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진정한 다원주의가 성립된다. 80)한스 큉은 „타 종교도 기독교와 같은 구원의 길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우상숭배를 진정한 하나님 숭배로 인정함. 81)어거스틴의 신국론 VI,10 82)Unbegreiflichkeit 83)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신 적은 없다. 그러나 다른 것(구름기둥, 불기둥)을 통해 자신의 임재를 표현하셨다. 이것은 단지 교육의 목적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인 된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강조한 것이다. 84)창18에서 3명의 남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남. 13절을 보면 하나님(아도나이)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두 명은 천사들이다(19:1). 하나님으로 표현된 이 분은 천사가 아니라 성자(聖子)로 추측됨. 다른 곳에서는 천사는 구분이 가도록 여호와의 사자(말락 아도나이)로 표현되었다. 85)Atonement cover(NIV), mercy seat(KJV), Gnadenthron. 속죄소는 언약궤의 뚜껑의 두 그룹 천사 사이 부분을 말하며 이 곳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는 장소이다. 또한 속죄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을뿐만아니라 대속죄일에 속죄를 상징하는 피를 뿌리는 장소이기도 했다(레16:14-17). 86)„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87)루터의 대적자 Eck는, 1526에 그의 저작 Enchiridion(작은 교과서) 15장에서 하나님이 형상을 가졌음을 옹호함. 88)교황. 590-604. 그의 큰 업적으로 말미암아 대 그레고리라고 불림. 그레고리 성가. 89)„that images are the books of the unlearned“, „Libros idiotarum esse imagines“ 무식하다는 말은 비하하는 말은 아니다. 90)교회에는 걸려있지 않았지만, 르네상스 시절에 가슴을 드러낸 마리아 그림이 많이 그려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그림은 바티칸의 시스틴 예배당의 벽화이다. 벌거벗은 모습이 그려졌으므로 보기 흉한 부분이 그대로 그려짐. 교황의 명령으로 다른 사람이 이것을 가리게 했으나, 후세에 가린 부분을 다시 없애버림. 91)이것을 단순히 악순환이라고 보는 것보다, 교황청의 의도적인 우민화 정책이라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백성의 우민화가 매우 효과적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92)죽은 자를 너무 높여서 결국 신화적인 존재가 된 것. 93)하나님이 돈(능력, 치료, 실제적인 도움)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옆에 계신 것을 믿지 않는다. 기적신앙의 문제. 94)Ludwig Feuerbach, 1804-1872. 포이어바하가 투사이론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후의 종교비평가들이 그의 이론을 설명할 때 사용함. 95)우상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상에 능력을 불어넣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즉 우상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하나의 실재가 된다. 이러한 실재 뒤에는 우리를 하나님 말씀을 떠나 자신의 욕망대로 살게하는 사단이 서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96)성지(형상물)탈환이 수백 년 간 많은 사상자를 낸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가 언제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는 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것도 과연 우상숭배가 아닌지 한번 심각하게 고민을 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중동의 사태를 더욱 가열시키고, 테러분자들을 양산시키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회교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가로막는 사단의 자식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우상숭배자일 뿐이다. 97)„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98)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이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그는 아름다운 여자의 상을 만들어 그녀와 사랑에 빠지자 나침내 그녀가 진짜 사람으로 변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99)동방 교회에서 특히 형상 경배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비잔틴의 레오 황제는 730년에 형상경배 금지 칙령을 내렸다. 그 아들 콘스탄틴 5세는 754년의 제국 공의회를 통해 형상 경배를 저주했다. 이레네 여황제에 이르러서 서방 교황의 허락을 받고 니케아에서 열린 제 7차 공의회에서 형상경배(Verehrung, proskynesis)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형상숭배(Anbetung, alethine latreia)를 허락하지 않았다. 형상 경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색체나 모자이크 돌로 그려진 그림들을 교회나 거룩한 의상이나 길거리에 달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소재는 그리스도, 마리아, 천사, 성인들의 그림이다. 근거로는: 그들이 그림으로 자주 보여지면 보여질수록 그들을 열망하는 생각이 고무된다. 이들에게는 입맞춤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숭배는 안 된다… 그림에게 영광을 돌리면, 이 영광은 그림의 실제 인물에게로 전가된다. 그림을 경배하면, 그림에 나타난 인믈을 경배하는 것이다. – 아민 져진의 교회사, 2권에서. 100)„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를 빗댐. 101)참 경배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102)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과 나누지 않는다는 말씀은 특히 한국인이 매우 경각심을 가지고 들어야 하는 말씀이다. 인간에게(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 조금이라도 영광을 돌린다면, 이것은 우상숭배하는 것이고, 그와 그 지도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다. 103)우리가 신학을 연구하면서 가끔 부디치는 문제는, 우리가 성경이 설명하지 않는 부분을 성경보다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가 이다. 이것은 칼빈도 처했던 딜레마이다. 그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비록 교부들의 생각을 정리하기는 했지만, 성경이 사용하지 않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옹호하기 위해 이단자들과 싸우는 자들이 부디치는 문제이다. 논쟁의 성격상 합리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104)Immensity, immensa, unermeßlich, 기본 의미는 연장이 없으므로 무한하다는 의미. 105)accomodation. 중요한 개념이니 숙지할 것. 106)In tribus personis, in three persons. 107)히1:3의 번역에서 불가타와 그리스어 성경의 표현을 비교해 보면, 그리스 원어에는 히포스타시스(존재양식)으로 되어 있지만, 약 500년 후에 히에로니무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에서는 숩스탄티아(본질)로 번역이 되어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__ 의 형상 “이라고 했으므로 히포스타시스나 숩스탄치아, 어느 것을 사용해도 의미는 대동소이하다. 108)이러한 이유로 그는 적으로부터 삼신론을 가르친다고 당국에 고소를 당한 적이 있다. 109)잠언 8장 이후에 지혜는 의인화된다. 칼빈은 이 지혜와 로고스(말씀)을 연결짓고있음. 110)„Cur enim diserte narrat Deum singulis operibus creandis dixisse, Fiat hoc vel illud, nisi ut impervestigabilis Dei gloria in imagine sua reluceat?“ „…., unless that the unsearcheable glory of God might shine forth in his image?“ 영어나 독일어 번역에서 „in imagine sua reluceat“를 „그의 형상에서“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그“가 하나님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없도록 필자가 „피조물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반영된다“라고 번역하였다. 111)„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잠8장을 읽어볼 것. 112)세르베투스 대해서는 „기독교 강요 보조자료“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었다. 113)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은 한 분이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처형을 당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선상에 놓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셨으므로 처형당하신 것이 아니다. 1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115)이사야24-27은 하나의 큰 단락을 형성하며, 비평학자들은 이것을 이사야 묵시록이라고 한다(그들은 이것을 포로기 이후의 저자 미상의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는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록의 특징이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묵시록이라는 주장이 옳지 않다는 설도 유력하다. Duhm이 1892년에 제3 이사야를 주장한 이후, 이사야는 세명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제1이사야는 1-49; 제2 이사야는 40-55, 제3 이사야는 56-66장). 이 단락에서 세상에 있는, 그리고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적의 몰락을 서술한다(24:21-22; 27:1). 사단의 죽음, 그리고 죽음이 완전히 극복된다. 죽은자의 부활(26:19)과 지구가 거의 멸망함(24:19). 그리고 이스라엘은 구원된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예수님 재림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 24장의 지구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25장에서는 약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남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음. 아마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그리고 그 사이의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따라서 24-27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야훼(성부)와 그리스도(성자)로 분리하기가 어렵다. 이 단락에서 등장된 야훼를 전부 그리스도라고 본다면 이해가 되지만, 25:9에 나오는 엘로힘, 야훼만을 지칭하여 그리스도라고 하는 칼빈의 주장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본다. 116)„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117)„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18)이것은 칼빈이 롬14:10-11을 인용한 것은, 본문에는 하나님이라고 되어있다. 즉 칼빈이 잘못 인용한 것으로 간주된다. 칼빈은 기억력이 매우 비상한 사람이었지만, 기억으로 본문을 인용하였을 경우에는 가끔 분명치 못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칼빈이 바로 뒤에 인용한 고후5: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하므로 의미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119)이것은 빌립보 찬가중 빌2:10-11에서 예수님께 돌리는 영광이기도 하다. 120)요엘3:6에서 여호와는 70인역에서 퀴리오스로 번역되었다(καὶ ἔσται πᾶς, ὃς ἂν ἐπικαλέσηται τὸ ὄνομα κυρίου, σωθήσεται·). 베드로는 지금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여호와라는 이름 대신에 퀴리오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36절에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퀴리오스로 만드셨다고 함. 즉 베드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선상에 올려놓음. 121)개역 개정판에는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신을 보내셨느니라“로 번역됨. 다수의 번역이 이것과 같다. 그러나 루터 번역은 칼빈의 번역과 같다. 122)„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123)„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124)믿음이 하나님 믿음, 성자 믿음, 성령 믿음의 세 가지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다. 125)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와 더불어 삼대 갑바도기아 교부로 불리며, 이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381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 : 하나님은 세 가지 경륜적 모습을 가지신 한 존재이다: una substantia, tres personae = mia ousia en tresin hypostasesin 126)예를 들어 가현설: 한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예수님 당시에는 성자로, 예수님 승천 이후는 성령으로 자신을 계시하심. 127)proprietas, Eigenheit 128)„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9)삼위일체의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뽑힐 것이다! 130)개혁신학의 성경연구 자세는 칼빈의 이 말에서 유래되었다: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면 멈춘다“ 131)그는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이 지옥을 지키는 제르베루스(Zerberus)라는 머리가 셋이 달린 괴물로 여기는 자라고 하였다. 132)이것은 범재신론의 주장이다: Panentheismus 133)즉 성자와 성령은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세르베투스는 양식론자이다. 예수님은 원래 인간이었는데, 차차로 하나님의 본질의 한 부분이 되었다고 한다. 134)Valentine(Valentino) Gentile. 제네바에 이태리 피난민 교회가 있었다. 여기에 여러 명의 유력한 반 삼위일체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쟝띠도 그중의 한 사람. 이들은 종교적 관용을 요구함. 그는 반 삼위일체를 주장한 저서로 인해 먼저 투옥되었다가 추방당함. 1566에 베른에서 붙잡혀서 참수형을 당함. 135)성자는 본질적으로는 낳으신 분이 아니지만, 성부와 구분할 때에는 낳으신 분이라고 한다. 136)그들은 인간 예수에게 하나님이 신성을 이입되었다고 주장함. 137)„이단에 대항하여“ III,6,4 138)모든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서 다시 권능을 받는다는 것은 모순된다는 그들의 비판에 대한 대답: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추시고 모든 것을 포기하셨기 때문이다. 139) 순교자 져스틴이라고도 하며, 2 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이다. 165 로마에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순교. 100년경 탄생. 젊어서부터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으나 스토아, 소요학파, 플라톤 학파에게서도 만족을 얻지 못함하다가 기독교 가르침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만하고 유익한 철학을 발견하였다“(트리폰8)고 술회함. 남아 있는 그의 3편의 변증서: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에게 바치는 변증서. 로마 원로원에 바치는 변증서.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 원로원에는 당대의 지성인, 철학가들이 있는 곳이므로 그의 변증서의 질과 내용의 방향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의 변증서는 140-160 사이의 (소아시아의) 예배에 대한 유익한 정보를 준다(변증I,67). 그의 변증서 내용 요약: 국가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양자가 지혜를 사랑할 때만이(플라톤!) 번영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을 숭배한다.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므로 그들을 향한 근거 없는 증오는 중지되어야 한다. 플라톤과 스토아 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준비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에 참여한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아무도 완전한 진리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지만, 오늘에는 모든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의 내적인 음성을 들으면 기독교인이 될 수가 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은 기독교를 믿게끔 되어 있다. 클레멘스와 오리겐이 이러한 생각을 발전시킴. 그의 변증 방법은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있지만, 그가 진정한 신자였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140)안디옥의 비숍으로서 110년경에 트라얀 황제 치하에서 로마에서 순교함. 그는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들과 싸우다 죽어야 하는 사형 언도를 이미 받고서, 소아시아를 거쳐서 10명의 로마 군인들에 의해 호송되어 로마로 가는 도중에 여러 교회에 7개의 서신을 씀. 그의 서신에서 이단적 교리에 의해 위협을 당하는 교회를 걱정함. 그는 신자들에게 순교를 당할 것을 격려함. 그는 교회가 비숍과 결속할 것을 당부함. 141)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의 진정성은 19세기까지 확정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까지 여러 가짜 서신들이 인용되고 있었다. 142)스토아의 신을 말한다. 인격적인 신이 아니다. 범신론. 모든 사물은 신의 연장(延長)이다. 키케로: 신들의 성질(I,13,33) 143)특히 오리겐은 신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창조이전의 문제를 많이 다루었다. 우리의 신앙은 근거없는 사변에 기초하면 안 된다. 그는 신플라톤 주의의 유출설의 영향으로 성령 밑으로 천사, 인간의 영, 마귀와 사단이 따른다고 가르침. 이들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되었다 à 영혼의 선재설. 그의 원타락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최고의 천사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함. 하나님께서 그를 지옥에 보냄. 그가 반란에 참가한 다른 천사들과 인간의 영들과 함께 지옥으로 끌고 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살 곳을 지정하심. 이렇게 해서 하늘과 땅과 하계(下界)가 탄생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자비의 첫 걸음이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온다. 선한자는 천국에 가고 악한자는 지옥에 간다. 영혼은 천국에서도 배우고 계속 노력을 해서 여러 세계를 통과하여 완성의 단계로 나아간다. 지옥은 각자의 죄를 불사르는 정화를 시키는 불이다. 지옥의 불은 벌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종국에는 모든 죄가 불살라져서 모두가 정화됨. 결국은 사단까지도 정화되어 하나님께 나아온다. 이것이 만유구원론이다. 그러나 물론 또 다시 타락이 시작되어 새로운 세대의 역사가 진행될 수 있다. 지금의 세대는 첫 세대가 아니다. 오리겐의 신학은 많은 문제가 있지만, 또한 많은 공헌으로 말미암아 이단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순교했다(고백자). 144)루터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하나님은 이들을 때려주시기 위해 회초리를 만들고 계셨다고 했다. 145)오늘날의 성경은 무엇인가? 이성이다. 혹은 이성을 가진 각 주체이다. 이성이 바로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숫자는 사람 수 만큼 많다. 146)안식일에는 또한 자신의 구원(출애굽)을 기념하고 감사해야 한다(출20:11과 신5:15를 비교해볼 것) 147)욥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이 구절은 사단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148)마니교의 기본 원리는 선에서 악이 나올 수 없으므로 악이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니교는 힘이 서로 대등한 빛의 원리(하나님)와 어둠의 원리(사단)의 이원론의 종교이다. 기독교는 하나님만이 전능하시기 때문에 선과 악의 이원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마니교는 악의 근원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듯이 보인다. 즉 하나님이 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모순이므로, 악이 원래부터 존재했다는 이론을 만들었다. 선과 악이 싸워서 선이 패배함으로써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가르침으로써, 인간에 있는 선과 악을 잘 설명하여 자기들이 기독교보다 발전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 마니교에 몸을 담았으나, 나중에 „악은 선이 결핍한 것“(natura, in qua nullum bonum est: 신국론 XIX,13)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이것으로 마니교를 논박했다. Contra Julianum에서는 인간의 악은 악이라는 실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패에서 온 것이라고 함. 149)만물은 zaha의 번역으로서 별들이나 천사들을 의미할 수 있다. 만물은 이 창조기사에 특별히 언급되지 않은 하늘과 땅의 모든 무리들을 의미한다. KJV „Thus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host of them“ 150)edification, Aufbauung, ad aedificationem, a l’edification. 교회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세워진다. 이 말의 흔히 „교회에 덕이 안 된다“는 말을 할 때 사용하는 덕의 의미와 같으나, 의미를 잘 생각해서 사용하여야 한다. 이 말은 교회가 피해를 입지 않고자 진리를 은폐하거나, 거짓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51)confirm the conscience, conscientias confirmare, confermer les consciences, die Gewissen aufrichten. 양심은 성경에서나 서구 문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테마이다. 양심을 떠나서 기독교를 논할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은 바로 인간의 양심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 기독교는 양심 문제를 별로 논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양심과 신앙생활을 별개로 생각한다. 양심을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율법)이 올바로 선포되어야 한다. 152)„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53)중세신학은 디오니시우스(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고스, 6세기의 신비가)의 영향을 받아 천사들의 계급과 여러 직능을 서술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의 신학대전에서 천사들에 대해 지나치게 공상적으로 다루었다. 154)칼빈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우리의 신뢰와 존귀를 절대로 다른 피조물에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만 존귀를 돌리고 하나님만 신뢰를 해야 한다. 155)ὁ θεὸς τοῦ αἰῶνος τούτου: 직역을 하면 „이 세대(아이온)의 하나님“이다. 세대란 아담의 타락부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의 기간을 말한다. 즉 인간의 모든 시대를 말하며, 이 기간에는 인간이 사단의 지배와 죄의 능력으로 신음하는 시대이다. 성경은 비유적으로 사단도 하나님(이 세대의) 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사단의 능력이 강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깨어있지 않으면 사단의 지배에서 살게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대의 문화와 풍조를 따라가면 안 되며, 복음으로 문화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늘 세상의 풍조를 따르기를 원하므로, 우리는 영적 싸움을 싸우지 않을 수 없다. 156)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157)사단은 모든 마귀(타락한 천사)를 지배하며 그의 능력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자녀를 지배할 수 없다. 15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159)사단은 우리의 정욕을 부추겨 죄를 짓도록 하기도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우리에게 잘못된 세계관을 심어주어서 우리를 아무 저항없이 그의 부하로 만든다. 잘못된 세계관을 예로 들어볼 것:…… 따라서 세계관과의 전쟁은 필요하다. 160)우리가 말씀으로 무장하여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사단은 우리를 습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늘 깨어서 산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공격을 덜 받는다. 따라서 신자가 올바른 양심, 도덕심, 교양, 합리적 생각, 깨끗한 마음, 자비한 마음 등의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것이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러한 것이 지배하지 않는 단체는 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신자는 교회가 사회를 정화시키는 촉진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회가 타락하면 대부분 신자도 같이 타락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가 문화를 변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문화화되는 위험이 수반되므로 대단히 조심스럽게 수행해야 한다. 161)이 문제는 우리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우리가 불신자와 세상의 불신, 불경을 사단의 세력으로 본다면 우리는 이분법에 빠져서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어렵게 되고, 항상 판단을 해야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또한 불필요하게 상대방을 판단하는 바리새주의에 빠지기 쉽다. 칼빈은 이것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단의 세력을 첨예화시켜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러한 살벌한 싸움터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62)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곳에서 우리가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또한 그러한 곳에서 우리가 문제없이 거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믿음의 진실성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163)If we have any anxiety about our own salvation. Siqua salutis nostrae cura nos tangit. Wenn uns die Sorge von unserem Heil anliegt. Si nous avons soin de nostre salut. 대부분 라틴어 cura를 „걱정“에 가깝게 번역했는데(영어는 열망), cura는 걱정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마음을 기울인다(애쓰다, 주의하다)가 기본 의미이다. 구원이란 우리가 얻기 위해 애써야하는 것도 아니고, 구원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어서도 안 된다. 칼빈은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살기위해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164)우리가 이 사실을 숙지하고 있으면, 자신에게서, 가정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단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165)기독교는 신과 악마가 대등한 능력을 가진 마니교와 같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원론이 아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존재하므로 성서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166)„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한 영이 하나님께 나왔다고 했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이 영이 꼭 사탄은 아닐지라도 사탄의 영향 아래에 있는 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천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므로 이 영은 천사는 아니다. 사단도 여호와의 어전회의에 출입할 수 있다(욥기) 167)„그의 맹렬한 노여움과 진노와 분노와 고난 곧 재앙의 천사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 „He cast upon them the fierceness of his anger, wrath, and indignation, and trouble, by sending evil angels among them“(KJV) 168)살2:9-12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69)„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170)„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171)„…the promise above quoted commences in this life““…werde erst anfangsweise erfuellt…“ 172)„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73)„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174)„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75)사단과 악령의 실재를 부인하는 학자들이 벌써 칼빈 당시에 나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76)„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177)믿음이 인식의 도구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보고 듣는 체험을 통해서도 인식이 되고, 이성의 추론을 통해서도 인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에 이르는 참 지식,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알 수 있다. 178)본 장에서는 창조 당시의 순결한 인간의 성질만을 다루고, 타락한 상태의 인간에 대해서는 II,1-4에서 다룬다. 179)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본성은 순결하기 때문에, 본성에 탓을 돌릴 수는 없다. 오늘날의 인본주의적 인간관은 신학은 물론 교회까지 지배하여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180)anima, soul, Seele, l,ame. 영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혼동을 피하고자 필자는 끝까지 „혼“으로 번역하였다. 181)spiritus, spirit, Geist, l’esprit 182)mens, mind, Gemuet, l’ame. 183)배가 고프거나 화가 나면 다른 짐승을 공격하는 것. 184)mens, human (mind), (Menschen)geist, l’esprit (humain) 185)인간은 그리스도가 장차 입으실 육신의 모형을 따라서 창조되었다는 오지안더의 이상한 주장. 186)„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원문 직역은: „우리의 형상과 모양(같음)대로“이다. 불가타는“ad imaginem et similitudinem nostram“ 187)„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88)인간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생각은 신비주의적인 생각이다. 189)이것은 인간에게 올바른 이성이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다. 190)플라톤, Theaetetus. 191)Imagination (영어판) 192)오성이라는 말은 라틴어 mens의 번역인데, 원래 일본어이다. 생명의 말씀사판 기독교 강요에 mens를 오성으로 번역하여서 필자가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 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Otto Weber는 Gemuet, Sinne로 번역을 하였지만 이것도 또한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영어는 intellect로 번역됨. mens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생각, 사고력, 이해, 의견, 의식. 오성은 철학 용어로서 „사물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정의된다. 193)appetitus et intellectus 194)Intellectus: 인식, 지각, 정신적 이해. 영어로는 intellect. 독일어는 Verstand(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 말이 오성의 의미로 사용됨). Intellectus를 적당히 번역할 말이 없어서 필자가 오성으로 번역함(생명의 말씀사의 번역을 따름). 칼빈이 앞에서 사용한 라틴어 mens도 한국어로 오성으로 번역함. 영어도 mens와 intellectus를 똑같이 intellect로 번역했다. 독일어는 문맥에 따라 Verstand, Gemuet등으로 번역함. 195)바로 앞에서 칼빈은 혼에 intellect와 voluntas가 있다고 하면서, 지금은 다시 mens와 voluntas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칼빈은 intellect와 mens를 혼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intelligentia, intelligence, Verstand(Otto Weber) 197)organic parts, sinnliche Faehigkeit 198)perseverantiae virtute 199)협력 교리를 부정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찰스 핫지(조직신학 상권)가 협력교리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은 피조물이 행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인간들의 의식과 모순된다. 우리가 자유행위자라는 것은 자유롭게 행할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자유롭게 행한다는 것은 우리자신의 행위를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에 따라 우리를 영으로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행위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협력 교리는 인간의 자유 행위를 하나님이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부당하다. …협력 교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행동을 통치하신다는 성경의 단순하고도 확실한 선포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은 이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상 불가능하다. 우리는 물질적 원인들이 활동하는 것을 보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협력 교리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므로 부당하다. 200)이것은 이신론의 하나님관으로서 이에 따르면 창조만 있고 섭리는 없다. 이러한 생각에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가 나타난다. 여기에는 물론 인간의 자유의지가 극도로 강조된다. 201)물론 물리적 세계에서는 자연법칙이 유효하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을 만드셔서 이것을 통하여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넘어서는 이적(비상 섭리)을 일으키시기도 하신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세계에서는 인간의 신경의 운동(자연법칙)에 맡기지 아니하시고, 인간의 마음을 바꾸시고 충동질도 하신다. 202)독일어로는 Wirken. Unde sequitur, providentiam in actu locari/ Hence it appears that providence consists in action/ Dont il s’ensuit que la providence de Dieu est actuelle, comme l’on dit. 203)따라서 신자는 아무리 가난하고 배가 고파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최고의 배려를 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잃으면 안 된다. 204)„펠라기우스 주의자들의 두 편지에 대항하여“ 어거스틴. 205)Qua ratione et contingentiam quae ab hominum arbitrio pendet excludit/ Par laquelle raison il exclud tout ce qui pourroit estre changé du costé des hommes. contingentia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한 τὰ ἐνδεχόμενα의 라틴어 번역으로서 일차적으로는 가능성이라는 의미이며, 보편적으로는 우연성이라는 의미이다. Otto Weber는 우연성으로 번역했고, 영어본은 우연성을 의미하는 contingency 를 사용했고, 불어본은 말을 풀어서 „가능성“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하였다. 206)16장에서 칼빈은 섭리의 의미와 본질을 밝힌 다음에 17장에서는 섭리의 실천적인 면을 가르친다. 칼빈이 섭리를 가르치는 목적은, 결코 신학적 토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섭리의 가르침을 실 생활에 잘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독교 강요의 저술 의도도 신자들의 참된 경건을 돕기 위한 실천적 용도에 있다. 207)생명의 말씀사 판 주석에 따르면, 이 비난은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와 그의 지지자들이 칼빈을 반대하여 제기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인문주의자로서 칼빈을 비난하는 글을 썼다. 인문주의자들의 특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여 삶의 주권을 인간편에 놓는 것이고, 인간의 노력으로 자신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을 공격하였다 .칼빈의 예정론은 그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계속 보충된 것이다. 208)미케네의 왕. 트로야를 대항해서 싸운 그리스군의 총 대장(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 209)여기에서 볼 수 있드시 칼빈은 철학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정확하게 하나님의 주권의 진리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이미 루터가 해놓았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이 신자의 삶에 필요불가결하고 실제로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가를 밝히는데에 있다. 지금까지 그는 이에 대한 반대자들의 공격을 방어하느라고 애를 쓰고 있다. 210)이러한 칼빈의 관점은 우리가 주의를 해야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선택받은 자의 안녕과 구원을 위하여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이 관점을 상대화시켰다. 우리는 이 구약의 말씀(신28: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구속사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축복과 저주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지도하셨으나, 신약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역사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의 큰 비밀을 계시하셨고, 신자는 믿음으로 이미 영생의 구원을 얻었으므로 어떠한 고난을 받든지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요 축복이며, 불신자는 어떠한 축복을 받든지 결국은 영원히 멸망한다. 즉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현재 삶의 외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보다는, 내적인 문제이며 영생과 관계되는 문제이다(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설교).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칙이 바뀐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지 구약과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교육 방법이 다를 뿐이다. 죄인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다. 211)성구는 칼빈이 의역한 것. 212)pro rerum inferiorum; sublunary affairs; untergeordnete Dinge; choses inferieures. 213)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화를 내신다는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들과 같은 의미 선상에 있다. 214)sed quod ab aeterno providerat, probaverat, decreverat, perpetuo tenore prosequitur; What from eternity he had forseen, approved, decreed, he prosecutes with unvarying uniformity. 215)이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기독교 강요 보조자료“에 있다. 216)필자는 그의 지나친 엄격함을 실수로 본다. 217)Theodizee 문제. 218)„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행4:27-28 219)arcanos(몰래하는, 비밀의, 신비한) motus, secret movements, affections et mouvements, geheime Regungen. 220)겔7:26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서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책략이 없어질 것이며“ 221)지금 칼빈이 두 부류의 적들을 상대하고 있음을 염두에 둘 것. 첫째 그룹은 완악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며, 바로는 사단이 완악한 마음을 불어넣어 준 것을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서 완악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허용한 것이다. 이것을 칼빈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허용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완악하게 하셨다는 구절을 찾아서 간단하게 반박한다. 둘째 그룹은 하나님과 사단의 충동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강퍅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 단락에서 그는 이것을 반박한다. 222)이러한 말투는 인문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점잖은 말투이다. 그들은 대부분 인간적으로는 겸손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하다는 것을 루터도 깨닫고 에라스무스에게 글로써 호통을 친 바있다. 칼빈은 지금 주로 카스텔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도 역시 학식이 뛰어나고 젊잖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루터와 칼빈으로부터 배워야할 점은, 아무리 훌륭하고 성품이 겸손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손을 대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방어하는 태도를 이분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223)지금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의 악행의 시작자이지만, 또한 아니다라는 말을 하려고 한다. 그는 하나님이 악의 근원자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칼빈은 성경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애쓴다. 224)엡3:8-10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225)흑암 가운데서 하나님만 빛이라는 의미.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지 않으면 어떠한 영적 지식도 얻을 수 없다. 226)어거스틴의 라우렌티스에게 보내는 소책자, 101에서 227)„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228)상기의 어거스틴의 소책자 100. 229)„이에 사람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0)이러한 방법의 증명은 기독교 내에서만 가능하다. 당시 인문주의자들도 자신을 전부 기독교(가톨릭, 개신교) 신자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성경을 토대로 논쟁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를 떠나서는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기독교와 타 종교, 그리고 다른 세계관과는 원천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 231)„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 232)„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233)„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 그는 그의 주인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한 자라“ 234)„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 필자가 확인한 모든 번역과 사본은 이 말이 의문문이 아니라 서술문으로 되어있다(„너희는 의롭도다“). 칼빈이 잘못 인용했거나, 아니면 다른 번역을 사용했을 것이다. 10절에서 예후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예후가 그들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너희들이 잘 한 것이다. 너희들도 왕에게 반역하여 나와 한 편이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후가 그들을 꾸짖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칼빈의 주장을 좀 더 매끄럽게 고친다면: „예후가 그들의 행동을 인정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살인을 인정하지 않았다“. 235)„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하여“ 2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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