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2)-자연계시적 지식(2) 지난 1월 특강은 칼빈의 생애와 그의 역작인“기독교강요”의 태동과정, 그리고 자연적 계시의 기초를 설명한 제1장과 2장의 내용을 개관했습니다. 지난 번 강의의 주된 내용은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사실상 불가능 내지는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칼빈의 논거를 통하여 확인하였습니다. 특히 우리 인생은 너무나 무능하고 무기력하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인간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함은 물론 경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지도 않으며 신뢰하지도 않는 마치 자신이“반신적 존재”인양 처신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확인했으며,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새겨 만든 형상과 벌레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번 2월 특강은 1월에 이어“자연계시적 지식”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 그리고“자연계시적 지식”이“자연신학”으로 변질되면서 생기는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확인함은 물론, 자연계시적 지식으로서는 결코 온전히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확인코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칼빈이 기술한 바와 같이 불완전한“자연계시적 지식”을 넘어 특별계시인“성경”을 통하여 확인코자 하는데, 이 부분은 다음 3월 특강에서 검토하기로 하겠습니다. 제3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1. 이 자연적 은사의 특성 (1) 사실상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칼빈은 Cicero의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만적인 종족은 없다.”고 말한다. (2) 세계가 존재하던 날부터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나라, 도시, 간단히 말해서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가족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상숭배도 이 관념에 대한 풍부한 증거이다. 2. 종교는 임의의 발명품이 아니다. (1) 거짓종교를 임의로 만들어 순박한 대중을 속이는 일도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씨앗에서 싹이 움트듯이 인간의 마음에 종교적 성향을 낳게 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아마 그들은 결코 이 일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2) 가장 대담하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일수록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장 심하게 놀라는 것이다(레 26:36 참조). 실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며,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마음으로 지워버리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찾고 있지만, 양심(良心)은 결코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양심의 불안에 잠시 놓였다면 아마 그들은 술에 취하였거나 흥분한 사람의 수면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물론 술에 취하여 잠자더라도 악몽에 시달리겠지만…). 3.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1)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의식’(神意識)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항상 확신하게 될 것이다. (2) 세계는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지식을 몰아내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부패케 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식인 ‘신의식’은 도리어 무성해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싹트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3) 칼빈은 이러한 “신의식은 학교에서 비로소 배워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모태에서부터 터득하며 많은 사람이 전력을 다하여 이것을 잊어버리려고 할지라도 본성(本性) 그 자체가 아무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래서 칼빈은 그릴루스(Gryllus)도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된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4) 결국 칼빈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시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을 동경하게 된다”고 본다. 제4장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 1. 미신(迷信) (1)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지만, 이 씨앗을 마음에 소중히 키우고 있는 사람은 백 사람에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열매 맺게 하는 기대는 더욱 불가능하다. (2)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등 우리 인간 모두는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3) 바울사도는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된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롬 1:21,22).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자신의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판단을 게을리 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2.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53:1)라는 다윗의 말은, 하나님의 인식에 대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과 같은 생래적인 감각은 물론 자연의 빛을 끄며, 고의적으로 자신을 무감각하는 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 인간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 설령 이들이 어떤 하나님(神)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인간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천상에서 파멸시키기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과 섭리를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게으름뱅이로 가두어 버림으로써 사실상 그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하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어 지지는 않는다. 3. 우리는 자신의 망상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1)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자들과 달리 종교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터무니없는 것이라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미신론자들은 자신의 거짓된 의식과 망상으로 예배하며 찬양하는 자들이다. (2) 미신적인 입장에서 유일신을 생각하든, 다신(多神)을 생각하든, 이들 모두는 다 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받을 우상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3) 참된 종교는 마땅히 우주법칙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망령(妄靈) 혹은 환상(幻想)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고 단정해야 한다. 4. 위선(僞善) (1)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는 데서 생기는 자발적인 두려움에 감동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당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자들이 있다. (2) “공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신을 만들어 냈다”는 스타티우스(Statius)의 말처럼, 그들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에 대항하여 무신론자로서 싸우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후퇴하여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3) 이러한 자들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체 위장함으로써,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아니하고 자기로 만족하며, 또한 자신의 육체적 방종을 성령의 고삐로 제재하기보다는 오히려 방종에 빠지기를 더 좋아하는 무리들이다. (4) 이러한 위선자들은 이처럼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 한다. 전 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재물로 하나님을 회유(懷柔)하려 열중한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儀式)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 한다. (5)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있다는 것을 제4장 끝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시키고 있다. 즉 위선자 내지는 유기자(遺棄者) 자신들도 평온할 때는 익살스럽게 하나님을 희롱하며,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일단 절망이 그들에게 몰려오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며, 형식적으로나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된다. 따라서 이들도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무지자(無知者)가 아니라 완고함으로 억제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제5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주 창조와 그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1. 하나님은 창조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5.1-10) (1) 하나님의 자기 현현(顯現)은 명백하기 때문에 어떠한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바울 사도 역시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19-20)라고 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지혜는 온 인류에게 제시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는 하늘과 땅에 있는 자연 속에서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창조주의 지혜가 인간 인체의 구조의 정묘함 속에서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인간은 신적 지혜의 최상의 증거이다. 옛 철학자들이 말한바와 같이 인간을 가리켜서 소우주(小宇宙)라고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인데,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라는 점을 잘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인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가슴에서 젖 먹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다른 웅변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이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4) 그러나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을 대항한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과 동시에 측량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그 반대로 교만에 부풀어 잘난 체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말하기 위하여 인간성 안에 뿌려져 있는 신성의 모든 씨앗을 그릇되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5) 그래서 그들은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동하고 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교설을 이용하여, 영혼은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것을 구실로 삼아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자연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대한 억압하려 든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로 세워진 이 세계가 마치 그 자체의 창조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아니라 육체와는 구별된 영혼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에게 신성(神性)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증거로 삼을 수 있는데, 이러한 신적인 존재인 인간이 창조주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자연은 그 자체 신이 결코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인 것이다. (6) 창조주는 자신의 주(主) 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本性)을 정관(靜觀)할 때마다, 한 분 하나님은 존재하셔서, 바로 이 분이 자연 전체를 다스리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하시며, 우리의 신앙을 자게에게 향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욥기와 이사야서 등 성경의 도처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영원하시며 자존하신 분이시며, 피조물 중에 그의 자비를 넘치도록 받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의 권능에 대한 찬양은 당연한 것이다. (7) 그리고 하나님의 통지자인 동시에 심판자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로서 섭리자일뿐만 아니라, 경건한 자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하고 범죄 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비참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은혜를 나누어 주시는 분이시지만, 행악자의 행악은 산산이 부셔버리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한다.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혹은 높은 자들을 그 위엄 있는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시는, 인간의 생사화복의 주관하시는 섭리자이시다. (9) 우리는 머리로 하나님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하신 일을 보고 숙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주의 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기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상역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라 한다. 특히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10) 그렇다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지식은 마땅히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극할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각성시키며, 용기들 북돋아 주기 때문이라 한다. 나아가 이는 온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誘引)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칼빈은 말한다. 2.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경배 드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침내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5.11-12) (1) 그런데 창조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뚜렷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이는 범인이나 둔한 자 뿐만 아니라, 가장 탁월하고 다른 일에 있어서 예리한 식별력을 가진 자라도 다 같이 순수한 진리를 부패하게 만드는 질병에 걸려 있다. (2) 그러므로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 인간의 미신과 철학은 인간의 경솔함과 천박함이 무지와 흑암으로 더불어 결합되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위해서 우상과 환상을 날조하고 있다. 이성과 교양으로 하늘나라를 통찰하려고 애쓰는 철학자들이 서로 불일치하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예술과 학문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채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칼빈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탐구하는 데 그렇게 많은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한층 어리석고 눈이 멀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바울사도의 말처럼 혼란의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게 된다(행 17:23)는 사실에 이른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특별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자연신학’(自然神學)만으로는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오류로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3. 인간은 오류를 고집하는 한 핑계할 수 없다(5.13-15) (1)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행위를 거절하신다. 칼빈은 순수한 종교를 부패케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견해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런데 빠질 수밖에 없고, 결국 유일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은 그들의 눈먼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마귀를 두는 자들을 모두 다 배교자라고 선언하신다(고전 10:20). 성경은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들어가실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전에 이방인들 사이에 신으로 경배 받던 것을 어떠한 신도 어리석고 거짓된 신으로 정죄하는 한편,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계속 번창하던 시온산 외에는 어떠한 하나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합 2:18, 20). 그러므로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예배형식을 성령이 속된 것으로 거절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한 도시의 관습이나 전통의 여론에 따르는 것은, 경건의 띠로서는 너무도 약하고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자기 자신을 증거하시는 일뿐이다. (2) 그리고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顯現)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칼빈에 의하면 우주의 구조에서 조물주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렇게도 많은 등불이 우리를 비춰주고 있지만, 그것은 헛될 뿐이다. 비록 그 광선이 우리의 온 둘레를 비춰준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분명히 다소의 섬광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충분한 빛을 방사하기도 전에 질식하여 버린다고 한다. 따라서 칼빈에 따르면 바울사도의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보이지 않는 신성(神性)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시적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인간들이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 역시 하나님의 현현을 인간의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롬 1:19). (3) 결론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들은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신지식을 맛보게 되자, 그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상을 치켜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의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일 하시는 역사(役事)를 악하게 판단함으로써 그 역사를 희미하게 하거나 뒤집어엎거나 하여, 그 역사 자체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며, 창조주에게서 그가 받아야 할 찬양을 박탈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이 존재를 ‘금수’(禽獸)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거나 하나님의 자리에 ‘반신적인 인간’이 대신하는 교만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의 영광을 박탈하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곳에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누구도 변명할 수 없는 것이다. [특강 2 정리] 지난번 특강에 이어 이번 강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칼빈의 기독교강요(上) 제1장에서 5장까지는 “자연계시적 지식”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의 강의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독립적인 실재로 우리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허망한 환상을 갖게 되고 만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해야 할 인간들이 그를 창조한 창조주의 자리에 스스로 위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 속에서 인간의 교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를 기초로 하여 이제 3장에서 5장까지는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상에 대하여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칼빈은 로마서 1장 18절에서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 즉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나나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것은 우리 모두 아담 안에서 ‘진리’(眞理)를 ‘막았기’ 때문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는 19절에서부터 먼저 그 진리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롬 1:19-21), 그 다음으로 그 진리를 막는 것이 우리에게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롬 1:21-23)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진리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우리가 이미 제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생각 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해 ‘신의식’(神意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칼빈은 로마시대의 철학자인 Cicero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만적인 종족은 없다.”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굳이 성경에서 찾지 않더라도 보편적이며 본성적인 것임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칼빈에 의하면 바울사도가 지적한 바와 같이(롬 1:21) “하나님께서 그를 알게 하는 모든 수단을 통해, 즉 그가 하신 일들을 통해 자신을 사람들의 생각 속에 계시하셨기 때문에 사람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하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를 진리로 알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장벽이란 무엇일까요? 칼빈의 제4장의 논거에 따르면 이는 부패로 인한 ‘불의’(不義) 또는 아래서 말하는 ‘왜곡’(歪曲)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불의가 드러난 것은 “하나님을 아는 바를 지식의 씨가 익기 전에 그것을 사람들이 자신의 부패함을 인하여 곧바로 질식시켰기 때문이다.”고 칼빈은 논증합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인간의 ‘본성의 빛’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본성의 빛을 소멸시킴으로써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보들이란 미신(迷信),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 자신의 망상에 의하여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일 및 위선(僞善)에 빠진 자들이라고 칼빈은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면 칼빈은 제3장에서 신의식 또는 종교의 씨가 사실인 것을 입증한 다음, 제4장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 가운데 그 신지식을 붙잡고 있을 때 생기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왜곡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은 우리의 ‘반역적 본성’(反逆的本性)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형상의 신을 우리 죄 가운데 만들어 내었으며, 이렇게 만들어 낸 거짓 신을 중심으로 종교를 고안해 내고 고약하게도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막는 것입니다. 칼빈은 제5장에서 이러한 진리를 막는 일이 있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자연계시적 지식”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온 인류에게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는 하늘과 땅에 있는 자연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특히 창조주의 지혜가 인간 인체의 구조의 정묘함 속에서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 모두는 하나님의 존재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며 또한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에 따르면 자연계시를 통하여 추론과정을 거쳐 참된 하나님을 아는 데 이를 수 결코 없다고 봅니다. 이는 죄로 인한 본성의 오염에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인간이 ‘자연계시’를 통하여 ‘자연신학’(自然神學)을 만들어 내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롬 1:23). 이상에서 논의한 칼빈의 제1장 내지 제5장의 “자연계시적 지식”은 결국 다음과 같은 구조로 종결됩니다. 즉 칼빈이 말하고 있는 모든 것과 창조에 대한 불신자들의 평가에 관한 그의 모든 논증의 배후에 있는 전제는 (1)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2) 그가 참되게 알려져 있다는 것과, (3) 그에 대한 참된 지식이 죄 때문에 불가피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리고 이 참된 지식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그릇된 반응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핑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와 경배를 주장하기 위하여 참된 지식을 또한 언급하는데, 이러한 참된 지식은 “자연계시적 지식”이 아니라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聖經)을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칼빈의 논의순서를 따라 “자연계시적 지식”을 넘어 특별계시인 ‘성경’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고자 합니다(2011년 2월 27일 주일 오후예배 특강자료, 구모영장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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