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3)-칼빈의 성경관 지난 1월과 2월 두 차례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1장부터 5장까지의 내용에 대한 특강은 하나님에 대한 ‘자연계시적 지식’에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그의 모든 논증의 배후에 (1)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2) 그가 참되게 알려져 있다는 것, (3) 그러나 그에 대한 참된 지식이 죄 때문에 불가피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그릇된 반응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이 참된 지식을 인간은 영원히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자연계시적 지식’만으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향한 참된 예배와 경배자가 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락된 인간의 본성은 그 반대로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은‘자연계시적 지식’을 넘어 하나님 당신이 존재하심은 물론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특별계시, 즉‘성경’(聖經)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칼빈의 논의순서를 따라“자연계시적 지식”을 넘어 특별계시인 제6장부터 10장까지에 언급하고 있는 그의‘성경관’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제6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 뿐이다. (1)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사람에 눈에 명백하게 비치는 광채는, 인간들로 하여금 배은망덕에 대한 일체의 변명을 못하게 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에 불구하고 마치 노인이나 눈이 어두운 사람에게는 안경을 쓰게 하면 더욱 똑똑히 책을 읽을 수 있듯이, 우리들을 창조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훌륭한 조력자로 성경을 주신 것이다. (2)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시기 위하여 무언의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입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다. (3) 성경은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주요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구속주임을 밝히 말씀하신다. 즉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요, 지음 받은 만물의 유일한 원작자(原作者),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중보자의 위격(位格)으로 나타나신 구속주라는 점을 알아 마땅히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1)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나 환상으로나 혹은 사람들의 사역이나 일을 통하여 자신을 족장들에게 계시하셨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자손들에게 전승하여야 할 것을 그들의 마음에 알리셨고, 그들이 배운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확신하고 이해하였던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흑암에 태어난 자가 점점 둔감해지는 것처럼 둔감해 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들 기울여야 한다. 참된 종교의 빛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하늘의 교리에서 그 시초를 찾아야 하며, 그리고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는 아무도 참되고 건전한 교리를 극히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에 걸쳐서 자신의 탁월한 섭리에 의해 인간을 특별히 고려하신 은사이다. 3. 성경을 떠나면 오류에 빠진다. (1)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얼마나 심하게 각종 오류에 기울어지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맹렬하게 계속 신기하고 인위적인 종교를 날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하나님이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기록된 증거들을 통하여 유익한 교훈을 주시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2) 그런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의 거하시는”(딤전 6:16) 그 하나님의 광채는, 말씀의 실(絲)로 인도받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迷宮)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말씀의 실로 인도받는 길 이외에는 우리가 아무리 전속력으로 달려간다고 하더라도 목적지에 당도할 수 없다. (3) 말씀이라는 실의 인도를 받는 이 방법 이외에는 우리 마음의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우리 마음에 심겨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길 밖에서 전속력을 다해서 달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절며 이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할 수 있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1,2)…“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19:7,8). (2) 칼빈은 다윗의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일을 통하여 모든 백성을 자기에게 초청하신 일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공허와 오류에서 방황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제7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확립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악랄한 거짓이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1) 현재 우리는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자기의 진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신성(神聖)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요 5:39 참조). (2) 성경이 얼마나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책이 정경(正經)에 편입되어야 하는가는 교회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승인이 있을 때만 그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는 유해한 오류가 현재 널리 로마 가톨릭에서 유행하고 있다고 칼빈은 지적하였다. (3) 우리의 신앙이 인간의 만족에만 의존하는 그런 불안정한 권위를 가진 것이라면, 불경자(不敬者)들은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조롱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의심할 것인가? 2.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다. (1)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고 바울 사도가 증거 한 것처럼(엡 2:20), 만일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벌써 그 권위를 갖고 있었음이 들림 없다. (2) 그러므로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 속하며 성경의 확실성이 교회의 찬동에 좌우된다는 것은 참으로 거짓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反證)으로 내세울 수 있다. (1) 어거스틴이 “나로서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감동됨이 없이는 복음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2) 이 말의 의미는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에 의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아직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어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고 칼빈은 말한다. 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 강하다. (1) 하나님이 교리의 저자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 (2) 칼빈은 논쟁을 통하여 성경에 대한 견고한 신앙을 세워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면서, 성령의 증거는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고 답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만이 자기 말씀의 합당한 증인이 되시는 것처럼, 그 말씀도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 의하여 확증되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 본다. (3)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선지자들이 충성스럽게 선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사 59:21 참조). 5. 성경은 자증(自證)한다. (1)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자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이성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2)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 때문에 존경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확증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은 아니다. 제8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1. 성경의 독특한 권위와 감동성, 그리고 고전성(8․1-4)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 진리는 외부적인 것에 의하여 유지되지 아니하고 진리 그 자체가 자증하게 될 때에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경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며 우리 마음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골수에까지 새겨짐으로써, 그 깊은 인상과 비교할 때에 수사학자(修辭學者)나 철학자들의 힘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다. (2) 성경에 관한 한, 완고한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을 헐뜯고자 해도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 가득 차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결정적인 것은 문체가 아니라 내용인 것이다. (3) 성경의 고전성(古典性), 그 자체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모세 그는 다른 모든 저자들보다 시간적으로 이렇게 훨씬 앞서고 있는데, 자기 교리의 전승을 그렇게 먼 근원에 까지 더듬어 올라갔다고 하면 성경이 고전성에 있어서 다른 모든 책보다 얼마나 우수한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4) 모세는 자신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그 사악한 불의를 기록할 때에(민 12:1), 육신의 생각을 말하였다고 볼 것인가, 아니면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말했다고 볼 것인가? 더욱이,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자기의 아들들을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위치에 떨어뜨렸던가? 이처럼 율법서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모세가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임이 분명하다는 충분한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세의 예증(例證)을 통해서도 성경의 진실성을 확신할 수 있다. 2. 이적과 예언에 대한 반대설을 논박함(8․5-10) (1) 이적은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모세에 의한 출애굽시의 수많은 주목할 만한 이적들은 온 회중 앞에서 드러난 것으로, 이 사건을 목격한 자들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2) 모세의 이적에서 논란의 여지가 없다. (3) 예언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취된다. 족장 야곱을 통하여 유다 지파에 최고 우위를 돌리게 한 것이 예언의 영(靈)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또한 모세는 희미하기는 하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한 바 있는데(창 49:10), 이 예언은 그 후 2,000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이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들을 확증하셨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왕국은 평화로웠고 심지어는 그들이 갈대아 사람의 동맹국(同盟國)이라 하여 스스로 안정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사야는 그 도시가 파괴되며 그 백성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예언하였다(사 39:6-7). 특히 그는 고레스라는 이름을 들면서(사 45:1), 갈대아 사람들이 이 고레스에게 항복하며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자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예언하였으며, 그 예언은 사실과 같이 성취되었다. (5) 율법의 전승, 심지어 모세가 실재의 인물이었던가를 감히 문제 삼는 자들까지 있었지만,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적적으로 보존되었다. 한 때 이 율법은 제사장들의 게으름으로 잠시 파묻혀 있기도 하였으나, 경건한 왕 요시야가 이를 발견한 후부터는(왕하 22:8) 대대로 계속하여 계승되어 왔다. (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를 이적적(異蹟的)으로 보존하셨다. 안티오쿠스가 모든 책들을 불태우라고 명령하였지만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포고령 속에서 언약의 서판들을 건져내신 것이 이적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거듭되는 재난으로 짓밟힘을 받고 황폐해지며 마침내는 거의 멸절상태에 이르는 그 속에서도 이 기록들이 본래대로 안전하게 보존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적이다. 3. 신양성경의 단순성과 천적(天的) 특성 및 그 권위(8․11) (1) 구약에 이어 신약성경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진리는 얼마나 튼튼한 지주(支柱)로 유지되어 있는가를 알게 된다. 세 사람의 복음서 저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평범한 문체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많은 거만한 사람들은 그 문체의 단순함을 몹시 경멸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교리의 중심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2) 그렇지만 조금만 주의를 한다면, 복음서 저자들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논하고 있음을 쉽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하는 천적인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다. (3) 마태는 이전에 책상 앞에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배에서 일하던 사람이다.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가 등등한 원수였다. 이처럼 이전에는 일반 대중에게 비천한 자로 멸시를 받던 그들이 갑자기 하늘나라의 신비를 장엄하게 강론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사실 그 자체는 소리 높여 부르짖을 것이다. 4.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8․12-13) (1)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성경이 공포된 이후 장구한 시대를 거쳐 사람들은 확고하게 또한 한결같이 성경에 순종하였다. 성경은 종려나무와 같아서 점점 더 높이 자라며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존속하여 온 것이다. 사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궤변가나 웅변가 치고 성경에 반대하는 데 자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성경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데 일치하였던 것은 한 국가나 한 국민만이 아니었으며, 전혀 공통점이 없던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이 거룩한 일치에 의해서 성경은 그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2)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성경이 많은 증인들의 피로 인쳐졌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증명으로서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은 죽기까지 그들의 신앙을 증거 하되 잘못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를 광신(狂信)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확고하고 견고하며 건전한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더욱 명백해진다. 제9장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재세례파, 합리주의자 및 직통계시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관심 (1)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도(誤導)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들은 아주 거만하게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은 문자를 아직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다. (2)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것”(딤후 3:16-17)이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 읽는 것에 착념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것이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악마적인 광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容認)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인쳐 주는 데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성경에 의해 인정된다. (1)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유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여기서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의 빛이 나타난 후에는 물러갔다고 생각되었던 예언자의 교훈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을 베드로가 칭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벧후 1:19). (2)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시다. 그 변하실 수도, 자신과 다를 수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1)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말씀이 당연히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2)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으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에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식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이 사실이다. 제10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있다.(창조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 지식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이 일치) 1.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 (1)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우주의 구조와 모든 피조물에게서 아주 명백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에서 더욱 생생하고 더욱 상세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을 앞에서 배웠다. (2) 그런데 칼빈은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을 인용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최초의 창조물을 보존하시는 그 섭리를 입증함은 물론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에까지 이르러야 하겠지만 이것은 다음 논의로 미룬다. 그 대신에 지금은 천지의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우주를 어떻게 통치하시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즉 하나님은 부성적(父性的)인 선하심과 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그의 의지를 성경 어디를 보아도 반복하고 있지만,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관용을 베푸시는 하나님도 사악한 자들에게는 공의로 징벌하시는 심판자이심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2.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들에게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1)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라고 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2) 칼빈은 위의 모세의 글을 통하여, 두 번 반복된 그의 장엄한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自存性)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완전성을 나타내신 분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러한 완전성은 그가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와 같은 것들에서 드러난다. 또한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Elohim)이라는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칼빈에 의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들). (3) 또한 칼빈은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4)는 예레미야의 말 속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는 꼭 알아야 한다고 본다. 즉 첫째는 인애(仁愛)로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여기에만 달려 있다. 둘째는 공평(公平) 혹은 심판(審判, Judgment)으로, 이것은 날마다 행악자들에게 시행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다 가혹하게 저들을 영원히 멸망에 이르기까지 기다린다. 셋째는 정직 혹은 의(義, Justice)로,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또한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게 된다. (4)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새겨져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무결한 생활과 거짓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를 배우게 된다. 3.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으므로 우상숭배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 (1) 칼빈은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우리를 참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경은 이교도의 모든 신들을 명백히 배척하며 거절하고 있음을 독자들이 우선적으로 주의하기 바란다”는 표현으로 가장 일반적인 교리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2) 칼빈은 져스틴 마티(Justin Martyr)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God's Monarchy)라는 책을 통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인용하였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도피로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부패케 한 그 변절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는 하바국이 일체의 우상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를 찾으라”(합 2:20)라고 한 것은 신자로 하여금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신도 용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특강 3 정리] 칼빈의 [기독교강요] 중 제1권 6장에서 10장까지는 그의 성경에 관한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7장부터 9장까지는 성경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 앞의 6장은 도입부로서, 그리고 10장은 결론부에 해당합니다. 제6장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자연계시적 지식으로는 타락한 피조물을 살아계시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 나아가기 위하여 성경이라는 안내자요 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눈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착용해야 그 사물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미궁 속을 헤쳐 나올 수 있는 실(絲)이 필요한 것처럼, 바른 가르침을 위한 교사가 필요한 것처럼 성경이라는 안경 또는 실, 그리고 교사의 도움을 받아서 창조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 안에 있는 자연의 빛을 적절히 보고 해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7장에서 9장까지는 가장 핵심이 되는 영역으로, 로마 가톨릭과 같이 성경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권위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 저자이시며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성경의 권위는 교회가 아닌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통하여 조명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의 저자는 성령이다.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이 신자의 신앙과 삶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권위이신데, 이러한 성령께서 말씀에 의해 그리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가운데 신자의 마음속에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속에서 말씀하신다는 사실로부터 이끌어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칼빈은 성경의 권위와 관련하여 성경의 자증성(自證性)을 7장에서(7․5), 그리고 성경의 신임성(信任性)을 8장에서 지적하고 있으며, 성경과 성령의 통일성을 9장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자증성과 신임성은 성령의 증거로 드러난다고 보는데, 이러한 점에서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도 칼빈의 논의를 따라 ‘성령의 증거’에 관하여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첫째는 성령의 증거로 인해 새로운 계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둘째는 성령의 증거는 믿음의 작용인(作用因)으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를 신자의 믿음 체험 그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칼빈은 9장에서 광신주의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데, 광신주의자로서의 그의 비판대상은 주로 재세례파와 합리주의자 및 직통계시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말씀 없는 성령은 망상이요, 성령 없는 말씀은 죽어있다며, 말씀과 성령은 항상 함께 가며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칼빈은 10장의 결론 부분에서 창조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 지식과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이 일치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그는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새겨져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 즉 특히 하나님의 속성(영원성, 자존성, 완전성 등)은 먼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며, 나아가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무결한 생활과 거짓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를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성경관을 살펴보면서 이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칼빈이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주장하였는가의 문제입니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하여 벤쟈민 위필드(Benjamin Warfield)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물론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래서 그 위에는 지울 수 없이 인간 저작의 흔적이 새겨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성령의 강력한 영향 하에 쓰여져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성령께서는 인간 저자의 단어 선택에 있어서까지 간섭하셨으며(축자 영감), 성경이 기록될 때 신적 저작과 불일치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로부터 지켜지도록 감독하셨다. 이로써 성령께서는 성경 기자(記者)들이 항상 전제로 내걸고 또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성경이 전적으로 신뢰할만한 책이 되게끔 하신 것이다”(무오성)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칼빈의 신학사상, 좁게는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위의 워필드와 같은 주장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칼빈의 성경의 무오성 주장과 가장 관련이 있는 기록을 찾는다면 아마 이미 살펴본 7장(7․3,4)과 8장(8․3)에서일 것 같습니다. 칼빈은 성경의 유일한 책임 있는 저자로 성령을 들고 있으며, 이 성령이라는 단일성 앞에서 인가 저자들의 다양성은 사라져 없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 자신만이 자기 말씀의 합당한 증인이 되시는 것처럼, 그 말씀도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 의하여 확증되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선지자들이 충성스럽게 선포하였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성령을 통하여 자증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베드로와 마태 등 성경저자의 면면을 보면 “이전에는 일반 대중에게 비천한 자로 멸시를 받던 그들이 갑자기 하늘나라의 신비를 장엄하게 강론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사실 그 자체는 소리 높여 부르짖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점 들을 종합해 보면, 칼빈 역시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칼빈이 축자영감설을 인정하였는가의 문제인데,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칼빈이 이를 인정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지배적인 견해입니다. 다음은 성경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 칼빈의 삼위일체론에 대하여 특강을 하겠습니다(2011년 3월 27일 주일 오후 예배 특강자료, 구모영장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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