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5)-참되시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2) /구모영장로

에반젤(복음) 2021. 8. 30. 07:25
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5)-참되시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2)
부산한우리교회 구모영장로

지난번까지의 강의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11장부터 제13장 6항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강의에서 칼빈은 교황주의자들의 교회 내에서의 형상물의 설치 및 성화를 그리는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특히 교황주의자들은 봉사(dulia)와 예배(latria)를 의도적으로 구별하여 죽은 성인에 대한 형상화 내지는 성화를 그리는 것, 그리고 그 앞에서 존경을 표하는 것과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다르다고 보았으나, 이는 결국 제2계명을 범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는 비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의 후에 진정으로 예배를 받아야 할 분은 유일하신 성삼위 일체되신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삼위일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에 대하여 아리우스파와 사벨리우스파의 논거를 비판하면서 하나님은 본질(ousia, essence)상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지만, 위격(hypostasis, subsistence)상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칼빈의 논의에 따라 설명하였습니다. 특히 앞으로 더욱 분명히 밝혀지겠지만, 칼빈에 의하면 삼위의 하나님은 본질과 달리 각각 그 위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또한 이들 삼위 간에는 위상(位相)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하여 순서를 말할 때는 위격의 경륜에 따른 질서를 위한 것임을, 나아가 삼위 하나님 간에는 종속이 아닌 완전동등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확인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13장 7항부터 마지막 29항에 걸쳐 언급되고 있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보혜사 성령의 신성 등을 확인한 후 칼빈이 취한 방법과 같은 귀납법(歸納法)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확인케 될 것입니다. 다만 향후 강의는 문서강의로 대체하겠습니다. 의문이 있거나 토론이 필요하신 분은 리플로 참여해 주십시오.

제13장 성경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질이시며 이 본질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1. 성자의 영원한 신격(神格)(13.7-13)
(1) 말씀의 신격(13.7) 칼빈은 이하에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하고 그런 후에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살피고 있다. 먼저 성자의 신성과 관련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자 그리스도는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이 성자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했다(히 1:2-3 참조). 그리고 또한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셨고, 태초부터 계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요 1:1-3).
(2) 말씀의 영원성(13.8) 몇몇 이단들, 특히 아리우스(Arius)파는 말씀이 태초부터 계신 것이 아니라 시초를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본체 안에서 새로운 무엇이 생긴 것으로 봄으로써 성자의 신성을 사실상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이 있어라”(창 1:3)고 말씀하신 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그러나 말씀은 오래 전에 존재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칼빈은 지적한다. 즉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말씀이신 성자 그리스도는 분명 태초부터 계셨기 때문에 “시작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3)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13.9) 칼빈은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으신 자로 그 말씀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구약성경의 여호와(야웨)라는 표현은 바로 성자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라 본다. 즉,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시 45:6), “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 9:6)라고 함으로써, 이사야는 특히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의 특징적인 표지인 지상대권을 가진 분으로 아주 분명하게 공표하였다. 특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렘23:5-6),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주지 아니하리라”(사 42:8)라고 선언함으로써, 유일하신 성자만이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겔 48:3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출 17:15),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16)라는 데서 보는 바와 같이 앞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여호와시요 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면, 이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의 결과를 설명한 것이라 본다.
(4) 영원하신 하나님의 천사(13.10) 칼빈은 구약성경에 천사가 자주 나타나는데(삿 6:11, 12, 20, 21, 22, 7:5, 9), 이 (최고의)천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여호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마노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라고 외쳤을 때 그의 아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 13:18)라는 답변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본다. 특히 천사, 그의 이름은 기묘자(삿 13:18)라고 하는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래서 칼빈은 정통적인 학자에 따르면 최고의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이 그때 벌써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는 져스틴(Jusin)이나 터툴리안(Tertullian)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호세아 선지자도 야곱과 천사의 씨름에 대하여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5)라고 했던 것이다. 다만 모든 천사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은 아니다. 스가랴 2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천사들을 파송한 ‘그’ 천사가 바로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 천사에게 지상 권능이 부여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히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유대인들이 항상 경배하였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5)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13.11) 칼빈은 사도들은 육신을 입으시고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에 대한 증거들이 될 것이라 한다. 바울사도는 만군의 주께서 “이스라엘의 두 집에서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요”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롬 9:32-33). 즉 그리스도가 만군의 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롬 14:10; 사 45:23)라고 하였다. 요한사도 역시 이사야의 환상을 통하여 계시된 것을 성자의 영광이라고 증거하고 있다(요 12:41; 사 6:1). 특히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빌 2:6-7) 종의 형상으로 오셨다고 했으며, 요한 역시 그리스도를 마치 이방신처럼 트집을 잡을 수 있다고 보아 바울보다 더 진보한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 5:20)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마의 신앙고백을 빌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라”(요 20:28)라고 했던 것이다.
(6)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13.12) 주님께서는 태초로부터 성부와 함께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시자(요 5:17),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권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에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온 우주를 섭리하시고 다스리는 권능을 하나님만 가지고 있으며, 죄 사함의 권능 역시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사죄하는 일을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사죄권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모독으로 죽이려 하였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그가 하나님이심을 반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7)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으로 통하여 입증된다(13.13) 칼빈에 따르면 예언자나 사도들은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나누어 준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이적은 자신의 권능으로 행사하였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적과 그리스도의 이적 사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들을 고치며 악한 마귀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마 10:8; 막 3:15; 6:7).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어라”(행 3:6)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은 그리스도 그 자신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신성을 완전하게 증명 해 주는 것이다(요 5:36, 10:37, 14:11). 더욱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의도 없고 생명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것을 자신 안에서 소유하고 계시다는 점에서 역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어라”(요 14:1), “나를 믿은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라는 말씀 속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앙에서 나오는 기도 역시 그리스도에게 드리는 기도이다. 즉,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 2:32),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고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라는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이 그리스도가 바로 여호와인 것이다. 따라서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육신으로 거하셨던 것이다(골 2:9). 그래서 칼빈은 천부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가 성자의 중재로 온다는 것뿐만 아니라,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성자 자신이 바로 그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성자의 신성을 분명히 하였다.

2. 성령의 영원한 신격(神格)(13.14-15)
(1) 성령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13.14) 칼빈은 성령의 신격에 관한 증거를 창조기사에서부터 먼저 찾고 있다. 즉,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는 모세의 증거에서, 그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보존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장식되기 전에 벌써 성령께서 저 혼돈된 덩어리를 돌보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지자를 파송할 때에 그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심을,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그의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에서 구절에서도 또한 성령의 신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온 우주에 편재하시어,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성장케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킨다. 또한 그분께서는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기 때문에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있어서, 확실히 그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 칼빈은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을 빌려온 능력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나게 하시는 창시자이시며, 중생뿐만 아니라 영생의 창시자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 요컨대 성령에게도 성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신성에 속하는 기능들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즉,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롬 11:34), 성령께서는 지혜와 말의 재능을 주신다(고전 12:10). 그러므로 성령이 신성이 없고는 이러한 일은 결코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당연히 신성이 증명된 것이다. 특히 칼빈은 우리의 칭의(Justification 稱義)는 성령의 사역이라 본다. 능력, 성화(고전 6:11 참조), 진리, 은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체의 선이 다 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은사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2:11). 바울사도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성령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 창시자임을 잘 표현한 구절일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안에 실재적(實在的)으로 머무신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고 말한다.
(2) 성령의 신격에 대한 명백한 증거(13.15) 바울사도의 말처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전(殿)이라고 할 때(고전 3:16-17, 6:19; 고후 6:16) 성령의 신성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탁월한 의미에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이야 말로 참되신 여호와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완고함을 인하여 노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사야는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사 63:10)라는 기록에서도 성령의 신성을 잘 볼 수 있다. 특히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 한다”(마 12:32; 막 3:29; 눅 12:10)고 공관복음에 기록된 것과 같이 이는 성령의 신적 권위를 공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3.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13.16-20)
(1) 하나님의 하나 되심(13.16) 칼빈은 하나님의 하나 되심에 대하여, 바울이 하나님(주),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다른 증거 없이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즉,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에 주도 하나이며, 또한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이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서 잘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하셨는데,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하는 말씀이며,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고하게 드러내는 증거이다. 특히 신앙은 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세례는 신앙의 성례이기 때문에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라면 신 또한 여럿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하나 되심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은사는 여러 가지라도 성령은 같은 한 성령이다(고전 12:11).
(2) 삼위(三位)(13.17)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하고 있다. 따라서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확인했는데,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 및 성령 간에는 어떠한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칼빈은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of Nazianzus)가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단일성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단일성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 없다”("Ou ftano to ei noesai, kai tois trisi perilampomai; ou ftavo ta tria dielein kai eis to hen anaferomai" : "I cannot think of the unity without being irradiated by the Trinity: I cannot distinguish between the Trinity without being carried up to the unity." 는 말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삼위(三位)가 곧 삼일성(三一性)으로 상상해서는 안 되지만 성부와 성자 및 성령이라는 말은 분리(division 分離 혹은 分割)는 아닐지라도 분명 위격(位格) 상에서는 실제적인 구별(distinction 區別)은 의미한다고 본다. 즉,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을 것이며(슥 13:7),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데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고는 성부는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요 1:3; 히 11:3),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나(요 15:26)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 하시는 데서(요 14:16) 성령은 또한 성부와 구별된다.
(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이점(13.18) 삼위는 분리는 아니지만 분명 구별은 된다고 하였는데, 이 경우 자칫하면 삼신론(三神論)이 될 수 있는데 칼빈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칼빈은 성경에 따를 때 “성부는 일의 시초(始初)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counsel)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성령님께서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This distinction is, that to the Father is attributed the beginning of action, the fountain and source of all things; to the Son, wisdom, counsel, and arrangement in action, while the energy and efficacy of action is assigned to the Spirit). 그러나 이들 간에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으로 찾아서는 안 되며, 성부의 영원성은 또한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13.19) 칼빈의 삼위에 대한 위와 같은 분리가 아닌 구별은, 그에 따르는 경우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본다. 아니 이러한 구별은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더불어 똑같은 영(靈)을 소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 준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한 말씀(요 14:10)과 잘 통하게 된다. 특히 어거스틴은 성부와 성자를 관계적인 관점에서 구별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와 아무런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의 관점에서 말할 때에는 ‘자존하시는 하나님’(Autotheos)이 되는 것이다.
(5) 삼위일체 하나님(13.20) 칼빈은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가장 진심으로 절제된 표현방식을 택한다면,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특수화함이 없이 언급할 때, 이 명칭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도 지칭한다”고 말한다(When we profess to believe in one God, by the name God is understood the one simple essence, comprehending three persons or hypostases; and, accordingly, whenever the name of God is used indefinitely, the Son and Spirit, not less than the Father, is meant.) 그러나 성자와 성부가 연합될 때 어거스틴과 같이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위격(Persons 位格)들의 사이를 순서(order 혹은 질서)라는 관점에서 구별하게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 또는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언급될 때에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삼위의 위격에 따른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점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보는데, 그렇다고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모독죄가 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말할 때 칼빈은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4. 반(反)삼위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13.21-29)
(1) 모든 이단의 근거: 모두에 대한 경고(13.21) 칼빈은 사탄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으로부터 뒤집어 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부분적으로는 위(位)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하여 왔다고 전제한 뒤,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인간의 적은 재능으로 다 규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런 점에서 기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자고 말하면서, 힐라리(Hilary)가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한 충분한 증거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한다”고 말한다.
(2) 세르베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13.22) 칼빈은 성경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된 대로, “한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 이 본질은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 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해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자도 성령과 구별되신다는 점” 등을 확고히 견지한다면, Arius나 사벨리우스(Sabellius)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를 주장한 자들에 대하여 문을 굳게 닫혀 질 것이라 본다(But if we hold, what has already been demonstrated from Scripture, that the essence of the one God, pertaining to the Father, Son, and Spirit, is simple and indivisible, and again, that the Father differs in some special property from the Son, and the Son from the Spirit, the door will be shut against Arius and Sabellius, as well as the other ancient authors of error).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세르베투스(Serbetus)와 그의 동류들과 같은 광신자들은 관념(觀念) 내지 사변(思辨)에 기초한 새로운 속임수로 사실상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함으로 인하여 만사를 혼란케 하였다고 비판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상치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組)가 될 뿐이라는 것, 그리고 위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이라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분분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으며, 때로는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보통의 피조물과 무분별하게 혼합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3)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다(13.23) 한편 또 다른 자(Valentine Gentile)는 세르베투스와 같은 불경건을 피하기 위하여 삼위가 있다는 고백은 하지만, 이들은 성부만이 진실로 또한 당연히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지으시고 이들에게 자신의 신격을 주입하셨다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 그리스도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성부만이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으며(사 6:1), 이 하나님을 가리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라 단정하였다(요 12:41).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성령을 성부의 영이라고 말하지만 바울사도는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고 증거하고 있다(롬 8:9). 이처럼 이들이 주장하는 경우 결국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성부만이 본질이며 성자와 성령은 부분적인 본질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칼빈에 따르면 본질은 성부와 성자에게 다 같이 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공통적인 것이며, 본질에 관한 한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외형적인 명목상의 하나님에 불과할 것이다.
(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성부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13.24) 칼빈은 성경에서 어떤 조건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언제나 그것은 성부에게만 적용된다고 저들은 주장하지만, 그와 같은 주장은 허위라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었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중보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 말씀에서 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사도는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가르쳤으며(빌 2:6-7), 이사야선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사 25:9)라고 함으로써 성부만이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 역시 구속주이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있는 하나님이었다면서, 그의 신성을 훼손시키려 하지만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원작자이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이다”고 단정한다. 특히 모세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할 때, 성부가 말씀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가 그 말씀과 함께 계셨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5) 삼위는 공통적으로 신성을 소유한다(13.25) 칼빈은 거듭해서 삼위일체를 사실상 부정하고 성자와 성령을 부분적인 본질로 보려는 무리들에 대하여,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보면,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도 비발생적이다. 다만,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자신으로부터 모든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저들(삼위일체에 대한 비판자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견해가 사위일체(四位一體)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한다는 사실이다.…(그들은) 우리가 세 하나님이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하듯이…그 무익한 질문에…본질이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成員)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위들은 본질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우리는 그가 성자인 이상 그가 성부로부터 오셨다는 점에서 그의 위에 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고 말하면서, 옛날의 정통적인 저술가들의 논의를 따라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은 (본질상의 나눔이 아니라) 오직 ‘위’에만 적용시켰다고 말한다.
(6) 성육신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예속된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13.26)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이라고 하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는 성경귀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라는 비판에 대하여, 칼빈은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신격의 근원이신 성부에게 한정된다”면서(13.20, 23), 위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의 위격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그의 위엄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라 말한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 아래 두셨다고 칼빈은 지적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라고 말할 때, 칼빈은 이는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격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 이를 배제하는 것 역시 부당하다. 특히,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시며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였다(요 1:1; 요일 5:20)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13.27) 그리스도의 신격에 훼손을 가하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이레니우스(Irenaeus)의 말을 자주 그 근거로 든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의 이 말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과 다른 신을 상상하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 없이 하나님이라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 불리셨다”(제6장).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제12장)라고 그의 저서(Against Heresies Ⅲ)에서 설명하고 있다.
(8) 터툴리안을 인용한 것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13.28)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말을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논거로 비판자들이 삼고 있지만, 이 말은 하나님은 본체(substance)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삼위로 배열된다는 의미라고 본다. 따라서 칼빈은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state)에 있어서가 아니라 품위(degree)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substance)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form)에 있어서 그러하고, 권능(power)에 있어서가 아니라 질서(order)에 있어서 그러하다면서, 터툴리안 역시 성자를 성부 다음 가는 분으로 지적하지만 이는 위를 구별할 때에만 차이가 있는 것이라 보고 있다는 지적을 한다.
(9) 교회의 인정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증하였다(13.29) 교대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삼위일체의 교리가 정당함으로 확인할 수 있다면서, 그동안 그가 논의 중 언급하였던 이레니우스(Irenaeus)나 져스틴(Justin), 힐라리(Hilary) 그리고 어거스틴(Augustine)의 견해를 들어 간단히 살펴 본 후에, 최종적으로 “하나님께는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특강 5 정리]
칼빈은 하나님은 본질상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한 분 이외에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칼빈에 따르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파와 같은 부류들에 의하여 삼위일체라는 말은 사용하더라도 사실상 성자의 신성을 부정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기독교강요 제1권 13.7-15에서 확인을 하였습니다. 특히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여호와(야웨 YHWH, Yahweh)로 그리고 신약에서는 말씀(logos)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이시며, 성령 역시 하나님의 영으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에 따르면 통상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성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자 및 성령이라는 삼위로 구별할 때는 반드시 위격을 전제로 한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 삼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이들 간의 구별이 아닌 분리는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하여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1권 13.16 이하에서 언급하였는데,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하여 구별은 가능하지만, 분리는 할 수 없다고 보면서, 위격상의 구별은 질서와 경륜에 기초한 것이라 봅니다. 즉, 칼빈은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을 것이며(슥 13:7),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데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고는 성부는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요 1:3; 히 11:3),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나(요 15:26)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 하시는 데서(요 14:16) 성령은 또한 성부와 당연히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는 일의 시초(始初)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counsel)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시라면, 성령님께서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함으로써 경륜(economic)에 따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간의 위상에 차이는 있는 것일까요? 칼빈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관계 개념 속에서 볼 때는 아버지로부터 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이라는 순서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서는 질서의 문제일 뿐이며 성자와 성령도 성부와 같이 비발생적일 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예속된다는 것도 옳지 않다고 봄으로써 삼위 간에는 완전동등설을 주장하였습니다. 특히 칼빈이 종속설을 비판한 것은, 이 종속설에 따를 경우 무엇보다 기독교강요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처럼 성자의 신성이 훼손될 경우 성경상의 중대한 오류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곳곳에서 성자와 성령 역시 자존하시는 하나님(autotheos)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이 말로 삼위일체론의 강의를 끝내고자 합니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특수화함이 없이 언급할 때, 이 명칭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도 지칭한다.” “삼위는 모두 하나님의 한 본질로 영원히 존재한다.”(all three divine persons eternally subsist in the one being(or essence) of God)(2011년 6월 16일 부산한우리교회 구모영장로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