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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젤(복음) 2021. 8. 28. 10:19
종교개혁 사상가




4명의 주요 종교개혁 사상가와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글쓴이 김홍기 교수/정리 문흥일 목사
  

차            례


I. 종교개혁 신앙과 사상의 부활
II. 마틴 루터
III. 존 칼빈
IV. 토마스 뮌쩌
V. 존 웨슬리
VI.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I. 종교개혁 신앙과 사상의 부활


휴머니즘과 종교개혁
     휴머니즘은 르네상스 운동의 정신적 기초를 이루는 사상으로 인간성을 상실한 중세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본래적 모습을 찾기 위해 '원천적 자료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일으켜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연구가 활발해지고 히브리어 문학, 희랍어 문학, 라틴어 문학을 다시 읽기 위해 고전적 자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문주의 운동이 어거스틴의 저서 출판을 1528 9년에 이룩하게 했고, 루터는 어거스틴의 저서들 특히 {영과 문자}를 읽으면서 새로운 신학적 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스위스 종교 개혁을 주도했던 쯔빙글리는 인문주의 운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쯔빙글리는 비엔나와 바젤의 인문주의 대학교에서 일찍이 공부하였고, 에라스무스를 1516년 바젤에서 만났다.
     당시 에라스무스는 바젤에서 프로벤 출판사를 통하여 그의 신약 희랍어 성서를 인쇄하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의 아이디어와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에라스무스가 쯔빙글리에게 영향을 준 것은 종교는 영적이고 내면적인 문제라는 것, 종교의 중요한 강조점을 윤리적 거듭남과 개혁에 두는 것, 개인뿐 아니라 사회까지 거듭나게 하고 개혁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의 기본적 상관성은 속죄주라기보다 도덕적 모범에 있다는 것, 어거스틴보다 제롬과 오리겐이 더 훌륭한 교부들이라는 것, 교회의 교리보다는 교회의 삶과 실천에 기본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교육적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것 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인문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는 '자유 의지냐, 노예 의지냐' 라는 논쟁으로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은 완전히 나뉘어지게 되었다. 1524년에 쓰여진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해 루터가 1525년의 {노예 의지론}으로 도전함으로써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의 등장
     종교개혁은 민족주의의 등장과 깊은 관련 속에서 발전하였다. 민족주의는 교황의 세속적 권한을 약화시키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세속 정부가 서서히 힘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루터의 독일 종교개혁은 독일 민족주의의 지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성공할 수 없었다. 루터는 독일 귀족과 제후와 동맹하여, 선제후 프레데릭의 정치적 도움을 얻었다. 보름스 국회에서 종교재판을 받은 루터가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은 막강한 정치적 힘을 지닌 선제후 삭소니의 프레데릭 4세의 도움으로 바르트버그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스위스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도시국가 형태의 정치체로 상당히 발전하게 되어, 독일과 마찬가지로 중앙집권 체제인 로마교황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인쇄술의 발전
     종교개혁 전야에 나타난 요하네스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발명(1454년)은 종교개혁 사상을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메인쯔에 이 금속활자가 소개되어, 1456년 라틴어 성경책을 인쇄하였다. 1457년에는 '메인쯔 시편'을 인쇄하였는데, 첫 페이지에 출판사 이름과 위치, 출판 날짜가 명시되어 있었다. 인쇄술 덕분에 종교개혁의 선전 내용이 빨리 값싸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읽을 수 있는 사람, 책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비텐베르그나 제네바에서 나오는 획기적인 새 아이디어들을 배울 수 있었다.
     종교 개혁가들의 설교들이 인쇄된 형태로 나타났을 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영국 상류층들은 이미 1575 1600년경에 루터 사상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한자 동맹의 길을 통해 케임브리지에도 책들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루터가 그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위하여 영국을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루터는 학문적으로 토론하기 위해 95개조의 항의문을 학문적인 언어인 라틴어로 독일 민중들을 선동하려면 쉬운 독일어로 썼을 텐데 썼다. 그런데 자신이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르게 삽시간에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고 인쇄되어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다.

종교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후기 중세의 교회 상황은 교회의 행정적, 도덕적, 법적 개혁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교황이 세속 일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세속 권세 위에 군림하는 것에 대한 개혁의 소리가 높았다. 그리고 성서 해석의 권위가 교황에게만 주어진다는 교황의 절대무오설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있게 되었다. 교황은 추기경들과 대주교들을 많이 임명하여 값비싼 예복과 부담금을 부과함으로써 치부하였다. 이렇게 물량화한 교황청이 성 베드로 성당 증축 공사를 하고도 남는 돈이 있음에도 가난한 교인들의 피를 짜내어 성당 증축 공사를 하는 데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중세 교회는 선행 의인화 사상에 의해 많은 선행  성지 순례, 금식, 고행, 독신생활 등  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는 성자들의 유품을 모으고 귀를 모으는 것, 성녀의 젖꼭지를 모으는 것, 성자와 성녀의 뼈를 갈아 물에 타서 마심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착각과 미신에 빠지기도 하였다. 가장 극단적인 선행 추구는 면죄부 판매였다. 면죄부 설교가들이 면죄부 헌금함에 동전을 넣는 순간,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에 있는 부모들의 영혼들과 조부모의 영혼들이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미신을 설교하였다.
     또한 죄사함의 만족을 얻기 위해 신부로부터 보속행위를 명령받고 보속행위를 다 치른 뒤에도 죄사함 받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연옥에서의 천년간의 형벌을 면하려고 면죄부를 샀던 것이다. 중세 수도원의 포도주와 농산물 수입으로 성직자들이 너무 부요하여 영성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지나치게 물량화되어가고 이웃의 가난과 고통에 무관심한 것은 중세 암흑기의 타락상과도 아주 유사하다.





II. 마틴 루터

신앙 의인화
     루터가 중세 천주교 신학과 결별하게 된 것은 그의 자서전적 고백에 의하면 로마서 1장 17절의 해석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을 루터는 무섭게 정죄하고 형벌하고 분노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우리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의'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가장 미워한 로마서 1장 17절이 가장 사랑하는 구절로 되었고 바로 천국의 문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경험을 루터는 "탑의 경험"이라고 표현하였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엄청난 용서의 은총을 믿기만 하면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의롭다 하심(Justification)을 입게 된다는 사실을 루터는 고백한다.
     루터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의를 힘입기 위해 능동적인 선행과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욱 절망에 빠지게 되어 아무런 효과가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는 스콜라주의적인 사변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온전히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만이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루터는 "우리의 신학은 오직 십자가뿐"이라고 강조한다.

자유의 복음
     루터는 바로 십자가 신앙을 통해 중세인을 자유롭게 하였다. 율법과 선행의 무거운 짐에서 자유롭게 하였다. 또한 어려운 라틴어 예배 의식의 노예에서 벗어나 평신도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독일어 예배 의식으로 바꾸었고, 미사에서 벗어나 설교를 듣는 청각적 예배로 개혁하였다. 또한 신부만 성경을 라틴어로 읽던 모든 모순에서 평신도도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쉬운 독일어로 번역하여 평신도 성경 읽기의 해방운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평신도도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자유와 해방운동은 철저히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신앙 의인화에 기초하여 미신과 터부와 맹종과 형식과 율법과 고행과 금욕에서 중세인을 해방시킨 것이다. 루터는 그 유명한 {기독자의 자유}에서 고린도전서 9장 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를 중요시 여긴다. 복음을 믿음으로써 얻은 자유는 방종과 향락의 기회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성령의 노예가 되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종노릇을 해야 한다. 루터는 변증법적 성격으로 크리스천의 본성을 설명한다.

십자가의 신학
     루터는 로마서 8장 17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를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짐을 지는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을 주장한다. 참 신학자는 책을 읽고 명상하고 사변하는 데서 만들어지지 않고 삶과 죽음, 비난당함과 고난 당함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루터는 라이프찌히 논쟁(1519년) 이후 죽음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고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 십자가 위에서만 그의 신학을 수립하였다.
     본회퍼는 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값비싼 은혜라고 풀이한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안일하게 기도하고 명상하는 수도사적 경건에 머무르지 않고 수도원 문을 박차고 나와서 세속 속에서, 역사 속에서 종교개혁 운동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한 것은 값비싼 은혜의 결단이라고 이해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너무 값싼 은혜  성공과 기적과 축복과 형통  만을 추구하지,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루터의 값비싼 은혜를 무시하고 있다.

성례전 이해
     루터는 그의 저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몇 가지 성례전 이해를 밝힌다.
     첫째, 가톨릭 교회의 화체설을 비판한다. 루터는 이 화체설의 미신적 요소를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공체설은 중세 가톨릭 교회처럼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 신체적으로 임재한다는 신체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둘째, 평신도들도 성만찬의 두 요소 즉, 떡과 포도주를 모두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세에는 사제들만 떡과 포도주를 모두 받았고 평신도들은 떡만 받았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평신도들의 죄도 사하시기 위해서 고귀한 피를 흘리셨으며, 예수님 자신이 두 종류를 모두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평신도도 떡뿐 아니라 포도주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희생의 미사를 비판한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미사 때마다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또한 우리의 죄사함의 보속을 위해서 인간도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노력과 공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 한번 영원한 희생의 제사를 드렸는데 또다시 미사 때마다 희생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넷째, 두 가지 성례전만을 강조한다. 다른 다섯 가지 중세의 성례전들은 비성서적이고 세례와 성만찬 두 가지만 성서적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다른 성례전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시지 않고 두 가지만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셨다고 해석한다.

두 왕국설
     루터는 정치와 종교의, 하나님 나라와 세속 왕국을 구분 지었다. 중세 교황이 세속 권력 위에 군림하려는 위험성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이런 윤리관이 나왔다. 루터는 세속 국가권력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할 책임을 철저히 구분 지었다. 교회는 사랑과 용서로 다스려져야 하고, 세속 국가는 칼과 정의로 다스려져야 한다는 이중 구조의 윤리를 말한다. 따라서 크리스천은 산상수훈대로 그리스도의 왕국 시민답게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또한 세상 왕국의 시민으로서 세속법 질서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세속 왕국도 사탄의 도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을 실현하는 도구다. 창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왼손 왕국이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실현하는 오른손 왕국이다. 비록 세속 왕국이 세속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우리는 모든 세속 권력 앞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정치와의 협력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선제후가 교황과 황제의 정치적 위협에서 그를 구해 주었다. 그러나 루터는 제후와 귀족 세력을 지지함으로써 억눌리고 소외당하고 가난한 농민의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III. 존 칼빈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속에 있는 구원
     칼빈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능력과 뜻  에 의해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마치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귀하게, 한 그릇은 천하게 그 뜻대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 달려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구원받을 자의 예정'을 발전시켜 한 걸음 더욱 나아가 구원받을 자의 예정과 멸망 받을 자의 예정도 말하는 '이중예정론'을 말한다. 따라서 칼빈에게서 인간의 의지는 노예적이며, 성령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 마치 인간 의지는 두 기사 앞에 놓인 짐승 혹은 말과 같은 존재이므로 성령이 타면 천국으로, 악령이 타면 지옥으로 달려간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 1백%, 인간의 의지 0%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중세 신학에 영향을 미친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 50%, 하나님의 은총 50%를 말하는 신인협조설을 주장하며,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 1백%, 인간의 의지 1백%를 말하는 복음적 신인협조설을 주장한다.

행동주의로 나타나는 성화 신앙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행동주의적 성화(聖化) 신앙을 강조한다.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행동주의 신앙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전체를 읽어보면 예정론보다 성화론이 더욱 강조된다. 칼빈은 우리의 성화의 채찍질로서의 율법의 적극적 역할 곧 제3의 용법을 강조한다.
     거기에 비해 루터는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제1의 용법)만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성도가 율법의 요구에 따라 게을리 하지 않고 부지런히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속 직업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인 줄 알고 그 직업 속에서 확신을 얻으려고 하였다. 또한 그 직업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 직업을 천국으로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금욕적 직업 생활은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을 모두 조사해 보니 칼빈주의 신앙이 강한 나라들임을 막스 베버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를 통해 증명하였다.

신정 정치의 역사적 실천
     칼빈의 성화는 사회적 성화 운동으로까지 발전한다. 곧 제네바 시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신정 정치의 사회로 만들고자 하였다. 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개 이름을 칼빈이라고 지어 그를 모욕하기도 했다  인내를 갖고 사회적 성화 운동을 실천했고, 저속한 노래를 금지시키고 카드놀이도 금지시키며 76명을 귀향 살이 보냈고 58명을 처형시켰다(간음죄, 혹은 칼빈 모독죄, 삼위일체 부인죄 등을 이유로).
     루터는 두 왕국설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오른손 왕국(교회)과 왼손 왕국(국가)의 정교 분리를 강조했고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독재 권력에도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칼빈은 교회의 주인도 그리스도요 국가의 주인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곧 세속 국가도 그리스도의 뜻을 거슬려서는 안된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교회와 국가 속에서 모두 실현되는 역사의 목표를 희망하였다.
     정치적 왕국은 단순히 의식주에 관계된 현실 생활에만 관심 갖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거룩하게 경건하게 존경스럽게 살도록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에 의해 국가가 세워졌기에 국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봉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똑같은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가 시민법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칼빈의 구원론과 정치 윤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아주 중요하다. 국가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문제에 있어서 두 가지의 예외를 칼빈은 주장한다.
     첫째로, 최고 통치자(왕) 밑에 있는 관리들은 백성의 이익을 위해 변호하고 백성들을 대변해야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뜻과 법에 어긋나는 모든 것에는 복종해서는 안된다. 칼빈은 신앙의 문제뿐 아니라 정치의 문제에 있어서도 통치자가 그리스도의 뜻을 거스를 때 복종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그 예로 예레미야, 다니엘, 나단, 사무엘, 호세아 등 선지자들을 언급한다.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감으로 불의한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국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발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사회적 성화 신앙과 저항 정신은 메리 여왕에게 항거했던 존 녹스, 히틀러 정권에 항거했던 디트리히 본회퍼 등에게로 이어졌다.
     이러한 칼빈의 정신은 한국 교회의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도 계속 살아서 숨쉴 수 있다. 한국 교회가 루터식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왔기에 비정치화 하려는 신앙적 입장이 초창기 선교사부터 지금의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에게 계속 전해져 내려왔다. 이런 의식구조가 칼빈의 정치 윤리에 의해서 거듭나고 갱신되어져야 한다.

칼빈의 성례전 이해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만찬 논쟁을 중도적 차원에서 종합하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루터의 공체설을 반대한다.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을 받아들여 보좌 우편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성만찬 상에 올 수 없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는 쯔빙글리의 상징설 혹은 기념설도 비판한다. 쯔빙글리처럼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성령으로 출석한다는 영적 임재설을 말한다. 또한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은혜를 받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성만찬은 회중의 공동체적 사랑을 나누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경험하는 사랑의 성만찬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더욱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구제하기 위해 사회 구제와 봉사만을 목적으로 반드시 성만찬식 때 헌금할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전하기 위한 영적 힘을 얻기 위해 성만찬을 나누어야 함을 강조한다.



IV. 토마스 뮌쩌

성서 이해
     뮌쩌는 성서 자체는 증거를 주는 것이지 신앙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성서에 대한 권위가 아무 의심 없이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뮌쩌가 성서를 무시했다기 보다는  성서 자체는 그 자체를 능가하는 것을 가르친다  성서가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외적인 증거일 뿐 신자 안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뮌쩌는 문자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성서에 한정하지 않으며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인간의 마음 속에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뮌쩌는 자연신학적인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뮌쩌도 성경 말씀을 교회의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성화 사상
     롤란드 베인튼과 칼 홀은 뮌쩌를 감정 혹은 경험의 수단으로 구원받은 자의 정체를 확신시킨 개척 종교 개혁가라고 해석했다. 고든 랍은 뮌쩌를 그의 성화 사상 때문에 최초의 감리교도 라고 부르고 있다. 웨슬리는 로마서 8장을 중심으로 성령의 내적 확증을 주장한다. 뮌쩌도 웨슬리처럼 성령의 내적 확증의 교리를 강조한다. 그러나 웨슬리가 거듭남과 성화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고 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역사라고 강조한다면, 뮌쩌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역할보다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성령의 내적인 확신을 가진 인간의 동참이 더욱 강조되므로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강조는 그의 영성에서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을 이룸에 있어서 뮌쩌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반대하고 '율법에 의한 칭의'와 그것을 통해 성령이 죄인을 회개시켜 하나님의 자발적인 도구가 되게 하는 구원의 완성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행함, 곧 인간의 사역을 중요시하고 있다. 루터의 슬로건 '오직 믿음으로만'이 뮌쩌에게 와서 '오직 율법으로만'으로 바뀌었다. 그의 기본적 관심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뮌쩌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형벌을 받음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분들 중 최초의 수난자라고 간주된다. 그리하여 죄인의 의인화는 신앙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형벌을 받아들임으로써 성취된다. 그 자신이 율법에 의해 야기되는 고난을 통한 변혁을 느꼈기 때문에 전 세계도 연약한 피조성으로부터 강한 왕국으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뮌쩌에게 있어서는 객관적인 의인화의 단계가 없는 주관적인 성령의 내적인 사역만이 강조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성령의 내적인 확증에 대한 출발은 기독교의 외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의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뮌쩌는 신비주의적 영성으로 성화를 말하면서도 신비주의나 경건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서 교회와 사회의 구조 개혁을 혁명적으로 시도하는 정치적 신비주의를 강조한다.

역사의 변혁
     뮌쩌의 민중은 역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하고, 능동적으로 구원 완성에 참여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에서 자라나는 영혼은 지고의 혁명적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뮌쩌의 고난 신학은 종교적 경험의 권위로 집중된다. 루터적 개신교에서 잊혀진 종교 경험의 역동성과 신자들의 개인 생활의 변혁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뮌쩌는 루터를 달콤한 그리스도를 외치는 설교가로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은 고통 당하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로 생각했다. 고난을 통하여 구원의 과정은 계속된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외적 고난과 내적 고난이 극복될 수 있다. 그 고난 속에서 민중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실천하는 역사 변혁의 행동을 강조한다.
     뮌쩌는 말씀 신앙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성령 변혁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었다. 개인적 구원으로서의 계시 대신에 계시는 사회적 변혁으로 이해된다. 그는 어거스틴으로부터 루터에 이르는 시민 복종의 정통 교리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드온으로부터 엘리야 까지 불의한 무신론에 대항한 거룩한 투사들의 예들을 뮌쩌는 발견했다. 뮌쩌는 자신을 다니엘과 동일시할 뿐 아니라, 예레미야와도 동일시했다. 그의 성화 신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개입의 생생한 기대와 연결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을 일으켰다. 하나의 능력 있는 사회적 신비주의가 뮌쩌로부터 태어났다.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  인간의 성화와 역사의 종말  를 선포했다. 이러한 견해로부터 그는 신정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뮌쩌는 어떤 종류의 세속적 정부도 거부한다. 그는 무정부주의자요 과격한 혁명가였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완전한 혁명과 역사적 변혁을 이룩하기를 원했다.
     뮌쩌는 지상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폭력(정의로운 칼의 사용)을 선택하였다. 뮌쩌는 비록 농민 전쟁의 상황이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전제로 하는 혁명적인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마르크시스트 농민 전쟁과 뮌쩌를 역사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연구는 엥겔스의 {독일 농민 전쟁사}라는 작품 속에서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사고와 연구의 발전을 배경으로 본격화하였다. 뮌쩌와 농민 전쟁은 혁명적 노동자들의 운동과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싸움의 중심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뮌쩌 신학의 본질은 혁명적 이데올로기보다는 내면적, 영적 성화 사상의 외연화, 사회화, 정치화이다. 그리고 그의 폭력 이해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다르게 반동 폭력(counter-violence)적 요소가 많다. 뮌쩌의 폭력에 대한 이해는 그의 신앙적인 열정과 상황 이해에서 유래된 반동 폭력의 요소가 많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뮌쩌 자신은 능동적인 폭력의 선동자라기 보다는 정부나 왕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인데 이 일을 행하지 않으면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의 제창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V. 존 웨슬리


복음적 신인협조설
     웨슬리는 루터의 신앙 의인화 신학에 철저히 근거하면서도 성화 신학을 칼빈보다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성화 신학이 칼빈의 성화 신학보다 더욱 행동주의를 강조하는 이유는 복음적 신인협조설에서 나타난다. 칼빈의 성화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인간 속에서 행하는 행동이지 인간은 노예 신세이다. 거기에 반하여 웨슬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성령이 먼저 역사 하지만 거기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응답으로 곧 신인 협조로 성화가 이루어진다.
     신앙 의인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으로만 이루어지고 그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거듭남도 성령의 내재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지만 성화는 믿음(하나님의 선물)과 사랑(인간의 선행적 참여)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인간의 선행을 가능케 하는 자유의지는 본성적으로 또는 자연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선재적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펠라기우스나 중세 가톨릭 교회의 반(半; semi) 펠라기우스주의의 본성적으로 자유의지를 갖고 태어난다는 자유의지론과 다르다. 웨슬리에 있어서 인간은 모두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 그런데 성령의 선재적 은총으로 믿는 성도나 안 믿는 자연인들 속에도 부분적인 자유의지의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이 선재적 은총은 자유의지뿐 아니라 양심과 종교성으로도 나타난다. 이 선재적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향해 즉, 은총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을 뜻한다.

행동주의
     웨슬리의 행동주의 신학은 루터의 신앙 제일주의와 정숙주의를 비판하면서 형성된다. 웨슬리는 그의 설교 {하나님에 관하여}에서 루터의 구원론을 비판한다. 루터가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성화에 무관심하였다고 비판한다. 루터는 의인화만을 강조하다가 성화에 관심 없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화를 강조하다가 의인화에 무관심하였다고 웨슬리는 지적한다.
     웨슬리에게 선행과 사랑은 저절로 맺히는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적 참여에 의해 신인 협조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그래서 루터는 로마서를 강조한 나머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평가 절하했으나 웨슬리는 로마서의 신앙과 함께 야고보서의 선행을 동등하게 중요시 여긴다.
     따라서 웨슬리는 도덕적 행동을 강조하는 산상수훈도 야고보서처럼 중요한 설교 본문으로 선택하였다. 산상수훈 설교는 그의 성화 신학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의 기록된 설교 152편 중 무려 13편이 산상수훈 해설 설교이다. 특히 그는 산상수훈 강해에서 사회적 성화 개념과 지상의 하나님 나라 실현을 아주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렇게 산상수훈 등을 성화 생활의 기준으로 생각한 것은 칼빈의 율법 이해와 상통한다. 곧 율법을 통해 자아 부정과 영성 훈련을 실천함으로써 더욱 경건하고 성화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율법 이해가 웨슬리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율법을 준수하고 복종하는 칼빈의 선행은 성령의 역사이다. 인간은 다만 노예 신세일 따름이다. 칼빈의 선행 이해는 1백% 성령의 역사요 인간 의지의 참여는 0%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선행 이해는 1백% 성령의 역사와 거기에 대한 1백% 인간의 자유의지의 적극적 응답과 참여로 표현되어 있다.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
     웨슬리 구원론의 핵심은 성화(Sanctification)이다. 회개는 종교의 현관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이라면 성화는 종교 자체이다. 그런데 이 성화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다. 웨슬리는 신앙의 본질은 내면적이지만 신앙의 증거는 사회적이라고 강조한다. 기독교를 은둔자의 종교, 기도하고 명상하는 종교로만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행위로 본다.
     그래서 웨슬리 신학자 알버트 아우틀러는 개인적 성화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건전한 복음주의라고 해석하고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를 모두 강조하는 것은 건전한 복음주의라고 해석하면서 웨슬리의 사상은 바로 건전한 복음주의라고 풀이한다.

은총의 낙관주의
     이 성화의 완성이 죽기 전에 가능하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악성의 깊이로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은총의 높이가 크시기에 크신 은총으로 지상의 완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절대적 완전은 죽음 후에 영화(榮華; Glorification)에서 일어진다. 왜냐하면 지상의 완전은 의식적인 죄는 범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인 죄의 가능성은 남아 있고, 무지, 실수, 유혹, 연약의 상태는 남아 있기에 상대적 완전이다. 그리고 완전은 정착된 상태가 아니고 계속적인 과정 속에 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계속 달려가는 것이 완전이다. 또한 이것은 개인적 완전을 의미할 뿐 아니라 사회적 완전도 뜻한다.

희년운동
     은총의 낙관주의에 의해서 사회적으로도 지상의 천국을 실현할 수 있다고 웨슬리는 믿는다. 물론 절대적 신국의 모습은 초월적, 미래적이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웨슬리는 지상의 천국을 믿는다. 그것이 곧 그의 희년사상으로 나타난다.
     그의 현재적 천국 개념과 희년사상은 그의 완전 교리와 연결된다. 역사 속에서도 완전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신앙은 모든 창조의 개혁과 재창조의 꿈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웨슬리는 감리교(성서적 기독교)는 완전한 사랑의 승리를 믿는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리라(시 85:10). 정의가 땅에서부터 흘러 넘치고 평화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  아무도 그가 소유한 것이 그의 소유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는 아무도 궁핍한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의 이웃을 그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레위기 25장에 나타난 희년의 모습대로 빚진 자를 탕감하고, 포로된 흑인 노예를 해방시켜 주고, 굶주린 민중들에게 먹을 것을 제대로 나누어주고, 상속할 재산의 대부분은 사회에 환원하고(자녀들에게 필수적인 것은 상속할 수 있지만), 가난한 민중에게 힘에 겨운 세금을 부과하지 말고, 부자들이 사치 있게 음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하며, 일거리 없는 자들이 구체적으로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제도적 개혁을 주장하였다.
     또한 희년생활은 마태복음 25장 35-40절의 작은 자에 대한 사랑, 즉 갇힌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헐벗은 자, 나그네 등에 대한 사랑임을 역설한다. 또한 눈먼 자에게 눈이 되어 주는 것, 발없는 자에게 발이 되어 주는 것,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는 것,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구체적인 경제 개혁 운동으로 고용 체계의 개혁, 시장경제의 부당성, 세금 제도의 개혁, '할 수 있는 한 돈을 많이 벌어서, 할 수 있는 한 많이 저축하고, 할 수 있는 한 많이 나누어 주라'는 돈 사용의 3대 원리, 청지기 의식에 의한 재산상속의 반대, 돈 사랑의 위험, 헌금이 아닌 작은 자들에 대한 사회 봉사로서의 하늘 나라의 저축, 인류 최초의 농민과 노동자와 광부들의 노동조합, 여성 해방운동(여성 설교가의 임명) 등을 가르치고 실천하였던 희년 운동가였다.


VI.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한국 교회 개혁의 과제
     그 동안 다룬 루터, 칼빈, 뮌쩌, 웨슬리의 가르침 속에서 한국 교회는 그 역사적 사명을 위해 거듭나야 할 필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개혁 신학의 조명을 통해 한국 교회는 다시금 자기 변혁을 시도해야 한다.
     첫째로, 체험 중심의 신비주의에서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역사적 종교가 될 수 있다. 다미선교회 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고 역사 속에서 책임적 공동체가 되려면 꿈과 환상에서 말씀 탐구로 돌아가야 한다.
     둘째로, 물량주의, 성공주의 신앙에서 십자가 신학의 신앙으로 거듭나야 역사적 책임을 지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소외와 빈곤과 억눌림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지는 십자가의 교회가 될 때 한국 역사의 바른 방향에 설 수 있고 역사에 앞장 서가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셋째로, 신앙 지상주의 혹은 신앙 제일주의에서 행동주의 신앙으로,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는 산 신앙으로 거듭나야 역사 창조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넷째로, 영육이원론,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의 이원론적 신앙에서 현실 참여적 신앙으로 거듭나서 복음화와 인간화의 총체적 선교를 수행하는 것이 한국 교회의 역사적 과제이다.
     다섯째로, 자본주의의 병폐인 이기적 신앙에서 더불어 살고 더불어 주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민주화와 통일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될 수 있다.
     여섯째로, 현실 도피적 환상적 말세 신앙에서 현재적 천국을 건설하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역사적 부르심에 응답하는 탈출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일곱째로, 신정 정치의 신앙으로 한국 역사의 예언자가 되어 사랑, 평화, 평등, 자유와 정의의 통일 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예언자적 공동체가 되기보다 체제 지향적 공동체였음을 회개하고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뜻이 한민족사 속에도 실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현존하도록 역사 속에서 일하는 예언자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희년운동의 종교개혁 신학적 근거
     우리는 앞서 살펴본 종교개혁 신학 사상 속에서 통일희년운동의 역사 신학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통일희년운동이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역사 신학적 근거를 종교개혁 신학의 조명에서 다시 총괄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통일희년운동은 세계사의 십자가인 냉전 구조의 죄악을 짊어진 한민족의 한을 풀어 주고 새로운 세계사의 장을 여는 부활 운동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우리가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은 세계사적 이유는 새로운 세계사를 창조하는 주역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 때문이다.
     둘째로, 통일희년운동은 냉전의 죄악을 속죄하고 용서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십자가의 신학으로 자본주의가 저지른 죄악과 공산주의가 저지른 죄악을 속죄하고 용서하는 운동을 전개하여야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다.
     셋째로, 통일희년운동은 남과 북이 미워하고 싸웠던 관계를 넘어서서 서로 화해하고 하나 되는 일이기에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십자가 신학으로 서로의 원수 되었던 관계, 전쟁을 치른 깊은 상처를 싸매고 어루만지며 화해하지 않고는 통일의 문을 열 수가 없다.
     넷째로, 통일희년운동은 서로 나누어 갖는 사회적 성화 운동이기에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성화 신학으로 지나친 소유욕을 회개하고 청지기 정신으로 돌아가서 경제적 재분배 운동, 경제적 섬김의 운동, 경제적 정의 운동을 실천하여야 통일을 이룰 수 있다.
     다섯째로, 통일희년운동은 하나님의 신정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신정 정치 신학으로 한반도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예언자적 외침과 예언자적 행동 예언을 통해 국내, 국외의 반통일 세력을 회개시키고 통일 운동에 동참하도록 의식화시키고 조직화시켜야 한다.
     통일희년운동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 신학과 칼빈의 신정 정치 신학과 뮌쩌의 하나님의 선교 신학의 구체적인 프락시스(Praxis)로 자유 운동과 평등 운동의 프로그램화에서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북한 속에는 자유 운동이 일어나도록 해야 하고 남한 속에는 평등 운동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북한은 시장을 개방하여 외국의 발전된 기술과 자본 투자의 문을 열고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여 열심히 일하는 개혁 운동을 일으켜야 하고, 남한은 극단적 이기주의를 버리고 자본과 시장과 대지의 독점화를 지양(止揚)하고 더불어 나누어 먹고 나누어 갖는 재분배 운동에 앞장서도록 기독교적인 경제 윤리 이상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여야 한다.
     세금 제도의 개혁, 청지기 정신에 의한 재분배와 나눔의 운동, 재산상속 반대운동, 고용 제도의 개혁, 금융 실명제의 구체적 실천 운동, 토지 공개념 제도화 운동, 속회와 구역예배 헌금을 통일기금화 하는 운동, 남북간의 나눔 운동 등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운동, 인간 띠잇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운동 등의 구체적인 희년실천운동으로 통일의 문을 여는 한국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통일희년운동이 하나님 나라 운동임을 확신하고 이를 모든 기독교인들과 국민들에게 의식화하고 계몽하여야 한다. 또한 열심히 기도하는 운동과 희년 실천 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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