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중세 교회사

[스크랩] 간략한 교회사

에반젤(복음) 2021. 8. 28. 10:16
간략한 교회사


간략한 마르틴 루터의 생애와 종교개혁

마르틴루터 (1483-1546)
교회사에 있어서 16세기의 종교개혁보다 더 큰 일은 없다. 종교개혁 운동은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 라는 국가기능이 출현하고, 문화적 으로는 르네상스 이후 인문주의가 유행하며, 신학적으로는 성경의 권위가 갈수록 높아져 초기 교회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망을 더욱 자극하여 유럽곳곳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구름처럼 일어 났다.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 주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광부였고. 사람들이 존경할만한 인품을 가진 그는 1491년 시의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어머니는 전통적이며 선량한 여인 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루터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게 했다. 루터는 14세때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공동생활 형제회에서 1년동안 공부하였다. 당시 시골 사람들의 미신은 어린 루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498년 루터는 수도생활을 통해 수도생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라틴어를 배워 대학에 들어가는 기초를 닦았다.

19세때 1502년 루터는 에르프르트 대학을 졸업하고 1505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부친의 뜻을 따라 계속 법률을 공부할 계획이었으나. 1505년 스토테론하임으로 가는 중에 폭풍우 속에서 벼락에 맞을 뻔 했다.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수호자 “성 안나”에게 당신이 저를 도와 주십시요. 당신이 저를 도와주시면 수도자가 되겠습니다 라고. 서원했다. 2주 후 에 아버지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장 엄격하고 청빈한 어거스틴 수도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어린시절 미신과 연옥 에 대한
공포로 루터의 수도생활은 고행과 속죄 사이에서 계속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게 하였다. 이곳에서1505년부터1511년까지 수도사 생활을 하였다.

어거스틴 수도원은 중세때 베네닉트 수도원의 형태에 불만을 품고 한무리의 사람들이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조직한 것이었다. 어거스틴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크회와 테레사가르메 수녀회는 중세때 유명한 수도회였다.

수도원안에서 루터는 엄격한 생활를 하며 심지어 채찍으로 자신을 때리기 까지 하면서 죄에서벗어나고 거룩한생활을 살며 새사람이 되기를 힘써 수도 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마음에 평안을 얻지못했다. 평소에 추구했던 하나님의 은혜도 얻지 못했다. 죄악에 대한 느낌은 그를 무거운 돌로 누르는것 같았으며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내적인 몸부림 가운데 로마서와 시편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이 그의 사상을 변화 시키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로마서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을 읽었다. 그리고 시편22편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씀을 읽고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성결한 어린양이 아닌가. 왜 하나님이 그분을 버리셨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때 성령의 빛비춤을 통해서 “나의 모든 죄가 모두 그분께 돌려졌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의 죄가 용서 받는 것은 외적인 의식과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이루어 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사상이 바뀌자 천주교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루터가 괴로워 하는 것을 보고 루터를 인도한 수도사가 루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루터를 로마로 파견 시켰다. 1510년부터 1511년 까지 루터는 종교의 중심지인 로마를 방문하여 참된 평강과 평안을 얻고자 하였으나 로마에서 교황의 사치스런 생활과 부패를 보고 더욱 실망을 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내가 로마 교황청을 보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증오 하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1512년 루터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수도원을 떠나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때부터 루터는 성경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기위해 힘을다해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517 년에 테첼이(교황의 면죄부판매 설교사) 비텐베르크에서 수치심도 없이 면죄부를 팔며 재물을 축적하자. 이를 반대하기 위하여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부쳤다. 그 내용은 천주교를 반대하거나 교황를 공격하는 것이 없었고. 중요한 내용은 면죄부를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면죄부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여 연옥에서 벗어나게 하는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면죄부를 팔아서는 안 된다고 섰다. 이것은 당시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유럽전체를 뒤흔들었고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1518년 루터는 추기경 카예탄과 회담을 가졌으며, 그 다음해에는 요한에크(신학교수. 종교개혁의 반대론자)와 변론했다. 루터는 양보하는 것을 거절하였고 오직 성경의
권위를 내세웠다.

1520년 루터는 문서의 일에 적극적으로 시작하여 ”교황과성직자의 부패와타락”을 고발했다.”독일의 귀족에게 보내는 공개서신, 바벨론으로 포로된 교회,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 수백권의 독일어 소책자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소책자는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환영을 받았지만 교황의 분노를 야기 하였다. 교황은 루터에게 60일 이내에 회개하라는 조서를 내렸으나. 루터는 오히려 이 조서(파문장)를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다음해 1월에 교황은 루터의 교적을 파면하였다. 이로 인해 루터와 천주교는 정식으로 결별하였다.

1521년 교황의 재촉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5세(독일황제)는 보름스에서 회의를 개최했으며, 루터에게 출석하여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의 친구들은 후스와 같이 될까봐 그곳에 가지말라고 하였으나 “내가 가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루터는 보름스로 갔다. 회의 첫날 책상 위에 가득 놓인 책 앞에서 찰스황제는 이 책들이 그의 작품인지 그것들을 철회하거나 폐지 할 것인지를 심문하였다. 루터는 그것들이 자기의 저서인 것은 인정했지만 그 주장과 내용을 폐기 할 것은 신중하게 고려 하여야 했기 때문에 결정할 수 없었다. 찰스 황제는 그에게 대답할 시간을 하루 동안 주었다.

다음날 루터는 회의에서 저는 어떤 신념도 바꿀 수 없으며 바꾸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교회나 성직자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경를 통해서이며,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이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저는 성경의 진리에만 굴복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었읍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읍니다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하였다. 루터는 집에 돌아가는 중에 친구들에게 납치되어 바르트 부르크성에 숨겨졌다. 한달 뒤 찰스5세황제는 루터를 우둔하고 완고하고 융통성이 전혀 없는 이단자라고 선포하였고 그를 체포하고 그의 간행물의 발간을 금지하라고
명령하였다.

루터는 찰스5세의 경쟁자인 작센지방의 바르트 부르크성 선제후 프레드리히의 보호를 받아 그곳에 거주하며 10개월동안 작은 방에 갇혀 외롭게 지냈다. 그러나 루터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그는 열 두 권의 책을 썼고. 라틴어로 쓰인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제 것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이 라틴어를 모르는 평민들도 읽히게 되었다. 그가 번역한 번역본은 지금까지 독일인 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번역본중의 하나이다. 루터는 바르트 부르크성에서 까마귀와 박쥐의 친구가 되었다.그는 외롭고 몸은 쇠약해 졌지만 주님에 대한 믿음은 날고 견고해 져갔다.

바르트 부르크성은 작은 산위에 있어서 주위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성에서 밖을 내다 보며 영감을 얻어 “‘내주는 강한성이요” 라는 찬송를 섰다. 이 찬송시는 시편 45편을 근거로 하여쓴 것이다.이 가사에서 진리를 위해 싸운 강한 영을 볼 수있다. 이 작은 방에서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는 길을 생생각하였, 어느 날 자신이 옳은지 천주교가 옳은지 몰라서 믿음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천주교의 1500년역사가 잘못되고 나만 옳단말인가. 루터는 마귀와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루터는 자신이 옳은지 천주교가 옳은지 고통스러워하며. 창문을 열고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멀리있는 구름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 먹구름이 사라졌는데 그의 속에 있던 의심, 믿지 않는 악한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만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전통에 서있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서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테첼은 라이프치히 출신의 도미니크회 소속 수도사이다. 그는 당시 일정한 금액을 주고 면죄부를 구입하면 지금까지 지은 죄와 함께 미래의 죄도 사함 받을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종교재판소
종교 재판소는 교회 역사 가운데 있어서 가장 어두운 한 페이지이다. 로마 천주교는 이단을 소멸 하는 것을 목적으로 1233년에 로마 교황청을 따르지 않는 이단을 전문적으로 심판하는 교회 법정을 세웠다. 법정에서 이단으로 고소된 사람은 변호사를 둘 수 없었고, 원고의 신분을 알 수 없었다. 일단 이단으로 고소되면 어린이나 범죄자의 증언, 심지어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도 모두 정식 증언으로 받아들여졌다. 무고함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피고는 유죄로 간주되었다.

법정에서 회개한 자는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면되었다. 무릇 피고의 변호자도 공범으로 간주되었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교회에 조사기관을 설립하고 파문 규정을 만들고 이단 용의자들을 심리하기 위해 종교 재판소를 설립했다. 종교재판소는 1만여명에 달하는 중세 유럽 학자들과 사상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종교 재판관에게는 이단 용의자들을 고발할 권한이 주어졌다. 용의자들은 고문과 매로 죽음의 공포 앞에서 죄를 고백해야만 했다.

알비파
1145-1244년 사이에 존재한 알비파 기독교인 들이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알비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알비파 라고 불렸다. 당시 로마천주교가 권력을 탐하고 뇌물을 받는 등 부패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순수하고 소박한 기독교가 랑그도크에 서 신속하게 퍼졌다. 현지 주민들은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수도원과 성당를 탈취하였으며 이러한 시설물을 접수하고 관리 하였다.

이파의 분포는 매우 광범위 하여 로마 천주교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그들은 엄격하게 고행하며 수도하는 것을 실행하였고 고행으로 수도하여 영혼의 불결함을 벗고자 갈망하였다. 그들은 혼인과 출산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였고 십자가와 성례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 하였으며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고 신약을 연구하였으며 또한 신약을 그 지방 언어로 번역하였다.

알비파 신도들은 로마 천주교를 반대함으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선고 받았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재위하는 동안 알비파가 유럽에서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랑그도크에서 세력이 가장 큰 레이몽 백작에게 알비파를 영지 내에서 쫓아내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레이몽은 교황의 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의 특사를 죽였다. 이에 분노한 교황은 1208년에 칙령을 공포하여 각 나라을 불러 십자군 원정대를 조직하여 이단을 징벌하고자 했다. 사실 박해는 1145년 부터 시작되었는데 몇 명의 알비파의 신도들이 퀼른에서 화형 당하였고 그후 1209년 교황청은 알비파를 공격하라고 분명히 명을 내렸다. 심지어 이단을 신봉하는 것을 사형죄에 해당한다고 선포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으로 프랑스 남부는 20년동안 대대적으로 유린 되었다. 이노센트3세 후에 교황이 된 이들은 모두 알비파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였으며 또한 종교재판소가 정식적인 기구가 되어 이러한 이단을 소멸하는 직무를 계속해서 집행하였다.

예수회
예수회는 스페인의 군인 이었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 창립 되었다. 그는 1521년 중상을 입어 퇴역 하였다. 그는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것과 초기 성도들에 관한 서적을 읽고 깊이 감동을 받아 예수의 군병이 되어 규율을 엄수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을 맹세 하였다. 후에 그는 계속 공부를 하고 여행도 하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1528년에 그는 파리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했다. 같은 시기에 칼빈도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으며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을 갔다. 1533년에 칼뱅은 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하였고, 1534년에 로욜라는 프란체스코와 다섯명의 동반자들과 함께 빈궁한 생활을 하고 자비를 베풀고 선교하며 교황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1540년에 교황은 정식으로 예수회를 인정했다.

종교개혁 전에 천주교 내부에서도 영성을 고양하자는 소리가 높아졌다. 천주교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서로 돕고 선행을 강조하는 조직과 수도회가 계속 세워졌다. 예수회는 이러한 천주교의 위기를 배경으로 세워졌지만 이조직의 목적은 개신교를 타도하고 개신교인 들을 핍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회의 세가지 주요 임무는 개신교를 대항하고 높은 수준의 교육를 제공하여 선교 활동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땅에서의 왕국이 로마 천주교에 있다고 믿고 교황을 대표 권위로 여겼다. 그리고 교황청을 떠난 모든 조직이나 교회는 이단으로 여겼다. 그들의 세력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칼 등으로 신속하게 확장되었다.그들은 종교 재판소의 지지하에 개신교를 공격하고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개신교의 위협 때문에 천주교의 신분이 낮은 성직자들과 더불어 학술계는 개혁을 위해 대공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는 즉위한 후에 신속히 교회를 개혁 하려 하였다. 초기에 그는 루터를 통해 목적을 달성 하려고 하였으나 루터는 너무나
급진적이었다.

1521년 교황레오 10세가 갑자기 죽자 찰스5세의 압력으로 교황청에서는 찰스 5세의 스승이었던 하드리안6세을 후임으로 선출하였다. 하드리안6세은 매우 경건하였으며 이전의 성경을 연구하고 성직자를 교육하며 설교하는 방식을 개선하는 등 많은 개혁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루터의 개혁을 경시하였다. 그는 재위 한지 20개월만에 과로로 죽었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라고 써 있다.

중세의 교회사
주 후 500년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을 고대라고 부르고. 500-1500년을 중세라고 하며. 1500년이후를 근대라고 부른다. 중세의 천주교는 2000년 교회사 가운데 가장 부패한 시기였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때 만약 천주교의 부패 상만 비판 하는데 머문다면 그것은 추한 장면만 재현하는 의미 밖에 없다. 우리는 성령의 빛비춤을 통해 부패의 원인을 정확하고 분명 하게 보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얻어야 할 교훈이다.

로마에는 성 라테란 대 성당이 있다. 이성당은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한후 그의 장인 라터라니의 별장을 개축하여 교황에게 기증하였고. 1307년까지 교황청으로 사용하던 성당이다. 십자군 전쟁 후 프랑스 아비뇽 성당에 피신해 가있던 교황이 돌아와서 구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여. 베드로성당은 1600년대부터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성당이 되었다.

계시록에 예언한대로 중세 천주교는 버가모교회의 예표이다. 버가모는 세상과 결혼, 높은 탑을 의미한다. 라테란 성당 내부를 보면 많은 성상과 모자이크 많은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천주교는 외적으로 정치와 결혼했고. 내적으로는 세상과 결혼한 상태를 보여준다. 원래 이 땅에 있는 교회는 겨자씨처럼 작고 감취어져 있고 생명으로 가득해야 하지만, 교회의 변질은 높은 탑이 되었고. 높은 성당들은 주님의 겨자씨에 나오는 큰 나무의 경고가 이루어진 것이다.

서 로마제국은 정치적 혼란과 이 민족의 침입이라는 상황하에서 교황이 정치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된다. 452년에 훈족의 침입과 455년의 게르만의 반달족의 침입으로 점령 당하였을 때 교황 레오 1세의 간곡한 부탁으로 군대가 철수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트족, 부르군디족, 프랑크족.등의 이 민족 침입과 정치 권력의 무질서로 로마교황이 백성들을 보호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590년 교황이 된 그레고리시대에 고대 로마왕국이 중세기의 로마천주교로 넘어가는 과도기임을 나타낸다. 그레고리는 로마교회의 주교였을 뿐 아니라 중세기의 첫 번째 교황이었다. 로마교회는 사도들의 계보를 강조하며 교황권력의 이론을 점진적으로 형성하였다. 레오1세(470) 때에는 교황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이고 모든 사도들의 머리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레고리 시대부터 로마 천주교는 서유럽과 북유럽의 각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각지 주교는 교황의 명령을 들게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교황의 권력을 대대적으로 강화 시켰다.

성 라테란 성당 입구중앙에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다. 성라테란 교회는 전세계와 모든 도시의 중심이 되는 교회이며 “어미와 머리” 이다.또 성당 안에는 많은 성상과 교황의 좌 가있다.교황의 제단(좌)은 베드로가 사용하던 곳이어서 교황만 앉을 수 있는 곳 이라고 한다. 이것은 계시록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녀가 모든 교회의 어미로 많은 물위에 앉아있는 음녀이다.그러므로 여기서 모든 교회의 어미와 머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마 천주교는 정치와 연합 함으로 점차적으로 변질되어 영에 속한 유기체로부터 세상적인 조직으로 변했다. 결국 더 큰 성당. 더 복잡한 계급. 더 죽은 의문. 더 죽은 교리가 천주교의 가장 큰 특징이 되어버렸다. 라테란 대성당은 323년에 콘스탄틴이 지어주었다. 침례당건물은 432-440년에 건립한 것이며. 내부를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다. 1650년에는 전면적으로 개장하여 내부에는 콘스탄틴황제와 열두사도의 조각상이 외부에는 초기 교부들의 조각상등이 있다.

라테란 성당 옆에는 성 계단성당이 있다. 이곳에는 예수님께서 심판받으실때 올라가신 계단이 있는데 이것을 예루살렘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천주교는 이것에 대해 매우 미신적이다. 믿는이들이 이계단을 오르면서 기도하고 입마추면 그들의 영혼이 연옥으로 부터 나올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마르틴 루터도 16세기 이곳에 와서 무릅으로 한계단 한계단 올라갈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기억했다. 그때 그는 내가 여기서 하고있는 의식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이런방식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때 부터 그는 천주교에 대해 의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갈3장1.3절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잃어버리므로 남은것은 육체의 경건함과 종교의 미신적인 것밖에 없게 되었다.이것는 참으로 가슴 아픈일이 아닐 수 가 없다. 로마에는 수천개의 성당이 있다. 그중 마리아를 숭배하는 성당이 가장많다.예수님을 기념하는 성당보다 많다. 로마에는 세계에서 가장큰 네개의 성당이 있는데 성 베드로(바티칸)성당. 성 요한성당(라테란). 성 바울성당. 성 마리아성당인데 성마리아 성당은 마리아을 숭배하기 위한 성당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성모 숭배가 없다. 주님은 마리아의 육체를 빌려 이땅에 오셨지만 천주교는 마리아를 하늘의 황후로 숭배한다. 마리아를 숭배 하는것은 381년부터 시작되었고 4세기 부터는 마리아 숭배 사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성 마리아 성당이 처음 지어졌을때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이단은 대항하기 위해 천주교는 예수님은 과거부터 존재하는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431년 에베소 대공회부터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공식화 했다.

432년부터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개축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때 부터 상황은 더욱 악화 되고 심각해졌다. 먼저는 성모에게는 원죄가 없다 라는 말이 떠돌고. 나중에는 성모가 죽지 않았다는 말이 나돌았다.1950년경에는 성모가 하나님에 의해 직접 하늘오 이끌려졌다는 말도 했다. 이것이 오늘날 천주교의 정통신앙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마리아를 하늘로 데려갔기 때문에 성모의 무덤이 없다고 말한다.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마리아를 가장 숭배했고 마리아를 대대적으로 높였다.

이때 수 많은 이방의 신전들이 대대적으로 복원 되었고 보수 되었다.로마에는 판테온신전이 있는데 천주교는 신전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만들었다.판테온의 뜻은 '모든신을 위하여드리는 신전'이란 뜻이다.이 신전을 천주교는 성모와 모든 성자를 위하여 라고 바꾸었다.진리에 이단이 추가된것. 생명에 사악함이 섞여진것. 고운가루에 누룩이 더해진것. 이것이 바로 타락한 천주교이다.

천주교는 마태13장의 사악한 여인의 본 모습이며. 계17장은 이 사악한 여인이”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피에 취한지라” 라고 말한다. 천주교는 성경의 교훈으로 부터 떠났을 뿐아니라 역대로 주님을 믿는이를 핍박하고 살해 했다. 종교 재판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콘스탄티누스 이후 천주교가 점차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교황이 된 뒤 종신토록 교황직을 수행하였으며.종신교황제가 시작 되었는데 이것이 중세 교황제도의 시작이었다.

중세의 천주교는 교황이 영원히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였다. 즉 교황 무오설을 주장한 것이다.이것은 교황의 말은 성경과 동등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역대 교황의 사적을 종합해 볼때 그들 중 에는 탐욕.살인. 강탈.음행. 하나님을 모독 하는 자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못할일이 거의 없었다. 중세기의 로마 교황청의 허례 허식과 음란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 였으며. 교황청은 거의 매춘부들의 거처와 같았다. 심지어 어떤 교황은 간음현장에서 정부의 남편에게 살해된 경우도 있었다. 중세의 천주교는 암흑시대 였다.이러한 흑암시대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빛 줄기의 노선이 있었다

농민 혁명
1524-1525년 뮐하우젠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은 중세 천주교와 귀족들의 착취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들 이었다.천주교와 귀족들의 횡포에 시달려온 농민들은 종교개혁을 빌미로 사회 혁명을 이루고자 하였다.당시 루터는 믿음과 자유를 강조했기 때문에 농민들도 자유를 쟁취하려는 생각이 일어났고. 농민들은 루터의 신학을 사회 운동의 기초로 이용하였다.

한편 토마스 뮨처(Muenzer)는 프랑크프르트 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회운동에 심취되었다. 루터와 같은시대에 살면서 루터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너무나 극단적 이어서 점차 루터와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루터를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사상은 성경의 도움없이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직접 성령을 받을 수 있다며.계시록을 인용하여 무력으로 불신자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세워 하나님의 왕국을 지상에 가져올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는 개신교의 영향을 주었고 독일 남부의 제후들이 루터파를 박해 하였기 때문에 뮨쳐는농민들을 격동시켜 1524년 뮐하우젠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압자들을 살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폭동은 다음해에 스위스와 독일의 각지에 확산되어 하층 계급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삼십만명이 동참하였다.

초기에 루터는 귀족과 교회가 농민을 장기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대하여 농민을 동정을 표하며 농민을 “사랑하는 형제” 친구라고 부르며 불합리한 영주들을 질책하였다.다른 한편으로는 농민들에게 사회적 정의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며 정부를 존중할 것을 훈계하였다. 그러나 농민들의폭동은 갈수록
잔혹해져서 살인과 방화를 하는 등 극단적인 상황에 루터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루터는 “강도이며 살인마인 농민들의 집단 약탈과 대량 학살을 반대함”이라는 반박 글을 써서 복음을 구실로 노략하고 살인하는 농민은 사형에 처해야 하며 귀족들은 모든 방법으로 폭동을 제지 해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루터파와 천주교와 귀족들이 연합 했으며 10만명의 농민들이 살해 되었다. 루터는 귀족들의 흉악함과 잔인함에 상심했지만 여전히 정부의 권위를 지지 했다.

원래 농민들은 루터의 종교 개혁에 충실한 지지자였으며 루터가 자신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도울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때 이후로 농민폭동은 루터와 농민사이에 큰 간격을 가져왔고.루터와 농민은 서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그로 인해 그의 개혁 신학도 영향을 받았다. 농민이 자유와 평등을 구호로 한 폭동을 일으켜서 복음이 왜곡되자 루터는 즉시 로마서 14장과 디모데 전서2장을 신성한 권력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용하여 세상의 권위에 복종 하여야 한다고 말하게 되었다.그러나 각 국왕 하에 있는 제후정권은 루터의 말을 빌미로 영주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농민혁명후 독일의 북부는 루터파에 남부는 천주교에 속하게 되었다.귀족과 지주 계급들은 다시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서 제후의 권력을 강화하기 원했고 루터를 지지하여 독일의 국교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존 위클리프 (1329-1384)
14세기 민족주의가 일어나자 영국.프랑스. 독일등 유럽 지역은 로마 교황청의 장기간 통제에 대해 불만이 늘어갔다.국왕과 교황의 권력다툼은 갈수록 증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은 당시 천주교의 부패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던 개혁가들에게 좋은 정치적 보호를 제공하였다. 개혁가 중의 가장 유명한 사람은 영국의 존 위클리프 였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한 뛰어난 개혁가로서 성경의 권위를 높인 인물이다. 그는 성경를 영어로 번역하여 영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수 있게 하였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존은 위클리프의 좋은 친구 였다. 위클리프도 국왕과 교황의 권력다툼에서 영국왕을 지지 하였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재산를 모으는것과 교황이 정치에 관여 하는 것을 반대 하였다. 그는 참된교회는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며 하나님께 선택받고 부름받은 사람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믿는이들과 하나님 사이에 대언자인 교황이 필요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부패한 성직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그의 관점은 평민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교황청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1377년 교황은 위클리프를 잡아오라는 명령을 다섯번이나 내렸다.
이 시대을 살고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참으로 복된사람들이다.선진들의 피의 대가로 회복된 진리를 아부 손상없이 우리에게 도달되고 보존되고 실행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자 존과 귀족들의 보호아래 위클리프는 안전을 보장 받았다. 위클리프의 말년에 귀족과 평민이 손을 잡고 교회를 공격 하는 농민운동이 (1377-1381) 일어났다. 교황청은 모든 파괴와 손실을 위클리프파에게 돌렸다. 그러나 정치 세력의 보호아래 위클리프는 살아있을때 어떠한 박해도 받지 않았지만. 그가 죽은뒤 천주교는 교회를 새롭게 정비한다는 명분으로 위클리프에게 이단이라는 죄명을 씌우고 그의 시신을 파내어 불살랐으며 그의 추종자들을 대대적으로 박해 하였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믿음과 성경의 권위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그들은 성경을 유일한 권위로 삼아야 하고 믿음을 구원의조건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두가지 관점은 후에 오직 성경을 의지하자 와 믿음을 의지하자는 논점으로 발전하여 16세기 종교개혁의 주된 내용이 되었고 주님께서 회복하신 진리의 한 항목이 되었다.

교회는 주교를 머리 로한 조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선택받은 모든 믿는 이들로 구성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지 교황이 아니라며. 천주교의 낡은 풍속을 격렬하게 비판 하였다.그리고 신약은 교회의 헌법이라고 말하였다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거짓선지자)
계 13:11-14 또 내가 보니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데 그 짐승은 어린양처럼 두 뿔을 가졌고. 용처럼 말을 하였읍니다. 그 짐승은 첫째 짐승 앞에서 첫째 짐승의 모든 권세를 행사하여 땅과 땅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상처에서 나은 첫째 짐승에게 경배하게 합니다. 또 그 짐승이 큰 기적을 행하는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 오도록 합니다.첫째 짐승 앞에서 행하도록 주어진 그 기적들을 통하여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칼을 맞고도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형상을 만들라고 땅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하였읍니다.
계 13:15-17절 또 둘째 짐승은 능력을 받아서 첫째 짐승의 형상에게 호흡을 주고 심지어 짐승의 형상이 말을 하도록 하였으며 또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않는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 짐승이 모든 사람들 곧 낮은 사람이든 높은사람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자유인이든 노예이든 다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숫자를 표로 가진 사람이 아니면 사거나 팔수 없게 합니다.
계 16:13절 또 내가 용의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개구리와 같은 더러운 영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읍니다.
계 19:20-21절 짐승이 붙잡혔고 또 그 짐승 앞에서 기적들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붙잡혔습니다.그 거짓선지자는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한 사람들을 미혹 하던자입니다. 이둘을 유황불로 불타는 불못에 산채로 던져 졌고 그 나머지는 말을 타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에 죽었는데 모든 새들이 그들의 살로 배를 채웠읍니다.

위 말씀에서 나오는 짐승은 거짓 선지자이다. “또 내가 보니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 오는데” 땅 곧 육지는 이스라엘나라를 상징하므로 거짓 선지자인 이 짐승은 유대나라에서 나올 것이다. 어떤 예언 연구가 들은 거짓 선지자가 가룟유다일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런 견해가 옳다고 믿는다. 사도행전 1장25절에 따르면 유다는 죽은 후에 자기 백성들에게로 간것이 아니라.(창25:17.35:29) “자기 곳”으로 갔다.
비록 역사속에서 수많은 거짓된 사람들이 있어왔지만 아무도 유다 처럼 사탄으로 충만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유다를 심지어 마귀라고 부르셨다.(요6:70-71) 유다는 마귀로 충만했기 때문에 그는 마귀와 하나였다.유다 외에는 그 누구도 그 거짓선지자에 대한 묘사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유다가 자기곳 으로 간것의 의미를 더 깊이 살펴보자.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엘리야는 하나님께 들림받았고. 모세의 시체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었다. 더욱이 우리는 네로의 영이 무저갱에 유치 되어 있음을 보았다.의심할바 없이 유다의 영도 어떤 특별한 곳에 유치 되어있다.
계시록에 와서야 우리는 왜 성경이 이 네사람에 대한 특별한 기록을 우리에게 제시하는지를 보게 된다.대환란 동안 땅위에 있는 주님의 백성들은 강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에 주님의 간증을 위해 모세와 엘리야를 주권적으로 간직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네로도 간직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와엘리야처럼 즐거운 곳에 있지않다.네로는 무저갱에 있고 유다는 자기곳에 있다. 비록 나는 이 장소가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이 기쁨의 장소는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그 두사람은 주님의 적극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간직되었고. 다른 두사람은 그분의 소극적인 목적을 위해 간직되었다.수십세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예비하셨다.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한다. 모세와 엘리야는 두 증인이기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의도 적으로 간직되었다. 어느날 사탄이 땅으로 내어쫓기어 사탄의 능력을 행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할 적그리스도 안에서 체현 된 후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강화하기 위해 이 두 증인 들을 다시 보내실 것이다.

그때에 사탄은 유다를 호출하여 전에 했던 것처럼 자기을 위해 일하게 할것이다. 네로의 영이 무저갱에서 나와 적 그리스도가 되는 것처럼 유다도 자기곳에거 나와 거짓 선지자가 될것이다. 그러므로 삼년반의 대환란동안 특별한 네 사람 모세 엘리야 네로 유다 가 이땅위에 있게 될것이다. 거짓 선지자인 유다는 어린양처럼 생겼지만 용처럼 말할것이다. 엘리야처람 하늘로부터 불이 땅에 내려오게 하는 기적도 행한다. 거짓 선지자가 큰 표적을 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짜 선지자가 누구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말 재주에 관한 유다는 모세와 엘리야보다 못할것 같지 않다.왜냐하면 그의 말은 용의 말과 비슷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설교자나 사역자가 기적의 방식으로 무엇을 행할 수 있나 주의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어떤류의 생명을 가졌는지 점검 해야한다.표적을 추구하는 대신 우리는 생명의 길 안에서 그리스도를 관심 해야한다.기적을 기대하지 말고 생명을 주의 해야한다.거짓 선지자인 유다가 나타날때 그는 그가 행하는 표적으로 사람들을 속일것이다.

적그리스도를 위해 일함(거짓선지자의 원칙)
거짓선지자인 가룟유다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곧 적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할것이다.나는 왜 유다가 적그리스도와 함께 불못에 들어갈 정도로 자신을 그에게 파는지 전혀 이해 할 수 가 없다.사탄도 적그리스도도 유다에게 아무것도 약속해 주지 않을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는 자기 자신을 꺼리낌없이 팔 정도로 어리석은가. 과거에 사탄이 유다를 통제 했던것처럼 그는 다시 한번 유다를 통제 할것이다. 아마 이것이 자신을 적 그리스도에게 파는 이유일 것이다.비록 우리중에 누구도 유다와 같지는 않지만 유다의 원칙안에 있다.

우리 역시 사탄에게 아무댓가 없이 자신을 사탄에게 팔지도 모른다.우리는 자주 예수님을 배뱐하거나 교회 생활에 손상을 주었었다. 우리는 주의 회복을 좌절시키는 어떤 일들도 행했었다. 지난 14년동안 미국에서 나는 주님의 회복을 손상시키고 나서 결국에는 아무런 댓가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몇번 보아왔다. 그들의 행동은 사탄이 그들의 천연적인 존재를 사로잡은 사실의 결과였다.

사탄이 우리의 천연적인 존재 안으로 들어와 어떤 부분들을 차지할때 우리는 아무 댓가 없이 팔아버리고 만다.이것이 유다의 원칙인 동시에 거짓 선지자의 원칙이다. 사탄이 거짓 선지자에게 그의 능력을 줄뿐 아니라 적그리스도도 그를 완전히 신임한다.이런 연합으로 인해 거짓 선지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첫번째 짐승을 위한 형상을 만들게 함
계 13:14.짐승 앞에서 행하도록 주어진 그 기적들을 통하여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칼을 맞고도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형상을 만들라고 땅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하더라. 라고 말한다.그는 사람들이 짐승의 형상을 만드는데 동의하고 그를 경배하게 될 정도로 사람들을 속일것이다.

역대로 사람들은 그들의 영웅들의 형상을 세우기를 좋아해 왔다.심지어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어떤 영웅들의 형상을 만든다. 이모든것은 거짓 선지자가 적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를 예시해준다.거짓선지자는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하나의 우상으로 세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형상은 우상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경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말이 옳다해도 원칙적으로 영웅숭배는 우상숭배이다.십계명은 하나님외에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만일 당신이 어떤 목적으로 형상을 만들던지 사람들은 당대나 후대에 가서 결국 그것을 경배할것이다.

계13:15절은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형상에게 생기를주고 그 짐승의 형상으로 말하게 하고”라고 말한다. 여기서 거짓선지자가 우상에게 생기를 주고 그우상이 실제로 살아날것이다. 인간이 만든우상은 말하지 못하지만 이 마지막 우상은 산 형상처럼 말 할수있게 될것이다.이것은 이땅의 거민들에게 깜짝 놀랄 만한 표적이므로 그들로 적그리스도의 형상에게 경배하게 할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는 많는 것을 만들수 있지만 자기들이 만든 어떤 것에도 호흡을 넣어줄 수 없다. 그러나 유다가 이렇게 할수있는 날이 오고 있다. 누가 적그리스도나 그의 형상을 경배하는 데서 자신을 지킬수 있겠는가 13장 8절은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이들만이 적 그리스도와 그의 형상을 경배하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심지어 자기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그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할 것이다. 그결과 상당히 많은 이들이 순교할 것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2 (무저갱.열뿔.일곱머라).

계시록 9장11절. 메뚜기들을 다스리는 왕이 있으니 곧 무저갱의 천사입니다. 그이 이름은 히브리어로 아바돈이고 헬라어로 아볼루온 입니다.
계시록 11장7절.그들이 증언을 마칠때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계시록 17장 8절.그대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지만 장차 무저갱에서 올라와서 멸망하여 버릴 것입니다.

무저갱
위 구절 들은 적 그리스도가 깊은 수직 갱인 무저갱의 사자이고. 무저갱에서 올라 온다고 말해준다.그러나 계13장1절과 다니엘서 7장3절에서는 적그리스도가 바다에서 올라 올 것이라고 말한다. 적 그리스도가 무저갱과 바다에서 올라 온다는 것은 바다가 무저갱의 입구라는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무저갱은 땅의 심장부에 있고.(롬 10:7.마12:40) 바다는 땅위에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 9장 11절은 무저갱의 사자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아볼루온이라고 말한다.아바돈은 파멸을 뜻하고 아볼루온은 파괴자라는 뜻이다.적그리스도는 파괴자인 동시에 파멸일 것이다.

열뿔
계시록 13장1절은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라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 고 말한다. 모든것을 포함한 짐승에게 열뿔과 일곱머리가 있음을 본다.
계시록12장3절은 하늘에 또 다른 표징이 보였습니다. 큰 붉은 용 한마리가 있는데 일곱머리와 열 뿔을 가졌고.라고 말한다. 짐승과 용의 머리가 동일하게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다는 것은 장차 올 적 그리스도가 사탄과 하나일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열 뿔은 무엇인가.그것은 열뿔위에 있는 열왕관에 의해 상징되고 있는 17장12절의 열 왕들이다. 둘째로 그것은 다니엘 2장 42절부터 44절 까지에서 거대한 형상의 열발가락으로 상징되는 열 왕국들이다.
계 17:12-13 또 네가 보던 열뿔은 열왕이니 아직 왕국을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왕 같은 권세를 한시간 동안 받으리라 이들이 한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대환난 전에 소생된 로마제국에서 열왕이 일으켜질 것이다.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그분의 백성들을 핍박하는데 있어서 적 그리스도와 하나될것이다. 열왕은 한시간 안에 짐승과 더불어 왕국을 받을것이다. 이것은 기적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유럽공동체 E.C.를 여기서 언급된 열 왕국이 아닌가 하여 궁굼하게 여기고 있다.이러한 견해는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왜냐하면 이 왕들은 한시간 이내에 그들의 왕국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전에는 아무도 그들이 누군지 모를 것이다. 갑자기 한시간 내에 그들은 모두 왕국을 받을 것이다. 이왕들은 그처럼 짧은 시간 내에 권세를 얻게 될것이다.이것은 사탄이 행한 기적일 것이며 사람들에게 경악스럽게 닥쳐올 것이다. 이 열왕들은 적그리스도와 함께 어린 양으로 더불어 직접 전쟁을 할것이다.(17장14절) 여기의 전쟁은 19장에 언급된 아마겟돈 전쟁이다.

일곱머리
“계:17장9-10절. 여기에 지혜로운 생각이 필요합니다.일곱머리는 그 여자가 앉아 있는 일곱산이며.또한 일곱왕입니다. 다섯은 넘어졌고 하나는 지금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가 오면 반드시 잠시동안 머물 것입니다.”
일곱 머리는 짐승의 일곱머리 위에 있는 일곱 왕관으로 상징되는 로마제국의 일곱 황제들이다. 로마제국에는 도합 열두명의 황제들이 있었지만 계시록의 예언에는 오직 일곱명만 언급된다. 다른 다섯명은 포함되지않는다. 적 그리스도는 열세번째가 될것이다. 첫번째는 1. 아우구스투스(BC 27-AD.14) . 2.티베리우스(14-37). 3 칼리굴라(37-41암살).4 클라우디우스(41-54암살).5.네로(54-68자살).

여섯번째는 요한 계시록을 쓸당시의 황제였던 도미티안(81-96암살) 이었다. 처음다섯은 망하였다. 그들은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기 전에 살해당하거나 자살하여없어졌고. 이책이 기록될 당시 도미티안는 생존하고있었으므로 “있고” 라고 말했다. 적 그리스도가 될 7번째 황제는 그 당시 아직 이르지 않았다.”그가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남아 있으리라.”
장차 소생된 로마제국에서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인데 그가 7 번째 로마황제가 될것인데 그는 살해을 당하고 네로의 영이 무저갱에서 플려나와 일곱번째의 황제의 몸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그가 소생되어 여덟번째 황제가 될것이다.
11절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짐승은 또한 여덟째 왕이니 일곱중에 속한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라고 말한다. 적 그리스도는 장차 올 일곱 번째 황제 일것이다. 그런데 그는 또한 여덟째 왕이다. 비록 적 그리스도가 여덟번째 이긴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일곱번째 황제에 속하고 다섯 번째 황제의 일부분일 것이다.

계 13장 3절에 따라 적 그리스도는 살해된 다음 소생 될것이다.”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8절”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그의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후 소생될때 온 땅은 경탄 하면서 그를 따를 것이다.적 그리스도는 마지막 칠년의 중간쯤에 아마도 사탄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쫓기는 때와 동일한 시기쯤에 살해될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계시록 9장 1절에 따라 무저갱의 사자가 사탄이 별로서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직후에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때쯤에 로마제국의 일곱번째 황제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

마지막 칠년의 전반부 동안에 일곱 번째 황제가 나타날 것이다.그가 살해되고 소생한뒤 칠년의 중간 쯤에 여덟 번째 황제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삼년 반동안에는 소생된 일곱번째 황제 일것이며.후 삼년 반동안에는 적 그리스도로서 여덟번째 황제가 될것이다. 일곱번째 황제는 유대인들과 칠년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할 것이며.여덟번때 황제는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자신을 하나님으로 높일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두 사람일 것이다. 그가 일곱번째 황제일 동안에는 별로 놀랍지도 않고 매력적 이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암살되고 소생된 후에는 놀랄만 한 인물이 될 것이다.

혹자는 어떻게 소생한 적 그리스도가 네로의 영을 소유하리라는 것을 아는지 궁금해 할것이다. 앞서간 몇몇교사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네로 황제가 죽은 후 그의 영이 장래의 어떤소용을 위해 무저갱으로 갔음을 보게 되었다. 어떤시점에 이를때 그의 영은 무저갱에서 플려나올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네로가 무저갱에서 출현할 것임을 명확하게 지적해 주고있다. 그의 이름은 666 이란 수를 갖게 될것이다. 로마 문자의 숫자 계산에 의하면 네로 가이사라는 이름의 숫자는 666 이다. 이것은 장차올 적 그리스도가 네로 황제일 것임을 가리킨다.

계시록은 로마제국 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에 요한은 네로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숫자로 그것을 지칭했다.그러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우리는 666이란 숫자가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확정 할수있다.
계 9:1-5절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나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별하나를 보았습니다. 그에게는 무저갱의 열쇠가 주어졌습니다.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덩이에서 연기가 올라왔는데 큰 용광로의 연기와 같았으며 그 구덩이의 연기 때문에 해와 공중이 어두워 졌으며.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 부터 땅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플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니라. 그러나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달동안 괴롭게만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다섯째 나팔을 불자 사탄은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쥘것이다.사탄은 무저갱의 열쇠를 사용하여 마귀에게 사로잡힌 황충들을 플어보낼것이다. 이 황충들이 플려나올 시각에 아마도 네로의 영이 그들과 함께 플려나올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함께 무저갱에서 나올 것이며.적그리스도는 황충들의 군대의 왕이 될것이다. 황충들은 다섯달동안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용인 사탄과 짐승인 적 그리스도가 함께 합작해서 하나님이 그분 자신을 위해 창조한 사람을 괴롭히고 해칠 것이다.이것이 다섯째 나팔이요.세 재앙중 첫번째의 것이며 대환란의 시작일것이다.

죄의 사람
살후 2:3-4. 여러분은 어느누구에게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먼저 변절하는 일이 생기고 그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이며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 과 사람의 경배를 받는 모든 대상보다 자기를높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를 내세우며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할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후서를썼을때 그는 다니엘서에 대한 그의 지식으로 부터 죄의 사람에 관해 깊은 인상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다니엘서 8장과11장에 의하면 적 그리스도는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칭할것이다.그는 심히 죄가 가득하고 불법적이기 때문에 멸망의 아들일것이다. 그는 어린양에게 참패당하고 사로잡혀 산채로 불못안으로 내 던져질 것이다. 따라서 이 짧은 부분의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적그리스도에 대한 세가지 명칭 – 죄의 사람. 불법의 사람. 멸망의 아들을 제시하고있다. 우리는 적 그리스도가 네번째 짐승. 작은뿔. 왕. 모든것을 포함한짐승.무저갱의 사자.죄의 사람임을 보았다.


종교개혁 후 독일의 발전

슈파이어 회의와 아우구스 브르크 회의
1521년 교황의 재촉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5세는 보름스에서 회의를 개최했으며. 루터에게 출석하여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보름스회의가 있은 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5세는 마르틴 루터를 이단자로 판정하고 그의 모든 저작을 없애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외국과의 전쟁이 빈번하여 그 명령은 철저하게 이행되지 못했다. 독일 남부 의 제후들은 모두 천주교에 충성했고 북부의 제후들은 루터를 지지했다.

1526년에 제1차 슈파이어에서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는 개혁파 제후들의 회의였다. 회의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에 제후들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할 수 있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 때문에 보름스에서 루터에게 내린 처벌은 잠시 유보되었다.
1529년 제 2차 회의가 열렸다. 찰스 5세의 지지 아래 천주교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보름스에서의 왕명을 단호하게 관철하고 개혁파의 지역을 천주교화 하려고 하였다. 루터파는 루터 교리 배척에 대항하여 신랄하게 항의 하였다. 이 항의로 기독교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나뉘게 되었고.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1530년 찰스 5세가 국경을 침범한 오스만 터키 군대를 격파한 후에 신성 로마제국내의 종교 문제를 다시 자세하게 파악하려고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서 신앙을 진술하도록 했다. 루터는 당시 불법자의 신분으로 제재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멜란히톤을 대표로 출석하게 하였다. 멜란히톤는 회의에서 그 유명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를 발표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문헌이 되었을 뿐아니라 후에 루터파의 신앙을 성명하는 표준이 되었다.

로마천주교 측은 즉시 그 성명을 반박하는 반박문을 발표하였으며 찰스5세에게 그것을 금지 해줄것을 요구함으로 양쪽 협상은 다시 깨졌다.루터를 지지한 제후들은 찰스5세가 군대로 진압을 할까 두려워서 1531년 2월말에 슈말칼덴 동맹을 형성하게 되었다.그때 오스만 군대가 다시 국경을 침범하여 쌍방은 휴전을 체결하고 협력하여 외적을 막기로 하였다.

제2차 슈파이어 회의가 끝난후 헤센왕 필립(독일의 오래된 명문 가문중 하나이다) 은 루터와 쯔빙글리 그리고 다른 개혁자들을 마르부르크의 협상에 초청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교리의 관점이 달라서 합일하려는 헤센공의 목표는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1544년 찰스5세는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고 쌍방이 국경내에 개신교를 제거할 것을 동의 하였다.1545년 교황은 십자군을 일으켰는데 십자군에 가입하는 사람마다.모두 죄를 용서 받을수 있다고 했으며 찰스 5세 에게 군자금을 원조 했다.

1546년 2월 18일 새벽 루터는 그가 태어난 작센주 아이스레벤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비텐부르크성당에 안장되었다.개혁파에 속한 제후들의 슈말칼덴 동맹이 실패하고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헤센 공 필립은 갇히게 되었으며. 찰스5세는 개혁파에 속한 제후들을 상대로 이겼다. 이로서 종교개혁 운동의 불길이 점점 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천주교와 찰스5세는 결탁하여 개신교룰 분쇄 하였으나.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더니 후에는 서로 상극의 관계가 되었다.

더이상 내전이 격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찰스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회의를 통해 잠정적으로 개신교를 어느정도 허용해주었다.그러나 개신교 제후들은 잠정적 협정을 받아 들이지 않았고 1552년 프랑스왕 앙리2세와 결탁하여 찰스의 군대에 대항하였다.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회의 에서 대 타협이 이루어짐으로서 독일은 카토릭이아닌 루터교가 성립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지배자의 신앙이 곧 지배지의 신앙”이라는 원칙이 세워졌다.각 제후들은 하나의 신앙을 선택해야 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쯔빙글리파나 칼빈파. 그리고 소위 급진파는 배제 되었다,

마흔두달간 활동함
계13:5절 또한 용이 짐승에게 — 마흔 두달동안 활동할 권세를 주었읍니다.
계 11:2절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그 거룩한 성을 마흔두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계 12:4. 그러나 그 여자는—거기에서 뱀의 낯을 피하여 한때와 두때와 반때 동안 음식을 공급 받았읍니다.
계 12:6. 그여자가 광야로 피신하여—천이백육십일 동안 그 여자에게 음식을 공급할수 있도록—.
계 11:3절 내가 나의 두증인을 시켜 천이백육십일 동안 베옷을 입고 예언하게 할 것이다.

위 구절들은 대환난 때를 말한다,(마24:21) 이시대 끝에 적 그리스도는 칠년동안 이스라엘 나라와 언약을 맺을 것이다.(단 9:27) 언약을 맺은다음 그는 삼년반후에 언약을 파기 할 것이며 삼년반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유대인의 경배와섬김을 종결시키고 성도들을 핍박하며 (13:7) 거룩한 성을 파괴 할것이다.(11:2) 많은 이들의 생각과 반대로 대환난은 7년동안 지속되는 것이 아니고 삼년반 마흔두달,또는 일천이백육십일 동안 지속 될것이다.

적 그리스도가 살해되고 소생되기 전에 이기는 자들은 하늘로 휴거될 것이다.이기는 자들이 하늘에 도착할때 그들은 사탄을 땅으로 내쫓으라고 명할것이다. 이말을 하자마자 천사장 미가엘이 앞장서서 사탄과 싸울것이며 이때를 즈음하여 일곱번째 황제인 적그리스도가 살해 될 것이다. 사탄이 땅으로 내려올때 네로의 영이 무저갱에서 플려나와 암살된 일곱번째 황제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를 소생시켜 여덟번째 황제가 되게 할것이다. 이 모든일이 발생되고 있을때 지상의 모든이들은 휴거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며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그것에 관해 간증할 것이다.

그때 소생된 여덟번째 황제가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것보다 더큰일 을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땅의 거민들을 속이기 위해 큰것들을 말할 것이다. 계 13장5절은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6절은 “또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모독하되 그이 이름과 그의 장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 이것은 그가 하나님과 그분의 처소와 하나님의 처소로 휴거된 이기는 자들을 거스려 말하는 참람한 것일 것이다. 만일 이시기 동안 땅위에 남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모든것에 관해 알고있다면 그들은 크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적 그리스도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

계 13장7절: 또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이기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성도들은 12장17절에 있는 여자의 남은 자손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안에 믿는이들로 구성되어 있다.이것은 대환란 가운데 어느정도의 믿는 이들이 여전히 땅위에 있게 될 것임을 입증해 준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것이다.15장과 20장이 가리키듯이 이시기동안 많은 사람들이 순교할것이다.

두 증인과 싸워서 그들을 죽임
적 그리스도는 또한 두 증인과 싸워서 그들을 죽일 것이다.우리의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약함을 아신다.그러므로 이기는 자들이 휴거되고 나서 마지막 삼년반 동안에 하나님은 그분의 핍박받는 백성들을 강화시키기 위해 모세와 엘리야를 되돌려 보내실 것이다. 적 그리스도는 그 두 증인 과 싸워서 그들을 죽일것이다. 그러나 11장11절에 계시하듯이 삼일 반후에 그 두증인은 부활되어 하늘로 휴거될것이다.

변절한 로마교회를 미워하여 황폐케하고 불로 태워버림
적그리스도는 또한 로마 교회로 방향을 돌려 그녀을 미워하고. 황폐케 만들 것이다. 계시록 17장16절은 열왕들인 열뿔이 그 음녀를 미워하고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하고 그녀의 육체를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고 말한다, 적 그리스도가 소생된후 그는 유대교와 천주교를 포함한 모든 류의 종교를 핍박할 것이다. 종국에 가서 적 그리스도는 주님과 싸워서 그분에게 패배당 할것이다. 주 예수님은 그를 멸하여 불못에 던지실 것이다.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리스도는 적 그리스도와 거짓선지자를 패배 시키고 그들을 산채로 불못에 던지실 것이다.이것이 적 그리스도의 최후의 운명일 것이다



교회사 후기

간추린2000년교회사

2000년 교회사를 통해 우리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성경안에 있는 신앙과 계시를 위해 피와 눈물의 대가를 지불한 것을 볼수있다. 그들은 역사가운데 향기롭고 달콤한 증인들이 되었다.이땅에서 교회가 지나온 길은 피와 눈물의 역사라고 말할수있다. 초기의 박해로 부터 종교개혁까지 종교개혁부터 연합형제단 까지.특히 교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얀 후스와 보헤미안 형제단.모라비안 형제회와 진젠돌프. 마르틴루터. 칼빈. 쯔빙글리. 존웨슬리. 영국의 형제회.속생명파 . 근대 성령의 운행하심의 두드러진 특징은 내적 생명의 회복이다.

페네롱신부. 귀용부인부터 앤드류머레이.펜 루이스 또한 마가렛바버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내적 생명을 회복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진리와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신 진리를 보아야 한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안에 사시는 것에 대한 합당한 이해와 그리스도를 누리고 체험하는 것과 합당한 교회생활의 실행이다.

그러나 이모든 귀한 항목들 자체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수없다. 반드시 실재가 되어야한다.20세기에 이르러서 워치만니와 위트니스리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준 계시와 이상은 앞선 믿음의 선진들에 의해 밣혀진 진리를 전진시켰으며 집대성 되었다.. 그내용은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의 어깨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와 계시가 우리를 통해 더 전진하여 실행되고 실천하여 완전한데 이르게 해야한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고자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성경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시며 사람이 그 생명을 얻을 뿐아니라 그 생명으로 그리스도안에 살고 그 생명을 통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으로건축되고 새 예루살렘이되게 하신다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시고 그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시며 생명주는 영은 일곱배로 강화된 영이 되심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여 새 예루살렘을 완결하는 것이다.

이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다. 선진들의 피의 댓가로 회복된 진리와 계시들이 아무 손상없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었을 뿐아니라. 전진되었으며 실행 가능하게 되었다. 사탄은 언제나 파괴하는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의 완성을 저지하는 듯 했으나 결국 이 땅에서 한 무리의 이기는 자들 을 통해 죽어있고 타락한 상황을 이기실 것이고 묵묵히 그분의 교회를 지키고 예비하실 것이다. 이기는 이들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한다. 이기는 이들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건축될수없고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부를 얻기위해 다시 돌아오실수없다. 이기는 이들은 주님을 위해 회복을 위해 몸을 위해 이기는 이들이 되도록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대가를 지불할것이다.


감리교 운동이 일어남
봉사에 있어서 존 웨슬리는 조직력과 관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믿는이들이 구원받은 후에 한걸음 더 나아가 반드시 온전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유념했다. 그는 부흥된 믿는이들을 온전케하기 위해 1739년에 첫번째의 감리회 조직을 설립했다. 이조직은(Society) 당시에 보편적인 제도로서 믿는이들을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었다. 그리고 웨슬리는 정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하면서 감찰과 규율의 집행을 책임졌다.

1742년에는 평신도들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 조직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증가했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런던에서 1차 연합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후 몇개의 교구로 나누어 전도사들이 순회하며 돌보도록 하였다. 이 감리회단이 크게 성장했지만 존 웨스리는 성공회를 떠날 뜻이 없었고 오히려 국교회의 일부로 여겨지길 원했다. 그러나 감리교 운동이 독립된 체제를 갖춘 단체로 발전했고.성공회의 신학과 관점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 그둘은 나뉘게 되었다.

또한 존 웨슬리와 휘트필드는 선택과 구원의 진리에 관하여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휘트필드는 칼빈파의 관점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 받는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은혜를 베픈 것으로 여겼다. 그반면에 웨슬리는 성공회의 영향을 받아 사람의 행위를 중시했던 알미니안파의 관점을 받아들인 존 웨슬리를 정죄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이 양면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진리에는 두 방면이 있는데 한면으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의 면이 있고 다른 방면으로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한 것이다. 존 웨슬리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 하였다.그러므로 휘트필드는 칼빈파 감리회를 설립하였고, 존 웨슬리는 알미니안파 감리회를 설립하여 나뉘어 지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매우 근면하게 일 하였다. 45년 동안 그의 선교여행은 25만 마일을 초과했고 그 발자취는 영국 독일 네델란드 등에 이르렀으며 그가 전한 메세지 만도 4만여편이 되었다. 그가 죽을때 감리교는 영국에서 이미 8만명의 회중이 있었고 미국에서도 6만명이 넘었다. 오늘날 감리교에는 전세계에 4천만명의 믿는 이들이 있다.이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첫째.둘째가는 복음주의 단체이다.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웨슬리는 비교적 칼빈파에 동조하였다. 찰스웨슬리는 형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아이작 왓츠. 패니 크로스비와 함께 교회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일생동안 찰스웨슬리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며 부르는 7천여 곡의 찬송가를 창작했다. “천사노래들려온다”. “천만의 입이 있어도” “어디부터 말하리오” “주 예수 승리의 사랑” “고요히 감춘 근원인 주님은” “예수내 사랑” 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찬송가이다.

찰스웨슬리는 모라비안형제회의 영향을 많이받아 죽기전까지 모라비안교회와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었다. 18세기 감리교 운동이 가져온 신선함과 부흥은 그 당시 부패와 흑암중에 있던 영국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은 공의를 추구하고 악습을 버리며 빈민을 구제하는 사회 혁신의 역량이 되었다. 이러한 역량은 훗날 영국의 사법제도에 영향을 미쳐서 유혈혁명을 피하게 했고 또한 영국의 각 복음주의 단체가 전반적으로 부흥되게 했다.이것은 18세기 말 19세기 초 대대적인 해외 선교 운동의 견고한 기초가 되었다


존 웨슬리의 생애. [1703년 ~ 1791년 ]

18세기초 영국의 전반적인 영적인 상황과 사회 분위기는 매우 음울했다. 그 주된원인은 바로 전 세기에 있었던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학살때문이었다. 더욱이 영국은 내전이 막 끝난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란의 염증을 느낀 백성들은 오직 안정되고 평온한 생활만을 요구했고 다른 일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외적으로 유럽대륙은 30년 전쟁과 네델란드이 독립운동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신교 와 구교 양진영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 이었다. 천주교의 부패는 이미 세상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루터의 개혁도 생명과 실재가 없는 이론과 가르침으로 떨어져 공식화된 루터주의가 되었다,성공회의 성직자들의 영적상태는 보편적으로 하락했는데 특히 술을 마시는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사회적으로 영국은 산업혁명후 인구집중과 공업화로 사회병패가 날로 심각해졌다.상류층은 부와 오락과 귀족들만의 종교를 소유하고 누렸으며 착취 당하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하류층은 삶의 아무런 소망도없었다.이러한 상황하에 개혁과 부흥의 필요가 날로 증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옥스포드 대학에서 존과찰스웨슬리 두형제와 조지 휘트필드라는 젊은이들을 얻었고. 그들은 영적인 불씨가 되었으며. 감리교 운동의 부흥이라는 불길을 가져왔다.웨슬리 두형제는 영국에 이전까지 없었던 큰 부흥을 가져왔다.이러한 부흥은 영국에 영향을 미쳤을뿐아니라.전세계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이들 두형제는 독일의 진젠돌프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독일 경건파노선의 연속이라고 말할수있다,

1703년 존 웨슬리는 링컨주 엡워스에서 새무얼과수 잔나 사이에서 열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엡워스지방의 성공회 교구 목사였고. 어머니는 경건하고 비범한 여성으로서 열아홉명의 자녀들을 낳아 엄격하게 가르쳤다.자녀중 8명은 유아기에 죽었고 존 웨슬리는 15번째 찰스웨슬리는18전째 자녀였다.
1720년 존웨슬리는 옥스포드의 크라이스트 처치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졸업후에는 링컨대학에 들어가 연구했으며 22세때 성공회 목사로 임명되었다.그의 형제 찰스웨슬리도 1726년에 크라이스트처치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며 성결를 추구하는 동호회를 만들었다.그리고 존 웨슬리 이 동호회의 인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엄격하게 자신을 통제하고 기꺼이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삶을 살았다.웨슬리와 그의 동급생들은 성결회(Holy Club) 모임을 결성하였으므로 주변사람들이 그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메소디스트 (엄격한) 종교주의자라고 불렀다. 이것은 이상적인 영적생활에 대한 그들의 추구를 묘사한것이다.

존 웨슬리는 졸업한뒤 성결을위해 자신를 드렸지만 자기자신은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아직 분명하지 못했다. 어느날 그는 패터레인집회에 참석하여 진젠돌프에게서온 한형제를 만났는데. 그형제는 당신이 비록 구원에대해서 분명하지 않아도 분명해 질때까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십시요라고 그에게 말하였다.

존 웨슬리는1738년 5월24일자 일기에서 1738년 모라비안 형제회 피터뵐러의 도움으로 거룩함이나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받을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5월24일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한교회 예배당에 참석하였는데 한 평신도가 마르틴루터의 로마서강해 서문을 읽는것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새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시작이었다. 3주후에 요한 웨슬리는 독일로 건너가 헤른후트를 방문하여 진젠돌프를 만났다.


조지 휘트필드
조지휘트필드는 매우 뛰어난 전도사였다.그는 어릴적 가정형편이어려워 지인의 도움으로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갔고 일하면서 공부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웨슬리형제들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홀리클럽에 가입하였다.조지 휘트피드의 강한감동을 주는 설교는 보수파의 불만을 야기했고. 결국 많은 교회들이 그를 거절했다.

1730년 휘트필드는 존 웨슬리와 함께 선교를 시작하였는데.그가 복음을 전할때 남자들이 큰소리로 울정도로 매우 강한 역사가 있었다고 한다. 단 한마디의 말만해고 그들이 감동하여 뛸 정도로 휘트필드는 위대한 복음전파자 였다고 한다.1739년 2월 휘트필드와 존 웨슬리는 킹스우드에서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수천명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믿었다. 그의 말을 들은 광부들의 검은얼굴에는 두줄기의 눈물이 하얀 두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고 한다.

처음에 웨슬리는 야외에서 설교하는 것을 주저하였다.나중에 그는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야외로 나가 수만의 믿는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그당시의 성공회는 성당안에서만 말씀을 전할수있고. 성당을 떠나서는 말씀을 전할수없다고 말하였다.그런데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당 밖으로 나갔다.

1739년 5월 존 웨슬리가 야외에서 2만명에게 말씀을 전할때 그의 목소리는 모든사람이 들을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비록 존 웨슬리가 전한복음은 휘트필드 보다설교가 뛰어나지 못했지만 웨슬레가 전한 복음은 성령의 능력이 가득 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

웨슬리 형제와 휘트필드의 수고와 전도로 잉글랜드 스코트랜드 아일랜드 각지에 복음이 전파되어 영국복음의 대 부흥을 가져왔다. 1791년 그가 죽기까지 45년동안 북쪽에서 부터 남쪽에 이르기 까지 영국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영향은 18세기동안 영국역사상 없었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교회사(17세기 경건주의 운동)
30년 전쟁 후 독일은 정식으로 개신교 지역이 되었으나 교회가 점차 국교회되자 정부의 간섭과 관여를 벗어날 수 없었다.루터 자신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주관적인 체험을 갖는 것을 중요시 하였으자 점차로 체험보다는 교의를 강조하는 멜란히톤의 조례식 신앙으로 대치되는 스콜라저 루터교가 발전하였다.

멜란히톤의 조례는 명목상으로는 성경를 근거로 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진부하고 융통성이 없고 정체된 교리 해석이었다. 백년이란 짧은기간 내에 루터교는 원래 주의 했던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한 주관적인 믿음에 서 다시 죽은 교리와 의식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더 깊고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추구하는 한무리의 개혁자들이 일어났다. 생명의 체험을 중요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의 유럽에 보편적으로 전개 되었다.그들은 경건한 생활을 추구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경건파라고 불렀다.

이러한 믿는 이들은 루터교를 뒤집거나 떠난것이 아니라 루터가 주장한 이상을 하나하나 실행해 냈다. 그들은 자주 가정에서 함께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 하였다. 집회에서는 한 사람만 말하고 다른사람들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원칙 아래서 함께 누림을 나누었다. 그들은 성겅 읽기를 다만 지식만이 아닌 생명과 양육을 얻는데 중점을 두었다. 성경은 반드시 실재생활가운데 적용해야 하며 성결하고 도덕적인 생활을 살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믿는이들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주관적인 체험과 그리스도가 그들의 중심이 되며 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슈패너와 프랑케
독일의 작센주 할레는 문화와 학술의 중요한 도시이다.인구는 약 27만명이며 이곳에는 독일에서 가장오래된 건축물 과 죽은 루터의 얼굴상.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성경학교가 있다.18세기 초 이곳은 하나님께서 회복의 일을한 중요한 곳이었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계시록 3장에서 사데교회는 종교개혁이후의 기독교를 말한다고 볼수있다.주님은 사데교회에 대하여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너는 일깨워 그남은바 죽게 된것을 굳게하라 내 하나님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다. 개신교가 천주교를 정복하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것의 진리를 회복한것은 교회에게 생기를 가져다 주었다.그러나 1세기도 못되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었던 이러한 움직임은 이름만 남고 실상은 죽은 상태로 떨어졌다. 새로 일어난 국교회는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벗어나지 못하고 성직자의 목회활동은 공직같이 되어버렸다.

믿는이들의 영성은 타락하고 루터가 주장했던 의롭게 된다는 진리는 루터 종파주의가 되어버렸다.루터교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한 주관적인 믿음에서 다시 죽은교리와 의식으로 떨어졌다.믿는이들은 단지 세례를 받고 성례와 교의를 지키며 시간에맞추어 예배를 드리면 좋은 신도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깊고 의미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한무리의 믿는이들이 일어났다.그들은 믿음의실행과 거듭남의 체험을 주의했고. 성경을 읽는것을 중시하며 살아있고 경건한 생활을 추구했다. 이운동의 창시자인 슈패너는 1635년에 태어났다. 젊었을때 그는 제네바에서 공부를하였는데 그곳에서 영적인 사람인 라바디를 만났다. 라바디는 종교개혁의 공허함을 깊이느끼고 성령의 능력과 믿는이들의 기능을 회복하는데 힘을쏟았으며. 믿는이들이 가정에서 모이는것을 격려했다. 슈패너는 그의 영향을 받고 독일에서 그와 같은 진리를 전하기 시작했다.1675년 그는 경건한생활에 대한 책을 출판하여 루터파를 소생시키기위한
5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째 예배당에서 목사가 전하는 말만 의지하지 말고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고.둘째 믿는이들이 모두 제사장에 관한 진리와 실재를 회복하는것이고 셋째는 교리뿐아니라 믿음과 사랑이있어야한다.넷째 신학적인 쟁론을 줄이고 회개을 통해 진정한 경건의 생활을 사는것이다.다섯째는 신학교육의 개혁을 강조하고 주관적인 체험과 경건생활를 주의하고 공허한 신학적교리만 주의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슈패너는 가정집회에서 믿는이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누림을 나누고.사도시대와 같이 모든사람이 기능을 발휘하는 상호성적인 집회방식을 회복하기를 바랬다.슈패너의 개혁은 루터파 신학자들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그들은 슈패너가 지나치게 영적인수양을 중요시하고. 교의를 소홀이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슈패너의 개혁은 경건한생활을 추구하는 많은 믿는이들을 매혹시켜 17세기의 독일 기독교에 맑은 물을 주입하였다.

슈패너의 영향을 받는 많은사람들 가운데 청년강사 프랑케가 있었다.그는 1687년 주관적인 회개와 거듭남을 체험했다.후에 프랑케는 드레스덴에서 슈패너와 2개월동안 머물면서 경건주의를 완전히 받아들였다.그는 라이프찌히에 돌아온 뒤에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그러나 루터파의 선재후에게 불안한 마음을 일으켰고 선재후는 소그룹집회실행을 금하였다.1691년 브란덴브르크 선재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할레에 대학을 세웠다. 슈패너의 추천으로 프랑케는 할레의 그라우카에서 목회를 하였고.할레대학의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30년간의 그의영향으로 할레대학은 경건주의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그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교육기관을 창설 하였다.그가 세운고아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이 2000명에 달했고 130명의 고아들이 합당하게 돌봄을 받았다.진젠톨프도 이곳 할레에서 교육을 받았다.

독일 동남쪽 체코와폴란드 국경선지역에 작은 도시 헤른후트가 있는데 이뜻은 주님께서 지키심이란뜻이다.300년전 이곳에서 위대한 영적인 지도자 진젠돌프가 태어났다.그는 원래 귀족으로서 모라비안 형제회의 창시자였다.그와 그의 무리는 헤른후트에서 영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그들은 종파를 떠나 믿는이들이 유기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고 주님께서 하나되게 하신것을 회복하고 그 어떤 기독교 단체보다 더많은 해외선교사들을 보냈다. 또한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을 주는 이러한 교회생활을 이방인에게 복음으로 전파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진젠돌프
진젠돌프는 1700년에 태어났다.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몇주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어머니가 그를 헤른후트로 데리고 왔다.이곳은 귀족인 진젠돌프의 할머니가 살던곳이다.그의 할머니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매였으며 당시 독일의 경건파와 자주 왕래 하였었다.경건파의 지도자인 슈패너나 프랑케 를 집으로 초대해서 가정에서 집회를 가졌다.그러므로 진젠돌프는 어려서부터 경건파의 좋은 훈도를 받고 자랐다.

10살때 진젠돌프는 당시 경건주의운동의 중심지인 할레의 패다고기움에서 교육을 받았다.페다고기움을 졸업한 후에 진젠돌프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법률을 전공하였다. 대학 졸업후 진젠돌프는 학위 이수의일환으로 관례에 따라 유럽각지를 여행하였다.그는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관에서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님을 그린 그림을 보고 깊이 매료되었다. 그 그림에는 “보라 이사람을”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어낼때 한말이다. “나는 너를 위해 나는 모든것을 버렸지만. 너는 나를위해 무었을 버리겠느냐” 라는 글이 써있었다. 그는 자신를 위해고난받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너무도 깊은 감동을 받고 사로잡혀서 무어라 말할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생토록 주님을 위해 살것을 결심했다.

1721년5월에 진젠돌프는 고향 드레스덴에 돌아와 작센지방의 전문변호사가 되었다.그는 가정을 열어서 서로다른 계급의 귀족이나 평민들이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간증하고 찬송하도록 하였다.그리고 이듬해 4월에 자신의 영지에서 에르트무트와 결혼하였다. 두사람은 귀족 신분을 버리고 한마음과 한뜻으로 그리스도을 섬기기로 결심하였다.
1722년 진젠돌프는 외할머니에게서 베르테르스 도르프영지를 샀다.영지안에는 진젠돌프의성 과 400년의 역사를 가진 루터회 예배당이 있다.어느날 이 영지에 한무리의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모라비아에서 온 난민들이었다.그들의 대표자의 이름은 크리스티안 데이비드였다. 그들은 체코연합형제단의 후대 였다.모라비아는 체코 동부에 있다,그난민들은 그곳에서 100 여년동안 살다가 종교의 핍박을 피해 진젠돌프의 영지로 온 것이었다.


청교도 혁명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1세 때에 영국해군 제독이었다.1587년 프리머스 앞바다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퇴 시켰다.스페인의 무적 함대는 필립 2세의 지휘하에 있었는데 필립2세는 피의 메리 여왕의 남편이었다.메리의 통치 기간은 단지 6년 밖에 안되었다.드레이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궤멸시킴으로 이때 부터 세상에서의 천주교의 영향력을 정지시켰다고 말할 수 가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조카 메리의 아들인 스코트랜드 왕 제임스가 영국을 통치 하도록 유언하여 제임스1세는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왕위를 받았다.청교도들은 새로운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성공회의 조항을 수정하여 줄것을 바랬다.그때 제임스는 청교도들과 회의 하는것을 승낙하였고 1604년 햄프턴궁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했다.회의의 유일한 결론은 신약성경을 번역 하는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흠정역성경(킹 제임스역)이다.

그러나 제임스1세는 성공회의 조례들을 수정할 마음이 없었고.오히려 청교도들을 핍박하였기 때문에 일부 청교도들은 영국을 떠나 네델란드로 이주하였다. 제임스는 왕권 신수설을 주장하고 영국의 국내사정에 어두웠으므로 의회와 사사건건 대립하여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제임스1세가 죽은 후 제임스1세의 뒤를 이어 찰스1세가 영국의 왕위에 오르고 나서 독재와 학정은 더욱 심해졌고.청교도와 영국 국왕 사이의 투쟁은 갈수록 격렬해졌다.또한 찰스1세는 천주교로 복원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영국 국왕이었다.

찰스1세가 아르미니안파로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에서 성공회를 따르지 않는 신교도들을 핍박하자.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영국에서는 중산 계급이 성장함에 따라 절대왕정의 전제 정치를 공격하는 청교도들이 하원에서 큰 세력을 펼치고 있었다. 전제 정치를 대항해서 의회는 1628년 권리 청원을 가결하여 국민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찰스 1세는 이에 맞서 의회를 해산하고.전제 정치를
강화하여 의회의 승인도 없이 관세를 징수하고 헌금과 공체를 강제해서 응하지 않는자들를 투옥하였다.이 때문에 29년간 의회가 해산 되었다. 그 후 찰스1세는 성공회 정책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스코트랜드와의 전쟁비용을 마련 하고자 다시 의회를 소집하게 되었는데.이때 의회는 국왕의 전제 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리하여 1642년 의회 와의 불화로 인해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종교 투쟁으로부터 점점 정치 투쟁으로 변하였고 결국 17세기 중엽에 유혈 혁명을 촉발시켰다.

이 내란에서 의회파 지도자 크롬웰은 자영 농민을 중심으로 청교도 정신이 충만한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여 왕당파를 무찌르고. 크롬웰은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국을 세웠다. 이공화국은 약10년동안 지속되었다.그러나 크롬웰이 죽은뒤 찰스2세가 즉위하여 영국은 다시 군주 체제로 되돌아갔다.
의회주의자를 의회파(Roundheads) 이라고 불렀고. 교황주의자를 왕당파Cavaliers)라고 불렀다. 크롬웰은 의회파의 지도자로서 칼빈파에 속하였다. 칼빈파는 의회를 장악하고 의회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등을 제정하며.장로교 방식의 교회행정을 채택하였다. 올리버 크롬웰은 청교도로서 17세기에 매우 경건한 그리스도인 이었다.그는 평범한 출신이었으나 그가 국회에서 인도한 군대가 황실의 군대를 수차례 격퇴 시켰다. 이로서 그는 영국에서 매우 짧은 기간에 민주적이면서 왕실에 속하지 않은 정권을 세웠었다.

찰스1세는 크롬웰과의 4차례의 피의 전쟁에서 계속 패하고 말았다. 4년이 지난후 1646년 포로로 잡혔다.1649년 1월30일 의회파는 찰스1세국왕을 사형을 시켰다. 이것은 영국역사에서 처음있었던 일이었다. 교회사에서 크롬웰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가 로마 천주교회에게 장례식의 종을 쳤다고 볼수있다. 로마천주교가 영국에서 매장되고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도록 종지부를 찍었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고 한다.

사탄의 깊은 것들 (1)
그 여자는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고 손에는 금잔을 가졌는데, 그 금잔에는 가증한 것들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하였으며 그 여자의 이마에는 ‘비밀, 큰 바빌론,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계 17:4-5)

24절은 『그러나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고 말한다. 「깊은 것들」이란 에베소서 3장 18절의 깊이들을 뜻한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비밀스런 것들을 나타낸다. 로마 천주교는 많은 비밀들이나 깊은 교리들을 갖고 있다. 고난받는 교회에 대해서는 사탄의 회당이 있었고(2:9), 세상적인 교회에는 사탄의 왕좌가 있었으며(2:13), 변절한 교회 속에는 「사탄의 깊은 것들」이 있다. 회당의 종교, 사탄의 왕좌 밑에 있는 세상, 사탄에 속한 비밀들의 철학들은 모두 교회를 손상시키고 부패시키려고 사탄이 사용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교회는 사탄의 회당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으며, 마침내 교회는 세상적으로 되어 사탄이 거하며 그의 왕좌가 있는 곳에 거하고 있다. 이 모두가 원수의 간교함이다. 그것은 모두 사탄에게서 발원(發源)된다. 그러나 여기 네 번째 교회에는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단지 사탄의 회당, 사탄이 거하는 곳, 혹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의 문제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사탄은 교회 안으로 들어왔으며, 그 자신으로 교회를 적셔지게 했다. 변절한 교회에는 사탄의 깊은 것들 곧 사탄의 비밀스런 교훈들이 있다. 이것이 사탄적인 철학이다. 변절한 교회는 사탄에 속한 비밀들을 가르친다. 이것은 사탄의 깊숙한 사상 곧 사탄의 관념이 변절한 교회에 침투했음을 가리킨다. 결국 이 교회는 사탄의 체현이 된다.

합당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변절한 교회는 사탄의 체현이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내주하시지만, 사탄은 간교한 방법으로 변절한 교회에 내주한다. 사탄은 언제나 간교한 방법으로 행동한다. 그가 처음 사람에게 왔을 때 그는 아름다운 뱀의 모습으로 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었다. 사탄은 늘 좋은 모습을 취한다. 사탄이 「교회」를 그의 모습으로 입을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우리는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계의 참 상황임을 본다. 기독교계는 사탄의 도구가 되었다. 비록 그 안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다해도 실상 그 속에는 사탄 자신이 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이것을 보아야 한다. 사탄의 깊은 것들은 사탄적인 철학으로서 간교한 것이다. 변절한 교회 안에는 수많은 소위 비밀들이 있다. 이 악한 교회가 가르친 비밀들은 모두 사탄적인 철학들이다. 그들의 철학 중 하나는, 만일 당신이 어떤 것들을 성경 진리들 안에 첨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로우신 주님은 이것을 빵을 먹기 쉽게 만들기 위해 고운 가루 속에 넣는 누룩에 비유하셨다. 변절한 교회는 말하기를, 만일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갖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출생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마스(mass)」는 고운 가루에 더해진 누룩이다. 이것은 간교하며 사악하다.

만일 당신이 이 악한 여자가 사탄의 체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계시록 17장 4절과 5절을 살펴보라고 청하겠다. 4절은 『또 그 여자는 자주빛과 진홍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것들과 그녀의 음행의 부정한 것들이 가득하더라』고 말한다. 이 악한 여자는 멋있는 외양을 갖고 있다. 그녀는 금과 보석들과 진주 곧 새 예루살렘이 건축된 바로 그 재료들로 치장(도금)했다. 새 예루살렘은 이 세 가지 재료들로 견고하게 건축된 반면에 이 악한 여자는 단지 그것들로 치장했을 뿐이다. 치장(도금)한다는 것은 거짓 모습으로 꾸미고, 피상적으로 매력 있게 되고, 악한 것을 감추어 호감을 주거나 보이기 위한 겉모양을 갖는 것이다. 그녀의 외양은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흉측하다.

또한 이 여자는 가증한 것들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찬 금잔을 갖고 있다. 예표론에서 금은 신성한 본성을 상징한다. 외관상 이 악한 여자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붙잡고 있지만, 사실은 내적으로 가증한 것들이 가득하다. 성경에서 가증한 것은 주로 두 가지-우상 숭배와 음행-를 가리킨다. 이 두 가지 것은 하나님 눈에 가증한 것이다. 겉으로 볼 때 이 여자는 금과 진주와 보석들로 치장하고 금잔을 갖고 있으므로 매우 매력적이다. 만일 당신에게 통찰력이 없다면 당신은 그녀에게 속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이 여자가 내적으로 어떠한지를 볼 때 우리는 그녀가 가증한 것들과 더러움으로 충만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계 LS 13)

사탄의 깊은 것들 (2)
그 여자의 이마에는 ‘비밀, 큰 바빌론,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 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계 17:5)

17장 5절은 『또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말한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들을 감찰하시며 그들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계신다. 그분은 투시력을 갖고 계시므로 이 악한 여자의 내부를 보신다. 주님은 그녀를 「음녀들의 어미」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녀가 모든 영적 음행의 근원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사탄의 체현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우리에게는 그녀의 외적 모양을 꿰뚫어 볼 투시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가 좌우에 날선 검 곧 성경의 말씀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그분의 주권적인 은혜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한다. 그분의 은혜는 주권적이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어떤 환경에서도 구원하실 수 있다.
변절한 천주교의 악한 환경 안에서조차도 많은 이들이 구원받았다. 천주교가 성경을 전하지 않는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다. 중국에서 많은 이교도 중국인들이 천주교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과 성경의 몇 구절들을 배웠다. 그러나 악한 일은 이것인데, 즉 사람들이 이 변절한 교회에 의해 도움받은 뒤에 그들은 참된 방식으로 주님을 계속적으로 아는 것에서 좌절된다는 것이다. 천주교 안에 있을 때 주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어떤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 악한 것을 사랑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만일 이것이 악하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가 그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왔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깊은 속에서 여전히 이 악한 여자를 동정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주님이 미워하시는 만큼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서신을 재차 읽기 바란다. 주님은 그 악한 여자가 사탄 곧 악한 자로 철저하게 적셔졌기 때문에 이세벨을 조금도 동정하지 않으신다. 사탄이 그 사악한 여자의 모든 섬유질(신경과 근육) 안에 있다. 우리는 이 변절한 교회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요 사탄의 체현이다. 그것은 간교하고 악하다. 만일 변절한 교회에 관해서 더욱 많이 보고자 한다면 니(Nee) 형제님의 저서 「교회의 정통」을 읽어보라. 주님과 그분의 회복을 위한 마음을 가진 자는 모두 이 변절한 교회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 일단 우리가 그녀를 안 다음에는 그녀에 관련된 그 무엇도 귀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녀가 큰 음녀요 큰
바벨론이라는 것과 우리는 그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앞으로 보겠지만, 계시록은 이 큰 음녀가 몇 명의 딸을 갖고 있음을 지적해 준다. 우리는 변절한 교회에 관해서 철저하게 비춤을 받아야 한다. 일단 우리가 비춤을 받는다면 우리는 교회에 관한 한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의 회복 안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곧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으며 악한 여자요 음녀이며 큰 바벨론인 이세벨과 아무 상관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딸들과도 아무 상관없다. 이 서신에서 주님은 그분이 이세벨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을 지적한다. 17장 16절에서 우리는 큰 환난 동안 주님이 적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변절한 교회를 죽이고 손상시키도록 허락하실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때에 종교적인 바벨론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전에는 이 변절한 교회가 예언에 따라 계속될 것이다. 25절은 변절한 천주교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잔존하게 될 것임을 지적한다.(계 LS 13)

비 성경적인 실행을 가져온 그릇된 가르침들
교회생활은 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과 집회와 복음전파와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것을 포함한다.신약은 이러한 것들을 체계적인 방식으로 순서있게 계시하지 않는다. 신약에서 집회하는 법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같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 말할때 실행적인 면들을 보여주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을 단번에 분명하게 지적하지 않는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경배하는지 분명한 말씀과 지시가 있었다. 그러난 신약이 시작되면서 부터 영적인 필요에 따라 침례요한 보내어 회개하고 침례를 주었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도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 오히려 신약의 기록은 영적인 필요를 따른다.신약의 기록은 대개 영적이지만 어떤 사항들을 실행하는 길에관해서는 분명해 지기가 용이 하지 않다. 이것은 신약의 제시에 있어서 명료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약에서 어떤사항들을 실행하는 길을 찿아내기가 쉽지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세기에 걸쳐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갈망하는 자들은 성경을 연구할때 문제들에 직면한다. 이것이 교회생활을 실행하는 길이 지난 1900년동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많은 논쟁과 이견을 낳게 한 한가지 이유이다.

모든사람이 신약으로 부터 충분한 빛을 받지 않았으므로 어떤 비 성경적인 실행들이 교회 생활 안으로 들어왔다.예를 들면 침례에도 여러 형태의

실행이 있다. 이것에 관하여 신약에 어떤 명시적인 규정이 없기 때문에 침례주는 방법과 그 횟수에 관하여 수세기 동안 끝없는 논쟁이 있었다.너무나 많은 논쟁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혼돈되었고 결과적으로 어떤 비 성경적인 실행들이 점차적으로 들어왔다. 이와 같은 상황은 특히 교회의 타락속에서 거듭거듭 발생했다.교회을 타락으로 인해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은 많을 실행들이 들어왔다. 장로 직분의
문제도 또 한예이다. 신약에서 장로와 감독자는 동의어로서 같은 사람을 지칭한다. (행 20:17.28) 그러나 2세기에 이그나티우스 는 감독이 장로보다 높다는 오류적인 가르침을 끌어들였다. 따라서 그는 한 지역내의 여러장로 들을 감독하는 자로서 감독을 임명했다.

감독이 그 교구의 주교가 되었다. 이 극단적인 오류는 결국 계급조직을 형성했고 또한 이것이 교회의 감독정치의 근원이 되었다.이후 이것은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한 교구를 다스리는 감독 뿐아니라 주로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 주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보다 높은 단계에서 추기경이 있었는데 그들은 카토릭 교회를 다스리는 교황의 내각 구성원들로서 교황이 죽으면 그들 가운데서 새로운 교황이 선출되었다. 물론 교황이 가장 높은 주교이다. 로마 카토릭교회 외에 감리교회도 감독체계에 의해 지배된다. 장로교는 이만큼 엄격하지 않지만 그 원칙은 똑같다. 교회의 타락된 상태에고 불구하고 2.3세기 이후 주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교 주의 진리들을 회복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그러한 회복은 점진적으로 지난 세기를 통하여 계속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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