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중세 교회사

[스크랩] 중세교회사 요약

에반젤(복음) 2021. 8. 28. 10:17

중세교회사 요약

 제 1장

새로운 질서

 

? 야만족의 왕국 - 407년 라인 강을 도하한 반달족은 프랑스와 스페인 일대를 , 429년 지브랄타 해역을 건너 439년 카르타고를 함락시켰다. 이 때 이들은 이미 지브랄타 해역으로부터 이집트 경계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해안 지방을 실질적으로 정복하고 있었다. 그 후에는 다시 바다를 건너 시실리,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등을 점령했다. 서 고트족은 378년 아드리아 노플에서 로마인들을 패퇴시키고, 발칸 반도 일대를 휩쓴 후 410년에 로마를 점령했다. 그들은 415년에는 스페인에 침입하여 8세기 초 모슬렘 교도들에게 정복되기까지 그곳을 통치했다. 그 왕국의 정치적 역사야말로 혼란과 투쟁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 베네딕트의 수도원 운동 - 서방 수도원 운동의 형성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혹은 여러 가지 의미로 볼 때에 그 설립자랄 할 수 있는 인물- 은 A.D 480년경 누루시아라는 조그마한 이탈리아 촌락에서 태어난 베네딕트였다. 그는 20세 되었을 때에 은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동굴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육체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극단적 금욕생활을 시작했다. 얼마 후 그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이집트에서 존경받는 수도사들의 경우처럼 주위에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베네딕트의 위대성은 무엇보다도 그가 공동체를 위해 작성했던 [규율 집]에 있다. 이 문서는 비록 단순하고 소박했지만, 그후 수 세기에 걸쳐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기본적 모습을 결정하게 된다. 베네딕트의 [규율 집]은 극단적 금욕죽의 대신에, 비록 엄격하기는 하지만 정도에 지나치지 않는 질서와 규범을 통한 지혜로운 수도 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 교황제 - 수도원 운동과 아울러 중세에 통일성과 지속성을 제공했던 것은 교황제도였다. 원래 “교황”이라는 단어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초기에는 모든 중요하고 존경받는 감독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 되었다.

? 아랍 정복 - 모하메드가 메디나로 도주하였던 A.D 622년을 이들은 모슬렘교의 기원 원년으로 계산한다. 그는 이곳에서 예배 및 종교 의식뿐만 아니라 일체의 정치 제도와 세속 생활까지도 그의 손에 의해 마련된 지침을 따르는 모슬렘 공동체를 창립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곳으로부터 군사적, 정치적 원정을 시작하여 결국 메카까지도 정복하게 되었다. 모하메드는 그 때부터 일체의 우상들을 폐지한 후, 이전의 자기 적들을 용허하였다. 그가 632년 사망할 당시에는 아라비아의 대부분이 모슬렘의 수중에 들어 있었다.

 

 

 

제 2장

동방 기독교

 

? 칼케돈 회의에 이르는 기독 논쟁 - 삼위일체의 제 2위격과 성령의 신성에 관한 문제는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통해 정립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은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한 기본적 합의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신학적 불일치를 낳을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들이 존재하였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였던 것은 과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관하여, 동방교회 내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사상의 흐름이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역사가들은 편의에 의해 각각 “안디옥 학파”,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학파”라 이름 하였다. 양 학파는 모두 예수께서 하나님이신 동시에 인간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연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 동방의 분파 교회들 - 410년 페르시아 교호는 스스로 독립을 선언하고, 당시 페르시아 수도였던 크테시폰의 동대주교를 교회의 지도자로 옹립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 받게 되자 안디옥 학파를 따르던 일단의 신학자들은 박해를 피해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에 도피했고, 이곳은 페르시아 내의 신학 교육의 중심지가 된 학교를 세웠다. 그 결과 다른 기독교 신자들은 페르시아 교회를 “네스토리우스파”라고 규정했다.

? 아랍 정복 후의 동방 정교 - 모든 교회들은 스스로 정통이라 자처하지만, 이 칭호는 결국 동방 칼케돈주의 기독교의 칭호처럼 쓰여졌으므로, 이들은 흔히 정교라 불린다. 아랍인들의 정복 이후, 동방 교회는 이슬람에 의해 남쪽과 동쪽이 차단되었으므로 주로 북쪽과 북서쪽으로 확장하였다. 동부 유럽의 이 지역들은 게르만족 이후 이곳에 침입하였던 슬라브족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다.

 

 

 

제 3장

제국의 복고와 계속되는 쇠퇴

 

? 샤를마뉴의 통치 - 레오가 샤를마뉴에게 황제의 관을 내렷을 때, 서방 기독교권 거의 전부가 황제의 통치 아래 있었다. 단지 브리튼 제도 및 아랍인들도 정복하지 못했던 일부 스페인만은 예외였다. 그러나 샤를마뉴는 아직 황제 위에 오르기 전, 프랑크족의 국왕으로서 이미 고대 로마 제국의 영역 이상으로 자기 영토를 확장한 바 있었다. 그는 특히 제국 동쪽에 자리작고 있었던 색슨족과 이들의 동맹자 프리지아족을 쳐부숨으로써 이러한 영토의 확장을 이룩하였다.  

? 신학적 활동 - 샤를마뉴가 주도하였던 학문의 부흥은 9세기 전체에 걸쳐 열매를 맺었다. 강력한 군주 및 평화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학교들이 융성하였고, 사본들이 복사되었으며, 상당한 시학적 활동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서부 유럽은 현재까지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조직적 사상가를 겨우 한 사람 배출하였을 뿐이다. 또한 대부분의 신학 활동은 주로 교리 혹은 예배의 특정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 새로운 침입자들 - 노스맨들은 처음에는 단지 브리튼 제도와 프랑스 북부 해안을 공격을 국한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곧 더욱 대담해져서 보다 멀리 공격의 영역을 넓히고 새로운 영토에 정복자들로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일글랜드의 경우, 이들에 대항했던 유일한 인물은 웨섹스의 알프레드 대와 정도였다. 그러나 11세기경 데인족의 왕 카누트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뿐만 아니라 잉글랜든 전체를 정복하였다. 프랑스의 경우, 그들은 모르도, 낭트, 그리고 845년에는 파리까지 약탈하였다. 스페인에서는 모슬렘인들의 도시 세빌과 아울러 산티아고 드 캄포스텔라에 있던 기독교인의 성지를 약탈하였다. 이들은 또한 지브랄타 해역을 건너 지중해에까지 진출하였다. 마침내 이들은 모슬렘들로부터 시실리를 탈환하고, 이곳과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왕국을 건설하였다. 또 다른 일파는 프랑스 북부에 정착하였으니, 이 지역은 그후 노르만디라 불리게 되었다.

? 교황제의 타락 - 로마제국 안에서는 자주 혼란 상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를 임명할 권한을 가진 자들이 자기 자신의 도시는 통솔할 능력이 없는 득 싶었다. 이에 따라 교황의 자리는 뇌물, 음모, 그리고 폭력까지도 사양치 않는 야망에 가득 찬 자 들의 희생물이 되었다.

 

 

 

제 4장

개혁과 부흥 운동

 

? 수도원 개혁운동 - 월리엄은 수도원장으로 베르노를 초빙하였다. 베르노는 이미 수도원 개혁을 위한 열성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베르노의 요청에 따라 윌리엄은 자기가 가장 아끼던 사냥터 클루니를 수도원 부지로 제공하였다. 월리엄은 클루니뿐만 아니라 수도원을 유지하기 위한 토지를 “성 베드로와 성 바울”에게 바침으로써 이 새로운 공동체를 교황의 직접 감독과 보호 아래 두었다. 그러나 당시 교황제는 최악의 타락 상태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보호는 단지 월리엄 자신과 그의 후계자들을 비롯하여 인근 감독들과 영주들의 손에서 수도원을 보호하는 역할밖에 못했다. 또한 이 새로운 수도원이 당시 부패했던 교황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월리엄은 교황이 두 사람의 거룩한 사도들에게 속한 재산에 손대는 것을 명문화하여 금지시켰다.

? 교황 주도의 개혁 - 힐데브란트는 흔히 여러 교황들을 배후에서 조정했던 야망에 찬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그는 스스로 교황직에 오르기까지도 단지 교회의 개혁만을 꿈꾸었던 인물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만으로 그는 여러 교황들을 보좌하였으며, 결국 자기 스스로 교황직에 오르는 것이 개혁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레고리 7세의 칭호로 교황 자리에 올랐다.

 

 

 

제 5장

이슬람에 대한 공격

 

? 제 1차 십자군 원정 - 그레고리 7세도 이미 콘스탄티노플을 구성하고 성지를 회복할 대원정을 꿈 꾼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생전에 이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길 여유가 없었으며,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실제로 원정의 불을 당긴 것은 우르반 2세였다. 이곳에 참여하였던 신자들은 “데우스 불트”, 즉 하나님께서 이를 원하신다는 부름에 응답하였다. 당시 유럽 전역은 가뭄과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외국으로 원정하자는 부름은 귀천을 막론하고 귀족들과 농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후기 십자군 원정 - 이제 사명을 완수 했으므로 대부분의 십자군들은 귀향할 준비를 하였다. 때문에 부이용의 고드프리는 당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접근하고 있던 모슬렘군은 맞아 싸울 기사들이 부족한 상태임을 알았다. 십자군을은 아스칼론에서 모슬렘들을 패배시켰으므로, 예루살렘의 라틴 왕국의 생존은 한 동안 보장되었다. 그러나 보충 병력의 계속적 투입이 시급하였으므로 수수의 무장 병사들 혹은 기사들이 단 기간 성지에서 봉사하기위해 유럽을 떠나는 것은 흔한 광경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성지에 남았으나 또 다른 이들은 겨우 무장 순례라 볼 수 있는 여행을 마치곤 다시 귀향하였다.

? 스페인의 재정복 - 스페인에 세워졌던 고대 서고트 왕국은 8세기에 들어와 모슬렘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그 일부가 북부 스페인 아스투리아스지방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후 프랑크족은 보다 동방으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두가지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스페인들이 흔히 “레콩키스타”, 즉 재정복이라 부르는 이슬람에 대항한 기나긴 저항이 시작된다. 비록 후에 나타난 전설은 이를 가리켜 불신자들에 대항한 기독교측의 계속적 노력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자들은 모슬ㄹ메들에 대항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들까지도 계속 분열 상태에서 싸움을 벌였으며, 종교를 초월한 동맹의 모습도 흔히 찾아 볼 수 있었다. 기독교적 스페인의 통일에 있어서는 성 야고보의 무덤 “발견”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9세기에 들어와 이곳은 서부 유럽 전역으로부터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드는 중요한 성지가 되었으므로, 산티아고, 즉성 야고보의 성지에 이르는 도로는 북부 스페인을 기타 서방 기독교권과 계속적 접촉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결국 성 야고보는 모슬렘들에 대항한 투쟁의 수호신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산티아고 마타모로스, 즉 무어인들의 살해자 성 야고보라는 명칭이 성립하게 되었다.

? 이슬람에 대한 공격의 결과들 - 이러한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기독교 신자들과 모슬렘들, 그리고 라틴 신자들과 비잔틴 신자들 사이의 증오와 적대심은 깊어가기만 하였다. 십자군 원정의 사건들과 이 때문에 발생하였던 유혈극은 쉽사리 잊혀질 수 없었다. 서부 유럽에서 십자군 원정과 스페인 재정복은 교황의 세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십자군 원정을 주도하고 그 지도자들을 임명한 것은 교황들이었으며, 이들은 또한 스페인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으므로 교황청은 보다 막강한 국제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제 6장

중세 기독교의 황금시대

 

? 탁발 수도회 - 도시의 성장과 함께 발생한 인구 이동으로 말미암아 전통적 교구 목회는 도시를 향해 모여든 인구들의 종교적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미 수 세기를 두고 뛰어난 적응력을 보여 왔던 수도원 운동이 이와 같은 화폐 경제의 약점에 대응하여 인구 이동에 대처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이 곧 “탁발 수도사들”로서 그 의미는 구걸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 한 목자 아래의 한 양떼 - 자기의 적수에게 로마를 빼앗긴 인노센트는 자기를 지지하였던 프랑스를 찾아갔다. 한편 프랑스의 전통적 적수들인 영국과 독일은 그에 대한 충성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드는 양국 왕들에게 이노센트트의 편을 들도록 설복하였다. 결국 황제군의 지원아래 인노센트는 로마로 귀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황제가 사망하고 그 계승자와 인노센트 사이의 관계는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공화주의가 유포되고 있었다. 교황은 북쪽의 제국 도시들 속에서, 그리고 황제는 로마 내에서 이러한 공화주의를 조장하였다.

? 신학 활동: 스콜라 신학 - 교황권력의 전성기이자 탁발 수도회들의 설립으로 특정 지어지는 13세기는 또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절정이기도 하였다. 이는 나름대로의 특유한 방법론들을 가지고 있었던 신학으로서 “학교” 속에서 발전한 신학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기원은 수도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2세기경 신학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성당 부속 학당들은 13세기에 들어서서 대학교들로 대체되었다. 신학은 인구 중심지로부터 떨어진 곳에 소재한 수도사들로부터 교회와 주교들과 연관된 성당 부속 학당들로 옮겨졌다.

? 증거하는 돌들: 건축 - 중세기 교회 건축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으니, 하나는 교육적 목적이요, 또 하나는 종교 의식을 위한 것이다. 교육적 목적은 서적이 귀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인구가 극소수였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 건물들은 문맹자들을 위한 교과서 구실을 하였다. 전체 성경 역사, 위대한 성자들과 순교자들의 생애, 덕성과, 악덕들, 천국의 약속과 지옥의 형벌들을 건물을 통해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 취해졌다. 오늘날 우리들은 모론 건물이라는 형식을 통해 나타난 교훈들을 제대로 찾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예배를 드렸던 이들은 모든 건물들의 세부적 부분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선조들로부터 그 교훈을 전해 들었던 부모들로부터 반복하여 설명을 들으며 자라났다.

 

 

 

제 7장

몰락

 

? 새로운 상황 - 12~13세기에 발전한 화폐 경제는 중세말의 상황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비록 20세기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사소한 규모지만 신용제도, 교역, 그리고 공산품 생산 등으로 부르주아 계급은 점차 막강한 영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새로이 등장한 이 계급의 이해관계는 봉건 영주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귀족들 간의 잦은 전쟁, 자기 영역을 통과하는 상품들에 부과한 세금들, 그리고 자급자족을 추구하였던 대 영주들의 욕망 등은 모두 교역을 저해하고 그 이익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 교역이 보호받고, 산적들을 퇴치하며, 화폐제도를 통솔하고 사소한 전쟁들을 종식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은 대 귀족들에 대항하여 국왕들을 지원하였다. 국왕들 역시 이러한 동맹을 통하여 이익을 얻었다. 국왕들이 대군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자금이 없을 때에만 강력한 귀족들은 군주들에게 반항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군자금을 왕들은 부르주아들로부터 얻었다. 그리하여 중세에 있어서 중앙 집권 군주제의 성숙은 은행가들 및 상인들의 점증하는 영향력과 병행하였다.

? 프랑스 그늘 아래의 교황청 -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그후 백년전쟁의 서막이 되었던 전쟁에 돌입할 찰나에 있었다. 보니페이스는 양측의 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협상 중에 프랑스의 필립 4세와 영국의 에드워드 1세가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자 않자, 그는 1296년 교황 칙령을 반포하여, 사제들이 세속 군주에게 헌금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한편 당시 영국의 침입에 직면했던 스코틀랜드는 스스로를 교황의 봉토라고 선언했다. 영국은 이에 따라 스코틀랜드가 누려야 했던 보호권을 무시했으나, 어쨌든 보니페이스는 이 속에서 교황이 지니는 보편적 권력의 승인을 발견했다.

? 서방 교회의 대 분열 - 그레고리 11세의 로마 귀환과 함께 시에나의 캐터린의 꿈은 달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교회의 바벨론 유수”를 야기 시켰던 정치적 상황들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얼마 안 되어 그레고리는 아비뇽으로 다시 귀환 할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 일이 다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기에 바벨론 유수사건보다 더 악화된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로마시민들은 교황의 부재와 함께 다음에 선출될 교황이 아비뇽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이제까지처럼 새로운 교황이 프랑스의 노리개가 될 것을 염려하였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비 공개 추기경 회의가 회집될 장소가 폭도들의 침입을 받았다. 폭도들은 추기경들이 도망할 모든 통로를 차단한 후에야 물러났다. 또한 건물 안팎을 점령한 폭도들은 로마인 출신, 혹은 최소한 이탈리아인 교황의 선출을 요구했다.

 

 

 

제 8장

개혁의 갈망

 

? 종교회의 운동 - 4세기 경, 아리우스 논쟁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분열될 위험에 처했을 때, 콘스탄틴은 종교회의 소집하였다. 또한 그후의 역사속에서도 종교회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위기들이 해결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종교회의에 관한 이론들이 발전함에 따라, 그 주창자들은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보편 종교회의가 교황보다 더 우세한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과연 누가 합법적 교황이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자기들끼리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던 교황들 대신에 종교회의가 더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명백한 해결책에 난관이 되었던 요소는 과연 회의를 소집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러한 난제는 결국 협상을 거부하였던 교황들의 고집에 지쳐버린 두 파의 추기경들이 1409년에 피사에서 공동으로 대회의를 소집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자 적대 관계에 있던 두 교황은 피사횡의를 방해하기 위해 자기들 나름대로의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스스로의 정통성을 계속 주장하였던 두 교황들은 각자 자기의 요새로 은둔하게 되었다.

? 존 위클리프 - 위클리프는  아비뇽 교황청 시대에 살았으며 대분열이 시작될 즈음 사망하였다. 위클리프ㅢ 초기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옥스포드에서 보냈는데, 그는 특히 유창한 화술과 엄격한 논리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위클리프에 의하면, 일체의 합법적 통치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권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른 특성을 지녀야 한다. 위클리프는 또한 성경은 교회의 소유이며, 오직 교회만이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성경을 소유한 교회는 모든 택정함을 입은 자들로 이루어진 몸이며, 따라서 성경은 바로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들로 이루어진 몸이며, 따라서 성경은 바로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되어 그들의 손에 들어가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론에 의하여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은 그가 사망한 후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신학적으로 위클리프의 교리가 가장 겨결한 논쟁을 낳은 것은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관한 문제였다. 제 4차 라테란 공의회는 1215년에 화체설의 교리를 선언한 바 있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이 교리가 성육신에 나타난 원칙을 부인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하셨을 때, 신성의 임재는 인성을 파괴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성찬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떡 속에 임재하면서도 이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었다.

? 존 후스 - 피사측 교황청과의 대결을 통해 후스는 보다 극단적 입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첫 번째로 그는 자격 없는 교황들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질문을 던진 것은 과연 교황들이 교회의 복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사익을 위해 행동할 때에도 교황으로서의 권위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성경이야말로 교황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긍극적 권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황에게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후스의 입장은 다소 강경한 종교회의주의자들의 입장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요한 23세는 주로 이탈리아 정치에 관련된 문제 때문에 나폴리 공략할 것을 선언했으며, 이를 위한 군자금을 면죄부들의 판매를 통해 거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20년 전에 면죄부를 매입한 경험이 있는 후스가 이때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뒤였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는 처분을 매매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사보나롤라는 성 마가 수도원에 가입한 후, 동료 수도사들에게 성경을 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곧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해를 듣게 되었으므로 강연장을 정원에서 교회로 옮겼으며, 그의 강연은 설교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1491년 사순절에는 플로렌스의 가장 큰 교회당에서 설교를 부탁 받을 정도의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후 얼마 안되어 그는 수도원의 재산 대부분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또한 수도원 내의 생활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시민들은 곧 수도사들의 변화한 경건한 모습과 봉사를 찬양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수도원들도 곧 개혁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로렌조마저도 이종 시에 사보나롤라에게 최후를 지켜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당시 사보나롤라의 상망은, 찰스와 그의 군대들이 떠난후 플로렌ㅅ흐 시민들로부터 정부 형태에 관한 자문을 받을 정도여Tekl 그가 추천한 대로 이들은 공화 정체를 수립하고, 침체 상태에 빠졌던 경제 부흥에 열을 올렀다. 그는 또 교회들이 소유한 금과 은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때가 사보나롤라가 주창하였던 개혁 운동이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그는 흔히 열광적이고 무지한 tgn도사로 묘사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학문 연구야말로 필요한 개혁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지도 아래 성 마가의 수도사들은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 아랍어, 그리고 갈대아어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당시의 부유한 자들이 추구하였던 사치와 gif=dfkr이 허영이라고 생각하고, 물질을 향한 탐욕이야말로 그가 비난하였던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부르짖었다. 이에 따라 그의 영도 아래 정기적으로 “허영의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 신비주의에의 길 - 독일 신비주의의 가장 뛰어난 스승은 흔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 알려진 에크하르트 폰 호크하임으로서 그는 13세기말에서 14세기초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신비주의적 교리는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띄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거룩하고, 형언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명상이었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언어는 정확하지 못하며, 따라서 엄격하게 말해 이들은 오류이다. 많은 이들은 그가 세상과 모든 피조물들이 영원하다고 가르쳤다고 이해하였으며, 이에 따라 그가 하나님과 세상을 혼돈함으로써 범신론-모든 피조물이 신성의 일부라는-에 빠졌다고 생각하였다.

? 대중 운동 - 처음에는 주로 향사와 학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던 후스파들은 아마 후스보다 먼저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신념은 후스로부터가 아니라 가나한 자들의 종말론적 기대로부터 생성된 대중들의 종교성에서 추출되었을 것이다. 여성들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수도원 운동이야말로 그들의 부친이나 남편이나 아들들로부터 완전히 자유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때문에 여성들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혹은 도미니크 수도회 등에 모여들었다.

 

 

 

제 9장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 스콜라 신학의 후기 양상 -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절정에 달하였던 스콜라 신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이해하기조차 힘든 난해한 질문들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위해 미묘한 구분들을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비전문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조차 없는 어려운 문체와 기술적 용어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철학과 신학 사이의 괴리라로 할 수 있다. 즉 이성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오직 신적 계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상이에 점차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장벽이 쌓여갔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도이 시대 학자들은 신앙과 이성 사이에 기본적 연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즉 특정 계시된 진리들-예를 들면 하나님의 존재-은 또한 이성의 합당한 사용에 의해 추론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도미니크파 신학자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미 신앙과 시성 사이의 연계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출현하였다.

? 고전 학문의 부흥 - 이처럼 스콜라 철학이 점차 증가해 가기만 하는 난해성의 길을 걷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이들은 고전 학문의 영광을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이 발생하였으며, 문학 부문에서는 인문주의가 나타났다. 재생, 혹은 부흥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라는 용어 자체는 전 시대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시사하는 역사적 기간에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14-15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전체 서부 유럽까지 확산되었던 지적, 예술적 운동을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이라 이름 함으로써, 자기들 이전의 시대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함축함과 동시에, 당시 발생하고 있던 현상이야말로 망각되었던 고전적 영광의 재생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휴머니즘”이라는 용어는 보다 복잡하다. 이는 흔히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이들을 만물의 척도로 삼은 경향에 주어진 명칭이다. 그런데 “휴머니즘”이란 또한 “휴머니티”-오늘날 우리가 흔히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의 연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문 계통의 연구에 전념하였던 중세 말과 16세기의 많은 학자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휴머니스트”라고 불렀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실제로” 인본주의자, “휴머니스트”들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고전 학문의 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창조성에 대한 외경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 실재에 대한 새로운 시각 - 이제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및 조각가들은 이를 다시 물감과 돌덩이를 통해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손가락으로부터 전체 피조 세계를 통치할 권한을 위임받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에 그렸던 아담이 모습이 중세 서적들 속에 등장한 창백한 아담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창조하기 위해 태어나서 이 우주에 그 흔적을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 르네상스의 고상한 인간관을 표현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서도 동일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위대한 르네상스의 천재는 가히 인간 능력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표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의 목적은 그가 살던 시대의 이상대로 “보편적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수로를 건선한다든지, 새로운 무기를 개발한다든지, 잠수함과 비행기의 건조 등에 걸친 그이 웅대한 계획들은 생전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의 대부분의 그림들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으며 초벌 스케치에 불과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현재에는 위대한 예술적 보물로 간주되고 있다.

?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 - 앞에서 교황에 관해 살펴보았을 때, 유게네 4세가 마침내 바젤 공의회에 대항한 그의 권위를 주장한 바 있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로마 시를 장식하고 치장하는 데 주력하였다.이는 르네상스이 풍조가 교황청에게까지 스며 들고 있다는 징조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직후까지 대부분의 교황들의 목표와 이상은 르네상스의 그것과 동일하였다. 교항들의 대부분은 열렬한 예술의 후원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최고의 예술가들을 로마로 끌어 들여 장려하고 아름다운 저택과 성당과 기념물들로 도시를 장식함으로써 가히 기독교권의 수도다운 모습을 이루는 것을 커다란 목표로 생각하였다. 유게네 4세를 계승한 니콜라스 5세는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다른 이탈리아 국가들보다도 로마가 정치적으로 보다 우세한 위치를 점유하도록 노력하는 데 바쳤다. 그의 계승자는 칼릭스투스 3세로서, 이탈리아에는 보르지아라고 알려졌던바 스페인의 보르야 가문에서 배출된 최초의 교황이었다. 그가 고위 관직에 등용한 많은 가족들 가운데에는 그의 손자 로드리고도 있었으니, 이사람은 그후 악명높은 알렉산더 6세로서 교황직에 오르게 된다. 다음 교황 피우스 2세는 자기의 직분에 충실하고지 애쓴 흔적을 보여준 마지막 르네상스 교황이었다.

 

 

 

    

제 2부 식민지 기독교의 시작

 

 

제 10장

스페인과 신세계

 

? 스페인 정복의 본질 -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룸부스와 그 일행이 신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을 당시에는 아무도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광대한 토지와 막대한 자원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얻게 된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는 콜룸부스의 세력을 제한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단지 탐욕만은 아니었고, 이미 스페인 본토에서 얻은 쓰라린 경험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부르주아층의 도움을 얻어 이사벨라의 오빠인 카스틸랴의 헨리 4세의 통치를 무력하게 하였던 고위 호족들이 신세게에 출현하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함대 사령관이자 후작이었으며 총독으로서 신세게 교역에서 발생하는 이익의 1/10을 차지할 콜룸부스는 왕실에 반항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부와 권력을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황실의 작전은 신세계의 인디언들을 보호하는 법령을 제정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는 만약 스페인 출신 정복자들이 마음놓고 인디언들을 착취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이들은 곧 스페인의 대 귀족들과 같이 독립성을 주장하는 유력한 영주들로 변모할 것을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왕실과 스페인 출신 이주민들 사이에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왕실의 간섭을 혐오했던 이주민들이 본국에서 제정한 법령들을 신세계에서 준수하지 않는 경우가 속출했다.

? 저항 - 인디언들에 대한 착취를 고바한 최초의 공개적 저항은 1511년에 도미니크회 수도사 안토니오 몬테시노스가 산토 도밍고에서 행한 설교였다. 이 지방 관리들은 그를 침묵시키고자 하였으나 동료 도니니크회 수도사들이 그를 지지하였으며, 결국  이 분쟁은 스페인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 카리브 지방 -

? 멕시코 -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크티틀란을 향해 진군하는 도중에 만난 여러 종족들의 우상들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가 아주텍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강력한 부족 트라스칼라 족에게는 이러한 파괴 행위를 삼갔다. 이에 따라 편의성과 광신적 열정이 묘한 결합을 이루는 멕시코에서의 스페인 종교 정책이 그 근복적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 황금의 카스틸랴 - 스페인으로 황금을 보낸 발보아의 행동은 결국 그에게 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황금의 맛을 본 당국에서는 이 지역이 발보아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도 귀중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지도자를 파견하였으며, 이곳을 가리켜 카스틸라 델 오를, 즉황금의 카스틸라라고 명명하였다.

? 플로리다 - 정복초기부터 스페인들은 쿠바북쪽에도 육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1513년, 푸에리토리코의 총독이었던 후앙 폰스 데 레온은 국왕으로부터 비미니 지방의 탐험 및 식민권을 하사 받았다. 이곳에는 인간의 젊음을 다시 회복시켜 줄 뿐만 아니라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분수가 존재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폰스의 탐험대는 이곳에 도착하여 플로리다라고 이름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파스코아 플로리다국왕의 이름 아래 부활절 날에 도착하였기 때문이었다.

? 콜롬비아와 베네주엘라 -

? 지구의 사방: 잉카 제국 - 남아케리카의 서반부는 잉카 족의 통치 아래 있었다. 스페인인들은 이들의 중심부를 “페루”라 불렀으나 원래 잉카족들은 자기들의 제국을 “타후안틴수유”, 즉 “세계의 사방”이라 불러왔다. 확실한 경계선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이 거대한 대 제국은 페루, 에쿠아돌, 볼리비아, 그리고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전부 혹은 일부를 포함하였으니, 전체 면적은 750,000평방 마일에 달하였다.

? 라 플라타 - 스페인에 의해 마지막으로 정복된 지역은 현재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그리고 파라과이 등이다. 스페인은 몇 차례의 시도 끝에 1537년에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시에 성채를 건설했다.

 

 

 

제 11장

포르투칼의 진출

 

? 아프리카 - 포르투칼은 카스틸랴보다 거의 200년이나 앞선 13세기경 무어족들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했다. 그런데 이들은 카스틸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외부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다였다. 15세기 전반기에 흔히 항해왕이라 불렸던 헨리는 아프리카 서해안의 탐험을 도모했다. 그의 적극적 지원 아래, 포르투칼인들은 14차례의 시도 후에 케이프 보자도르를 통과하여 시에라 레온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탐험의 배경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유럽과 극동 사이의 직접적 육로를 장악하고 있던 모슬렘 교도들을 우회하여 아프리카를 통과하거나 혹은 아프리카를 해로로 돌아 동양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이었다.  1487년 최초의 포르투칼 탐험가들이 희망봉을 통과하였다. 10년후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인도양을 건넌 후 유럽으로 귀환함으로써 모슬렘들을 우회하여 인디아와 직접 교역하는 것이 가능함을 증명하였다.

? 해 돋는 곳을 향하여 -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을 통하여 포르투칼인들은 인도, 일본, 그리고 중국 등 동양의 면적이 매우 넓고 인구가 많아서 포르투칼의 힘으로는 결코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비단과 향료 등 동양으로부터 들어온 상품들은 유럽시장에서 고가로 매매 되었으므로, 포르투칼은 정복보다는 교역의 길을 택했다.

? 브라질 - 포르투칼 당국은 수 차례의 예비 탐사후, 이곳에서 생산되는 유일한 가치있는 물품은 단지 물감을 만드느 데 사용 될 수 있는 브라질 나무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포르투칼의 국왕 마노엘은 일단의 포르투칼 상인들에게 브라질 나무의 독점권을 주었으며, 이들 상인들은 해안 지방을 따라 교역소들을 설치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인디언들이 잘라 운반해 오는 브라질 나무와 칼, 가위, 바늘 등을 교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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