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 용서(롬8장15;갈5장1-13)
성경본문: 로마서8:15;갈라디아5:1-13
로마서8:15;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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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5:1-13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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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한 달동안 공부 잘하고 돌아왔습니다.
무더운 날씨가운데 여름 성경학교, 서천 블레싱을 통해 섬기고 봉사하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고 저 또한 교회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짧은 한 달동안 우리에게는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도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번에 저는 <하와이 코나>에서 열린 목회자 부부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하와이 코나>하와이 코나는 하와이에 있는 여러 섬중에 가장 큰 섬입니다. 그래서 라고 부릅니다.
이 섬에 오래전에 로렌 커닝햄이라는 목사님이 세계선교를 위해 “열방대학”이라는 대학을 세웠는 데 그 “열방대학”에서 하는 프로그램중 하나가 목회자 세미나입니다.
과연 한 사람의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분이 아주 오래전 젊은이들을 통한 세계선교의 환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대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학이 지금 전 세계에 선교사와 크리스쳔 리더들을 보내는 큰 대학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난 7.19일,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데 그 한인교회 목사님이 하와이 한인 이민역사를 말했습니다. 하와이에 한인들이 처음으로 이민을 간 것은 1903년이라고 합니다. 당시 가난하던 시절, 미국가면 돈많이 번다는 말을 듣고 많은 한인들이 배를 탔습니다.
나라는 희망이 없고 일본은 한국 침략을 노골화하고 있을 때 생계를 찾아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난 것입니다. 1903년에서 1905년까지 65차례에 걸쳐 모두 7천명이 넘은 사람들이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낮에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고, 밤에는 삵바느질을 하며 힘들게 하루 하루 살았습니다. 이어서 이미 LA에 와 있던 이승만박사가 하와이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때부터 하와이는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자료를 보면 해방전 까지 하와이 노동자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보낸 기금이 3백만 달러가 넘습니다. 90년 100년전이니 지금으로 하면 어마 어마한 돈입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조국을 잊지 않았던 한인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았나 가보았습니다.
주로 사탕수수밭에서, 커피농장에서 고되게 일했습니다.
하와이 날씨는 너무 덥습니다. 에어컨도 없습니다. 한낮에는 푹푹 찝니다.
그 더운 낯선 나라에서 밤낮으로 일하며 살았을 동포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시간을 내서 한인들이 묻혀 있는 무덤에도 가 보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무덤은 제가 처음 보았습니다.
깜깜한 대나무 숲에 몇 개의 비석들이 뒹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모기가 많은지 들어갈 엄두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용감하게 저하고 감경철 회장님이 같이 들어갔습니다.
거기엔 오랜 세월, 빛 바랜 비석들이 희미하게 자신들의 과거 존재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냥 봐서는 글씨도 안보였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보았더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930. 10.8 경남 김천 출신의 문필연씨 무덤“.
또 하나는 황해도 출신이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조국을 떠나 자유를 잃고 살았던 사람들, 놀라게도 한인들이 묻혀 있는 땅은 일본인 소유의 커피농장이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싫어서 하와이를 갔는 데 거기에 또 다시 먼저 온 일본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 밑에 들어가 고생하다가 부모형제도 모르게 그 땅에 묻힌 것입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 내평개쳐진 무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왜 인간은 자유를 잃고 살까?
압제가 싫어 자유를 찾아 떠났는 데 왜 그곳에서 또 다른 압제를 만났을까?
세상 어디를 가도 진정한 자유는 없는 것일까?
오늘은 광복 75주년,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한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자유를 어떻게 얻으며 어떻게 지켜야 하나?
오늘 말씀 롬8:15은 8.15를 맞아 롬8:15입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바울은 롬8장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종과 아들입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지붕아래 살고 한 가정안에 삽니다.
한 주인밑에 삽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습니다.
종은 자유가 없고 아들은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종과 아들은 믿고 안 믿고의 구분이 아닙니다.
다 같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릅니다.
자유가 없다고 안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롬8장에 나오는 이 두 사람은 모두 롬1장부터 7장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롬1-3장, 에“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둘 다 죄인입니다.
4장에서 “예수믿고 의로워졌습니다”.
종이든 아들이든 다 예수믿습니다.
롬5-7장, “세례받고 죄와 싸우며 삽니다”.
종이나 아들이나 예외없이 죄의지배아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과 아들로 구분됩니다.
둘다 다 예수믿고 구원받았는 데 하나는 종이고 하나는 아들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같은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데도 종이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를 믿지만 여전히 부자유속에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가장 큰 차이는 두려움입니다.
“너희는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들의 영을 받았으므로”.
종은 두려워 하고 아들은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자유의 반대는 속박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속박이 자유를 억누리는 외적 장치라면 두려움은 자유를 빼앗는 내적 요소입니다.
가장 큰 불행은 은혜안에 있지만 여전히 두려움 속에 사는 것입니다.
어떤 통계를 보았습니다.
30-40대 젊은 기독교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해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60퍼센트의 크리스쳔들이 “자주, 혹은 때로” 죄책감을 느끼고 살고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과거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불과 10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두려움의 원인이 되는 죄책감은 두 가지 이유로 옵니다.
율법주의와 죄입니다.
☞먼저 율법주의는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동기는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은혜로 하지 않고 내 노력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의로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잘 안됩니다.
잘 안되면 안될수록 우리는 더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하면 더할수록 우리 자신의 현실과 멀어집니다.
그러면 절망을 느낍니다.
안되면 안된다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내 모습 이대로 나가면 되는 데 우리는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내가 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을 “완전주의”라고 합니다.
완전주의는 자기를 비참하게 만들고 남도 불행하게 합니다.
어떤 사람이 완전주의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신이 흠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믿으며, 그런 도달 할 수 없는 목표에 미치지 못할 경우 자신을 꾸짖고 벌하는 것, 삶에 대한 이런 식의 접근은 좌절의 흔적을 남기고 더 많은 문제를 낳을 뿐이다.
완벽주의자들은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며, 대개는 미래를 두려워한다”.
한마디로 율법주의든 완전주의든 자신의 삶을 존재(being)보다는 행위(doing)에 두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안에 두려는 것보다 자신의 옳은 행동에 두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속에 살게 해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려움속에 사는 본질적인 이유는 죄입니다.
율법주의가 자기 의를 앞세운 우리의 인간적 태도라면 죄는 그 뿌리입니다.
다시 8:15, “너희는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종은 “죄의 종”입니다. 종이 자유가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죄 때문입니다.
갈5:13로 말하면 “육체”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여기서 “육체”는 “죄”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죄의 특징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자유를 잃습니다.
아담이 언제 자유를 잃었습니까?
선악과 따먹은 후입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고 어떻게 했습니까?
창3:8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숨었습니다.
왜 숨었습니까?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숨어서 살 존재로 지으셨나요?
아닙니다.
창2:25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벌거벗고 살아도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지음받았습니다.
자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음부터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숨습니다.
누가 숨지 말라고 해도 숨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죄는 반드시 두 가지 나쁜 것을 동반합니다.
죄책감과 수치감입니다.
둘은 죄의 쌍둥이 자매입니다.
둘은 비슷한데 다릅니다.
죄책감은 “내가 행한 행위가 잘못되었다”라는 느낌입니다.
수치감은 “내가 바로 잘못된 존재다”라는 느낌입니다.
죄를 지으면 먼저 죄책감이 먼저 옵니다.
“I did something wrong", "내가 뭔가 잘못했다”.
그것이 죄책감입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합니다.
그러면 “I am wrong". ”내가 바로 잘못된 존재다“. 이렇게 됩니다.
만약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혹시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존재가 잘못되었다면 고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절망, 낙심, 모든 자살, 모든 무의미, 모두 허무의 원인입니다.
오래전에 제가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공부하는 데 한 여집사님이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겸손해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속속들이 알면 자기는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사랑받기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하도 강해서 말도 못 붙일 정도였습니다.
알고보니 이 집사님이 과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가정이 있었지만 어떤 남자의 유혹을 받아 잠시 실수를 범했습니다.
곧 교회에 나와 회개했지만 이것이 수치심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했어” 하던 것이 “나는 나쁜 년이야” 이렇게 되었습니다.
죄책감이 수치감으로 변한 것입니다.
교회를 안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나오긴 나오지만 여전히 죄의 짐에 눌려 삽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다가 교인들과 같이 아시아 선교를 갔습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 문제아고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얼굴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졌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 이 분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못 받아줄 죄인이 없다는 것을 선교를 통해 깨달은 것입니다.
죄책감과 수치감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무서운 죄의 종입니다.
여기에 한번 붙잡히면 자유는 사라지고 기쁨과 감사도 사라집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숨어 살든지 용납받고 살든지.
아담은 숨는 편을 택했습니다.
창3:8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은 무화과 나무로 자신을 가리고 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숨기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숨습니다.
폭식은 잘먹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숨기기 위해 많이 먹는 사람입니다.
술, 마약, 포르노, 중독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은 숨기고 싶은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치료할 때 술만 안 먹게 하고 포르노만 안 보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서 이들이 정말 숨기고 싶은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해야 합니다.
요즘 성형이 유행입니다.
꼭 필요한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얼굴을 바꾸기 전에 마음에 바꾸고 싶은 자아가 있습니다.
내면 세계를 바꾸지 않고 렛미인에 나가 얼굴만 바꾸면 몇 달은 괜찮지만 몇 년이 지나면 자신이 뭘 바꿨는지 잘 모르게 될 것입니다.
최신 유행을 따라간다든지, 집이나 자동차에 집착한다는든지, 학위, 성공, 자격증, 승진, 직책, 심지어 교회 봉사에 열심하는 것도 때로는 숨기고 싶은 무엇을 잠시 숨기는 방편일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잠시의 기쁨을 얻을 수 있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진정한 자유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용서입니다.
용서는 자유를 회복하는 최고의 성경적 통로입니다.
죄로 문제가 되어 죄책감과 수치감에 빠지고 그것이 두려움을 가져왔다면 원인 치료는 당연히 죄의 용서입니다.
성경에는 용서를 통해 자유를 회복한 많은 예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구약의 요셉입니다.
요셉은 참으로 많은 상처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결국은 최후에 승리했지만 거기엔 많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최후 승리한 과정을 보면 크게 넷입니다.
첫째 웅덩이 사건, 형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그를 깊은 웅덩이에 빠뜨렸습니다.
둘째 보디발 사건, 보디발의 아내가 백주대낮에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셋째 감옥 사건, 그래서 요셉은 이유없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마지막에 애굽의 총리, 결국 바로에게 쓰임받아 애굽을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쓰시기 위해 많은 과정을 통과하게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 사건, 우리는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유없이 감옥에 갇힙니다.
인내와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에게 쓰임받습니다.
그때까지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하나님의 승리를 위한 긴 훈련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웅덩이 사건입니다.
요셉에게 있어 형들에게 미움받아 광야의 웅덩이에 빠진 사건은 그에게 두고 두고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 상처를 해결하지 않고 마음에 두었다면 요셉은 승리는 커녕 형제들과 칼부림으로 인생을 끝냈을 수도 있었습니다.
요셉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용서였습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의 용서의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용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믿고 용서한 것입니다.
자기 감정으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다같이 “하나님이”.
이것이 열쇠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용서도 우리 의지로는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언제 용서했을까요?
요셉의 용서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요셉은 먼저 용서했고 계속 용서했다”.
요셉은 웅덩이에 빠져 애굽으로 팔려갔지만 아마도 그 사건이 나자 마자 바로 형들을 용서한 것 같습니다.
사실 용서 안한다고 상황이 달라지지도 않지 않습니까?
요셉은 아마도 너무도 많은 인생고 때문에 형들을 미워할 시간도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도 인간이기 때문에 불쑥 불쑥 형들이 원망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감옥에서 특히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계속 용서했습니다.
끊임없이 미워하는 마음과 원망의 마음을 다잡아 끝까지 용서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먼저 용서하고 계속 용서하라”.
먼저 용서한다는 것은 선제적으로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사과를 받은 뒤에 용서하겠다”.
이것은 후속적 용서입니다.
조건적 용서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이렇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용서는 선제적 용서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선제적으로 용서하셨습니다.
롬5:6, “우리가 연약할 때”,
롬5:8,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롬5: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강해진 다음, 의롭게 된 다음, 우리가 그의 친구가 된 후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계속 용서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용서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한번 용서했다고 모든 상처, 모든 아픔이 다 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거듭 거듭 용서해야 합니다.
“한번 용서했는 데 여전히 미운 마음이 든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용서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치료해도 자국을 남습니다.
자국은 오래갑니다.
하나님도 우리는 계속 용서하셨습니다.
요13:1, “예수께서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은 계속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항상 잘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죽을 때까지 용서했습니다.
오래 해로하고 80, 90이 된 부부를 보면 정말 좋습니다.
두 부부가 오래 함께 살았다는 말은 서로 계속 용서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교인 하나가 한 교회를 60년 다녔습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교회가 언제나 천국이고 어느 교회 성도가 항상 천사겠습니까?
아닙니다.
60년간 계속 그 교회를 용납하고 교인들을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집에서 30년을 살았습니다.
정말 잘 했습니다.
서로 계속 용서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성가대에서 20년 봉사했다.” 참 잘했습니다.
성가대의 이런 저런 모습을 보면서 끝까지 참고 견디며 계속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가 20년동안 한 교회에서 목회했습니다.
교인이나 목회자 다 위대합니다.
교인도 목회자를 용서했고 목회자도 교회를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죄짓자 말자 용서하고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용서하심을 믿습니까?
그 하나님께 여러분은 언제나 바로 용서받고 계속 받기 원합니까?
그것이 자유의 비결입니다.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셉은 그후로 한번도 형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미움이 남아 있으면 언젠가 이야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요셉이 형들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이미 용서했고 미리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라 요셉이 선제적으로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고 잊어 버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잊었나요?
혹시 용서했다고 하면서 두고 두고 그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며느리가 말합니다.
“나, 우리 어머니 용서했어. 정말이야.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아직 어머니를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안에서 둘이 싸웠습니다.
누가 중재해서 서로 화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른 교인만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집사님, 김집사 만만치 않아요. 조심하세요. 지금은 용서했지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아직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했는지 아닌지 여부를 판단하는 시금석은 내가 용서한 그 사람을 자주 입에 올리나 안 올리나입니다.
제가 요셉의 이 모습을 보고 반성했습니다.
저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저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집사님, 그 사람에 대하야 잘 아세요? 잘 모르시는구나. 정말 조심해야 사람이예요. 다른 사람과 달라요”.
더 친한 사람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가 나에게 했던 잘못을 다 까발립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고 생각했습니다.
“아, 내가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니구나. 내 속에는 여전히 그에게 대한 미음이 있구나”.
그리고 무릎꿇었습니다.
“하나님, 내 속에는 여전히 그에 대한 미움이 있습니다. 저는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용서한 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진정한 용서의 마음을 주옵소서”.
그때부터는 딱 하나 결심했습니다.
“제가 마음으로까지 그를 다 용서못해도 적어도 남들에게 그에게 대한 이야기는 안하겠다”.
저도 머르게 말이 나오면 “주여, 제 입을 막아 주시옵소서”.
또 하나 요셉이 용서한 증거가 있습니다.
축복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그들을 축복합니다.
이것이 창47장입니다.
야곱과 그 형제들이 바로에게 인사하자 요셉이 말합니다.
창47:11-12,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것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요셉은 자기를 웅덩이에 빠뜨리고 애굽으로 판 형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좋은 들, 라암셋에 살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자녀를 책임집니다. 아버지가 죽자 다시 형들을 불러 약속합니다.
창50:21, “당신들은 두려워 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여기까지 가야 용서입니다.
이 용서가 요셉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어 그 자유 때문에 결국 승리한 것입니다.
저는 이 자유의 원리가 광복 75주년을 맞은 이 나라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얼마 점에 <국민일보>에 어떤 위안부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 일본의 아베가 사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과연은 아베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그 사람이 사죄하지 않을 것이다”는 기대대로 되었습니다.
명확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채 두루뭉술하게 과거에 사과했지 않으냐는 식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일본이 왜 사과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일본놈들 뻔뻔하다. 일본 총리는 무엇 하는 놈이냐? 일본은 왜 독일을 본받지 않는가?”.
맞습니다.
그 주장도 맞고 감정도 맞습니다.
그러나 해방 75주년에 물읍시다.
우리는 언제까지 일본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일희일비하겠습니까?
왜 우리의 국가적 자존감을 일본의 태도에 의존합니까?
왜 우리의 광복절은 자주민족을 선언하고 세계 열방과 하나되어 앞으로 나아갈 생각보다 일본을 비난하는 일에 집중합니까?
일본을 두둔하는 것 아닙니다.
어차피 일본의 잘못은 일본이 알고 세계가 압니다.
왜 안하겠다는 사과에 목매답니까?
일본에 더 이상 매이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입니다.
해방은 1945년에 정치적으로 이루었지만 자유는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용서가 일본을 이기는 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해야 합입니다.
일본을 축복하고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것입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북도 문제지만 멸공도 문제입니다.
두려움은 일본이나 북한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행위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대한 태도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말씀을 보세요.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한 어느 누구도, 어떤 민족도, 어떤 과거도, 우리를 다시 종이 되게 못합니다.
마틴 루터 킹이 한 위대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등을 굽히지 않는 한 누구도 당신의 등에 타지 못한다”.
일본이 잘해아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 아닙니다.
북한이 우리의 자유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자유는 하늘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와 율법주의와 부자유에 우리의 등을 굽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유를 뺏길 리가 없습니다.
해방은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얻은 정치적 자유입니다.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영적인 해방입니다.
해방은 밖에서 얻고 자유는 안에서 누립니다.
해방은 사람이 주고 자유는 하나님이 줍니다.
75년전에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얻었으나 우리는 2천년전에 자유를 얻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해방은 얻었으나 자유는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옛날 관습대로 산다면 우리는 해방을 얻었으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뭔가에 눌려 두려움속에 산다면 우리는 해방은 얻었으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방에서 자유로, 종에서 아들로, 종교에서 생명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이것이 광복 75주년, 입당 17주년에 우리가 바라보는 진정한 자유의 방향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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