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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함께 죽고 함께 살고(롬6: 1-11)

에반젤(복음) 2021. 8. 22. 10:43
함께 죽고 함께 살고(61-11)
성경본문: 로마서6:1-11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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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셋째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은혜안에 사셨습니까?
지난 주 저는 은혜가 이긴다”. “세상을 이기게 한 힘은 은혜다” 말씀드렸습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항상 은혜안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난 월요일, 저의 집사람과 함께 <현대백화점 CGV>를 갔습니다.
시간이 있어서 잠시 영화를 보러 갔는 데 매표소 여직원이 저를 보며 말합니다.
우대자시죠?” 그러면서 제 이름을 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영화보는 데 이름도 쓰나?” 하고 무심코 이름을 썼습니다.
그런데 영화비를 두 사람 합해서 8천원만 받는 것입니다.
8천원씩이니까 반값입니다.
왜 이렇게 영화가 싸지?” 하고 생각하고 표를 받고 영화를 보는 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제가 65세 이상 노인인줄 알고 경로 우대표를 준 것이었습니다.
머리가 희면 가끔 이런 축복을 받습니다.
그랬으면 영화본 이후에라도 매표소에 가서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 데 미쳐 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기도하는 데 , 네가 노인이냐? 65세도 아니면서 경로우대를 받아? 돈 몇 푼 때문에 양심을 속여?”
내면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달려갔습니다.
갔더니 직원이 바뀌었습니다.
상황을 이야기하고 8천원을 냈더니 직원이 말합니다.
저희들은 매일 정산을 하거든요. 어제 정산이 끝나서 안내셔도 되는데요”. “그래도 받으세요” 하고 제가 돈을 내 밀었더니 직원이 “안 내셔도 되는데. 그러면 이름을 쓰세요 제가 또 한번 이름을 썼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제가 사장님께 말씀드릴께요”.
제가 얼른 돈을 주고 나오는 데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저를 속인 것이 회개가 되면서 이 작은 일 하나 제대로 못하는 제가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목사인 제가 이 정로도 사는 데, 우리가 은혜안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입버릇처럼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안에 살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자책하는 데 하필 오늘 설교 본문이 롬6장입니다.
롬6:1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롬1-3장에서 죄를 말한 바울은 3:21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말하고, 5장에서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의 축복을 말했습니다.
지난 주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 죄와 은혜의 관계를 말합니다.
롬5:20절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는 심판을 가져오지만 죄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에 결국 죄는 은혜를 가져온다는 역설입니다.
그리고 6장으로 넘어오면 바울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은혜를 많이 받으려고 계속 죄를 짓겠느냐?”
답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2절, 롬6:2,그럴 수 없으니라”.
죄가 결국 은혜를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죄를 더 지을 수는 없지 않으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2절입니다. 롬6:2, “그럴 수 없으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바울은 그 이유를 아주 본질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이 말씀은 죄와 은혜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 최고의 주제인 죄와 은혜의 문제에 대해 바울은 최고의 신학적 설명으로 복음의 진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1.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우리가 죽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 “죽었다는 말의 문법적 형태는 부정과거동사입니다.
이 말은 사건이 이미 일어났고 그것은 다시 번복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죽을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고 노력해서 죽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미 죽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점차 죽을 것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피나는 노력과 기도로 죄와 싸우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는 번복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어떻게 해볼 겨를도 없이 우리도 모르게, 과거의 어느 시점에 누군가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은 2절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4절에도 나옵니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장사되었다“. 이미 무덤속에 매장된 것입니다.
8절,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죽었으면”, 11절에 또 나옵니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이미 죽었습니다.
로마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갈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죽었습니다”.
골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죽었습니다”.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죽었습니다.
딤후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죽었습니다”.
성경에 너무 자주 나오는 이 “우리가 죽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왜 성경은 우리가 죽었다고 자주 말할까?
우선 우리는 우리가 죽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한 수도원에서 한 젊은이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그러자 오랫동안 기도하며 살아온 노인이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그대의 육신이 떠나가기 까지는 너무 자신만만하지 마시오. 형제는 형제가 죽었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아직 사탄은 죽지 않았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사탄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죄를 이겼다든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말은 우리의 경험과 무관한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는 죽었다 말할 때 우리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아직도 나쁜 감정, 연약한 양심, 악한 행실, 그대로 있습니다.
어제까지도 부부싸움했습니다.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 데 성경이 나보고 “너 죽었다 하니까 나는 안 죽었는데?” 합니다.


성경이 우리가 죽었다”고 할 때 죄를 짓지 않았다거나 죄질 욕망조차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경험과 무관한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손자 하고 이야기하다 깨달았습니다.
세 살먹은 손자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하삐 죽었다. 그랬더니 손자 피식 웃습니다.
안죽었다”. 그러면서 다음에 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삐, 어디 가?” 세살 먹은 아이에게 죽는다는 말은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세살먹은 아이에게 “사람은 죽는다 하면 그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 아이는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 살뿐 아니라 초등학생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사람은 죽는다” 하면 감정상, 경험상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이 죽는다는 말을 어린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알아듣습니까?
설명할 수 없을 때는 따라 하게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 따라 해봐. 사람은 죽는다“.
이 말이 어린아이들에게는 전혀 감동도, 이해도 안되지만 때가 되면 깨닫습니다.
언젠가 깨달을 때가 오겠지 하고 부지런히 가르칩니다.
바울이 지금 그런 심정입니다. 너는 죽었다. 너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분명 지금 내가 살아 있고 죄도 짓고 있는 데 너는 죽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하면 이해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말이 틀린 말입니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의 경험에 호소하지 않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언이니까 우리가 할 일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긴다는 말입니다.
롬6:10-11,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다같이 여길지어다”. “여긴다는 말은 감정상, 경험상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되지만 언젠가 이해될 것으로 믿고 그 말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다같이 “여기라”. “여기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 자체를 없앴다거나 죄의 근원인 사단을 완전정복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죄의 지배,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자체는 우리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요1서3:9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자녀가 죄짓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 죄질 욕망이나 유혹조차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는 그대로 있는 데 그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 죄의 세력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제가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로 마음이 조금 상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다 해도 나중에라도 알았으면 즉시 가서 말하지 못한 것 때문에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살고,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도 그렇게 밖에 살지 못하니 제가 한심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목사님의 예화를 읽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런 예화를 들었습니다.
여기 등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산은 높고 험한 데 중턱을 넘어 잘 올라갔습니다. 한 2/3은 올라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지가 저기 보이는 데 삐끗하다가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조금만 올라가면 되먼 데 그것도 못 올라가고 넘어졌으니“.
그때 절망하지 말고 잠시 냉정을 되찾고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산아래서 넘어진 것과 산 중턱에서 넘어진 것이 같으냐 하는 것입니다.
산아래서 넘어진 것은 아예 소망이 없습니다.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3쯤 올라가다 넘어졌으면 나름대로 노력한 것 아닙니까?
거기까지 올라가는 데 최선을 다했고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되니까 다시 일어나 올라가면 됩니다.


믿는 사람도 죄짓고 실수하지만 그 죄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한번도 넘어지지 않고 한번 더 죄짓지 않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자주 넘어집니다.
또 실수합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그때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올라왔지 않습니까?
아직도 내가 저 산밑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상아닙니까?


그래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실수도 죄도 유혹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롬6:6 현대어 번역입니다.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7절입니다. 롬6: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감옥의 비유가 있습니다.
사람이 큰 죄를 지으면 무기수가 됩니다.
무기수는 감옥에서 평생 사는 것입니다.
무기수로 감옥에 있어도 죄를 생각, 미운 생각, 죄의 유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행동으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육신은 살아 있지만 자아는 이미 죽었습니다.
여전히 죄속에 살지만 죄가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죄의 욕구가 있지만 높은 담과 간수의 통제 때문에 실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2.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6절 볼까요?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8절입니다.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공통적인 말이 함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우리가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나마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씀도 어렵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이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부터 2천년전에 이스라엘에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때 살지 않았고 더구나 이스라엘에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시간적, 공간적인 큰 갭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유명한 갈2:20도 어떻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여기도 함께가 나옵니다.
여기서 ”함께는 무엇입니까?
산 시간과 공간이 다른 데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살고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함께는 시간과 공간이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비로운 연합”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연결을 말합니다.
2천년 신학에서 이 연합의 교리만큼 신비한 교리도 없습니다.
한편 이 연합의 교리만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설명하는 교리도 없습니다.
매우 어려운 말이지만 우리가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연리지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뿌리가 다른 데 하나가 된 나무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뿌리가 다른데 어떻게 한 나무가 됩니까?
그래서 아름다운 사랑을 “연리지 사랑”이라고 합니다. 연합의 신비입니다.
고염나무를 아십니까?
고염나무를 잘라 감나무를 접붙이면 감이 열립니다.
참 신기합니다,
뿌리는 고염나무인데 열매는 감입니다.
연합의 신비입니다.


바다도 그렇습니다.
바다는 수많은 강들의 연합입니다.
우리 나라 서해는 우리 나라 대동강, 한강, 금강, 영산강이 흘러 들어 갑니다.
중국의 황허강, 양자강도 흘러갑니다.
그래서 큰 바다가 되지만 일단 바다가 되면 서해의 어느 부분이 한강이고 어느 부분이 양자강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 그 속에 강이 있지만 강을 보이지 않고 바다만 보입니다
연합”의 신비입니다.
자연은 말없이 연합의 신비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자연만 연합을 가르칩니까?


성경은 이 “연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구약에서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양이나 소를 잡았습니다.
매년 유월절마다 대제사장이 두 마리의 양을 잡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는 백성을 위하여 잡습니다.
먼저 자기를 위하여 한 마리를 잡을 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때 양은 대제사장의 죄를 뒤집어 씁니다.
그리고 죽입니다.
양이 죽는 순간 대제사장의 죄도 함께 죽습니다.


또 한 마리를 잡습니다.
또 안수하여 백성의 죄를 그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여호와여, 백성들의 모든 죄를 이 양에게 전가시킵니다”.
그리고 양을 멀리 광야로 내쫓습니다. 양이 멀리 사라지는 순간, 백성들의 죄도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멀리 사라졌습니다.
분명 죄는 사람이 지었는 데 양이 죽었습니다.


양의 죽음이 사람의 죄를 대신했습니다.
동일화의 원리입니다.
양이 죽을 때 죄인이 용서받았습니다.
양이 죽을 때 죄인도 함께 죽고 양의 피흘릴 때 죄인도 함께 살았습니다.
연합”의 원리입니다.


신약으로 오면 바라바가 나옵니다. 바라바는 강도이며 살인자였습니다.
그가 어느날 예수님과 함께 백성앞에 섰습니다.
유월절에 두 사람을 세워놓고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너희는 이 둘중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느냐? 바라바냐 예수냐?”
사람들이 소리쳤습니다.
바라바요, 바라바는 놓고 예수는 죽이시요”.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으로 바라바가 살았습니다.
본래 바라바가 졌어야 할 십자가를 예수님이 대신 짊으로서 예수님은 죽고 바라바는 살았습니다.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함께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연합니다.


십자가 좌우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왼쪽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했고 오른쪽 강도는 예수님을 향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른쪽 강도에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때 중요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강도가 살아났습니다.
교환되었습니다.
강도의 운명과 예수님의 생명이 맞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함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었다”는 믿음과 “예수님이 나와 함께 죽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었다고 믿음으로 우리는 용서받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죽었다고 믿음으로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이 믿음이 구원의 시작이라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이 믿음이 성화의 시작입니다.
1910년 8월 29일, 이완용이 일본과 <한일합방문서>에 조인할 때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고, 1945. 8.15, 일본이 항복할 때 우리는 해방을 얻었습니다.


이완용이때 우리가 안살았어도 우리는 그때 나라를 잃었고, 1945년에 내가 없었어도 우리는 해방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이완용의 매국행위에 아무리 반대해도 우리가 한국사람이면 그때 나라를 잃었습니다.
1945년 우리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었어도 우리가 한국사람인 한 우리는 그때 해방을 얻었습니다. “연합”입니다.


성경은 크게 두 가지 연합을 말합니다.
고전15:22,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과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대표한 존재입니다.
아담은 우리와 죄로 연합되고 그리스도는 우리와 용서로 연합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담시대에 안 살았어도 아담이 범죄할 때 ”함께 범죄했습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시대 안 살았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순간, 우리도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순간, 우리도 살아 났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범죄할 때 우리도 범죄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못박힐 때 우리도 못박혔습니다.
함께 범죄하고,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살았습니다“. 신비로운 연합의 결과입니다.


3.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연합의 원리는 나쁜 것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도 함께 합니다.
8절을 보세요. 롬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두 가지의 함께 가 있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았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이 신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러해 전 박대통령, 최순실 사건을 말하면서 검찰이 경제공동체라는 말을 썼습니다.
적어도 주머니에 있어서는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퍼뜩 ”, 우리도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구나 생각했습니다.


공동체란 말은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가끔 머리는 둘인데 몸은 하나인 기형아가 태어납니다.
둘인지 하나인지 알아보려면 머리를 ” 때려서 두 몸이 동시에 아야“하면 한 몸이고, 하나는 아픈데 다른 하나는 안 아프다고 하면 두 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감히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하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운명을 같이 하니 나쁜 일, 좋은 일, 다 같이 겪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우리도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때 우리는 부활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의지하여 사셨으니 우리는 성령을 의지하며 삽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했으니 우리도 예수님 재림할 때 휴거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다스리시니 우리도 주와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으니 우리도 고난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이기고 최후 승리했으니 우리도 최후 승리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한 몸이요 운명공동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산 것을 교회에서 고백하는 예식이 세례입니다.
이스라엘 요단강 세례터입니다(영상).
여기에 세계 각처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크게 둘로 되어 있습니다. 물로 들어가고 물에서 나오고. 물로 들어갈 때 옷을 벗습니다. 물에서 나올 때 옷을 입습니다.


세례는 단지 물속에 들어가 몸을 적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에 들어갈 때 나는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물에서 나올 때 “나는 주님과 함께 살았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 내가 죽고 물에서 나와 내가 사는 것입니다.


세례는 롬6:10의 재현입니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골2:12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러분은 우리와 예수님이 함께”의 운명을 짊어진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아십니까?
<2002년 월드컵>은 우리에게 두고 두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선수 11명이 세계 강호들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을 차례로 이겼습니다.


11명 선수가 이길 때 대한민국 전체가 환호했습니다.
그러다가 독일에게 질 때 대한민국 전체가 탄식했습니다.
11명 선수 따로 있고 대한민국 국민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1명이 곧 대한민국이었습니다.
11명이 이길 때 대한민국이 함께 이기고 11명이 질 때 대한민국이 함께 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요 운명공동체입니다.
이렇게 믿으면 사실 우리에게 아무 고민이나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고난당합니까?
예수님이 고난당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당합니다.
우리가 고난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승리합니다.
조금도 힘들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존재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 5절이 중요합니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이것은 우리의 과거입니다.
그의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것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가 죽을 때 우리도 죽었다. 우리의 현재 신분입니다.
너희도 그의 부활한 것처럼 부활하리라,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저는 이번주에 성경읽다가 히12:15을 읽고 은혜받았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여기서 쓴 뿌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독초입니다.
왜 우리 마음에 독초가 있습니까?
은혜없는 종교는 독초를 만들어 냅니다.
은혜없이 믿으면 믿기는 믿는 데 쓴 뿌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쓴 뿌리가 있고 어떻게 없앱니까?
15절 앞 부분,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가 무엇입니까?
잘살고 사업잘되는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은혜입니다.
롬6:8이 최종 은혜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함께 죽고, 함께 살고”, 우리가 받은 최고의 은혜, 그 은혜가 있어야 우리속에 쓴 뿌리, 독초 사라집니다.
주여,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살게 하소서“.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