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 은혜(롬7장6;5장20- 21) 성경본문: 로마서7:6; 5:20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 5:20-21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 8월의 무더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여름이지만 조금씩 선선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더위보다 더 나쁜 것은 부자유입니다. 며칠 전에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교인을 찾아갔더니 없습니다. 어디 갔나 했더니 밖에 휴계소에 있습니다. “왜 여기 있어요?” 했더니 “목사님, 답답해서요. 아픈 것은 참겠는 데 답답한 것은 못 참겠어요”. 병보다 더 힘든 것은 답답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3 학생을 만났습니다. “어때? 공부할만해?” 했더니 “힘들어요”. “왜 힘들어?” 했더니 “자유가 없어요. 놀지도 못하고 잠자는 것도 마음대로 못해요. 죽겠어요”. 공부가 힘든 것이 아니라 자유가 없어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이렇게 소중합니다. 그런데도 자유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남자가 병원을 찾아가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극심한 두통 때문에 죽겠습니다. 어떻게 좀 도와주십시오.” 의사가 말했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술을 많이 마십니까?” “술이요? 안 마십니다” “그럼 담배는 피우십니까?” “담배요? 담배는 만져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례지만 혹시 외도를 하십니까?” “아니 날 어떻게 보고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전 그런 일 없어요”. “그런데도 머리가 욱신거리고 아프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찌르는 듯이 욱신거립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답이 나왔습니다. 선생님이 너무 자신을 조이고 있습니다. 조금 느슨하게 풀어놓으면 두통이 사라질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을 너무 조이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항상 느슨할 수는 없지만 너무 조이면 부러지지 않습니까? 활도 조이면 부러지고 기계도 너무 조이면 부서지고 몸도 너무 조이면 스테레스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앙인이 한 가지 더 자기를 조이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본래 율법이란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지키라고 주신 신앙적 삶의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법입니다. 성막을 어떻게 지어야 하며 제사는 어떻게 집행해야 하고 제사장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배 잘 드리게 하는 법입니다. ☞또 하나는 윤리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법입니다. 이웃은 어떻게 대하고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도덕법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예배 잘 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선하게 살고. 하나님은 너무 좋은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의 자유를 빼았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것이 사람들에 의해 나쁜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자, 율법에 “안식일을 지키라” 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 냅니다. 남들은 다 회당에 간다고 가는 데 이 사람은 회당에도 안가고 구덩이에 빠진 양과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때 믿음 좋은 사람 하나가 지나가면서 말합니다. “아니, 지금 당신 무엇하고 있소? 안식일은 일하지 말라는 율법도 모르시오?” “죄송합니다. 양이 구덩이에 빠져서”. “구덩이에 빠졌던 어쨓든 당신이 하는 것은 일이잖소? 안식일에는 무슨 일이나 하지 말라는 계명도 모르시오? 율법을 어기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모르시오?”. 그때부터 그 사람은 간데마다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저 사람은 안식일을 범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끄집어 내고 있더라고. 문제야.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받으려고. 쯧쯧”. 하도 사람들이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죄책감이 듭니다. “응, 내가 큰 잘못을 범했구나.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는 데 구덩이에 빠진 양과 씨름하다니. 그 놈의 양이 뭐라고. 어쩌지? 하나님이 화내실텐데”. 하면서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율법이 그 사람의 자유를 빼앗아 갔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사람은 안식일을 범해서 자유를 빼앗기고, 그것을 본 사람은 그 사람을 정죄하느라 자유를 빼앗깁니다. 그러면 율법은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 주신 축복의 선물입니다. 문제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율법주의는 인간의 주장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율법주의는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태도입니다. 동기는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은혜로 하지 않고 내 노력으로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이 롬7장에서 하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바울은 롬1-3장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4장에서 오직 예수님을 믿으면 의로워 진다고 말합니다. 5장에는 믿음으로 의로워졌으면 정죄가 없다고 말합니다. 6장에는 믿음으로 의로워졌으면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7장입니다. 7장은 우리가 예수믿으면 평안도 있고 자유가 있는 데 그것을 깨뜨리는 방해세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마치 날마다 아내를 괴롭히는 나쁜 남편과 같습니다. 매일 밤 술먹고 들어와 아내를 구타합니다. 그러니 여자가 남자에게서 벗어나려면 딱 한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죽는 것입니다. 롬7:2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여기서 매인다는 말은 속박한다는 말입니다. 얽어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 남편이 죽어야 우리가 자유를 회복합니다. 율법주의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앞에 선 존재보다 자기가 하는 행위에 두려는 인간적 태도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실패감과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누가 완전하게 살겠으며 누가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살겠습니까? 잘 안되다 보니까 죄책감, 수치감에 사로잡히고, 그로 인해 결국 자유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이 율법주의가 발전하면 완전주의가 됩니다. 완전주의는 조금도 자기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완전주의자들은 그들의 완벽주의 때문에 늘 주변의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침대는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하고 숟가락은 반드시 놓아야 하고 옷은 주름 하나 없어야 합니다. 집에는 먼지 하나 없어야 하고 차는 정확하게 줄에 맞춰 파킹해야 합니다. 우표는 네모 반듯하게 붙여야 하고 집에는 반드시 10시 이전에 들어와야 합니다. 학교 성적은 여야 하고 식사는 반드시 제 시간에 해야 합니다. 이러니 얼마나 힘듭니까? 어떤 집에 가니까 “가정 10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부모가 자녀들 보라고 크게 써 붙였습니다. 1). 일이 끝났다면 치워라. 2). 방에서 나간다면 불을 꺼라. 3). 떨어뜨렸다면 주워라. 4). 더렵혔다면 청소해라. 5). 열었다면 닫아라. 6). 흘렸다면 닦아라. 7). 가져갔다면 바구니 안에 넣어라. 8). 다 썼다면 버려라. 9). 어질렀다면 제자리에 놓아라. 10).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을 잊지 말아라.“ 이 부모는 분명 완벽주의 부모입니다. 이런 집에서 자녀들이 숨쉬고 산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리처드 윌터스가 쓴 <덫으로부터의 탈출>이란 책에서 그는 완전주의는 이런 것입니다. “완전주의는 자신이 흠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믿으며, 그런 도달 할 수 없는 목표에 미치지 못할 경우 자신을 꾸짖고 벌하는 것이다. 완전주의는 과거를 자주 후회하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며, 미래를 항상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게 합니다. 우리가 교회생활하면서 언제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생활 잘못 하다가 내 자유도 빼앗기고 남의 자유까지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교인들을 훈련하기 위해 많은 법을 만들었습니다. 1901년에 만든 신앙생활의 7가지 기본 강령이 이 예입니다. 모든 신자는 반드시 7가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예배출석을 철저히 할 것, 둘째 주일을 반드시 지킬 것, 셋째 부모에게 효도할 것, 넷째 일부일처제를 지킬 것, 다섯째 인가귀도 할 것, 여섯째 근면 성실할 것, 일곱째 금주 금연할 것. 당시 교회는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세례도 안주고 그래도 안지키면 직분까지 파면했습니다. 1914년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절대 장로로 세우지 말라는 법도 만들었습니다. 물론 잘 해보려고 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 효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잘못되어 교회의 위선자를 낳고 신자의 자유를 빼앗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잘하는 것은 좋은 데 대개 잘하는 사람은 남이 못할 때 정죄하기 쉽습니다. 옛날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함께 식탁에 앉아 모처럼 고기를 구워서 먹고 있었는 데 한 사람이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수도원에서 평생 고기 안 먹는 것이 옳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물만 주십시오”. 그래서 시중드는 분이 주방에 가서 말했습니다. ”그 분은 고기는 안 먹고 소금만 달랍니다“. 이때 수도원원장이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형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고기 안 먹는다고 말하기 보다 사람들과는 같이 먹고 자기 방에 들어가 혼자 있을 때 고기를 안 먹는 것이 먹는 것이 좋을 뻔 했소“. 다른 사람들은 맛있게 고기를 먹고 있는 데 ”나는 안 먹는다. 나는 안 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면 고기먹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고기먹는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만, 아마 목회자가 이런 실수를 가장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을 잘 예배하게 하려고 기도 많이 하게 하려고 가끔 그렇게 합니다. “예배 안드리는 사람도 집사냐? 기도 안하는 사람도 교인이냐?”. 그렇게 되면 예배 안 드리고 기도 안한 사람은 큰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가끔 제 설교가 그런 죄의식을 불러 일으켰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뜻으로도 할 수 있고 실수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은 강압으로 되지 않습니다. 억압으로 예배하고 강압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는 누가 듣겠습니까? 혹시 제가 이런 실수를 하면 앞으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교인들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정한 자기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기준이 있지만 그 기준이 항상 성경적인 것도 아니고 항상 옳은 것도 아닙니다. 대개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기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기준에 안 맞는다. 그러면 사정없이 떠들고 다닙니다. “누구 누구는 어떻게 한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리고 그것을 인터넷에 올리고 훼이스 북, 트위터에까지 올립니다. 그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얼마나 많이 고생하는 것을 모르고 무조건 자기 기준에 안 맞는다고 그렇게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유를 빼앗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은혜가 필요합니다. 율법주의의 문제에 대해 성경이 제안하는 대안은 은혜입니다. 오늘 말씀 7절 볼까요?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조문의 묶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율법주의는 자기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얽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리는 일이 아니라 죽이는 일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 “죽었다”는 말이 무엇일까 제가 많이 생각했습니다. 생각해 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자, 제가 결혼했습니다. 제가 결혼했다는 것은 독신생활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입니다. 독신생활과 결혼생활은 둘을 한꺼번에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결혼했다는 것은 독신생활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독신생활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나는 더 이상 총각으로, 독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내가 총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끔 결혼생활에 부대낄 때 “아, 내가 왜 결혼했지. 혼자 살걸”. 할 때가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가정을 돌보고 가족때문에 신경써야 할 때 “아, 나는 주님만 위해 순교자처럼 살고 싶은 데 가족들이 걸림돌이 되는구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부처럼 혼자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는 틀렸습니다. 저는 이미 가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독신주의에 대해 죽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다시는 율법적이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기준으로 살고 싶습니다. 내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고 정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모든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완전했습니다. 그러나 완전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 입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입장으로 남을 정죄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고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았습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은혜에 대해서는 살았습니다. 제가 어느날 “은혜”의 의미를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 저의 자녀들이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비오는 날이었는 데 제가 우선을 쓰고 급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아들이 친구들하고 놀다가 저를 보고 “아빠”하고 달려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가까이 가면서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아들의 옷이 온통 흙탕물로 뒤범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흙탕물 때문에 제가 아들을 피했을까요? 아니면 “너 옷이 그게 뭐니” 하고 나무라면서 “너 옷 씻고 아빠한테 와” 했을까요? 그때 제가 한 것은 달려가서 아들을 안은 것입니다. 아들의 옷에 있던 흙탕물이 저에게도 묻었습니다. 그 옷은 금방 제가 설교한 옷이었습니다. 제가 아들을 안아준 후 한 행동이 무엇이었을까요? “자, 씻으러 가자”. 그리고 세면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먼 훗날 제가 그 장면을 떠올리며 이렇게 스스로 물었습니다. “그때 아들의 옷이 더럽지 않았니? 그런데 왜 씻기기부터 안하고 안아주기부터 했지? 왜 흙탕물로 달려오는 아들을 너는 피하지 않았니? 네 옷이 분명 더러워질텐데”. 그리고 그것이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은혜는 흙탕물부터 씻기는 것이 아니라 안아주기부터 하는 것입니다. “네 몸에 흙탕물 있잖아. 그것 씻고 와”.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괜찮아. 나는 네 아빠야. 내가 너를 안아줄께“ 이것이 은혜입니다. 필립 얀시가 은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더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적어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그날 흙탕물을 튀기지 않고 달려왔다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왔다고 아빠의 사랑이 적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아들이 흙탕물대신 꽃다발을 더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제 사랑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날 아들이 흙탕물로 아빠 옷을 더렵혔지만 그렇다고 제 사랑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은혜는 상대방에 따라 내 사랑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에 따라 상대방이 커지는 것입니다. 율법은 상대방이 하기 따라 내 사랑이 결정되고 은혜는 내 사랑에 따라 상대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롬5장으로 가볼까요? 롬5장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의 위대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모두 5번 은혜를 죄와 관련시켜 말하는 데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죄를 말할 때는 그냥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말할 때는 항상 “더욱”이란 말을 씁니다. 롬5:8절이 그렇고 10절이 그렇습니다. 15절입니다. 롬5:15,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7절, 롬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 그리고 20절, 롬5: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다같이 ”더욱“, 이 세상에 죄도 만만치 않지만 은혜는 그보다 ”더욱“ 크게, ”더욱“ 넘치고, ”더욱“ 왕노릇합니다. 아멘. 우리에게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고 은혜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일관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믿습니까? 율법적 신앙과 은혜의 신앙의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입니다. 율법적 신앙은 하나님을 무섭게 봅니다. 은혜의 신앙은 하나님은 선하게 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이 무엇이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이 선하다는 것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하다면 세월호 사건을 통해 죄없는 사람들을 죽입니까? 왜 하나님이 선하다면 메르스같은 것이 생겨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합니까?” 평소에 믿음이 없던 사람도 세상에 나쁜 일만 생기면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무신론자들도 나름대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항상 허허웃고 마음씨 좋은 켄터키 후라이 같은 하나님을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선하다는 것이 얼굴입니다. 얼굴이 부드러우면 선한 줄 압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얼굴이 선해서 자식에게 선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에게 화안내고 고통을 안 주기 때문에 선한 부모는 아닙니다. 좋은 부모는 자식을 나무라기도 하고 벌주기도 합니다. 자식들이 잘못되어 가는 데 허허 웃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동네 아저씨입니다. 눅15장에 탕자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아버지가 아마도 성경에 나타난 가장 좋은 하나님의 모델일 것입니다. 어느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재산을 내 놓으라고 욱박지릅니다. 말도 안됩니다. 재산상속은 아버지가 죽을 때 주고 또 주고 안주는 것은 아버지의 재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직도 멀쩡한데 아들이 다짜고짜로 협박합니다. 할 수 없이 아버지가 재산을 나눠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을 밖으로 나갑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답답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재산을 주는 것이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면 아버지는 마땅히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래도 달라고 하면 혼을 냈어야 합니다. 그래도 소란을 피우면 발목을 비틀든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동네사람들이 아들을 붙잡고 두들겨 패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는 대로 재산을 주고 아들이 집나갈 때도 가로 막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결과 아들의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막았다면 아들이 고생하지 않았을까요? 목숨걸고 막아 아들이 집안에 있었다면 적어도 돼지 쥐엄열매를 먹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과연 좋은 아버지일까요? 이것은 이렇게 묻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의 악을 그냥 두고 보십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악을 제어할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왜 하나님은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난받는 것을 바라 보고만 계십니까?” 이것을 어떤 신학자는 “힘없는 전능자”라고 불렀습니다. 전능자는 전능자인데 힘을 안쓰는 전능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불까요? 아들이 나가는 것을 아버지가 막지 않아 아들이 고생했지만 그 결과 아들이 스스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나갈 자유를 주면서 또한 돌아올 자유도 주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망할 자유를 주면서 또한 다시 시작할 자유도 주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는 당연히 말할 수 있었으나 말하지 않고, 강제할 수 있었으나 강제하지 않고, 힘을 쓸 수 있었으나 힘쓰지 않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래 참고 기다려 결국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봐야 합니다. 결국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세 마디 말을 합니다. 성경으로 볼까요? 눅15:21절,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입니까? 같은 21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그리고 세 번째가 있습니다. 19절, “나를 아들이라 부르지 마시고 종이라 부르소서”. 이 세 마디는 죄짓고 돌아온 아들의 눈물겨운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버지가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아버지, 내가 죄지었습니다“ 했더니 어떻게 합니까? 제일 좋은 옷을 입힙니다. 상거지가 된 아들을 먼저 씻기기부터 하지 않고 입히기부터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오면 모든 죄를 다 회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용납하고 받아줍니다. 덮어 줍니다. 추위를 녹이고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 겉옷을 입혀 줍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나는 더 이상 아들이 아닙니다” 할 때 어떻게 합니까? 반지를 끼워줍니다. 반지는 상속자를 의미합니다. 자기는 아들자격도 없고 재산상속을 커녕 아무 쓸모없는 놈이라고 하니까 반지를 끼워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니야. 너는 내 아들이고 내 상속자다. 네가 어떤 짓을 했어도 나는 너를 미워할 수 없다. 네가 어떤 잘못울 했어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네가 언제라도 집에 오면 문열어 줄 것이고 내 팔은 항상 너를 안아줄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그리고 “나를 종으로 여겨 달라”고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신발을 신깁니다. 옛날 노예들에게는 신발을 신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도망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움직일 자유까지 빼앗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신발을 신깁니다.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너를 묶지 않겠다. 너는 내 노예가 아니야. You are free. 너는 자유를 얻었다. 너는 이제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갈 수 있고 네가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다. 나는 종이 아니라 내 아들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발에 신을 신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들이 아닙니다”. “나는 이제 종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율법적 신앙이라면 “죄지었어? 괜찮아. 내가 덮어 줄게”. “내 아들이 아니라고. 아니야. 너는 내 아들이요 상속자야”. 그리고 “나는 이제 종이예요” 할 때 “아니야. 너는 종이 아니야. 내 아들이야. 내가 네게 신을 신겨 주고 있지 않니? 이 신을 봐라. 이 신을 신고 마음껏 다녀라. 이 신을 신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너는 이제 자유다”. 롬8:15, ”너는 두려워 하는 종이 아니라 자유한 내 아들이다“. 자유를 누려라. 나도 너 때문에 행복하다. 나는 내 아들이 아들이면서도 종처럼 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자, 자유를 누려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돌아온 탕자들이 아닙니까?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종의 신발 벗어버리고 아들의 신발로 갈아 신읍시다. 진정한 자유, 하나님의 은혜에서 옵니다. |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
'설교 자료실 > 주제별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함께 죽고 함께 살고(롬6: 1-11) (0) | 2021.08.22 |
---|---|
[스크랩]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롬12: 1- 2) (0) | 2021.08.22 |
[스크랩] 교회의 본질과 사역(행6: 1- 7) (0) | 2021.08.22 |
[스크랩]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대상17:22-24;눅19: 1-10) (0) | 2021.02.26 |
2020년, 내 신앙의 결산서 (0) | 2020.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