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본질과 사역(행6장1- 7) 성경본문: 사도행전6:1-7 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회가 가장 성경적 교회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 부동산 투자 전문가인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신도시 투기가 한창일 때 이 집사님은 일주일 내내 아파트와 땅만 보러 돌아다녔습니다. 여집사님은 선교회 회장이었는 데 마침 그날 저녁이 여선교회 헌신예배였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 여집사님은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시간이 거의 임박해서야 총무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회장님, 오늘 저녁 우리 선교회 헌신예배인 것 아시죠? 10분 전이예요. 빨리 오세요”. 깜짝 놀란 여 집사님이 교회로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단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여선교회 헌신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신앙고백까지는 잘 했습니다. 드디어 찬송을 불러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 집사님은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찬송가 105동 102호를 부르겠습니다”. 세상 일로 바쁜 신자의 삶의 한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일에 바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잖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은 제대로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의 신앙도 이러면 안되지만 만일 교회가 세상인지 교회인지 분간을 못하고 세상적 방법으로 세상적인 목적으로 존재한다면 여러분은 그 교회 나오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분이 요즘 유행인 교회의 몇 가지 유형을 말했습니다. ☞첫째 카센터 교회. 이 교회는 기름을 넣어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오지만 거기 살지는 않는 교회입니다. 기름 넣으면 떠납니다. ☞둘째 패스트푸드점 교회. 영혼의 허기가 지면 불쑥 찾아와 간단한 햄버거, 콜라등을 요기하고 떠납니다. ☞셋째 천국보험교회. 이 교회는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믿는 교회입니다. 교회에 내 이름이 있는 것이 중요하고 매주 교회나와 보험료쳐럼 헌금하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넷째 박물관 교회. 이 교회는 항상 과거 이야기만 합니다. 이 교회가 과거에 어떠했고 옛날 목사님은 얼마나 유명했고 늘 화제가 과거입니다. 박물관같은 교회입니다. ☞다섯째 컨트리 클럽형 교회. 이 교회는 마치 사교장같습니다. 교인들이 어울리고 싶은 사람과만 어울립니다. 컨트리클럽처럼 끼리 끼리 모입니다. 모이는 사람이 꼭 정해져 있고 화제도 정해져 있습니다. ☞여섯째 리조트형 교회. 이 교회는 노는 것이 목적입니다. 누구나 대접을 받기위해 교회나오고 대접이 시원찮으면 언제든지 떠납니다. 또 있습니다. ☞대형 쇼핑몰 교회. 이 교회 가면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이 완비되어 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최신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찬양, 공연, 콘서트, 온갖 문화 프로그램, 교육,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형 쇼핑몰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교회를 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1절을 보십시오 . 행6:1, “그때에 제자의 수가 많아졌는데.” 교인의 수가 많아지는 것은 축복입니다. 사도행전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났다”는 표현입니다. 처음에 12사도로 시작한 교회가 500명이 되었고, 500명이 간절히 기도하고 성령을 받자 3천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다가 행4:4절에 오면 남자만 5천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6:1로 오면 “제자가 수가 더 많아졌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인은 얼마나 되었을까? 성경학자 렌스키가 이것을 계산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적어도 2만 5천명은 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성장하는 교회를 꿈꿉니까? 부흥은 언제나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열망은 성장을 낳고 비전은 부흥을 낳습니다. 그러나 부흥에는 극복해야 할 장애가 있습니다. 1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행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예수믿는 히브리파 유대인과 이스라엘 밖에서 태어나 예수믿는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같은 크리스쳔이면서도 관심이 조금 달랐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로마정부에 대하여 긍정적이었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부정적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타종교와 문화에 대해 개방적이었는 데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과 전통을 더 선호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지적이고 히브리파 유대인은 율법적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헬라파 유대인은 진보파요 히브리파 보수파였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다양하고 관심, 취미, 생활수준에 있어서도 다양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교회가 언제나 경계해야 할 것은 공산주의식 획일주의입니다. 교회는 다양해야 합니다. 지역적 다양성, 정치적 다양성, 문화적 다양성, 사회적 다양성이 있습니다. 그 다양성속에서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한 교인이 주차문제로 다른 교인과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예배드리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데 어떤 사람이 자기 차를 친 것입니다. 주차장에서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이 사람이 화가 나서 교회를 옮겨버렸습니다. 주차문제로 신경 안쓰는 조용한 교회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편했습니다. 교회 늦게 와도 주차할 곳이 많고 차 빼다가 서로 부딪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주차장이 빈 교회는 은혜도 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이 고민하다가 다시 우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차라리 주차문제로 싸우더라도 은혜로운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모이면 교회에 대한 이해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 교인 수가 많아지다 보니 사도들이 바빠졌습니다. 가롯 유다의 빈 자리를 맛디아가 채워 12명이 되긴 했지만 이 12명이 그 많은 교인들을 섬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매우 어려운 시기여서 교회안에도 가난한 자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정신으로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있었는 데 사도들이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사도들의 주된 일은 말씀전하고 기도하는 것인데 교회 안에 그많은 가난한 자를 섬기다 보니까 이것도 저것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결단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2절에서 4절입니다. 행6:2-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여러분, 사도들의 이 말이 구제가 필요없다는 것입니까? 가난한 자를 섬기는 일이 교회의 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필요합니다. 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는 10억 명 사람이 하루에 천 원 정도의 생활비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 갑니다. 2천원 수준의 생활비로 살아가는 사람만 전 세계 20억이 됩니다. 이들에게 그래도 교회가 희망입니다. 하루도 2만6천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들에게 손을 펴야 합니다. 신15:11절에도 말씀했습니다. “내가 네가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우리 손을 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과 사역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교회의 아름다운 사역이지만 교회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빵만 주는 곳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빵도 주어야 하지만 영적인 빵도 줘야 합니다. 육적인 빵을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면 영적인 빵을 주는 것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빵을 주더라도 이것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적 필요는 영원한 만족이 없으며 줄수록 욕구는 점점 많아져 받은 것에 대한 감사보다는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더 커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다 필요한 데 무엇이 먼저냐가 중요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기자가 성공의 비결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성공하셨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무시합니까?” “제가 학교에 다닐 때 너무 많은 일에 제 시간을 할애했거든요. 아침식사 후 침대를 비롯하여 온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마루 먼지까지 털어냈습니다. 매일 눈에 보이는 것이 정돈할 것, 청소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이올린도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꿨지요. 청소를 의도적으로 무시하자. 그리고 바이올린에만 집중하자. 그래서 오늘날의 제가 있습니다“. 결국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필요하지만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제임스가 좋은 말을 했습니다. “지혜란 무엇을 하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 안하는 기술이다”. 성공은 이것 저것 다 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시할 것을 무시하시고 선택한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본질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무엇에 교회는 목숨걸어야 합니까? 다시 4절을 보실까요? 행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 교회안에 많은 일이 있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할 일이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다른 사역은 사람의 필요와 관련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공급과 관련됩니다. 다른 사역을 열심히 하면 성공합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에 열심하면 성화됩니다. 다른 사역을 잘 하면 칭찬받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면 하나님을 닮습니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에 관해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를 보면 기자>가 테레사수녀와 함께 버려진 아기들, 어린이들, 고아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한 집들을 쭉 걸어갑니다. 그러면서 “이 일은 어떻게 했고 저 일은 어떻게 하는 일이냐?” 고 물었습니다. 이때 테레사 수녀가 걸음을 멈추고 기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내 일에 대해서만 묻고 나를 그 일로 고용하신 분에 대해서는 한번도 묻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많은 일은 그 분이 시킨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부지런히 봉사하고 교회밖에 까지 섬기고 봉사하는 일은 분명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키신 일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시키신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고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정작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사역들은 그 분이 시키신 일이요 기도와 말씀은 그 분 자신의 일입니다. 가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이 혼동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의 일이니까요“. ”왜 직분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고요.”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음식준비하고 주차안내하고 헌금 계수하고 목자로 임원으로 교사로 성가대로 집사로 권사로 장사로 일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킨 일입니다. 그래서 시킬 사(使)자를 써서 “사역”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 분 자신과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일을 시킨 그 분과 친해지는 일입니다.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가끔 회의 하느라 예배에 빠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회의입니까? 가끔 봉사하면서 예배는 안드리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를 위한 봉사입니까? 열심히 봉사하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느날 모든 봉사를 중단하고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 그럴까? 누가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는 분들을 시험들게 했나? 그래서 제가 만났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너무 많이 봉사하다 하나님과 멀어진 부부였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기뻐서 봉사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힘들어 졌고 그래도 안 할 수 없어서 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하게 더 하게 됩니다. 특히 목회자가 더 시킵니다. 그래서 또 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나자빠졌습니다. 가짓수를 세어보니까 대 여섯 가지는 더 된 것 같습니다. 심령은 고갈되어가는 데 일만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칭찬해서 좋지만 칭찬이 독약이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처음에는 교회에 예수님 때문에 나오다가 나중에는 일 때문에 나옵니다. 이것이 아닌데 할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점점 은혜는 소멸되고 악만 남습니다. 마지막 인간적 의로 버텨보다가 그것도 안되면 그만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 있다가는 제 명대로 못살겠다 생각하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 가운데 이런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문제의 본질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가 문제입니다. 일한 것만큼 공급받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은혜보다 일이 앞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로 인한 기쁨을 주님과 교제로 인한 기쁨을 앞세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교회 가도 그것을 해결하지 않고 가면 불행이 반복됩니다. 본질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사시대에 나오미가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고향은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이란 말은 “빵집”이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은 지형상 밀과 보리가 잘 납니다. 그래서 옛날 성전시대에는 거기서 난 밀로 빵을 만들어 성전에 진설병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빵집, 떡집”입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족들은 빵이 없어서 베들레헴을 떠납니다. 이름은 빵집인데 빵이 없어서 베들레헴을 떠납니다. 결국 모압에 가서 실컷 고생하고 다시 돌아와 보아스의 들판에서 마음껏 먹습니다. 보아스는 그 이전에도 베들레헴에 살았지만 그 이전에 나오미는 보아스를 몰랐습니다. 결국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보아스를 만난 후 빵문제를 해결합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아십니까? 재미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이 없고 사랑이 없고 봉사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빵이 없어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입니다. 영적 보아스인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 떠나 어디로 가도 기근이요 기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봉사하되 일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더 사랑하십시오. 일로 인한 만족보다 예수님으로 인한 만족을 더 얻으십시오. 그래야 행복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행위에서 존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서 행위가 나옵니다. 기도와 말씀, 우리가 항상 돌아갈 신앙의 본질입니다. 일곱 집사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이 이를 위해 세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7집사입니다. 5절입니다. 행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테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이 일곱명은 교회가 세운 최초의 일꾼들입니다. 이들의 직분은 집사입니다. 집사를 요즘의 교회 서열로 볼 때 장로, 권사보다 낮은 어떤 사람들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당시로는 집사는 유일한 교회 직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집사란 뜻의 헬라어 “디아코노스”는 신약 성경에 총 29회 등장하는데 “집사”라고 번역된 것은 단 세 곳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번역은 “일꾼”, “수종자”, “섬기는 자”, “사환”, “하인” 등입니다. 이 말에서 “섬김”, “봉사”란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집사”말고 또 하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제자”입니다. 1절입니다. 행6:1, “그때에 제자의 수가 많아졌는데.” 제자란 말은 사도행전에서 여기가 처음입니다. 그동안에는 사도행전은 사람을 가르킬 때 “신자”, 혹은 “믿는 자”라는 말을 썼습니다. 행2:41, “그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4:4, “믿는 자가 남자만 약 오천이나 되더라”. 그런데 6장에 오면 그 이름이 “제자”로 바뀝니다. 그냥 단순히 신자가 제자가 된 것일까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처음 예수믿으면 “신자”가 됩니다. 믿는 자입니다. 그러다 점점 자라면 “제자”가 됩니다. 그냥 시간만 지났다고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란 말은 헬라어로 “마세테스”, 이 말에서 “마르투리아”, “증인”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서 “마르투스”, 영어로 “마아터”, “순교자”란 말이 나왔습니다. 제자는 곧 순교자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직분을 받은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요즘 이런 책이 나왔습니다. “팬인가? 제자인가?” 여러분도 어떤 가수나 연예인을 좋아합니까? 어떤 아이돌 가수를 좋아한다. 그러면 팬입니다. 팬이 얼마나 열심인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압니다. 가수가 나타나는 곳에 귀신같이 나타납니다. 그가 만든 노래를 듣고 그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습니다. 정말 광적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합니다. 희생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무슨 실수로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그러면 금방 떠납니다. 희생이 없습니다. 즐깁니다. 좋아합니다. 열광합니다. 그러나 인기떨어지면 언제든지 떠납니다. 이것이 팬입니다. 예수님도 팬이 많았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 먹일 때 수만명의 팬이 따랐습니다. 병고쳐줄 때까지 그 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붙잡히자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두려워 했지만 결국 예수님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팬입니까? 제자입니까? 여러분이 권사일 수 있습니다. 장로일 수 있습니다. 집사, 교사일 수 있습니다. 목사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역의 기능상 붙혀진 이름들입니다. 그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이름이 중요합니다. “제자”, 그것이 우리의 본질적인 이름입니다. 제자”는 “마세테스”,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마르투리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제자”제자는 “마르투스”, 순교자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 이런 행사가 있었습니다. 학교 앞 마당에 거름자리를 미리 만들고 졸업식 후 교수님들이 몇 명을 그 거름자리로 던졌습니다. 그러면 옷에 거름이 묻고 냄새가 납니다. 왜 아름다운 졸업식에 그런 일을 했을까요? “신학교를 졸업한 너희는 이제 죽었다. 예수안에 죽었다. 세상의 모든 자랑과 욕심은 이제 배설물이다”. 롬6:11, “이와같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니라”. 교수님이 던진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은 키득 키득 웃었지만 거름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 덤져짐으로써 “아, 나는 이제 죽었구나. 그래 이왕 목회자가 된다면 주님을 위해 죽는 목회자가 되어야지” 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졸업식 며칠 전에는 교실에서 졸업반 학생에게 이런 것을 써 보도록 했습니다. 제목이 “권리포기증서”입니다. 목회자가 되면 무슨 권리를 포기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 ...........을 포기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시간” 이라고 쓰고 어떤 사람은 “내 생명”이라고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욕심”이라고 쓰고 어떤 사람은 “내 전부”라고 썼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죄송한 말이지만 임직을 받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진 사람중에 도대체 그 사람이 무엇을 포기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사람이 많습니다. 임직하기 전, 주일 가끔 빼먹고 운동갔습니다. 임직후 같습니다. 임직 전에 온전한 십일조 못 드렸습니다. 임직후에도 못 드립니다. 임직전에 공예배에 안 나왔습니다. 임직후에도 똑같습니다. 차라리 임직전에는 겸손이라도 하고 인사라도 잘 했습니다. 임직후에는 겸손하지도 않고 인사도 잘 안합니다. 도대체 그가 왜 임직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달라진 것은 직분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까? 3절 다시 봅니다. 행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예수님의 제자는 먼저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은 기도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양식이요 무기입니다. 겸손히 배워야 하나님의 지혜를 받습니다. 칭찬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신적 성품을 믿음으로 본받으면 누구에게나 칭찬받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7절 보십시.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여기에 “복종”이 나옵니다. “순종”은 믿음의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믿으면 순종합니다. 우리가 믿되 순종할만큼 믿어야 합니다. 복음의 목적은 다만 믿음이 아닙니다. 믿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저는 교회역사에서 예수님을 위해 철저히 자기를 순종하며 살았던 많은 제자들을 통해 은혜받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프랑스의 잔느 귀용을 소개했고 오늘은 미국의 윌리엄 보든을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1800년대 말, 미국의 한 거부 낙농회사 상속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며 예일대학과 프린스턴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는 늘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각오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중동을 여행하는 데 중동의 영혼들이 그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을 중동 영혼들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이 한 마디를 씁니다 “남김없이”. 그 뒤에 예일대학에 들어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아침마다 쉬지 않고 성경읽고 기도했습니다. 4학년을 마칠 때 성경에 또 한 마디를 썼습니다. “후퇴없이”. 주님을 위한 길을 뒤돌아 보지 않고 달리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드디어 대학졸업후 이집트로 갔습니다. 거기서 의욕적으로 선교를 시작했는 데 웬일입니까? 그만 척수막염에 걸려 고생하다가 25세 나이로 죽어 카이로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어가면서 성경이 마지막으로 한 구절을더 썻습니다. “후회없이”. 그가 쓴 세 마디가 우리가 사도행전의 제자들을 따라가는 표지입니다. “남김없이”(No Resreves), “후퇴없이”(No Retreats), 그리고 “후회없이”(No Regrets). 여러분, 우리의 교회가 더 본질적이 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더 본질에 충실하기를 바랍니까? 기도와 말씀을 신앙의 본질로 끝까지 붙잡겠습니까? 교회에서 봉사하고 일하고 사역하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와 능력보다 앞서지 않음을 믿습니까? 사역에 지치고 일에 짓눌리지 않도록 날마나 여러분의 영혼을 살피겠습니까? 우리가 좋은 집사, 좋은 권사, 좋은 장로, 좋은 목회자, 좋은 신자되기 위해 좋은 제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제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제자, 하나님의 성품을 구비한 제자로 끝까지 순종하며 살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남김없이”. (No Resreves), 주님을 위하여 “후퇴없이”, (No Retreats), 그리고 주님을 위해 “후회없이”. (No Regrets), 살겠습니까? |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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