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롬12장1- 2) 성경본문: 로마서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1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은 우리에게 밖에서 다가온 일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외부의 일을 우리는 조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데 그것은 그 일에 반응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일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반응할 뿐입니다. 우리가 잘 반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입니다. 어느 시장에 두 종류의 소고기가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하나의 고기에는 “99% 무지방”이라고 적혀 있고 또 하나의 고기에는 “1% 지방 포함”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기를 택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어떤 고기를 선택하나 보니까 “99%, 무지방”이 “1% 지방 포함”보다 두 배나 많았습니다. 사실 내용은 똑같습니다. 99% 무지방이나 1% 지방이나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99% 무지방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다음에 “98% 무지방”과 “1% 지방”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98% 무지방을 선택했습니다. “1% 지방 포함”보다 지방이 더 많은 데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고기를 사는 데도 분별력을 사용한 것입니다. 핸드폰 살 때도 깊은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핸드백이 명품인지 짝퉁인지 어떻게 구별합니까? 몇 가지 관점이 있답니다. 남편이 사다 준 것은 틀림없이 짝퉁이랍니다. 그러나 애인이 사다 준 것이라면 명품중에 명품이랍니다. 노처녀나 젊은 부인이 들고 다니면 명품일 가능성이 높답니다. 그런데 아이를 둘, 셋 둔 중년 부인이 들고 다니면 짝퉁이 의심된답니다. 비가 올 때 머리 위에 올리고 다니면 100% 짝퉁이랍니다. 비가 올 때 가슴에 안고 다니면 틀림없는 명품이랍니다. 커피숍에 있을 때 무릎 위에 올려 놓으면 명품일 가능성이 높답니다. 그러나 바닥에 팽개쳐 놓으면 분명히 짝퉁이랍니다.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대예배때 들고 나오면 거의 명품이랍니다. 그러나 새벽기도때 들고 나오면 확실히 짝퉁이랍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분별력은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좋고 나쁨의 문제까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필요한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 분별력은 영적인 분야로 갈수록 우리에게 더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영적인 분야의 분별력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소중히 여길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우리 생의 가치로 삼고 무엇으로 우리 삶의 중요한 목적으로 삼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올해 주제의 말씀 롬12:1-2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무엇으로 삼을 것이냐를 묻습니다. 2절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에 “분별”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무엇을 분별하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롬12:1-2절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롬12:1-2은 “변화”가 키워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화되느냐? 첫째는 하지 말고, 둘째는 해야 합니다. 하지 말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대“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마음“은 ”영“입니다. 우리안에 있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안에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고, 기도하게 함으로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합니다. 그것이 ”변화“의 과정입니다. 그러면 왜 변화되어야 합니까? 다만 세상과 분리되기 위해서? 다만 성령으로 새롭게 되기 위하여? 그것은 변화의 방법이고 과정입니다. 변화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말로는 2절,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다음에 “하나님의 선하시고”로 바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원문에 보면 “마음으로 새롭게 되어” 다음에 한 마디가 더 나옵니다. “에이스 토 도키마제인”, 이 말은 “무엇 무엇을 시험하기 위하여”의 뜻입니다. “도키마제인”은 “시험, 증명, 조사”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증명하고, 시험하고, 부합하고, 실현해 내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안에서 변화되어야 할 이유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복에 두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새로워 져야 한다“. 그러나 다만 ”기분좋은 만족감“이 행복이라면 그 행복이 우리를 충분히 구원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아 실현이 변화의 목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또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성경의 목적이 있습니다. 2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위하여“. 이것이 변화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우리 변화의 목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 뿐 아니라 그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기 원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현해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최고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야 할 이유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배, 경외, 찬양, 전도, 봉사, 선교, 구제, 사랑, 나눔, 실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신앙생활을 열고 닫는 마스터 키입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뜻의 몇 가지 오해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1. 길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어떤 길을 묻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대학을 가는데 의대를 가느냐 공대를 가느냐? 내가 이 아가씨와 결혼하는 것이 좋으냐 저 아가씨와 결혼하는 것이 좋으냐? 그러나 나중에 보면 어떤 길을 선택해도 큰 문제가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길로 가느냐보다 하나님과 함께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시48:14에 중요한 말씀 나옵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라”. 믿습니까? 하나님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는 영원히 우리 하나님입니다. 어느 길로 가느냐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가는 길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길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대개 그것이 감춰져 있고 하나님은 그것을 잘 나타내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신명기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신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일은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모르게 하려고 일부로 그 뜻을 감추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숨어 있으면서 우리가 뭔가 알려고 하면 “나 찾아봐라” 하고 숨박꼭질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뜻을 찾는 것은 좋아하시고 언제라도 그 뜻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책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의 계시는 충분하고 충족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마11:25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게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지혜와 목적으로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3.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수준만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심리적 동기는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가 하나님의 것이듯 미래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다 알 수 없고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미래를 다 알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해집니다. 우리는 다만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과 함께 갈 뿐입니다. 송정미의 노래 “한걸음처럼”, “한걸음 한걸음 주님께로 가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욥23:10, “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오직 하나님만 나의 길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미래를 통째로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맡기고 가는 것입니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미래는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우리가 할 일은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하라”. 신뢰는 몸을 기대는 것입니다. “의지하라”. 지팡이나 보조기를 잡고 걷는 것입니다. “인정하라”.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 말씀의 영역입니다. “He will make straight your paths”. “그가 그 길을 곧게 하리라”.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4. 하나님의 뜻은 나의 소명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그것이 나와 관련될 때 소명을 통해 주어집니다. 소명은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소명은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일이라고 내가 믿는 일입니다. 그것은 나의 인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소명은 나의 기질과 재능과 인생 경험에서 자라나지만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want to be(워너비)”란 말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would to be(우더비)”가 있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shoud to be(수더 비)”가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개 내가 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일을 자유롭게 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줍니다. 신학자 뷰크너가 말해습니다. ”소명은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평생 하도록 부름 받는 일”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일과 소명은 다릅니다. 보험업자가 단순히 보험을 파는 것은 일입니다. 그러나 보험으로 사람에게 행복을 파는 것은 소명입니다. 스포츠 가게를 운영하는 것은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 오는 사람의 건강을 돌보는 것은 소명입니다. 중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는 것은 일입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인생을 가르치는 것은 소명입니다. 비서로 일하는 것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일로 회사를 살리는 것은 소명입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일하는 것은 일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통해 영혼을 살리는 일은 소명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소명과 함께 나타납니다. 5.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분별합니까? 저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 세 가지는 함께 갑니다. 그것은 “들으라”, “기다리라”, 그리고 “행하라”입니다. ☛ 들으라 하나님의 뜻은 먼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옛날에는 들렸으나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사무엘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그가 응답했습니다. 삼상3:10,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사도 바울이 다매섹으로 가다가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음성을 듣고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고넬료에게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고넬료야,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 고넬료가 듣고 베드로를 청했고 모든 식구들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위해 지금도 말씀합니다. 문제는 이 음성을 성경을 통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가장 명확히 기록된 하나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세 종류의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 66권입니다. ♣선포된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한 설교입니다. ♣들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기본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모든 성경”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성경입니다. 율법의 말씀, 예언의 말씀, 복음의 말씀, 서신의 말씀, 모든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선지자나 사도들을 통해 하신 말씀, “모든 성경”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가 가는 길에 어떤 때는 교훈을, 어떤 때는 책망을, 어떤 때는 바르게 함을, 어떤 때는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을 줍니다. 성경을 제쳐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우물없는 사막에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까? 먼저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에는 충분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역사속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4세기 성자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할 때 롬13:12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그 말씀에 붙잡혀 그는 그 후 한번도 세상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16세기, 마틴 루터, 수도원에서 죄의식과 싸우던 그가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에 붙잡혀 그는 위대한 <종교개혁자>가 되었습니다. 폐병걸려 병원에서 죽어가던 미국의 한 청년, 오랄 로버츠가 병실에 걸린 성경 한 구절 읽었습니다. 요한3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으로 그는 일어났고 수많은 대학과 교회를 세우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까? 먼저 성경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언제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음성을 들었든지, 환경을 통해 확신했든지, 사람들의 조언을 들었든지 반드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메시지와 일치하느냐? 성경이 의도하는 하나님의 본래 계획과 부합하느냐? 무엇보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성품과 일치하느냐? 다시 롬12:2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의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세 가지 성품을 말합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려면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의 발로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내 기준으로 온전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온전성입니다. 구약의 요셉이 형들에게 배신당해 애굽으로 팔렸습니다. 총리가 되어 보니 어느날 형들이 거지꼴로 양식구하러 왔습니다. 이때 요셉이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형들에 대해 복수해야 합니까? 용서해야 합니까?” 세 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형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입니까? 죄에 대해서는 심판하라는 말씀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 하나님 마음은 아닙니다. 그러면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용서하고 승리했습니다. 제가 오래전 이스라엘 공부하러 갈 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은 있는 데 돈은 없고 환경은 안 열리는 데 마음에 감동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어느날 성경 읽는 데 시32:8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아무도 도와준다는 사람도 없는 데 하나님이 “네 길을 가르쳐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주님, 공부하러 가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것입니까?” 답은 “그렇다”였습니다. 그 순간 바로 짐싸고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또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교수가 되어야 합니까?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까?” 어느날 도서관에서 공부마치고 집으로 오는 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너를 목회자로 불렀다”. 그래서 첫 번째 불러 주는 교회로 가겠다고 기도했더니 전주에서 불렀습니다. 그때도 물었던 질문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에 부합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이루는 것입니까?”. 그때도 “예”하고 한국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설교를 통하여,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통하여, 심지어 자연만물을 통하여 말씀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장 좋은 통로입니다. 기도하면서 들으면 반드시 그 중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받는 감동은 성령이 주시는 음성입니다. 존경하는 멘토, 스승, 부모, 친구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새를 통해 꽃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합니다. 그때마다 분별의 기준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듣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계속적인 인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음성들려 준다고 우리가 언제나 쉽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그 뜻을 받을 준비가 안되어 있거나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음성도 소용이 없습니다. 땅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지만 언제나 씨를 뿌리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겨울이면 봄을 기다려야 합니다. 가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우리 영혼의 토양을 부드럽게 하는 영적 훈련입니다. 시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급증은 하나님보다 앞서 가는 불신앙의 자세입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남긴 책이 있습니다. 『나의 빛이 되어라(Come be My Light)』책입니다. 이 책은 테레사가 쓴 개인 편지들을 모아 출판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테레사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그가 적어도 수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세기의 성녀 테레사에게 칠흑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 있었다니. 언제나 기도하면 들어줄 것만 같은 테레사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하셨다니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테레사가 그때 어떻게 했느냐입니다. 크게 세 가지를 했답니다. 첫째 실망하지 않고 기다렸답니다. 그는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둘째는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다면 그 이전에 준 말씀을 아직도 실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곰곰이 이미 받은 말씀중에 내가 순종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것 저것 생각났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만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하신 말씀이 먼저 실천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하나님이 계속 말씀하지 않으면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리라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동화책을 읽어줘야만 엄마가 아니다. 엄마는 아무 말없이 아기와 함께 있기만 해도 엄마다. 실제로 엄마는 아기에게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고 같이 있어 주는 시간이 더 많다. 하나님도 그렇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해도 나는 그분을 사랑하리라. 그분이 나에게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것처럼 나는 그 분을 더 사랑하리라”. 테레사의 위대성은 그가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어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테레사의 비유대로 엄마는 아무 말없이 아기와 함께 있기만 해도 엄마입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고 동화책을 읽어줘야만 엄마가 아닙니다. 실제로 엄마는 아기에게 말하는 것보다 말없이 같이 있어 주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린다고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하나님이 나를 버렸거나 하나님이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면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우리가 할 일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입니다. 광야에서의 백성들의 삶은 간단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뜨면 행진하고 그렇지 않으면 머물렀습니다. 민9:17, 19-20,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도 간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면 가면 됩니다. “아니다, 잘 모르겠다” 하면 머물면 됩니다. “앞으로 가고 멈추고 또 한 걸음 가다가 멈추고”, “가고 멈추고, 멈추고 가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매일 하늘을 보고 구름기둥이, 불기둥이 떳나 안떳나 확인해야 합니다. 하루 하루 다르기 때문에 매일 해야 합니다. 떴으면 일어날 준비, 안 떴으면 주저 앉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겠습니까? 이를 위해 매일 성경읽고 기도하고, 말씀듣고 묵상하는 삶을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 순종하겠습니까? 그것이 내 생각과 달라도, 내 몸이 피곤해도, 환경이 안 따라줘도, 하나님의 뜻이면 즉시 일어나 순종하시겠습니까? “듣고, 보고, 가고, 멈추고, 또 가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그 위대한 축복의 삶이 올해 시작되시기 바랍니다. |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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