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대상17장22- 24; 눅19장1- 1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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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대상17장22-24;눅19장1-10)
성경본문: 역대기상17:22-24; 누가복음19:1-10
역대기상17:22-24;
22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23 여호와여 이제 주의 종과 그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24 견고하게 하시고 사람에게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시라 하게 하시며 주의 종 다윗의 왕조가 주 앞에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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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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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은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이셨지만 태어나면서 곱사등을 가지고 태어나셨답니다. 자랄 때는 많은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롬체라는 딸을 가진 함부르크의 사업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프롬체를 보자 한눈에 반하여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은 프롬체는 깜짝 놀랐습니다. 곱사등을 가진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청년의 청혼에 혐오감을 감추려고 애를 썼습니다.
모세는 당당한 태도로 프롬체에게 접근하였습니다.
“부부는 하늘에서 점지해준다는 것을 당신은 믿으시오?”라고 모세는 프롬체에게 물었습니다.
“네 물론 믿지요.”
신앙심이 깊은 프롬체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어떤 여인이 장차 아내가 될 것인지를 이미 점지해 주었다오. 하나님은 그 사내아이의 신부감이 될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소. 네 아내는 특별히 사랑스러운 여자이기는 하지만 곱사등을 갖고 태어날 것이다”.
그 때 ‘오! 안돼요!’ 사내아이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오.
“너무 가혹하십니다. 차라리 그녀를 아름답게 해 주시고 저에게 곱사등을 주십시오”라고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결혼하여 평생을 행복한 부부로 살았답니다.
좋은 가정은 외형적으로 조금의 결함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적인 자세,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가정의 목적을 헤아리는 가정입니다.
모세 멘델스존의 신앙과 해학이 곁들인 당당함이 결국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적 자신감과 인간적 해학이 필요한 곳이 가정입니다.
요즘의 보고에 의하면 어른들이 하루 130명씩 가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청소년들이 아니라 어른 가출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른들도 철이 없어 아이 같은 어른이 많이 있습니다.
빈곤과 가정불화 등으로 지난해에만 4만 7,254명의 어른이 가출하였습니다.
이 수는 IMF 때의 2배에 해당합니다.
오히려 청소년 가출은 다소 줄어 작년 한 해 동안 청소년 가출은 1만 3,374명이었습니다. 어른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이 점점 소홀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비 샌더스가 쓴 ‘돌고래에게 배운다’란 책을 보았습니다.
돌고래는 무리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맨 바깥에 수컷들이 열을 짜고, 그 안쪽에 암컷들이 열을 짜고, 그리고 한 가운데 어린 돌고래가 열을 짠다고 합니다. 돌고래는 가족의식과 동료의식이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돌고래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위협이 있고 빈곤이 있다고 하여 어른이 가족을 버리고 가출하는 것은 돌고래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우리 사회에 가족 간의 대화가 날로 줄고 있습니다.
가장의 20%이상은 전혀 가족과의 대화가 없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은 산모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율이 세계에서 제일 낮습니다.
이혼률은 거의 5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나홀로 가구’가 250만 가구나 됩니다. 가정에 대한 의미와, 책임과, 목적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가정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서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고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창조하시므로 천지창조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하므로 마무리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의 첫 번째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였습니다.
성경은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기관인가 하는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가정은 교회의 원형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에 예루살렘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이었습니다.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눔바의 집이었습니다.
빌리보교회는 루디아의 집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모든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인 곳이 교회와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가 주인이고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가정을 소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없이 사람된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란 말은 원래 ‘살암’이었다고 합니다.
‘살’이란 살덩어리를 말입니다.
그리고 ‘암’이란 여자 즉 어머니를 뜻한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원래 뜻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온 살덩어리”란 말입니다. 참 가정적인 표현이지요. 사람은 모름지기 가정적이어야 합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여리고 사람인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보고 싶은 마음에 나왔지만 키가 작고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몰려나와 있어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고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머무시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부정한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남의 것을 억지로 탈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도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삭개오는 늦게 나왔기 때문에 뽕나무 위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좀 일찍 나오지”라고 그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가 늦게 나왔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기에 예수님도 그를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의 집이 예수님을 모신 집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하신 복된 가정이 된 이유를 살펴보고 우리의 가정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가정입니다.
3절과 4절에는 말합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삭개오는 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간절한 마음, 보고 싶어 하는 그의 열정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5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위로 삭개오를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내려보고 있고 예수님이 우러러 보게 하는 불충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삭개오를 우러러 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무신 동기는 보고자 하는 삭개오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보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있고, 열심이 있는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열심히 살고, 열심히 가족이 함께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성경쓰기에 참여하고, 열심히 교회 출석하는 가정은 평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보기를 원하는 열정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가시덤불이 불꽃에 타지 않는 신비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기이한 광경을 보리라”고 하면서 험한 산을 올라갔습니다.
호렙산은 올라가기가 그리 쉬운 산이 아닙니다.
힘들게 올라갔을 것입니다.
보려고 하는 열망과 호기심이 없이는 올라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산에 올라갔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모세는 나이 40세 때에는 문제를 보았으나 80세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기이히 여겨”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외로운 들을 지나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런 보기를 원하는 호기심이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고,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에 예수님을 보리라는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는 열망을 가진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하시려면 예수님을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교회에 나오시면 예수님을 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봅니다.
기도를 하면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도 계시는데 보지 못하는 분 안 계십니까?
키가 작아서도 아니고 눈이 나빠서도 아닙니다.
간정한 마음이 있으면 지금 여기에 계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삭개오의 다른 식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다른 식구들은 삭개오 한 사람 덕분에 예수님을 모시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 되게 하고 예수님이 그 집에 머무시게 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의 간절한 열망이 예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갈까요?
현대에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마태복음 5:8에는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시편 11:7에는 말합니다. “정직한 자가 그 얼굴을 뵈오리라.”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정직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일 것입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일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할 테니 말입니다.”
어떤 이는 청결은 성결의 사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성결한 자입니다.
이런 자의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둘째,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가정입니다.
뽕나무 위의 삭개오를 보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 때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6절은 그의 신속하고 간절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의 마음의 자세는 이미 예수님이 머무실만한 집이었습니다.
삭개오의 태도를 보세요.
첫째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즐거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기꺼이 맞았습니다.
셋째는 영접하였습니다.
환영하며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이미 하나님이 머무시는 마음이었고 천국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 이런 비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고 머무시는 그 기쁨 외에 어떤 것도 그에게는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손님을 맞는 자세를 보면 기꺼이 맞이하는 사람이 있고,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태도에 따라 상대방의 느낌은 천지차이입니다.
노천명 시인의 ‘임이 오시던 날’이란 시가 있습니다.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여인의 속절없는 애틋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주님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마음이 이만도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바라고 기꺼이 영접하는 가정에 들어가시기를 원하시고 그 집에 머무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요한복음 1:12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사람, 모시는 사람은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모시면 머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수넴여인은 엘리사에게 작은 방을 마련하였습니다. 작은 침상과 촛불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런 모시는 정성이 결과적으로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살게 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베다니의 집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곳에 지나실 때마다 모신 흔적이 있습니다. 이런 알뜰하고 정성스런 대접이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주님이 슬퍼하시며 죽은 지 나흘 되었지만 다시 살리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왔습니다. 이런 극진한 마음이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영접하는 첫 번째 이방인 개종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소자를 대접하고 모시면 그것이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예수님을 대하듯 대접하세요.
집에 모셔 들이세요.
이것이 예수님을 모시는 방법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영접하면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면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영접하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 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여 주인 되게 하여야 합니다.
가정의 주인이 내가 아니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가정의 주인 되게 하여야 합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자신의 집에 들어와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억지로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사도행전 16:15은 말합니다. 바울이 들어와도 복을 받고 그 집에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을 모신 가정이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 싫은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보세요.
로마서 1:28에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좋아하면 머무십니다. 그러나 싫어하면 떠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떠난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등입니다.
세상에 못된 것은 죄다 하나님이 마음에서 떠난 결과입니다.
우리가 바르게살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바르게 서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시고 머무십니다.
“주 네 맘에 들어가시려 하네. 왜 모시지 않느냐.
이 세상의 그 누가 막으리요.
너의 대답 무엇이냐.
언제나 주님은 기다리셨고 또 지금도 기다리셔.
주님께선 문 열기 원하시며 지금 기다리시네.”
주님을 기다리게 마시고 모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가정에 주인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께 회개하는 가정입니다.
8절에는 삭개오의 용감한 자기 회개가 나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며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 말은 삭개오의 자발적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강요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회개합니다.
회개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하나가 되어야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죄를 알고, 잘못을 느끼고, 새로운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삭개오는 아는 것에 머문 것이 아닙니다.
느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줄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나의 사랑하는 책’에서 “회개는 내적 가책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외적 행동이 없는 회개는 참 회개가 아닙니다.
완전하게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은 구원에 이르는 가정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가정은 회개로 완성된 가정입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은 회개한 가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합니다.
삭개오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집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이 그 온 집에 이르렀습니다. 삭개오 한 사람 덕에 온 가정이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입습니다.
지난 5월 7일 신문에는 아름답고 훈훈한 기사가 났습니다.
어떤 70대 할머니가 37년 전에 기차 무임승차한 것을 갚기 위하여 30만원과 사과 편지를 서울역에 두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워 그렇게 했는데 이제 갚고 싶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를 믿는 분이라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회개는 실제로 자신의 것으로 갚는 것입니다.
의지가 없는 회개는 속임수입니다.
회개는 가장 온전한 제사입니다.
사죄의 은총이 있어야 완전히 예수님이 머무시고 떠나지 않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1서 1:9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회개가 없는 불의하고 죄악이 있고 더러운 곳은 예수님이 머무실 수 없습니다. 이런 더러운 곳은 예수님이 머무실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어떤 죄 많은 여인이 와서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진 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300데나리온이면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1500만원은 되는 향유입니다.
이 여인은 이 비싼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이 여인의 많은 죄가 다 사해졌다고 예수님은 사죄를 선포하십니다. 이 여인의 고 비싼 대가가 없이는 참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참 회개가 가능합니다.
어느 회사에 있는 값비싼 컴퓨터가 고장이 났습니다.
컴퓨터 기술자는 하루 종일 거대한 컴퓨터를 상대로 고장 난 부분을 찾기 위해 씨름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고장 난 곳을 발견하여 한군데에 분필로 하얀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그 부분의 부품을 교체하여 완전히 기능을 회복하였습니다. 이 기술자는 수리비로 5만 달러를 청구하였습니다.
이 회사는 수리비가 너무 비싸다고 하여 자세한 명세 계산서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술자는 “분필로 동그라미 치는데 1달러, 동그라미 칠 부분을 찾는데 49,999달러”라고 계산서를 적어 왔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고치고 돌이키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이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결론
어느 책에 보니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Women pack, but they never carry”(여자들은 짐은 싸지만 운반하진 않는다)라고 조크를 하였습니다.
제가 어느 목사님께 그 책을 보여주었더니 “맞네. 맞어”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은 “짐 싸는 게 짐 드는 것보다 힘들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목사님이시죠?
어느 것이 더 힘들고, 더 중요하다기 보다 둘 다 중요하지요. 그런데 역시 짐은 여자가 싸는 게 좋고, 짐을 드는 건 남자가 좋아요. 남편과 아내의 차이를 인정하십시오. 좋은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일을 덜어줍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일의 가치를 존중합니다. 이런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감사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합니다.
이런 가정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런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인 가정은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존귀하고 주인 되시는 분이십니다.
가정의 왕이나 더구나 폭군이 되지 마십시오.
집안의 왕은 주님이십니다. 집안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의 족장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제사장 되어야 합니다.
역대상 17:24에는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주 앞에서 견고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연동의 가정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외적 행동으로 회개함으로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대상17장22-24;눅19장1-10) ◀
성경본문: 역대기상17:22-24; 누가복음19:1-10
역대기상17:22-24;
22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23 여호와여 이제 주의 종과 그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24 견고하게 하시고 사람에게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시라 하게 하시며 주의 종 다윗의 왕조가 주 앞에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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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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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은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이셨지만 태어나면서 곱사등을 가지고 태어나셨답니다. 자랄 때는 많은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롬체라는 딸을 가진 함부르크의 사업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프롬체를 보자 한눈에 반하여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은 프롬체는 깜짝 놀랐습니다. 곱사등을 가진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청년의 청혼에 혐오감을 감추려고 애를 썼습니다.
모세는 당당한 태도로 프롬체에게 접근하였습니다.
“부부는 하늘에서 점지해준다는 것을 당신은 믿으시오?”라고 모세는 프롬체에게 물었습니다.
“네 물론 믿지요.”
신앙심이 깊은 프롬체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어떤 여인이 장차 아내가 될 것인지를 이미 점지해 주었다오. 하나님은 그 사내아이의 신부감이 될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소. 네 아내는 특별히 사랑스러운 여자이기는 하지만 곱사등을 갖고 태어날 것이다”.
그 때 ‘오! 안돼요!’ 사내아이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오.
“너무 가혹하십니다. 차라리 그녀를 아름답게 해 주시고 저에게 곱사등을 주십시오”라고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결혼하여 평생을 행복한 부부로 살았답니다.
좋은 가정은 외형적으로 조금의 결함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적인 자세,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가정의 목적을 헤아리는 가정입니다.
모세 멘델스존의 신앙과 해학이 곁들인 당당함이 결국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적 자신감과 인간적 해학이 필요한 곳이 가정입니다.
요즘의 보고에 의하면 어른들이 하루 130명씩 가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청소년들이 아니라 어른 가출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른들도 철이 없어 아이 같은 어른이 많이 있습니다.
빈곤과 가정불화 등으로 지난해에만 4만 7,254명의 어른이 가출하였습니다.
이 수는 IMF 때의 2배에 해당합니다.
오히려 청소년 가출은 다소 줄어 작년 한 해 동안 청소년 가출은 1만 3,374명이었습니다. 어른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이 점점 소홀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비 샌더스가 쓴 ‘돌고래에게 배운다’란 책을 보았습니다.
돌고래는 무리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맨 바깥에 수컷들이 열을 짜고, 그 안쪽에 암컷들이 열을 짜고, 그리고 한 가운데 어린 돌고래가 열을 짠다고 합니다. 돌고래는 가족의식과 동료의식이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돌고래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위협이 있고 빈곤이 있다고 하여 어른이 가족을 버리고 가출하는 것은 돌고래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우리 사회에 가족 간의 대화가 날로 줄고 있습니다.
가장의 20%이상은 전혀 가족과의 대화가 없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은 산모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율이 세계에서 제일 낮습니다.
이혼률은 거의 5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나홀로 가구’가 250만 가구나 됩니다. 가정에 대한 의미와, 책임과, 목적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가정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서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고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창조하시므로 천지창조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하므로 마무리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의 첫 번째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였습니다.
성경은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기관인가 하는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가정은 교회의 원형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에 예루살렘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이었습니다.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눔바의 집이었습니다.
빌리보교회는 루디아의 집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모든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인 곳이 교회와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가 주인이고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가정을 소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없이 사람된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란 말은 원래 ‘살암’이었다고 합니다.
‘살’이란 살덩어리를 말입니다.
그리고 ‘암’이란 여자 즉 어머니를 뜻한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원래 뜻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온 살덩어리”란 말입니다. 참 가정적인 표현이지요. 사람은 모름지기 가정적이어야 합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여리고 사람인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보고 싶은 마음에 나왔지만 키가 작고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몰려나와 있어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고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머무시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부정한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남의 것을 억지로 탈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도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삭개오는 늦게 나왔기 때문에 뽕나무 위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좀 일찍 나오지”라고 그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가 늦게 나왔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기에 예수님도 그를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의 집이 예수님을 모신 집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하신 복된 가정이 된 이유를 살펴보고 우리의 가정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가정입니다.
3절과 4절에는 말합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삭개오는 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간절한 마음, 보고 싶어 하는 그의 열정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5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위로 삭개오를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내려보고 있고 예수님이 우러러 보게 하는 불충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삭개오를 우러러 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무신 동기는 보고자 하는 삭개오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보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있고, 열심이 있는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열심히 살고, 열심히 가족이 함께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성경쓰기에 참여하고, 열심히 교회 출석하는 가정은 평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보기를 원하는 열정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가시덤불이 불꽃에 타지 않는 신비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기이한 광경을 보리라”고 하면서 험한 산을 올라갔습니다.
호렙산은 올라가기가 그리 쉬운 산이 아닙니다.
힘들게 올라갔을 것입니다.
보려고 하는 열망과 호기심이 없이는 올라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산에 올라갔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모세는 나이 40세 때에는 문제를 보았으나 80세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기이히 여겨”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외로운 들을 지나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런 보기를 원하는 호기심이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고,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에 예수님을 보리라는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는 열망을 가진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하시려면 예수님을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교회에 나오시면 예수님을 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봅니다.
기도를 하면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도 계시는데 보지 못하는 분 안 계십니까?
키가 작아서도 아니고 눈이 나빠서도 아닙니다.
간정한 마음이 있으면 지금 여기에 계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삭개오의 다른 식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다른 식구들은 삭개오 한 사람 덕분에 예수님을 모시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 되게 하고 예수님이 그 집에 머무시게 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의 간절한 열망이 예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갈까요?
현대에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마태복음 5:8에는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시편 11:7에는 말합니다. “정직한 자가 그 얼굴을 뵈오리라.”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정직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일 것입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일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할 테니 말입니다.”
어떤 이는 청결은 성결의 사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성결한 자입니다.
이런 자의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둘째,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가정입니다.
뽕나무 위의 삭개오를 보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 때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6절은 그의 신속하고 간절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의 마음의 자세는 이미 예수님이 머무실만한 집이었습니다.
삭개오의 태도를 보세요.
첫째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즐거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기꺼이 맞았습니다.
셋째는 영접하였습니다.
환영하며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이미 하나님이 머무시는 마음이었고 천국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 이런 비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고 머무시는 그 기쁨 외에 어떤 것도 그에게는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손님을 맞는 자세를 보면 기꺼이 맞이하는 사람이 있고,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태도에 따라 상대방의 느낌은 천지차이입니다.
노천명 시인의 ‘임이 오시던 날’이란 시가 있습니다.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여인의 속절없는 애틋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주님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마음이 이만도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바라고 기꺼이 영접하는 가정에 들어가시기를 원하시고 그 집에 머무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요한복음 1:12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사람, 모시는 사람은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모시면 머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수넴여인은 엘리사에게 작은 방을 마련하였습니다. 작은 침상과 촛불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런 모시는 정성이 결과적으로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살게 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베다니의 집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곳에 지나실 때마다 모신 흔적이 있습니다. 이런 알뜰하고 정성스런 대접이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주님이 슬퍼하시며 죽은 지 나흘 되었지만 다시 살리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왔습니다. 이런 극진한 마음이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영접하는 첫 번째 이방인 개종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소자를 대접하고 모시면 그것이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예수님을 대하듯 대접하세요.
집에 모셔 들이세요.
이것이 예수님을 모시는 방법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영접하면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면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영접하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 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여 주인 되게 하여야 합니다.
가정의 주인이 내가 아니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가정의 주인 되게 하여야 합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자신의 집에 들어와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억지로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사도행전 16:15은 말합니다. 바울이 들어와도 복을 받고 그 집에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을 모신 가정이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 싫은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보세요.
로마서 1:28에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좋아하면 머무십니다. 그러나 싫어하면 떠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떠난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등입니다.
세상에 못된 것은 죄다 하나님이 마음에서 떠난 결과입니다.
우리가 바르게살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바르게 서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시고 머무십니다.
“주 네 맘에 들어가시려 하네. 왜 모시지 않느냐.
이 세상의 그 누가 막으리요.
너의 대답 무엇이냐.
언제나 주님은 기다리셨고 또 지금도 기다리셔.
주님께선 문 열기 원하시며 지금 기다리시네.”
주님을 기다리게 마시고 모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가정에 주인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께 회개하는 가정입니다.
8절에는 삭개오의 용감한 자기 회개가 나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며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 말은 삭개오의 자발적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강요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회개합니다.
회개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하나가 되어야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죄를 알고, 잘못을 느끼고, 새로운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삭개오는 아는 것에 머문 것이 아닙니다.
느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줄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나의 사랑하는 책’에서 “회개는 내적 가책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외적 행동이 없는 회개는 참 회개가 아닙니다.
완전하게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은 구원에 이르는 가정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가정은 회개로 완성된 가정입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은 회개한 가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합니다.
삭개오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집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이 그 온 집에 이르렀습니다. 삭개오 한 사람 덕에 온 가정이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입습니다.
지난 5월 7일 신문에는 아름답고 훈훈한 기사가 났습니다.
어떤 70대 할머니가 37년 전에 기차 무임승차한 것을 갚기 위하여 30만원과 사과 편지를 서울역에 두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워 그렇게 했는데 이제 갚고 싶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를 믿는 분이라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회개는 실제로 자신의 것으로 갚는 것입니다.
의지가 없는 회개는 속임수입니다.
회개는 가장 온전한 제사입니다.
사죄의 은총이 있어야 완전히 예수님이 머무시고 떠나지 않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1서 1:9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회개가 없는 불의하고 죄악이 있고 더러운 곳은 예수님이 머무실 수 없습니다. 이런 더러운 곳은 예수님이 머무실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어떤 죄 많은 여인이 와서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진 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300데나리온이면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1500만원은 되는 향유입니다.
이 여인은 이 비싼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이 여인의 많은 죄가 다 사해졌다고 예수님은 사죄를 선포하십니다. 이 여인의 고 비싼 대가가 없이는 참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참 회개가 가능합니다.
어느 회사에 있는 값비싼 컴퓨터가 고장이 났습니다.
컴퓨터 기술자는 하루 종일 거대한 컴퓨터를 상대로 고장 난 부분을 찾기 위해 씨름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고장 난 곳을 발견하여 한군데에 분필로 하얀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그 부분의 부품을 교체하여 완전히 기능을 회복하였습니다. 이 기술자는 수리비로 5만 달러를 청구하였습니다.
이 회사는 수리비가 너무 비싸다고 하여 자세한 명세 계산서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술자는 “분필로 동그라미 치는데 1달러, 동그라미 칠 부분을 찾는데 49,999달러”라고 계산서를 적어 왔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고치고 돌이키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이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결론
어느 책에 보니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Women pack, but they never carry”(여자들은 짐은 싸지만 운반하진 않는다)라고 조크를 하였습니다.
제가 어느 목사님께 그 책을 보여주었더니 “맞네. 맞어”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은 “짐 싸는 게 짐 드는 것보다 힘들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목사님이시죠?
어느 것이 더 힘들고, 더 중요하다기 보다 둘 다 중요하지요. 그런데 역시 짐은 여자가 싸는 게 좋고, 짐을 드는 건 남자가 좋아요. 남편과 아내의 차이를 인정하십시오. 좋은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일을 덜어줍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일의 가치를 존중합니다. 이런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감사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합니다.
이런 가정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런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인 가정은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존귀하고 주인 되시는 분이십니다.
가정의 왕이나 더구나 폭군이 되지 마십시오.
집안의 왕은 주님이십니다. 집안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의 족장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제사장 되어야 합니다.
역대상 17:24에는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주 앞에서 견고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연동의 가정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외적 행동으로 회개함으로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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