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장로교회 1.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한국선교 (1)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 선교사 입국 선교 활동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교 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 동안 선배 선교사 인 헤본(James C. H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 풍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드디어 아펜셀라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발을 내딛었고,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6년 5월 11일부터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신중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입국하자마자 이와 같이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국 선교사업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1887넌 가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개성, 솔내, 펑양, 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약품과 성경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여행은 솔내에 있는 교인들의 초청에 의한 것으로서 솔내 교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1889년 봄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신혼의 부인과 함께 신혼 여행을 겸하여 개성, 솔내, 평양, 의주 등지를 여행하면서 약 600여명의 병자를 돌아보았다. 언더우드 목사는 의학을 공부한 바 있고 그의 부인은 릴리아스 호튼 의사의 미망인이었다. 이들은 1889년 4월 27일에 의주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는 세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세례 배푸는 것을 금하였기에 이들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쪽으로 가서 33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 부른다. (2) 호주 장로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 (J. Henry Davis)가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 열은 매우 왕성하였다. 데이비스 목사는 1857년 빅토리아주의 멜보른(Melbourne)에서 출생하였으며 멜보른 대학을 졸업하여 그곳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 후로 법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한 바 있어 도중에 그만두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바라 대학에 가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하여 처음에 인도로 갔으나 18개월이 지나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부득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기운이 조성되었으며,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 (Too-rack)교회와 협력하여 선교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고 초대 선교사로 데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 하게 되었다. 데이비스 목사는 먼저 한국에 도래하여 선교사업에 자리잡고 있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협의하여 부산을 중심 하여 남부지역에서 선교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서울이나 서부지역 등 다른 지역은 이미 선교사들이 자리잡고 선교사업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중복이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서였다. 당시 부산에 머물고 있었던 게일[James Gale]선교사는 데이비스 목사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고 달려갔다. 긴 여행을 보행으로 하여 피로에 지친 나머지 급성 폐렴에 천연두까지 겹쳐 소생할 가망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1890년 4월 15일 데이비스 목사는 한국선교의 청운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별세의 보도가 호주에 전달되자 전국의 교회는 깊은 애도 속에 잠겼다. 비록 선교의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망으로 인해 호주의 본국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유지를 계승하여 그러한 죽음이 헛되지 않게 뒤를 이어 선교사를 파송 해야 한다고 강렬한 선교 열이 고조되어 엥겔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 하였다. 1907년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되자, 엥겔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회를 대표한 파송 교수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그리고 교회사를 주로 강의하였다. 그는 30여 년을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원어를 하는 신학교들을 특별히 취급한다든지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에게는 철저한 징벌을 가하는 등으로 강직한 일면의 성품을 보여주어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엥겔 목사는 1913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2대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1917년에는 경남 노회를 창설하면서 제1,2,3대의 노회장을 연임하면서 호주 장로교 파송 선교사로서의 위상을 격상하였고 또한 지방교회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고 꾸준히 수행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3)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미국 남 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언더우드 목사가 189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 신학교 연맹 (The Inter-Seminary Aliance)서 주최한 내슈빌(Nashville) 대회에서 선교강연을 할 때 여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레이놀드(William D.Reinolds) 는 한국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 후에 남장로교 총회 외지선교회에 선교사로 한국에 보내달라고 지원하였다. 그러나 선교회에서는 아직 한국 선교사업은 착수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레이놀드와 젼킨은 한국 선교의 실현을 위하여 매일 3시에 기숙사에서 합심 기도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레이놀드는 세 사람의 선교 동지와 함께 각지를 순회하면서 언더우드 목사를 강사로 하여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열심히 강조하였다. 교회 신문에도 한국에 관한 기사를 많이 발표하였다. 드디어 독지가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뉴욕에 사는 죤 언더우드(John T. Under wood)란 사람으로 2만5천 달러를 한국 선교를 위하여 사용해 달라고 기탁하였다. 그렇게 되자 외지 선교회에서도 선교에 착수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드디어 1892년 2월에 레이놀드 부부와 젼킨부부 그리고 데이트와 그의 누이 동생 매티 데이트(Mattie S.Tate) 데이비스(L.Linnie Davis) 등이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 해 10월 18일에 그리고 나머지 몇 사람은 11월 3일에 서울에 각각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 장로회의 한국 선교의 막은 올려진 것이다. 그들은 얼마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국말을 익힌 다음에 선교 활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주로 호남지역인 전라도 일원을 선교구역으로 생각하여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도착한 그 해 연말 크리스마스 후에 미국 북 장로회 파송인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공주 지방을 방문하여 선교 적지로서의 여부를 타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젼킨과 테이트 목사가 함께 전주를 찾아가 시찰하였다. 1893년 2월 레이놀드 선교사는 비서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 선교 사업을 위한 전초기지가 될 기지를 구입하였다. 그는 전라도의 서해안 관문인 군산을 방문하고 그리고 연이어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쭉 순방하면서 무척 만족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한국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이념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그는 1917년부터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어학과 함께 조직신학 분야를 담당하여 가르쳐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 이념을 구체화할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그의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의 이념은 오직 성령 충만한 성신인으로 키워, 오직 한국교회를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선 성령 충만한 교회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레이놀드 목사는 장로회신학교 교우지인 신학 지남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보수주의 신학노선의 많은 논문을 게재하여 한국교회를 그러한 방향으로 인도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국 장로교회를 위한 신학교육은 영적 훈련 면은 우수하였으나 지적 훈련 면은 빈약하였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하에서 수난과 박해가 중첩되는 그 시기에 있어서 성령 충만한 교회의 신앙노선은 필요하였다. 신사참배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도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여 굴하지 아니하였다. (4)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캐나다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에서 파송 된 정식 선교사단이 한국에 도래하기는 1898년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맥켄지(William John MaKenzie,)목사가 개인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생명을 희생한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맥켄지 목사는 신학교 재학 시에 한국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한국에 가서 선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맥켄지는 총회 본부를 방문하여 저축한 돈 1백 달러를 내놓으면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아직 한국선교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 선교사로서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내항하였다. 새 해가 되면서 그는 곧 서울을 떠나 2월에 황해도 솔내로 갔다. 맥켄지 선교사는 자연히 솔내교회의 초대 목사처럼 되었으며, 희생적인 헌신의 결과로 1895년 7월 3일 교회당을 신축하여 헌당 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교회당은 외국인 선교기관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이 한국교인 스스로의 헌금으로 완공한 최초의 교회당이라고 하는데 뜻이 크다. 멕켄지 목사가 한국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심 성의껏 그리스도를 전하는 생활에 헌신하여 우상 숭배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을 속출케 하였다. 이렇듯이 숭고한 생활로 일관한 그가 1895년 7월 23일 너무나 무더운 여름날에 피로에 지친 나머지 일사병에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멕켄지 목사의 죽음의 소식은 캐나다 본국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뒤흔들었다. 그의 유서에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2천 달러의 남은 돈을 전부 바친다는 귀절이 있었다. 솔내교회 교인들은 맥켄지 목사의 신앙생활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의를 표시하면서 선교사를 꼭 보내달라고 진정서를 캐나다 장로회 총회에 발송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한국 선교의 개시를 촉구하는 글이 교회 잡지에 많이 기고 되었으며 그리어슨 (Robert Grierson,)의사 부부와 푸트(W R.Foote,)목사 부부 그리고 맥래 (Duncan M. Mcrae) 목사 등이 선교사로 선임되어 캐나다 장로회 총회의 동해안 연합노회 (The Synod of the Maritime Province)의 파송을 받아 1898년 9월 8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 사업에 있어서 큰 공헌이 있다고 한다면 만주간도 지방에서의 선교활동을 간과해선 안 된다. 1912년에는 정식으로 캐나다 선교부가 용정에 설치되었으며 은진 중학교, 명신 여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일대 요람지가 되게 하였다. 특히 간도에 설치된 제창 병원은 의료 선교 기관의 역할 뿐 아니라 한국망명객들이 출입하며 독립운동을 숙의 하던 장소로 유명하게 등장하였는데 병원장 마틴(Stanly F.Martin) 선교사는 한국인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깊어 솔선해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3.1운동의 추진을 위하여도 상당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다. (5) 선교부들의 연합과 구역 분할 선교 여러 교파의 선교 단체가 속속 도래하게 되자 자칫 잘못하면 선교사들 사이에 불화와 대립이 발생할 염려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각 교파들 사이에 협동만 이루어진다면 모든 교인을 한데 묶어 하나의 교회를 형성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아니하였다. 1890년 [선교사 연합 공의회] (United Coyncil of Missions in Korea)는 그것을 목적하여 탄생하였다. 창립 회합에서 미국 북장로회의 헤론(John W. Heron,)의사가 의장이 되었고, 호주 장로회의 데이비스(J. Henry Davis)목사가 서기로 선임되었으며, 언더우드 목사와 기포드 (D,L.Gifford)목사, 그리고 알렌(H.Newton Allen) 의사 등이 참석하였다. 마펫(Samuel A. Moffett)목사는 제2차 회합부터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회합은 호주 선교회의 유일의 대표인 데이비스 목사가 별세하게 되자 미국의 북장로회 만으로는 존재할 의의가 없어져 3, 4개월이 지나면서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1892년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도래하게 되어 1893년 1월 28일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 (The Council of MIssions Holdingthe Presby- terian Form of Government)가 빈튼 (C.C Vinton)박사의 집에서 회합하였는데, 여기에는 장로회 계통의 선교사들 전원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개혁 신앙과 장로회 정치를 준행 하는 하나의 한국교회를 조직하는 것] 을 목적으로 설정하였고 한국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기구가 정립되기 전까지 전국 교회에 대한 상회의 역할을 자연히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회가 결코 공식적 기구는 아니었으며 다만 상호간의 친교와 상담과 조언하는 회합에 불과했고 권리 행사를 여전히 각자의 선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다. 1893년 1월에 열린 첫 회의에서 미국 남장로회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호남지방에서 선교하기로 약정되었고 미국 북장로회는 이미 선교를 개시한 모든 지역에서의 선교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부산 지역에서는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가 함께 선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는 두 선교회가 함께 상주하기로 하고 경상도 남부는 호주 장로회가 낙동강의 이북은 북장로회의 선교 구역으로 합의가 성립되었다. 2. 한국 장로교회의 조직 (1) 한국의 최초 장로교회 - 소래교회 만주에서 로스 목사와 갈이 성경 번역사업과 전도 사업에 종사하다가 고향인 의주에 와서 전도 사업을 하던 서상륜은 동생 서 경조와 같이 박해를 피하여 황해도 솔내(松川 ·九美浦)에 있는 삼촌 집으로 왔다. 그는 1884년 로스 목사가 선편으로 부친 6천 권의 성경을 당시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호의로 인수하여 전도 사업을 하였고. 1885년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 된 사실은 선교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솔내는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요람지이며, 한국 교회 역사의 발상지라고 하겠다. 자립 전도를 실시하였고 몇 해 안되어 이 교회는 그 마을의 58세대 중에서 50세대의 장년을 포섭할 정도로 교세가 확창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가 1887년에 솔내교회에 가서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의 신앙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2) 최초의 장로 안수와 당회 조직 1887년 9윌 12일에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새문안교회가 창립되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1885년 9월 27일부터 집회하였었다. 첫날은 14명이 모였고, 다음 주일에는 15명이 모였으며, 그 다음 주일에는 두 사람의 장로를 뽑았으니 백홍준과 서상륜이었다. 그러나 예수교장로회사기에서는 1900년 서경조가 소래교회에서 장로로 장립하였다고 한다. "당회를 조직하니 시내(是乃)의 아국교회(我國敎會)의 최선(最先) 장로더라"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서울에서는 새문안교회의 송순명 장로가 1904년 10월 2일 장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3) 대한예수교장로회 최초 노회 조직 - 독노회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합심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키로 하고, 1907넌 9월 17일에 평양장대현 교회당에서 선교사 33명, 한국인 장로 36명. 찬성원(캐나다와 호주 선교사) 9명. 계 78명이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하나의 노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흔히 독노회(獨老會)라고 한다. 이 독노회에서 결의한 주요 안건은 다음과 같다. (1) 신학 졸업생 7명 목사 장립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서경조(徐景昨), 한석진(韓錫普), 양전백(梁甸伯), 길선주(吉善宙), 이기풍(李基豊), 송린서(宋麟瑞), 방기창(邦基昌) 등이 안수를 받았다. 이들이 한국 최초의 신학사 목사들인 것이다. (2)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결의하고 7명의 목사 중 한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파송 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설립 당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나아간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선교를 받은 지 2O년의 교회가, 그것도 처음으로 장립하는 7명의 목사 중 한 명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획기적인 사건을 통해 l907년 부흥 운동의 결과가 이같이 확장됨을 볼 수 있다. (3) 의사봉 제정이다. 의사봉을 제정하여 회의 전통을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4) 대리회의 조직이다. 전국을 한 개의 노회로 묶어 놓으니 그 지역이 너무 넓어 노회가 자주 모이기 곤란하므로 종전의 소회(小會) 대신에 경기, 충청, 평북, 평남, 함경, 경상 및 전라 지방에 대리회(代理會)를 두어 노회의 위임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5) 장로회 12신조와 장로회 정치를 채택하였다. 이와 같이 독노회는 출발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였는데, 1907년의 첫 졸업생 가운데서 이 기풍 목사를,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고, 1909년의 8명의 졸업생 중 최관흘 목사를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파송 한 것이 좋은 예이다. (4) 대한예수교장로회 최초 총회의 조직 1911년까지 독노회가 모이다가 1912년부터 총회로 모이기로 하였다. 지금까지의 7대리회를 7노회로 조직키로 하고 독노회가 발전적으로 총회가 되도록 하였다. 1912년 9월 1일 평양 여성경학원(女聖經學院)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회집 되었는데, 회원은 목사 52인, 선교사 44인, 장로 125인 계 221명이 회집 하였다. 이 때 선출된 임원은 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방위량(W. N. Blair), 부회계 김석창 등이었다. 총회 설립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1957년에 방지일 목사가 중공치하에서 귀국하기까지 45년 동안 선교사업을 하였다. 역대 산동성 선교사는 김영훈(金永勳), 박태로(朴泰魯), 사병순(史秉淳), 박상순(朴商純), 홍승한(洪承漢), 방효원(方孝元), 이대영(李大榮), 방지일(方之日), 김호순(金好淳) 등이다. 이것을 보면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제주도 선교를 실시하고 그후 시베리아 선교, 일본 유학생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는 첫 걸음을 딛는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쾌거이며, 안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불길을 밖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3.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 (1) 신사참배로 인한 고신파의 분열 해방이 되면서 신사참배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1945년 9월 18일 재건노회가 열리고 2개항의 자숙 안을 정했다. 그러나 곧 기성교회 인사들과 주남선 목사 등의 출옥성도와의 마찰이 야기되었는데,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한 것이며, 지금에 해방이 되었다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 라고 주장했고,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빚어내어 말썽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 로마의 탄압에 의한 배교자 문제 처리로 인한 교회의 분열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해방 전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성도들은 기왕에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를 향하여 통회 자복 근신을 요청하였고, 그 참회의 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 곳에서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 정죄가 잇달았다. 이렇게 해서 이북에 재건파, 복구파의 교회가 세워졌고, 남한에서는 박윤선 목사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세칭 고신파 장로교의 분열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피차의 공방과정에서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중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장로교회는, 사변으로 단속된 총회의 속회에서 고신파를 정식 단죄하였고, 고신파는 그 나름대로 총회를 향해 용공을 비수처럼 덮어 씌웠고 신사참배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 고신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게 된다. (2) 신학사상 차이로 인한 기장과 예장의 분열 선교 개시이래 한국 개신교는 그 신학사상과 신앙적 태도에서 보수적 입장을 지켜왔다. 이는 한국에 개신 교회를 전래시킨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에 기인하고 있었으며, 또한 한국교회 지도자들(특히 장로교) 이 세계적인 여러 신학적 조류에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데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더구나 1920년대로부터 한국신학을 대표해온 박형룡 박사는 미국유학시절에도 근대 보수 신학의 대표 메이천에게서 사사한 신학자로서, 귀국이후 한국 신학의 객척자의 구실 등, 모두가 한국 신학을 더욱 한 방향에 고착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진출한 몇몇 개신 교파 (이중캐나다 장로회도 포함된)의 신학적 입장은 자못 자유로 왔고, 그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훈련된 한국인 지도자들도 그러한 경향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30년대 이후 한국의 새로운 신학사조 도입의 주체가 되는 김재준 박사를 비롯한 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 신학적 갈등을 엿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1935년의 단권 성경 주석 문제로 신학적 갈등은 표면화된다. 이 사건은 감리교 류형기 목사의 편집발행 아빙돈 단권 주석이 새로운 신학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이유로 그 집필자로 참여한 장로교 인사인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에 대한 문제이었다. 채필근은 즉시 사과하였으나 나머지 세 사람은 자신들의 잘못 없음을 별도로 설명하였고, 장로교총회는 동 주석의 열람, 참고를 금지한 사건이다. 자유로운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였던 일군은, 평양신학교가 무기휴학하자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개교했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조선신학교는 49년 남부총회의 직영의 허락을 받았다. 그 후 새로운 신학사상을 나타냈다. 김재준 교수는 마음놓고 보수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 성경연구와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남북장로교의 신학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1947년 김재준 목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 51명이 그를 자유주의라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로교는 흥분했고, 박형룡 박사는 진정서를 검토한 후 그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판단했다. 이때 김재준은 문제가 신학적 문제만은 아님을 직감하고 보수주의에서 이탈을 결심하였다. 한편 총회가 제출한 조선신학교에 대한 개혁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학대책위원회에서 박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교 신학교를 세웠다. 한 교단에 2개 신학교의 모순이 있자 합동 7원칙 안을 내놓았으나 조선신학교 측의 수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 1952년 37차 총회 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 조선신학교의 직영취소를 재인식시켰다. 조선신학교는 불복하고 한국 신학대학교로 출발했고, 1953년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을 '한국기독교장로회'라 하였다. (3) 에큐메니칼운동으로 인한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6. 25후 일치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 때 장로교의 3번째 분열이 1959년에 일어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 A E)라는 단체는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한 단체이다. N A E는 보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WCC를 용공이라 하여 탈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 44차 총회서 정회서 거듭하는 혼란 속에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온 총대들은 승동교회에서 1959년 합동총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세계교회협의회(WCC) 에서 영구탈퇴를 선언했고, WCC 를 지지하는 총대들은 1960년 서울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일치를 위해 WCC서 잠정 탈퇴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기금 유용을 두고 양측간의 대립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동교회 총회를 오늘의 '장로회신학대학'(통합측)과 승동교회 총회측을 오늘의 '총회신학대학'(합동측)으로 분열케 한 것이다. 이 분열은 자기 신앙노선을 내세우려는 주도권의 싸움이요, 신학보다는 그 방법론 때문에 다수의 분열을 보여주는 오점을 낳았다. (4) 고신측과, 합동측의 정치적 분쟁으로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 예장의 일부와 고려파가 연합해 구성된 합동 측은 이후 교권과 지방색을 둘러싼 분열을 계속한다. 먼저 갈라져 나갔다가 돌아온 고려파가 고려신학교의 인정문제를 놓고 다시 교단을 이탈, 본래의 고려파로 환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고신측'이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문제 이면에는 고려파의 거두인 한상동 목사가 3년 연속 총회장을 맡는 문제, 다시 말해서 교권문제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교단으로 환원한 고신측에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부산 측과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마산 측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다. 한목사는 명실공히 고려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데에 반해 법리해석과 행정절차에 밝았던 송상석 목사는 교단의 행정적 지도자였으며, 두 사람 휘하에는 제각기 빼어난 후배와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한편 두 그룹의 갈등으로 인해 교단의 일부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경기노회를 주축으로 한 일부 세력과 이전에 고려파를 탈퇴한 바 있는 이기진 목사 등이 이 고소에 반대하면서, 교단을 탈퇴해 새 교단을 세웠는데 이때 탈퇴한 그룹의 대표가 바로 석원태 목사였으며, 이 그룹이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으로 발전했다. 이 교단을 '반고소 고려측'이라고 부른다. 고려파가 환원한 후 합동측의 교권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과 호남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 그룹의 거두는 정규오 목사였다. 이 그룹은 고려파 환원 이후 12년 동안 합동 측을 지배해 왔다. 이 과정에서 소외됐던 중부 영남 출신들은 절치 부심 끝에 이영수 목사를 중심으로 뭉쳐 드디어 교권 장악에 성공, 무려 17년 동안 합동측의 교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두 그룹의 교권 다툼으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 이른바 1979년 64회 총회에서 발생한 합동측 주류 비주류의 분열사건이다. 당시 이영수 목사 계열, 즉 중부 영남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교권에서 소외돼 있던 비주류측(황해 평안 호남 계열)은 64회 총회에서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합동보수'라는 교단을 세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이 '합동보수'는 호남 세를 중심으로 한 '개혁측'과 이북 출신과 호남측 일부로 구성된 '합동 보수측'으로 양분된다. 그 후 이 합동 비주류계열은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해 50개가 넘는 수많은 장로교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합동 비주류 계열의 분열은 철저하게 지방색과 교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인해 분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50개 교단이 넘개 분리되어 있으며, 대표적인 교단으로는 고신, 통합, 합동이 있다. 4. 한국 장로교회들 ○ 소래교회 설립일 1883~1885년 한국 최초의 교회 ○ 새문안교회 설립일 1887. 9.27 (통합) 장로교 최초의 교회 ○ 남대문교회 설립일 1887.11.21 (통합) ○ 초량교회 설립일 1892.11. 7(합동) 부산 최초의 교회 ○ 승동교회(곤당골교회) 설립일 1893. 6 (합동) ○ 연동교회 설립일 1894 (통합) ○ 산정현교회 설립일 1906.1.26 ○ 안동교회(서울 안국동) 설립일 1909. 3 (통합) ○ 안동교회(경북 안동시) 설립일 1909(통합) ○ 대구서문교회(달람교회) 설립일 1912.5.21(합동) ○ 부천제일교회(소사교회) 설립일 1930. 11. 1(기감) ○ 영락교회 설립일 1945.12.21(통합) |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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