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한국교회 불의 사자 김익두 목사
▲ 생전의 김익두목사
길선주가 말씀을 통해 영적 각성과 성령의 은혜를 주도한 한국의 바울이라면, 김익두는 치유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 한 한국의 베드로였다. 그는 1874년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 가정을 일찍부터 돌봐 왔던 그가 사기를 당해 모든 재산을 잃게 된 것이 그로 하여금 타락의 생활을 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날마다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했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불량배가 되었다. 그가 얼마나 악행을 하였는지 사람들이 '오늘 호랑이 익두인지 억두인지 만나지 않게 해 줍소서'라고 성황당(城隍堂)에 빌었고, 만나는 사람마다 강제로 돈을 빼앗아 "김내라"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회심한 후에는 그가 과거를 뉘우치고 사람을 때린 장소마다 찾아다니며 방성대곡으로 울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인가 장에 나갔다가 서양 여자가 전도하며 전해준 전도지 사건을 계기로 회심하게 되었다. 전도지를 받은 김익두는 '뭐 나더러 양 귀신을 믿으라고' 하며 전도지로 코를 풀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썩어요"하는 것이었다.
▲ 김익두 목사가 평생시무하다 순교한 신천서부교회
그 후 그는 '어느 모로 보나 자기보다 개화되어 있는 서양 여자가 멀리 이국땅에 와서 저러는 것을 보면 무언가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때 친구인 박태후의 전도를 받아 교회엘 나가게 된 것이다. 그는 순 한문 신약성서를 100번 읽으며 신앙에 심취했고 그 과정에서 가슴을 칼로 찢는 것 같은 불세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가 삼일 간 금식을 하고 산에서 내려 올 때 큰 불덩어리가 가슴에 떨어져 화끈거리는 체험을 하였고 하늘에서 "김익두야! 김익두야!"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임을 깨달았고 하염없이 울며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그의 사역에서는 특히 치병의 역사가 많이 나타났는데 심지어 임택권 목사는 '이적증명회'를 만들어 김익두 목사의 집회 현장에서 이적이 일어나는 장면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 그것을 증명했는데 약 일만 명가량의 치병자를 추측하고 있다.
그의 최초의 이적은 1919년 12월 25일 달성군 현풍읍내 현풍교회에서였다. 거지 행각을 하며 살던 박수진이란 자가 있었다. 10년 전 사고로 아래턱이 떨어져 음식도 누워서 먹던 자였다. 김익두 목사는 그를 불쌍히 여겨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박수진의 아래턱이 올라가 붙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에 감격한 박수진이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여 온 동네가 놀라게 되었다.
그의 신유의 역사는 이후 계속 되었고 곱사등이 소녀가 펴지기도 하고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계속 되었는데, 이런 사건들을 동아일보 58호에서는 '김익두의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김익두목사의 신유의 사역은 병자 자신의 회개와 간구가 함께 역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요 순결한 삶으로 요구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구 집회에서 김경애라는 기생이 1년 남짓 중풍으로 고생하다가 김익두 목사의 간절한 기도와 자신의 간절한 회개로 고침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다시 기생의 생활로 돌아가는 바람에 병이 재발하고 말았다. 또 안악군 동문면에 최석황이라는 자는 30년이나 고생하던 종기를 치료받았는데 후에 타락하여 병이 재발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응한 사건이었다.
그의 집회 역시도 철저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임하는 집회였다. 1920년 10월 11일부터 열린 평양집회에는 일만 여명이 모여 통회와 자복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새벽기도에는 수천 명이 마당에 멍석을 깔고 통회의 눈물로 아침을 밝히는 영적 각성이 있기도 했다. 김익두 목사는 원칙을 세우고 생활을 하였는데 오늘의 목회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새벽에 은밀히 기도할 것, 신구약 2장씩 숙독할 것, 냉수마찰, 하루 세 번 가정예배 드릴 것 등이다.
그는 또한 철저히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 믿는 생활을 몸소 실천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이적의 사역자로 삼으신 것은 이런 믿음의 그릇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150여 곳에 교회를 세웠고, 설교횟수 이만 팔천 번, 새 신자 28만 명, 치병자 일만 여명이었고,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여명이 있는데 그 중에 이성봉, 주기철, 김재준 등 한국교회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사경에 이르도록 고문을 당했고, 목사직을 박탈당했다. 광복 후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었지만 한국동란 때 교회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 공산당에 의해 교인들과 함께 순교당하고 말았다. 그 날이 1950년 10월 14일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이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함으로 환란과 핍박 가운데 고통 하는 이 민족에게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부흥 집회를 통해 이 땅에 능력으로 복음을 전한 하나님의 종이였던 것이다.
참고도서: 초기한국교회불의사자 김익두 목사
이태선 목사지음 (보이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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