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한국 교회사

[스크랩]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

에반젤(복음) 2021. 8. 21. 06:11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

- 예배 형성기(1870-1900)를 중심으로 -



예배 형성기(1870-1900)는 만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미국 교단의 배경을 가진 예배 형식이 소개됨으로 예배가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로 이 때 한국 개신교는 자체에 의한 예식서 없이 선교사들이 소개한 외국의 예배 형식을 따라 주일예배를 드렸다. 이 기간에 선교사들에 의해 유교, 불교, 그리고 무교의 전통종교와 문화 속에 소개된 예배는 주로 회심자들을 얻기 위해 19세기 부흥회 형식의 선교지향적이며 비예전적인 예배로 한국 교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시작 글

 최근에는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이 멈추기 시작하였다는 보고가 나왔다. 심지어 일부의 보고는 감소 추세까지 나타난다고 지적하였다. 성장의 정체 현상에 당황한 한국교회는 양적인 성장으로부터 질적인 성장에로 관심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이 질적인 성장을 위한 노력이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한국교회의 갱신은 예배 갱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자각의 소리가 나왔다. 포도나무 가지가 전적으로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생명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교회의 갱신도 각 예배자를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님에게 연결시키는 바른 예배를 통하여 가능하다. 예배는 예배자들을 준비시켜 교회의 생명과 사역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교회갱신을 위한 힘을 제공한다. 바른 예배가 교회갱신의 비결이며 교회 갱신이 곧 바른 예배를 드린 결과임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소개한 19세기의 청교도형 예배(the Frontier Worship)와 그 전통을 신학적인 조명 없이 한 세기 이상 따르던 한국교회 내에 회심을 목적으로 한 전도설교 중심의 비예전적--예배의 의식적인 면이 최대한 간소화된--예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런 비판은 부분적으로 1980년대부터 한국교회 내에 예배 갱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곧 서구교회의 예전운동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다. 1990년대 후반에 와서는 예배 갱신운동이 한국 개신교 안에 전체적으로 확산되면서 각 교단마다 새로운 예식서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모처럼 어렵게 시작된 한국교회의 예배 갱신운동이 바른 방향으로 지속되고 그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질적인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도록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예배갱신을 위한 효과적인 연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예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다음, 그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미래의 바람직한 예배를 위해 새로운 방향과 예배모범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예배의 역사적인 형성과 현상학적인 경향, 그리고 바람직한 방향을 위한 연구가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 교회의 과거(전통), 현재와 미래, 내재성과 초월성, 그리고 내면과 외면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예배에 대한 연구는 한국교회의 정체성 즉, 우리의 내면과 외면을 밝히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한 교회의 역사와 전통은 예배 속에서 발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예배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리고 바람직한 미래의 예배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연구는 다음의 세 단계로 진행된다: 1) 역사적 정리 및 분석, 2) 신학적 해석, 그리고 3) 실제적 적용. 이 세 단계--역사적, 신학적, 그리고 실제적 관점--는 예배에 대한 성경적 관점과 함께 예배 연구를 위한 4중적 방법론으로 서로 적절히 연결될 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지면관계상 첫 번째 단계에 머무르며 더구나 초기 한국교회 예배의 역사적인 형성 및 발전 과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본 연구는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사를 전체적으로 기술하는 것보다는 예배의 흐름과 변화에 더욱 초점을 둔다. 먼저, 각 시대별로 한국교회의 예배 흐름과 변화를 보여주는 역사를 중심으로 각 교단이 여러 세대에 걸쳐 연속성 있게 보여준 예배의 전통을 찾아본다. 그 다음, 각 교단이 예배 전통 속에서 나타내는 특별한 예배 양식의 문제 즉, 예배자들의 태도와 방식을 살펴본다. 그러므로 각 시대별 교단의 주일예배의 전통과 특징을 알아보는 일은 예배자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각 교단이 최초의 시기에 제정한 표준 주일예배와 그 예배 의식의 변화들을 비교하며 분석하는데 집중된다.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는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오랜 기간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발전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사용하던 예배형식을 한국문화에 적절하게 적용하는 일보다는 단순히 번역 및 소개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언어인 영어를 아는 소수의 한국인들만 예배에 관여할 기회를 가졌다. 선교사들은 한국인 지도자들을 훈련시킬 필요를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나 교회의 일들에 대한 결정권을 한국인들에게 넘기기를 꺼려하였다. 예배의 내용, 구조, 그리고 형식을 결정하는 일은 오랜 동안 선교사들의 손에 달려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관한 연구는 선교사들에 의해 초기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진행된 다양한 예배들의 내용, 구조, 그리고 형식을 역사적으로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또한 한국교회의 예배 형성에 관한 연구는 각 주요 교단의 예배 역사와 전통을 찾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아보려는 자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3가지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1) 한국교회의 예배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가? 2)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의 내용, 구조, 그리고 형식은 어떤 특징과 경향을 나타내며 진행되었는가? 그리고 3) 그 예배가 한국교회에 어떤 예배 전통을 형성하였는가?
 위에 제기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본 연구는 두 가지 다른 접근방법 즉, 한국교회의 예배 형성에 영향을 끼친 독특한 토양과 배경으로부터 시작한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형성된 과정을 알아보기 위한 한가지 접근방법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중국의 만주와 일본에서부터 한국인들에 의해 형성된 토착적인 토양 즉, 한인 예배공동체의 예배 내용과 형식을 고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접근방법은 한국교회에 예배를 소개하고 진행한 선교사들의 예배 배경과 경험을 알아보는 것이다. 결국, 본 연구의 관심은 한국인 예배공동체에 의해 형성된 예배 토양과 선교사들의 예배 배경이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한국인 예배공동체

 한국이 개신교의 복음을 수용한 것은 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이미 한국인들에 의하여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이 기독교의 복음을 접한 것은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이다. 이 두 가지 경로는 시기적으로 10년 전과 후, 지리적으로 북방과 남방으로부터의 전래, 그리고 동시에 주체적 인물들로는 한국인들과 미국선교사들로 구분된다. 하나는 1870년대 말부터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정식으로 입국하기 전까지 주로 중국의 만주 지방을 거쳐 의주와 평양 등 서북지방의 진취적인 청년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다른 하나는 1880년대 말 일본에서 기독교를 접한 개화파 지식인들에 의하여 연결되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교회의 예배는 한국보다 먼저 선교를 받은 중국과 일본에서 시작된 한국인들의 예배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과 일본에서 복음을 접한 한국인들은 한국에 선교가 시작되기 이전에 기독교의 예배를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먼저,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 형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 시작된 한국인 예배공동체의 예배 내용과 형식을 고찰한 후, 그 예배가 후에 한국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예배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1. 최초의 한국인 예배공동체

 한국인을 위한 예배, 한국어로 진행된 예배는 언제,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하여 시작되었는가? 한국교회의 예배는 한국인들이 스스로 뿌린 복음의 씨앗에 의하여 형성된 예배공동체로 시작되어 토착화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예배를 위한 전초기지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선교가 시작되기 이전에 만주에서 형성된 한국인 예배공동체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교회의 예배에 관한 연구는 만주에서 행해진 예배로부터 시작될 필요가 있다.

만주의 예배공동체
 최초의 한국인 예배공동체는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인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로스(John Ross)에 의해 만주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회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각각 1872년 1월과 8월에 파송되었다. 이들은 만주의 개항장 영구(營口)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특별히 로스는 1874년 10월에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려고 그리고 1876년 4월에는 어학교사를 얻으려고 한국과 만주 사이의 위치한 한국인들의 마을,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 Corean Gate)을 두 번 방문하였다. 이 마을은 작았으나 한국과의 국경 지역(평안북도 의주 건너편)에 위치하여 교역의 관문이었기에 약 3천명의 한국인들이 살았다. 당시 의주에는 청과의 교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들은 대개 중국어와 만주어에 능한 독서층이었고 또한 개방적이며 독립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문화와 질서에 대한 욕구가 강한 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그들이 새로운 종교에 대하여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게 하였다. 이들을 방문하여 로스는 의주 상인 이응찬(李應贊)을 비롯하여 한국 젊은이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한국 개신교 신자들은 1879년에 맥킨타이어가 의주로부터 영구로 와서 선교사들의 사역을 돕던 4명의 한국인 청년들, 이응찬,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에게 세례를 줌으로 탄생하였다. 이어 로스가 1879년에 2명의 의주 청년들, 서상륜(徐相崙)과 김청송(金靑松)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청년들은 처음에 국경을 넘나들며 문물교류를 수행하던 자들이었으나 선교사들을 만난 후에는 그들의 사역을 돕는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 또는 매서인(賣書人)이 되었다. 이들은 선교사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그들을 도와 1878년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번역된 성경책자를 판매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 권서인들이 바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먼저 만주의 한인촌과 한국의 북부 지방에 반포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인 예배공동체를 형성한 주인공들이 되었다.
 성경반포사업을 위해 선교사들에 의해 만주와 한국의 국경 지역에 파견된 권서인들은 자신들의 복음전도로 형성된 예배공동체에서 한국인을 위한 정기적인 예배를 인도하였다. 비록 한국에서는 아니지만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한국인 복음전도자들이 1879년 10월에 한국어로 예배를 시작한 것이 최초 한국인들의 공식 예배가 되었다. 맥킨타이어는 1880년 이전에 만주에서 30여명의 한국인들이 저녁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1884년 로스는 동료선교사 웹스터(J. Webster)와 함께 묘이산(猫耳山)에 위치한 4개의 한인촌에서 75명의 남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로스는 다음 해 여름에 같은 한인촌을 방문하여 2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권서인들의 복음전도로 1884년 말 만주의 즙안현 이양자(裡楊子; 1898년 만주에 설립된 최초의 한국인 교회)를 비롯하여 만주의 압록강 연안에 있던 28개의 한인촌에는 세례교인인 100명, 세례 받기를 희망하는 남자가 600명 등 수 천명의 신자들이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다.


북부지방의 자생교회
 1880년대에 들어오면서 만주에서 번역되고 간행된 성서를 한국에 들여와 보급한 한국인 개종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만주에서 세례를 받고 예배를 드린 자들이 한국과 국경을 이루는 지역이나 의주, 평양, 소래, 그리고 서울과 같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와 번역된 성경 책자를 전하면서 복음전도사역에 종사함으로 후에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사역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였다. 1885년 중국인들로부터 핍박을 받던 한국인 개종자들이 만주의 한인촌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이 압록강 거주지역에서 전한 복음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 사실은 훗날 미국 선교사들이 북부지방을 방문했을 때 확인되었다.
 1879년에 서상륜을 첫 개종자로 얻은 백홍준은 의주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사돈이 되는 김이련(金利鍊)과 사위 김관근(金灌根)을 개종시켜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인 의주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백홍준은 가족들과 함께 중국의 선교사들에게 배운 전도 활동의 하나로 간단하게 신앙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요리문답반을 운영하여 1885년에 18명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의주교회의 주역이 되어 1889년 4월 27일 압록강에서 언더우드에 의해 세례를 받은 33명 가운데 포함되었다.
 서상륜은 1885년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소래에서 동생 서경조와 함께 열심히 전도하여 얻은 20여명의 구도자들을 지도하며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면서 개인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늦어도 1886년에는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매 주일 정기예배를 드림으로 소래의 예배공동체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구도자 중 3명은 서상륜의 인도로 언더우드로부터 서울에서 세례문답을 거친 후 1887년 1월 23일에, 그리고 나머지는 소래에서 세례를 받았다. 또한 서울에서 1887년 9월 최초로 한국인 교회(새문안장로교회)가 세워졌을 때 총 교인수 14명 가운데 13명이 이미 서상륜을 통해 신도가 되었던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이전에 만주의 권서전도인들에 의해 한국인 예배공동체를 형성한 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선교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887년 11월 한국에 온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평북 의주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주변 마을과 군(郡)들로부터 세례를 받고 입교하기를 원하는 남자들이 100명이 넘게 모여든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중국으로부터 한국의 북부 지방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복음의 씨가 뿌려지고 복음에 관한 책자들이 전달된 것은 선교사들에게 효과적인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또한 베어드(Richard H. Baird)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에서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 한 예로, 1901년 평양 지역의 선교보고는 선교사들이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곳에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던 그룹들이 여럿 있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자생적으로 신앙 및 예배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한국 선교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한국인 예배공동체
 만주에서 한국선교가 시도되고 있을 무렵,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庭)이 한국선교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처음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중국이 아니면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한국인 예배공동체는 만주에서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형성되었다. 알렌, 언더우드, 그리고 아펜젤러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1885년 전에 일본에서는 이미 다른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접한 개화파 지식인들 중 이수정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882년 9월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뒤처리를 위해 박영효(朴泳孝)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간 이수정은 일본의 농학자 쓰다센(津田仙)에게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배운 후, 1883년 4월 동경의 쓰유게쓰초(露月町)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녹스(G. W. Knox)의해 세례를 받았다. 이로서 이수정은 일본에 간지 7개월만에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첫 한국인이 되었다. 또한 그는 1884년에 재일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enry Loomis)의 요청으로 일본어 성경(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상륙할 때 들고 온 복음서가 바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었다.
 이수정은 1883년 6월 24일에 자신의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은 한인 유학생들을 모아 한문 요리문답서를 교재로 하는 주일학교를 열었다. 이런 노력으로 요리문답반 주일학교가 점차 발전하여 1883년 말에는 이미 7, 8명의 한국인 수세자들이 모여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성경연구반으로 확대되었다. 주일마다 설교자를 초청하여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던 이 신앙공동체는 1883년 말 동경에 세워진 최초의 한인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인 관계 때문에 이수정에 의해 일본에서 형성된 유학생 예배공동체는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였다. 일본에서 형성된 한국인 예배공동체의 활동이 어떻게 한국교회의 예배에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수정은 한국에 선교할 선교사는 미국에서 직접 파송되어야 함을 주장하여 1883년 12월 미국교회에 진정서를 보냄으로 기독교가 한국에 수용되는데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선교사 요청은 1884년에도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오게 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2. 한국인 예배공동체의 예배

 만주에서 시작된 한국인의 정기적인 예배는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는가? 만주의 한국인 예배 형태는 네비어스(John L. Nevius)와 로스(John Ross)가 19세기 중반에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논의되던 삼자이론(three-self theory)을 중국의 선교현장에서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토착교회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네비어스와 로스는 각각 산동과 만주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19세기말에 영국 교회선교회의 총무 벤(Henry Venn)과 미국공리회 해외선교부 총무 앤더슨(Rufus Anderson)의 삼자이론을 중국 실정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실천하였다. 그들은 선교지의 신생교회들이 해외 선교부로부터 독립하여 자립(self-supporting), 자치(self-governing), 자전(self- propagating) 하는 토착교회로 성장하는 것을 최종단계로 설정하고 토착인 목회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로스는 네비어스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그로부터 선교방법을 배우고 보완하여 만주 지역의 선교현장에서 토착교회론을 실천하였다. 토착교회론을 옹호한 로스는 일차적인 복음화는 다양한 외국 기관이 맡고, 교회의 일은 토착인들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복음주의자로 사회의 관습을 개혁하는 것보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선교사의 유일한 의무이기 때문에 복음을 듣는 자들의 개종과 중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렇게 회심을 강조하는 로스의 선교방법은 만주의 한국인 예배공동체의 중심이었던 권서전도인들을 통하여 한국인 예배의 형태를 형성하였다. 만주에서 형성된 한국인들의 예배는 평일 오후에는 전도설교, 저녁에는 성경교육, 그리고 주일에는 찬송과 기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3가지 특징으로 구분되는 예배들은 연결성을 지니면서 서로 필요에 따라 보완되고 확대되었다. 먼저 복음전도로 회심자들을 얻어, 그 다음에는 사경회 형식의 저녁예배를 통하여 회심자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흥회 형식의 주일예배를 통하여 확실한 영적 구원을 체험하게 하였다. 이렇게 연결된 각 집회는 성격에 따라 전도설교, 성경공부, 기도와 찬송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회심자들을 얻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평일 오후예배는 가장 효과적인 대중설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로스의 선교방법으로부터 나온 대중설교는 네비어스가 사용하던 개인전도 방법과 비교된다. 만주에서 사용된 전도설교(또는 노상설교; street preaching)는 선교 초기에 전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던 선교사들과 권서전도인들이 회심자들을 얻기 위해 길이나 시장과 같은 장소와 도심지 예배당(street chapel)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진행하던 예배 형식의 중심이었다. 주로 오후에 선교사와 권서전도인들이 즐겨 사용한 전도설교는 간단한 기도와 찬송을 부른 후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복음을 처음 접하는 자들에게 기도와 찬송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어 생략되는 경우도 있었다. 회심자들을 얻기 위한 전도설교도 성경본문으로부터 나오기보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사건이나 주제를 다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성육신적 설교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런 설교 방법은 사도 바울의 선교원리인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고전 9:19-22) 성육신적 방법을 선교현장에서 적용한 것으로 듣는 자의 필요와 처지에 맞게 실제적인 내용을 듣는 자의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다. 또한 상류층보다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단순한 말로 전하는 전도설교는 강연식보다는 대화에 의한 가르침에 우위를 두어 설교 도중 청중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이에 답하는 청담(淸談)식을 취하였다. 그 이유는 기독교에 관하여 무지한 자들을 위한 전도설교가 사교적, 응답적, 교리문답적, 그리고 대화적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로스는 선교사의 임무를 개종과 중생을 위하여 광범위하게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는 전도설교를 하면서 순회전도와 내륙전도를 실천하였다. 그의 광범위한 순회 전도여행은 고려문(高麗門, Corean Gate)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에게까지 이르렀다. 국경지역에 위치한 한국인들의 마을 고려문을 방문한 선교사 로스의 보고에 의하면, 중국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들은 각 마을을 순방하는 선교 방법 외에 큰 마을에 정착하여 선교본부로 삼고 2, 3개월 동안 주변 20개의 작은 마을들을 돌면서 복음전도, 교육, 또는 의료선교를 하였다. 이런 선교 형식은 각 마을의 원주민 복음전도자들에게 예배를 인도하며 복음전도와 목회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선교사들과 접촉하며 훈련을 받은 한국인 복음전도자들은 노상이나 시장에서, 길을 걸으면서 또는 여인숙에 머무르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설교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진흙으로 집을 만든 예배당(public chapel)에서 설교하였다.
 둘째, 저녁예배는 복음전도로부터 얻은 회심자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한 성경교육과 상담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만주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복음전도자들은 기도와 찬송보다는 회심자들에게 먼저 성경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사경회 형식의 저녁예배를 시작하였다. 오후에 노상 설교를 들은 자들을 저녁예배에 초청하여 성경으로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교육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었다. 저녁예배에서 진행되던 성경공부는 노상 설교를 들은 자들이 개인적으로 더 알기를 원할 때 그들을 초청하던 성경 교육과 상담의 연장이었다. 이런 개인적인 성경 교육이나 상담은 설교자와 보조자들이 잠을 자고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예배당 뒤쪽 작은 문으로 연결된 작은 방(back room)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성경을 교육하던 저녁 예배는 학습교인들과 세례교인들을 양육하는 기회가 되었다. 교회에 등록한 자들은 먼저 오늘날 2-4시간 동안 새신자 교육과 같은 특별 교육을 받은 후 9개월 동안의 학습기간을 통과하여 세례를 받게된다. 이 세례 예식은 매월 첫 번째 주일에 선교사에 의해 행해졌다.
 셋째, 만주의 한국인 예배의 형태는 구도자들의 신앙부흥을 위해 찬송과 기도가 많이 사용되는 주일예배로 진행되었다. 만주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복음전도자들은 기도와 찬송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부흥회 형식의 주일예배를 시작하였다. 주중에 성경 교육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저녁예배와는 달리 주일예배는 신앙부흥을 위한 영적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주일예배에서 사용되는 기도와 찬송은 영적인 예배를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예배의 요소들이었다.
 로스의 토착인 선교방법은 만주의 한인촌뿐 아니라 한국의 서북지역에 토착인에 의한 예배 토양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런 선교방법에 따라 한국인 권서와 전도인들을 한국에 파송하였다. 만주에서 형성된 복음전도, 사경회, 부흥회 성격을 띤 예배는 한국인들의 가정에서 계속되었으며 또한 한국인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국경을 넘어 전달되었다. 그 결과 의주와 소래 등에 한국인들이 인도하던 예배공동체들이 형성되어 후에 최초의 한국 개신교회가 되었다. 이와 같이 로스의 토착인 예배공동체가 서북지역에서 성공적으로 형성된 것은 언더우드의 선교여행에 의해 밝혀졌다.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언더우드는 2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통해 1887년 1월에 소래에서 3명에게, 1888년에 다시 소래에서 7명에게, 그리고 1889년에는 의주에서 33명의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언더우드는 수차의 북부선교여행을 통하여 한국에서 토착인 선교방법이 생각보다 성공적인 것을 깨달았다.
 네비어스와 로스의 토착교회론은 만주의 한국인 예배와 한국교회의 예배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 이유는 만주의 선교사들뿐 아니라 한국의 선교사들도 역시 선교현장에서 토착교회론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에게 예배에 관한 훈련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네비어스가 중국 선교 25년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선교 방법론(Methods of Mission Work)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같이 해외선교에 거의 경험이 없던 젊은 선교사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네비어스는 1890년 6월에 안식년 휴가로 미국으로 가는 길에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의 계속된 서면 요청으로 서울에서 2주간 자신의 선교 경험과 방법론을 강의하였다. 그 결과, 장로교 선교회는 1891년에 네비어스의 선교정책을 수정하여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감리교도 네비어스의 선교방법을 실천하였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네비어스의 선교방법으로부터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두 가지 원리는 자급과 사경회 제도이었다. 한국 상황에 적절하도록 수정된 이 두 가지 선교원리는 한국교회의 예배를 간단한 형식과 교육 중심의 두 가지 특징을 지닌 비예전적 예배를 형성하였다.
 첫째, 철저한 자급과 자전을 강조한 네비어스의 토착교회론은 처음부터 예배를 그 지역 교회 교인들 가운데 오래 믿은 사람 중 지도자를 뽑아서 인도하도록 강조하여 간단하게 진행하였다. 선교사들은 네비어스의 선교정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예배 처소를 한국인들 스스로 마련하도록 할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배를 인도하도록 노력하였다. 선교사를 보조하는 한국인의 책임 하에 각 지역은 네비어스가 발전시킨 교회의 프로그램에 의해 4-7개의 한국인 그룹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여러 그룹들은 선교사들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한 곳에 함께 모여 연합예배를 드렸다. 각 지역의 연합예배를 인도한 한국인 예배 인도자들은 그 지역의 농부, 장인, 그리고 상인들로 예배 인도에 대한 훈련을 충분히 받은 자들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선교회로부터 파송된 목사대신 지역 교회 출신의 영수가 예배를 인도하도록 한 토착 사역자 제도는 세속적인 고등교육보다는 영적 훈련을 강조하였다. 결과적으로 선교 초기에 한국인들에 의해 진행된 일반적인 예배(성례전을 제외한)는 간단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초기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예배는 찬송, 기도, 성경봉독, 그리고 읽은 성경에 대한 설명, 권면이나 교훈으로 구성된 간단한 설교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간단하게 이루어진 예배의 길이는 보통 45분을 넘지 않았다.
 둘째, 설교보다 성경공부를 강조한 네비어스의 선교방법은 교육 중심의 예배를 지향하게 하였다. 토착 사역자뿐 아니라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인들에게도 성경의 주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설교는 이해하거나 배우기에 매우 어려운 예배 요소이었다. 이런 이유로 선교사들이나 안수 받은 목사가 없는 지역의 주일 오전예배는 기도, 찬송, 성경봉독 등으로 진행되어 설교가 생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공부는 빠짐없이 예배 전에 진행되었다. 설교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보는 토착교회론에 의하면 교육도 설교와 같이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각 지역의 한국인 평신도 지도자들은 선교사들이 가르쳐준 성경 중심의 간단한 권면이나 교훈을 전함으로 전형적인 설교를 대신하였다. 이와 같은 설교방법은 네비어스 선교방법에 따라 선교사들이 거리나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용하던 간접적이며 강요하지 않는 일상적인 대화방법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로스와 네비어스의 토착교회론은 지역공동체에게 예배주도권(Worship Initiative)을 넘겨줌으로 초기 한국교회의 급성장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초기 교회조직의 특징은 서리 남자 목사인 조사(助事; helper), 서리 여자 목사인 전도부인, 그리고 서리 남자 장로인 영수(領袖;leader), 서리 남녀 집사(steward) 등 서리제도에 있었다. 장로교의 경우, 미조직 교회에서는 한국인 영수(leader)가 성례를 제외한 설교와 목회를 책임졌다. 영수가 학습자와 수세자를 일차로 심사하였고 선교사는 일년에 한두 차례 방문하여 한나절 동안 수십 명을 간단히 문답한 후 의식을 베풀었다. 선교사나 파송되어 온 전도사 등 외부인이 아닌 지역의 교인들 스스로가 예배 인도와 설교, 그리고 가르침을 책임지고 처리해 나가는 체계는 예배공동체를 형성해 왔던 여러 지역 교회의 영성을 만족시켜 주었으며 예배 인도자와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교회에서 지도력을 확립하고 제자도를 훈련받을 수 있게 하였다.


선교와 예배의 연결

 미국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예배 내용, 구조, 그리고 형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영향력은 이미 선교현장에서 한국인들에 의해 형성된 예배공동체를 제도적인 교회의 예배와 연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한국교회 설립의 기반이 되는 예배공동체는 만주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서북지방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들의 전도활동으로 상당수의 세례 지원자들이 선교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은 선교사들의 복음전도로 시작되기 보다 이미 결심한 구도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언더우드가 고백한 것처럼,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은 이미 복음의 씨가 뿌려진 곳들을 찾아다니며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았다.
 만주에서 형성된 한국인 예배공동체를 통하여 형성된 전도, 교육, 그리고 신앙부흥 중심의 예배 형식은 1884년 이후 한국에서 예배의 내용, 구조, 그리고 형식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 선교사들의 예배 경험과 상이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의 예배 경험은 19세기에 미국에서 독특하게 발생한 프론티어(Frontier; 변경[邊境]) 예배를 그 배경으로 한다. 프론티어 예배는 개신교 예배가 미국화된 것으로 약 1800년부터 미국의 변경에서 주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몇 일 동안 열린 야영집회(Camp Meeting)를 통해 형성되었다. 프론티어 예배의 특징은 선교와 예배를 통합한 것으로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응답으로 "교회 밖"에서 시작된 복음전도를 "교회 안"의 세례예식과 연결시킨 것이다.
 프론티어 예배에 의해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은 선교의 자유가 없던 한국의 선교현장에서 비공식적으로 선교와 예배를 연결하였다. 선교 초기에는 한국인의 서양에 대한 편견과 타종교에 대한 배척정신 때문에 한국에서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통하여 예배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어려웠다. 그러나 처음부터 선교현장과 예배가 용이하게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을 도와 복음을 전하던 권서인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만주나 한국의 북부지역에서 복음을 접한 후 자신들의 고향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예배공동체의 기초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선교와 예배의 연결은 사랑방에서 시작된 성경연구반과 세례식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만주에서 형성된 자생적 예배공동체가 먼저, 번역 간행된 복음서를 반포하며 전도함으로써 신앙공동체의 발판을 마련하고 그 다음,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줌으로 예배공동체를 마련한 단계와 동일하다. 


1. 성경연구반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성경을 통하여 한국인들에게 접근하였다.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의 부탁으로 이수정이 일본에서 번역한 「신약성서 마가전」을 양팔에 한 묶음씩 끼고 제물포에 들어왔다. 이렇게 선교사가 이미 피선교지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온 특수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예배보다 성경교육을 먼저 접하게 되었다. 성경반포는 초기 선교사들에게 최대의 관심사이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하여 접근한 한국 개신교의 선교는 십자가, 성화와 같은 예배적 상징과 기도서, 교리문답서 등으로 접근한 천주교와 매우 다르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성경 중심의 선교로부터 회심을 강조하는 설교와 교리를 강조하는 교육 중심으로 형성되어 처음부터 예전적 접근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양반계층에 선교의 초점을 맞춘 천주교와는 달리 한국의 개신교는 처음부터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확보함으로 일반 서민들을 중심으로 전도를 하였다. 또한 서상륜을 비롯한 한국 최초의 교인들도 이미 성경을 기초로 한 신앙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국인들을 위한 직접적인 포교활동이 허락되지 않은 초기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예배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개인적인 접근이 가능한 성경연구반을 활용하였다. 선교사들은 1886년 6월까지 서울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1898년 정부로부터 선교사의 공개적인 복음전도 활동이 허락될 때까지는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추방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한 것은 곧 선교사역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이유로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에게만 허락된 예배와 기도회가 그들의 집에서 시작된 것과 아울러 개인적인 전도를 위한 성경공부도 선교사들의 사랑방이나 외국 영사의 집, 또는 미국 공사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그 예로, 아펜젤러는 1885년 겨울부터 주일 오후에 자신을 찾아 온 일본 공사관의 직원 하야카와 데찌야(Hayakawa Tezya)와 그의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성경연구반을 시작하였다. 아펜젤러의 성경연구반은 시작한지 약 1년만에 주일예배로 발전해 갔다. 이와 같이 조용히 한국인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전략으로 먼저 일본인들에게 시작한 성경연구반은 세례 후보자들을 교육할 뿐만 아니라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첫 단계이었다.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비밀리에 운영된 성경연구반이 예배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들의 병원과 학교를 통한 간접적인 선교활동 때문이었다. 한국 왕실이 환영한 선교사들의 의료와 교육활동은 성경연구반을 운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사업을 통하여 서양과 기독교에 대한 한국인의 편견을 제거하면서 복음전도의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병원과 학교는 선교사들이 소외계층이나 여성들까지 만날 수 있는 좋은 중개소였다. 선교사들에 의해 개설된 병원과 진료소들에는 한국인 전도인들이 배속되어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전도하였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의료선교보다 교육선교가 더욱 효과적이었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예외 없이 성경과목을 포함시켜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이렇게 병원과 학교를 통한 효과적인 전도는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성경연구반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성경연구반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예배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목사 안수를 받은 선교사들이었지만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영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제중원과 정동 진료소의 교사로 있던 두 선교사는 이미 1885년 말에 2, 3명의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선교사들로부터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는 현실적인 욕구를 가진 학생들은 성경연구반에서 주로 성경을 읽거나 성경구절을 암기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은 선교사들의 예배에 참석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점차 성경연구반은 세례를 준비시키는 학습과정과 같이 되었다. 1887년 7월 24일과 10월 2일에 각각 세례를 받은 박중상과 한용경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처음부터 한글 성경을  가지고 시작된 성경연구반은 점차 사경회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초기 한국교회가 급성장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2. 세례식

 선교 초기부터 세례를 강조한 것은 한국교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세례는 하나님께서 죄를 사유하신 것과 성령의 은사를 받은 하나의 증표로서 강조되었다. 그러나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회심자를 얻으려는 선교적 열정으로 인하여 세례의식이 교회공동체로 전입하는 예식(Initiation)으로 강조되었다. 이런 이유로 선교사들은 학습과정의 성격을 지닌 성경연구반을 통하여 세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세례는 새로운 회심자들을 이끌어 교회의 구성원이 되도록 만드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복음전도나 성경공부도 세례예식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례문답에서 가장 중요한 심사기준의 하나가 전도한 사람이 있는가의 여부이었기 때문에 세례는 전도의 의무를 강조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처럼 세례를 받기 위한 조건으로 강조되던 세례는 종종 예배에서 선교의 서약으로까지 요구되었다. 선교 선교사들은 회심자들이나 초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세례식으로 연결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성급한 열매를 기대하던 선교사들에게 이교적 풍습과 미신을 버린 분명한 변화를 가져온 자들만을 선별하여 세례를 베푸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연구반 운영은 일정한 기간의 학습과정 없이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결정하여 세례를 주던 초기 단계에 변화를 주었다. 비록 충분한 교육과정은 아니지만 성경연구반은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 세례를 받도록 준비하는 기회가 되었다.
 선교사들이 세례를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세례를 받은 자들이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배척받던 선교 초기에는 복음을 접하고 성경연구반에 참석한 자라도 정기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앙을 결단하고 분명한 소속감을 주는 세례를 받은 자들이나 용기를 가지고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세례예식은 정기적인 예배에서 거행되기 때문에 세례자들은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먼저 정기적인 성경공부반에 참석한 후 세례를 받아 예배공동체의 핵심이 된 자들은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권서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의 보좌로 1886년 7월 18일 주일 오후에 최초로 한국인 노도사(盧道士 또는 盧春京)에게 세례식을 집례하였다. 알렌의 통역을 돕던 노도사의 세례식은 북장로교 소속 의료 선교사 헤론(J. W. Heron; 惠論)의 집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때 헤론의 어린 딸 앤(Sara Anne)도 함께 세례를 받았다. 또한 언더우드는 1887년 가을에 황해도 소래에서 7명에게 성인세례를 베풀 때 서경조의 아들 병호(丙浩)에게도 세례를 주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한국인 유아세례식이었다.
 1886년 4월 25일 부활주일 오후 3시에 아펜젤러는 언더우드보다 3개월 먼저 세례식을 거행하였으나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들이었다. 이 때 언더우드가 예식을 보좌하였으며 세례를 받은 자들은 스크랜톤의 딸(Marion Fitch Scranton), 아펜젤러의 맏딸(Alice Rebecca), 그리고 일본영사관 직원(Hayakawa Tezya)이었다. 아펜젤러는 1887년 7월 24일에 첫 감리교 신자인 박중상에게 세례를 주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아펜젤러로부터 권서인 최씨의 아내가 세례를 받은 첫 한국인 여성이 되었다.
 세례를 받은 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예배공동체가 형성되고 교회가 시작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예배공동체는 권서인들을 중심으로 서울, 평양, 의주, 그리고 솔내 등지에서 형성되어 갔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처음으로 방문한 지역에서 이미 세례를 받았거나 세례를 받고 교회공동체에 가입하려는 자들을 발견하였다. 이미 언급한대로 언더우드가 1887년 가을에 평북 소래에서 7명에게 세례를 줄 때 이미 세례를 받은 3명이 있었으며 또한 평북 의주에서 선교를 할 때 세례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100여명이 모였다.
 만주에서 시작된 한국인 권서전도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초기 한국교회의 전도열은 성경연구와 세례식을 통하여 나타났다. 각 교회는 자체의 확장을 향한 선교 열정이 무르익음에 따라 때로는 예배가 선교 서약을 강조하는 시간이 되었으며 심지어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 세례를 받는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전도열과 세례 강조가 초기 한국교회 급성장의 원인이었지만 오히려 예배는 점차 회심자들을 얻기 위한 설교 중심의 부흥회 형식과 그 회심자들을 위한 세례교육을 강조하는 사경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주일예배

 주일예배는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에 강조한 가장 특징적인 것이었다. 청교도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은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의 개념보다 구약의 율법적 개념이 더욱 강조되면서 안식일은 주로 농사일을 하던 교인들에게 상당한 갈등의 여인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주일이 안식일로 지칭되던 초기에는 교회가 교인들에게 노동은 물론 안식일을 지키도록 허락하지 않는 직장을 떠나도록 권면까지 하였다. 
 한국에서 시작된 주일예배는 장소에 따라 사랑방 시대와 예배당 시대로 구분된다. 선교의 자유가 없던 초기에는 간단한 형식의 예배가 선교사들의 사랑방에서 시작되었다. 선교초기에 예배의 형식은 예배 장소에 따라 발전하며 변하였다. 이미 선교사들의 공식적인 선교가 시작되기 전에 서북지역의 한국인들에 의해 사랑방에서 예배가 진행되었음을 알아보았다. 한 마을에 신자들이 생기면 먼저 어떤 집에서 예배공동체를 형성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그 다음 수가 늘어나면 별도의 작은 집을 사거나 짓고, 마침내 큰 기와 지붕의 예배당을 지어 나간 것이 초기 교회 건축의 일반적 형태이었다. 한국 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자급의 원리에 충실하면서 마을마다 사랑방을 중심으로 그들 자신의 예배 처소를 갖게 하였다. 서울에서도 1894년 예배당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선교사들의 사랑방에서 예배가 이루어졌다. 형식을 갖춘 공식적인 예배가 시작된 것은 사랑방 시대를 지나 예배당이 건축된 후부터이다. 여기서는 선교사들의 사랑방에서 시작된 예배와 예배당이 건축된 후부터 시작된 장로교와 감리교의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알아보자.


1. 사랑방 예배

 초기 기독교의 전도와 예배가 다락방에서 시작되었듯이 한국의 전도와 예배도 사랑방에서 시작되었다. 선교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사람들을 직접 접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랑방이 복음전파와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네비어스의 선교방법을 실천하던 선교사들과 권서전도인들은 사랑방을 통하여 개인전도와 예배를 발전시켰다. 사랑방은 불신자나 구도자가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기독교에 대하여 배우고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대화의 통로이었다. 또한 사랑방은 종교적인 대화 뿐 아니라 성경공부와 기도를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선교사를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때때로 선교사의 집으로 무리를 지어 찾아가 여러 가지 물음을 던지곤 하였다.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선교사와 조사들은 일일이 응답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로 삼았다. 저명한 인사가 사랑방으로 초청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성경공부나 말씀을 들었다. 집주인이 예수를 믿을 마음이 생길 때에도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그의 사랑방이 사용되었다. 이처럼 선교사와 한국인 조사들은 교회를 건축하기 전이나 후에 사랑방을 통하여 예배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사랑방은 점차 교회로 성장하여 갔다. 널다리골교회로 알려진 평야 최초의 교회도 마펫의 조사 한석진의 사랑방에서 시작되었다. 마펫과 한석진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으로 마침내 1893년 11월에 22명으로 이루어진 교리학습만이 조직되어 그 중 7명이 1894년 1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세례교인 73명, 학습인 195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시작된 주일예배, 세례식 및 성만찬식 등은 사랑방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의 사랑방 예배는 미국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영어로 진행되었다. 선교활동이 허락되지 않던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비밀리에 복음전도와 성경연구반, 그리고 세례식을 통하여 예배공동체를 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일예배는 선교사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에게만 한정되었다. 그러나 사랑방 예배는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기회를 제공하여 점차 한국인을 위한 예배를 준비하게 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점을 지적하였다:

 선교사들의 집에서 드린 주일예배들은 점차 발전되었으나 처음에는 우리들이 [한국인 의] 언어에 대한 지식 결핍뿐 아니라 회중의 입장을 이해할 수 없어서 예배가 매우 형 식을 갖추지 못하였다; 한국어에 더욱 익숙해지고 회중도 예배의 의미를 더욱 잘 이해 할 수 있게됨에 따라 더욱 형식을 갖춘 예배를 시도하게 되었다.
 주일예배가 한국인들을 위하여 한국어로 진행되기까지는 약 2년이 걸렸다. 알렌(Horace N. Allen)의 보고에 의하면, 한국에서 영어로 드린 외국인 첫 공식 주일예배는 1885년 6월 28일 주일 저녁에 언더우드의 집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드린 연합예배이었다. 그 이후 선교사들은 언더우드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주일예배를 드렸다. 파커(William H. Parker) 공사는 1886년 8월부터 자신의 공관을 제공하여 선교사들과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매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예배 장소로 제공되었던 미국 공사관은 그 해 10월말부터 연합교회(The Union Church)로 발전하였다. 1887년 2월말에는 연합교회의 예배에 50여 명이 모일 정도로 성장하였다. 연합교회의 예배와 설교는 담임목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 다른 목사들이 교대로 주관하였다.
 사랑방 예배는 점차 한국인들에게 소개되었다. 1886년 1월부터 소수의 한국인들이 주중에 모이는 선교사들의 저녁기도회(Week of Prayer)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언더우드는 1886년 1월부터 주일 저녁예배를 부흥회 성격을 띤 주중 저녁기도회로 확대하였다. 1886년 8월부터 미국 공사관에서 모이던 선교사들의 주일 연합예배에 소수의 한국인들이 일본 공사관 직원과 함께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의 예배에 한국인들이 초청될 때는 은밀하게 집안에서 창문을 막고 진행되었다. 점차 조심스럽게 성경공부로부터 회심한 자들에게 확대되던 예배는 1887년에야 자유롭게 공식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1887년 2월 27일 주일부터 선교사들의 연합교회의 예배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비록 자신들의 소속 교단과 예배 경험은 달랐어도 선교사들은 기도회와 주일예배를 연합으로 인도하였다. 어려운 선교 현장에서 공동의 목적을 가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가지고 다른 교단의 예배 형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1885년 10월 11일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족 11명이 참석한 주일예배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함께 첫 성찬식을 집례하였다. 장로교의 첫 성만찬은 1887년 성탄절에 언더우드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2. 예배당 예배

 1890년대 후반부터 정규적인 예배를 위해 사랑방에서 모이던 예배공동체들은 점차 자체의 예배당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예배당 건축이 시작되면서 표면적으로 두 가지 변화를 경험하였다. 하나는, 선교의 자유가 없던 사랑방 시대에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교단의 구별이 없이 주일 오후에 드린 연합예배가 각 교단의 교회가 건축되면서 주일 오후예배의 형식에 교단적인 특징이 나타나며 교파교회를 위한 선교시대가 시작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예배당이 건축되면서 예배의식에 토착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먼저 초기에 건축된 장로교와 감리교의 예배당에서 드려진 주일 예배순서와 토착화된 예배의식을 살펴보자.

장로교
 한국에 세워진 첫 번째 개신교 조직교회는 1887년 9월 27일(화요일)에 서울 정동 언더우드의 사택에서 14명의 남자 세례교인들로 시작된 정동교회(새문안장로교회의 전신)는 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새문안교회에서 드린 첫 공식예배에 관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첫 예배 형식은 1895년에 마펫(Samuel A. Moffett)이 발행한 『위원입교인규도(位願入敎人規道)』에서 소개된다. 이 교리문답은 장로교 입문서로 다양한 기도 및 찬송과 함께 신앙 초보자들에게 기본적인 교회 정치와 예식을 제공한다. 마펫이 소개한 주일예배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마펫이 소개한 주일예배 순서(1895)
 찬송        
 기도        
 성경봉독    
 기도(회중 중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대표로 함)  
 찬송       
 성경강도   
 기도       
 헌금       
 찬송


 마펫이 소개한 주일예배의 순서는 매우 간단하다. 그 이유는 초기 장로교의 주일예배가 전도설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노방전도형의 간단한 예배로부터 시작하여 설교중심의 비예전적 예배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이 예배순서가 간단하게 시작과 마지막 순서(축도)를 생략하거나 간단하게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끝나도록 계획된 이유는 목사가 참석하지 않은 예배를 위하여 또는 가정 예배와 같이 작은 규모의 예배를 인도할 한국인들을 위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마펫의 간단한 예배 형식은 한국인들이 만주에서 드리던 예배 형식을 연상하게 한다. 이처럼 장로교의 예배가 비예전적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예배순서에 축도가 마지막 순서로 추가된 것은 1896년에 Horace G. Underwood가 연합 부활주일 예배를 위해 준비한 한국 최초의 예배주보, 「부활주일예배」에서이다.
 마펫이 소개한 주일예배 순서는 점차 묵도, 시편낭독(교독), 광고, 그리고 축도 순서들이 추가되면서 장로교회의 전형적인 순서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것은 1932년 10월 30일에 드려진 새문안장로교회의 주일예배 순서와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마펫의 예배(1895)   새문안장로교회의 주일예배(1932)


                            묵도
 찬송                찬송(일어서서)
 기도                기도(장로)
                            시편낭독
 성경봉독            성경봉독
 기도(회중)  
 찬송                찬송(성가대)
 성경강도            설교
 기도                기도
 헌금                헌금과 기도
                            광고
 찬송                찬송(송영)
                            축도


마펫의 예배 형식으로부터 발전한 새문안장로교회의 주일예배 순서는 한국 교회의 표준적인 주일예배가 되었다. 이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표준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예배는 묵도로 시작하여 축도로 끝난다. 예배의 시작 부분의 찬송은 일어나서 부른다. 기도는 장로나 평신도가 인도한다. 시편낭독(교독)이 기도 순서의 앞이나 후에 진행된다. 성경봉독과 설교 사이에 성가대가 찬양을 한다. 헌금과 광고 순서가 설교 후에 배치된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으로부터 구체적인 주일예배의 순서를 제정하지 못한 초기 장로교의 주일예배는 전도설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노방전도형의 간단한 예배로부터 시작하여 1907년 대부흥운동의 영향으로 더욱 강화된 설교중심의 사경회형의 비예전적 예배로 발전하였다.


감리교
 아펜젤러는 1887년 9월 성경공부를 위한 장소로 시내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사서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10월 9일(주일) 오후에 "벧엘 예배당"(Bethel Chapel; 정동감리교회의 전신)으로 불리던 이 건물에서 한국 최초의 감리교 공중 주일예배가 한국인 4명(두 명의 권서인 장씨와 최씨, 최씨의 부인, 강씨)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이 첫 주일예배는 아펜젤러가 영어로 개회기도를 하고 마가복음 1장을 읽은 후 권서인 장씨의 폐회기도로 끝난 매우 간단한 예배였다.
 아펜젤러는 최초의 감리교회로 설립된 벧엘 예배당에서 다양한 예식을 인도하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대로, 10월 16일에는 안방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권서인 최씨의 부인(28세)이 세례를 받았다. 10월 23일에는 권서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최, 장, 강, 한씨 등과 최씨의 아내) 참석한 가운데 감리교의 첫 성만찬이 거행되었다. 벧엘교회는 점차 발전하여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1888년 3월 11일 주일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집회가 추가되었다. 하나는 아펜젤러가 자신의 집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함으로 30분 동안 영어로 진행된 교육 내용은 성경연구와 리교의 교리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스크랜톤 대부인이 여성들을 위한 저녁예배를 시작하여 이 날에 21명이 참석하였다. 또한 3월 14일(수) 저녁에는 아펜젤러의 주례로 한용경과 과부 박씨의 결혼식이 거행되어 한국 최초의 교회 결혼식이 되었다.
 금교령으로 인해 1888년 5월 벧엘 예배당이 폐쇄됨으로 중단되었던 주일예배는 5개월 후인 10월 1일부터 연합교회로 사용되던 아펜젤러의 집에서 재개되었다. 1897년 정동교회당이 건축되어 통합된 예배공동체가 형성되기까지는 감리교회의 주일예배는 일정한 예배처가 없이 빈 건물이나 학교 건물에서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분산된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분산된 형태의 예배는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는 속회(구역회) 교회를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1년 당시 5개의 예배처(정동, 이화학당, 아오개, 동대문, 종로)로 구성된 서울구역의 감리교회에서는 주일에 3종류의 예배가 진행되었다. 1891년 50여명이 모이던 정동교회는 주일예배를 주일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하고, 주일학교를 오후 2시 30분에 배재학당에서 연합으로, 그리고 저녁예배를 여성회관에서 진행하였다. 1890년에 조직되기 시작한 주일학교는 장년들까지 포함한 일종의 성서 공부반과 같았다.
 벧엘교회에서 드린 주일예배 중 1887년 12월 25일 오후 2시에 드린 성탄절 예배순서는 초기 감리교회의 주일예배를 잘 보여준다.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어로 진행된 이 공식 예배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베델교회의 주일예배(1887)
 1. 김명옥의 세례
 2. 찬송
 3. 기도(한글로 읽음)...스크랜톤
 4. 성경봉독(마태복음 2장)
 5. 성경봉독(누가복음 2장)...스크랜톤
 6. 설교("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태 1:21)...아펜젤러
 7. 주기도문
 8. 찬송("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9. 축도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을 위해 설교와 기도순서를 한글로 진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 첫 공식 예배에서 아펜젤러는 처음으로 한국말로 설교하였다. 아펜젤러가 설교할 아이디어를 자신의 권서인 최씨에게 말하면 최씨가 그것을 적당한 한국말로 설교 원고를 써 주었다. 이 설교 이후에 아펜젤러는 자주 한국어 설교를 시도하였다. 또한 스크랜톤도 한글로 읽은 기도문도 최씨가 작성하였을 것이다. 선교 초기에는 서구의 찬송들을 직접 한글로 번역하여 사용하였으나 아직은 성탄절 찬송가나 캐롤송이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아 성탄 절기에 알맞은 찬송가를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탄 축하예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대에 어긋난 찬송("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을 불렀다.
 매우 간단하게 진행된 특별절기 예배이지만 미국 감리교의 예배 형식으로부터 온 몇 가지 예전적인 특징들을 보여준다. 그러면 초기 감리교회의 주일예배의 내용과 구조 그리고 형식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알아보자.
 첫째, 세례식을 설교 이전에 행하였다. 공식적인 예배가 허락되자마자 교회 밖에서 행하던 세례식이 예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아펜젤러는 한국인들에게 이미 두 번의 세례식을 집례하였다. 배재학당의 학생들인 박중상과 한용경에게 각각 1887년 7월 24일과 10월 2일에 세례를 베풀었다. 두 번째 세례식은 한국어로 번역된 세례 예식서(교리문답서)를 가지고 집례하였다. 그러므로 김명옥의 세례식에도 번역된 세례 예식서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세례식을 설교 전에 행한 것은 어린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미국 교회의 예전에서 온 것이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던 미국 교회들은 어른들을 위한 설교 순서 바로 전에 어린아이들이 교회학교에서 성경공부를 하도록 퇴장하도록 하였다. 설교 이전에 세례식을 행함으로 어린아이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교육적인 배려를 한 것이다. 이 공식적인 예배에서 세례식을 거행한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례예식을 행하였다.
 둘째, 준비된 기도문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먼저 기도를 작성하여(written prayer) 예배에서 그 기도문을 읽었다(reading prayer)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예배에서 준비된 한글 기도문을 영어 표기로 읽은 스크랜톤(William Scranton)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선교사로 안수를 받은 의사였다. 비록 선교사가 한국어로 대표 기도를 하기 위해 기도문을 준비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기도를 즉흥적으로 하지 않고 준비된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은 미국 교회의 예전적인 특징의 하나이었다. 선교 초기의 상황을 고려할 때, 선교사가 예배에서 기도문을 사용한 것을 한국인들에게 기도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교육적인 의도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2회의 성경봉독(성서일과)을 준비하였다. 이 때의 첫 예배에서 성탄절을 위한 본문을 신약의 두 곳으로부터 선택하였으나 이것은 한 예배에서 구약공과와 신약공과를 모두 읽은 미국 감리교의 예전에서 온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변방지역(the frontier)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감리교회는 안수를 받은 목사가 부족하였다. 안수 받은 목사가 없는 경우를 위한 예배는 찬송, 성경봉독, 그리고 기도로 간단하게 진행되었으며 이 때 성경봉독은 설교를 대신하였다. 이처럼 2회의 성경을 읽고 경우에 따라서는 설교를 대신함으로 성경봉독을 중요한 순서로 여기던 미국 감리교의 예배 전통이 한국 감리교의 예배 순서에서 처음부터 계속 나타난다.
 넷째, 선교 초기부터 주기도가 예배에 포함된 것은 감리교의 전통이다. 그러나 주기도를 설교 후에 진행한 것은 감리교 예전의 예외라고 볼 수 있다. 초기 한국장로교회의 예배에는 주기도가 생략되어 있지만 감리교의 예배에는 초기부터 항상 주기도가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나 감리교는 주기도를 항상 대표기도 후에 연결하여 진행하였다.
 위에서 본 것처럼 아펜젤러는 처음부터 한국감리교의 예배에 미국감리교의 예전 형식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아펜젤러의 노력은 선교 초기부터 감리교의 예배 전통이 되어 감리교 선교사들은 한국감리교의 주일예배가 예전적이기를 희망하였다. 이런 이유로 초기 한국감리교회의 예배는 미국감리교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강령과 규측」(Doctrines and Discipline)에 나타난 예배형식을 거의 그대로 옮겨 실천하였다. 이런 증거의 하나가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예배 문헌으로 밝혀진 「미이미(美以美)교회 강례」이다. 미이미(美以美)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초기 한국 감리교회의 이름이었으며 1906년부터 미감리회로 불려졌다. 미감리회 선교부에 의해 1890년에 순한글 국판 52쪽으로 출판된 「미이미교회 강례」는 아펜젤러가 선교사역에 필요성을 느껴 1888년의 미국 감리교의 「강령과 규측」을 부분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미이미(美以美)교회 강례」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은 세례와 성만찬과 같은 여러 예식들에 관한 간단한 설명(Articles of Religion)과 일반적인 규범(General Rules)으로 구성된다. 둘째 부분은 기본적인 6가지 예식들--유아세례, 성인세례, 입교, 성만찬, 결혼, 하관--의 순서가 소개된다. 그러나 선교초기에 발행된 전도책자용으로 만들어진 이 문헌에는 주일예배에 관한 내용이 없다. 그 이유는 주일예배의 형식과 순서보다는 복음전도에 더 큰 관심을 두던 아펜젤러가 미국 감리교의 「강령과 규측」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주일예배에 관한 부분을 생략한 것이다. 더구나 「미이미교회 강례」에서 소개된 감리교의 예식들은 주일예배의 기본적인 순서들로 진행되지 않아 주일예배의 순서를 추정할 수 없다.
 1900년 이전 한국감리교의 예배를 살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는 1898년 <죠선크리스도인회보>에 실린 주일예배순서이다. 이 자료는 1896년 미국 감리교 총회의 결정에 따라 "미이미(美以美) 교회의 예배예식"으로 정해진 것으로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감리교회도 이 예배순서를 따르도록 각 교회에 제안하였다. 이 초기 한국 감리교회의 주일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ㄱ. 풍류소리
 ㄴ. 찬미함: 회중이 서서 찬미가 책으로
 ㄷ. 사도신경을 외움
 ㄹ. 기도함: 목사와 회중이 다 꿇어 엎드려. 이후 주기도문 외움
 ㅁ. 성가함
 ㅂ. 구약 몇 귀절을 읽음: 시편을 읽으면 회중과 함께 화답함이 가함
 ㅅ. 영광경: 영광이 성부께와 성자께 계시도다
                   태초와 이제와 영원한 세상까지 무궁히 계시도다 아멘
 ㅇ. 신약 몇 귀절을 읽음
 ㅈ. 수전과 고시함
 ㅊ. 찬미함: 회중이 서서 찬미가 책으로
 ㅋ. 전도함
 ㅌ. 기도함: 전도함이 회중에게 유익되기를 위하여 간단하게
 ㅍ. 찬미함: 찬미한 후에 찬미 하나님 복근원으로 그침
 ㅎ. 사도축문


 이 공동예배의 절차는 1930년대까지 한국 감리교회에서 사용되었다. 미국 감리교회의 예배 형식을 따르던 한국 감리교회의 주일예배는 점차 초기에 번역된 예배순서의 명칭을 현대어로 바꾼 것과 한 두 가지 순서가 추가되거나 분리된 것 외에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풍류소리는 주악이나 성악으로, 영광경은 삼위찬송이나 귀영가로, 수전은 헌금으로, 고시는 광고로, 전도는 설교로, 그리고 사도축문은 축사 혹은 축복으로 점차 명칭이 변하였다. 또한 이 주일예배 순서는 예전적 성격이 분명하다. 찬송을 할 때는 일어서서 기도를 드릴 때는 꿇어 엎드리도록 하였다. 구약과 신약을 봉독하고 그 사이를 삼위찬송으로 구분하였다.   


토착화된 예배의식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예배의식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상당한 대결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강조한 청교도의 엄숙한 예배분위기는 조선 말기의 지배종교였던 유교의 가부장적 분위기와 적절하게 연결되면서 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엄격한 청교도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성경과 설교가 중심 부분이 된 예배는 유교의 보수적, 율법적, 형식적인 분위기에 익숙한 회심자들에게 윤리의식과 회개를 강조할 수 있었다. 선교 초기에 나타난 예배의식의 토착화는 네비어스 선교정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의 예배 토착화는 네비어스 정책에 의해 예배당 건축 양식으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언더우드는 네비어스 정책을 요약한 자신의 책 The Call of Korea에서 "예배당은 토착적인 모양과 기독교인들 자신의 재원을 가지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건축되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예배공동체를 형성하는 준비단계이었던 성경연구반은 교회가 건축되기 시작하면서 주일 오후예배를 준비하는 오전 성경공부로 정착되었다. 또한 수요일 기도회가 정착되면서 기도와 간증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수요일 기도회에 참석한 자들은 돌아가며 짧은 기도를 이어가는 돌림기도와 한 목소리로 다같이 기도하는 통성기도를 하였다. 이와 같은 예배형식은 만주에서 한국인들이 드린 예배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자 없이 한국식의 마루로 된 예배당 내부에서 기도를 할 때는 모두 꿇어  앉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형식을 취했다. 당시의 풍속을 따라 커튼으로 남녀의 좌석을 분리하여 예배를 드리거나 남녀의 예배 시간을 따로 정해서 모였다. 이런 이유로 예배당을 증축할 때는 'ㄱ'자 모양으로 변형하여 남녀를 격리하였다.
 학습식과 세례식은 단순하면서도 감격 속에서 이루어졌다. 불신자가 교회생활을 시작하고 교인이 되기 위해 준비된 절차로 발전된 성경연구반은 1894년부터 구도자들에게 일정한 기간동안 교리를 배우고 기본적인 신앙생활 수칙들을 가르치는 학습제도가 되었다. 이 때 학습교인들에게 요구하기 위해 채택된 기본적인 규정들의 중심은 십계명으로 유교, 불교, 및 무교의 종교적 습관을 따르던 한국인들에게 분명한 개종의 의지와 표시를 선언하는 토착적인 내용들이 추가되었다. 1897년 장로교의 선교보고에 의하면 입교자들에게 세례의 조건으로 제시된 일곱 가지 규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누구든지 교인이 되려면 조상숭배를 해서는 안 된다. 교인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어떤 경우에도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 따라서 조상신을 섬기는 제사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둘째,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한다. 주일은 안식의 날이고 거룩한 날이므로 사람이 나 짐승이나 모두 안식을 취해야 한다. 생계 유지를 위해 일해서는 안 되고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주일은 쉬어야 한다 (그러나 긴급을 요하는 일은 할 수 있다).
    셋째, 부모를 공경하라. 살아 계신 부모에 대한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살아 생 전에 부모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해야 한다.
    넷째, 불법적인 혼인 관계를 금하라. 하나님께서는 일남일녀를 지으시고 부부로 삼으 셨으니 서로를 버려서는 안 되고, 첨을 두거나 음란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먼저 자신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라. 모든 교리를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 요한 것이므로 자기 가족을 설득하여 찬양하고 기도하며 일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순종케 해야 한다.
    여섯째, 생업에 근면하고 계명을 지키라. 하나님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 셨다. 어느 누구도 일하지 않고 먹을 수 없다. 게으르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시기하 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정직하게 돈을 벌고, 힘을 다해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라.
    일곱째, 악한 범죄를 피하라. 성경은 술취함과 노름을 금하고 있다. 이런 것에서 분 쟁과 싸움, 살인과 상해가 나온다. 포도주, 아편을 만들거나, 먹거나, 팔지 말고, 도박 집 을 개설하지 말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남을 타락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분명한 신앙훈련을 요구하는 규정들을 따라 앞으로 6개월 동안 훈련을 받게될 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 20여 가지에 이르는 학습문답이 주어진다:

 -- 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되려 하나요?
 -- 용서받아야 할 당신의 죄악들은 무엇인가요?
 -- 당신은 용서를 받았습니까? 용서를 받은 증거가 무엇인가요?
 -- 누구를 통하여 용서를 받았나요?
 -- 예수는 누구인가요?
 -- 그는 어디에서 나셨나요?
 -- 그의 어머니는 누구인가요?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하나님'이라 답해야 함)
 -- 하나님과 당신과의 관계에서 예수는 누구인가요?
 -- 예수님은 죄인이었나요?
 -- 왜 그는 죄인으로 죽으셨나요?
 -- 그는 완전히 죽으셨나요?
 -- 그는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 언제 그리고 무엇하러 오시나요?
 --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 불신자들이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 만일 당신이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어디로 가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나요?
 -- 날마다 기도하나요?
 --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요?
 -- 모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포기하였나요?
 -- 날마다 성경을 읽나요?
 -- 얼마나 연속으로 읽나요?
 -- 다른 이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있나요?

 이상과 같은 질문들에 만족할 만큼 대답을 한 입교인은 학습교인이 되며 6개월 동안 신앙훈련과 세례교육을 거친 후 세례를 받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세례문답에 답해야 한다:

 -- 학습교인이 된 후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기쁜가요? 왜 그런가요?
 -- 주일을 성수하시나요? 어떻게 성수하는지 말해 보세요.
 -- 가정예배를 드리나요?
 -- 술을 마시나요? 그리고 술이나 그런 종류를 집에 두고 있나요?
 -- 당신 집에 일하는 일꾼들에게 술을 주나요?
 -- 아내를 둘 두는 것이 옳은 일인가요?
 -- 죄를 가지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나요?
 -- 당신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나요?
 --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길이 있나요?
 -- 두려워해야 할 [악]영들이 있나요? 왜 없나요?
 -- 교회에는 무슨 성례가 있나요?
 -- 세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누가 이 예식을 집행하며, 누구의 이름으로 하나요?
 -- 무엇으로 [세례를] 집행하나요?
 --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인가요?
 -- 그러면 당신은 왜 세례를 받으려 하나요?
 -- 성찬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 빵은 무엇을 상징하나요? 포도주는 무엇을 상징하나요?
 -- 누가 성례에 참예하나요?
 -- 주의 성찬에 어떤 정신으로 참예해야 하나요?
 -- 다른 이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일이 있나요?


세례문답식은 이와 같은 질문들로 매우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학습교인은 위의 세례문답에 만족할 만큼 대답을 한 후에 세례를 받아 교회의 정회원이 된다. 위에 언급된 입교자를 위한 신앙훈련 수칙들, 일정한 기간의 훈련을 거친 후의 구체적인 학습문답과 세례문답은 초기 한국교회가 선교사들이 소개한 청교도 신앙훈련을 배경으로 교인들에게 철저한 신앙훈련을 실천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처음에는 성경연구반이 학습과정을 대신하였으나 1890년대부터 학습제도가 발전되면서 6개월에서 1년에 걸친 교리 교육을 받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허락하였다. 유아세례 교인이 적은 초기 한국교회에서의 학습은 일종의 세례와 같아 세례식에 앞서 진행된 학습식의 특징은 세례대상자들이 교회 앞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서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식 세례는 견진이나 입교에 가까운 의식이었다.  1886년 언더우드의 편지에 의하면, 초기 한국교회에서 거행된 세례식의 간단한 형식은 찬송, 세례 후보자의 신앙고백, 기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1897년 스피어 총무가 평양의 한 장로교회에서 진행된 학습식과 세례식에 관한 보고에 의하면, 예식은 찬송, 서약, 기도, 헌금, 세례의 간단한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세례식 후에는 곧 성찬식이 진행되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학습식과 세례식은 토착화된 내용의 신앙고백을 강조하는 의식이었다. 예식은 세례대상자들인 학습자들을 일어서게 하여 그들을 위해 무급조사가 엄격한 내용의 학습 서약서를 읽도록 하였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죄 회개, 제사 포기, 주일 성수, 효도, 가족과 이웃 전도, 그리고 낙태, 축첩, 술취함, 노름 등 모든 죄를 버리겠다는 내용의 서약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세례식에 사용된 물 역시 토착화의 한 증거였다. 세례식 물은 새벽마다 여인들이 떠놓고 기도하던 정화수를 값싼 흰 사발에 담아 사용하였다.
 의식의 토착화는 성찬식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초기에는 대부분 성만찬이 세례식 직후에 거행되었다. 단순한 성찬식의 순서는 해당 성경구절을 읽는 후 쌀로 만든 떡이 분배되고 두 개의 단순한 옹기 잔에 포도즙이 분배되었다. 성찬식에 사용된 떡의 종류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통적으로 제사용으로 사용하던 시루떡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배의 경향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미국의 교파 교회들에 의해 파송되었다. 이런 배경은 곧 초기 한국에 소개된 예배의 형식과 내용이 미국적인 교파 교회의 예배 형식과 내용에 직접 연결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한 미국의 교파 교회들에서 나타난 공통점은 순수한 형태의 복음을 전하려는 복음주의와 경건주의 중심의 신앙 형태이었다. 민경배는 한국에 들어온 미국 교파교회의 선교사들의 배경을 한마디로 "부흥회적인 형태, 감리교적 생태"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라고 지적하였다. 미국의 부흥운동을 통해 형성된 복음주의와 경건주의의 이중적 신앙 형태는 선교사들을 통하여 생활과 체험 중심의 부흥회 형식의 예배 형식과 내용을 한국교회에 심었다.  
 초기 한국에 파송된 청교도형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19세기 미국의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으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은 자들로 한국교회에 특별히 회심자들을 만들기 위한 예배를 심었다. 선교 현장에서 한국인들이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회심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선교 현장에서 회심이 예배의 주된 기능이 된 것은 이미 18세기 말 미국의 제 2차 대각성운동과 웨슬레운동과 같은 신앙부흥운동에서 나타났던 중요한 변화였다. 미국에서 회심을 강조하면서 형성된 부흥회식 예배는 선교사들의 경험에 의하여 한국의 선교 현장에서도 재연되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의 예배는 가능한 빨리 회심자들을 얻으려는 선교사들의 열정에 의하여 비예전적인 형식 즉, 선교지향적인 예배 형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점진적 신앙 교육이나 양육보다는 급진적인 변화와 구원을 강조하는 선교지향적인 예배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나타냈다: 실용주의적인 예배 구조와 자유로운 예배 진행.


1. 실용적인 예배 구조

 첫째,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는 회심자들을 만들려는 열정에 의해 실용주의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복음전도나 부흥회와 같은 신앙부흥운동에 의해 지배를 받은 실용주의적 경향은 주일예배의 순서에 잘 나타났다. 노상설교를 중심으로 전후에 회중에 의한 찬송과 기도가 추가된 간단한 예배 형식으로부터 발전한 주일예배의 순서는 통상적으로 3단계로 진행된다: 준비단계(warming up)의 찬송, 회개와 회심을 요구하는 설교, 그리고 새로운 회심자들을 얻기 위한 초청.
 선교지향적 예배 구조의 첫 번째 이며 동시에 준비단계를 형성하는 찬송은 회심과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부흥회식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복음전도집회나 부흥회 성격을 띤 예배에서 찬송의 기능은 회개와 회심을 전할 설교를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비과정으로 찬송은 찬송 그 자체의 기능을 넘어 사람들에게서 회심이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와 기대감을 조성하는 특별한 기능을 가진다. 회중 찬송은 예배자들에게 일치감을 느끼게 하며 감정을 흥분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찬송은 예배의 각 단계를 연결하는 샌드위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선교지향적 예배의 두 번째 단계를 형성하는 설교는 참석자들이 회심을 하는데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예배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런 이유로 설교는 주일예배에서 실제 예배 시간의 절반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한다. 설교 다음에는 회심자들을 수확하는 순서만을 진행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교는 예배의 뒷부분에 위치한다. 설교의 내용은 단순하게 계몽주의적인 경건을 강조한다. 이런 도덕적인 생활의 변화를 강조한 설교는 실용주의적인 접근이다. 설교를 듣고 초청의 시간에 회심한 자들은 세례를 받을 대상자들이 된다.
 선교지향적 예배의 마지막 세 번째 단계를 형성하는 회심자 초청의 순서는 죄, 회개, 구원, 성령으로 충만한 성결의 삶, 그리고 전도와 같은 주제들을 다루는 열정적인 부흥회식 예배에서 실제적인 결론 부분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복음(순복음)을 전하기 위한 설교를 들은 자들은 설교가 끝난 후 20-30명이 기도를 받으러 앞으로 나와 사죄, 평화, 정결함, 그리고 능력을 경험하였다. 19세기초 미국의 신앙부흥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은 초기 한국교회에 복음주의적 전통의 예배를 심으면서 "초청의 시간" 혹은 "결단의 시간" 순서를 소개하였다. 이 순서는 설교를 들은 후 그 주일 처음으로 나온 자가 믿기로 작정하거나 재헌신을 다짐하는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도록 마련된 "은혜의 자리"이었다. 또한 이 은혜의 자리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나 삶의 문제와 싸우는 자가 회심이나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기 위해 기도를 드리도록 강단 앞에 마련된 "애도자의 자리(a mourners' bench)"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회심자들을 수확하기 위한 실용적인 예배에서는 그 목적을 위한 직접적인 효과를 제공하는 설교가 가장 중요한 초점이며 절정을 이루도록 예배 순서에서 보다 뒤쪽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는 헌금과 감사기도, 광고 순서를 설교 전에 위치하였다. 이와 같이 주일예배에서 헌금과 광고가 설교 전에 진행되던 한국 개신교의 공통적인 경향은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열정을 예배 속에서 강조하던 1960년대 말부터 점차 바뀌기 시작하면서 그 순서들이 모두 설교 뒤쪽으로 이동한다.


2. 자유로운 예배 진행

 둘째,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는 교회 법규나 예식서에 의해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처음부터 한국교회는 고정된 형태의 표준예배를 배척하였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그리고 그들을 회심자로 만들기 위하여 예배는 자유롭게 진행되고 또한 간단한 형식을 취하였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복잡한 예전보다는 간단하고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부흥회 형식을 선택하였다. 이런 간단한 형식은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에 적절하였다.
 초기 한국교회가 예배를 자유롭게 진행한 경향은 정열적인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찬송에서 잘 나타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열정적인 찬송들로 진행되는 노방전도와 부흥회식 예배로 유명하던 초기의 예배는 19세기 미국의 프런티어 예배(Frontier Worship)와 같이 "찬송 샌드위치"(hymn sandwitch)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형식은 찬송을 가운데 두고 다른 순서들을 그 앞과 뒤에 배치하여 예배의 기본적인 구조가 찬송으로 구분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형식으로 진행되는 예배는 자유롭게 즐거움과 축제 기분을 가지고 찬송을 큰소리로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자유로운 예배 진행이 예배 참석자들 서로가 친밀감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게 하였다. 그들이 복음전도의 성격을 지닌 예배에서 사용한 찬송의 기능은 회개와 회심을 전할 설교를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본래 예배자들이 경건한 마음과 뜨거운 마음으로 주의 성호를 찬양하는 것이 찬송의 기능이지만, 새로운 회심자들을 준비시키는 찬송이나 찬양은 예배에서 찬송 자체의 기능을 넘어서는 것이다.
 예배용 찬송보다는 예배자들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간단하고 부르기 쉬운 찬송들이 자유롭게 반복되었다. 자주 부르는 찬송들의 내용은 독선적이거나 너무 단순하였지만 주로 성경적이었으며 신앙의 확신을 주고 경건을 표현하였다. 반복적으로 부르는 찬송은 일본의 정치 간섭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불안하던 때에 낙담하고 있던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었다. 인간의 심각한 죄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대속적 죽음은 당시 초기 한국교회가 찬송가를 발행한 주된 목적의 하나이었다. 초기 한국교회는 당시에 발행된 장로교와 감리교의 찬송가들을 사용하였다. 한국 최초의 찬송가는 1892년 감리교의 존스와 로드와일러(L. C. Rothweilder)가 30장으로 된 감리교회 전용 <찬미가>이다. 언더우드는 1894년 장로교회를 위해 154장으로 된 <찬양가>를 발행하였다. 이어 1895년에 장로교는 또 다른 <찬셩시>를 감리교는 <찬미가>를 펴냈다. 이 찬송들은 초기 한국교회의 신앙 형태를 보여준다. 민경배는 초기 한국교회가 예배에서 부른 찬송들의 내용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육신에 대한 무관, 역사에서의 격리, 천국 고향에의 향수, 무궁한 영생의 축복과 신비적 환희" 등으로 요약하였다. 내적으로 경건성을 고조하는 찬송들은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또한 믿음을 강조하는 찬송들은 수난에 대응할 수 있는 신앙적 동질성을 형성하였다.   
 또한 인쇄화된 기도의 내용을 읽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인 기도를 장려하였다. 기도서에 나오는 연속적이거나 일관성 있는 기도의 내용을 배척하였다. 오히려 기도자가 다양한 기억과 감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성령이 도우시는 영적인 기도로 이해되었다. 이런 기도의 자유는 한국인들의 하늘을 향해 열심히 기도하던 습성과 또한 민족적으로 매우 어려운 때에 개인, 가정, 그리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기도해야 할 필요와 함께 잘 연결되어 평신도들의 역할을 확인해 주었으며 또한 예배자들로 하여금 열심 있는 기도를 경청하게 만들었다.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큰 소리로 기도하는 진지한 태도를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평신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배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부흥회를 연상하게 한다. 이와 같은 분위기가 1907년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독특한 한국형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그리고 통성기도회로 발전되었다.
 때때로 초기 설교자들의 열정적인 설교 또한 자유스러운 예배 진행의 한 경향을 나타냈다. 노방전도를 위한 옥외집회에서 다져진 초기 부흥회식 열정적인 설교는 실제 예배 시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회개와 회심을 요구하는 설교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긴 설교에도 불구하고 신앙부흥운동의 성격을 띤 설교는 청중으로 하여금 "할렐루야"와 "아멘" 소리로 그들의 긍정이나 열렬한 응답을 유발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에서 회심자들을 얻기 위해 복음전도로부터 시작된 실용주의적이며 자유로운 예배는 1907년에 일어난 한국식 부흥회 형식의 예배를 통하여 한국 교회에 더욱 강하게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초기에 회개와 회심을 강조하며 예전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적이며 자유롭게 진행되던 예배를 전통으로 세우기 시작한 한국교회의 예배 경향은 서민들을 중심으로 호응을 얻으며 감정적인 부분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예배 경향은 후에 교회성장을 향한 열정에 치우치면서 교단이 제공하는 표준예식을 마치 입기에는 맞지 않고 입어도 불편한 기성복으로 생각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마침 글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자들은 교회 공동체로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려는 목적으로 성전에 함께 모였다. 그러나 그들이 성전으로 모일 때 그들이 몸담고 생활하던 세상을 함께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세상 속에서 한 주간 자신들을 구속하신 분을 일시적으로나마 나타내기 위해 구원받은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전에 서 있었다. 그들은 고백하고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기 위해, 감사하고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변화된 백성, 구속받은 백성, 회복된 백성으로 다시 세상으로 파송되기 위해 성전에 모였다.
 매 주일 초기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찾아 간 곳은 성전이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들이 드렸던 예배는 종교적인 행사이나 사회적인 모임, 또는 주기적인 안식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배에서 활동적이 되고, 관계를 맺고, 요구를 받고, 시간을 투자하고,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였다. 전통적인 우리의 예배는 예배자들에게 자극적이며, 예언적이며, 참견하며, 침략적이며, 그리고 그들의 중심을 꿰뚫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는 열정과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예배는 예배자들에게 도전하고 죄를 깨닫게 하며 그들을 새롭게 하고 변화시켰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었고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었으며 그 열매를 거두었다. 그들은 예배 계획과 진행에 지혜로웠으며 또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우리는 예배의 실용주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자유스럽게 진행되던 초기 한국교회 예배의 경향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가 지닌 전통에 대하여 오늘 우리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 있다. 선교가 시작되던 상황에서 초기 한국교회의 실용주의적인 예배 경향이 특별히 복음전도 중심의 예배와 설교를 통해 회심자들을 얻으려는 그들의 목적에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복음전도를 위한 목적 지향적인 예배는 성경이 말하는 바람직한 예배라고 볼 수 없다. 예배에 대한 바른 질문은 "이 예배가 무엇을 성취하는가?"가 아니라, "이 예배가 무엇을 나타내는가?"이다. 예배는 사람들을 위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축하하는 것임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란 예배자들에게 또는 그들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전도적인 예배의 핵심은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특별히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맺게 하여 회심자를 얻으려는 의도로 진행되는 것이다. 선교와 개종이 예배의 주된 목적이 되어 회심을 목적으로 한 전도설교 위주의 아주 단순한 교육적인 예배가 되면 예전적 성격이 배제된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일시적인 행사나 양적 성장을 성취하려는 교회의 수단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것은 특별히 초기의 한국교회의 예배 전통을 이어가야 할 오늘의 한국교회가 기억해야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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