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한국 교회사

[스크랩] 성결교회 기원과 연혁

에반젤(복음) 2021. 8. 21. 06:18
성결교회 기원과 연혁




1. 역사적 신학적 뿌리


   한국 성결교회 역사적, 신학적 뿌리는 19세기 미국 성결운동에서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감리교회는 19세기의 미국서 큰 부흥을 보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초대 감리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바로 이것이 웨슬리안 성결운동이다.
그리고 그 기원은 만국성결연맹의 설립자인 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감리교회 교역자가 되어 미시시간 연회에서 목회하던 1882년 여름, 웨슬리안성결운동의 지도자인 테일러의 집회에 참석하여 그의 사역을 도우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
   그 집회에서 냅은 더 깊은 은혜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따로 시간을 내어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요한1서 1장7절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자신의 불신앙을 깨달고 마음속에서는 평화가 임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성결의 확신이 왔다. 그 후 그는 개 교회 목회보다 부흥사역으로 일했으며 그 후에 그는 만국성결연맹을 설립하였다. 만국성결연맹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과 더불어 항상 세계복음화를 강조했다. 냅은 1897년, 만국성결연맹을 창시하여 성결운동을 이끌었다.
   이때 카우만은 신시내티에서 열린 냅이 주도하는 이 성결집회(1900년 9월 25일)에 참석하였다. 그때 냅은 하나님의 신학교와 선교사 훈련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카우만은 만국성결연맹에 가입하여 평생회원이 되었다. 그는 새롭게 태어난 마음으로 믿음의 원리에 따라 독립선교사로 출국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카우만은 냅에게 일본 선교계획을 설명하였고, 이때부터 냅과 그의 그룹에 의해서 일본 선교에 대한 공감을 받았다. 그리고 냅이 운영하던 신앙잡지<부흥사>는 카우만 사역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카우만과 그의 부인은 1901년 1월 시카코에 있는 만국성결연맹의 주요 지도자들에 의해 안수를 받았다. 그 후 성직자 명단에는 언제나 카우만 부부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카우만 부부는 동년 2월 22일 동경에 도착하였다.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동경 한 복판 간다지역의 진보조에 건물을 전세로 얻어 새롭게 수리하고 일층은 강의실과 전도관으로, 2층은 카우만과 나까다의 숙소와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건물 앞에 “중앙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내 걸었다. 이것이 발전하여 동경성서학원이 되었고,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바로 한국의 유학생 정빈과 김상준이었다.


2. 한국의 복음전도관 시작


   한국성결 교회는 1907년 5월 30일 종로 염곡에 복음전도관을 세운 것을 창립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복음 전도관은 한국성결교회의 모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복음전도관은 1907년 5월 2일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정빈과 김상준, 이장하와 카우만 부부, 길보른이 같이 귀국함으로써 시작 되었다. 이들은 부산에서 평양까지 선교부지를 물색하던 중 서울 중심지인 종로 염곡동(현 종로1가)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집 한 채를 세 얻어 임시 전도관으로 문을 열었다.
  카우만 일행은 2주간 전도 집회를 마치고 5월 30일 동양선교회 <예수교회복음전도관>이라는 관판을 걸고 정식으로 성결교회 시작을 알렸다. 정빈과 김상준은 거리에 나가 북을 치면서 “믿기만 하오. 미기만 하오. 예수를 믿기만 하오”라고 외치면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한국을 찾은 카우만과 길보른은 1908년 9월 9일 성서학원을 위해 모금한 돈 4000불을 가지고 다시 한국을 방문했다. 그들은 더 큰 기와집을 동현이란 곳에 세를 얻어 주고 이전케 했다.
세 번째로 1908년 카우만과 길보른은 한국에 내한하여 이제까지는 장소가 너무 좁아 아주 큰 경성 중심지 변화가인 무교동 12번지에 집을 계약하여 주었다. 이곳을 경성중앙복음전도관(무교성결교회 희년기념관이 세워진 곳)이라고 불렀다.

   영국 존토마스 목사는 1910년 복음 전도관의 감독으로 부임해 1911년에 세워진 성서학원 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경성 무교동 안에 임시 교사를 지어 공식적인 성서학원을 1911년 3월13일 개원했다. 성서학원의 신축과 함께 정빈은 1912년부터 성서학원전임교사가 되었다. 봉헌식은 1912년 3월31일 가졌다.

  그러나 이들은 성서학원 신축 전부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국에서 성서학원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 동경성서신학원에서 공부하던 이명헌이 돌아와 경성성서학원의 학생이 됨으로 1912년 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3. 성결교회 기원과 연혁
    그러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헌법 책에는 성결교회 기원과 연혁이 이렇게 기록 되었다.
“본 교회는 1901년 미국인 씨.이 카우만과 이.에이 길보른 양인이 동양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동양선교회를 조직하여 일본에 선교를 시작하면서 동경에 성서학원을 설립하여 현지 전도사를 양성할 때, 때마침 한국의 김상준, 정 빈 양씨가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907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경성에서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이름으로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한국성결교회의 기원이 되었다.
   1911년 성서학원을 설립하였으며 그 후 교세가 확장되므로 1921년 9월에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의 명칭으로 교회를 조직하고 현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도 크게 건축하였다. 1933년에는 처음으로 대의제도의 제1회 총회가 개최되어 자립을 선언하고, 수년간의 놀라운 발전과 전국을 누비는 전도활동이 계속되다가 1940년 일제의 강요로 주한선교사들이 자기나라로 돌아감을 계기로 본 교회는 명실공히 자립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때에 교회를 탄압하던 일제는 1943년 5월 24일에 본 교회가 주장하는 복음 중 재림의 복음이 일본 군국주의 국체에 배치된다는 구실로 당시의 조선총독부령으로 전 교회 교역자와 다수의 교인들을 검거 구금하였고, 동년 9월에 예배 중지령을 내려 공예배가 중지되었다가 동년 12월 29일에는 드디어 교회를 강제 해산시키므로 교인들은 목자 잃은 양무리같이 사방으로 이산되었다. 이때에 끝까지 믿음을 지킨 교역자와 교인들 중에 많은 분들이 옥고를 겪었으며 순교를 당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본 교회는 재흥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일어났다.
1945년 11월 9일과 10일 양일에 기독교조선성결교회의 이름으로 제1회 재건총회를 경성에서 개최하고 새로운 재건 헌법을 제정 공포하며 획기적인 교회 부흥에 박차를 가하였다.
1949년 4월 총회에서는 국호의 변경으로 조선을 대한으로 변경하여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명칭을 본 교회의 명칭으로 확정하였다.
   1960년대에 NCC가입문제로 일시 교단의 분열이 있었으나 수년간에 걸친 성실한 노력 끝에 2차에 걸친 합동이 성취되어 단합된 교단으로 크게 부흥되는 중, 1977년에는 교단창립 제70주년 기념대회를 개최하고 기념회관을 건립하였으며, 동남아와 세계를 향해 선교하는 교회의 기반을 굳히게 되었으며 1978년 4월 17일 해외선교위원회를 창립하여 아세아와 세계에 선교하는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1987년 교단 창립 제80주년 기념대회를 기하여 교육 사업을 확장하여 교회의 성숙을 도모하고 국내외적으로 교회가 더 확장되고 아세아와 세계에 선교하는 성결교회의 위상을 높여 오던 중 성결교회 세계화를 위하여 1995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89년차 총회와 기독교미주성결교회 제16회 총회가 통합을 결의하게 되었다.“라고 기록 되었다.









* 끝으로, 초기 눈부시게 발전한 성결교회가 100년이 지난 지금 복음전도의 열정이 식어가고 있다고들 한다. 최초 정빈, 김상준과 같은 열정으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일군들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 참고서적
한국성결교회 100년사
역사적 유산자료 연구 집
성결교회 인물전 제1집
기독교대한성결교회 헌법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