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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성봉 목사의 해방이후 부흥활동

에반젤(복음) 2021. 8. 21. 06:22

 

이성봉 목사의 사역과 가난한 교회

 박명수 교수 /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3. 이성봉 목사의 해방이후 부흥활동 

 

3) 임마누엘 특공대 
6. 25를 지나면서 이성봉 목사가 생각해낸 것이 임마누엘특공대이다. 수복 후 첫 총회가 부산 수정동교회에서 열렸는데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환란의 책임이 바로 자신들의 탓이라고 고백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다. 이것을 보면서 이성봉 목사는 임마누엘특공대를 조직하여 교회를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당시는 6.25 직후여서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가득한 때였다. 공산당이 특공대를 조직하여 사탄의 앞잡이 노릇한 것에 대항하여 주님이 함께하시는 십자가의 특공대를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산시키려고 한 것이다.

당시 이성봉 목사는 부흥사로서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생각한 것은 작은 교단 성결교회요, 작은 시골교회였다. 당시 성결교회는 1000교회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1000교회운동이란 1947년 제 2회 총회에서 채택한 교회확장계획42) 으로 비록 계획대로 구체화되지는 못했지만 이성봉 목사는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정하였다. “총회 부흥강사 이성봉 목사께서는 일천교회 완성운동을 위하여 금년부터는 주로 성결교회 집회를 인도하기로 정하고 전국을 순회할 것이며, 특히 약소교회를 순방집회하기로 되었는데”라고 <활천>은 기록하고 있다.43)

 

이성봉 목사는 임마누엘 특공대를 시작하면서 이런 원칙을 가지고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44)

나는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1. 성지임을 믿음으로 그렇다. 주님은 약한자와 가난한 자의 친구되시고, 또한 나뿐 아니라 주님의 종들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2. 시대가 너무 자유주의로 흘러 교회조차 법적 질서가 없고 혼란 무질서하여 이단과 속화를 방지하기 어려우므로 이제는 내부 결속이 시급함으로 그렇다.

 3. 내가 나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타인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내가 버림을 받을까 두렵다.

 4. 타인을 위하여 대를 구하고(대교회는 내가 안가도 갈 사람이 많다) 자기를 위하여 소를 구하는 뜻에서 그렇다.

 5. 약소교회를 동정하여 고루 고루 은혜를 나누기 위하여 그렇다.

 6. 새시대 남북 통일을 위하여 전도훈련과 작전계획이다.

 7. 환영하는 헬라로 가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기다리는 예루살렘에서 밀알같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은 주님의 자취를 조금이라도 밟아 보려는 심정에서 된 것이다(요 12: 24). 살든지 죽든지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영을 받으소서. 1954년 5월 25일.

 

임마누엘 특공대의 전도활동은 강원도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이 특공대는 경상도를 거쳐 충청도와 전라도의 어려운 교회를 중점적으로 방문하여 영적 싸움을 싸웠다. 1954년 5월 25일 시작하여 1955년 4월 27일 약 일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였다. 이 집회는 경우에 따라 1박 2일에서 부터 일주일동안 계속되었다. 집회의 주목적은 전후의 어려운 교회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부흥운동에서는 언어의 활용이 매우 중요하다. 그 시기에 적절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점에서 이성봉 목사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6.25 전쟁이후 한국사회의 언어는 전쟁의 언어였고, 이성봉 목사는 이 전쟁의 언어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그가 인도한 부흥집회를 “춘천 재토벌,” “황성성결군,” “원주전,” 진부 백병전,“ 주봉산고지,” “경남지방 장교하기훈련”(제직수련을 이렇게 표현함), “유성천양원 꼬마전”(고아원부흥회)등으로 불렀다.

 

이성봉은 교회의 모든 용어를 전쟁용어로 바꾸었다. 1954년 6월 횡성집회의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45)

횡성성결군대장 이만선 목사의 고군분투라는 소식을 듣고, 급진돌굑하니 교회당과 목사숙소 모도 빼앗기고 문어진 공회당 지하실에서 장병들은 포위당하여 악전고투로 비절참절이었다. 특공대 숙소는 신흥여관이요, 전투장은 건난장이라. 4일간 공방전에 고지를 탈화하여 엉터리 예배당에 가마니깔고 승전예배드리니 부상장병 50여명은 사기 충천하야 진지 사수에 진력하는 중이다.

여기에 의하면 부흥사는 특공대이며, 담임목사는 대장이요, 교인들은 장병이며, 부흥집회는 전투이며, 낙심한 신자는 부상병이며, 성공적인 부흥회는 고지탈환이다. 이런 용어사용은 전쟁후의 상황에 적절할 뿐만이 아니라 사실 전도가 영적 전쟁임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봉 목사는 임마누엘 특공대의 전과를 포로석방 8천여 명, 헌금 1천만 환이상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수복이후 한국교회의 중요한 과제는 소위 이단적인 단체의 출현이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박태선 장로를 중심으로 한 전도관운동이다. 여기에 대해서 성결교회는 매우 민감하였다. 왜냐하면 박태선 장로의 부흥운동과 신유집회는 성결교회의 것과 유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명직 목사는 <활천>에 “부흥사를 삼가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실어 거짓 부흥사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46)

 

이런 상황을 이성봉 목사는 그대로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참된 부흥사와 거짓된 부흥사를 구분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僞자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율법주의, 자유주의, 환상주의, 사이비한 僞교리, 이단사설이 우후죽순같이 이러나 그날에는 龍尾에 물녀 天星 3분의 일이 떠러진다더니 유럭한 교직자와 충실한 신도들이 무수히 타락하는 것을 볼 때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47) 여기에서 이성봉은 건전한 부흥회, 즉 순연한 복음주의, 그리고 정통주의 부흥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성결교회는 해방이후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복음주의, 혹은 정통주의로 규정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잘못될 길로 빠지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거짓된 부흥사들의 출현을 말세의 징조로서 설명하여, 여기에 대하여 대비하도록 교육하였다.

 

4) 희년기념전도대 
이성봉 목사는 1955년 4월로 임마누엘특공대의 사역을 마치고 5월부터는 희년을 앞두고 희년준비부흥회를 시작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성결교회는 원래 “사중복음을 들고, 진격전도에 노방전도, 문서전도, 천막전도, 개인전도에 주력”하였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해방 후에 “시대변천과 악마오묘와 인간지혜로 전도열이 저하되고 정치와 사업에 치중되어 직접전도에 등한함은 자타가 공인 유감 천만”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성봉 목사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당시 성결교회가 벌이고 있는 1천 교회 운동에 기여하고자 희년부흥성회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희년성회는 임마누엘성회와는 달리 대교회 부흥회를 통하여 지교회 설립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48)

 

해방 후 한국성결교회의 당면과제가 성전재건이었다면 수복 후 한국성결교회는 교회신축에 힘을 썼다. 여기에는 선명회를 통한 동양선교회의 도움이 컸다. 선명회는 한국성결교회 신축의 반절이상의 비용을 부담하였다. 그 결과 희년총회까지 약 100여 교회가 새로이 신축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49) 그러나 동양선교회의 도움이 외적인 것이라면 이런 것을 내적으로 가능하게 만든 것은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성봉 목사는 곳곳마다 다니면서 영적인 각성과 거기에 알맞는 신앙적인 결단을 강조하여 교회신축에 큰 공헌을 했다.

 

이성봉 목사는 부흥집회를 통해서 지방교회의 교역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일에 힘썼다. 실지로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는 그를 통해서 수 많은 주의 일꾼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해방이후의 한국성결교회의 거의 모든 사역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명단을 보면 당시 성결교회의 수많은 사역자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을 든다면 임동선, 정운상, 황성주, 이진우, 이대준 등을 들수 있다.

 

특별히 희년부흥성회를 인도하면서 그는 교역자들을 격려하고 권면하는 일에 힘썼다. 그의 부흥회 보고에 실린 것들을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본교 김경식목사는 서울지방 부회장으로 의지의 인물이며, 면학 근실로 전도양양하다.”(만리현교회). “이정백목사의 열화적 봉역은 교계와 사회에 신망이 두텁다. 존더 큰 은혜를 주시리라.”(인천송현교회). “청년목사 이성호는 장래 유망한 부흥목사 후보 1인자이다. 좀더 겸손 자중노력으로 일승우일진(日勝又日進)하여라.”(인천중앙교회). “전도사 거듭 거듭 목사안수 낙선은 김전도사의 인격을 더욱 더욱 고상하게 만들고 총회원들의 동정집중은 만사합동 유익뿐일저.”(군산중앙교회). 이런것들을 통하여 이성봉 목사는 목회자의 목자로서 사명을 감당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이성봉 목사의 칭호는 부흥목사였다. 그는 매해 부흥목사로서 총회에 자신의 사역을 기관보고시간에 보고하였다. 1956년 4월 제 11회 총회에 그가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50) “집회수 74교회, 설교회수 890회, 신결신자수 4,250명, 헌금총액 16,930,000환, 지교회설립 수십개 약속중….”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원래 계획한대로 많은 지교회가 개척되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1957년은 성결교회가 창립5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것을 기해서 이성봉 목사는 희년복음전도대를 조직하였다.51) 당시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후원으로 십자군전도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 십자군전도대는 천막전도, 노방전도, 시장전도를 통하여 신개척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총회는 십자군전도대를 해체하고 이성봉 목사를 중심으로 희년복음전도대를 발족시켰다. 그러므로 희년복음전도대는 십자군전도대를 지원하던 재정의 도움도 받으면서 이성봉 목사의 부흥집회로 인한 수입으로 운영하였다. 다시 말하면 반보조, 반자급의 성격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희년복음전도대를 출동하면서 보다 본격적인 전도운동을 계획하였다. 지금까지는 단독으로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이제는 단체로 집회를 인도하려고 계획하였고, 가능한 대로 개교회 집회보다는 연합집회를 계획하였는데 장소는 지방회나 감찰회가 정하도록 하였다. 희년전도대의 조직으로는 대장에 이성봉, 부대장에 이정률, 총무에 정운상, 대원에 임원상이었다. 이성봉 목사는 약 1년 동안을 약 50회의 집회를 작정하고 이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희년의 노래를 지어서 함께 부르도록 했다. “주님의 은총이 그 영광으로/ 이강산 전국에 임하였네/ 희년의 소식과 성결의 복음/ 나팔을 불러라 때는 왔다.”52)

 

희년복음전도대의 효과적인 운영을 위하여 운송수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하여 대원들이 선교부에 찦차를 요청했으나 선교부에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의외로 장충단교회의 김원철 장로가 2백여 만원을 내어 놓아 차를 대여해주었다. 그리하여 한층 발전된 교통수단을 활용하여 전도대를 운영할 수 있었다.53)

 

희년복음전도대는 장충단교회 서울지방대전도대회로 시작하였다. 이 전도집회는 저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를 택해 집회를 열었고, 새벽과 낮에는 개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예를 들면 인천에서는 인천역전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했는데 사람들이 번잡하여 소란스러웠으나 5000명이상이 운집한 모임이 정숙하고 질서정연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룰수가 있었다. 그리고 새벽과 낮에는 송현교회에서 집회를 가졌다. 이런식의 집회를 서울, 청주, 춘천, 양구, 원주등지에서 계속 가졌다. 주최는 지역의 지방회가 맡았고, 진행은 희년전도대 팀이 이끌었다.

또한 희년전도집회에는 퍼거슨박사가 내한하여 강사로 활약하였다. 원래 한미합동집회를 계획하였으나 예정되었던 천막이 오지 않았고, 또한 전도방식의 차이로 합동집회가 아니라 별도의 두 개의 집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성봉 목사와 퍼거슨의 집회는 성결교회의 희년을 기념하는 중요한 잔치였다.54)

 

원래 희년복음전도대는 1년동안 100교회개척을 목표로 출범하였다. 하지만 선교부에서는 1957년 12월로 희년전도대를 마감한다고 통보하고, 지원을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총무와 대원은 감원될수 밖에 없었다. 결국 동년 5월 15일 장충단에서 시작한 집회는 같은 해 12월 29일 부여 규암집회를 끝으로 한단계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장과 부대장은 계속 희년전도대의 사역을 1958년 4월 제 13회 총회까지 계속하였다. 이 집회의 결과는 신구도자가 3,103명이며, 회개체험자는 3,577명이었다.55)

 

이성봉 목사는 13회 총회를 끝마치고, 대만에 전도집회를 계획하였다. 당시 성결교회는 최초로 대만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작정을 하였고, 이성봉 목사도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희년복음전도대 전대원이 십일조를 하여 후원하였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바로 파송하지는 못하였다. 이성봉 목사도 여권의 수속이 지연되어 출발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6월에 부산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6월 21일에 휴양차 제주도에 도착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이성봉 목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곳곳에서 집회를 초청하여 여름 내내 제주도 일대를 돌며 특별전도집회를 열었다.56)

 

5)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이성봉 목사의 마지막 인생은 교단의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이성봉 목사가 미국순회전도를 마치고 귀국한 1960년에 이미 한국성결교회는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당시 한국성결교회는 NCC와 NAE에 다같이 가입하여있었다. NCC에는 해방이후 부터 가입되었고, NAE는 1955년 이명직목사의 동의로 가입하였다. 그런데 6. 25이후 어려웠던 상황에서 미국의 구호물자가 NAE를 통하여 한국에 전달되었고, 이것은 교회를 많이 속화시켰다. 여기에 잡음이 생기자 NAE 탈퇴안이 나오기 시작했고, 아울러서 NCC 탈퇴안도 제출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모인 1960년 4월 총회는 4.19혁명 때문에 열리지 못하고, 그 뒤 5월에 열린 총회에서 이 동시 탈퇴가 부결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1961년의 제 16회 총회에서도 다시 부결되고 말았다. 여기에 대해서 성결교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복음진리 수호동지회라는 단체가 생겨나 강력한 항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교단은 임시총회를 개최해서 양기관 탈퇴를 결의 하였다. 하지만 이미 집단행동을 감행한 복음진리동지회는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복음진리동지회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발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봉 목사는 어느 편에 있었는가? 이성봉 목사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교단의 합동을 위하여 통일수염을 기르고 전국교회의 일일 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교단의 합동과 복음전파를 위하여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1961년 9월 23일 부터 시작하여 1963년 2월 27일까지 성결교회 전체 480여교회를 순회하였다.

 

일일 순회를 마친 그 이듬해인 1965년 7월 23일에 기성측은 아현교회에서, 예성측은 신촌교회에서 합동결의를 하고, 다시 아현교회에서 모여 역사적인 합동총회가 이루어 졌다. 성결교회는 비록 전체가 다 합하지는 못했지만 일부세력을 남겨 놓고 대합동이 이루어 졌다. 이 합동총회의 설교를 이성봉 목사가 “주를 사랑하자”는 제목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합동총회를 마친 후 10일 만인 1965년 8월 2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