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의 특징

에반젤(복음) 2019. 7. 6. 07:26



마태복음은 고대교회에서 4복음서 중에 제일 인기 있었던 복음서로서 가장 많이 교회 지도자들,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교회 평신도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쓰였던 복음서이다.

또 이 복음서가 신약정경에 제일 먼저 나타난다.

 


1. 마태복음의 특징


(1) 마태복음의 몇가지 특성을 살펴보면, 마태복음은 아주 유대적 냄새가 많이 나는 복음서이다.


1) 마태복음 첫머리에 예수의 족보를 내세운 것도 바로 창세기 5:1, 37:2, 대상9:1, 에스라8:1 등과 마찬가지로 이 구약의 관습을 따르는 아주 유대적인 면모를 많이 띤다. 이 족보에서 보여줄려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언약의 성취자이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보일려고 한다.


2) 또 마1:17, 여기 14대가 어떻게 나왔느냐? 14대씩 족보의 세대를 구분해서 예수의 족보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 14대라는 숫자가 어떻게 예수의 족보를 정리하는 원칙으로 나왔느냐? 할 때, 이것은 아마 다윗의 히브리 문자를 숫자로 표시하면 dwd = 4+6+4= 14이다.


그래서 이렇게 히브리 글자에 숫적인 가치를 부여해서 거기서 합이 14가 나옴으로 해서 예수의 족보를 14대씩 구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숫자놀음을 gematria라 한다. 이것은 랍비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랍비들이 구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가끔씩 구약에 나오는 문자의 의미를 그 문자속에 더 깊은 의미가 들었다고 보고 그 깊은 의미를 캐는 하나의 방법으로 각 문자의 숫자적 의미를 부여해서 그것을 합해보거나 또는 빼 본다든가 하는 숫자놀음을 통해서, 그것이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석할려고 하는 것을 gematria라 하는데, 마태도 그런 방법을 쓰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랍비식의 해석방법을 보여주는 이것도 아주 유대적 특징의 하나이다.


3) 또 하나는 1:21에서 예수의 이름이 그의 백성을 구할 자라는 의미이다 라고 하는데, 예수의 이름이 [vy '구할 자'라는 의미로 그 이름 풀이를 paronomasia라고 하는데 이런 방법도 랍비들의 해석방법인데 그런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2) 또 하나는 구약이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 41번 직접 인용되고 있다. 그 중에 한 20번은 신약의 다른 부분에도 있는 인용이고, 그 중에 한 20번은 마태만 인용하는 독특한 구약의 인용이다. 그런데 41번중에 37번은 "이 말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 우리말 번역에 이 말이 응하도록 하기 위해서, 또는 이 말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 서문을 달고 있다.


1) 2: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 바 ", 우리 말은 어순이 원래 말과 달라서 인용부분의 말을 중간에 넣었는데, 헬라어로 보면 " 이것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해진 말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는 서문을 달고, 예레미야가 한 말이 18절에 나온다.


2) 그다음 3:3 "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세례요한을 소개 하면서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미 말해진 자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다.


3) 4:14도 마찬가지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이렇게 구약이 41번 인용이 되는데, 그 중에 37번은 이와같은 서문을 달고 있다. 선지자 누구를 통해서 해진 말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현상이 일어난다고 선지자 말이 인용된다. 이렇게 구약의 성취의 주제를 아주 강조한다.


(3) 또 예수는 자기의 사역을 유대인들에게만 한정을 한다. 가령 마15:21-28까지, 그리고 자기의 제자들의 복음선포의 활동도 유대인들에게만 한정을 한다(마10:5-6, 23).


1) 마15:21-28까지는 아주 중요한 구절인데, 이것의 병행구절이 막 7:24-30에 수로보니게 여자의 딸을 치료하는 그 이야기의 앞에, 마태복음에 나오는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보냄을 받았다'는 그 소리는 마가복음판에 안나오는데, 마태복음판에만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막724-30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자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자녀들을 위한 떡을 개들에게 던져 줄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개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항상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다. 아주 불결한 민족이라고 천시하는 말로 개라고 불렀다. 마가복음판만 보아도 예수께서 자기의 사역을 유대인들에게만 한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태는 그것을 강조해서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에게 자기가 보냄을 받았음을 강조한다.


2) 마10:5-6에서도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이나 사마리아인들에게는 가지를 말고 유대인들에게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한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유대인들에게 한정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에 믿음으로 나오는 이방인들에게 예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다. 수로보니게 여자가 대표적인 이야기다. 또는 막5:1ff에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구출해 준 이야기라든지 또는 고관의 아들을 구출해 준 이야기라든지, 예외적인 경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을 구출했다.


3) 예수께서 종말에 이방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약속을 한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약속한다. 대표적으로 마8:11에서 이방인들이 동 서에서 불러 모아져서, 역대 하나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한다. 종말에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것을 약속을 한다. 종말에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약속은 보통 유대인들에게 대한 경고이다. 믿음없는 불신앙하는 유대인들은 내쫓김을 당하리라는 경고와 같이 나온다. 불신앙하는 유대인들은 그 반면에 심판받고 쫓겨가고 구원받지 못한다는 경고이다.


4) 예수께서 유대민족주의를 과격히 배격했다. 그래서 유대민족주의적, 다윗적 메시야 되기를 거부했고, 특히 유대 종말론의 중요한 사상인 이스라엘이 높임받고,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원수를 갚는다, 복수를 한다는 사상이 아주 강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사상을 완전히 배격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가령 눅4:16 ff에 나오는 예수의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의 메시야 취임강연에서, 예수는 사61:1-3까지를 인용하는데 자기가 바로 이사야서에 예언된 그 갖힌 자를 해방하고 눈먼 자들의 눈을 띄우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선포하는 등의 구원을 주려 왔다고 한다.


그런데 사61장 3절에 있는 한마디 말에 의하면, '이방인들에게 원수갚는다는 사상이 있다' 그것만 싹 빼고 예수가 인용을 한다. 거기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께서 그가 오실 자인가 물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구약의 이사야서 61, 56장등을 인용하면서, 자기가 바로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야 임을 나타내면서도, 그런 곳들에 있는 이방인들에 대한 복수사상은 일부러 뺀다. 이처럼 유대민족주의를 배격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모순되는 상황을 본다. 예수는 유대인들에게만 자기사역을 한정하고, 자기 제자들의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예외적으로는 벌써 지금도 구원을 베풀고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는냐? 이것이 초대교회가 이방인들의 선교의 발생, 초대교회가 이방인들의 선교를 어떻게 하게 되느냐? 당시 유대 신학에 의하면 이방인 선교란 있을 수 없다.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그 영광의 빛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온세상에 퍼지게 해서, 이방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이사야의 언어로 하면 물이 바다를 덮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세상을 덮을 것이며, 모든 민족들이 야웨가 유일한 신임을 알고, 반에 자기들이 신이라고 섬겼던 것들은 한 조각의 목석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자기들의 우상을 다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이 시온에 순례온다는 것이 구약의 선지자들로 부터 내려오는 아주 강력한 사상이다. 이 사상을 이방인들의 시온에 대한 종말적인 순례사상이라고 그런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종말에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오실 때, 그 때 그 영광의 빛이 세상에 비추면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시온에 보화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이런 사상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선교란 있을 수 없다. 종말에 이방인들이 들어온다.


그런데 어떻게 초대교회에서 이방인 선교를 하게 되었느냐? 역사적 예수가 이방인 선교를 명령을 한 것이냐? 마태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가 명령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시간적으로 관계된 것이냐? 그러니까 예수의 생전의, 역사적 예수의 사역에는 유대인들에게 집중을 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이방인들에게 선교하는 그래서 이 관계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전 예수시대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후 교회의 시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되느냐? 이런 것이 초대교회의 선교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와의 갈등과도 관계가 있다. 바울과 헬라교회는 이방선교를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선교에 대해서 좀 달갑지 않게 생각을 했을 지 모른다.


바울 이전에 벌써 사도행전 6장에 반영된 헬라파들 즉 헬라말을 쓰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히브리말을 쓰는 예루살렘 토박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는데 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핍박에 의해서 쫓겨나면서 처음으로 이방인들에게 선교를 한다. 사마리아와 안디옥까지 가면서 이방선교를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선교에 관계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예수의 이와같은 태도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모든 복음서에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기의 사역을 한정했다. 예수는 이방지역에 안갔다. 이방인들에게 일부러 가서 선교한 일은 없고, 예외적으로 자기에게 믿음을 가지고 나오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푼 것이다. 그러면서도 종말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그들을 심지어 우대하기까지 한다. 반면에 불신앙하는 유대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고 한다. 왜 그러면 예수께서 이렇게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 것을 약속하면서 자신은 유대인들에게만 한정을 하느냐? 바울이 이에 대해서 답을 잘한다.


롬15:8,9에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할례의 수종자 즉 유대인들의 종노릇했다. 유대인들을 섬겼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예수께서 생전에 유대인들만 섬긴 것이다. 할례란 유대인들을 말한다. 유대인들의 종노릇했다.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용서와 치유의 은혜를 베풀고 유대인들만 섬긴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유대인들만 섬긴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의 목적이 두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실함, 신실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신실성때문에 그래서 조상들에게 준 약속을 확인하기위해서 약속을 지켜서 확실히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목적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위해서이다.


제일 첫째목적은 무슨 소리냐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했다. 즉 그들을 자기백성으로 선택해서 그들에게 하나님노릇해 주겠다고 언약을 맺은 것이다. 내가 너희 하나님이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 곧 그들을 복주고 그들을 후원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가 와서 그들의 후손들인 유대인들의 종노릇하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을 신실히 지킴을 확인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전적으로 매달려 섬겼다. 여기까지는 다 이해한다.


또 하나의 목적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서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조상들에게 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이냐?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운용에 중요한 원칙인 Representive Universalism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온 인류의 구원이다. 타락한 자기 창조 전체의 회복이다. 보편주의이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 모든 피조세계전체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래서 온 인류와 피조세계 전체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구원계획을 운용하신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운용하느냐면, 항상 소수의 대표를 선택해서 그들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심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한 이유는, 창12장이하에 나온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복주어서 그들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그들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을 도구로 삼아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함이다. 그들을 인류의 대표로 선택해서 그들을 구원해 가지고, 그들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할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 운용방법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 조상들에게 한 약속을 신실히 성취해서 유대인들에게 종노릇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공동체를 이루면 그러면 원래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조상들을 선택한 구원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구원의 공동체로 삼아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서 모든 이방인들을 모든 민족들을 구원할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굳건히 서는 것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혜택이 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예수도 자기 생전에 유대인들에 집중을 하면서 그러나 그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민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종노릇하면서 그들에게서 구원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구원의 공동체를 통해서 모든 민족들을 구원할려고 하셨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언뜻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은 롬1:16에 유대인들에게 먼저요,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도-- 하는 도식으로 말을 한다. 그러니까 구원이 유대인들에게 먼저요,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도-- 이런 도식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우선권이다. 바로 이런 것을 위해서 예수도 자기의 생전에는 유대인들에게만 집중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토론하고 있어요. 마태복음의 유대적 특성을 말하고 있다. 왜 이 말을 하느냐면 이것은 어느 복음서나 다 마찬가지인데, 마태는 그것을 더 특별히 강조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만 섬김의 활동을 하신 유대인들의 메시야,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것을 다른 복음서 보다 더 강조를 한다.


5) 마태복음 5:17-20까지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도리어 세우려 왔다는 강조, 예수와 율법의 연속성의 강조, 예수께서 율법을 성취했다는 것은 율법을 폐한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을 도리어 견고케한다는 뜻이다.


2. 마태복음의 구조 및 특징


(1) 5개의 긴 강론으로 구성됨


마태복음의 구조가 5개의 긴 강론(설교)들 중심으로 되어있다.


1) 5장-7장: 산상수훈 - 진정한 의(義)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강 론


2) 10장: 열두제자들을 선교사업을 위해서 보냄, 하나님 나라의 선포 를 위해서 보냄.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함의 의미,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핍박과 보상이 따르게 됨을 가르친다.


3) 13장 :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 12제자들을 보냄, 하나님 나 라의 의미


4) 18장: 교회생활 - 교회에서 성도들의 교제와 질서에 관한 여러가 지를 다루고 있다.


5) 23-25장: 유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종말 에 심판에 대한 경고,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그 메시야를 거절함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


(2) 모세오경과 비교됨


이와같이 5강론들을 중심으로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모세오경을 상기시킨다. 모세오경의 법이 5구조로 되어있는 것 같이, 예수의 가르침도 5개로 모아져서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마태복음에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가령 산상수훈에서도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앉아서 그렇게 서문을 다는 것부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전달해 주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서 새로운 법, 모세 율법의 추종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보다도 더 완벽한 의를 이루는 새로운 법 산상수훈을 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예수의 가르침이 새로운 법으로 기술된다.


또 예수의 출생기사에서 모세와 많이 비교했다. 특히 하나 예를 들면 예수께서 애굽으로 쫓겨갔다 오는 것도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는 것이다. 또 예수께서 변화산상에서 변화되어 모세와 이야기하는 것으로 모세와 비교되어있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내용에 있어서도 예수의 법과 모세의 법이 비교 대조되어 있다. 마5:21, 27, 31,33,38,43등에 반대어법이 나오는데 너희들이 옛사람들에게 이렇게 이렇게 말해졌다고 들었다. 옛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들을 미워하거나 또는 형제에게 증오심을 품으면 살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최후심판에 넘겨져서 벌을 받는다. 옛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졌다고 들었다. 곧 간음하지 말라 그러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벌써 그 마음속에 간음을 했다. 이런 반대어법 이것이 나중에 아주 중요하는데, 예수의 자기이해를 규명하는데 이른바 간접기독론에 있어서 이렇게 말하는 예수는 자기를 어떤 분으로 보았느냐, 얼마나 큰 권위를 주장하느냐? 그런 것을 규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옛사람에게 말했다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하는 것이 모세의 법, 십계명에서 온 말인데 그것을 능가하는 새로운 법을 예수가 제시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문자를 넘어서 그 정신에 까지 나타내는 새로운 법, 십계명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하는 것은 다 무엇인가? 행위의 최소한을 규제하는 외적 법이다. 그런데 예수가 주는 법은 동기의 내면을 규제하는, 동기의 최대한을 구제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모세의 법은 외적행위의 최소한 규정하고 예수의 법은 내적 동기의 최대함을 규제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 문장형식도 옛사람이 말한다는 것은 모세가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예수는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위를 주장하는 분이다. 내용면에 있어서는 모세의 법을 능가하는 더 완벽한 하나님의 법을 천명하는 분이다. 유대교의 틀 안에서 모세보다 위대한 분은 없다. 유대교의 틀안에서는 모세다음은 곧 하나님이다. 모세보다 더 위대한 자가 없다. 심지어 메시야도 모세밑에 있다. 모든 선지자들 랍비들은 말할 필요가 없고 심지어 메시야도 모세 밑에 있다.


그래서 가령 신15:18절에 보면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다, 즉 기준이 모세이고 메시야는 모세와 같은 존재이다.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의 일부를 보면 메시야가 종말에 모세율법을 백성들에게 잘가르쳐서 백성들을 의롭게 하는 분이다. 그러니까 메시야도 모세 밑에 있다. 그런데 예수가 모세보다 더 높은 분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이미 유대교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편에 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언어상, 유대교의 인식상 모세이상은 곧 하나님이니까 그렇다. 곧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자로서 모세를 능가하는, 십계명을 능가하는 종말의 새로운 법을 계시하는 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여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에 예수와 모세가 비교되는 것으로 해서 예수가 모세의 법을 성취하고 능가하는 것이다.(즉 예수께서 모세법과 구약을 모두 성취하면 구약을 능가하는 것이다.) 완성된 것이 준비보다 항상 큰 것이다. 이런 의미로 예수께서 율법을 완성해서 능가하는 분이다. 이런 것들이 다 아주 마태복음의 유대적인 면모이다.


3. 마태복음의 언어적 특징


(1) 유대적 특징


1) 마태복음에서 하늘나라라고 하는데 막, 눅에는 하나님 나라라 한 다. 막, 눅에는 basileia tou qeou 라고 된 것을 마태복음에서는 basileia ton ouranon 이라고 한다. 보통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하늘로 대칭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렸다. 그래서 하나님 이름 대신에 대칭어를 많이 썼다. 전능하신 이, 임재하시는 이, 거룩하신 이, 그래서 마태복음에 basileia tou qeou 대신에 basileia ton ouranon을 쓴 것을 보면 이것도 아주 유대적인 언어 사용법이다.


2) 또는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첫마디에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 이런 말도 아주 유대적인 표현이다. 하늘이라는 언어가 아주 유대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마태복음에 아주 유대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이런 것을 Jewisch Particularism(유대 특수주의) 이라 한다. 유대 특수주의가 아주 강한 복음서가 마태복음이다. 예수가 유대인들의 메시야이며 유대인의 왕이심이 아주 강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새로운 모세로서 새로운 율법의 계시자 이런 것을 강하게 나타낸다.


(2) Universalism, 이방에 대한 관심이 많음


반면에 Universalism,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1) 이것을 살펴보면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마태복음 28:16ff에서,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제자로 삼아서 그들을 가르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지키게하라는 대위임,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됨, 그래서 그들을 예수의 제자를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야 됨을 말한다.


동방박사가 이방 땅에서 예물을 가지고 예수에게 경배하려 옴,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모든 열방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순례를 하는 사상의 성취로 본다. 그래서 동방에서 온 현자들이 열방들의 대표들로서 그들의 예물을 가지고 와서 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하는 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예물을 바치고 경배하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야 일 뿐 아니라 온 인류의 메시야이고, 예수의 탄생사건은 선지자들이 바라던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는 사건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건이다.


2) 그다음 아까 소개한 8:11,12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 때에 동과 서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불러 모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라는 의미는 inclusive many라는 의미이다. ( 히브리 말에는 추상명사나 또 전체를 나타내는 집합명사가 별로 발달하지 않아서 이와 같이 추상명사가 전체를 나타내는 뜻을 함께 나타냈다.) 그래서 닝br 이란 뜻 many는 all(모두)라는 뜻이다.


가령 막10:45에 예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가 아니라 섬기려, 그리고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들에게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 할 때, '많은'이란 말은 숙어적 all이란 말이다.


이것을 헬라말로 숙어적으로 잘 번역한 것이 딤전 2:6이다. 딤전2:6은 막10:45의 그대로이다. 한자도 틀림없이 그대로이다. 단 딤전2:6은 더 숙어적인 헬라어로 번역된 것이다. 막10:45은 아직 히브리적인 원래 냄새가 많이 간직되어 있는 번역이다.

막10:45에 '많은(polloi)'을 딤전2:6에서 '모든(panta)'로 바뀌었다. 이런 것을 inclusive many라고 그런다. 예수께서 마8:11에서 동과 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즉 모든 사람들이 와서 역대 하나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과 더불어 그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 대잔치를 베풀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때 부름받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내쫓김을 당한다.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유대인들)은 내쫓김을 당한다.


이런 것을 보면 여기서도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약속한 것을 볼 수 있다.


3) 또 13장 38절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데, 예수 자신이 복음을 선포해야 할 대상 즉 밭은 이스라엘 만이 아니고 온 세상이다. 온 세상에 복음의 씨가 뿌려져야 할 것을 말한다.


4) 21장 33-43에 보면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이스라엘에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마태복음에는, 구약의 Universalism 즉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많다. 이런 점에서 바울과 비슷하다. 이방선교에 대한 강조가 많이 있다.


(3) 반 유대주의가 강하다( Anti-Judaism).


1) 대표적으로 23장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위선자들이고, 행악자들이라고 엄청나게 공격을 하고, 마태복음의 수난사에서는 특별히 예수의 십자가에서 죽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책임을 아주 강조한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 예수를 죽였다. 예수를 심지어 죽이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부르짖기를 그의 피가 우리의 왕 우리의 자손들에게 있게 하라는 숙명적인 말을 한다. 27:25에 나오는 이것은 아주 숙명적인 말이다. 콘스탄틴 대제이래로 기독교가 주도 세력이 되서 그 이후 유럽에서 기독교도들에 의해서 유대인들의 핍박이 아주 심했다. 최근까지, 그런데 기독교도들이 유대인들을 핍박할 때, 제일 먼저 내세운 구호가 바로 이말이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죽였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총 책임을 졌다.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에게 임하게 하라. 이와같이 마태복음에 반 유대주의가 아주 강조된다.


2)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장면에서 불신앙하는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경고가 아주심하다.


3) 또 유대인들에게 심판과 경고가 아주 심하다.


4) 또 유대인들의 회당을 언급할 때, '너희들의 회당, 그들의 회당' 이런 식으로 말한다(7:29, 9:35). 또는 그들의 서기관(23:34) 이런 식으로 말한다. 이런 detachment 즉 마태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유대인들의 공동체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고, 이미 분리된 것으로 적대하는 세력으로 보는 것이다. '너희들의 회당', 또는 '그들의 회당', 또는 '그들의 서기관' 이런 식으로 지칭하는 것을 보면 이미 라이벌 관계를 넘어서 적대관계에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4) 목회자로서의 교회생활에 대한 관심을 많이 보여주는 책이다.


1) 18장은 교회생활의 지침서라 할 수 있는데, 18:10-22에 보면 교회에서 연약 자들, 믿음이 약한 자들, 가끔 죄짖고 교회생활을 게을리 하는 자들을 박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찾아서 북돋아 주어라고 한다. 계속해서 교회내에서 discipline 즉 형제가 한 형제에게 범죄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면, 교회내에서 원만한 fellowship을 유지하기 위해서 요즘 치리(권징)을 할 때, 처음 너가 가서 직접 권면을 하라, 그래서 말을 들으면 fellowship이 회복되어 형제를 얻은 셈이 된다. 말을 안들으면 두 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을 하라. 그래도 안들으면 교회전체에 내놓고, 이 못된 녀석이 이런 일을 했는데 내가 다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있는데도 죄를 회개않는데, 우리 다같이 의논하고 기도하자, 그래서 교회앞에 내 놓는다. 그래도 안들으면 교회에 파문, 출교시켜라.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다. 이렇게 4단계로 교회의 discipline을 말하고 있다. 계속해서 교회가 예수로부터 죄 용서해 주는 권위를 위임받아서 행사함을 말한다.


2) 합심해서 성도들이 fellowship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 unity를 강조한다. '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 이것은 하나의 교회가 성립되기 위한 정족수이다. 유대인들이 회당을 하나 설립할려면 남자 열명이 있어야 한다. 열명이 정족수이다. 가령 바울이 빌립보에 갔을 때, 유대회당이 없었다. 바울은 어느 도시나 갈 때, 유대회당에 먼저 가는 것이 선교전락이었다. 그런데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다. 그래서 안식일에 강 가에서 여자들 몇이 기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로 찾아간다. 아마 빌립보에는 루디아와 같은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매력을 느끼고 야웨를 예배하는 여자 몇이 있었던 모양인데 남자 열명이 없어서 회당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이 그 곳에 찾아간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족수는 2-3명이다. 둘이 하나의 group의 최소한이다. 하나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다. 둘부터가 집단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작은 수라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의 교회이다. 거기에 주님께서 같이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3) 용서에 대한 규칙이 나온다. 교회 생활에 대한 규칙이 나온다.


4) 5장 31-32절, 그리고 19:3-9절에 결혼과 이혼에 관한 가르침이 나온다. 그런데 막10:2-9과 마19:3-9를 비교하면,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는 이혼을 금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소위 예외조항을 허락을 한다. 간음의 경우는 이혼을 할 수 있다고 예외조항을 허락을 한다. 이것은 교회에서 실제로 이런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그래서 교회내에서 결혼과 이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느냐에 대해서 마태복음이 관심을 가지고 지침을 마련하는 것을 본다. 왜 간음의 경우는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느냐? 그 예외 조항이 신학적으로 왜 성립하는가? 간음은 간음행위 자체가 결혼의 파괴이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을 결혼으로 본다. 그래서 성관계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의 상징행위이다. 그런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렇게 연합을 했다. 이것을 성관계가 극적으로 상징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한 남자가 한 여자와 간음이란, 연합을 f +(m + f ) + m 한 것인데 이렇게 되면 먼저의 연합은 깨어지 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여자가 한 남자와 연합을 하면, 먼저의 연합이 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의 절차는 이미 간음행위에 내포된 떨어져버림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간음의 경우에만 이혼이 되버림을 확인하는 예외조항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상당히 엄격히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5) 교회(ekklesia)라는 언어 사용도 복음서중에서 마태복음에만 있다. 마16:18, 18:17에 교회의 권위에 대해서, 마16:19에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고 또 용서와 용서하지 않는 - 풀고 맺는 - 그런 권위에 대해서, 사도의 권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경우는 마태복음 뿐이다.


6) 마태복음이 교회내에서 교육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관심이 많이 있다. 마태복음에 교육용 자료들이 참 많이 있다. 5개의 강론들(catechism)은 어린 신자들에 대한 교육용으로 쓰여진 자료들이다. 이런 것들이 많다.


7) 또 열두 제자들을 마태복음은 어떻게 그리고 있으냐? 마가복음과 다르다. 마가복음에서 강조된 것은 열두 제자들이 바보 멍텅구리임이 굉장히 강조되어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자기의 선생을 도무지 못 알아 듣고, 예수께서 '이다' 하면, '아니다'로 알아듣고, '아니다' 하면, '이다'로 알아 듣는다. 그 중에 대표격이 베드로이다. 베드로가 제일 말귀를 못알아듣는 녀석이다. 파피아스의 증언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증거를 쓴 것인데, 이 점도 하나의 간접적 증거이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베드로 상은 아주 우둔하고 신실하지 못하고 죄인 중에 괴수로 나타난다. 그것은 베드로 스스로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누가 초대교회에서 감히 교회의 교회의 반석이요, 대지도자를 그렇게 깎아 내리겠는가? 마가복음이 베드로를 그렇게 깎아 내리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 베드로의 자기증거이다. 베드로가 스스로 주께서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가르치는데, 내가 매번 그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그 마지막 재판의 과정에서 3번이나 부인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도 하고, 그것은 베드로 스스로의 자기에 대한 증거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바보 멍텅구리로 나온다. 그런데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그렇지만, 마가복음 전체에 12제자들은 우둔하고 신앙없고 신실하지 못하고 이렇게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의 메시야 됨에 대해서 심장이 완악해서 잘 터득하지 못한다. 겨우 터득한 뒤에도 자기들의 이상에 사로잡혀, 정치적 왕이나 되어 주었으면 하고 자기들의 자리다툼을 열심히 한다. 예수께서 세울 다윗왕조의 수상자리를 놓고 서로 다툰다. 제자들이 그런 다툼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모습이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서 점점 성장해 가는 교육받은 학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과 믿음에서 점점 성장해 가는 학도로 나타난다. 그래서 랍비 예수의 학교의 문도들로서 그의 법의 가르침에 깨달음이 점점 커가는 자들로 나타나고, 이 때 예수는 랍비학교의 랍비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11:28, 30, 23:8,10)


이렇게 해서 제자들이 신자들의 모범(exemple, model)로 비추어 진다. 마태복음에 catechism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새로운 신자들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과 교회생활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있는데 이것과 연관해서 마태복음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서 점점 지식과 신앙에서 성장해 가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8) 마태복음에 목회자적 관심은 온전한 의를 요구함을 말한다.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듯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을 인용을 하고, 바리새인들보다 더 온전한 의를 요구하고, 이렇게 온전한 의를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완벽한 윤리생활을 요구한다. 이런 것을 보면 마태복음의 성도의 교회생활에 대한 목회자적 관심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4. 마태복음이 쓰인 정황( sitz im Leben )


이런 마태복음의 특징을 볼 때 마태복음이 어떠한 정황속에서 쓰여졌다고 보아야 하는가? 마태복음의 sitz im Leben은 어떤 것 인가?


마태복음의 특징을 크게 나누면, 아주 유대주의적인 색체가 있고, 동시에 반 유주의적 색체와 이방인들의 선교에 대한 관심과 이것은 동시에 반 유대주의적 성격과 같이 간다. 거기다가 덧붙여서 교회생활, 교회의 높은 윤리로 특징지워지는 교회생활을 강조한다.


이렇게 정리해 볼 때, 유대주의 색체가 강한 것을 보면, 우리가 짐작하기를, 유대인들의 사회속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 쓰여졌을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삶의 정황이, 유대인들로 둘러 쌓여진 교회에서 나왔지 않나 본다. 그렇다면 혹시 팔레스타인에서 쓰여졌다고 추측한다.


동시에 반 유대주의는 유대사회에 있으면서 유대회당과 계속 신학적인 논쟁을 벌리고 유대인들과 상당히 껄끄러운 갈등과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선교라는 것을 볼 때, 마태복음이 이방인 지역에서 쓰여졌을 가능성이 많다. 이방인 지역에서 교회의 구성원들 중에 이방인들의 수가 많아져서, 이방인들이 다수가 되면서, 복음의 유대주의적 뿌리가 점점 약해지고, 이방인들의 생활관습이 윤리면에서 점점 내려가니까 유대주의적 뿌리를 강조하고 동시에 율법이 요구하는 그 이상의 높은 윤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특징들을 감안할 때, 가장 그럴듯한 제안은 마태복음이 시리아 가령 안디옥같은데, 즉 유대인들도 더러 있고, 헬라인들, 이방인들의 환경속에 유대인들이 섞여사는 그런 헬라유대그리스도인들(Hellenistic Jewisch Christian)이 있는 곳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행6:1ff 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간에 초대교회에서 분쟁이 벌어졌는데, 그 이유인 즉 누가는 말하기를, 구제에서 히브리 유대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제대로 대접을 못받는다. 그래서 논쟁이 벌어졌다. 신학자들은 그것보다는 언어적, 신학적 이유로 분쟁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JEllhnisthv"들은 이방인이 아니고 헬라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헬라말을 모어로 쓰는 유대인(헬라파 유대인)들을 두고 말한다. 반면에 JEbrai'o"는 팔레스타인 출신 히브리말을 모어로 쓰는 유대인(히브리파 유대인)들이다. 이 구분이 첫째는 즉 언어구분이다. 이 언어구분은 어디서 왔느냐면 팔레스타인에서 히브리말(당시는 아람말), 혹은 아람 말을 쓰는 유대인이 이 로마세계에 흩어 질 때, 이것을 디아스포라 한다. 그래서 가령 다소에, 고린도에, 에베소에, 이민을 와서 정착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민 온 세대는 팔레스타인 언어인 히브리말을 계속 쓰겠지, 그러나 그 다음 세대쯤 되면 히브리 말을 다 잊어버리고 그 아들들은 헬라말을 쓰게 된다. 그래서 가령 에베소에, 고린도에 팔레스타인에서 새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거기 오래 살았던 사람들과 따로 회당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거기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헬라말로 예배를 한다. 이제 새로 이사온 사람은 그 당대까지는 히브리 말로 예배하는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래서 이 말 - 헬라파 유대인, 히브리파 유대인 -은 보통 디아스포라 세계에서 이런 회당을 구분한 언어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히브리인의 회당이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회당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말이다. 최근에 이민 온 히브리말을 쓰는 사람들, 헬라 세계에서 오래 살아서 헬라말을 쓰는 유대인을 나누는말이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 로마세계에 오래 흩어져 산 사람들 중에 모든 유대인들의 꿈은 시온에(예루살렘에) 이주해 와서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세계는 개 돼지의 불결한 땅으로 보았다. 이방인들은 불결한 놈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이 그 만큼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의 도(度)를 열 개의 동심원으로 나누었다. 성전 지성소가 제일 거룩하고, 그다음 성전이 거룩하고, 그 다음 예루살렘이 거룩하고, 그 다음 유다가 거룩하고---, 이렇게 10개의 동심원으로 나누었다.


저기 헬라세계에 사는 사람은 거룩이 조금도 없는 개 돼지의 불결한 동네에 산다. 그래서 이방인 지역에서 돈을 한 몫 벌면 말년에 예루살렘에 이주해서 될 수 있으면 성전가까이서 살다가 거기 묻히는 것이 유대인들의 꿈이다. 그래서 신약시대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많이 와서 살았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헬라말을 쓰는 그들대로의 회당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에 여러 고장 출신 헬라파 유대인들이 많은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지도자가 스데반으로 나타나는데, 스데반이 바로 예루살렘에 사는 헬라파 유대인이다. 바울도 사실 그런 종류의 하나이다.


그래서 헬라파 유대인이란 말과 히브리파 유대인이란 말이 나오는데, 아마 마태복음도 헬라파 유대인들로 원래 시작된 교회에 이제 점점 유대인들보다는 이방인들의 그리스인들의 수가(이방인들 수가) 점점 많아진 것이다. 그런 상황속에서 신학적인 leadership은 계속 유대인의 손에 있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의 저자도 바로 그런 헬라파유대인으로서, 한편은 이방선교에 대한 관심을 많이 나타내고, 다른 한편은 점증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에 유대교적 뿌리를 점점 무시할려고 하고, 또 윤리적 수준에서 내려감에 대한 걱정 때문에, 유대교적 뿌리와 높은 윤리적 수준을 강조하는 그런 상황에서 복음서를 썼지 않았나 본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펴 본 그런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았나 하고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질문 : 구약에 부활사상이 희미하게 나타난다고 하셨는데 --


답변: 구약에 메시야의 부활사상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구약에 부활사상이 안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부활 사상이 희미하게 나온다. 즉 이사야, 다니엘서에 나오는 부활사상을 유대주의에서는 메시야의 죽고 부활하심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에서 죽음과 부활이 점진적인 계시에 의해서 완성된 계시이다. 환한 불빛이다. 그 불빛아래서 보았을 때, 구약에 희미하게 쓰여진 것이,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게된다. 그런데 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환한 불빛이 없이 구약성경을 아무리 펴 보았자 메시야가 부활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그말이다.


5. 마태복음의 저자


(1) 외적증거


마태복음 내에는 복음서가 누구에 의해서 저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복음서의 머리에 kata Maqqaion은 나중에 붙인 것이어서, 마태복음내에는 이 책을 누가 기록했는가가 없으므로, 외적 증거, 즉 교회의 전통을 우리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가복음의 저자를 증거하는 그 파피아스(Papias)가 제1복음서는 마태가 히브리어로 ta logia를 썼다고 증거한다. 이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제1복음서는 마태가 썼는데, 히브리어로 ta logia를 썼다.


파피아스가 이렇게 증거하고, 또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마태복음에 유대교적 전통이 아주 강하므로 마태복음이 꼭 히브리어로, (그 때에 히브리어라면 아람어를 말한다) 아람어로 쓰였느냐? 학자들이 많이 살펴보았는데, 한동안은 히브리어(아람어)로 썼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만, 지금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복음은 원래 헬라어로 쓰여진 책이지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졌다가 나중에 헬라어로 번역된 책이 아닌 것으로 본다.


원래 헬라어로 쓰여진 책으로서, 저자는 헬라어를 쓰는 사람이며 동시에 유대교에 대해서 잘 알고 특히 구약을 인용하고 구약의 성취를 보여 주는데 있어서 유대랍비들의 해석학 기술도 상당히 습득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보수적인 학자들, 복음주의 학자들은 예수의 열 두 제자들 중에 하나인 마태가 이 복음서를 팔레스타인 밖에서 주로 헬라말을 사용하는 헬라 유대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헬라어로 기록했다고 본다.


그러나 비판적인 학자들은 이것은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마태가 기록했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 이유로 마태는 마가복음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것 같다고 본다. 가령 공관복음의 문제중에 두 문서설을 받아들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Griesbach의 설을 받아들이면 반대로 마가는 마태의 요약이므로 그런 경우에는 마태가 썼다고 하는 말이 더 강하다. 그리고 상당히 발달된 신학이 많이 나타나 있다고 본다. 가령 지혜신학이라든지 또 마태의 원래 언어가 셈족언어라기 보다는 헬라어이다. 이런 이유를 들어서 팔레스타인 유대인이었던 마태가 썼을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조금 보수적인 경향을 띄는 어떤 학자들은, 파피아스의 말을 조금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파피아스가 마태가 ta logia를 히브리어로 썼다고 할 때, ta logia는 마태복음 전체를 두고하는 소리가 아니고,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의 어록들(logia 말씀들)을 아마 지칭하는 것 같다고 본다. 12제자중 하나였던 마태가 원래 예수의 말씀들 모음(ta logia)을 셈족언어(히브리어, 아람어)로 모아 두었는데, 헬라말을 쓰는 헬라 유대인인 마태의 제자가 이 마태의 어록을 중심으로, 마가의 틀을 빌리고(마가의 자료를 많이 빌리고)해서 지금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을 쓰고 거기다가 마태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 복음서의 근간이 마태가 증거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가령 R.H. Gundry도 그렇게 생각하고, 영국의 복음주의 학자였던 R.V.G. Tasker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설이 맞다면 마태복음의 중요한 자료는 마태에게서 오고 그 전체 마지막 편집자는 마태의 제자쯤 되는데, 우리가 잘 모른다.


마태의 저자는 마태의 제자가 자기 선생 마태의 모든 자료들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에서 일부, 그리고 일부는 Q에서 빌리고 이렇게 해서 복음서를 썼고, 그 복음서가 대대로 마태의 이름과 같이 전승이 되어서, 파피아스가 이렇게 말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2) 내적 증거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를 한다.


1) 만약 마태복음이 12제자중에 하나인 마태와 전혀 관련이 없다면, 왜 특별히 이 복음서가 마태에 의해서 쓰였다고 초대교회(고대교회)에서 지어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12제자 혹은 사도중에 하나가 썼다고 하므로 말미암아 이 복음서의 권위와 신빙성을 높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럴려면 조금 더 똑똑한 사도를 댈 것이지, 가령 베드로나 말이예요. 마태, 흐지부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이름을 댈게 뭐냐 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마 이 복음서는 마태와 무슨 관계가 있기 때문에 교회전승에서 마태에 의해 쓰여졌다고 하는 것이다. 마태가 전부 쓰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 중요한 증언이 마태에게서 온 것으로, 그 정도의 연관이있기 때문에 마태가 썼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 이름이라도 골라 잡기를 하면, 마태 이름보다는 베드로의 이름이 훨씬 더 근사하잖아요.


2) 또 막2:14 그리고 눅5:27-28에서,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는 장면에서, 마가와 누가는 마태를 레위라고 부른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9:9은 레위라 안부르고 마태라 부른다. 또 사도들의 목록에 있어서도 다른 두 복음서는 레위라고 부르는데, 마태복음은 레위 대신 마태가 들어가 있다. 이것도 마태복음이 마태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마태복음 즉 제1복음서가 제2복음서에 의존했다면, 공관복음 문제에 있어서 두 문서설에 의거할 때, 마태가 마가의 레위를 고쳐썼다는 말이다. 왜 고쳐썼느냐? 마태와 관련이 있으니까 고쳐썼다.


3) 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옳으냐, 옳지 않느냐는 문제에서, 그 때 세금을 마가와 누가는 dhnarion 이라 한다. 예수께서 동전 하나를 가져오라고 할 때, 한 dhnarion 이라한다. 그런데 마태는 좀 더 정확히 nomisma(당시 세금바칠 때 썼던 돈)라고 함으로 마태가 세리여서 세금에 대해서 정확한 언어를 쓴 것이 아닌가 이렇게 짐작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주변의 몇 개의 자료들을 근거로 마태복음이 마태에 의해서 전체로 쓰였든지, 아니면 적어도 마태복음의 중심자료들 즉 예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중심증거가 12제자중 하나인 마태에게서 왔고, 혹 그것의 편집이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였을 지 몰라도, 그 중심증거는 마태에게서 온 것이다. 이 정도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


6. 기록장소


어디서 썼느냐? 이게 헬라말로 되어 있다면 분명히 팔레스타인 밖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에서 썼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유대성이 강하므로 이방인들을 위해 쓴 것이 아니고, 또 이방인들 공동체에서 쓴 것이 아니고, 유대공동체에서 썼을 것이다.


7. 기록 연대


언제 쯤 썼느냐? 이건 뭐 종잡을 수 없다. 다만 마태복음 24장 같은 곳에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이 파괴된 것을 전제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해석에 따라, 전제하지 않는다고 보는 J. Robinson같은 사람은 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시사되어 있지 않으니까, 마태복음은 AD70년전에 쓰였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마태복음24장 같은 소위 종말론적 묵시적 언어에서 성전파괴가 전제되었다고 본다면, 70년 이후에 언제쯤 인지 모른다. 그런데 AD 100년전에는 쓰여졌다. 왜냐하면 이 무렵에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가 마태복음을 인용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전에는 썼어야 된다. 이런 시점을 보통 termius ad quem(어느 시점까지)라고 한다. '어느 시점에 까지' 기간 이 전에 쓰여서 이 시점을 termius ad quem이다.


만약에 마태복음24장이 성전파괴를 전제한다면 AD70년이 ter- mius ad quo이다. '이 시점에서 출발해서 이 후'라는 말이다. 가끔 성경의 책에 연대잡는데 termius ad quo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만약에 마태복음에 가령 24장 같은 곳에 성전파괴가 시사되었다고 본다면, AD 70년이 termius ad quo가 된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c.35-107)가 마태복음을 한 100년쯤에 인용을 하므로 그 전에 쓰여졌으므로 100년이 termius ad quem이 된다.


AD70년 성전파괴 AD100년 이그나티우스의 인용


마태복음이 쓰인 기간

termius ad quo termius ad quem


그래서 그 사이에 쓰여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정확히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기에 쓰여졌다고 한다. 약80년쯤에, 그러나 J. Robinson은 70년전에 쓰여졌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