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장
?마태복음 1:1-17 시작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1절)는 말씀은 ‘다윗의 자손,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族譜)가 이러 하니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족보라는 말은 창세기의 「톨레도트」(대략, 계보, 약전 등)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창세기에서 새로운 「톨레도트」를 접할 때마다 기원과 출생 및 새로운 후손에 관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1:1에서 이 말을 사용함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할 뿐만 아니라, 구속 역사에 있어서 새로운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을 계시(啓示)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히 혈통적 내력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그래서 마태는 의도적으로 족보를 14대(代)씩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다. 출발부터 다윗 언약의 정신을 반영한 족보로 시작한다. 언약을 이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는데 그것이 “~에게서”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감에 있어서 믿음없는 이스라엘 때문에 누군가의 희생이 개입되어야 했다. 결국 “~에게서”라는 희생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 성취되어지는 언약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에게서”는 다섯 명의 여인,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마리아 등이다. 다말은 자기 자식을 지키기 위한 유다에 의해 버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유다 가문을 통해 이어갈 것을 알고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를 통해서 언약의 후손을 이어가고자 했었다(창 38:1-30).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비언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유다의 집안에 하나님의 언약 정신을 가진 자를 투입시켜 언약이 이어지도록 하셨다. 라합은 이방 여인이면서 창녀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줌으로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음을 드러내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에 불신하는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것이었다(수 2장).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때에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좇아감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보아스를 통해서 이어지는 희생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룻기). 다음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이다. 여기서 밧세바의 이름은 기록되지 아니하고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은 것으로 나온다. 물론 솔로몬은 육체적으로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러나 언약의 관점에서는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보지 아니하고 우리아의 아내로 보고 있다는 것은 솔로몬이 우리아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우리아는 다윗의 범죄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된 자였다(삼하 11장). 솔로몬에게는 우리아의 희생을 반영함과 동시에 다윗의 죄악을 고발하는 기능을 같이 지니고 있다. 다윗의 죄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서 솔로몬을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는 의미의 이름인 “여디디아”라고 하였다(삼하 12:25). 그래서 다윗은 시온이 유지되는 것은 오직 “주의 은택”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시 51:18). 마리아는 비천한 처녀의 몸으로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서 아이를 잉태하는 희생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한 희생을 통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연약한 자로 여기는 비천한 여자들을 통해 위기를 넘기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14대, 15대, 14대 이지만 본문에서는 14대, 14대, 14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간 대수 계산에서 다윗이 빠지고 우리아 아내의 자손인 솔로몬부터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1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 앞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두어서 다윗 언약에 근거한 족보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하 솔로몬, 르호보암 등 모두 역대 왕들임에도 불구하고 6절에서 유독 다윗에게만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기록함으로 왕의 족보를 통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서의 왕이심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다윗언약 계통의 왕들은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는 이방 나라의 왕들과는 달리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대표자로서 희생적 모습을 담아내는 자들이어야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과 같은 죄인에 의해 희생되어지는 우리아의 모습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다윗의 족보를 따라 나신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의 왕권적인 모습을 거부하면서 우리아와 같이 세상의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으로 오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16)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요셉의 족보를 취하고는 있으나 요셉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언약의 성취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마태복음 1:18-25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定婚)하였으나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 이 점이 중요한 사실이다. 처녀가 잉태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진술되고 있지만, 강조점은 그것보다도 오히려 세상에서 일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여기서 “성령으로”라는 말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또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라는 말이다(참고 눅 1:35).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고 합법적인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든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로서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요셉은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예수님의 오심은 처음부터 그 목적이 분명하였다!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를 가난에서 건지시는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골치아픈 문제들에서 해방되게 하시는 것도 아니다. 질병의 고통 속에서 평안을 가지게 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즉 우리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23절 하반절 직역). 이런 점에서 단순히 예수님의 오심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여서 평안과 축복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분의 오심은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의 분리이다. 이런 뜻에서 주님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땅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 그리고 다윗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오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릴 영원한 왕이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왕은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인간들을 자신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해 내는 구원자가 되실 것이었다.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해 그들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을 영원히 의와 진실로 다스리실 왕-그분은 다름아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은 마태복음 1장이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내용이다.
2장
?마태복음 2:1-12 헤롯왕 때의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마굿간이 아니라 “집”(2:11)에 있는 예수님을 방문했고, 주님이 신생아가 아니라 유아(the young child,2:9,11,13,14)로 언급되었으며, 헤롯이 2살 이하의 아이를 죽인 것으로 보아 우리가 흔히 그림이나 성탄절(聖誕節)의 성극(聖劇)에서 보아온 것처럼 마굿간으로 동방 박사들이 방문한 것이 아니라 동방 박사들의 방문은 예수님이 태어나신지 여러 달이 지난 후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방 박사들의 수(數)에 대해서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세 가지 선물로 보아 세 명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이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소동(騷動)할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그 이상의 무리였을 가능성이 많다. 이들은 페르시아에서 별을 연구하는 점성가(占星家)들로 짐작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땅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던 유대인들(Diaspora)의 종교적 지식을 들을 수 있었으며(민24:15-19) 그들은 이 별이 한 왕의 탄생을 가리킨다고 믿었던 것같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착한 즉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2:2)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의 탄생을 먼저 알고 축하하며 기뻐했어야 할 유대 백성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분명 이것은 심판의 의미가 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별이 바로 베들레헴으로 인도했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모아 물었다.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표현한 반면 헤롯 왕은 “그 그리스도”(2:4)라고 하였다. “그 그리스도”란 유대 백성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말한다. 구약 성경 미가서 5:2에는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길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지리적 장소로만의 의미가 아니다. 미가 5:1에 보면 하나님을 향해 범죄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않으리라고 여기는 지도자들에 의해 쫓겨난 자들을 “딸 군대”라고 칭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재판자(지도자)의 뺨을 칠 자가 베들레헴에 나온다는 것이다. 즉 베들레헴으로 오시는 이는 인간 재판자를 심판할 자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온 세계에 미치고 있었다. 동방 박사들의 경배는 앞으로 모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예시해 주는 사건이 된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그 나라의 왕으로서 경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경배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2:13-23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즉시 이스라엘 왕에 대한 원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어둠의 나라의 적의를 의미하는 큰 붉은 용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어둠의 왕국(王國)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그리스도의 왕국과 계속적으로 투쟁해 오고 있다. 사탄은 헤롯 왕을 도구로 하여 여자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려고 하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호하심으로 그 시도는 실패한다. 이는 창세기 3:15에서 언약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히 이행해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그 날까지 그를 보호하실 것이다. 헤롯의 잔학한 행동으로 인해 유대 땅의 두 살 이하의 많은 어린 아이들이 희생된다. 유대의 분봉 왕 헤롯은 과거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애굽 왕 바로의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성경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유대를 애굽이라고 부르면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2:15/호11:1)는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즉 지리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애굽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 바로가 다스리는 나라가 애굽이고 세상이듯이 헤롯이 다스리는 나라가 애굽이요 세상이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이스라엘이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새로운 출애굽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즉 새로운 출애굽은 과거 출애굽을 통해 계시하신 바, 죄로부터의 구원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계시는 성취되는 것이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 백성들의 죄에서 구원해 내실 것이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심으로써 과거에 그의 백성들이 간 그 길을 가시는 것이고, 그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 겪었던 그 압제에까지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의 박해로 인해 어린 아이들이 살해되는 상황에서 건짐 받은 자가 모세였고 그 모세를 따라 나온 자가 이스라엘이었다. 그와 같이 헤롯의 박해로 인해 아이들이 살해되는 상황에서 건짐 받은 자가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을 따라 불림 받은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이 새로운 이스라엘은 교회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어떤 박해와 핍박, 고난을 당하느냐로 증명되는 것이다. 라헬의 울음은 곧 교회의 세상에 대한 울음이요 탄식이다(18절). 포악한 헤롯 아켈라오를 피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으로 데려간 일은 그가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한다. 마태는 여기서 여러 선지자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모든 것이 우연(偶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구약 성경)대로 철저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었고, 말씀의 성취란 기존의 것과 타협하는 측면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서의 도출이다. 믿음은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하나님 나라)로의 몰입이다.
3장
마태복음 3장 ?마태복음 3:1-12 마태복음 3장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는 시기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2장과 3장 사이에는 약 30년간의 예수님의 생애가 생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의 기록자는 예수님의 전기(傳記)를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오랜 기간의 생애를 과감히 생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이 이방인(동방박사)들을 통해 증거된 반면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역자인 세례 요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있다. 마태는 세례 요한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사람이라고 지적하면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 40:3)는 말씀을 인용한다(3:3). 이와 같이 주님의 길을 예비할 자가 오리라던 구약 성경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선발대(先發隊)로 세례요한이 소개된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의미는 이 땅에서 제2의 출애굽으로 모세 언약의 체계 안에서 새로운 언약을 이루시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이러한 일을 위해 준비하는 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때문에 그는 광야에서 엘리야와 비슷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음식으로 연명하면서 의도적으로 엘리야처럼 행동했다(3:4/왕하 1:8). 말라기는 그 선발대를 “엘리야”라고 했다. 실로 세례요한이 외쳤던 당시의 상황은 아합 왕과 그를 따르는 바알의 선지자들이 득실대는 암흑기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세례요한이 왜 유대 광야에서 외쳐야 되었는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였을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야 했다. 이 홍해와 요단강은 세례를 뜻하는데, 곧 이전의 자신이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즉 약속의 땅은 새롭게 된 자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세례요한 당시 약속의 땅에 있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역할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세례요한은 그들을 광야로 끌어낸 다음 세례를 주어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낸다. 이런 점에서 세례요한의 세례는 새로운 출애굽을 준비하는 의미가 있다. 동시에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10절)는 것과 “타작마당”(12절)이라는 표현은 역사의 종결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이 가진 기존의 모든 것을 거부하시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기 뒤에 오실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11절). ?마태복음 3:13-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분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신 사건이다. 이것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고난 당하시며 그들을 위해 죽으시는 그분의 중보자 사역의 시작을 알리신 사건이었다. 이 사건 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준비를 위한 일들이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은 세례를 받으심으로 인해 비로소 시작되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사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의미는, 그 자신이 이 세례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곧 하나님의 뜻에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즉 주님은 이렇게 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장차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실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참고 롬 15:8)-이런 점에서 마가복음 10:38-39에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자신이 받을 세례라고 표현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오직 십자가로 계시하시는 거기까지 시종일관되게 행하셨다. 세례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요한의 세례는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그 하나는 옛 죄를 버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시대로 들어가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자신이 유대인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며 또한 사람들이 죄사함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자리에 들어오셨고 또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함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이라고 하는 것이 증거되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운명으로 십자가를 향해서 가는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었다. 드디어 여인의 후손이 원수의 머리를 상하게 할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헌신을 표시하시고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성부 하나님은 그 사역을 기뻐하셨고 영광을 받으셨으며, 비둘기같이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주님의 사역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시작됨을 나타낸다. 예수의 생애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령님께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은 흔히 잊어버리기 쉬운 일이다. 이는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해 주는데, 중생케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 임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로 세례를 받으시는 의미 속에는 수세자가 가진 죄가 그와 같이 씻김을 받게 될 것임을 상징하고 있으니 이는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임을 예시해 주는 것이다.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사명을 시작하는 구약의 기름 붓는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세례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쁨은 십자가의 길을 시종일관 가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성령님의 온전한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을 기뻐게 하며 사람의 비위를 맞추면서 교회라고 자위하고 있지는 않는가?
4장
?마태복음 4:1-11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가셨다. 공관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이 일이 성령님에 의한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4:1), “성령이 곧 예수를 몰아내신지라”(막 1:12).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의 운명으로 들어가셨다. 죄인의 운명이 되셨으므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이는 앞으로 행하실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광야로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광야로 가신 것이다. 광야에 계신 목적은 흔히 말하듯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한 준비로 기도하시거나 하나님에 관해 명상하시거나 하나님과 교제하시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시험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누가는 이에 대해 좀더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수님은 요단강을 떠났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면서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성령에게 이끌리셨다”(누가복음 4:1-2의 직역). 즉 성령님은 사십일 동안 예수님을 광야의 여기 저기로 인도하시고 마귀는 그 사십일 동안 예수님을 시험했다. 사실 그 세 가지 시험은 사십일의 시험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사십일은 계속적인 시험의 기간이었다. 예수님의 시험에서 우리는 마귀의 성격과 의도를 알 수 있다. 마귀가 제공하는 것은 떡과 이적과 세상의 영광이다. 여기에 대하여 단순히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기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말씀만을 제공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것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역시 마찬가지로 마귀가 주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교회는 주님의 교회일 수 없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예수님으로, 병 고치는 이적을 나타내는 예수님으로 가르치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다면 그것은 마귀의 모습이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다른 영광을 기대했다. 이러한 실패에 반하여 예수님은 둘째(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전 15:45). 그리고 첫째 아담을 유혹했던 마귀의 권세를 완전히 물리치셨다(롬 5:12,19). 이것은 누가가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소급하고 이것을 둘째 아담(예수님)의 시험에 대한 기록과 연결시키고 있음에서 분명해지고 있다(눅 3:38-4:1). 예수님은 각 시험에 대하여 신명기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아담 이후 어느 누구도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다. 이스라엘 역시 출애굽 당시의 광야 40년 동안 늘 실패했었다. 지금 예수님은 광야 사십일 동안 마귀의 시험을 이긴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을 통해 우리의 구원자로 자신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세례받으실 때에 공적(公的)으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셨고, 그 임무 수행의 시작과 함께 첫번째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그런 의미에서 사십일 시험으로 시작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까지 이 모든 사역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인간을 원하셨지만 아담으로부터 모두 타락하여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 결과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이었고, 영원한 형벌만이 인간의 장래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셨고, 그 순종 중 하나가 사십일 광야 시험의 기간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순종을 전가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사십일의 시험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같은 괴로움을 당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사십일 금식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을 본받아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엔 동기와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둘째는,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십일 금식하면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유일성(唯一性)을 실제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셋째로, 예수님의 경우에 사십일 금식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닐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의 경우에는 사십일 금식 기도의 결과 일시적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기에 부적합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시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선취(先取)라는 사실로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귀신들을 쫓아내심이 이 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은 그의 사역이 시작되었을 때, 즉 사십일의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써 이미 이룩된 것으로 예수님의 생애의 전투로부터 얻어진 전리품의 한 부분이다(마 12:28;눅 11:20).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마귀의 통치와 죄의 세력을 격파하는 일을 통하여 올 수 있도록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요 12:31-32을 보라/요일 3:8; 요 16:33). ?마태복음 4:12-25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개략적인 묘사는 그가 사역하시던 곳이 갈릴리라는 것을 밝힘으로써 시작된다:“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4:12).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유대에 잠시 머물러 계셨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주된 관심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데 있다. 결국 이것은 이사야 9:1-2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지역에 포진함으로 기존의 이스라엘을 공격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지금 유대인들은 요한을 거절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사도)들을 부르심으로 복음을 이방 나라들에게 전하게 하실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19절)고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17절)는 선언은 단순히 반성하는 회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에 의미가 있다. 즉 천국에 대한 반응은 우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지 세상 삶에 그리스도적 삶을 더 보태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들을 주님은 사람 낚는 어부(19절)로 만드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므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의 십자가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란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을 주님의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시는 것이었고, 그의 제자들은 전적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로 그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4:23). 즉 하나님 나라는 저주받은 자들에게 은혜가 베풀어지는 나라이다. 그것은 오직 주님이 가져오신 복음으로만 되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5장
?마태복음 5:1-2 5장부터 7장까지의 세 장은 산상보훈(山上寶訓), 산상수훈(山上垂訓) 또는 산상설교(山上說敎)라고 알려진 유명한 말씀으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5대 강화(講話) 중 첫번째 것이다. 우리는 이제껏 마태복음 4장까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언약 백성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왕은 자기의 언약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며, 이 나라에 속한 언약 백성이 어떠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이 하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더러 이렇게 요구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상대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왜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던가를 이해하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자가 되도록 하신 말씀이다. 이것이 곧 복이다. ?마태복음 5:3-16 산상수훈은 팔복(八福)으로 시작된다(3-12절). 여기서 ‘복’(福)이란 구약적 배경을 가진 용어이다. 시편 1편과 2편에서 “복있는 사람”을 「의인」 또는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에 복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구약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인가를 말씀하셨는데 이 팔복은 서로 다른 여덟 가지 유형의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의 특성을 다른 표현으로 열거해 놓은 것이다. 즉 이미 복을 얻은 자, 천국에 사는 자는 이런 복된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3절)-여기서 가난하다는 것은 남의 도움이 없는 상태의 가난을 말한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남의 도움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태이다.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자리하시므로 땅의 것을 버렸다는 말이다. 세상 것보다 더 귀한 것을 발견하였기에 그 귀한 것이 내 안에 계속적으로 자리할 수 있도록 땅에 대하여 더 이상 소망을 가지지 않는 자이다. 이것이 천국의 모습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해 할 수밖에 없다. 천국은 의가 없고 악이 성행하는 곳에서 고통받고 억압당한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곳이다. 애통이란 악에 의해서 고통 당하는 자들의 애통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통해 하는 것 없이 하나님의 위로만 찾지는 않는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절)-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에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을 물리치고나서 분배한 것이 아니고 미리 분배한 후에 지파별로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친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싸우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모습이다. 온유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다. 이는 종이 주인에게 은혜를 바라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란 주님만을 바라보고 순종하는 모습을 말한다. 천국은 자기 주장을 하며 당연히 받을 것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자가 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자가 받을 기업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6절)-인간의 욕구는 세상에서 잘사는 것에 쏠려 있다. 세상 것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인간이요, 죄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코 배부름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천국에 있는 자는 의를 향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상태, 즉 의를 상실한 상태요 또 자기 힘으로 의를 획득할 수 없는 상태가 천국이다. 천국에는 자기 힘으로 천국에 왔다고 할 수 있는 자가 없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절)-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이 되게 해서 고통에 있다가 나오게 하신 것은 고통 가운데 있다가 구원을 입은 하나님의 긍휼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내가 어떤 형편에서 구원을 받았는가를 아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이다. 이런 자만이 긍휼을 베풀 수가 있는 것이다. 은혜로 배부름을 얻은 자는 이제 자연스럽게 내 이웃의 배고픔을 채우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긍휼을 베푸는 모습이 바로 천국의 모습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절)-청결은 깨끗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떤 것이 깨끗한 것인가? 우리의 삶이 깨끗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 앞에 깨끗한 인간은 없다. 여기서 청결이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했던 장애물이 제거된 상태 그것이 깨끗한 상태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청결의 상태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의 장애물인 죄를 제거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청결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것이 치워져 있는 마음 상태 그것이 곧 천국의 상태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절)-인간은 아담의 죄를 타고났기에 하나님과 또한 인간과 서로 원수 관계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의 십자가로 화평케 하실 때에 화평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것이 치워져 있는 청결한 자는 화평케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천국은 반목의 관계가 아니라 화평의 관계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10절)-천국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핍박을 받은 자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다. 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세상은 의를 본성적으로 싫어하여 의를 핍박하는 것이 본성이다. 그리스도로 인해 핍박을 받아 본적이 없는 자에게는 천국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산상수훈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천국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지 산상수훈을 마치 율법처럼 지키며 살아가야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끝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그 의를 이루기 위하여 이제 십자가로 가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천국을 그를 따르는 자가 그 천국의 특성들을 다양하게 드러내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는 이렇게 드러나고 또 다른 사람은 천국의 이런 모습을 드러내고 하는 역할분담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모습 속에서 이렇게 천국의 특성은 여덟 가지 대표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의 행위가 용납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행위만 인정되는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팔복에 나타난 천국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주님을 알고 주님을 영접한 자는 행복한 자이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하나님 나라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미래의 심판에서 제외되는 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향하여 핍박을 가한 세상이 여전히 존속되고 있기에 신자들에게는 핍박이 예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는 자는 천국을 영접한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을 일컬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혁해 나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과 빛이 되자!”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세상의 소금”으로써 세상의 형편이 소금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고, 세상과 소금이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즉 소금은 세상에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소금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소금이 특별히 ‘맛을 내자!’고 할 필요가 있는가? 신자는 그 삶을 통해 당연히 천국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과 구별되어 이미 다른 것에 가치관을 두고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들은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요 8:12)께 속했기 때문이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는 것은 신자의 삶은 세상에 드러나 있으나 자신이 빛이라고 하는 사실 자체를 증거하고 드러내는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행위를 통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착한 행실”이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착한 행실이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십자가의 행실뿐이다. 결국 신자란 그리스도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감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돌려지는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무엇을 보태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거기에 무엇을 보태려고 하는 그것은 곧 자신을 드러내는 길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얼마만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얼마만큼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자로 드러나느냐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천사의 모습을 가지지 않은 자 누가 있는가? 그러나 세상에서 진정 천국을 보여주며 사는 신자인가? 예배당 문을 나서면 예수님과 이별한 자로 살아가면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마태복음 5:17-48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만이 행복한 사람이며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저버리고 사람들을 보다 편하고 행복하게 해 주시려는 것인가? 이 질문은 그분의 적대자들과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던 무리들 양측 다에 의해 제기된 질문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의도가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5:17).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다. 그러면 여기서 완성자로 오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이신 그분이 낮아지신 모습으로 이 땅에 예수님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다. 인간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애쓴다. 그 모습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요 유대인들의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의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도리어 율법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할 뿐이었다. 주님 앞에 인간의 의를 드러낼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에 의를 내세울 자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 그렇다면 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인인가?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그러기에 죄인들은 우리의 완전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통해 나의 죄인됨을 깨닫고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자만이 참 신자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산상수훈을 통해 자신이 율법의 완성자라고 밝히셨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완성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했던 모세보다 더 완전한 권위로 예수님은 지금 율법의 본의(本意)를 밝히신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은 민망하리만큼 악용되었다. 유대인들은 말로는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노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율법을 왜곡하고 율법의 참 뜻을 가리우는 많은 인위적인 조항을 더하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릇된 상태를 바로잡으시기 위해 “옛 사람에게 말한바···들었으나”라는 표현형식으로 말씀하셨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이웃에 대한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살인”(21-26절)에 대해 말씀하셨다. 구약에는 살인을 금하는 법이 있다. 그러나 이 법의 정신은 단순히 살인을 금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이 법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에게 이 법의 완전한 면을 말씀하신다. 즉 형제를 향해서 미워하고 욕하는 것까지 모두 살인한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완전한 율법을 누가 지킬 수 있는가? 예물도 형제와 화목하고 나서 드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께 참된 예물을 드릴 수 있는가? 애초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제사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제물 자체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우리의 예물을 하나님은 모두 거부하실 뿐이다. 오직 미움이 없으시고 사랑으로 존재하셨던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간음(27-32절)”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를 실족케 한 신체를 제해 버리라고 하신다.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면 우리의 몸은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체의 일부분을 잘라 낸다고 해서 음욕이 그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대신한 분이 예수님이시다. 인간은 예수님을 벗어나서 살 수 없으며 십자가 또한 일회성이 아니고 날마다 져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십자가를 한 번 알았다고 해서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에는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주라는 법이 있지만 이것은 이혼 증서가 있어야 다른 데로 시집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아내를 위해서 증서를 주라는 것이지 마음대로 이혼하고 증서만 주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안되고 또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간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완전히 피할 자가 없는 것이다. “맹세”(31-37절)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자기 생각으로 어떤 법칙을 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헛맹세를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하신 것은 단지 맹세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규례가 아니고 맹세할 때 그 무엇을 두고 할지라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는 맹세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생각으로 결정하면서 맹세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법칙 아래서 자기의 결정을 내리면 된다고 하신 것이다. 네 번째는 “이웃”(38-47절)에 대한 부분이다. 오른 뺨을 맞는 것은 손등으로 맞는 모독이다. 즉 자기의 자존심까지 포기하며 자신의 생계의 최후 수단인 겉옷까지도 포기해야 하고 달라는 자에게 거절해서는 안된다고 하신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며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러한 율법의 완전함을 위해 누가 자신을 줄 수 있는가?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아들을 내어 주셨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잘 아셨던 주님은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기도 때문에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율법의 참 뜻을 말씀하신 후에 결론적으로 이 동기에 대해 말씀하셨다:“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닮아 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온전하신 그리스도에게 눈이 고정된 자이다.
6장
?마태복음 6:1-18 하나님의 백성/자녀들은 마땅히 왕/아버지 되신 그분께서 원하시는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라자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이지 사람 앞에서 사는 자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6:1)고 하셨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당시에 대표적인 종교적 경건으로 행해지고 있는 구제(2-4절)와 기도(5-15절) 그리고 금식(16-18절)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세 가지 사실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가르침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은밀하게 행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이란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다거나 몰래 엿보고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표현과 내용적인 대칭을 이루는 표현으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비밀성(秘密性)을 크게 강조하고자 하는 말씀이다. 특별히 예수님은 기도에 대하여 중언부언하지 말 것을 강조하셨는데, “중언부언”이란 일반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 문맥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여야 한다. 중언부언이라는 말 앞에는 이방인과 같이 라는 전제가 달려 있다. 이방인은 중언부언의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갖는 신(神)과의 관계는 비인격적인 관계이기에 자신들의 의사를 신에게 전달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도란 자신의 정성스러움을 드러내는 길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기도는 지성이면 감천(至誠感天)이라는 식으로 길어질 수밖에 없고 말을 많이 하여야만 기도를 들을 줄로 생각하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와 같은 식으로 기도를 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의 동기, 태도는 신인식(神認識)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6-9절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주기도문?(主祈禱文)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예수님께서 기도의 본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기도의 본을 제시해 주신 이유는, 기도는 그 방법에서뿐만 아니라 내용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올바른 것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즉 은밀하지 않은 기도나,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실 줄 생각하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므로(=그러므로) 너희는, 기도의 방법은 물론 기도의 내용이나 정신에 있어서도 이제 가르쳐 줄 기도의 표본대로(=이렇게) 기도하라”는 뜻에서 직접적인 방법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구체적인 기도의 표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구절을 통해 기도자가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인지 그 대상을 가르쳐 주신다. 기도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행 17:23) 기도하는 것도 아니고, 이방인들처럼 말을 많이 해야 겨우 알아듣는 비인격적인 신에게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자기의 자녀들이 구하기 전에 이미 필요한 것들을 다 알고 계신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어느 특정한 자녀만을 유별나게 편애(偏愛)하시는 아버지가 아니시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 모두를 골고루 돌보시며 그들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그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러기에 기도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그분은 ‘나 개인만의 아버지’가 아니시고 “우리 아버지”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기도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마땅히 지나치게 이기적인 간구를 삼가해야 할 것이며 그 대신에 다른 주님의 자녀들을 그리고 그들의 마음의 소원들을 염두에 두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자녀된 모든 이들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그러나 그분은 우리 인간들처럼 유한하신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무한하시며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우주를 통치하시는 참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사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시지만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분이시므로-예수님은 “우리 아버지”를 가리켜 “하늘에 계신 분”이라고 호칭하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기도문은 여섯 개의 간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앞의 셋은 하나님에 관한 간구이고 그 다음 셋은 인간인 기도자 자신에 관한 간구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반부 세개의 간구와 후반부 세개의 간구가 완전히 방향이 다른 두 종류의 간구는 아닌 것이다. 전반부와 후반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주기도문은 단순한 기도문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전인격과 사역이 투영(投影)되어 있는 복음이다. 여기에 주님 자신의 전메시지가 담겨 있고, 여기에 주님께서 신약 교회에 부탁한 선교적 사명이 담겨 있고, 그리고 여기에 신약 교회를 위한 삶이 담겨 있다. 주님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새롭게 태동된 신약 교회에게 이 주기도문을 주시고, 그리고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이러한 기도를 하도록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기도대로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전적으로 주님의 공로 때문에 내가 드릴 수 있는 기도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가진 존재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의 내용에서 거룩이란 세상과의 구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신자가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 거룩해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이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려진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을 뜻을 땅에서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세워질 수 없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는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고 산다는 기도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그것으로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진정한 하늘의 양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삶이다. “죄 용서”에 대한 기도는 내가 남을 용서한 것을 근거로 해서 나를 용서해 달라는 조건부 기도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인 것같이 나 또한 내 권리를 포기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신 후 용서를 말씀하신다. 기도의 목적은 결국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느냐 이고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을 용서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남을 용서하는 것이 내가 용서받는 조건이 아니다. 7장에서 나오지만 용서라는 것은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을 말한다. 즉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남을 용서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자이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금식”(16-18절)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도 앞의 두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금식은 나는 이 세상의 양식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식은 기쁨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의 양식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금식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식으로 최후의 수단으로 떼를 쓰는 단식투쟁이 아니다. ?마태복음 6:19-34 19-34절은 재물에 대한 말씀이다. 먼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한다. 하늘에 쌓는 보물이란 흔히 헌금하고 구제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더 나아가서 하늘에 적금하는 식으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은 보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것을 마음으로 연결시키신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관심의 대상이 지금 나에게 보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대한 문제로 말씀하신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23절). 즉 우리의 관심(눈)이 세상에만 얽매여 있다면 몸이 어두운 자이기에 그 마지막은 어두움이다. 그러나 하늘에 관심을 가진 자는 눈(시각)이 하늘에 고정된 자이므로 몸이 밝은 자이기에 그 마지막은 밝은 생명의 삶이다. 그러므로 이 재물에 대한 문제는 어느 주인을 섬기는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인간은 두 가지를 동시에 동일하게 대하지 못하도록 지어졌다. 둘 중의 하나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 쪽을 사랑하면 다른 한 쪽은 자연히 나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가 염려한다는 것은 땅의 관심에서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염려는 애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의미이다. 사람이 단지 자신의 몸을 위해서만 산다면 동물(새)이나 식물(백합화)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몸은 먹고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먹고 입는 것을 가지고 염려하는 것은 결국 돈을 섬기고 돈을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하는 자이다. 이런 신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죽든지 살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아는 자가 신자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자이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자는 땅의 것으로 염려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양식인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존재이다.
7장
?마태복음 7:1-12 산상수훈 7장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너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상대방을 비판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나를 향해 비판을 던질 수가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비판을 하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느 누구도 비판을 할 자격이 있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비판은 오직 주님이 하신다. 인간은 비판할 자격이 없고 주님만이 비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지 않고 먼저 자기에게 있는 들보를 보게 된다. 상대방에게서 작은 허물을 발견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더 큰 허물을 발견할 수 있다. 곧 죄인임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들보를 뺄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들보를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6절)는 말씀은 이러한 산상수훈을 통해 선포된 율법의 완성된 의미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무의미한 것이다.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지 못하고 무시한다면 결국 자신의 들보(죄)를 알지 못하는 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해야 하는 것이고 찾아야 하는 것이지 구원을, 율법의 완성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7절 말씀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끈질기게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신다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이미 6장에서 다 말씀하셨다. 따라서 7절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로 완성된 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11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12절에서 “대접하라”고 말씀하신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남이란 단순히 이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고 그 하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완성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좋은 것이란 무엇인가? 누가복음 11:13에 보면 “좋은 것”이란 성령님이신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알고, 완전히 이해하여서 믿는 자 있는가?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님을 보내시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우리가 성령님을 구해야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셔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허락하셔야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대로 알 수 있고 또한 그것을 통해 하나님 대접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의미이다.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할 줄 아는 자는 이웃에 대해서도 함부러 대하는 자가 아니다. 이웃까지 책임질 줄 아는 자는 좁은 문으로 가는 자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좁은 문이다. 좁은 문은 시작에 불과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고 협착한 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 이 길의 특징은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7:15-27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신다.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그들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거짓 선지자가 주장하는 열매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 많이 있다-“많은 사람”(22절). 즉 눈에 보이는 표적들을 열매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신다(21절).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시종일관 나타났듯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의 길이다. 이 십자가를 지는 길에서 어긋나는 것은 모두가 불법이다(23절). 예수님은 산상수훈 마지막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시며 그 집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말씀을 행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산상수훈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누구를 믿는가? 그리고 그분을 기초로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기초란 당연히 예수님께서 지시는 십자가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앞으로 지실 십자가 위에서 새롭게 모든 것을 시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결국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7:28-29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나자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아서 기존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달랐다. 즉 그들의 의와 예수님의 의가 비교되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삶을 보여주신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권세를 가지고 가르쳤으나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8장
?마태복음 8:1-4 산상수훈을 기록한 후에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예수님 자신이 친히 그 말씀을 이루시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산상수훈을 행할 능력이 없는 죄인이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율법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적의 의미는 한마디로 율법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다. 먼저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는 이적(1-4절)이 나온다. 문둥병이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나타내 주는 상징적인 병이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가 예수님에 의해 놓임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4절)고 하셨는가? 그것은 구약 시대부터 행해 오던 제사 제도에서 제사장과 모세가 명한 예물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문둥병자로 하여금 알도록 하신 것이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제사장으로, 모세의 명한 예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저주(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3절). “주여 원하신다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2절)라고 문둥병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문둥병은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8:5-13 5-13절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적이 기록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백부장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면서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자고 한다. 그러나 이 본문은 한 개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그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고 교훈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과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이 개같이 취급하는 이방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고 말씀하신 의도는 예수님께서 이방인에게로 가서 그들도 내 백성을 삼으시겠다는 의도이다(참고 사 49:6).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2절)고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새로운 백성들이 진짜 이스라엘이다. 혈통과 상관없이 주님을 메시아로 알고 십자가를 보며 모인 자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백부장은 주님을 단지 병이나 고쳐 주는 자로 여기지 않았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종으로 여기는 그 모습이 곧 주님의 백성된 모습인 것이다. ?마태복음 8:14-17 세 번째 이적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수많은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고치신 이적이다(14-17절).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서 고침을 받고 수종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은 자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예수님께 수종들게 되는 자이다. 여기서 성경은 구약 성경 이사야 53:4을 인용하여서 우리에게 병고침의 의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17절). “병”이란 저주이다. 그리고 “연약함”이란 죄의 모습을 가리킨다. 본문에서 주어진 강조점은 “짊어지셨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저주와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을 병고침과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적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저주와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표적으로 병을 고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것은 계시를 주시는 차원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셨기 때문에 오늘날도 나의 병을 고치시는 주님으로만 이해한다면 주님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주님은 오늘날도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병고침에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좇는다면 주님은 우리를 거부하실 것이다. 이 땅에서 질병이 들렸을 때에 반드시 병고침을 받고 오래 산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사는 자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항상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므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8:18-22 1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서기관이 등장한다. 서기관은 스스로 예수님을 좇고자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잘 아는 자로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단지 병을 고치시는 메시아로 본 것이다. 아마 예수님을 좇으면 자신의 인생은 편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서기관을 거부하신다. 인간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좇아가고자 하는 자는 거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자만 받으시는 것이다(요 6:37-39,44,65).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절)고 무소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개입되지 않는 사랑은 무소유이신 주님 그 자신을 사랑하는 자이다. 그때 제자 중 한 사람이 부친을 장사하고 주님을 좇겠다고 한다. 그러자 주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신다. 이것은 단지 장사(葬事)를 금하는 말씀이 아니고 주님께 부름 받은 자는 앞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 부름 받은 자는 과거의 생명과 상관없이 죽음에 처해 있던 그 모습을 좇지 말고 생명에 거하는 자답게 세상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우선권으로 두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8:23-27 23-27절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이적이 기록되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 때 바다에 풍랑이 일었다. 제자들은 풍랑에 두려워하며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보시고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꾸짖으신다. 배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만으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제자들은 두려워한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 적은 자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심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그 만물을 다스리실 수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람과 바다를 제압하시는 능력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했었다(욥 38:8-11; 시 29:10). 그렇다면 예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그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 8:28-34 예수님은 바다 건너편 가다라 지방으로 가셔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이적을 행하신다(28-34절).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감으로 돼지들이 바다에 빠져 몰사했다는 것은 귀신들이 하는 일의 성격이 파멸임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즉 세상의 것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34절에 보면,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떠나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그저 물질적인 손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다지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마귀의 세력에 붙잡혀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 이적은 예수께서 이미 그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마귀의 세력을 꺾으신 것(마 4:1-11)에 기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창세기 3:15에서 예시해 주듯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귀의 머리를 치시기 위함이다.
9장
?마태복음 9:1-8 예수님의 이적이 집중적으로 계속 기록되어 있다. 1-8절에서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는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중풍병자를 바로 고쳐 주시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서기관들이 속으로 “참람하다”고 했다. 참람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구약에서 죄사함이란 하나님의 권세인데 예수님이 죄사함을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 여겼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5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어느 것이 쉬운 것인가 비교하라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님이 둘 중의 어느 하나를 해도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죄사함은 하나님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것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중풍병자가 걸어가는 것을 보거든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른 것, 즉 죄 사함의 권세를 나타내신 줄 알고 믿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걸어가게 하신 것이다. 죄 사함의 문제는 저 멀리 미래의 하늘 나라에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께서 이루는 권세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마태복음 9:9-17 9-17절은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장면이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 사함의 권세를 보이신 그 권세로 마태를 부르신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이 부르실 때에 주님을 좇을 수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한다고 공격한다. 바리새인들은 그들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킴으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다(13절). 즉 예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분이시므로 죄인들에게 필요한 예수님이지 자신을 의인으로 아는 자에게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신 호세아 6:6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우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와 같이 어떤 형식과 제도를 행했다고 해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그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다(14절 이하). 당시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자기들의 의로 여겼다.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자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에는 금식하라고 하신다. 금식은 슬퍼한다는 뜻이다. 즉 주님과 함께한 기쁨을 빼앗겨 버렸을 때(십자가 사건)에는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는 사건이기에 이미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와 생베조각에 대한 말씀처럼 그분의 백성은 이제 예수님이 원하는 원리와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 ?마태복음 9:18-26 18-26절에는 혈루증 앓는 여자가 고침을 받는 것과 한 직원(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이적이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야이로의 딸의 살리기 위하여 가시다가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고치심으로 야이로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이로는 “내 딸이 죽었사오니 당장 오셔서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18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혈루병자 역시 예수님의 옷에라도 손을 대어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병고침 받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혈루병자를 만나시고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녀의 몸에 손을 꼭 얹어야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죽은 생명을 살리셔서 산 생명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시기 위해서 야이로의 집으로 찾아가셨고 그의 딸을 살리신 것이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과 십자가 안에서 만나고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마태복음 9:27-38 예수님은 두 소경을 고치시고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신다(27-38절). 두 소경은 앞을 보지 못했으나 두 눈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고 있는 그들보다도 더 분명하게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27절), 곧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왕으로 아직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는 아니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34절). 나는 나에게 베풀어진 가장 귀중한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을 무시하지는 않는가?
10장
?마태복음 10:1-15 마태복음 9:35-38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치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군이 없으므로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12제자를 부르시고 사도라 칭하셨다.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며 파송하셨다. 열 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즉 12지파에 대비되는 12제자를 택하심으로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성하시려는 것이다. 그 기준은 예수님이시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대신해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이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40절). 여기서 우리는 12제자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신 것은 단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은 천국이 왔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마8:17). 즉 천국이란 저주와 죄 아래에서 매여 있는 죄인들을 자유케 하는 것이며 그 천국은 이미 땅에 왔다는 것을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치는 것을 통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천국 복음 전파라는 것은 예수님을 전도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많이 모으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심고 열매를 맺는 일은 주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통해 다 이루실 것이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추수를 위해서 보냄을 받은 자이지 심는 자가 아닌 것이다. 결국 12제자는 하나님의 품꾼으로 부름을 받은 존재이다. 예수믿는 자를 끌어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수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이다. 때문에 12제자는 자기 생각을 말하면 안되고 주님이 가르치신 내용만 전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증인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증인이란 예수님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이다. 끌어 모으는 자가 증인이 아니라 보여주는 자가 증인이다. 천국을 확장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천국을 보여주는 자이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5-6절)고 말씀하신다. 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잃어버린 양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은 자기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이방인들을 멸시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교만이었으며 잃어버린 양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교만의 모습이 잃어버린 양의 모습인 것을 나타냄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확산될 것을 말씀하셨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태도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이어야 한다(8절). 보냄을 받은 자는 자기가 심은 것이 아니고 단지 추수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품꾼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없고 거저 받은 것에 불과하다. 만약 어떤 대가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거저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만이 천국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저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세상에서 어떤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오직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움직여질 뿐이다. 그래서 전대에 돈을 가지지 말고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아야 한다. 복음 전파라는 것은 단순히 전도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 땅에서 머리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절에서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했다. 이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과 모순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서로 거저 주라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거저 주는 것을 한 편에서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천국 복음을 받은 자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수 있어야 한다. 제자들이 천국을 전파할 합당한 집을 정해서 머물 때에 그 집에 평안을 빌라고 하신다. 여기서 평안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을 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즉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는 말이다. 이방인이라는 기준이 유대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가 이방인이냐 이스라엘이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소돔과 고모라이다. 따라서 평안이라는 것은 그 집에 세상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오직 하늘에만 관심을 두는 주님의 구원이 임하기를 비는 것을 말한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제자의 일이고 이것이 추수하는 것이다. 세상의 미련이 남아 있는 자는 천국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천국 복음을 아는 자는 세상을 포기한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천국 복음을 아는 자는 천국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이지 세상의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늘날 2002년 월드컵이 우리 나라에 유치되면 전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월드컵 유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세상에 편승하고자 하는 종교적 욕심일 뿐이다. ?마태복음 10:16-23 예수님은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상에 보내시는 것은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양과 같다고 말씀하신다(16절). 그러기에 제자들은 자신을 지키고 또한 지혜롭게 행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을 따르고 증거하는 삶은 고난의 길이라는 것이다. “넘겨주다”(내어주다)라는 말이 17,19,21절에서 반복 사용됨으로 인간에 의해서든지 하나님에 의해서든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지시는 것과 연관된다(참고 17:22). 이것은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증인의 삶을 산다면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 서게 될 일도 있을 것이었다(행 4,7,22,26장 등). 그럴 때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성령께서 증거의 내용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20절). 복음은 반드시 구원을 이루어 내시는 역할을 할 것이다(22절). 그러므로 증인을 핍박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 때문이다. 증인을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마태복음 10:24-33 24절을 보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라고 하신다. 여기서 제자와 종은 예수님의 제자를 가리키고 선생과 상전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은 “바알세불”(귀신의 왕)이라고 비난하였다. 즉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멸시의 대상이었다면 그분의 제자들이 원수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은 예수님의 운명과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같이 주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곧 예수님의 제자이고 증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은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을 따르려고 한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38절의 말씀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주님을 좇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의미로 주님을 따르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느냐 지지 않고 따르려고 하느냐 하는 문제로 십자가에 초점이 있다). 그래서 28절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한다. 죽음이란 세상에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이다. 따라서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지 못하는 그런 존재보다는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세상의 것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신자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일이다. 참새도 하나님의 허락하실 때 땅에 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가 되었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을 것인가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사람 앞에서 예수님만을 시인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가 증인이고 증인의 모습을 가진 자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다. 예수님만 전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다. ?마태복음 10:34-42 3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신다. 여기서 “화평”이란 인간관계의 화평이다. 즉 이 말씀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인간 관계 또는 혈통 관계가 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세상에서 분리되는 것이다(임마누엘).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면서 믿으려고 하는 자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복음이다. 때문에 단지 인간 관계로서 맺어진 것이나 인간의 혈통적 관계는 복음으로 인해서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참고 12:46-50). 그러나 이 말씀은 이 땅에서 인간 관계나 혈통적 관계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가족을 도와주더라도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족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생명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 즉 생존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위해 사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주님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곧 주님의 증인이고 결국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40-42절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그리고 하늘의 상을 받을 자는 증인을 영접하는 자임을 말한다. 어떤 자가 예수님을 바르게 전파했을 때 그를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선지자와 의인의 상을 받는다고 한다. 선지자와 의인은 누구인가? 예수님을 가리킨다. 42절의 소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며 핍박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이 자를 무시하지 않고 그 복음을 영접하는 자가 곧 하늘의 상을 받을 자이다. 이 상은 곧 구원이다.
11장
?마태복음 11:1-19 세례 요한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하여 소개하기를 심판을 가져올 분으로 소개하였었다(3:10-12). 그러나 옥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소문을 듣고 보니 의심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게 된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능력과 기적을 베풀어서 로마군을 징벌하는 일이 아니라 단지 말씀만을 가르치고 병이나 고치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정말 메시아인지에 대해서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요한의 제자들에게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요한에게 전하라고만 하셨다. 그들이 듣고 본 것은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해서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6절). 이 말씀은 메시아에 대해서 바로 아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즉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주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주님만을 붙들고 있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7절에 보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고 물으신다. 과거에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었다. 당시 선지자는 회개를 촉구하면서 백성들을 광야로 불러내었다. 왜냐하면 광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애굽의 성품을 버리지 못한 결과로 육신의 문제로 인해서 원망을 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야라는 곳은 이스라엘의 실패의 자리이다. 실패의 자리에 있는 그들이 잘못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책망하기 위해서 선지자가 세움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실패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십자가로 책망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선포하고 예비한 그 길로 하나님 나라가 이르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행되고 있다고 선언하신다. 그러기에 소돔과 고모라 같은 땅에서 주님의 증인 노릇하는 자는 요한보다 큰 자라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천국이 빨리 이르도록 길을 예비하는 자였지만 천국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천국에 참여되었기 때문이다(11-12절). 그러면 이 세대는 어떤 세대인가?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 비유로 말씀하신다(16-19절). 이 비유로 예수님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는 동참하지 않고 있는 세대라고 단정하신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자기들의 믿음있는 삶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예수님께서 볼 때에는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동참하지 않고 있는 자들이었다. 복음을 말하면서 진짜 복음이 나타났을 때에는 오히려 그 진짜 복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공격하는 현상이 오늘날에도 도처에 일어나고 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19절)고 했다. 여기서 지혜는 예수님이고 그 행한 일이란 누가복음 7:35에 보면 “자기의 모든 자녀”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반대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그 나라의 백성(자녀)들로 인하여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이 증명되어 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반대나 방해에 의해 주님의 사역은 헛될 수 없고 복음은 결코 좌절될 수 없다. ?마태복음 11:20-30 주님의 복음을 거절한 자리는 곧 심판의 자리이다. 복음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어린아이 같은 자들만이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을 아는 자들은 어떤 자리에서도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핍박을 받게 되고 많은 욕을 당하게 되고 쫓겨남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런 자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복음을 거부한 세대로부터 쫓겨나온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님 때문에 짐을 지게 된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쉼을 주겠다고 하신다. 그 쉼이란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쉼의 방법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라는 것은 자기가 지게 된 짐이 예수님 때문에 지게 된 것으로 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겸손이고 온유이다. 자신은 주님의 증인이기 때문에 주님을 나타낼 뿐이고 그로 인해서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라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온유이고 겸손이다. 이것이 곧 쉼을 얻는 방법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에게나 이러한 쉼이 함부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로 작정된 자들에게이며 그 자들은 어린아이, 즉 주님의 다스림 아래 있어야만 살 수 있다고 고백하는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고 주님은 이렇게 연약한 자들을 상대로 천국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
12장
?마태복음 12:1-21 마태복음서는 11장에서 보여준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안식임을 보여주기 위해 12장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계시하고 있다. 천국은 인간(죄인)들이 생각하는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에 인간(유대인)들이 어떻게 대립(걸림돌이)되는가가 드러나고 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었다. 바리새인들이 이를 보고 시비를 건다.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먹은 행위가 안식일을 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님은 다윗과 제사장의 경우를 들면서 안식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신다.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서 제사장만 먹도록 되어 있는 떡을 먹어도 죄가 되지 않은 것(삼상 21:1-6)은 다윗이 하나님의 법을 이을 자가 아니라 약속을 이을 자였기 때문이다. 또 제사장이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은 제사장은 안식을 주신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이” 라고 하셨고,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무시하고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일컬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법이 완성되었기에 성전의 의미가 다 드러났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안식일의 의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구약의 안식일을 가지고 어떤 한 날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누구인가로 생각해야 한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었다(갈 3:24).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나타내신 희생하고 섬기고 사랑하라는 정신, 한 마디로 십자가의 정신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는 그 자체를 가지고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율법을 가지고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롬 8:1;골 2:16).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임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 9절이하의 내용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한 편 손마른 자를 만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가한지 질문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역질문으로 대답하신다.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내지 않겠느냐?’ 이 논리를 가지고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善)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2절)고 말씀하신다. 흔히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주일에는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구제하고 전도하는 것이 주일에 할 일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12절은 그런 취지의 말씀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선을 행한다는 뜻이다. 선(善)이란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모두 죄의 권세 아래에 있기 때문에 선은 오직 예수님이다. 따라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선(善)이 예수님이고 예수님 자신이 안식이라는 의미이다. 이 의미가 드러났을 때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했다(14절).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어떤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17-21절까지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을 보고서도 누구신가를 깨닫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심판의 말씀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한다”(20절/사 42:3)는 말씀은 회개하는 자의 연약한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열왕기하 18:21에 의하면 애굽을 상한 갈대로 말한다. 즉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애굽(이방인)으로 지칭하시는 것이다. 이들을 지금 심판하시지(꺾지않고 끄지) 않겠다는 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그들의 심판을 이방인들(자기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성령님은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가 바리새인들을 심판할 것이고 십자가 앞에서 그들의 죄악이 무엇인가가 낱낱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이방인들에게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12:22-37 그 때에 예수님은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신다(22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로 몰아 부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귀신은 귀신을 쫓아낼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서 이 땅에 와 계신 분이심을 드러내셨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8절)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미래에 되어질 것이 이미 너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즉 미래의 것을 미리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사탄의 시험을 물리침으로 이미 사탄을 결박하였기에 지금 사탄의 집을 늑탈할 수 있는 것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로 사탄의 권세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신 것임을 믿는 자는 주님과 함께 하는 자요 그렇지 않는 자는 주님을 반대하는 자이다. 주님을 반대하는 자는 사탄의 부림을 받는 자로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자는 모두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여기시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를 고치심으로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일을 사탄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 하는 일로 치부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세상에 그대로 속해 있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31-32절)고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데 만약에 인간적으로 예수님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용서해 주겠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줄 알면서도 거역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성령님은 미래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일을 이루시고 난 뒤에 오신다. 그때에 성령님이 하실 일은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님을 거역하고 성령님을 훼방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신 십자가의 모습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사하심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성령님은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증거한다. 그리고 십자가를 아는 자를 통해서 이 땅에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알리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거부하고 오히려 반대한다. 그것이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으로서 모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아름다운 십자가를 믿으려고 한다. 십자가에 담겨 있는 고난, 희생 등은 다 빼 버리고 자신에게 좋은 것만 십자가로 이해하고 그것을 가지고자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33절)고 하신다. 즉 십자가는 좋다 하면서 그 열매는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만큼 생활도 또한 십자가를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적당하게 윤리적으로 살려고 힘 쓸 것이 아니라 진리에서 맺어지는 행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삶과는 반대적인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34절)라고 책망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악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말은 다 악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독사의 자식은 선을 싫어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마귀의 수하에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2:38-50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 몇 사람이 표적 보여주기를 원했다(38절). 그때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것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요나가 사흘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가 다시 밖으로 나온 사건을 들어서 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 됨의 표적이라고 제시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할 표적도 십자가이다. 그 외의 것은 우리에게 표적으로 자리할 수 없다. 표적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구하는 것이라고 하신다(39절). 그러기에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표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곧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표적을 이방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41-42절). 그리고 십자가를 표적으로 여기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표적으로 삼고자 하는 세대는 귀신에게 붙들린 형편으로 존재하게 된다(43-45절). 그렇다면 구원받을 자가 누구인가?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자이다.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자란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는 자이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예수님과 한 가족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이다. 누구를 기준으로 하는 한 가족인가? 바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한 가족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혈통이 무시된(요 1:13) 예수님의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이다(엡 2:13).
13장
?마태복음 13:1-23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에 대한 비유가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천국 비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천국은 세상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은 천국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천국을 보고도 거부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천국이란 예수님을 아는 자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천국을 이루신 장본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천국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1-23절)-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논란이 가장 많은 비유이기에 또한 가장 많이 오해를 하고 있는 비유이다. 사람들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은 말씀을 받기는 해도 마귀나 세상의 유혹 핍박이나 환난에 의해서 말씀을 빼앗기고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이것을 이겨서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 비유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다. 우리가 옥토가 되자고 해서 옥토가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에게 선한 무엇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인간은 죄인이기에 선한 것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전제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힘으로 옥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귀를 이길 수 없다. 환난과 핍박도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 옥토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 비유는 인간의 힘으로는 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을 통해서 옥토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미다.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고 나서는 자는 천국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님이시다. 지금 예수님은 마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씨를 뿌리고 계신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역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결과는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맺게 된다. 그러기에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는 하나님 나라로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천국을 알도록 허락된 자들에게는 더욱 밝히 알도록 하시기 위함이며, 반대로 천국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또한 예언의 성취이다(14-15절/사 6:9-10). 그러므로 무조건 많은 사람을 모은다고 해서 천국이 이루어지거나 교인 수가 많은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모으신 자들만 모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다(참고 요6:37-39). 오늘날 우리가 하는 주님의 일이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바로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지 교회가 잘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3:24-50 “가라지 비유”(24-30, 34-43절)-24절에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다. 여기서 씨를 뿌린 사람 역시 예수님이시다(37절). 29절을 보면 천국은 가라지가 함께 있는 데도 가만히 두고 있는 상태라고 하셨다. 밭은 세상이라고 했다(38절). 그러므로 가라지가 있는 세상과 같은 상태라고 할지라도 씨를 뿌린 주인의 밭이며 주인은 여전히 주인이다. 즉 가라지가 있든 없든 주님이 변함없이 주인으로 자리하고 있는 그 상태가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천국이 원수들에 의해 고난받는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천국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43절). “겨자씨 비유”(31-32절)-천국을 겨자씨로 비유한다. 그러나 이것은 점차 커져가는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겨자씨를 조그만하고 보잘 것 없고 미미한 것으로 여기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 같은 모습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누룩비유”(33절)-누룩은 가루에 묻히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누룩이 들어 있다는 것은 가루가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천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이지만 그러나 활동하고 있다. 그 결과는 장차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임을 가르치는 비유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44절)-사람이 밭을 산 이유는 밭이 가치가 있어서 산 것이 아니라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 때문에 밭을 샀다. 즉 밭은 감추어져 있는 보화로 인해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천국을 아는 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가치 있게 보는 것은 그 현실에 감추어져 있는 다른 세계 때문에 현재의 일을 가치 있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주장사 비유”(45-46절)-자기의 모든 소유보다 더 귀한 것이 천국이라는 비유이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예수님의 죽음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사람은 현실 속에서 생명을 찾아 다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했을 때 이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보다도 그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물 비유”(47-50절)-유대인들이 정한 것과 부정한 물고기로 율법에 의해 구별하듯이 천국은 지금 악인과 선인이 함께 존재하는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세상과 구별된 자들이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이 모든 것을 다 깨달았느냐”고 말씀하신다. 그 깨달음은 천국인 것과 천국이 아닌 것에 대하여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52절에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은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하신다. 이 말은 천국의 제자된 자는 새 것과 옛 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 능력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서 주어진다. 결국 천국 앞에서는 새 것이 무엇이고 옛 것이 무엇인지 모두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전도서에 보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1:9-10)고 말한다. 즉 세상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새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새 것이란 세상에 없는 것을 말하는데 결국 그것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이 무엇이 새 것이고 무엇이 옛 것인지를 드러나게 하며, 새 것과 옛 것을 판별할 수 있거든 그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깨달은 주님의 제자인 것이다. 예수님이 비유를 마치시고 고향으로 가셔서 가르치시자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 놀라면서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역사적인 시각으로만 보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에게서는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능력이 나올만한 사람의 기준을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옛 것의 모습이다.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는 말과 같이 역사 안에서는 새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하늘의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역사적인 시각이 아니라 묵시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거기에서 새 것이 나온다.
14장
?마태복음 14:1-12 어떤 인간도 스스로 마귀의 세력을 이겨서 천국을 만들어 내거나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다. 즉 천국은 어떤 방해나 장애를 극복하고 이 땅에 임하고 그 열매가 드러나거든 예수님이 하신줄 알라고 하는 것이 천국 비유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천국이 어떤 방해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있음을 14-15장에서 나타내 주고 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역이다. 본 장에서 먼저 세례 요한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1-12절). 천국에 대하여 세상의 권력이 어떻게 행하는가를 보여준다. 이 상황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던 아합 왕 때의 상황과 같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는 것을 실패했으나 헤로디아는 엘리야와 같은 세례 요한을 죽이는데 성공하였다. 천국이 빨리 이르도록 길을 평탄케 하는 세례 요한이기에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사역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헤롯이 요한을 죽이게 되었다 할지라도 천국은 세상의 권력에 의해 실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것이다(13-14절). 그것이 오병이어의 이적이다. 이제 세례 요한이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의 표적이 십자가라고 하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계시하시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지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4:13-21 그러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13-21절)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19절에서 “가지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라는 표현들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최후의 만찬에서 행하실 것을 의도적으로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신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떡어 떼어 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명을 공급받는 자들이 천국의 참된 백성들인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절)고 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 자신의 씨를 뿌리는 사역이 제자들을 통해 계속 될 것이고 그들을 통해 생명을 공급받은 자들의 모임이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교회이다. 남은 조각을 12바구니에 가득차게 거두어야 했던 것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단지 12바구니에 거두어들인 자로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결과를 얻은 자로 이 이적에 참여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서 모인 자가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역시 기준은 예수님이다. ?마태복음 14:22-36 요한복음 6:15에 의하면 이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정치적인 왕으로 삼기를 원했기에 예수님은 따로 피하셨다고 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갈 밤 사경에(오전3-6시경) 예수님은 물 위를 걷는 이적을 보이셨다(22-33절). 예수님의 이적에서 특징 중의 한 가지는 예수님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앞세워서 이적을 행하신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적 역시 예수님 자신을 어떤 분으로 계시하시는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유령이라고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절)고 하셨다. “내니”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3:14에서 “나로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표현이다. 즉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의 구원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은 오직 예수님만으로 되어질 일이다. 십자가를 진다고 해서 다 메시아가 아니다. 구원은 “바다 물결을 밟으시고”(욥 9:8), “길을 바다에 내시는”(시 77:19) 하나님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배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절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아들’이란 단순한 차원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됨에 대한 고백이다(요 5:18). 이런 점에서 여기 두 개의 대조적인 세계가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의 세계와 제자들의 세계이다. 즉 예수님의 세계는 평안과 잔잔함이 있으나 제자들의 세계에는 폭풍과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 예수님은 폭풍을 다스리는 주님이셨으나 제자들은 그것의 희생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의 세계를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만물을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실 수 있는 것처럼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걸음으로 주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구원이란 주님과 더불어 만물을 다스리는 왕노릇이다(계 5:10;20:6).
15장
?마태복음 15:1-20 예수님에 대한 반대는 계속되고 있다. 1-20절까지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고 있다고 트집을 잡는다. 장로들의 유전이란 율법에 여러 가지 세세한 규정들을 달아 전승되어 온 것들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율법의 위치로 놓고 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3절)라고 하셨다. 즉 장로들의 유전은 계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는다는 것은 그들의 유전이지 계명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결코 율법(계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거룩의 의미를 손을 씻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룩의 의미를 손을 씻는 외형적인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답변을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관계된 그들 유전의 한 사례를 인용하신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부모 공경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서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부모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 공경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쪽에서 자기 편리한대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신자의 부모 공경은 부모 사랑이다. 항상 공경하면서도 부족을 느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으로 부모님께 할 것을 대신했다고 여긴 것이고 따라서 자신은 부모 공경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들을 편리한 쪽으로 끌어가는 유전을 더 앞세우는 모습이다. 오늘날 신자들 역시 열심히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함으로 그것으로 자기의 의를 삼고 다른 부족을 가려 보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늘 자문(自問)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8-9절)라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전통, 자기들이 이제까지 지키고 행해 왔던 관습 때문에 예수님을 필요없는 존재로 여긴 것이라는 질책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필요없는 존재요 더 나아가서 자기들이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일에 방해가 되었기에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는 11절 말씀은 인간의 더러움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느 정도 들어가면 그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끝이 없다. 이 죄는 인간의 전통이나 의식으로 아무리 가리려고 해도 가리워질 수 없다. 인간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항상 거룩하게 보이는 경건, 예배, 기도, 헌금 이런 것들로 자신의 죄인됨을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믿고 주님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지 우리의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구원받을 자는 예수님의 사고방식과 같은 자다. 예수님 없이 하나님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님을 아는 자만이 천부께서 심은 자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가 인도할 때 둘 다 멸망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 무슨 이유인가?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이해하지를 못한다(15절, 12절). 왜냐하면 베드로도 유대교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악함은 모두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외형적인 것이 인간을 악하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5:21-28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예수님을 공격했었다. 기존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천국을 대적했던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인간이 결코 천국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명백히 보이셨다. 천국이란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악한 것을 뽑아 버리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것으로 심으신 것만으로 기뻐하시는 나라임을 예수님은 밝히셨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자기 딸이 귀신이 들렸음으로 고쳐 주시기를 구한다(21-28절). 여기서 예수님은 귀신들린 딸을 등장시켜서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보여줌으로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에게 구원이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인가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즉 천국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천국을 공격하고 반대하는 자에게가 아니라 이방인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고 하신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이 구원할 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지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은 누구이며 이방인은 누구인가? 지금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 와 계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결국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 주셨다. 그렇다면 이방인이란 가나안 여인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자기는 선택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방인이 바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다. 즉 자기를 잃어버린 양으로 아는 자를 주님은 이스라엘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7:26에 보면 이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가나안 여자”라는 구약식 표현을 씀으로 이방인이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으로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했던 구원(천국)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혈통을 거부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새로운 이스라엘이란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듯이(22절) 다윗의 언약에 의해 오실 메시아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이다. 이를 가지고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28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보였던 장로들의 유전을 앞세우고 그것을 지킴으로 자신들이 의로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을 지적하시면서 천국이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보이셨다. ?마태복음 15:29-39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 호숫가에 오셔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던 자들을 고치신다(29-31절).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원래 벙어리,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제외되었던 자들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들을 찾으시고 그들을 고쳐주신 것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시작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무시했다면 이제 예수님은 천대받고 소외되었던 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자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인간으로부터 외면 당하고 소외당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자 소위 말하는 ‘칠병이어(七餠二魚)의 이적’을 베푸셨다(32-39절). 여자와 아이 외에 4,000명이나 먹었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다. 이 이적은 예수님께서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 때문에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앞의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이적은 차이점이 있다. 오병이어는 유대인과 관계없이 주었으나 칠병이어는 이스라엘의 사회에서 배척받고 예수님이 새로운 시작을 하시는 새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다. 결국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새 이스라엘의 백성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16장
?마태복음 16:1-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다른 교리를 지향하는 자들이나 예수님을 모함하는 일에 있어서는 서로 연합하였다.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침과 저녁 하늘을 보면서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신다. 그리고 표적을 구하는 세대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규정하신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표적임에도 불구하고(눅 2:12)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표적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에게 더 이상 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 없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제 오직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십자가 표적 외에는 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동안 보여주신 이적들은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한 표적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될 것이기에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로 이 세대를 정죄하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임을 폭로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는 자들에 대해서도 예수님과 같은 대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란 예수님의 십자가로 살림받은 자가 다시 날마다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이다.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에 대해서 가르치신다(6-12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은 십자가의 표적을 보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실익(實益)을 따지며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떡을 생각한다. 결국 제자들도 먹고 사는 문제에 걸리고 있다. 십자가의 사건으로 오게될 천국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떡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병이어의 이적을 말씀하시면서 만약 떡에 대한 문제라면 오병이어와 같은 이적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님을 강조하신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우리의 시각으로만 볼 때 항상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시각으로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 안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16:13-28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을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게 되고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나온다(13-20절). 베드로는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고백한다. 이 말에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라고 하시면서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신다(17절). 즉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혈육)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자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성경공부를 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받은 자가 말씀을 배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18절에 예수님은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앞에서 바요나 시몬(17절)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베드로 개인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18절에서 베드로(반석)라고 말씀하신 것은 16절의 고백이 있는 자 모두가 반석(베드로)이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교회는 주님에 대한 바로 이러한 고백이 있는 반석으로 인해서 시작된다. 즉 그 고백의 핵심 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음부의 권세를 이기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교회는 예수님을 통해 모이는 모임만 교회이고, 음부의 권세 또한 예수님이 이기는 교회가 교회이다. 19절에서 “천국 열쇠를 맡긴다”는 의미는 천국 자체가 열쇠이기 때문에 고백을 하는 자에는 천국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천국은 내가 하나님께 붙잡혀 있는 상태라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붙잡혀 있는 자는 땅에서 어떤 원한을 당하든지 하늘에서 모든 것을 갚으신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자가 땅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 그것으로 억울해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심판주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신자는 천국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제자들의 고백이 있고, 교회에 대한 말씀을 하신 연후에 비로소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취지는 당위성이다. 반드시 고난을 받고 반드시 죽임을 당하고 반드시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그것을 말린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이라고 하신다. 방금 신앙고백을 제대로 했던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리는 것이다. 고난없이 예수님을 말하는 것은 모두 사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은 고난을 제거한 복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참고 마3장-예수님의 시험).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세워진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겪는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에 교회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절)고 하신다. 고난이란 고생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는 것이 고난이다. 이 고난을 근거로 해서 교회가 발생되는 것이다.
17장
?마태복음 17:1-8 마태복음 17장은 1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전제로 해서 내용이 전개된다. 그것은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16:28)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해서 17장은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행하신 일과 변화산 아래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주고 있다. 변화산 사건 자체가 바로 주님의 왕권적인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사건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세 제자(베드로,야고보,요한)만 특별히 경험하였다. 베드로는 이를 보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 하늘의 구름이 와서 저희들을 덮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5절)고 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누가복음 9:31에 보면 이 때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대화가 나온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즉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베드로는 그 영광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곳에서 초막 셋을 짓고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있을 때에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고서는 영광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을 십자가를 지는 아들이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은 인간이 집을 지어서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나 엘리야로 보여주셨듯이 구약의 말씀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천국의 영광은 주님이 가신 길을 주님의 말만 듣고 그대로 따라가는 자에게만 주어질 영광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모세도 엘리야도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때문에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았을 때에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8절)고 말씀하고 있다. 9절에 보면 예수님은 변화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변화산의 사건을 목격한 세 제자는 그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금하신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고난이 훼방을 받기 때문이다. 변화산의 영광을 말해 버리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고난이 없는, 십자가의 죽음이 없는 영광만을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이 훼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영광이나 어떤 경험 체험을 가지고 신앙을 미화시키면 안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훼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7:9-27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한 부활이 있기 전까지이다. 제자들은 메시아가 반드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가복음 9:10에 보면 제자들이 서로 의문이 되어 수군거렸다고 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메시아적 사명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0절)였다. 말라기 4:5에 의하면, 주의 날이 이르기 전에 먼저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의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제자들로서는 자연스럽게 엘리야에 대해서 질문하게 된 것이다. 즉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엘리야를 본 것이 바로 오리라 한 그 엘리야로 말라기 4:5말씀의 성취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변화산의 영광 그 자체가 주의 날로 성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달랐다.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 12절의 말씀은 세례 요한의 죽음이 곧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야와 같이 고난받는 선지자의 노선이라는 말씀이다. 결국 예수님 자신이 엘리야로 오셨다는 의미이다. 변화산의 사건을 보지 못한 산 밑의 제자들은 어떤 모습인가를 14-20절까지 기록하고 있다. 변화산 아래의 상태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혀 있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귀신들린 아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변화산 위의 영광의 모습은 변화산 아래에 있는 사탄의 권세에 붙잡혀 있는 죄인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이며 그 변화산 위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승리로 귀신의 우두머리인 사탄의 머리를 밟을 때에 가능한 영광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꾸짖으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7절)라고 하셨다. 여기서 믿음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믿음이 부족하니까 믿음을 더욱 길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믿음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무슨 믿음인가? 16:39-40과 16:4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보여줄 것이라고는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다. 즉 십자가의 사건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도 변화산 영광을 통해 보여주시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주님의 십자가 표적을 믿지 않고 자꾸 병고치는 것을 추구한다든지 자신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기를 구하는 신앙이라면 그 상태가 곧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 사건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신자들이 다른데 관심을 두고 사는 것도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의 사건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자들이 우리는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가를 물었을 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절)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분명히 너희가 믿음을 가져서 산을 옮기는 능력을 나타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산을 옮기는 그런 능력보다도 더 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설사 산을 옮기는 능력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 믿음은 겨자씨만큼 밖에 안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단지 귀신을 쫓아내는 그런 능력은 하찮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모든 이적들이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천국의 힘이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고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술적인 힘과 같은 식으로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란 실제로 주님의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주님이 귀히 여기시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이다. 따라서 신자란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나도 함께 죽었기에 나의 소원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안에 있는 것이지 땅에서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아는 자이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더욱 확실히 예고하시는 것이다(22절).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세상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기에 근심하게 된다(23절). 그러나 신자가 세상을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세상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살기는 하되 나그네로 살뿐이고 세상에 얽매이지 않게 산다는 것이지 세상의 모든 일에 전혀 관계없이 살아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24-27절까지의 말씀이다.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성전세를 받는 자가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요구한다. 당시 성전세는 반세겔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의 실체)이시므로 아니 성전보다 더 큰 분이시기에 세를 낼 필요가 없다. 또한 세는 타인에게 받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은 세를 낼 필요가 없으시다고 하신다. 그러나 오해를 막기 위해서 밖에 나가 일해서 얻은 것으로 세를 바치라고 하신다. 그들이 오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과 상관없이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세상과 무관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서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할 의무를 해야하되 보여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아는 것이 곧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18장
?마태복음 18:1-14 18장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5대강화 중에서 네 번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가?”하는 문제로 질문을 했다(1절). 아마 변화산에서 본 영광 때문에 서로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막9:33-34). 이 질문은 ‘누가 가장 큰가’하는 문제였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과는 달리 천국이 어떤 나라이며 누가 들어가는 나라인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셨다. 그리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면 여기서 어린 아이란 어떤 모습인가? 4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고 했다. 즉 어린 아이란 자기를 낮추는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3절에서 예수님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셨다. 돌이켜, 즉 그들의 삶의 방향이 어디로 잡혀 있는가 하는 말씀이다. 천국은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가치와 기준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천국은 누가 가장 큰가 하는 것으로 힘으로 따지고 경쟁하여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어느 것이 큰가 하는 식으로 비교해서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천국은 인간의 공로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소자를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나라이다. 천국은 높고 낮음이 없다. “천국에서 (가장) 큰 자”(4절)라는 말은 천국은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천국은 가장 큰 자만 있지 낮은 자는 없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5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자신을 같은 모습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아주 연약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오셨다.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은 보잘 것없는 모습으로 와 있다. 그러므로 소자의 마음 즉 주님의 이름, 주님의 마음이 아니면 천국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주님을 믿는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이 말씀은 실족케 하느니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실족케 할 바에는 오히려 그 사람의 목에 연자 맷돌이라도 달아서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화가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우리 몸이 아니라 천국이다. 비록 자신의 몸이라고 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방해 요소가 된다면 잘라버리는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마만큼 죄를 미워하고 천국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8-9절). 어린 아이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소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천사라도 보내서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10절). 하나님께서는 소자가 무시당하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14절). 하나님은 크고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은 소자에게 있기 때문에 양 백마리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면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반드시 찾으시는 것이다(12-13절). 하나님의 관심은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것을 반드시 찾으시고자 하시는 데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과연 주님의 마음이 담긴 소자에게 관심을 두는 주님의 마음인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유익이 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모습인가?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십자가의 주님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이것이 천국이다. ?마태복음 18:15-35 천국이란 소자와 같은 모습이다. 곧 예수님이 소자의 모습이요 그를 따르는 자가 소자이다. 하나님의 관심이 바로 소자에게 있기에 큰 자로 살아가고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세상의 경쟁 심리로는 교회 공동체에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관이 이 땅에서는 유일하게 교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5절에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과연 교회란 무엇일까? 무엇을 가지고 교회라고 해야할까? 오늘날 흔히 말하듯이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하나님이 부흥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는 조직과 숫자가 아니라 형제가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은 12:50에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혈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로 말미암아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다(16:16-18).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형제란 기존의 인간의 혈육에 의한 형제가 아니라 인간의 핏줄이 거부된 자들로 부름을 받은 형제들이다. 그렇다면 그 형제들이란 어떤 형제들인가? 곧 용서를 아는 형제를 말한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함으로 이루실 죄에 대한 용서를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형제)들을 모으실 것이다. 따라서 17절의 교회는 조직적인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림을 당한 경험이 있는 형제들, 즉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아는 자들의 모임을 말한다. 이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 17절의 말씀이다. 18절은 16:19말씀과 동일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용서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주님의 사역을 이루어 가는 교회의 역할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절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용서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하는 기도이고,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드러내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20절에서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무조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바로 용서를 이루는 이름이 되었기에 주님의 이름 그 자체가 이제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것이다. 거기에 주님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였다고 해서 주님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이름에 의해 모여진 자요 또한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로 용서를 보여주고 드러내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용서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순히 인간의 실수를 묻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용서인 것으로 이해했다(21절).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22절)고 하셨다. 용서란 숫자에 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22절). 즉 천국이란 용서의 끝이 없다는 말씀이다. 이제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비유의 말씀은 자신이 용서받은 자임을 알지 못할 때 남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것을 아는 자는 자신이 이미 용서받은 자로 남을 대할 수 있다. 즉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의로운 자로서 잘못한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었는데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고 남을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의 입장에서 형제를 바라보는 것이다. 결국 우리 자신은 남을 용서하고 안하고 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형제를 긍휼히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은 긍휼을 모르는 자는 형제를 용서할 수 없다. 교회는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은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경쟁하지 않은 소자들만 보여진다.
19장
?마태복음 19:1-15 천국과 교회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떠나 유대지방으로 가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혼에 대한 논쟁(1-15절)과 재물과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신다(16-30절). 먼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질문해 왔기 때문에 이혼에 대한 교훈을 주시게 된다. 바리새인들이 이혼의 문제를 거론한 것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자기들의 논리를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창세기 1:27과 2:24을 근거로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사람이 마음대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법적인 이혼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애당초 남자와 여자가 있게 하심으로 보여주신 한 몸된 관계로 마음까지 나뉘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의 의도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모세의 법을 앞세운다. “그러하면 어지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7절). 이런 율법에 근거해서 바리새인들은 이혼할 때 이혼 증서를 주었다. 즉 이혼에 문제에 대해서도 자기들은 철저하게 모세의 법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으로 자기들의 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라고 했던 것은 당시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재혼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으로 이혼했다는 증서가 필요했다. 결국 이혼 증서는 최후까지 아내를 보호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법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내어버리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 연고없이 이혼해 놓고도 이혼 증서만 주면 다 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절)고 말씀하심으로 이제까지 그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행해온 이혼뿐만 아니라 오히려 간음한 죄까지 범했다고 지적하셨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천국은 모세의 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오늘날 사람들에게서는 결혼이라는 것이 너무나 쉽게 생각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그래서 사랑하기에 무조건 결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이혼이라는 문제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결혼이라는 것을 불편으로 생각하기도 하다. 그래서 아예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것이 마음껏 성(sex)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인간의 심성은 비단 오늘에 와서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노골화 되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결혼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결정적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한 몸이 깨어져 이미 두 몸이 되었기에 십자가를 통해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신 주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저히 이혼이 금해지는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은 당시 제자들의 마음에도 이미 찾아들고 있었다. 제자들이 그러면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10절)라고 말한다. 이에 예수님은 세 가지 형태를 말씀하신다. 그러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는 말씀을 하시므로 결혼을 하든 하지않든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천국을 위해서 사는가 세상을 위해서 사는 자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옴으로 다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신다(13-14절). 즉 천국이란 모세의 법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나아오는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며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의미로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14절). ?마태복음 19:16-30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묻는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 마태는 의도적으로 인간의 심성이 본래 어떠한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같다. 앞에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시면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 천국(영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구한다. 어떤 선한 일을 행하는 결과로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여기서 청년은 선한 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청년은 선한 일을 도덕과 윤리에 비추어서 좋은 일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 청년이 예수님께 그 질문을 하는 것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정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게 묻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나를 보고 선한 일을 배우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답변은 ‘선한 일’을 행해야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한 분’이 누구이신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청년에게 십계명의 내용을 말씀하시면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20절)라고 묻는다. 그때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다. 결국 천국이란 인간이 이 땅에서 무슨 행위가 있고 없고에 의해서 주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선하신 한 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천국이다. 모세의 법(율법)을 잘 지켜야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가 되시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의가 된다. 그런데 이 하늘의 의는 땅의 것, 즉 인간의 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21절)고 하셨다. 땅의 것을 귀하게 여긴다면 주님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3-24절)과 말씀하신다. 여기서 부자란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자기 가진 재물을 바라보면서 살고 그것이 목적이 되어 살며 곧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가 부자이다. 즉 자기에게 있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부자이다. 이런 자들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듯이 천국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한다(25절).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26절)고 하셨다. 천국이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다. 다시 말해서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이 넣어주실 때에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공로란 조금도 개입될 수 없는 나라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 베드로는 부자 청년이 자기 재물로 인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자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기에 거기에 대한 보상이 주님으로부터 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신다(28절). 베드로는 아직도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거기에 대한 대가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주님의 영광을 보아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즉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버릴 때에 영광에 보좌에 이르게 되시는 주님을 볼 때에 우리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기존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하여”(29절), 즉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그 새 이스라엘이 자기의 것을 고수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는 이 땅에서 받는 보상이 아니라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렸기에 그보다 더 소중한 영생을 상속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절)는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20장에서) 비유로 연결된 내용으로 가르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0장
?마태복음 20:1-16 20장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포도원 품꾼에 대한 비유이다. 포도원 품꾼에 대한 비유는 먼저 신앙생활 한 자와 늦게 신앙생활 한 자에 대한 비교를 하거나 천국에서 받을 상급에 대하여 말씀하는 비유라고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포도원 품꾼 비유는 신앙생활을 언제 했는가 하는 문제로 구원을 말하고자 하는 비유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천국 상급에 대한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은 본 비유를 어떤 동기에 의해서 말씀하시게 되었는가?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어왔을 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시니까 청년은 근심하면서 갔다. 그때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으니 무슨 보상이 있겠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먼저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고 하셨다. 그리고 ‘포도원 품꾼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어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1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분명 포도원 주인에게 비유의 초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품꾼을 구하러 나가서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일을 시켰다. 또 주인이 제 삼시(오전9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 제 육시(낮12시), 제 구시(오후3시), 제 십일시(오후5시)에도 그렇게 하였다. 아마 그 당시에 이렇게까지 하여 일을 시키는 포도원 주인은 없었다. 그러기에 이 비유를 듣는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면서 당연히 가지게 되는 호기심은 ‘과연 포도원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것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온 사람에 대하여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이쯤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은 포도원에 처음 들어온 품꾼은 분명히 몇 배의 품삯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고 말씀하신다. 아침 일찍 들어온 품꾼이 주인에게 따졌다. 그러나 주인은 약속한대로 주었기 때문에 자신은 결코 잘못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인의 뜻이었다. 중요한 것은 3절의 “장터에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할 일없이 놀고 섰는 사람들이다. 주인이 불러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그날 하루는 일을 하지 못하고 굶어야 하는 신세이다. 주인은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품꾼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은혜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아니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된 성향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지면 애초부터 놀던 자이기에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조차 주인의 은혜였다. 그러므로 천국의 질서나 법칙은 세상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굳이 세상의 법칙을 가지고 설명한다면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것과 같이 완전히 반대로 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아직도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원리, 법칙을 잘 모르는 자들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하는가는 보여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유대적 관념과 종교관, 특히 유대종교가 가르치고 있는 보상주의, 공로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즉 당대의 유대적 사상의 기준이나 관념을 가지고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판단하거나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천국의 모습은 비유에 나타난 포도원 주인이 은혜를 베푸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하도록 내어 주면서도 죄인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시는 모습이 긍휼과 은혜의 모습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방법이며, 천국의 모습이다. 세상 질서 속에서 먼저 되고 이기려고 하는 기존의 관념, 기존의 잘못된 천국에 대한 이해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역사를 바르게 알 수가 없게 된다.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천국에 대한 관념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자기의 한 일을 가지고 앞뒤를 따지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를 가지고 앞뒤를 따지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20:17-28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절). 이는 유대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구원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나타내시면서 그것은 곧 유대인만 선택된 자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나중 된 자, 즉 이방인에게로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이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나타내준 것처럼 주인의 은혜를 아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게 된다(17-19절).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게 된 것은 세 번째이다(16:21; 17:22-23). 그때 세배대의 아들(야고보와 요한)의 어미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들이 주의 나라에서 우편과 좌편에 앉게해 달라고 부탁한다. 아마 19:28의 말씀을 염두에 두었던 것같고 또 “저희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눅 19:11). 그러자 예수님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신다. 마가복음 10:38에 보면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라고 하셨는데 “잔과 세례”는 곧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 자신이 받을 고난과 죽음을 제자들이 결코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할 수 있다”고 만용을 부리고 있다. 이것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려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23절에 의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들이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했다. 반드시 고난을 통해야만 보좌의 영광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고난이지 보좌의 영광이 아니다. “내 죄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에 영광의 보좌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되는 것이다. 두 제자로 인하여 열 제자들에게 분란이 일어났다. 두 제자가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높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을 참지못하고 분을 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세상과 천국을 대조하여 다시 말씀하신다(25-26절). 천국은 세상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세상에서는 권세를 잡은 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향해 권세를 부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 안에서는 오직 섬기는 모습만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곧 천국의 모습이다. 바로 이 천국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28절). 그 모습은 적당히 섬기는 모습이 아니라 목숨까지 대속물로 주시는 모습이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가 어떤 자인가 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사는 자인가 아닌가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모습으로 세상을 사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된 자이고 하나님 앞에서 큰 자이다. 섬김을 받으려 하고 권세를 부리려고 하는 모습은 하나님과 절대 상관없는 세상의 모습에 불과하다. ?마태복음 20:29-34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소경 둘을 만나신다(29-34절). 소경들은 크게 소리를 쳤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0절).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부른 까닭은 무엇인가?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공의와 은혜를 보여주는 왕이었다. 곧 그 다윗 언약 속에 메시아가 오셔서 불쌍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는 구원의 모습이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경이 주님을 향해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은 것은 남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살 수 있는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주님은 왕으로서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줌으로 긍휼을 베풀러 오셨다.
21장
?마태복음 21:1-11 예수님은 이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게 된다. 무리들이 환호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9절). 구원자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다고 하셨던 그곳이 바로 성전이요(출 20:24; 신 12:5-6; 대하 6:5-6) 그 성전의 기능을 담당하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5절을 보면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셨다는 것 자체를 가지고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그런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나귀새끼라고 하는 보잘것없는 짐승을 탄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나귀란 전쟁하는 일에 쓰이는 동물이 아니라 남의 짐을 대신 져주는 일을 하는 동물이다. 그 나귀가 하는 일을 앞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하실 일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은 나귀같이 남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이다. 이것이 겸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므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하실 일이다. 본문의 근거가 되는 스가랴 9:9에 의하면 멍에를 메는 나귀가 아니라 그냥 나귀라고 되어 있다. 스가랴서에서는 단지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데 그분이 곧 나귀를 타고 온다는 의미로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귀를 타고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메시아는 강한 힘을 소유한 분으로서 자기들을 해방시키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 메시아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리들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 곧 자기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생각하고 “호산나”(이제 구원하소서)라고 외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천국은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스가랴 9:10에 보면 “내가 에브라임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라고 한다. 병거, 말, 활은 힘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것을 다 끊어 버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는 세상 힘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겸손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모습이다. 우리의 죄 짐을 대신 져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 21:12-22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신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하신다(13절). 성전은 기능이란 바로 죄사함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곳이었다. 곧 성전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여주고자 이제까지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성전에서 소경과 저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옴으로 그들을 고쳐주시는 것이다(14절). 죄에서 사함받은 상태란 바로 이런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 주님을 모독하고 있고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사만 잘 지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제사의식 자체를 유지하는 일에 열중했던 것이다. 여기서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즉 제사는 자기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과 같이 기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이다. 제사의 의미를 기도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심판과 긍휼은 외면해 버리고 유익을 얻기만 바란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아니다. 마치 자신들의 유익을 기대하고 호산나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주님을 진심으로 구세주로 영접한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이다. 하나님은 이런 점에서 어린아이의 찬미를 예비하신(온전케 하신) 것이다(15-16절).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18-22절). 마가복음 11:13에 의하면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했는데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 무화과나무는 잎보다 열매가 먼저 맺히는 나무이다.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분명히 열매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즉 열매가 있도록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율법의 형식만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과 같은 모습이다. 이런 자들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 열매없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를 받으시기 위해서이다. ?마태복음 21:23-32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권세에 대하여 질문을 하게 된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은 일에 대하여 묻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에 대한 근원을 물으시면서 그 것에 대한 답변이 있으면 자신의 권세에 대하여 말씀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인간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저주를 짊어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찬양하도록 예비하셨으며(15절) 그 어린 아이들이란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할 줄 아는 자들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21-22절 말씀은 인간이 믿음으로 구하면 모든 것을 다 응답받을 수 있다는 기도만능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는 이제 십자가의 저주를 아는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과 구원이라는 양면을 행할 수 있는 천국의 비밀을 알고 행하는 자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저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임을 믿고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그리스도로 인해 저주가 제거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란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는 것이 요구되어지는 자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열매를 맺는 것이지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 주님의 찾으시는 것은 주님 자신의 것만 유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28-31절). 이 비유의 접속사는 “그러나”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비유는 권세에 대한 비유라기 보다 진정한 열매는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한 비유이다. 두 아들 중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대로 대답은 하였으나 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대답을 했지만 뉘우친 후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자는 둘째 아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치고 살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기들 나름대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큰 아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잘 행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그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는 세리와 창기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31절).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에 의해 버림받고 멸시받는 자들이라고 예수님은 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던 자였지만 요한의 의의 도를 듣고 믿은 자가 곧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였다. 오늘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누구인가? 종교적 행위를 펼쳐 보이면서 거창한 교회 사업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예수님 안에 있는 자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듣고 믿는 자이다. 그리고 자기의 죄된 모습에 대해서 깨닫고 자기의 죄인 됨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살아지는 삶으로 고백하는 자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 ?마태복음 21:33-46 예수님은 “다시 한 비유”를 말씀하신다(33절).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는 말씀으로 이 비유는 시작되고 있다. 당시에 이런 일은 많이 있었던 것같다. 열매의 때가 되어서 주인은 종들을 농부에게 보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들을 때리기도 하였고 죽이기도 하였다. 주인은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냈으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주인은 이제 아들을 보냈다. 농부들은 상속자를 죽이면 아들의 유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아들을 포도원밖에 내어 쫓아 죽였다. 비유의 끝맺음은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이 어떻게 하겠느뇨?”라고 물으신다(40절). 제자들이 이렇게 답변한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41절). 여기서 농부는 대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이다. 그렇다면 종은 선지자들이고 아들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농부가 종과 아들을 죽인 이유가 무엇일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내어놓을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왜 유대인들에게 열매가 없는가? 그들에게는 종교적인 의식과 형식들이 무성했다. 절기도 철저히 지키고 금식도 하며 기도도 빠뜨리지 않았으며(마 6:2) 십일조도 철저히 드렸다(마 23:23). 성경도 부지런히 연구했다(요 5:39). 그럼에도 주인에게 내어놓을 열매가 없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주인과 관계없는 열매였다. 종과 아들은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농부들에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원하는 열매가 자기들에게 없기 때문에 종과 아들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하면서 열매를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 118:22이하를 인용하면서 그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즉 사람들은 자기들의 뜻과 맞지 않다고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버리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주워서 새로운 기초를 마련하시는 것이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것은 아주 요긴하게 쓴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초를 놓는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기준으로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을 어떻게 대우했느냐에 따라서 새로운 천국 백성이 정해지는 것이다. 율법을 지켰느냐 안지켰느냐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했느냐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십자가 거기서 흘린 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나의 죄를 씻는 것으로 받아들이냐 하는 의미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사는 자가 열매를 맺는 자이다. 이제 하나님은 버림받은 돌 위에 돌을 쌓아가실 것이다. 따라서 버림받은 돌 위에 쌓여지는 돌 또한 버림받은 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은 버림받은 돌 위에 세워진 돌로서 함께 버림받기를 기뻐하는 모습을 말한다. 주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기를 기뻐하는 자에게 열매가 맺혀진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버림받은 돌 위에 설 수가 없고 세상에 버림받은 자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없다. 그것을 44절이 말해준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진다는 말은 모퉁이 돌에 의해서 내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가능한 것이다. 반면에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어신다고 하는 것은 모퉁이 돌이신 주님이 세상 사람들 위에 심판주로서 오실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부딪치든지 예수님이 치든지 모두 예수님에 의해 되어지는 일이다.
22장
?마태복음 22:1-14 본문에서 21장에 말씀하신 두 가지 비유와 연결하여(“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1절)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대한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1-14절). 2절에 보니까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했다. 즉 이 비유는 천국비유이다. 구약성경에서는 구원에 대하여 종종 잔치로 표현하고 있다(참고 사26:6-9). 그런데 그 잔치는 왕의 아들을 위한 잔치이다. 즉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아들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관한 것이다. 만약 아들을 잘못 대우했다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이런 점에서 두 번째 비유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 21장에서부터 계속 유대인들을 공격하시는 것이다. 왕은 잔치를 벌여놓고 사람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청함을 받은 자들이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서 오기를 싫어하였다. 재차 종들을 보내어 청하였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할 일에 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들을 잡아서 죽이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왕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진멸하였다. 그리고는 종들을 시켜 거리에 나가서 닥치는대로 사람을 청하여 오라고 했다. 그리하니 손님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어 그를 쫓아 내었다. 비유의 결론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14절)고 맺고 있다. 우리는 이 본문과 비슷한 누가복음 14:23을 들어서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하였기 때문에 무조건 힘써서 전도하여 예배당을 채우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앞의 두 비유에서도 이미 밝혀지고 있듯이 내 집을 채우라는 것은 천국이 비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씀이다. 현재 유대인들은 천국백성으로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는 뜻이다. 아들을 위한 잔치에 누구를 초청하는 가 하는 것은 오직 임금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왕이 초청하였기에 올 수밖에 없는 것으로 여기고 그러한 은혜에 대한 고백이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올 수 있었다고 자부하는 자이다. 이 잔치는 왕의 아들을 위한 잔치이기에 결국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되었다는 것은 아들에 의해 아들의 은혜로 지금 잔치에 참여된 자이다. 반면 아들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아들을 잘못 대한 자들에 대해서는 결코 천국에 있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아들의 은혜를 아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변함없이 믿어 왔는데, 과거에 주를 위한 열심이 었는데, 모태신앙인데 하는 등의 문제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한 앞으로 잘하겠다는 각오도 중요하지 않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과거에 얼마만큼 했는가? 미래에 얼마나 잘할 것인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베푸신 은혜를 아는가 하는 것이 주님의 관심사이다. 마찬가지로 내일이 되어서도 지금 주님의 은혜를 알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이 주님이 가지시는 관심이다. 그러므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을지 모르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천국은 오직 왕의 기쁘신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로 인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할 수만 있으면 올무에 걸리게하여 죽일 빌미를 찾고 있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헛된 열심에 사로잡혀 바리새인들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헤롯당원들과 연합하여 예수님을 찾아가게 된다(15-22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로마 왕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냐고 묻는다. 만약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 선지자로서 어떻게 이방 왕에게 굴복하고 로마를 위하여 살라고 하느냐 하는 바리새인들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이고, 만약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다면 로마 정부를 대적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헤롯당원들에게 고소당할 것이었다. ?마태복음 22:15-22 예수님은 세금을 바치는 돈에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느냐고 물으신다. 당시 로마돈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기에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다. 여기 본문에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씀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가이사에게 일부 바칠 것은 바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바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37절에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6:24에 의하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도 로마 정부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오히려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로마돈에 새겨진 가이사의 형상을 말씀하시면서 ‘과연 너희들은 누구의 형상인가?’하는 것을 물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누구의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 나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바치느냐 하나님께 바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악함 때문에 나온 질문이기에(18절) 그런 일에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너희 자신이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쓰는가? 예수님이 물으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자신의 피값으로 사셨기에 나는 주님의 것으로, 주님을 위해 살고 있는가? ?마태복음 22:23-33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이제 예수님을 공격한다(23-33절). 인간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만든 조직(단체)을 가지고 계속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모여 교회라고 이름을 붙인다. 교회라고 이름을 붙이고 세워지면 하나님의 교회로 둔갑한다. 그래서 오늘날도 인간이 만든 교회라고 하는 조직을 가지고 예수님을 수없이 공격하고 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시형제 결혼법’으로 예수님께 질문한다. 한 여자가 칠형제 가정의 맏이와 결혼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었으므로 동생과 결혼하여 결국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였다가 다 죽고 부활하였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소생이나 환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먼저 책망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29절). 천국은 세상에서의 모든 혈육적인 관계가 깨어지는 나라임을 말씀하신다. 32절 서두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언급은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 때에 약속하시고 행하신 하나님은 이삭 때에도, 야곱 때에도 약속하시고 그 약속대로 성취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일하게 오늘날도 약속하신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는 그리스도시므로 그 약속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약속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곧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이며 천국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언급하고 있다(32절).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와 관계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라도 다시 살려서 상대하신다는 것이다. 신자란 바로 이 생명 안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두려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이다. 오늘도 죄인으로서의 나는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 난 자로서 하나님과 상대하며 살아가는가? ?마태복음 22:34-46 34절 이하에서 다시 율법사가 율법으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다(34-40절). 율법사는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어느 계명이 큰가를 묻는다. 율법사는 사두개인들이 대답할 수 없게 되었음을 보고 아마 큰 계명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가장 큰 계명을 지키면 모든 율법을 다 지킨 것이라는 식으로 자신들을 자랑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랑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을 동일한 차원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이 구약성경(율법과 선지자)의 골격이요 핵심이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를 온전히 이루신 것이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으로 최고의 율법은 십자가이다. 이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 물으신다(41-46절).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예상하셨다. 자신이 다윗의 자손으로 왔지만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는 혈통적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성경을 가지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공격하는 이유는 말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다윗의 시편 110:1 말씀을 인용하시는 것이다. 주(여호와)께서 내(다윗) 주(그리스도)께 말씀하셨다:“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원수를 멸하고 얻으실 영광이 다윗보다 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혈통적인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임을 이 말씀을 근거로 나타내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한 말도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이 폭로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계시해 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하는 것이 구원의 관건이다.
23장
?마태복음 23:1-12 계속적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자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공격하신다. 이것은 소위 “일곱가지 화(禍)”라고 부른다. 지도자로 자처하기를 좋아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죄악을 7가지로 요약해서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지도자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도자란 인간의 조직에서 필요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지도자요 선생은 예수님뿐이시다(10절). 인간이 어떤 조직을 결성하고 나면 그 조직을 키우는 것이 소망이 된다. 그리고 조직을 키우는 방법으로 등장하는 것이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고 그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함으로 자신이 속한 조직을 키워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모든 면에서 조직화가 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교회는 결코 조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조직은 있을 수 있으나 조직으로 교회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에는 지도자도 상전도 있으면 안된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교회의 직분조차도 계급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계급으로 나누어서 서열을 정한다. 그러나 교회는 각기 맡겨진 일의 성격에 따라 나누어진 직분일 따름이다(고전 12:1-31).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관계로 형제일 뿐이다(8-10절). 예수님에 의해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이 교회이다. 누가 누구의 위에 존재할 수 없고 다스릴 수 없다. 교회에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믿음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인데 눈에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는 지도자나 상전이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신다(2절).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모세와 같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위치에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당시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자였으나 자기의 것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끄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과 명령대로만 할 뿐이었다. 모세의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3절의 말씀도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행하고 지켜야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이미 말씀에 의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명령했으나 자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같이 움직이는 것은 그들은 같은 위치에 있는 된다는 것으로 여기고 명령하는 자로, 지도자로, 상전으로 존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말씀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큰 자가 되시는 것도 섬기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분이시며 우리의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분이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마음으로는 하나님께로서 멀어져 있다. 이것이 그들의 외식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행위는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를 하나님은 높이시고 자기를 높이는 자를 낮추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23:13-39 첫 번째 화(13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비록 천국의 문을 여는 자인척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천국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을 책망하신다. 이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서 천국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를 의로 삼아서 천국에 가고자 한다. 결국 이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막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가는 것까지 방해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13절). 오늘날 교회가 천국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와 욕심에서 나온 말이 될 때에는 화를 당한다는 것을 잊으서는 안될 것이다. 두 번째 화(15절)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방 나라에서부터 교인된 사람들을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백성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을 책망하신다. 즉 새롭게 교인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적이고 의식적인 바리새인들을 배워갔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또 하나의 바리새인으로 자라갈 뿐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교회에 들어오면 성경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신앙생활한 사람들의 모습을 배우고 있다. 기도하는 문구, 봉사하는 생활, 교회를 경영하는 방법 등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종교인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실정이다. 종교인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화(16-22절)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맹세에 관한 진리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가를 말씀한다. 산상수훈에서는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맹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성전이나 제단은 그 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종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서 일했기 때문에 성전보다는 성전의 금 제단보다는 제단의 예물을 더 강조했던 것이다. 이들은 소경된 자이다. 성전과 제단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는 소경들이다.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금과 예물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번듯하게 지은 예배당인가?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목사인가? 네 번째 화(23-24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조그마한 회향의 십일조가 더 중한 율법의 요구를 실행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가치를 전도시킨 것을 책망하신다. 율법의 요구는 의와 인과 신을 행하는 것인데 그들은 그 요구는 묵살해 버리고 십일조를 율법의 전부인 것처럼 강조한 것이다. 의와 인과 신이란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을 말한다(미 6:8). 그것은 곧 예수님 자신이다. 바리새인들은 의와 인간 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십일조 자체에 매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십일조를 했다는 것으로 율법의 전부를 지킨 것으로 여기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지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십일조를 인정하셨다는 말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24절에서 십일조를 하루살이로 비유하고 계신다. 이 말씀의 의미는 십일조라는 하나님의 율법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와 인과 신을 버리지 않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십일조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기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십일조란 누구인가? 예수님이다. 다섯 번째 화(25-26절)는 음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음식을 담는 그릇, 잔과 대접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책망한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손 씻는 유전에 대해서 나온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깨끗게 하는 것은 속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우리를 깨끗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지만 속에는 더러움으로 가득찬 자, 그들이 바로 오늘날 종교지도자라 자처하는 자들이다. 더 나아가서는 오늘날 모든 죄인들이다. 여섯 번째 화(27-28절)는 다섯 번째 화와 연관성이 있다. 이 둘은 모두 겉모습을 통해서 안을 증명하려는 태도를 책망하는 말씀이다. 즉 자신들의 외적인 모습이 모든 수치와 죄를 덮어주는 것처럼 여기고 종교를 의식화하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의식을 주님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모습이 있지 않는가? 일곱 번째 화(29-36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옛날 조상들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린 일을 말하면서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지만 결국 그들도 선지자들을 죽인 자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은 옛날 선지자들의 무덤을 가꾸면서 자신들은 선지자를 경외한다는 의로움을 보이고자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외식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가꾸고 기념하는 일을 하는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두 선지자들 가운데서 가장 큰 선지자를 죽이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비록 우리가 조상의 때에 있었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지만, 이 말은 자신들 스스로 선지자를 죽인 자의 후손임을 말하는 것이고, 그 후손 또한 지금 선지자를 죽이고 있다는 것이다(30,31). 아벨과 사가랴를 언급한 것은 성경의 창세기 처음부터 역대기 끝까지라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의 성경(구약)의 마지막 책은 역대기이다. 32절의 말씀은 조상의 죄의 양을 채우라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경고하시고 책망을 하셨지만 그들의 강퍅함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무시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획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이므로 속히 죄를 시행하고 지옥의 판결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35-36절의 말씀은 과거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죽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도를 박해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하는 말씀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부함으로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24장
?마태복음 24:1-14 드디어 예수님은 이제 성전에 대하여 공격하신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오셨을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다. 제자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같다. 아마 예수님께서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23:38)과 하셨기 때문인 것같다. 다시 예수님은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끝에 남는 것은 이 땅에 있는 것 중에서는 아무 것도 없다. 영원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가? 여기서부터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있을 일들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사실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성경을 보고 이런 일이 있으니까 종말이 된줄 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종말이란 어떤 기간을 두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를 종말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24장과 2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런 현상이 있으니까 세상 끝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런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살고 있음을 확인하라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거짓 그리스도로 와서 신자들을 미혹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런 일들이 재난의 시작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부추기며 다른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얼마나 융성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들은 숫자가 많이 모이는 교회가 하나님이 진짜 축복하시는 교회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결국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9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2-13절). 주님에 대한 가짜 사랑은 언젠가 식어질 것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끝까지 견디어 구원이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13절 말씀은 시간적인 의미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날마다 자기를 쳐서 말씀에 복종시키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신자가 복음과 함께 살기에 받는 고난이다.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어야 한다. 14절 말씀은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빠짐없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다.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된다는 것은 복음으로 사는 삶을 무시했던 모든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말씀에 의해 고난받으면서 살아갈 때에 드러나게 되는데 그 때가 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의 끝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세상의 끝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끝내실 때에 하나님의 택한 자들만 살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22,24,31절). 오직 하나님의 은총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 계시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의 관심은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나타나는가? 언제 오는가? 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구약 4,000년 신약 2,000년으로 생각해서 6,000년으로 보면서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해서 6,000년이 끝나는 안식의 때에 재림이 있고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에 의해 계산을 해서 재림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시다. ?마태복음 24:15-28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징조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징조들과 대응되는 각각의 사건들을 일일이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연대순으로 나열된 것이 아닐뿐더러 종말에 있을 모든 징조들을 빠짐없이 제시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종말이라는 기간 동안에 일어날 일반적인 현상들을 말씀하고 있고 또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 및 세상의 종말’을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이라는 평면 위에 올려놓고 동시대 사건처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말론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종말의 일들 그 자체를 알아서 피하려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님되신 그리스도 그분께 우선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 할 것이다. 종 말의 징조들은 그것들 스스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전조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15절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는 표현은 다니엘 9:27, 11:31, 12:11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말씀이다. 구약성경에서 “가증한 것”이라는 말은 우상이나 우상숭배의 대상물을 가리킨다(왕상 11:5,7; 왕하 23:13,24; 사 66:3). 또 여기서 “거룩한 곳”이란 성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선다”는 말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과 멸망당할 동안에 발생하는 성전에 대한 모독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참고 살후 2:4).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하신 말씀이다(눅 21:20/ 참고 암 1:2). 이것은 종말의 징조로 다니엘 선지자가 예언한 예언의 성취이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16절). 이는 창세기 19:17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이 또 하나의 애굽이요 소돔이다. 재앙은 신속하게 임하기 때문에 집에 있는 물건을 가져갈 수도 없을 것이고, 밭에 있는 자들은 겉옷을 가지러 갈만큼의 여유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거나 또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는 도망하기에 더욱 나쁜 상황이 될 것이다. 어느새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를 말씀하시면서 전체적인 종말에 있을 일들로 말씀하시게 된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겠고 후에도 없으리라”는 21절 말씀으로 전체적인 환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택한 자는 살아남게 된다. 이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남은 자”이다. 남은 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 남을 수 있다고 해서 남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남은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출 33:19).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이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약 2:13). 마지막 때에는 단순히 물리적인 환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조차도 추종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다. 마태복음 7:22에 보면 이러한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항상 주의 이름을 가지고 행하는 모습이기에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영을 알게 된다(요일 4:1-3).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성령께서 거하셔서 그분이 직접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에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요일 2:27). 이런 점에서 광야에 혹은 골방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할지라도 믿지 말아야 할 것이다(26절).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인가? ?마태복음 24:29-51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처음 오실 때와는 다르다. 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임한다고 했다(27,30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기 혹은 저기에 계신다는 말들은 미혹하는 소리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주의 변동에 대한 묘사는 ‘신의 현현’ 곧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서의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구약적 표현들이다(사 13:9-10; 34:4 등). 이제 더 이상 해, 달, 별 등이 존재하는 세상은 끝나고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로 현 상태의 세상(우주)의 종말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제까지 땅이 유지되어 온 것은 “땅에 있을 동안에는”(창 8:22)이라고 말씀하신 노아 언약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세상이 유지되어 온 것이지 인간의 선함 때문이 아니었다. 때문에 종말이란 죄에 대한 결과이다. 따라서 신자는 종말을 말할 때 세상이 왜 무너져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구원을 받는 자는 세상에서 선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다(31절). 택함을 입은 자는 자신이 세상의 악한 모습에 속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나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자”라는 말로 예수님 자신을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다시 심판하러 오시는 분은 다름 아닌 이 땅에서 인간의 종교에 의해 고난과 죽임을 당하신 그분이어야 한다(참고 계1:7). 32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무화과나무로 종말의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를 통해 계절을 구분하듯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징조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에 대한 확인으로 주님이 오실 줄을 알라는 것이다.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과 동일한 세대에 서 있다. 즉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것이다. 세대라는 것은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23:36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볼 때에 “이 세대”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동일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하는 것이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는 중점일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효력이 없다면 땅은 악한 세대로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종말은 반드시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5절)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36절).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 이 말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한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끝내실 권한은 하나님 아버지께 있는 것이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권한에 순종되어질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가 세상을 끝내시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인간은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에 아예 관심이 없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다”고 말씀하신다(38절). 이 말씀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거나 금하는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임박한 심판과 그 심판을 하시는 분에 대한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죄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37,39절). 즉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역시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 삶에 쏠려 있지 주님께 관심이 없는 모습이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전혀 깨닫지 못해서 노아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깨닫지 못했듯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그와 같을 것이다.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호응하고 성취될 것을 기대하는 자는 없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노아만 그 말씀에 응했듯이 약속 안에 있는 자가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자에게는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음이란 온전한 영광의 능력으로 드러날 때까지는 수난 속에 감취어져 전해지기 때문이다(9절). 그래서 사실 성도는 외로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서 예비하고 있으라”고 권고하신다. 깨어서 예비한다는 것은 아무 일도 안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종말을 아는 자는 자기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냥 맡은 일에 충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종말을 예비하는 삶이다. 깨어있다는 것도 어떤 특별한 대비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삶 속에서 주님께 충성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 때의 충성이라는 말도 일상적 삶을 팽개치고 특별히 교회에 헌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근거한 신실한 삶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신자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살전 5:4). 겉으로는 다른 세상 사람들과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확연히 구분되어 나타날 것이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나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두 사람이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의 깨어서 예비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쉽게 가르쳐 주시려고 45-51절에서 두 개의 짧은 비유를 사용하신다. 지혜있는 종과 주인, 악한 종과 주인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 둘의 차이는 한 쪽은 주인이 오지 않는 가운데서도 주인이 원하는대로 살았고, 다른 한 쪽은 주인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결국 구원받는 신자는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미 오신 것처럼 살아가는 자임을 말한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종의 삶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초점이 있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 나와 함께 늘 계신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으로 알고 무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25장
?마태복음 25:1-13 종말론 강화에서 이제 비유로 이어진다. 25장에 나오는 비유들은 예수믿는 자들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쉽게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24장에서 이미 말씀하신 비유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열처녀의 비유”가 나온다(1-13절). 여기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들러리 들이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다른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세세한 사항에 관심을 빼앗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둘 필요가 없다. 기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고해서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본문을 말씀하신 의도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단지 기름을 준비한 자와 준비하지 못한 자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기름이란 신랑이 올 때 필요하다. 신랑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삶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현재를 살아갈 때 현재로만 제한해서 살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원을 준비하는 삶으로 살라는 것이다. 즉 미래에 어떻게 될까봐 대비하는 삶이 아니라 미래에 누릴 영생을 지금 누리며 보여주는 삶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하지만 이것은 장래 일을 자기의 노력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모든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를 대비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미래를 담고 살아라는 것을 말씀한다. 결국 기름을 준비한 처녀는 신랑이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온 것처럼 여겼던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25:14-30 14-30절은 흔히들 “달란트 비유”라고 부르는 내용이다. 이 비유는 대부분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은사를 활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위한 헌신의 삶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지키면서 미래까지도 대비하겠다는 의도였다. 종은 아무리 일해도 자기 것이 없다. 자기 것도 되지도 않는 일을 주인이 없는데도 주인의 것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주인을 위한 완전한 자기 희생이고, 그러한 삶이 게으른 종에게는 어리석게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종은 주인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주인을 위한 일에는 게을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인이 왔을 때를 대비해서 받았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었던 것이다. 천국에 자기를 위한 삶은 없다. 오직 주님만을 위한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미래의 일을 지금 현재에 앞당겨서 하는 것이다. 즉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주인이 있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 사는 것처럼 사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재에 누리는 천국이다. 그러나 자기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는 게으른 종에 불과하고, 그러한 종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하는 종교행위는 단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마태복음 25:31-46 31-34절은 심판 때에 구별이 있을 것을 말씀한다. 본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단지 남을 도와주고 구제하는 행위가 심판하는 구별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는 이것이 교회의 사명인줄 알고 구제하는 일에 몰두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살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셨다. 따라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알고 그 주님을 어떻게 대우하느냐 하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따르는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지극히 작은 자란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이다. 그런 자들을 멸시하지 않고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때에 행한 것이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알지 못하게 행해진 습관 속에서 주님을 어떻게 대우했느냐 하는 것이다.
26장
?마태복음 26:1-16 이미 앞에서도 예수님은 누차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으나 여기서 다시 구체적으로 유월절에 팔려서 십자가에 죽을 것을 말씀하신 것을 마태 사도는 기록하고 있다(2절). 3절에 보면 “그 때에”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즉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으로서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먼저 명백히 밝히고 있다. 6-1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요한복음에서는 마리아)가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 14:5에서는 이것이 300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노동자의 일년치 품삯이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분노하면서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책망하였다(요한복음 12장에는 가룟 유다가 한 말로 되어 있다). 아마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에서 소자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던 것같다. 단순히 구제하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12절). 물론 우리는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알고 했는지는 본문에서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만큼 많은 돈을 들여 살 수 있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모습이었고 그것은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된 모습인 것이다.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여인의 행위 자체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그 여인의 행위를 통해서 주님을 향한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여인의 행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믿음이 참으로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확인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넘겨주기 위하여 흥정하였다. 은 30을 받았다. 믿음과 사랑을 표현한 여자와는 대조적으로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아마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에 자기가 가졌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이 일순간에 무너졌던 것같다. 이처럼 십자가는 사람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십자가는 사랑을 표현하게 하고, 동시에 증오를 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마태복음 26:17-35 17절부터 유월절 만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이 준비하였던 것은 유월절 음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심으로 약속의 성취임을 강조하신다(24절). 예수님의 몸과 피는 희생제물 그 자체였다. 이것은 기적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같다.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이 내 피다. 내 기적 가져가지 말고 내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그것 기대하지 말고 내 몸과 내 피 곧 내 자신을 가져가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에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건짐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릴 피가 언약의 피라는 것이다. 그 유월절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셨고 약속대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이 떡과 잔을 받음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는 그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죄사함을 얻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대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약속 안에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예수님 자신)들을 알고(고전 2:12)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동참된 자이기에 자기를 포기하는 삶으로 사는 것이어야 한다. 30절에 보면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갔다고 했다. 찬미했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스가랴 13:7말씀을 인용하여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고 하셨다. 즉 주님이 십자가에 이르게 될 때에는 여기에 인간은 아무도 참여할 수 없고 오히려 주님을 버려두고 도망할 뿐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제자들도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을 따라다녔다고 해서 무조건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성령님에 의해 주님께 합류되는 자가 제자요,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주님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부르시기 위하여서 이방 땅으로 여겨지는 갈릴리로 부활 후에 다시 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32절). 결국 예수님이 12제자를 택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에 도움이 되도록 동역자를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 자신과 죄인을 비교해서 죄인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인 십자가에 동참할 수 없음을 보이시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십자가! 그것은 오직 주님께서 홀로 전적으로 감당하신 일이었다. 여기 인간의 대표적인 모습, 곧 베드로를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는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지만, 베드로가 분명히 예수님을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 증표가 닭이 세 번 우는 것이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죄인들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죄인을 향해 늘 말씀하시나 우리는 죄인으로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기록된 말씀으로 주시는 성경 말씀을 우리는 무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26:36-56 예수님은 겟세마네라고 하는 동산에 이르러서 기도하시게 된다(36-46절). 그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가까운 데에 두시고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기도를 요구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할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도록 하신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되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았기에 그 뜻에 자신을 맞추기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십자가의 고난-죽음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받으실 “잔”이란 곧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하는 것이었고(사 51:17,21-23; 렘 25:15이하; 겔 23:32-34),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고난과 죽음이었다. 결국 우리의 기도도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에 자신을 던져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기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이 기도할 때 자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은 앞으로 있어야 하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할 때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곧 제자들이 잠자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47절에서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고 언급함으로 예수님을 파는 자가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있었던 12제자에게서 나왔다는 것으로 12제자도 결국 참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참 이스라엘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유다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자신이 세운 계획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가? 제자 중 하나(베드로/요 18:10)가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리자 예수님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하신다. 검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은 이 위기를 힘으로 극복해 보고자 하는 세상 방식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힘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은 힘으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희생당하시는 모습으로 이루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힘을 가진 자가 아니라 희생을 하는 자들로 모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검과 몽치라는 힘을 동원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하늘과 땅의 권세(28:18)를 잡으시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의 힘을 동원하는 교회가 교회인가? 우리 교회는 희생을 자초하는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마태복음 26:57-75 마태복음의 본문에는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려와서 심문을 받으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이 심문 받으신 경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대제사장 안나스의 심문(요 18:13,19-24) ②대제사장 가야바의 심문(마 26:57-75) ③총독 빌라도의 첫 번째 심문(마 27:1,11-14) ④헤롯 안디바의 심문(눅 23:6-12) ⑤총독 빌라도의 두 번째 심문(마 27:15-26) 이제 가야바는 산헤드린이라는 유대인 공회를 통해 예수님을 심문하게 된다. 본래 대제사장이란 단 한 사람으로 오실 메시아가 진정한 대제사장이심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자였다. 그런데 여기 두명의 대제사장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미 성전에서의 제사제도가 그 본질을 잃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가짜 대제사장이 진짜 대제사장을 심문함으로 정죄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적인 재판이었다. 이미 자기들이 확정해 놓은 선고에 절차를 합법적으로 꾸미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죄란 언제나 자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까지도 고려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두 사람의 거짓 증거는 성전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시켰다(참고 요2:19-22).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새로 짓겠다고 했다”는 거짓 증언에 대하여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거짓 증언이기에 일일이 해명하여야 할 필요성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하심으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서 속죄의 죽음을 자초하고 계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사 53:7). 이것은 곧 말씀의 성취였다. 침묵으로 일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당황한 가야바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다그친다(63절). 예수님은 “네가 말하였느니라”과 당당히 밝히셨다. 그리고는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다(64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로 죽임을 당하신다. 그런데 그분이 다시 세상에 오실 때 하나님의 아들 같이 권능의 우편에 앉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때 세상은 모두다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대제사장은 옷을 찢는 것으로 의분을 표현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사형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사람들조차도 침뱉고 주먹으로 치면서 만약 선지자라면 누가 때렸는지 맞추어 보라고 조롱하였다. 반면 이 때 베드로는 바깥 뜰에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당당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히는 예수님과는 대조적이면서, 또한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들과는 같은 부류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다. 결국 제자들도 별 수 없는 인간이요 죄인의 모습임을 드러내심으로 십자가의 자리에 오직 예수님만이 서 계셨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십자가의 길이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길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단지 참여할 뿐이다.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께 꽤 쓸모있는 제자인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도 쓸모없는 제자로 전락되고 만다. 쓸모 있는 제자란 자기가 쓸모없음을 알고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그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일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고 나자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증표까지 주셨던 그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베드로는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다. 신자란 언제나 선 줄로 생각하는 순간 도리어 넘어질까 조심하는 자이다(고전 10:12).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하는 인간의 만용은 주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께 유익을 되는 일로 생각되면 무조건 믿음을 빙자하여 주님이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리하게 일을 벌리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슬픈 영웅심에서 나온 자만감일 뿐이다. 오히려 나의 계획, 내가 추진하고자 하는 모든 것까지도 주를 위해서 포기할 줄 아는 것이 믿음이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세상을 둘로 나누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나누어지기 싫은 자는 결국 주님을 부인하는 쪽에 서게 된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 안에서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고 사는 자는 세상에서 나누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삶이다.
27장
?마태복음 27:1-26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든 일을 아주 급하게 처리하느라 새벽에 이 일을 의논하였다. 보다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빌라도에게 넘겨주게 된다. 3-10절에 보면 유다에 대한 기사로 잠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것조차도 말씀의 성취라는 강조점에 있다(9절). 죄가 없는 예수님이 정죄 되는 것을 본 가룟 유다는 스스로 뉘우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된다. 뉘우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뉘우침의 방향이 주님을 향해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회개란, 단순히 자신의 죄악된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러한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의 의미를 알고 거기에 계속적으로 자신을 못박는 작업을 말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자신이 예수님을 팔았던 죄까지 포함하는 속죄의 죽음인줄을 몰랐던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그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다. 율법은 죄악으로 부정하게 규정된 돈을 여호와께 가져오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신23:18).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유다의 돈을 부정한 돈으로 규정함으로 상대적으로 예수님의 무죄함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다. 이들은 아마 이러한 선행으로 자기들의 마음과 손을 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밭은 피밭이라고 불려지게 된다. 결국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시고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알리시고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주님의 피 값을 자기들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김으로서 예수님과 유대인의 관계가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11-26절에서 빌라도의 심문을 기록하고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다. 아마 이렇게 물은 것은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하여 그가 스스로를 왕이라고 자칭하였으며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거짓으로 고소하였기 때문인 것같다(눅 23:1-2). 그러나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죄하는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었다(막 15:10).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를 가지고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바라바를 내세우는 수를 썼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총독의 명예와 권력, 그것으로 인해 누리고 있는 영화를 앞서지는 못했다.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빌라도를 정죄하나 기실 우리 자신들이 빌라도와 같은 모습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순간의 세상적 권력과 명예, 혹은 자기 자존심을 위해 예수님을 버리는 일이 우리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기 떄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놓아 달라는 요청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바보다 더 가치없고 인기없는 분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만다. 최후의 순간까지 철저하게 인간들에 의해서 버림을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수님이었지만 인간들의 선택은 바라바였던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유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죄악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예수님(하나님)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종교에 의해서만 아니라 정치에 의해서, 유대인들에 의해서만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한 총체적인 세상의 것과 세상에 의해서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었다. 이제 인간들 스스로 예수를 선택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인간은 예수를 버리는 존재로 살게 된다.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라보시는 그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믿지 못하고 멸망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이다. 그러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26절)고 함으로 약속의 성취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마태복음 27:27-56 예수님은 빌라도의 책임 하에서 죄인으로 정죄되어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졌다.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관정 안(브라이도리온)으로 데리고 들어가 희롱하기 시작한다. 빌라도의 권력 안에서 사형받도록 넘겨졌기에 이제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을 희롱해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세상의 권력 안에서 하나님의 권력이 희롱당하게 된다. 그 희롱은 예수께서 왕이시라는 점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들은 침을 뱉고 희롱하는 절을 하였으며, 주먹으로 때리고 채찍질 하였다. 가시로 만든 면류관은 왕관이었고, 홍포(자색 옷)는 왕복이었고, 갈대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홀’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왕이라면 왕다운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에 의한 고난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 것으로 여겼다(사53:4). 32절에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한 일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억지로 지는 십자가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가지고 교회 일을 억지로라도 하면 은혜가 있다고 가르치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십자가란 우리 스스로가 질 수 있다고 해서 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기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오히려 시몬이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는 것은, 십자가란 주님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것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사형장은 “골고다”(해골의 곳)라고 하는 곳이었다. 당시 마취의 방법으로 쓰이던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었으나 예수님은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고난을 뚜렷한 의식 속에서 받으시고자 하셨다. 로마의 사형법에 의해 예수님은 죽으셨으나 그 의미는 다른 것이었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신 21:23)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한 죄값이라고 생각했다. 실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계셨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른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킨 일”이었다(사 53:6).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일(35절/ 시 22:18), 좌우편의 강도 중에 있어서 범죄자 중의 하나로 헤아림을 입게 되는 일(38절/ 사 53:12), 심지어는 십자가 곁에서 조롱하는 일까지(39-40절/ 시 22:7-8)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상황들을 상세히 묘사함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들이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음이 밝혀진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죄패를 붙였다. 요한복음 19:20에 의하면 히브리와 로마, 헬라의 말로 기록되었다. 당시로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주님은 인간의 모든 왕을 거부하는 만왕의 왕이셨다. 세상의 왕은 자기의 명예를 드러내고 자기의 살아 있음을 통해 다스리나 예수님은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법칙을 여기서 분명히 세우셨다. 이제는 오직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 자만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40절)는 말은 애초에 예수님께 시험했던 마귀의 유혹이었다. 이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은 십자가를 거부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마귀는 끝까지 십자가 없는 예수님이기를 원했다(42절).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셨기에 십자가를 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였다(고전1:18).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구원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나의 구원관을 버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관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인가? 44절에서 함께 못박힌 두 강도들도 예수를 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 23:39-43에서는 한편 강도는 주님을 믿었다고 했다. 아마 한편 강도는 다른 강도와 같이 처음에는 저주했다가 나중에 돌이켜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태는 두 강도가 같이 욕했다고 처음 상태를 말함으로 제자들도 다 버린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 어떤 인간도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 15:25에 의하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때가 (로마시간으로) 구시라고 했다. 그런데 제 육시로부터 구시(우리의 시간으로 낮12시에서 오후3시)까지 어두움이 임했다(44-45절).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3시간 후부터 3시간동안 어두움이 임했다. 구약의 선지서들에서 어둠은 하나님의 진노와 임박한 멸망에 대한 징조를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암 8:9; 욜 2:31; 참고 마24:29), 대낮에 어둠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을 거부하신다는 의미이다. 실로 시편 22:1에서 다윗이 이스라엘로부터 버림을 받아 절규했던 그 절규를 예수님이 토해냄으로 이스라엘로 버림받은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심판을 대신해서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심판 때에 일어날 일들을 앞당겨 보여주시는 것이다. 50절에 보면 예수께서 소리지르신 후 영혼이 떠나가셨다고 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생겨난 당시의 정황들을 여기서 세 가지로 증거하고 있다. ①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51절). 흔히 말하듯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막혔던 관계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휘장이 찢어지기 전이나 후나 동일하게 하나님께 함부러 죄인이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정한 장소로서의 성전은 아무 의미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히 10:20)이 열린 것이다. 이런 점에서 히브리서는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4:6). 그러므로 하나님은 애초부터 어떤 장소에 국한 된 성전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전히 드러난 것이다. ②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려 자던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다(51-53절). 이때 깨어난 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인 일이 있었다. 이는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부활하여 거룩한 성으로 들어갈 것을 앞당겨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③백부장과 그 함께 한 자들이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했다(54절). 누가복음 23:47-49에 의하면 이 백부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이 정녕 의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도 유대인들은 조롱하고 비난하였으나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모습으로 양분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란 참 이스라엘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참고 8:11).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 곁에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다고 증언함으로 십자가 사건에 대한 분명한 목격자들을 내세우고 있다. ?마태복음 27:57-66 57-61절에서는 예수님의 장사(葬事)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그의 가족이나 12제자들에 의해 되어지지 아니하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해 되어진다. 그는 공회원이었으나(막 15:43)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부자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57절). 이렇게 함으로 일찍이 이사야가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라고 한 예언대로 성취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사에 니고데모도 동참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요 19:39). 62-66절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예수님께서 3일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 혹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친 후에 부활이라고 조작할 것을 대비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지키는 파숫군을 세워 굳게 하였다. 저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처단함으로써 이단(異端)에 대한 모든 경계를 분명히 하였을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확실히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요, 율법의 승리인줄 알았다. 그러나 인간의 승리는 실상 패배였다. 오히려 예수님을 살해한 인간들이 죄인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이 의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거스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획한대로 이루어졌고 내가 기도한대로 일이 성사되었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28장
?마태복음 28:1-15 27장에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해 기존의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보여주었다. 28장은 부활의 차원에서 새로운 이스라엘과 새언약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결별하고 이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든 상관없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인정하시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제거함으로 자기들의 종교로 하나님께 충성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종교에 의해 죽임당하신 예수님을 의(義)로 인정하셨다. 이것이 부활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케 하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가져오신 사건이다(엡1:10;골1:13-20). 따라서 이제부터 모든 권세는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18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이 권세를 가진 자이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시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계 20:4). 그러기에 신자들은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무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왔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천사가 전하여준 부활에 대한 소식과 빈 무덤을 보고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될 수밖에 없었다(8절).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갈 것을 전하도록 하셨다(10절).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많은 사람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갈릴리로 가신다. 그것은 이미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만나시기로 하신 약속 때문이었다(26:32). 예수님은 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려고 하시는가? 갈릴리는 대부분의 제자들 고향이었다. 다시 그들을 거기서 부르심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의 처음 상태로 되돌리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부름을 받는 자가 참 제자임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부활의 세계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가 이방의 중심이 되어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는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무덤을 지키던 파수군은 모든 일들을 대제사장에게 보고하였다. 대제사장들은 군병들을 많은 돈으로 매수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을 유포하도록 하였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성령님이 오신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28:16-20 16절 이하에 보면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새로운 권세자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활의 세계 안에 있는 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 말씀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라는 말씀이다. 이제까지 누가 이 구속사역을 이루셨는가? 오직 예수님 홀로 이루셨다. 어떤 인간도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예수님 홀로 다 감당하신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부활의 세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맡겨진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님의 일에 동참된 것이다. 이렇게 동참된 자와 함께 예수님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이 말씀이 단순히 자기 백성들을 무조건 보호하신다는 차원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항상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시겠다는 의미이다. 그 십자가의 길에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란 곧 고난과 죽음이 동반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정리 창세기 3:15에서 약속이 주어진 이후 인간은 그 약속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야 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족보로 시작하고 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마태복음의 첫 선언은 약속된 메시아임을 말하면서 동시에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이었다(1:1). 그러나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마리아에게서 나셨기에 실제적으로는 요셉과 관련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것은 인간 왕을 부정하는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언약의 백성과 비언약 백성이 구분된다(1:21). “임마누엘”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1:23).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누가 경배하느냐에 따라서 이스라엘과 애굽(이방)이 판가름 난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옴으로 기존의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2:15).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만이 참 이스라엘이다.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로써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겨내셨다(4:1-11). 오히려 이스라엘은 헤롯의 시녀노릇을 함으로 여인의 후손을 제거하려는 마귀의 일에 동참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으며, 스스로 주님을 영접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으로 칭함받게 될 것이다(2:23). 그곳은 이방지역의 언저리로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다(4:15-16;26:32;28:7,10;사9:1-2).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었다(3:15). 그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이다. 즉 십자가를 지는 자리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세례였다(참고 막10:38). 그러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지는 아들이다(3:17;17:5). 예수님의 잉태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이후의 모든 사역은 철저히 성령에 의해서 주도되어진다(12:28). 이후에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사역은 이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반면 마귀는 십자가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주고자 애쓴다. 예수님의 시험은 사역을 앞두고 40일의 금식기도로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통해 마귀를 정죄할 근거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령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천국이 가까웠다”(4:17)는 것은 기존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국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천국이어야 한다. 천국을 이루는 일이란 십자가밖에 없다. 그 본질적 의미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산상수훈(5-7장)을 말씀하셨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산상수훈 전체가 어떤 뜻으로 주어졌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인간은 산상수훈을 지킬려고 한다면 또 다른 율법에 완벽하게 매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 산상수훈대로 사실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그 의(義)만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은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다(롬 3:21). 그 의를 보이시기 위하여 산상수훈의 말씀 뒤에 곧장 등장하는 것이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이다(8:1-4).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리게 함으로 누가 희생되는가를 보여주신다. 그 희생 제물의 역할을 하실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짊어지시는 분이시다(8:17). 질병이란, 죄가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귀신을 부리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이미 꺾어놓으셨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그것은 곧 주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었고 새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9:15-17). 그 새 시대는 죽은 자를 살려서 산 자와 상대하시는 언약의 하나님(22:32)이 다스리시는 나라임을 밝히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다(9:23-25). 12제자를 파송하심으로 세상의 악함을 보게 하시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알게 하시는 것이다(10장). 이렇게 주님의 일에 동참된 자가 예수님의 모친이요, 형제며, 자매들이다(12:49-50). 그러나 주님에 의해 부름받지 않은 자는 결코 주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령께서 하신 일을 귀신의 왕(바알세불)에 의해 되어지는 일이라고 비난하게 된다(12:22-27). 예수님은 이렇게 양분된 세상을 분명히 갈라놓기 위해서 비유를 말씀하신다(13:11-16). 그렇지만 주님을 알게 된 새 언약의 백성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천국의 성격에 대한 말씀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고 그 끝은 반드시 주님이 의도하신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죽은 다음에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밝히신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다(14:13-21). 유대인들은 말씀도 아닌 “장로들의 유전”에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15:1-9)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편에 스스로를 가담시키고 있었다. 가나안 여인의 딸이 병 고침을 받는 것을 통해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되었다. 그들의 악함이 증명되었다. 예수님에게 신기한 기적을 내 놓으라고 윽박지른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예수님이 보여줄 수 있는 표적이란 “요나의 표적” 뿐이다(16:4;12:39). 그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악하고 음란한 이 세상을 고발하는 기능이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도 몰라보고 죽일만큼 악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로 교회를 이루실 것이다. 따라서 교회란 세상의 악함을 폭로하고 천국을 보여주는 기능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어떤 세력도 심지어 음부의 권세라도 이기지 못하게 된다(16:16-19).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18:20). 그러나 교회란 주님의 용서를 아는 것에 근거하고 있는 모임이다(18장). 인간은 늘 자신의 선한행위를 통해 천국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19:16).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나타내셨다(19:26). 부자 청년은 자기의 재물 때문에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19:22). 만약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들에게는 무슨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또한 제자들의 항변이었다(19:27). 예수님의 대답은 동일했다. 영생을 상속받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어떤 상급도 추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품 삯으로 주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즉 품군들이 얼마나 일했는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베풀어지는 주인의 은혜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동일한 다스림을 받는 나라이기 때문이다(20:1-16). 그러나 굳이 세상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19:30;20:16)는 것이다. 천국에는 먼저와 나중이 없다. 그러나 세상의 방식으로 꼭 설명하자면 세상에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나라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또 한 번 예고하셔야만 했다(20:17-19). 제자들은 무지몽매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있음이 자리 다툼을 하는 것으로 폭로되었다(20:20-21).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는 것으로 자기 백성들을 섬기러 오신 분이시다(20:28). 이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셨다(21:5). 말은 전쟁에서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힘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십자가로 세워지는 나라임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셨던 것이다. 사람들은 언젠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실 왕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21:9)라고 외쳤다. 예수님이 이렇게 입성하셨다는 것은 성전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고발의 기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전의 실체가 되신, 아니 성전보다 더 큰 분이 되시는 예수님(12:6)을 알아 보지 못하고 성전에서의 장사에 정신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종교놀이에 예수님이 방해가 되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계획한다(21:33-39).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해 도전함으로(21:23) 사탄의 권세에 매여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예수님을 이것을 철저히 폭로하시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이다. 이 땅에 어느 인간이 자의로 하나님께 전적인 순종을 할 수 있는가? 더구나 목숨까지 바칠 인간은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세상과 역사를 부정하실 수밖에 없었다(24장).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대인들을 통해 적나나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일곱 가지 화(禍)를 말씀하셨다(23장). 결국 율법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에 근거하는 구원이라야 된다(22:37-40). 그러므로 의가 이 땅에 오게 되어 불의가 폭로되고 완전히 노출됨으로 인간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즉 복음의 영광은 당분간 고난 속에 감추어져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주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의 역사 형편에 맞추어서 사는 자가 아니라 늘 주인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사는 종말론적 삶을 살아간다(25장). 역사의 흐름은 예수님을 향해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존재했다. 드디어 예수님은 유월절에 맞추어 죽음을 준비하신다(26:2). 모세언약에서 주어졌던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이란 바로 이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는 “언약의 피”이다(26:28). 그 피는 어떤 죄라도 사함을 이룰 수 있는 피가 된다.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피를 믿는 자가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의 호언장담도(26:33-35), 제자들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도(26:36-38,40-41,43) 결코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에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 넘김으로 포기하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이 십자가에 넘겨지는 일로 만드신 것이었다. 이것이 옛 언약의 완성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언약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부활 역시 언약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옛 이스라엘과 결별하고 하늘과 땅을 통일케 하신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신 것이다(28:18). 새로운 이스라엘된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할 뿐이다. 예수님을 재판하여 처형하는 일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유대종교 뿐만 아니라 로마의 정치권이 합세하여 이루어내는 작품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시의 모든 인간적 세력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하고 살해당하셨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결코 긍정적인 역사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 아직도 예수님을 죽음으로 넘긴 이 세상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 세상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하게 대우하고 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분은 십자가의 길을 가신 분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분이 함께 있겠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서 주님이 함께해 주실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끌어가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십자가의 길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내는 길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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