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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와 사역자와 성도 - 정원 목사

에반젤(복음) 2021. 8. 17. 11:19
교회와 사역자와 성도 - 정원 목사




교회는 몸에 속한 교회와 머리에 속한 교회와 심장에 속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것이 훌륭하고 수준이 높고..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분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중요하다고 몸을 무시하고 건강을 무시한다면 그것도 역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겠지요.




몸에 속한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많이 추구합니다.

눈에 보이는 형통, 풍성함을 강조하지요. 긍정적인 삶, 형통함, 기적, 치유, 세상에서 빛이 되는 것. 숫자, 세계 최고. 꿈과 비전 앞의 글에서 교회에 세 가지 상태와 단계가 있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좀 더 간단히 언급하자면 전, 이상.. 지역 사회의 모본이 되는 것.. 사회사업으로 불신자의 마음 열기.. 또는 콘서트 식의 예배로 전도하기.. 대학 진학률을 높여서 불신자 끌어들이기.. 등등 과 관련이 많이 있지요.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속한 교회는 제자 훈련 계통의 교회나 선교 단체와 같은 패턴의 교회입니다.

이들은 첫 번째 형태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많이 비판을 하는 편입니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개그 콘서트에 나오는 세바스찬처럼 이들에 대해서 "천한 것들..천박해 천박해 천박해.. " 하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제자 훈련, 큐티, 묵상, 의지의 훈련, 거룩훈련, 말씀 암송, 전도 훈련, 등과 주로 관련이 있지요. 주로 지적이고 품위 있는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무식하게 부르짖을 수는 없고.. 해서 심령이 허탈하기 때문에 심리학이나 의학이나 세상의 여러 학문의 도움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각종 세미나나 강의 등 학원이 되는 경향이 있지요. 또 이것저것 많이 이수하면 인정을 받고 일등신자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합니다.

이들은 의지적 노력과 헌신을 많이 강조하는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면도 있지만 대체로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창백한 삶을 살며 힘들고 탈진하는 경향이 많이 있지요. 그래서 어둡고 우울한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장에 속한 교회는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다만 현실에서는 그리 눈에 띄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교회는 첫 번째의 형태를 가지고 있고 두 번째의 교회도 첫 번째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꽤 많은 숫자를 가지고 있지만 이 세 번째 형태의 교회는 이 땅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 아마 아주 소규모이겠지요.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체질과 사명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나에게 맞고 자신에게 끌리는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첫 번째 형태의 교회는 새신자를 얻기에 유리한 점이 있습니다.

형통하고 풍성하게 사는 것.. 이것은 사람의 본능을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다만 약점이 있다면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교제나 영적 성숙에 있어서 약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강하고 담대하고 활동적이고 유능한 면이 있지만 가까이서 살기에는 조금 피곤한 사람들입니다. 워낙 사나우니까요.




두 번째 형태의 교회는 첫 번째보다는 좀 더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단순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넘어서서 내적인 변화도 추구하지요.

그러나 이들은 영의 흐름과 움직임에 대하여 무지해서 주의 영을 거스르고 인간적인 지혜와 의지로 결단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눌리고 무기력하고 침체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말씀의 권능과 역사를 체험하지 않고 단순히 이해하고 적용하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무거운 짐인데 이들은 그러한 구조적인 약점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체험하지 않고 연구만 하는 것도 참 무서운 일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는데 그것은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이 형태의 교회는 영의 역사를 참 많이 제한하고 거스르니까요.




세 번째 형태의 교회는 순수하게 주님을 구하고 연합하기를 원합니다.

이들은 은사나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첫 번째 교회의 권능과 두 번째 교회의 의지적인 헌신을 갖추지 못하면 심하게 눌리고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몸의 교회와 머리의 교회와 심장의 교회는 교회가 있는 한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체의 구조가 그러하고 영계의 구조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도 몸에 속하는 흙이 있고 심장, 영에 속하는 생기, 숨, 하늘이 있고 머리에 속하는 빛이 있습니다. 빛의 비춤은 뇌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신앙의 패턴, 어떠한 교회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각 사람의 기질과 사명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의 사역자, 대표자가 어떠한 사람인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각 사역자는 자신의 이상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길로 가야 합니다. 신약에 있어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신약에도 여전히 사역자는 지도자입니다. 계급이나 신분상에서는 같지만 사역 면에서 주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교회의 대표자들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표와 방향을 정하고 이상을 받고 나아가야 할 사람은 사역자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선명한 사실입니다. 흔히 부흥사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담임 목사님을 잘 섬겨야 복 받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메시지가 전달해주는 여운을 아주 싫어하지만 거기에도 진리의 측면은 있습니다. 즉 사역자와 신앙의 방향이 같고 같이 공감하며 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역자나 성도나 다 같이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를 잘 대우해야한다는 그러한 면보다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사역자가 변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괴롭지만 사역자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장면이 먹고 싶으면 중국집에 가야하며 설렁탕이 먹고 싶으면 한식집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한식집에서 울면서 기도하면서 <주님. 자장면이 먹고 싶어요. 제발 먹게 해주세요.. 저 주방장의 마음을 감동 감화시켜 주세요.. 그래서 자장면을 만들고 싶은 영감으로 채워주세요..> 하고 있다면 얼마나 웃기는 것일까요? 그는 설렁탕을 먹으면서 <오, 지금은 설렁탕이지만 언젠가는 나는 이 집에서 꼭 자장면을 먹고야 말겠어.. 분명히 그런 날이 올 거야.. 벌써 많이 변화되고 있어. 봐. 지금 설렁탕을 먹고 있지만 국수 가락이 점점 자장면을 닮아가고 있잖아..> 그러고 있다면 그건 코미디겠지요..




탤런트 송혜교가 좋으면 그녀를 따라다니면 될 일이지.. 자기 애인에게 혜교는 너보다 피부가 하얘.. 그리고 눈도 청순해.. 나는 네가 언젠가는 송혜교와 같이 될 것을 믿어.. 한다면 어떨까요? 뭐 당연히 안녕히 가세요. 해야겠지요.. 누구나 자기의 길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그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강요할 수 없으며 남의 길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식으로 바뀌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참 답답하게 여기는 사람도 이런 이들입니다. 항상 자기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안 들고.. 은혜도 없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그 교회에 계속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드는 다른 교회에 가면 될 텐데 왜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는 것일까요. 또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가 하나도 없다면 본인이 신학교를 가서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차리면 되겠지요. 목회자를 위한 중보기도를 열심히 드리면서 그 사역자가 변화되기를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역자들이 다 나름대로 주님께 사로잡히기를 원하며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방향과 사명은 각자가 다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도자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역자는 교회의 방향과 목회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것이 자기에게 맞을 것 같으면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사역자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설득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사역자에게도 많은 도움과 보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방향을 잡는 것은 사역자입니다. 모세가 팔을 들고 있었을 때 아론과 훌이 그의 두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바른 방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옆에서 그들이 모자란 힘을 보충해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중보이고 협력입니다. 모세가 가만히 있었는데 그들이 모세의 손을 들게 하려고 애를 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릅니다.




나는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갈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 사역자와 교회의 방향이 달라서 괴로워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것이 왜 그리 고민이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되는데 무엇이 그리 심각한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사역자의 방향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월권입니다. 이렇게 해달라고 저렇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 사람이 무엇을 맡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역자는 마지막 날에 주님께 직접 자기의 사역에 대하여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심판하는 분은 주님이시지 성도가 아닙니다. 또한 사역자는 자기의 사역에 대하여 간섭을 받는다면 거기에서 더 이상 사역을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깨어진 관계입니다.




오래 전 어떤 교회에서 집회 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집회를 하지 않은지 1년이 되어 가지만 그 때는 많이 초청이 오면 그 중에 한번 정도 나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간곡하게 초청을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아는 분과의 인간관계를 빌미로 간곡하게 요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간절하게 원했지만 장로님들이 다 시큰둥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런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인격과 의지를 중시하는 사역을 합니다. 은사적인 역사는 의지와 상관없이 거칠고 강하게 이루어지지만 내면의 주님과의 관계성은 사모함과 간절함의 정도에 비례해서 주님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되지 않은 이들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100명 중에 한 사람이 반대한다 해도 집회를 하지 않습니다. 100명의 성도들중 한 사람이 반대한다해도 나는 그 교회를 떠나는 스타일입니다. 한 사람이 반대하고 99명이 조용히 있다면 그 99명은 일종의 묵시적 동조이기 때문에 같이 반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에게서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목사님이 장로님들과의 관계가 아주 안 좋았고 교회에서 사임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내가 그 교회에 가서 회개의 역사를 일으켜서 그 장로님들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는 주님의 영이 임하실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거절을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사임을 하게 되었으니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나는 그 목사님께 축하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자기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한 명이 모이든 두 명이 모이든 목회자와 성도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눈치보고 견제하고 서로 판단하는 관계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사역자는 그러한 곳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쫓겨나서 생존이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굶어죽는 것이 두렵다면 애당초 사역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한 마음이 되어야 하고 상호간에 사랑과 신뢰와 그리움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주님의 영의 풍성함이 교회에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사역자가 교회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 불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이 세우신 방법입니다. 주님은 사역자에게 그의 사역 방향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에게 맞는 방향의 사역을 찾아서 가야 합니다. 대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 수강 신청을 하는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는 강의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문화사를 듣고 싶다면 그 강의를 신청해야지 철학사를 강의하는 교수에게 자기의 원하는 강의를 신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성도들이 도무지 마음에 맞는 사역자나 교회를 찾을 수 없다면 어쩌면 그는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역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 자기의 비전대로 되던 아니면 그것이 착각에 지나지 않아서 나중에 대가를 지불하게 되던 그것은 본인이 선택하고 주님 앞에서 판단을 받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땅에 많은 교회가 있고 많은 사역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 어떤 사역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기에게 맞는 사역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목회를 할 때 나의 설교에 대해서 불평하는 이들이 있으면 그들을 불러서 축복하며 말했습니다. <집사님.. 세상에 좋은 교회들, 집사님들에게 잘 맞는 교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들에게 맞는 교회에 가서 기쁘고 즐겁게 봉사한다면 그것은 아주 축복스러운 일이지요. 이 교회로 가나 저 교회로 가나 개교회 입장에서는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고 플러스가 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것 아닙니까? 게다가 본인에 맞게 즐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더 유익이 되겠지요.




사역자와 성도의 만남은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도를 기다리다 보면 주님이 원하심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나게도 되고 헤어지게도 됩니다. 그러므로 만남과 헤어짐은 주님께 맡겨야 하는 문제이며 그러한 것을 집착하여 인위적으로 강요하거나 의지하거나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좋은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역자는 주님이 사람을 보내시면 그들을 돕고 그렇지 않으면 주님과 같이 놀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자신이 살든 죽든 신경을 꺼야 합니다. 그것이 편한 삶입니다. 나는 사역자들이 성도들의 방향이나 사명이나 상태를 보고 그에 맞는 교회를 추천해주고 축복해주면서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참 바람직하고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 신앙의 패턴 때문에 서로 비방하고 다투고 하는 모습을 보거나 듣게 되는데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가 느끼기에는 참으로 의아스럽습니다.




서로 다른 부분에 대해서 각자의 주장을 하고 서로를 바꾸려고 노력하며 싸우는 것 보다 각자 헤어져서 자기에게 맞는 교회와 신앙 스타일의 사람들끼리 만나서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피곤하게 싸우고 서로 고통을 겪는지 잘 납득이 안 갑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좋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다 스타일이 다르니 서로 맞지 않으면 각자 주님을 잘 모시고 즐겁게 신앙생활을 잘 하라고 서로 축복해주고 즐거운 마음으로 헤어지면 좋지 않을까요.. 한국 교회에서는 상대의 스타일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것만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유와 집착이 심하기 때문에 자신을 떠나면 배반이라고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헤어짐은 항상 상처와 아픔을 낳게 되지요.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즐거운 헤어짐, 은혜스러운 분리를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로 다른 영역에 있어야할 사람이 가까이 있음으로서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으니까요.




내 경우에도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정이 많이 들었으니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나 자신의 삶과 신앙을 자신이 선택해야 하고 그것은 당연한 권리니까요. 억지로 있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항상 가는 이를 잡지 않고 오는 이를 막지 않는데 그것이 영계의 법칙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전과 이상, 목표와 방향이 같은 사람이 같이 걸어가는 것. 그것은 행복입니다. 그러나 맞지 않은 이들이 같이 걸어가면 그것은 피차에 비극이므로 서로 웃으면서 헤어지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나 역시 과거의 많은 순간에 방향이 맞지 않은 이들과 많이 걸어갔었고 그것은 참으로 고생에 비해서 열매도 없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 나의 삶에서 방향이 맞지 않는 이들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후 나는 정말 풍성한 자유와 열매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동일한 진리가 될 것입니다.




나는 오래 전 어떤 기도원에서 한 동안 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원 원장의 철학은 메시지를 통해서 사람을 개 패듯 패서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온갖 기적적인 치유도 많이 일으키고 입신 전문.. 하는 분으로 하도 사람들이 소개해서 가 보았는데 나는 체질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왔지요. 그렇게 패고 싶으면 맞고 싶은 사람이나 패라는 것이지요. 나는 맞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으니까요.. 나의 생각으로는 주님께서 심판 날에 왜 그 기도원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지 않았느냐.. 그래야 자아가 깨지지.. 하시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나는 천국이란 사랑의 공간이지 살벌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잘 가르치고 인도해서 주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접촉하도록 훈련하고 교제하는 곳이 아닐까요.. 그리고 사역자의 감동과 사명을 따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곳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자신의 방향과 사명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역자들은 이 또한 비극일 것입니다. 하나의 방향을 잡지 못하면 끝없이 이 세미나 저 세미나를 다니면서 적용하느라고 성도들을 헛갈리게 할 테니까요.

그러므로 자신의 사명과 비전과 방향이 분명해진 후에 비로소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입니다.




사역자와 성도들은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방향을 향해서 같이 기도하고 걸어가는 동역자들입니다.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나의 비전으로 뭉쳐서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풍성한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숫자적으로는 거의 찾기 어렵지만 나는 심장에 속한 교회가 이 땅에 좀 더 많이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교회들도 다 의미가 있고 존재가치가 있지만 그러나 이 땅에서 주님 자신을 구하며 그분의 사랑에 굶주리고 찾는 이들을 채워주는 교회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러한 교회들도 좀 많아져야 균형이 잡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이겠지요. 사역자, 성도 모든 이들이 오직 주님을 그리워하고 추구하고 나누며 그래서 모든 모임과 집회가 형식과 격식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주님의 사랑과 임재 속에서 울고 웃으며 기뻐하고 행복을 누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부디 그러한 교회가 많이 세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사역자가 일어나도록 많은 기도가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그러한 교회와 만남을 원하시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인도하시고 이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원하심을 이루실 것입니다.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