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 자신을 위하여
1.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시조인 예수는 ‘여호와(이스라엘의 하나님)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 인명, 즉 여호수와의 그리스어 음역(音譯)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좀더 정확하게는 ‘예수스’ 입니다. 또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 이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류 영혼의 구원과 대속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 땅을 골라 세상에 오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33세라는 짧은 생애를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원형을 남겨놓으신 성자입니다. 그분이 행하신 진리의 말씀과 행적이 기록된 책을 가리켜 우리는 성경(Bible)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책은 우리 인류에게 인쇄술의 혜택이 주어진 이래로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보급되어 읽혀온 복음의 책으로 꼽힙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언제 어디서고 ‘예수’ 라는 이름을 무심결에 슬쩍 한번 떠올리기만 해도 그 순간에 당장 머리가 맑아지며 기분이 좋아집니다. 기운이 없다가도 한 순간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힘이 생겨남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내가 실제로 겪고 있는 이 놀랍고도 신기한 축복의 체험을 젊은이들에게 나눠주고 싶은 욕구 하나 때문에 지금 어렵사리 쪼그리고 앉아서 이 책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얼마나 크게 달라지는가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책을 수십 권 써도 다 담지 못할 것입니다만, 나는 내 자신의 존재가 바로 그 살아 있는 증거물이라는 생각을 하루에 열 번도 더 하면서 삽니다. 성경말씀 안에는 우리 인간이 극도의 혼탁과 불안으로 가득한, 온갖 함정과 수렁투성이인 이 위험한 세상을 과연 어떻게 옳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모든 안전한 길과 방법들이 마치 밝은 횃불처럼 명쾌한 해답으로 낱낱이 다 제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예수를 잘 믿는 ‘작은 예수’ 들을 따라 성경에 적힌 말씀대로 예수가 가신 방식의 길을 조금씩 살펴나가다 보면 말씀이 뜻하는 바 언젠가는 기필코 실제 예수의 참모습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2.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뜻 생각하기에 머리가 참 명석해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명석한 머리만 잘 쓴다면 나름대로 완벽한 삶을 살 수 있을 듯이 보입니다. 또 우리 인간은 세상에 날 때부터 천성이 착하여 마음만 잘 먹으면 평생 동안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내내 착한 삶을 살 수 있을 듯이 여겨집니다. ‘인간은 머리가 명석하다‧‧‧, 그리고 인간은 본성이 착하다‧‧‧.’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인간은 머리가 명석하고, 또 착하기도 하다는 얘기가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머리가 명석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머리로 좋은 일과 더불어 나쁜 일도 항상 함께 생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원죄(原罪)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아무리 명석한 두뇌로 착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그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죄를 생각하고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원죄란 요즘말로 해서 ‘죄 성립 이전의 예비적 죄성’ 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모든 인간은 그 죄성을 그냥 그렇게 예비적 죄성으로 잠재, 잠복시켜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일상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지 끊임없이 그것을 야금야금, 꼼지락꼼지락 실천하기까지 합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학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직업의 여하를 막론하고,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거기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정체이자 인간된 숙명적 한계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는 유일의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면서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삶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 합당한 삶의 실제 모델까지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기독교의 이 교리는 그와 비슷한 다른 어느 종교의 교리보다 우위합니다.
3.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복은 하늘에서 별똥별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산신령에게 하듯 교회에서 무작정 복을 빈다고 쏟아지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에서 복 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세상이라고 하는 인간 사회의 우회경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챙겨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대개 ‘우연’ 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로 싸여 있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모든 우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사실, 그리고 세상에는 이유 없는 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지금쯤 눈치채셨을 줄 압니다.
복을 받고 싶으면 복을 빌기 이전에 우선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 자격과 순서라고 하는 게 바로 예수의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지요. 복을 받고 싶으면 복부터 빌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우선 순종하고 볼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내 주위의 누군가들을 매개체로 해서 복을 베풀어주십니다. 복의 발생현장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쉬운 예로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긍정적이 됩니다. 긍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보다 복 받을 확률이 현저히 높습니다. 이웃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온유해집니다. 온유한 사람은 조급하고 과격한 사람에 비해 복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웃에게 호감을 주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너그러워집니다. 너그러운 사람은 복 받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웃에게 덕을 베풀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선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선해지면 선행도 많이 하게 됩니다. 선행은 그 자체가 바로 복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화(禍)도 비켜갑니다. 좋은 이웃들이 내 편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에 성공도 빨리하게 됩니다. 이웃들이 돕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바로 인복입니다.
복은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땅 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맨발로 밟고 가신 바로 이 땅! 우리의 땅 위에 있습니다.
4. 예수를 믿으면 매사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어쩌면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미 여러분이 수긍을 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슨 일이든지 자신감을 갖고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용기와 힘’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용기와 힘의 원천이십니다.
널리 알려진 한 예로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을 이끌던 반쪽 대통령 링컨은 남부지역의 산업구조상 노예해방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 남군과의 지루한 전쟁을 치르면서 날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의 엄청난 피를 담보로 하여 지금 저희가 치르는 이 전쟁의 목적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늘 깨우치게 해주소서. 피를 흘리고서라도 저희의 뜻을 세움이 옳다 하신다면, 그렇다면 기필코 저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소서. 저희는 오로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대륙에서 실현하는 데 쓰임 받는 당신의 도구일 뿐이오이다‧‧‧.”
하나님께서는 산업구조를 앞세운 남부인들의 타산적인 인종차별 실리보다는 실리와 피부색의 편견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고자 한 북군 지도자의 손을 결국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간절히 기도하는 의로운 사람의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남군을 밀어붙이고 북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을 굳게 믿고 싸운 신심 독실한 링컨의 자신감이 그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5. 예수를 믿으면 부지런해집니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다가 맨손으로 상경하여 온갖 고생을 한 끝에 마침내 우리 나라 최대의 기업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 정주영 회장 같은 이는 평생을 초인적인 근면생활로 일관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고령에 이른 지금도 서울 장안의 누구보다도 새벽 일찍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고 하지요?
옛 격언에 ‘부지런은 반복(半福)’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부지런하기만 하면 이미 하늘의 복을 절반은 확보한 셈이라는 뜻입니다.
서양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더 잡는다!’ 이런 근면의 가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특별히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대개 밤늦게 자정 넘겨 잠자리에 들기가 일쑤고, 아침에는 해가 중천에 닿을 때까지 늦잠 자기를 즐깁니다.
원래 인간은 일몰과 함께 일찍 잠자도록 되어 있고, 일출과 함께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이란 저녁에 일찍 잠들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의 차이, 당장에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나면 그 생애의 성취도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부지런한 생활습관은 젊어서부터 몸에 배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나도 부지런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라도 부지런해집니다. 게으른 사람들의 특성은 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제 아무리 게을렀던 사람도 자연히 부지런한 사람이 됩니다. 삶의 목표가 뚜렷해지면서 근면해야 될 이유가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으로 일생을 보다 값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새벽기도의 축복도 당장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6.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평생동안 예수를 잘 믿어온 분들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 하나같이 편협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마음들이 다 넓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곤 하지요. 남의 과실이나 부족한 점은 못 본 듯 그냥 슬쩍 넘어가 주고, 남의 본의 아닌 실수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경우라 할지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줍니다. 마음이 넓다는 것은 바로 마음이 너그럽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너그럽게 되는 일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식당에 가 보세요. 종업원의 실수에 대해 너그러운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자동차들이 밀리는 거리에 나가 보세요. 이웃 차량의 운전자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그래서 대학교수도 운전대만 잡으면 입술에 욕설이 묻는다지 않습니까? 각박한 한세상을 살면서 너그러운 마음씨를 지닌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신실한 기독신앙을 통해 제 마음의 넓이를 무한히 넓혀서 사는 부러운 마음 부자들이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참 많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정신을 배우고, 기도를 통해 예수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자기수양을 해 왔기에 비로소 그 일이 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져 저는 그런 분들을 항상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 전체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모자라 결국 죄에 찌들고 성급하고 교만하고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우리의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도 십자가에 내걸어 바치셨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늘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마음을 넓히는 그 일은 혼자서는 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공동체적인 삶의 실천을 거듭거듭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그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다 보면 이 세상에는 분노할 일들보다 감사할 일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렇게 감사하면서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 속의 잘못보다는 내 자신 속의 잘못이 훨씬 더 많다는 것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넓히는 일이란 자신의 본래 모습을 하나씩 몰아내고 대신 그곳에 예수의 말씀과 정신을 차곡차곡 채워 넣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려면 예수를 잘 믿는 방법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7. 예수를 믿으면 성격이 밝아집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선물 가운데 가장 자신 있게 약속할 수 있는, 그래서 가장 확실한 대표적인 은혜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늘 외롭고 어둡고 음울하고 소극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사람의 성격이 금세 대낮같이 밝아집니다. 어둑어둑한 음지의 그늘 속에서 마지못해 사는 듯하던 사람이 햇살 바른 양지로 나와 즐거운 마음으로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일까요?
첫째, 예수를 믿으면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삶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사랑 아래 주어진 놀라운 은혜인가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그 깨달음을 통해 족쇄처럼 굳게 채워져 있던 자기 질곡의 굴레를 벗어던지게 됩니다. 지금껏 목표도 목적도 없이 비관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 생명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 찬양하는 밝은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둘째, 예수를 믿으면 교회사회라고 하는 공동체 생활에 몸담게 되는데 그곳은 빈부 차별 없이, 신분 차별 없이, 학벌 차별 없이 대등하고도 평등한 인간 가치의 기준 아래 우애와 포용과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셋째, 예수를 믿으면 불평과 불만으로만 가득 차 있던 칙칙한 마음이 깨끗이 비워지고 대신 거기에 무한한 감사와 축복의 맑은 샘물이 가득 고이게 됩니다. 세상을 둘러보나 자기 자신의 형편을 둘러보나 온통 감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어 자기 스스로가 깜짝 놀라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앞 못 보던 장님이 어느 날 아침 새롭게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은 놀라운 감동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훈련이야말로 우리가 믿음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훈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물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긍정적인 시각의 지혜인 셈인데 사람이 긍정적인 마음 씀씀이를 갖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자연히 성격도 따라서 밝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마음의 깊은 상처 한 가지씩을 가지고 세상을 살기가 쉽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성격을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요. 누구도 이해해 주려 하지 않는 자기만의 그 상처는 예수의 사랑, 예수의 말씀, 예수의 보혈로써만 치유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근원적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8. 예수를 믿으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 아는 사람을 평할 때 “그 사람 아주 인간이 됐어!” 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칭찬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세상을 살다 보면 그 반대의 씁쓸한 경우도 가끔씩 만납니다. 그럴 때 흔히 혼잣말처럼 “그 친구 좀 덜 된 인간 아냐?” 하고 무의식중에 뇌까리게 되지요. 저마다 귀한 인격체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을 그렇게 ‘된 사람’ 과 ‘덜 된 사람’으로 쉽사리 이분하는 습관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 터이나 복잡한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엉켜 살다 보면 그처럼 순간적인 감정이나 직관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단순하게 평가하기가 참 쉽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된 사람’ 은 어떤 사람이며 또 ‘덜 된 사람’ 은 과연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지를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되고 덜 되고를 재는 기준은 참으로 여러 각도에서 가능할 수 있겠습니다만, 가장 흔히 적용되는 기준시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심성을 지닌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범사에 감사,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원래 맨몸과 맨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게다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하고 무능, 무지한 갓난아기로 태어납니다. 스스로 앉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눈을 떠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먹지도 못합니다. 누군가가 하나부터 열까지를 다 챙겨서 보살펴주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일차적으로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 아래 조금씩 성장을 합니다. 성장을 하는 과정은 물론이려니와 성장을 다 하고 난 후에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직간접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가르쳐주니 지식을 얻게 되고, 누군가가 양식을 생산해주니 밥을 먹습니다. 누군가가 집을 지어 주니 춥지 않게 살 수 있고, 누군가가 차를 만들어주니 차를 타고 다닙니다. 누군가가 병을 고쳐 주니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누군가가 수돗물을 대주니 물을 먹고삽니다. 그 모두를 일일이 따져 볼 필요조차 없지요.
생각하면 참으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고맙지 아니한 것이 정말 단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피를 나눈 형제나 같은 길을 함께 가는 친구나 옷깃 스치는 이웃이나 또는 이름 모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내게는 한없이 고맙고 또 고마운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감사한 마음을 늘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 생명 자체를 비롯해서 그 모든 복잡한 생존 조건을 다 허락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섭리를 잊고 살 때는 더욱 많습니다. 그러니 ‘된 사람’ 과 ‘덜 된 사람’ 의 차이가 감사할 줄 아는 심성 여부로 판가름이 날 수밖에 없지요. 예수를 믿으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첫 번째로 배우게 되는 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귀한 심성입니다. 신분이 높아져도 감사를 모르면 ‘된 인간’ 이 아니지요.
9. 예수를 믿으면 효자가 됩니다.
날이 갈수록 사회환경이 번다해지고 세상풍조가 이기적이 되어감으로 인해 우리는 코앞의 일상에 쫓기기 바빠 자칫 우리를 낳아 길러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잊고 살기가 쉽습니다. 바꿔 말하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보다 훨씬 더 급하고 재미난 여러 가지 일들이 얼마든지 많은 세상이 되어 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부모에게 효도를 좀 해야지 하는 생각은 누구나 갖고 있으나 그 실천율이 낮다는 데 문제가 있겠지요. 불효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나는 봅니다. 아예 효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생각은 하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 또한 불효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습니다. 부모가 안 계시면 한 시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릴 적에 비해 사람이 장성하게 되면 부모님의 필요성과 고마움을 어릴 적처럼 그렇게 절실히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점 말입니다. 모든 불효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원인의 뿌리를 살펴보면 그것이 일종의 교만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불효자식도 효자가 됩니다. 그 이치는 예수사상에 접근하는 일 자체가 바로 그 교만한 마음을 우선 다소곳이 접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부모를 잘 섬겨야 된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말씀으로 이미 쓰여져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예수를 믿게 되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교만 대신 자기가 받은 모든 은혜를 낱낱이 챙겨 감사할 줄 아는 심성이 자연스럽게 싹트게 마련입니다. 세상의 은혜 가운데 부모님의 은혜만큼 큰 은혜는 달리 없습니다. 효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부모님을 편안하고 기쁘게 잘 섬기는 일이 있고 그리고 다른 또 하나는 부모님이 소망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이 건강하고 훌륭한 사회인으로 잘 성장해 가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이 두 가지 과제가 순조롭게 잘 풀려 나간다는 사실!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자연히 깨우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믿지 않으시는 부모님께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여 그분들의 귀한 생명과 영혼을 구원받도록 해 드리는 일이지요. 믿지 않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스스로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그 믿음을 부모님께도 심어드릴 수 있게만 된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귀한 축복, 그보다 더 값진 효도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10. 예수를 믿으면 얼굴이 예뻐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정말로 얼굴이 예뻐집니다. 얼른 믿어지지 않지요?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근거를 가진 내 지론 중의 하나입니다. 얼굴 표정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 이미 상식처럼 되었으니 분명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얼굴과 마음과 표정은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하나로 통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음은 ‘생각’ 과 파이프라인이 직결되어 있습니다. 어쩌다 혼자서 부끄러운 생각을 하거나 겸연쩍은 일을 떠올리게 되면 우선 마음이 두근거리면서 얼굴색이 따라서 빨개지지요? 바로 그것이 손쉽게 예를 들 수 있는 좋은 증거입니다. 얼굴은 얼굴 자체가 따로 독립된 피부장기(皮膚臟器)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 생각, 정신, 사상, 신념 등과 같은 맥을 잇댄 하나의 총체적인 ‘거울’ 이라는 뜻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우선 늘 좋은 일에 대한 생각, 밝은 미래에 대한 생각, 감사한 인연에 대한 생각, 희망에 찬 삶의 생각,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에 대한 생각,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의 얼굴에나 자연히 밝은 표정이 생기고, 얼굴 근육에 혈액순환이 잘 되어 화사한 생기가 발그스레 돌게 마련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직업과도 상관없습니다. 학벌이나 재산과도 상관없습니다. 타고난 선천적 외모와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라도 지금보다는 꼭 열 배 아름다워집니다. 예수는 그 방면에서도 역시 ‘축복’ 의 이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11. 예수를 믿으면 학교성적이 올라갑니다.
예수 믿기 시작하면 바로 그때부터 학교 성적이 쑥쑥 올라갑니다. 참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를 잘 믿는 가정의 학생들을 자신과 비교하면서 한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명백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를 잘 믿어 신앙심을 가진 사람은 아이나 어른이나를 막론하고 헛된 잡생각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잡생각 하는 데 소모합니다. 특히 호기심이 많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잡생각에 빼앗기는 그 시간의 양은 교회에 다니는 시간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꼭 짚어 기억하기 바랍니다. 진정 시간관리를 잘 하고 싶은 사람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정서가 안정되어 있습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애초 어떻게 생겨났고, 자기가 걸어갈 바가 어디인가를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를 믿으면 늘 즐거운 정신상태가 됩니다.
넷째, 예수를 믿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수업을 하건 자습을 하건 시험을 치르건‧‧‧ 무엇을 하던 간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학교성적이 올라가는 그런 정도는 그야말로 문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좋은 성적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약속 받고 싶으면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12. 예수를 믿으면 좋은 친구를 사귑니다.
터키 속담에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의 친구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먼저 알아 보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란 분명히 내가 아닌 남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남을 통해 나를 평가하는 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눈입니다. ‘친구는 유유상종이다’ 하는 말도 그래서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친구관계란 한마디로 말해서 생각과 행동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청소년 시절의 교우관계는 일생의 운명을 좌우하기 쉽습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지요. 그래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나 예수 믿는 친구를 사귀면 결코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 서로 인내와 온유의 미덕을 발휘하여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보려 하기 때문에 그 우정이 손상되지 않고 오래오래 갑니다. 아름다운 우정이란 바로 그런 것이지요. 예수 안에서의 모든 인간관계가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13. 예수를 믿으면 영어를 잘 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믿으면 믿지 않는 이들에 비해 영어를 잘 할 확률이 현저히 높아집니다. 왜일까요? 근본적으로는 기독교가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를 부다(Buddha), 공자를 컨퓨셔서(Confucius)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예수를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라고 부른다거나 기독교인을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부르는 일은 이미 관용어처럼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바이블(Bible)이라 부르고 성탄절을 크리스마스(Christmas)라 흔히 부르고 있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의 예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영어문화권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영어문화의 영향권 안에서 세계화의 추세로 나아가고 있는 현상과 상관관계가 매우 깊습니다. 성탄절만 되면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즐거운 마음으로 영어로 된 크리스마스 캐롤을 자연스럽게 부릅니다.
영어를 잘 해서 손해보는 경우가 있을까요?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 손해보는 경우가 있을까요? 어차피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비좁은 국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로,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습니다. 경쟁국들보다 먼저 세계화로 나아가는 무기가 있다면 바로 폭넓은 외국어능력일 것이고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얻는 무한한 용기와 막강한 신념일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지금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기독교 복음의 중심국가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14. 예수를 믿으면 역사지식이 풍부해집니다.
몇 년 전 나는 초동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조향록 목사님과 함께 유럽 일대를 함께 여행할 행운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조 목사님은 신학자이자 역사학자, 기독교 윤리학자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사상가로도 유명하신 분입니다.
낯선 대륙의 고공을 떠다니는 기나긴 비행시간 중 목사님께서는 영국, 독일, 스위스 등 통과하는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 그 해박한 지식의 일단을 내게 구수한 말씀솜씨로 들려주셨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한 당시의 소감을 나는 ‘세계사의 거대한 산맥을 우러러보는 느낌’ 이라고 어느 글엔가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한국전쟁 때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못 받아 기초가 부실한 데다가 워낙 머리도 나빠서 역사공부를 옳게 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남들과 같은 기독교 교육조차 받을 기회를 놓치다 보니 역사에 무지한 사람으로 나이만 먹었습니다. 여간 후회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자연히 역사지식이 풍부해진다는 사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5. 예수를 믿으면 음악을 잘 하게 됩니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믿으면 누구라도 음악을 잘 하게 됩니다. 내가 만난 우리나라의 훌륭한 음악가 몇 분들도 하나같이 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잘 믿어온 이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악가 박인수 님, 지휘자 금난새 님, 피아니스트 서혜경 님들이 그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노래 잘 하는 윤형주님, 양희은 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음악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의 대부분도 거의 예외 없이 예수를 잘 믿는 분들입니다. 복음성가 가수들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나위조차 없겠지요. 음악의 역사를 빛낸 세계적인 대 음악가들도 예외 없이 어릴 적의 음악생활을 교회음악으로부터 시작했거나 교회음악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음악을 잘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음악을 잘 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왜일까요? 기독교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 찬양으로 그 형식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어릴 적부터 교회음악에 젖어 찬송과 찬양생활을 하게 되면 음악의 눈을 남들보다 빨리, 남들보다 정확하게 뜨게 됩니다. 그 좋은 증거로 어느 대학교나 음악대학을 찾아가서 학생들의 성향을 조사해 본다면 저들의 대부분이 어릴 적부터 예수를 잘 믿어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금세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을 하면 사람의 심성이 맑아집니다. 음악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성 정화를 위해 특별히 배려하신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선물을 통해 다시 그것으로 하나님께 찬송과 찬양을 되돌려 드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감사한 일이 없겠지요.
16. 예수를 믿으면 운동을 잘 합니다.
운동을 잘 하고 싶으면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모든 종류의 운동에는 힘이 듭니다. 힘이 들기 때문에 운동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하지요. 자기와의 싸움을 일컬어 우리는 흔히 의지력이라고 말하곤 합니다만, 인간의 의지력이란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막강한 힘을 보탠다고 생각해 보세요. 천군만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랍니다.
우리는 올림픽 경기 같은 중요한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경기 전에 두 손 모아 잠깐 기도를 올리고, 또 승리를 한 후에는 벅찬 감격에 겨워서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광경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훌륭한 운동선수로 성공한 이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축구 선수 차범근 씨라든지, 이영무 씨라든지, 탁구선수 현정화 씨라든지, 홍차옥 씨라든지 하는 이들이 전부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름이 일일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힘든 마라톤 선수들 가운데, 씨름 선수들 가운데, 수영 선수들 가운데, 양궁이나 사격 선수들 가운데, 태권도나 유도 선수들 가운데 그리고 위험천만한 산악 등반가들 가운데 예수를 믿고 힘을 얻어 목표 달성에 성공한 이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태릉 국가대표 훈련장에 가보면 주일마다 교회당이 꽉 차 있습니다. 물론 훌륭한 트레이너나 코치의 지도 아래서 좋은 기량을 전수 받은 힘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을 터이지만 그러나 자기와의 싸움 과정에서 하나님의 엄청난 힘을 거기에 더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비단 선수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체력단련을 위해 혼자서 운동을 하더라도 운동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힘주심을 마음속에 굳건히 다져 믿고 운동을 하게 되면 그 능률과 성과가 배가될 것은 불을 보듯 명약한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힘 주시는 예수!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예수를 믿으면 누구라도 운동을 남보다 잘 할 수 있습니다.
17. 예수를 믿으면 표정이 밝아집니다.
예수를 잘 믿는 이들의 일상적인 얼굴 표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살펴보신 일이 혹 있습니까? 그분들의 얼굴 표정을 보면 항상 밝습니다. 사람의 얼굴 표정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지요? 언제나 밝은 마음을 갖고 살기 때문에 예수 믿는 분들의 ‘거울’ 은 대체로 늘 맑고 밝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상으로 치자면 언제나 ‘날씨 맑음’ 입니다. 마음속에 쓸데없는 근심 걱정과 같은 먹구름이 끼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들의 운명이나 삶에 늘 기분 좋은 일, 재수 좋은 일, 풍요로운 일, 만족하고 풍족한 일만 생기기 때문은 결코 아니랍니다. 다만 그분들은 행운이나 불운, 기쁨이나 슬픔, 승리나 패배, 또는 넘침이나 모자람까지도 온전히 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라 생각하고 그 뜻을 헤아리며 감사히 수용하는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그런 사람을 일러 우리는 마음부자라고 부르지요. 실제로 우리 세상 주변을 둘러보면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가난하여 늘 곤고한 삶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미 오래 전, 내가 종교 따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던 시절에 목격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당시 미얀마의 건국 영웅인 아웅산 참배소 폭발테러사건이 일어나서 현장에 있던 우리나라의 고급관료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아깝게 순직한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여의도 광장에서 거국적인 합동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장례 행사장에 임시로 마련된 유족석의 구석에는 나이 어린 소녀 하나가 소복을 입고 마치 박꽃 같은 하얀 얼굴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로 졸지에 사랑하는 아빠를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행사 현장을 취재하던 방송 카메라가 문득 마이크를 소녀에게 들이대고 심경을 묻는 듯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가만한 목소리로 눈을 내리감으며 말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게‧‧‧그렇게 훌륭한 아빠를‧‧‧16년 동안이나 허락해 주신 천주님께‧‧‧감사드려요‧‧‧.”
아마 소녀는 천주교 신자였던 모양입니다. 당시 나는 집 거실의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그 중계방송을 보다 말고 자신도 몰래 벌떡 일어났던 기억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었고 순간적인 체험이긴 했지만, 이름 모를 소녀의 그 말 한마디는 내게 엄청난 충격이고 사건이었습니다. 신앙의 불가사의, 위대한 신앙의 힘이라는 것에 대해 그 사건은 내게 하나의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 불가사의한 힘에 대해서는 그 후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 기독교에 귀의하여 내 자신이 예수님을 공부하게 된 연후에야 비로소 조금씩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주변에서 그와 같은 훌륭한 믿음의 형제자매들, 참으로 존경스러운 성직자들을 실제로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슬픔마저도 감사가 됩니다. 자기의 표정은 자기가 책임지게 되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요? 밝은 표정은 밝은 세상을 만듭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18. 예수를 믿으면 교양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평가하고자 할 때 첫 번째로 꺼내 드는 저울이 있다면 아마 그것이 바로 교양 유무의 정도를 재는 저울일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그것은 똑같습니다. 교양이란 한마디로 사람의 품성 됨됨이를 뜻합니다. 그 됨됨이에 이르는 길은 이론상으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랜 세월 학문 천착을 통한 자기수양의 길이 있을 것이고, 한 가지 자기 천직에 오래도록 충실하는 과정에서 깨우치는 장인의 경지가 있을 것이며, 또는 성장과정을 통해 부모님으로부터 영향받는 가정교육의 성과 같은 것들이 그에 포함될 것입니다. 교양을 잘 쌓은 사람한테서는 그가 가만히 있는데도 인품의 향기가 온몸에서 절로 스며 나온다고 하지요? 얼마나 값지고 부러워해 마땅할 덕성인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는 그런 이들을 만나 보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양은 화려한 학벌과 별 상관이 없어 뵈기도 하고, 재물의 소유나 사회적인 지위와도 상관이 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책 한 권이라도 더 읽고자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목적도 바로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데 있어야 합니다. 만의 하나라도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목적이 오로지 ‘남보다 비교 우위의 사회적 입지를 획득하는 데 있다’ 고 한다면 한 번 뿐인 우리 귀한 인생에서 그보다 더 가엾은 천덕(賤德)이 없습니다. 공부의 목적은 교양이라는 이름의 품덕 함양을 통해 ‘사회 이웃의 향기’ 가 되는 데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이들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회의 민도(民度)가 결정됩니다. ‘교양’ 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산과 같은 은혜의 소득들 중 아주 작은 조약돌로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19. 예수를 믿으면 정직한 사람이 됩니다
정직한 위인의 표상처럼 전해지는 조지 워싱턴도 당연히 예수를 잘 믿는 청교도 중 하나였습니다. 정직한 심성은 우리 인간이 갖춰야 할 모든 덕목들 중 가장 귀하고 소중한 첫 번째 요건입니다. 제아무리 유능한 기술과 제아무리 빛나는 학식과 제아무리 많은 재물과 제아무리 드높은 지위를 획득한 사람이라도 정직성을 의심받는 사람은 진정한 존경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런 이치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앞의 자기 유익을 위해 정직하지 못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지요. 정직함의 반대는 말할 것도 없이 거짓됨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여간 공평한 분이 아니어서 누구 머리를 특별히 좋게 만들어주고, 누구 머리를 그보다 못하게 만들어주고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대체적으로 대등한 수준의 지능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난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제 머리로 ‘굴릴 수 있는 것’ 은 남들도 당연히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그래서 참 중요합니다.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세상인 듯이 여겨질 때가 더러 없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잠깐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거짓됨과 진실됨은 반드시 명명백백히 밝혀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어느 경우에라도 정직한 사람을 끝끝내 지켜주시는 단 한 분의 절대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일삼는 사람의 삶은 ‘반드시 패배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의 삶’ 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으면 누구나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존경받으며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거울에 자신을 늘 비춰보며 살 줄 아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20. 예수를 믿으면 영혼이 맑아집니다
이 경우, 클리너라는 표현이 참 적절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혼 클리너라기보다는 예수님의 말씀, 즉 복음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는 백발백중 클리너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왜 백발백중이냐 하면‧‧‧ 우리의 영혼을 맑게 씻을 수 있는 방법이 세상에서는 달리 찾아볼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새것으로 깨끗하고 맑게 씻어 갖자면 우선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리고 예수님의 참으로 귀한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하늘 아래 단 하나밖에 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알고, 동시에 그것을 사심 없이 온 몸과 마음으로 전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교회당에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일주일 전부가 예수의 말씀 안에서 예수가 뜻하신 삶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살자고 우리가 굳센 마음을 먹고 부단히 노력은 해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쓰는 단어 중에 ‘승리’ 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런 삶을 지향하는 약속의 언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곧 승리의 언어이기도 하지요.
21. 예수를 믿으면 좋은 일이 많이 생깁니다.
쉬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예수를 믿으면 뜻하지 않은 그리고 이전에는 별로 없던 좋은 일들이 실제로 많이 생깁니다. 물론 세상방식으로 논리적인 근거를 댈 성질의 일은 아닙니다. 좋은 일 발생에 관한 어떤 확률 같은 것이 학문적으로 검증된 얘기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이라고 내가 힘주어 여기에 글로 밝히는 데 대해 예수를 믿는 이들은 반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 쉰이 가까워 오도록 혼자서 세상 방식대로만 살다가 뒤늦게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의 말이니 여러분은 내 말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까?’ 어느 날 나는 그 까닭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나름대로 정리해 본 이치로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를 믿으면 좋은 생각만 하게 됩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남들도 나를 좋게 보아줍니다.
둘째, 예수를 믿으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걱정이 없이 마음을 편하게 갖는 사람은 세상일도 편하게 풀리게 마련입니다.
셋째, 예수를 믿으면 몸과 마음과 생활이 건강해집니다. 그런 사람한테 좋은 일이 안 생긴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겠지요.
넷째, 예수를 믿으면 작은 것 하나라도 선한 행동을 이웃에게 베풀게 됩니다. 베푸는 것은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 준 이는 왕년의 후라이보이 곽규석 목사님입니다. 그 진리의 공식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한번 실천해 보십시오. 이 부메랑 공식에는 예외라는 게 없습니다.
22. 예수를 믿으면 적이 없어집니다.
젊은 날에는 잘 실감이 안 나겠지만, 세상을 좀더 살다 보면 차차 알게 됩니다. 야박한 얘기 같지만 어느 사회나를 막론하고 우리가 사는 일상의 주변에는 수많은 ‘나의 적’ 들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정치하는 이들의 세계에는 반드시 정적(政敵)이 있게 마련이고, 학교사회나 직장사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은연중 나와 함께 경쟁관계에 있는 누군가가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순수한 젊은이들의 세계에도 남녀관계에 있어 연적(戀敵)의 존재는 흔한 상식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적’ 이란 선의의 넓은 의미에서 흔히 통용되는 ‘라이벌’ 의 개념으로 우선 이해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실제의 처세 현실에 있어서는 그것이 그처럼 그냥 항상 선의의 의미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평소 친한 친구로만 믿고 있던 사람이 어느 경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적으로 표변하는 수도 있고, 선한 이웃으로만 그냥 단순하게 여기던 사람이 어떤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 가서는 졸지에 적으로 돌변해서 내가 추구하는 이익의 앞길을 가로막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심한 경우는 집안의 친척간이나 한 핏줄을 나눈 형제간에도 적이 생겨나 불미스런 송사(訟事)를 서로 주고받는다는 한심한 얘기도 간간이 듣습니다. 그래서 생각과 목적이 다른 여러 부류의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 바로 원만한 처세와 처신이다.’ 하고 어른들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또 ‘적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유능해도 출세를 하기 어렵다.’ 라고도 어른들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어느 사회에서나 성공을 하려면 주변에 적을 만들지 말아야 된다.’ 는 뜻이 됩니다. 세상 경험이 많은 어른들의 말씀은 어느 경우에도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어른들의 말씀은 경험칙의 배경이 탄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으면 적이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따라 겸양과 사랑과 이해와 봉사와 양심으로 늘 자기 반성을 하면서 정도(定道)를 걷는 사람한테는 결코 적이 생기지 않습니다.
23. 예수를 믿으면 술을 끊게 됩니다.
술에 관한 한 그리고 예수 믿고 술을 멀리하게 된 경우에 관한 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한테 일가견이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샘플이니까 말이지요. 적절한 때와 장소를 가려 적당량의 술이라면 분명히 거기에는 건강상, 친교상, 또는 업무상의 순기능이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점잖은 식탁에 모인 사람들끼리 식전이나 식후에 와인 한 잔을 곁들이는 경우가 보통인데 이것은 식전에 입맛을 돋우기 위한 목적이라든가, 또는 식후의 느끼한 입맛을 가시게 하는 데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술이라는 것은 그 본성이 ‘때와 장소를 가려서’라든가 ‘적당량’이라든가를 엄격히 지켜내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술의 본질은 그것을 섭취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도(程度)와 정도(正道)를 벗어나게 하는데 있지 않을까 싶은데 범인(凡人)들의 경우, 그 ‘본질’로부터 자유스러워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난 젊은 날을 되돌아보면 나는 술을 참 많이 마셨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문학, 연극, 영화, 매스컴 등 주로 예술계통에 종사하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 년이면 300번쯤 술을 마시지 않았나 기억됩니다. 그것이 우정이었고, 그것이 삶의 희열이었고, 그것이 젊은 낭만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나이를 먹어 가고, 자식들이 커 가고, 건강이 이전만 같지 못하게 됨에 따라 술로 인해 형성된 우정이며, 희열이며, 낭만이라는 것의 생명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생활, 가정생활, 경제생활의 리듬과 균형이 서서히 뒤틀리기 시작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였을까요? 온당한 삶의 노선과 목표가 허방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언뜻은 잘 닦인 길처럼 보이나 실제로 밟아 보면 발이 점점 빠지게 되는 그것이 허방이지요. 술의 한계가 그것이었습니다. 남는 게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훨씬 더 많은 그것이 바로 술의 한계였습니다. 천만다행이게도 그럴 즈음에 만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술꾼과 예수는 걸맞아 보이지 않지요? 정말로 걸맞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랬고, 남들이 보기에는 더 그랬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내 손에는 술잔 대신 성경이 들려 있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한줄 한줄 읽었습니다. 긴 허방 속을 헤매던 눈에 성경말씀 하나 하나는 그 자체가 바로 구원의 밧줄이었습니다. 결코 발빠지는 일이 없는, 견고한 길이 새로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내 몸이 곧 성전이라는 사실도 술의 덧없음과 함께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뿐일까요?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술을 끊을 수 있습니다.
24. 예수를 믿으면 병이 빨리 낫습니다.
나는 비교적 몸이 건강한 편입니다. 프리랜서로 독립해서 개인 사무실을 낸 이후 불가피한 해외 출장 때 말고는 지난 17년 동안 눈이오나 비가 오나 단 하루도 결근한 일이 없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들이 농담합니다. “워낙 독종이라 병이 찾아 왔다가도 그냥 도망간다.” 고 말이지요. 그런데 어인 일로 내 주위에는 개인적으로 아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의사거나 아니거나를 막론하고, 그분들의 얘기 가운데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환자는 병이 빨리 낫는다!” 물론 자신들의 일상적인 임상 경험을 통해서 얻은 결론일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잘 낫고 또 빨리 낫습니다. 참 신기하지요? 실제로 ‘치유하시는 은혜’ 와 관련된 이야기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우리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 몸과 마음의 고장을 고칠 능력을 가진 분도 바로 하나님이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자가 있는 병실을 찾아가서 하나님께 대신 기도를 해주기도 하고, 거리가 먼 곳에 있는 환자일 경우에는 여럿이 간절한 마음을 모아 중보기도를 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치유의 은사를 정말로 확실하게 받자면 그 어떤 방법이나 기도에 우선해서 한 가지 전제가 따릅니다. 즉 환자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얼마나 확실하게 믿고 의지하면서 간절히 간구하느냐에 따라 사정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약반심반(藥半心半)’ 은 거짓말이 아닙니다. 예수님 손이 바로 약손이지요. 그러나 이런 은사는 하나님이 지니신 무한량의 여러 능력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매우 적은 한 부분에 불과할 뿐입니다.
25. 예수를 믿으면 기쁨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삼십 년쯤 전의 일입니다. 나는 당시 인천의 한 모퉁이 거리에서 조그만 서점을 잠시 운영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서점 앞으로 동네 노인 한 분이 지나다니셨는데 노인은 언제 보아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늘 기쁨에 가득한 미소를 짓고 다녔습니다. 처음 한두 번은 무심히 보아 지나쳤지만 먼발치로나마 노인의 얼굴을 대하는 횟수가 거듭됨에 따라 나는 그분에 대해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차림새로 보면 그렇게 부잣집 노인도 아닌 모양인데‧‧‧. 무엇이 저 노인을 매일 저렇게 기쁘게 하나? 저 노인에겐 무슨 기분 좋은 일이 매일 생긴단 말인가? 도대체 저 노인은 뭘 해 먹고사는 사람일까?’ 당시는 60년대였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궁핍에 찌들어 찌푸린 얼굴로 살던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상을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노인의 기쁨에 가득한 표정이 여간 남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점도 함께 상상이 될 것입니다.
얼마쯤 지난 후에 이웃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분은 동네 교회 장로님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아직 내가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 모를 동네 노인 한 분이 내게 심어 준 인상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중년이 된 나이로 마침내 나는 예수 믿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의 기쁨에 가득 찬 얼굴을 만나는 순간, 30년 전의 기억 속에 숨어 있던 그 노인의 표정이 똑같은 느낌으로 다시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비슷한 표정을 나는 이후에도 교회를 통해 다수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속에 언제나 가득 찬 것이 오로지 기쁨뿐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 거룩한 예수님이 내 가슴 속, 머리 속에서 언제나 내 영혼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 오로지 나를 위해 그렇게 함께 계신다는 사실! 나부끼는 갈잎과도 같았던 내가 지금은 하늘 아래서 가장 축복스런 진리의 복음에 의해 지난날의 모든 죄악들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 누구라도 기쁨의 미소가 절로 얼굴에 배어 나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기쁨에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돈이나 명예나 사회적 지위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26. 예수를 믿으면 낙천가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평가할 때 ‘그 사람은 좋은 사람‧‧‧.’ 이라는 말을 잘 씁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에게 주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 ‘좋은 사람’ 으로 가는 지름길이 우선 낙천가가 되는 것임을 실감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 싶습니다. 낙천가란 늘 세상사를 좋게 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좋은 세상은 좋은 사람의 눈에 더 잘 보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매사에 기우(杞憂)가 많고 작은 일에도 꽁한 사람, 사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옹졸한 사람은 이웃에게도 그만큼 심적인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좋은 사람’ 의 인상을 주기 어렵습니다.
무리(無理)하지 않고 역리(逆理)하지 않고 늘 순리(順理)를 택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이웃을 불편하게 하거나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이웃에게 상처를 주거나 하지 않습니다. 웬만한 고충이나 불편함의 장애물도 넉넉하게 극복해 나아갑니다. 작은 바퀴는 작은 돌에도 잘 걸리지만 큰 바퀴가 굴러갈 때는 자잘한 돌멩이 따위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이치와 같다 할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언제나 근심 걱정을 모르는 낙천주의자가 됩니다. 큰 바퀴와 같은 마음을 지닌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께 온전히 다 맡겨 버리고 환경에 순응하는 순리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 “아무리 큰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문제가 문제로 드러나 있는 이상 문제 곁에는 이미 문제의 해결방법도 함께 숨어 있게 마련이다.” 하는 요지의 변증법도 있습니다만, 마음이 넓은 낙천주의자들은 그마저도 하나님의 선물 중 하나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과연 어떤 자세로 살 것인가는 이제 스스로가 결정할 일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낙천가가 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리 본디 모습을 되찾자는 얘기입니다.
27. 예수를 믿으면 행운이 따라다닙니다.
맨머리로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지요. 그 높은 예수님이 돈 받고 행운을 빌어주는 복술사 따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분인데도 어인 일인지 예수를 믿는 집안을 보면 두루두루 모든 게 술술 잘 풀려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을 보면 하는 일마다 잘되니까 말입니다. 혹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어김없이 통한다고 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부분을 오랜 시간에 걸쳐 나름대로 연구를 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드디어 해답이 나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지요. ‘예수를 믿으면 행운이 따라다닌다’ 는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믿으면’ 이라는 전제에 대한 해석입니다. ‘믿으면’ 이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교회를 왔다 갔다 다니면’ 을 뜻한다거나 ‘소설책 읽듯 성경을 얼마간 읽어보면’ 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으면’ 이란 ‘사람이 근본부터 아예 달라져서 예수님의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면’ 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새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사고방식이나 행동거지를 모두 하나님께 내맡기고 오로지 예수를 본받는 그런 삶을 산다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삶이란 곧 자기를 버린 희생이요, 자기를 버린 낮춤이요, 자기를 버린 베풂이요, 자기를 버린 사랑이요, 오로지 자기를 버린 이해와 용서와 온유와 인내와 기다림과 감사와 기쁨이었습니다. 자, 이제 생각을 정리해봅시다. 정말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기 욕심을 버린 선한 삶을 사는데 하늘의 복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 삶을 보고 감동하지 않는 이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보고 마음으로부터 흠모하지 않는 이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를 실제로 믿/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삶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감사하고 행복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통해 끝없이 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더러 사람들의 힘을 통해 될 법하지 않은 일은 손수 나서셔서 기적을 일으켜주시기도 합니다. 그 행운의 기적을 우리는 곧잘 ‘우연’ 이라 여기고 말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틀림없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 바로 ‘축복’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 대신 우리가 받는 놀라운 보상이기도 하지요.
28.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를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말씀하기도 했지요. 세상에서의 재물 추구보다는 천국에서의 영광을 더 중히 알고 그것에 예비하는 삶을 살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물질의 풍요를 싫어하신 게 아니라 오로지 재물만을 최고가치로 여겨 따순 피 흐르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수전노를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서양에는 이런 우스개 속담이 있습니다. “수전노란 거지가 될까 봐 겁나서 거지처럼 사는 사람!” 그런데 이 우스갯말을 음미해 보면 거지의 뜻이 조금씩 다름을 알게 됩니다. 즉, 앞에 나오는 거지는 물질이 없어 가난한 거지 그리고 뒤에 나오는 거지는 마음이 가난한 거지입니다. 두 거지의 공통점은 양쪽이 다 바람직한 삶의 모양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물질부자건 마음부자건 예수를 믿으면 누구라도 부자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흔히 부자가 되려면 우선 돈을 많이 벌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는 사실 별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돈에 특성이 있다면 번 만큼 다 써버리거나 번 것보다 더 많이 써버리기가 쉽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남보다 적게 벌더라도 돈의 못된 특성을 통제할 능력을 갖고 검약하면서 열심히 저축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부자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통장에 돈 얼마만 들어 있으면 그것이 근질거려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정신과 치료 대상 가운데 ‘쇼핑 중독증 환자’ 같은 게 있겠습니까? 요컨대 ‘통제능력’ 을 통한 검약생활인데 예수를 믿으면 그 일이 가능해집니다. 예수 말씀을 따르는 생활을 하면 ‘통제능력’ 과 ‘감사능력’ 을 배우게 됩니다. 말씀 따라 이 두 능력만 배우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지체없이 그에게 무한한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예수 믿고 나서 부자가 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물질부자, 마음부자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어김없는 약속사항입니다.
29. 예수를 믿으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나는 50년 넘게 세상을 살면서 참 많은 갖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 왔습니다. 회사나 점포를 운영하는 장사꾼들, 고급 예술분야의 이름난 종사자들, 높고 낮은 관직 관료들, 국회의원들과 그 추종자들, 언론 방송계 종사자들, 출판사경영자들, 전형직 장관들, 직장인들, 수사기관 종사자들, 직업 세일즈맨들, 수많은 남녀 연예인들, 무역업 종사자들, 유흥업소 운영주들, 직업군인들, 부동산중개업자들, 떠돌이 유랑극단 사람들, 전문분야 프리랜서들, 세리들, 의료인들, 교육자들, 전과자들‧‧‧. 그리고 거기에 재벌그룹 회장이나 판검사 등이 더해집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런 이들을 사귀다 보면 반드시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세상에는 사람마다 걱정거리 없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지요.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뱅이는 가난뱅이대로 걱정거리가 많습니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신기하게도 세상살이에 걱정이 없어집니다.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마다 얼른 예수님을 머리에 떠올리기 때문이지요. 세상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99%는 대개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탐욕본능에서 기인합니다. 명예와 관련한 욕심, 사회적 성취와 관련한 욕심, 재물 소유나 재물 손실과 관련한 욕심, 이성과 관련한 욕심, 건강장수와 관련한 욕심 그리고 제 자식에 대해 거는 욕심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게 되면 기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 그런 걱정들이 다 없어집니다. 걱정의 멍에는 세상에서 오는 경우보다 스스로의 탐욕에서 비롯된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 ‘걱정하지 말라’ 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걱정거리를 무책임하게 방기(放棄)하라는 뜻이 아니라 걱정의 멍에를 벗어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는 이들을 보면 걱정을 하지 않고 삽니다. 세속에 살면서 세속의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 말처럼 쉽게 되지는 않을 터이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은 그 길이 우리가 모색할 수 있는 유일한 ‘평안의 삶’ 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30. 예수를 믿으면 불면증이 사라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정말 불면증이 없어집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제가 그 경험자 장본인입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신기해서 한동안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평소 알고 지내는 의사 친구한테까지 자랑한 적이 있습니다. 1990년 4월 하순 어느 주일 아침, 친구인 가수 윤형주 씨에 이끌려서 용산 서빙고동 한강변에 있는 온누리교회에 처음 나간 역사적인 밤이었는데 그런 ‘기적’ 이 정말로 내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당시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혹시 베개가 원인인가 하고 수없이 많은 베개를 연달아 샀던 기억이 납니다. 불면증에 좋다는 자석 특허 베개, 영국제 던롭 스펀지 베개, 속리산 향나무 베개, 땀을 흡수하면서 포근하다는 양털베개 등등, 그러나 결국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면의 원인이 내 머리 속, 가슴속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는 글을 쓰는 직업인이기 때문에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면 그 이튿날 머리가 무거워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습니다. 각종 멍청한 베개들의 행렬이 그래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나로 치면 남들이 말하는 소위 ‘위기의 40대!’ 그중에서도 40대 후반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는데도 밤이면 깊은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자기 전에 술을 한 모금씩 홀짝거리기도 해보았지만 별 효험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내 머리 속에는 온갖 쓸데없는 걱정거리나 장래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들이 가득 차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첫날 교회에 가서 ‘예수 사랑해요’ 라는 아름다운 찬양을 듣고, 하용조 목사님의 자상한 설교를 듣고 그리고 성경 중 마태복음을 몇 줄 읽었을 뿐인데도 머리와 가슴에 가득 차 있던 온갖 무거운 찌꺼기들이 정말 기적처럼 사르르 다 녹아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몸도 덩달아 가벼워졌습니다. 특히 내가 그날 읽은 성경 가운데는 ‘걱정하지 말라’,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짐을 다 내려 놓으라’ 하는 내용의 말씀이 있었던 기억입니다. 그 후로는 불면증 때문에 고통당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백 마디 말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해답은 하나뿐입니다. 불면증으로 오랜 세월 고생을 한 사람이 낫기를 원하거든 예수를 믿는 길밖에 다른 치료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자신합니다. 불면증의 원인은 ‘불안’, 예수의 이름은 ‘평안’ 이기 때문입니다.
31.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왕의 왕’ 이시기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특히 극존칭적 묘사어법이 사용되고,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도 ‘해라’ 로 통일이 되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이 성경이 이 땅에 처음 소개되던 때가 구한말 때였으므로 그런 번역은 예수의 거룩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 한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그의 말씀인즉 개인적인 일용어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대리 선포하는 선언적 의미가 크다는 점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입니다.
그러나 실제 당대의 예수는 세상의 누구보다 겸손한 마음과 겸손한 어법을 구사하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성경 기록을 보면 그는 더럽고 미천한 자의 앞에 엎드려 그 발에 입맞추었고, 몸소 제자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가능한 한 자신을 겸손히 낮추면서 자신의 힘으로 베풀 수 있는 것은 하나 남김 없이 모두 베푸신 인물이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 짧은 서른 세 해의 생애를 몽땅 베푸는 데 쓰셨는데 나중에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우리 썩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면 맨 처음 배우게 되는 게 바로 자기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제 가진 모든 것, 제 가진 모든 능력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애당초부터 교만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지는 셈이지요. 세상의 모든 이웃 보기를 예수님 보듯 하라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웃 섬기기를 예수님 섬기듯 하라는 게 기독정신의 근본 교리입니다.
실제로 예수를 잘 믿는 이들이나 큰 성직자들을 보면 머리가 절로 숙여질 만큼 겸손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가끔씩 자신을 신격화, 신성화하는 성직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만, 그것은 세속적 영광을 탐하여 교인들 머리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려는 가짜 성직자이거나 사이비 종파의 지도자이기 쉽습니다. 진짜 성직자, 진짜 그리스도인은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위치를 남보다 높은 곳에 있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깊은 이들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나서도 그것을 겉에 나타내거나 자랑하려 하지 않습니다. 재물의 힘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가문을 내세우거나 지식과 학벌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시댁이나 친정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남의 약점, 단점, 불행을 자신과 비교함으로 얻게 되는 자족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깊은 이들은 남을 보기에 앞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우선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자기의 부족함을 늘 반성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늘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절로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인격 완성의 첫걸음이 겸손임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 사회를 위하여
32.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 예뻐집니다.
예수를 믿어서 좋은 이유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항목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여 우리가 보는 하나하나의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자연들 모두가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 이라 여길 줄 아는 눈을 갖게 되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저마다 참 예쁘고 아름답기도 하구나 하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로부터 사랑의 눈, 감사의 눈 그리고 섭리의 근원을 알아차리는 눈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그냥 대수롭지 않게만 보던 뭇 인간과 인간사 가운데서 문득문득 선한 마음의 연결고리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선한 심성이 고인 맑은 우물들을 수시로 만나게 되며, 동식물 생태계의 신비롭고 오묘한 생존구도를 보게 될 뿐만 아니라 하늘, 땅, 산, 강, 바다, 구름, 비, 눈, 태양 등 하나님께서 지어 놓으신 대자연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고 사는가에 대한 감사의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어 주신 것들 가운데서 우리는 숨 쉴 공기를 얻고, 마실 물을 얻고, 여러 가지 필요한 먹거리와 입을 것, 땔 것을 얻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그 모든 이치들을 참답게 볼 줄 아는 진리의 눈을 갖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특히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좋은 머리의 지혜를 우리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쓰고 있는지를 스스로 반성할 줄 알게 됩니다. 그 반성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궂은 일들의 원인을 남의 탓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원래 아름답던 세상이 우리 인간의 잘못 쓰여진 지혜로 인해 아름답지 않게 된 것을 부끄러이 생각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더러 아름답지 못해 보이는 풍경이 있다 해도 자연히 그것을 크게 탓하지 않게 될 수밖에 없지요. 우리 모두가 세상을 아름답게 본다면 실제로 세상은 조금씩 더 아름다운 쪽으로 그 모양이 달라질 것입니다.
기왕 한 세상 살면서 어차피 살아 내야 할 세상을 가급적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그 개인을 위해서도 축복에 해당하는 일이지요. 세상을 예쁘게 보아 버릇하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그 개인의 삶도 결국 긍정적인 쪽으로 풀려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얘기를 좀더 쉽게 풀어 볼까요? 예수의 으뜸 되는 가르침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우선 그 이웃을 예쁘게 볼 수 있어야 그것이 가능합니다. 세상을 예쁘게 보려면 우선 모든 사람들을 다 예쁘게 봐야 하겠지요?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 보기를 예수님 보듯 하면 틀림이 없다고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가장 예쁘게 연출하는 일류 연출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 예뻐집니다.
33. 예수를 믿으면 성공적인 처세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속담에 “숲속의 오얏나무는 그 향기로 십리 밖의 나그네 걸음을 멈추게 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향기는 오얏나무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인격과 인품의 향기를 지닌 사람 곁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얘기지요. ‘성공적인 처세’ 라고 하니까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처세론 전문가 D. 카네기가 연상되어 다소 세속적인 뉘앙스가 느껴지긴 합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처세는 반드시 사업가나 정치가들이 즐겨 탐하는, 예비적 이용가치로서의 즉물처세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과 더불어 일정 수준의 정신생활을 공유함에 따르는, 건전하고 생산적이며 우호적인 인간관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나는 성공적인 처세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일이 가능해질 확률이 가장 높아집니다. 왜냐면 예수사상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명료한 유일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주는 불변의 교본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지향하는 바의 뜻이 끝내 옳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옳은 뜻을 가지고 옳은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의 편이었으며, 하나님의 그 뜻하심과 함께 하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라 기분 좋은 수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서만이 진정 성공적인 처세가 가능하다고 믿는 주장의 근거가 그것입니다.
34. 예수를 믿으면 대인관계가 좋아집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고소한 참기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매끄러운 윤활유입니다. 특히 원만한 대인관계에 관한 한 예수님이상 가는 전문가가 유사이래 없었습니다. 대인관계가 좋으면 학교사회에서나 직장사회에서나 절대로 실패할 염려가 없지요. 많은 사람들이 출중한 잠재능력이나 뛰어난 기능에도 불구하고 사회생활 적응에 실패하는 것은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해서인 경우가 태반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특히 층층시하 위계질서와 상하좌우 조직체계를 기본 구도로 하고 있는 직장사회에서는 이 대목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그런 모든 걱정이 일거에 해소될 뿐만 아니라 얼마 가지 않아 그 직장의 모범적인 일등사원, 인기사원으로 자타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예수사상의 기본은 자기를 낮춰 겸양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자기의 잇속 계산보다는 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남의 말을 잘 경청하게 됩니다. 항상 양보하며 궂은 일은 스스로 나서서 맡아 하게 됩니다. 얼굴 표정은 늘 밝고 명랑하며 감사와 기쁨에 충만해 있게 됩니다. 잘난 체를 하지 않게 됩니다. 누가 보거나 안 보거나 자기의 직무에 양심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그러니 잔꾀를 모르는 모범적인 사원이 될 밖에요.
예수 믿음이란 곧 인간 믿음, 인간 이해, 인간 사랑이기 때문이기도 해서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를 믿으면 신념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긴답니다. 모든 자잘한 우려, 기우, 조바심까지도 다 주님 앞에 다 내맡겨버림으로 혹여라도 잘못될 걱정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요. 참 신기한 사실입니다.
35. 예수를 믿으면 성실한 사람이 됩니다.
“지식이 없는 성실성은 허약해서 그 자신의 손해에 그치지만, 성실성이 없는 지식은 독약처럼 위험해서 만인에게 손해를 끼친다.” 18세기 영국의 사전 편찬가이자 유명한 시인인 사무엘 존슨(1709~1784)의 말입니다. 그 어떤 지식보다도 인간 됨됨이의 성실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의 경구(警句)일 것입니다. 지식은 많이 쌓았으되 성실성이 없는 일부 정치가나 일부 변호사, 일부 어용학자 같은 이들을 볼 때마다 이 경구가 생각나곤 합니다.
지식의 많고 적음을 건축물의 높낮이에 비유했을 때 성실성의 여부는 곧 그 건축물을 밑에서 받쳐 주는 지반 기초에 해당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실성의 지반 기초가 튼튼한 사람이 됩니다. 신앙이라는 믿음이 철근 심지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성실 가운데서도 신앙에 근거한 성실이 특히 돋보이는 게 바로 그 까닭이지요. 성실한 사람은 누가 눈으로 자기를 보거나 보지 않거나 언제나 일하는 모습이 한결같습니다. 특히 예수를 믿으면 남의 눈 대신 ‘양심이라는 이름의 하나님 눈’ 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언제나 성실한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작은 물건 하나를 만들더라도 양심적으로 만듭니다. 돈이 없어 뵈는 환자라도 양심껏 진료합니다. 돈이 없어 뵈는 의뢰인이라도 양심껏 변론합니다. 어긋짱나게 나가는 학생이라도 양심껏 가르칩니다. 힘이 없어 뵈는 민원인에게라도 양심껏 봉사합니다. 예수를 잘 믿는 이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실한 사람이 됩니다.
36. 예수를 믿으면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인 까닭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일단 대통령 자리에 앉기만 하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그 말로(末路)가 신통칠 않아 결국 퇴임과 동시에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치욕의 법정에 서곤 하는 이상한 나라 하나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대통령생활’ 을 하기가(잘 하기가) 참으로 만만한 일은 아닌 모양이로구나 하는 짐작을 우리는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 경험이 많으신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대통령 생활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바로 결혼생활이라고 합니다.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가(잘 하기가) 힘든 일이 결혼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결혼 경험이 없는 미혼의 젊은이들은 쉽사리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테지요. ‘누가 뭘 특별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기만 하면 그냥 저절로 술술 풀려나가는게 결혼생활이라는 것 아닐까? 결혼생활 하는 데도 무슨 각별한 노하우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하는 등등의 생각을 하기가 쉬울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정작 부닥쳐 보면 그 일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인생의 절반 이상에 걸쳐 지속되는 길고도 긴 결혼생활의 노정에는 그야말로 미혼시절에는 차마 예측하지 못했던, 너무나도 많은 미묘한 변수의 장애물과 함정과 지뢰와 같은 험로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게 마련입니다. 연애시절에 그처럼 절대의 유일 가치로 여겨졌던 소위 장미빛 사랑이라는 것은 결혼과 동시에 그 색깔이 칙칙한 현실로 퇴색 증발해 버리고, 대신 ‘장미’ 가 피어 있던 그 자리에는 양가(兩家)의 전통 차이나 그 가족 구성원들 간의 불화에서 불거지는 갖가지 갈등이라든지 날이 갈수록 새롭게 발견되는 생활방식의 상이점(흔히 성격차이로 지칭되는)으로 인한 갭이라든지 가정경제의 어려움이라든지 육아 교육 문제의 난제라든지 주거환경과 관련된 숙제라든지 하는 등등의 어려움들이 끊임없이 제기됩니다.
피차 성격이 원만하고 인내심이나 이해심이 깊어서 매 고비마다 그것들을 현명하게 극복하고 대처해 나간다면 다행이겠지만, 더러는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겪기로는 부잣집도 예외가 아니고, 학벌이 반반하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집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원만한 결혼생활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만한 결혼생활!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대로 해내기가 어려우니 문제가 실로 큽니다. 해결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결혼생활을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예물로 주고받는 다이아몬드보다 열 배 백 배나 더 빛나는 광채의 비결들이 성경책 안에는 예수의 말씀으로 전부 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대로만 하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장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37. 예수를 믿으면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의 공통된 소망 가운데 가장 첫번째는 바로 사랑하는 제 자녀를 훌륭한 인간으로 키워내는 일입니다. 가설이지만 이 소망을 첫번째 소망으로 치지 않는 부모가 만일 하나라도 있다면 그는 그 자체로서 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무슨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것이 모든 부모의 본성입니다. 내 눈을 빼어 자식의 눈이 떠진다면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기꺼이 눈을 빼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부모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눈이 멀고 허리가 휘고 뼈가 녹아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부모들은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한계와 끝이 없는 그 위대한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부터 불변의 이치로 가르쳐주신 본성이기도 합니다.
자식을 잘 먹이기 위해, 자식을 잘 입히기 위해, 자식을 잘 교육시키기 위해 부모님들이 쏟는 그 무한한 사랑의 깊이는 그 자식들이 커서 결혼한 후, 제 자식을 낳아 보아야만 비로소 깨닫게 된다고 하죠? 그런데 사실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치르는 일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 바로 ‘자식을 올바로 잘 키워내는 일’ 이라고 합니다. 나는 지금 물질적으로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돈 들여서 좋은 학교에 보내고 하는 따위의 도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만일 물질만 갖고 그 ‘어려운 일’ 이 만족스럽게 해결된다면 부잣집 아이들은 전부가 다 잘 되어 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음을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보지요.
아버지는 돈 많은 재벌이었는데 그 자식은 나이를 많이 먹은 후까지 끝내 구제불능의 성격 파탄자로 낙오된 인물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훌륭한 교육자였는데 그 자식은 못된 길로 빠져 수형생활을 하고 있는 인물도 알고 있습니다. 자식 잘 키우기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들입니다. 보았듯이 물질이나 학식이나 사회적인 신분만 갖고는 안 되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자식을 셋 낳아 키워 보았습니다.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자식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았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이미 저들은 건강한 사회인으로 다 장성해서 제 앞가림을 해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부모된 자의 욕심으로 보자면 너무나도 부족하고 미흡한 점들과 후회되는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비단 내 경우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38.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님이 주일 대예배 설교 중에 가정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강조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만일 교회와 가정,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경우에 처하게 된다면 저는 주저 없이 가정 쪽을 택할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 쪽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가정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공동체 사회의 뿌리로서 가장 기초가 되는 가족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이 없으면 교회도 설 자리가 없어지고, 교회가 없으면 신앙도 융성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복과 모든 불행이 다 우리의 가정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모든 성취와 모든 실패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믿음생활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신앙이 없이도 가정의 형태는 대충 이룰 수 있을 터이지만, 행복한 가정이 없다면 진정한 믿음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조금 더 의미에 깊이를 두어 말하자면 그러니까 신앙과 가정은 실과 바늘의 관계, 또는 안경렌즈와 안경테의 관계처럼 상호보완적 사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정은 그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가정의 의미나 고마움을 우리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많지요.
예수를 믿으면 말씀에 따라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 중 핵심이 바로 이해와 사랑과 감사이기 때문이며, 이해와 사랑과 감사라면 우리네 가정의 화목과 평화는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39. 예수를 믿으면 사업이 잘 됩니다.
사업가가 예수를 믿고 나면 사업이 훨씬 더 잘 됩니다. 언뜻 거짓말로 들릴 지 모르겠지만 사실에 있어서 너무나도 명명백백한 그 이치는 의외로 매우 간단합니다. 첫째, 예수를 믿으면 제품을 정성 들여 좋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음의 근본이 바로 남이나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는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원료를 제대로 쓰고 정성을 다하여 양심적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 사업성공 번창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부인할 이는 아마 없겠지요.
둘째, 예수를 믿으면 자기가 정성껏 만든 제품에다 터무니없는 바가지 요금을 붙여 폭리를 취하려 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부합하는 적정한 가격을 매기게 마련입니다. 적정한 가격은 구매율을 높이는 지름길입니다. 좋은 품질의 제품에 가격마저 양심적이니 장사가 안 될 까닭이 없지요. 셋째, 예수를 믿으면 판매방식이나 판매조건, 유통구조 등을 합리적으로 선택하여 결정하게 됩니다.
넷째, 예수를 믿는 사업가는 실제와 다른 과대광고나 허위광고로써 소비자를 속이거나 현혹시키려 들지 않습니다. 다섯째, 사업가가 예수를 믿으면 권위의식 대신 늘 인간적인 따뜻한 애정과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바탕으로 해서 조직관리를 한다든지 이익을 공정히 분배한다든지 하기 때문에 휘하 구성원들의 신망을 얻어 노사분규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섯째, 예수를 믿으면 고객에 대한 겸손한 친절 정신과 서비스 정신이 몸에 배어 그것이 곧바로 회사의 기풍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십일조를 바치는 일이라든지 주일성수와 주일안식을 지켜야 하는 등 이전에 없던 새로운 관행을 따라야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를 받으면 그것을 열 곱으로 채워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못 됩니다. 걱정이라니요. 오히려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들만이 끊임없이 샘솟는 귀한 사업체가 될 것입니다. 사업가가 예수를 믿어야 할 분명한 이유입니다.
40. 예수를 믿으면 신뢰받는 사람이 됩니다.
땅 넓이에 비해 우리 나라만큼 사람이 많은 나라도 이 지구상에는 흔치 않습니다. 게다가 국토의 2/3는 산악지대입니다. 도시건 시골이건 어디를 가나 사람이 너무 많고 흔하다 보니까 사람들끼리 서로 사람 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왕조를 가릴 것 없이 갖가지 정변이 잦았던 데다가 지정학적 특수한 입지 탓에 몽골 중국 일본 등 이웃나라들의 무력 외침마저 끊이질 않아서 민족정서의 기본이 심히 불안정하였습니다. 힘있는 집단, 힘있는 나라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생존 변수로서의 ‘기회주의’ 가 백성들의 심성 가운데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근대사 가운데서 36년간은 일본의 식민지로 짓눌려 민족적 자긍심은 물론, 고유한 민족언어와 함께 개개인의 이름까지 빼앗겨 가며 눈칫밥을 먹어야 했는가 하면, 조국이 해방되자마자 이번에는 또 국토가 양분되어 극도의 빈궁과 혼란 속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비참의 극을 다 한 약소국의 설움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비롯된 민족정서의 불안정은 급기야 국민 개개인의 인간적인 신뢰감까지 무너뜨리는 바람에 한때는 우리나라를 좀 안다는 외국인들 간에 ‘믿지 못할 코리안 타임’, ‘신용 없는 한국사람’ 등의 치욕적인 오명이 공공연히 회자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라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은 신뢰할 수 없는 불량 자동차 부품과 마찬가지로 아예 애당초부터 없느니만 못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신뢰감이 다소 결여되었던 사람도 신뢰할 수 있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좇는 자세와 행위 그 자체가 바로 믿음이요, 자기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신뢰받는 인재가 됩니다.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41. 예수를 믿으면 안전운전을 약속 받습니다.
자동차 세상이 되었습니다. 도시나 시골이나 이제 자동차 없는 가정이 드문 세상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요? 우리 자동차를 세계 각국에 많이 수출하고 있는 것도 자랑스런 일입니다. 자동차는 매우 쓸모가 많고 편리한 문명의 이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에 따른 부작용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교통사고가 잦기로 세계 1위를 다툰다고 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의 수가 한국전쟁 때 죽은 사람의 수보다 많다는 통계 앞에서 ‘아, 이제는 차사고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로구나.’ 하는 우려를 누구나 갖게 됩니다. 자동차 사고 중에는 운전자 본인의 부주의로 일어나는 사고가 있고, 다른 차의 과실로 인한 사고가 있으며 아울러 도로 여건 등 환경시설 측면의 부실로 인한 사고와 자동차 제조 및 정비 결함으로 인한 사고가 또 있습니다. 어느 경우라도 귀한 인명이 죽고 다친다는 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한테 예수를 믿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자동차 사고 요인을 원천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선 운전자 각자가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과속이나 난폭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내 개인의 일시적인 기분풀이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고운 심성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게 되기 때문이지요. 너나없이 안정된 정서상태에서 자중자애하는 운행을 한다면 누구나 안전운전에 관한 한 일등시민이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일이 가능합니다. 또 예수를 믿으면 양보를 잘 하게 됩니다. 길가에서 싸움질하는 남세스런 광경도 자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갑자기 좁아진 길에서도 양보를 잘 하여 순리적으로 교행하면 호리병현상 등 답답한 교통체증이 사라집니다.
음주운전과 같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예비 살인행위’도 하루아침에 말끔히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도로상에서 보행인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항상 조심스런 운전을 하게 됩니다. 법규를 속이는 무면허 운전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이들이 도로공사를 하거나 안전시설공사를 하게 되면 사회이웃에 봉사한다는 마음가짐 아래 그야말로 양심적으로 성심을 다해서 작업에 임할 터이기 때문에 사고 요인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차를 제조하거나 정비하는 이들도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의 생명존중 사상에 입각해서 보다 철저하고 꼼꼼하고 완벽한 작업을 할 것이기 때문에 차의 결함으로 인한 사고발생 확률은 그만큼 낮아집니다. 모두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도 서구 선진국들처럼 안전하고 쾌적한 ‘자동차 천국’을 이루리라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42. 예수를 믿으면 ‘낮은 곳’ 의 귀함을 아는 인간이 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지구상의 각양각색 거의 모든 인류는 이스라엘 땅 가나안 목수 집에서 났다가 33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사형을 당한 한 청년의 이름 앞에 꼼짝 못하고 엎드려 그가 남긴 말씀을 경청하면서 경배하기를 마지않아 왔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권세가 높은 이도 낮은 이도, 학식을 많이 쌓은 이도, 무식한 이도‧‧‧. 거기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피부가 검거나 누렇거나 희거나 역시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가 남긴 말씀이 적힌 책은 지난 십 수세기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최강국을 자임하는 미합중국의 대통령들도 대통령 취임선서를 할 때 그 책 위에 엄숙히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세계 역사를 돌아보면 ‘그 책’ 에 적힌 말씀에 순종한 민족은 내내 부강해 왔고, ‘그 책’ 을 부인하거나 부정한 민족은 예외 없이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청년의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독교의 창시자로 세상에 오신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33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인류의 원죄 대속을 담보로 그 귀한 목숨을 바치셨지만, 남기신 진리의 말씀을 통해 인류된 우리 인간 하나 하나가 과연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하고도 올바른 길을 똑똑히 제시해 주셨습니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그 모든 말씀들 가운데 실증(實證)이 되지 않은 말씀의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일러 복음이라 부르는 까닭이 그러합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많은 복음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예수사상의 가장 핵심이 되는 말씀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아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는 명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낮은 곳’ 의 의미는 주어진 한 세상을 참답게 살고자 노력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껍데기 성취의 생명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준한 진리 된 성공은 영원히 빛나는 횃불처럼 내내 세상을 밝게 비춥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 중의 첫번째가 바로 이 진리 된 삶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를 믿어서 ‘낮은 곳’ 의 귀한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최고등급의 인간입니다.
43. 예수를 믿으면 ‘순한 양’ 이 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양치기, 즉 선한 목자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목자를 자처하신 것은 우리 인간을 순한 양으로 보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어느 한 편 자신들을 돌아보면 우리가 과연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순한 양으로서의 자격이 있긴 있는 것인지 부끄러워질 때가 없지 않습니다. 때로 야수의 호전적 공격본능을 발휘하기도 하고, 뱀과 같은 교활함으로 꾀를 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선한 목자를 자처하셨으므로 우리 양된 인간이 광야의 위해 요인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안전한 삶을 살려면 죽으나 사나 목자의 인도를 따라 순한 양이 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봅니다. 즉, 예수를 믿는 일입니다.
양이라는 착하고 유익한 동물은 신석기시대 초두, 즉 예수 나시기 9천년 전부터 인간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어 왔습니다. 양의 가축화는 농경문명의 발생과정과 거의 시기를 같이하고 있으며, 그 후 고대 오리엔트문명 성립에 있어 그 경제적 배경을 이루는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수렵동물을 대신한 식량원의 하나로 주로 양고기가 이용되어 왔으나 차츰 젖의 이용도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는 예수 나시기 3천 년 전부터 치즈나 발효유 등 양의 유제품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초식동물로서 성질이 순한 양은 제 몸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줍니다. 털, 고기, 가죽, 뼈로부터 배설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게 없을 정도로 그 쓰임새가 넓습니다. 우리 인간을 위해 끝없이 베푸는 삶을 사는 동물이 바로 양인데 무엇보다도 양은 성질이 착하여 그 어떤 동물도 해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원래가 양과 같은 존재, 즉 대체로 착한 천성은 지녔으되 자칫 교만으로 인해 길을 잃기 쉽도록 되어 있다고 하는 그 본분 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선한 목자의 인도 아래 말씀에 순종하는 진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44. 예수를 믿으면 ‘나무’ 같은 사람이 됩니다.
옛 시인과 철인들은 가장 완벽한 인격에 도달한 인간의 경지를 곧잘 나무에 비유한 일이 많았습니다. 똑같이 이 세상에 태어나 평생을 살면서도 나무는 인간과 달리 ‘오로지 베푸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더운 이에게는 그늘을 만들어 주고, 추운 이에게는 바람을 막아 주고, 새들에게는 둥지 틀 가지를 주고, 제가 뿌리를 내린 땅으로 하여금 빗물사태가 나지 않도록 뿌리로 얽어 도와줍니다. 욕심 많은 인간에게도 나무는 끝없이 베풀기만 합니다. 제 몸 베어 목재로 주고 땔감으로 주고, 제 과실 따서 양식으로 주고, 온몸의 잎으로는 고른 숨 맑게 쉬며 살라고 신선한 산소를 내내 뿜어 줍니다. 그러다가 낙엽이 지면 그 낙엽이 썩어서 또 온 땅을 기름지게 해줍니다.
그 모든 좋은 일을 다 하면서도 나무는 단 한마디의 말을 하지 아니합니다. 제 몸 베이고, 잘리우고, 빼앗기고, 썩히우면서도 말 한마디를 하지 아니한 채 다만 베풀 뿐입니다. 생색을 농(弄)하는 일이 결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를 인간의 삶에 견준다면 나무의 생애 자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과 맥이 똑같은 것입니다. 될 수만 있으면 나무 같은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나무는 제 분수에 만족할 줄 압니다. 나무는 왜 나무로 태어났는가를 묻거나 탓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합니다. 혹여 산등성이에 올라서면 따사로운 햇살을 좀더 받을까, 골짝에 내려서면 시원한 물을 좀더 마실까 하면서 새로운 자리나 기회를 엿보는 일도 없습니다. 언제나 제게 주어진 만큼의 물과 바람과 태양과 흙의 겸손한 아들일 뿐입니다.
언제나 두 팔의 가지를 하늘로 세워 올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자세로 살 뿐입니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 가진 것들에게 오로지 유익한 존재로 제 삶을 살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무를 인간 가까이 지으신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나무의 덕을 본받으라는 깊은 뜻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나무와 같이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나무와 같이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나무와 같이 생색 내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말없이 묵상하며 감사하는 자족의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나무와 같은 사람이 많을 때 우리 인간의 숲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뭇 새들이 날아와 하나님의 생명주신 은혜를 찬미하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가득하겠지요. 그곳이 바로 땅 위에서 우리가 이루는 천국일 수 있겠지요. 우리 하나 하나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바로 그 일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5. 예수를 믿으면 세상이 바로 천국입니다.
70살 된 할머니가 자신의 덧없는 늙음에 대해 혼자서 한탄하고 있을 때 90살 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어인 일로 90살 할머니는 자기보다 훨씬 더 의기양양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물론 허리도 더 꼬부라졌고 시력도 거의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어떻게 저토록 행복할 수 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볼 때도 사이다병 밑바닥처럼 두꺼운 돋보기 렌즈를 통해 비춰 보지 않으면 볼 수가 없을 정도인 할머니였기 때문입니다. 70살 할머니가 묻습니다. “돋보기가 좀 도움이 되시는 모양이지요?” 그러자 90살 할머니는 더없이 행복한 미소로 대답합니다.
“내 눈을 주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시요, 가져가신 이도 하나님이신데 내게 무엇하난들 불평할 자격이 있겠어요? 돋보기 볼 만한 시력을 남겨 주신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오.” “아니, 시력을 다 가져가고 겨우 돋보기 하나를 던져준 셈인데 그것이 무에 고맙단 말씀예요?” 그러자 90살 할머니는 70살 할머니의 손을 다정하게 꼭 잡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게 어찌 돋보기 하나뿐인가요? 하나님께서는 나이만큼 순리에 순응하면서 감사히 늙을 수 있는 귀한 지혜를 또 주셨잖아요?” 70살 할머니는 크게 깨달은 바 있어 곧 90살 할머니를 따라 예수를 섬기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여생을 살게 되었다는 잔잔한 삶의 실화입니다.
위에 예 든 할머니의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열 배나 더 어려운 조건 속에 살면서도 열 배나 더 행복하게 사는 이들을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생명을 부여받아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만도 정말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들보다 삶의 조건이 불리하다 하여 세상을 비관하거나 자포자기하거나 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고귀함과 생명의 근원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후의 내세만 기대하며 현실을 포기하는 대신, 나 하나의 작은 노력으로나마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고자 헌신하는 것 그리고 지금 세상에 살아서 숨쉴 수 있음만도 그것이 무엇보다 큰 축복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세상을 천국으로 여기는 삶! 예수를 믿으면 그 일이 가능해집니다.
46. 예수를 믿으면 선진사회가 빨리 옵니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의 내구 연한은 보통 50년~100년이라는 데 어떻게 된 셈인지 우리나라에서만은 20년 미만에 아파트 재 건축이 시작됩니다. 여간한 자원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은 지 7년밖에 안 되는 도심 한복판의 콘크리트 백화점 건물이 어느 날 모래성처럼 무너지기도 합니다. 개통된 지 1년도 채 안 되는 도로나 교량, 터널 등을 끊임없이 보수하는 광경을 우리나라에서는 도처에 볼 수 있습니다. 수도관, 가스관, 전화선 등 지하매설물들은 아직도 통합관리 체제를 못 갖추고 있어 각각의 필요에 따라 일년 내내 도로가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부실 사회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개인의 주택이나 공장, 상업시설 등의 사정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듯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해 있는 가장 큰 사회문제 중 하나가 바로 무슨 일이든지 대충대충 해내고 마는 이 부실 문제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듯이 이런 부실한 대충주의는 비단 건축구조물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우선 정치구조나 관행부터가 부실한 경우가 많고, 경제구조, 문화구조, 의식구조도 부실한 점이 참 많이 눈에 뜁니다. 어쩌면 사회 전반적인 부실 구조가 건축물의 부실 보다 더 문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부실한 건축물은 헐고 다시 지으면 되지만 문화구조나 의식구조가 부실, 왜곡되어 있는 현상은 하루아침에 개선될 성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려면 사회의 모든 분야와 함께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구조가 우선 ‘부실공사’ 의 숙명적 한계로부터 벗어나서 합리의 원칙과 성실의 바탕 위에 다시 시작되어야 하겠지요. 우리는 건국이래 여러 정권을 거쳐오는 동안 그야말로 갖가지의 다양한 정책대안들과 여러 가지 다양하고 새로운 법률들과 심지어는 극단적인 통치방식들까지 다 실험해 본 바 있지만, 그것들이 부실 사회의 본질을 바꿔 놓진 못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실 사회를 하루 빨리 졸업하고 선진사회로 가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위정자나 행정관이나 국민들이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사상은 개인적 양심과 공동체적 성실이 그 근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실 공사가 사라집니다. 도로 하나를 닦더라도 제대로 닦습니다. 집을 한 채 지어도 백 년 갈 집을 짓습니다. 표지판 하나를 내걸어도 시민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만듭니다. 경제는 노사가 화합하여 합리적인 부의 균배를 이루는 쪽으로 정착됩니다. 예수의 공동체정신은 사회보장제도를 발전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선진국입니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우리 모두가 저마다 예수를 잘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47. 예수를 믿으면 정치를 잘 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말을 대단히 잘 하거나 글을 아주 잘 쓰거나 사람을 잘 다루거나 돈이 많거나 힘이 세거나 지식이 많거나 하면 그리고 그가 정치적인 열망과 집념을 갖고 있으면,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은 정치가의 위치에 앉아볼 수 있습니다. 말도 글도 용인술도 재력도 다 하나의 ‘힘’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위치에 일시적으로 앉게 되었다 해서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의를 제대로 섬겨 백성들을 올바로 이끌어 나갈 수 있어야 그것이 정치가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은 하나같이 생각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고 욕구가 다르고 수준이 다릅니다. 그 수많은 다름들을 각기 다른 귀한 구슬들로 여겨 그것을 하나의 성공적인 목걸이로 꿰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비자금이니 통치자금이니 하는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됩니다. 윗물이 그렇게 맑으니 전 공직사회가 다 맑아져서 부정부패가 없어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같은 짝패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능한 일꾼을 내쫓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여론을 부추겨 죄없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덮어씌우지도 않습니다. 욕심을 부려 정권을 연장하려 하는 꾀를 부리지도 않습니다. 물욕, 정권욕이 없으니 내 사람, 네 사람 편을 갈라 싸울 일도 없어집니다.
지역감정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벼슬을 팔거나 벼슬을 짝패들끼리의 논공행상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관직은 오로지 봉사의 기회일 뿐, 벼슬이라는 말 자체를 의미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내 코앞의 이해타산보다는 백성들의 먼 장래를 먼저 걱정하여 정치를 합니다. 매사 정치논리로 상황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헌법에 명시된 대로 엄정한 3권 분립을 실천하는 정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막강한 배경이 있으니 어떤 외세 앞에서도 당당한 자신감이 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늘 스스로를 반성하는 솔직한 정치를 합니다. 이보다 더 훌륭한 정치가가 있을 수 있을까요? 단, 예수를 제/대/로/ 믿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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