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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드보라와 바락 6 (삿 4:21-24)

에반젤(복음) 2021. 7. 6. 06:54

드보라와 바락 6 (삿 4:21-24)

 

21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22 바락이 시스라를 추격할 때에 야엘이 나가서 그를 맞아 그에게 이르되 오라 네가 찾는 그 사람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러져 죽었고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혔더라 23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24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오늘도 “드보라와 바락”의 그림에 담긴 신령한 의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피곤하실까봐 가벼운 이야기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 한국의 근대사에 초대 부통령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아실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 이강석이가 뜨니까 이강석을 사칭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가짜 이강석이가 지방의 곳곳을 다니며 암행어사로 왔다면서 관리들을 놀래게 하고 온갖 대접을 받으며 세도를 부리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경찰서장 군수 사단장 중앙부처 기관장 도지사 등 할 것 없이 이강석이 잘못 모시다 큰 일 날까봐 했던 웃지 못 할 일화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강성병인데 그러나 이강석을 아는 경북도지사에게 들켜 그 정체는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도지사가 이강석을 알고 도지사의 아들도 이강석과 친구였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가짜가 있습니다. 죄의 옛사람입니다. 속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속의 옛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어떻게 꿈틀거리든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골3:9-10에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죄인을 온전함에 이르도록 인도해야 합나까?

 

4. 세속에서 구원받게 해야 합니다.

 

20절 "그가 또 이르되 장막 문에 섰다가 만일 사람이 와서 네게 묻기를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거든 너는 없다 하라 하고" 시스라가 추격자를 피해 숨는 내용입니다. 추격자가 와서 물으면 너는 없다고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세속이 우리를 추격할 때 그런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먼저 잠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성도는 알고 보면 예수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롬6:11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그리고 ‘나 없다고 해라.’ 했듯 성도는 ‘나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믿음을 견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세상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고후6:14-16에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했습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보면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찾는 세속에 대해서 '나 없다.'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과 상관이 없는 태도입니다. 세속과 결별은 구원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라합도 자기 동족을 배반했습니다. 기브온도 자기 동족을 배반했습니다. 모세도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를 믿지만 세속과 결별하지 못하면 아직 죄에서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2:40) 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 결별을 서약했습니다. 그리고 옛사람을 물에 장사했습니다. 이 입장을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이 길을 가던 중에 과거 그가 방탕했던 시절에 알았던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못 본체하며 그 여자를 피하여 가는데 그 여인이 따라오면서 ‘나예요, 나예요’라고 외치며 따라왔습니다. 어거스틴은 도망치면서 ‘너는 너지만 나는 내가 아니라오.’라고 외치면서 그녀를 피했다고 합니다.

 

아삽의 신앙고백처럼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나이다"(시73:25)고 고백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러나 씻음의 과정을 거쳐야 천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 성령 안에서 천국을 누리시려면 잘 씻으시기 바랍니다.

 

5. 진리의 확신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21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야엘은 잠든 시스라를 방망이로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죽였습니다. 관자놀이는 한의에서는 미릉골이라고도 하고 뇌로 올라가는 동맥이 있는 곳입니다. 급소인 관자놀이에 박았으니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머리를 뚫고 땅에까지 박혔습니다.

 

이 이미지가 보여주는 진리는 우리 옛사람도 진리로서 말뚝질을 해야 합니다. 장막 말뚝이 성경의 진리라면 방망이는 성령의 확신입니다. 그래서 전12:11에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했습니다.

 

우리 옛사람과 그 생각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가졌어도 우리 생각과 마음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상태는 불신자와 같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머리를 박은 이유는 사고방식의 개조입니다. 장막의 말뚝은 장막집을 지을 때 박는 건데 야엘은 시스라의 머리에다 집 짓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 집 짓는 행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할 수 없지만 머리에 집을 짓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집은 어떤 사상도 집이 될 수 있고, 어떤 집착이나, 풀리지 않는 어떤 감정도 집이 될 수 있는데 일단 집이 지어지면 진을 친 것과 같이 터전이 견고해서 사단을 추방하기란 어려워집니다.

 

이교나 이단이나 공산사상이 들어가 있으면 그 사상이 빠지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그게 쉽게 빠지겠습니까? 그 사상이 있는 한 그는 거기에 미칠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악감정이나 실연 실패 같은 상처가 있으면 그것이 치료되기까지 귀신이 나가지 않습니다. 원리는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서 그 마음이 견고하고 치료되면 사탄은 떠나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야엘이 박은 말뚝이 두개골을 통과하여 땅에까지 뚫고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평강으로 우리 마음이 흔들리려야 흔들릴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악한 것이 마음을 점령하여 사탄의 진을 이루었듯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늘 받으면 사탄의 진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진이 됩니다.

 

10년 전에 어느 유명한 목사가 불교의 템플스테이를 찬양하는 글을 SNS상에 올렸습니다. 그를 따르는 팔로워만 해도 수십만인데 이 일로 불교귀신이 교회에 틈타서 사찰에 가서 도 닦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최근 교계 기자들이 화가 나서 ‘당신의 죄가 크다. 지금도 불교를 인정하냐?’고 물으니까 그제야 ‘불교는 자력종교다. 인간 스스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실수했으면 진즉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어야지 그 한 사람의 잘못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실족 당했습니까? 그래서 마18:6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하셨습니다. 예수 잘못 믿으면 구언 받을 수 없습니다.

 

요리2:23-24에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했습니다. 오직 예수! 올바른 진리에 서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계속적인 성화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23-24절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여기 "점점 더 눌러서" 란 점진적인 성화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누가 은혜 받았다고 하면 기도해 줄 일이지 지나치게 과대평가나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큰 감동을 받고 큰 체험을 했다 해도 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떤 건달이 회개했다고 여기 저기 강단에 세워 간증하게 했더니 나중에 다시 건달이 되어 사회의 웃음거리가 됐었고, 대도가 회개했다고 찬사를 보냈지만 또 다시 도둑질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성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진리의 말씀과 영성의 부어짐과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변화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예배와 성찬과 교제와 사랑과 감사와 순종 등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화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충분할 때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지금도 쉬지 않고 역사하십니다. 우리 속에 야빈과 시스라 같은 옛사람과 그 자아를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과 연단과 성령의 은혜 안에서 더욱 자라감으로 온전히 세속을 벗고 진리에 서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더 온전한 은혜 가운데 자라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