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인간론
(죄와 자유의지를 중심으로)
윤석주 전도사
Ⅰ. 서론
칼빈의 인간론은 인간에 대한 지식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며, 이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에서 말하는 "사람의 제 일된 목적이 무엇인가?"와 같은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제 일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칼빈이 인간에 대해서 다루는 근본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기 위함임을 깨닫는다.
칼빈이 "우리들이 자신들의 비참상과 빈곤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가져온 처방의 가치를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며 그에게 충분한 애정으로 다가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이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자신들의 비참함을 의식하게 되어야 비로소 열심히 달려가 그 처방을 우리에게 적용하지,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는 그것을 조금도 평가하지 않는다"154)고 말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본 글은 이러한 칼빈의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다음과 같은 차례로 전개할 것이다. 'Ⅰ. 서론', 'Ⅱ. 죄의 문제'에 대해서 다룰 때, 먼저는 'A. 하나님과 인간'이란 제목으로 칼빈의 인간론의 출발의 독특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부터 최종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과 더불어 생각해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배워보고, 인간의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다룰 것이다.
다음으로는 'B. 인간과 죄'라는 제목으로, 왜 인간을 전적으로 부패했다고 말하며,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본다. 'Ⅲ. 자유의지 문제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먼저는 'A. 죄와 자유의지'를 다룰 때, 죄로 물든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의 의가 구원의 근본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칼빈이 말하는 성경적 구원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다루고, 이어서 궤변론자들이 말한 잘못된 주장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B.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까지 다스리시며 섭리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라고 할 수 없는 것과, 이에 대한 이유로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를 찾아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제 이 원인을 무시하지 않는 방식에 대한 것까지 살펴보기로 하자.
Ⅱ. 죄의 문제 대해서
A. 하나님과 인간(칼빈의 인간론의 출발의 독특성)
칼빈의 인간론의 위치는 신론과 상호 관련하여, 즉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만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그리고 다음으로 인간에 대한 지식에 대해 사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5) 칼빈이 '인간의 지식'에 대해 다루었던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칼빈이 어떤 인간의 지식에 대해서 다루고 있냐는 것이다. 그에 대한 바른 이해는 다음 김영규 교수의 말에서 도움을 얻도록 하자.
칼빈에게 있어서 자신을 알라는 것은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도 아니요 그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자아의 상태로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자아에 대한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자아요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자아이다.156)
이처럼, 인간에 대한 지식의 성격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아요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자아'157)에 대한 내용을 칼빈이 말하고 있다고 김영규 교수는 지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아에 대한 지식이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인간론으로 교리화 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 타락된 본성을 개혁주의 인간론의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이 인간의 지식을 말할 때 '하나님의 지식이 없이 참된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사상은 기독교 강요 1559년도 판에서 비로소 말한 것이 아니라 이미 1536년도 판에서부터 갖고 있던 내용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기독교 강요 1536년도 판에서 제Ⅰ권에 율법을 다룰 때 'a. 하나님에 대한 지식→ b. 인간에 대한 지식→ c. 율법→ d.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e. 십계명 강해'와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처럼 초판에서부터 인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158) 칼빈은 1559년 판 제Ⅰ권 1장 1항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아에 대한 지식이 다음과 같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빈곤으로부터 하나님 안에 무한한 선이 있음이 더 분명해 지고 있다. 특별히 최초 인간의 실수로 빠지게 된 그 비참한 파멸은 위를 바라보게 한다. 이는 거기에서 굶주리고 배고픈 자로서 우리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갈구할 뿐만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자로서 겸손을 배우기 때문이다. … 그와 같이 우리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마지막으로 타락과 부패의 지각으로부터 오직 하나님 안에 지혜의 참빛과 건전한 덕, 완전하고 차고 넘치는 선들, 의의 순결함이 있음을 깨닫는다. …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선을 생각하도록 우리는 자극을 받는다.159)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그 직관으로부터 내려와 자신을 관찰하지 않으면 그의 순수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성격은 당시 로마교회의 우상숭배적인 무지한 맹신을 반대하는 개혁신앙의 독특한 내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시 97:7절160)에 대한 주석에서 이러한 내용을 잘 보여주는데, 영적인 지각이 둔한 자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갖자마자 근거없는 미혹에 빠져버려 각기 자기를 위하여 신을 만들고 잡다한 발명품 중에서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을 골라 섬기게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 낸 헛된 것들 안에서 방황하게 되는데, 태양이 어두움을 물리치듯이 그들의 우매함을 물리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칼빈은 정의한다. 다음 칼빈 주석의 내용은 이러한 이해를 더 잘 도울 것이다.
모든 사람은 본래부터 그들 안에 종교에 관한 어떤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연약할 뿐 아니라 우매하고 둔해서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각이 부패해 버린다. 종교는 이와 같이 모든 우상숭배의 시초가 된다. 그러나 본질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니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어두움으로 말미암아서 그렇게 된다. 그 마음의 어두움이 그들로 우상들과 참 하나님 사이를 구별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상숭배를 제거할 때 비로소 효력을 발생한다. …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사람들의 눈에 숨겨졌으므로 우리는 또한 세계 도처에 만연되어 있는 엄청난 우상숭배에 대해서 놀랄 이유가 없다는 사실도 역시 깨닫게 된다. … 참 교리에 대한 지식은 회교도와 유대교도와 교황주의자들 사이에 구분이 된다.161)
칼빈의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자극할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각성시키며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162)는 것이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이 인간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생각되어지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익히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 한마디로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공장"163)이라고 표현했으며, 우상숭배의 기원을 인간의 어리석음, 무지, 교만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가 부족하지 않는데도(자신을 인식하도록 많고 여러 가지 인자하심으로 인간을 친절하게 이끄심에도 불구하고) 인간 자신의 길, 즉 치명적 오류들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시 교황주의자들이라고 일컫는 로마 카톨릭의 잘못은 이러한 무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형상물을 가리켜 "무식한 자의 책"164)이라고 하는가 하면, 성자의 화상, 혹은 조상(彫像)과 동정녀의 조상을 만들어서 무식한 자들을 가르치기에 적당하다고 변명하였다. 하지만 칼빈은 이러한 어리석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러한 쓰레기 같은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교리를 배우기를 원하신다"165)고 말했으면, 그들이 무식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그렇게 무식하게 된 것에 대해서는 "그들을 교육하기에 적합했던 그 교리를 탈취당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임무를 우상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166)고 그 원인을 교회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에 돌리고 있다.
한 가지 참된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 개의 십자가상에서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칼빈의 지적은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도록 하지 않고, 인간의 감정만을 자극시키거나, 인간의 의지만을 신앙의 요소의 모든 것 인양 가르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가 되리라고 본다.
B. 인간과 죄(전적으로 부패한 인간)
칼빈이 제시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지식의 내용은 인간의 창조, 타락, 타락된 본성과 같이 3부분으로 생각해 볼 때, 칼빈은 주로 타락된 본성이 전전으로 부패하였다라는 부분을 가장 집중적으로 소개하려는 것을 보게된다. 즉 인간의 부패성과 그 죄악의 심각성을 가장 깊이 드러내 주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칼빈의 영향으로 "전적부패"의 내용은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167)168)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은 이런 성격을 명확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상태는 어떠했는가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아담이 타락한 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이 슬픈 파멸로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부패되었고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하다하면 우리가 인간 창조를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그다지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169)
칼빈은 기독교 강요 1536년판에서 아담이 실족하여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형상은 취소되고 지워졌다고 말하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모든 혜택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한다. 게다가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옮기워져서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 버려서 인간은 모든 지혜, 의, 능력, 생명을 박탈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우리 힘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도 없다고 분명하게 죄의 성격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으로 그분을 섬길 수 없고, 또한 그분의 뜻을 따라서 살 수 없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린 것이 인간의 가장 비참한 죄악의 내용임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죄악의 성격은 1559년판 2권 1-5장에 이르러서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되어지고 있다. 즉 칼빈은 "아담의 타락과 배반으로 인류 전체가 저주에 넘겨졌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원죄론)"라는 제목으로 인간의 타락과 그 비참성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언급해 주고 있다. 특히 우리는 칼빈이 여기서 제시해 주고 있는 인간의 죄의 성격과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먼저 칼빈은 인간의 지식에 있어서 무엇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수치심으로 우리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비참한 빈곤과 치욕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선한 특징들을 고려하라고 하는 원칙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사람의 본성은 남의 아첨을 받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자신의 천품이 높이 평가되는 것을 알 때에 사람들은 자기의 천품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와 같이 사람들이 이 점에서 대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맹목적인 자애(自愛)는 모든 인간의 천성이므로, 자기들의 천성에는 가증하다고 여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사람들은 가장 신선하게 믿어 버린다. 따라서 사람은 선하고 복된 생활을 할 풍부한 능력을 타고났다는, 이 완전히 허망한 견해가 아무 외부의 지지가 없어도 일반적으로 신뢰를 얻는다170)
이처럼 칼빈은 먼저 인간자신의 허망함과 부패와 비참을 바르게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인간의 지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언급해 주고 있다. 특히 그는 이와 반대적으로 인간의 자리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성격임을 지적하면서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적인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해로운 일인지를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우리에게서 자기의 능력을 믿는 모든 자신을 빼앗으며 자랑할 만한 모든 원인을 빼앗고, 우리를 복종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구하라고 요구한다. 지혜와 진정한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171)라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마치 무슨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제거해야 하는 것인지를 지적해 주고 있다.
이처럼 칼빈은 인간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자신의 비참함을 바르게 아는 것이 신앙의 근본적인 기초를 제시해 주는 것으로 소개해 주고 있다. 그는 "자기 성찰이 깊어 갈수록 더욱 낙심하며, 드디어는 일체의 자신을 빼앗기고 인생을 바르게 지도해 줄 것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172)라고 말하면서 이 지식의 근본적인 성격은 결국 자신의 곤핍함과 비참함을 알게 될 때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그분의 은혜로만 살려고 하는 신본주의적인 신앙을 세워가게 되는 중요한 기초라고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인간론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칼빈이 지적해 주고 있는 인간론의 핵심은 죄론이며, 또한 죄론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그분과 더 이상 교제할 수 없는 인간의 비참과 악함을 인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자기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살아가려고 생각하며,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것이 죄의 본질적 성격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에게로 향하며, 자신의 뜻과 힘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자체가 죄의 모습인 것이다.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는 칼빈은 죄에 대한 내용을 본격적으로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부정한 생각이 있었기에 여자는 뱀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다. 그러므로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였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목할 일은 처음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반역한 것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빠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멸시하고 허위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해서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의 존엄 또한 우리 사이에 거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경배도 여전히 완전하게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불순종이 타락의 근본이었던 것이다173)
이와 같은 칼빈의 지적을 통해서 우리는 원죄의 성격은 "불순종"임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의해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말씀만을 먹고살면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인간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했다라는 것이다. 즉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죄의 본질적인 내용이며 성격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죄를 말할 때는 단순히 윤리적인 잘못들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인간의 본질적인 목적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싫어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죄악의 내용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174)
칼빈은 이와 같은 죄의 성격을 더욱 깊이 드러내기 위해서 "배신", "배은망덕"이라는 표현을 제시하기도 한다. 계속해서 칼빈은 "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인 것 같으며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들고, 다음에는 성경에 '육체의 일'이라고 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울이 자주 '죄'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175)라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악한 죄악된 행동들을 하는 자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리고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을 칼빈은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계속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그리고 제2권 3장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부패에 대해서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받을 일밖에 없다"고 말함으로써 1536년도 판과 같이 인간의 전적 부패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성경 말씀은 로마서 3장을 들고 있으며176), 그리고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롬 8:6-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는 말씀 외에도 렘 17:9177), 시 14:1-3178), 53:1-3179), 시 140:3180), 시 10:7181), 시 36:1182), 사 59:7183)과 같은 말씀을 근거 구절로 제시하고 있다. 칼빈은 이러한 말씀은 어떤 특수한 사람만이 아닌 아담의 후손 전체를 공격하는 것이며, 어느 한 시대의 부패한 풍습을 비난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한결같이 부패한 것을 고발하는 말씀이라고 한다.
Ⅲ. 자유의지 문제에 대해서
"칼빈의 예정론"이라는 책을 쓴 로뢰인 뵈트너(Loraine Boettner)는 그 책의 목적이 "새로운 신학사상 체계를 수립하려는 데 있지 않고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신앙 혹은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칼빈의 신학 체계를 저술하여 그 교의가 분명히 성경적 교훈이요 또한 이성적 교훈이라는 것을 밝히 제시하려는 데 있다"184)고 밝힘으로써 그의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 칼빈의 예정론은 지극히 성경적인 교리이다. 칼빈은 항상 성경이 인도하는 곳까지만 갔고 성경이 머무는 곳에서 머물렀다. 이것이 그의 성경해석의 매우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이러한 정신의 원리를 갖고 성경적으로 다루고자 했음을 전제하고 다음의 내용을 살펴야 할 것이다.
특히 칼빈이 지금까지 인간의 죄와 그 성격을 어떻게 정립하고 있는지를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칼빈의 인간의 지식으로서 인간의 비참과 부패와 악함을 가장 중심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 죄악을 행하는 가장 본질적인 주체는 바로 인간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죄를 범했음을 지적해 주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성격으로 의지에 대한 의미를 칼빈은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A. 죄와 자유의지
1) 인간의 구원의 원인은 자유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
칼빈은 인간의 구원의 원인, 즉 선택의 원인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히 언급한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다른 무엇보다도 로마서 주석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만일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언약에 이르게 되면, 그들 또한 그의 자녀들이 된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 이 사실에 대한 실례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이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생각되는 하나님의 선택을 다룬다. 우리의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려있기 때문에 선택의 원인을 인간에게서 찾는 것은 헛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유기가 있다. 이 유기의 정당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최고의 원인은 하나님의 뜻이다. 185)
이 말은 선택의 원인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혹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신인협력이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는 내용을 그는 기독교 강요와 주석에서 매우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기독교 강요 제2권 3장에서는 인간의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과 의지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의 근거 구절로 먼저는 빌 2:13절186)을 들고 있다. 이 말씀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는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다 풍성한 설명이 있다. 칼빈에 의하면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의지란 인간이 자기의 행동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것, 그리고 독특하고 분리된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자유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키어 올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함으로써 자유의지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한 의지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고 하지만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어떤 행동에 있어서 의지와 유효적 능력, 둘 다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의 마음이 단순히 돌아섰거나, 뒤섞여져 있으므로 선한 의지가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선한 의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근거 구절로 칼빈은 고전 12:6절187)을 들고 있다. 칼빈은 이 말씀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은 믿는 자들이 각각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능력의 근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귀절에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로 더듬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은사를 주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관대하심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제외한다면 인간은 어떤 선이나 칭찬 받을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188)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에게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보다 더 풍성한 설명은 칼빈의 엡 2:10절189) 주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 것이요, 인간에게는 구원 얻을 만한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말씀으로써 인간에게 있는 선행은 모두 중생의 열매이며, 행위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의 일부임을 가르친다고 한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선행이 모두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하고 있는 이상, 자유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엡 2:10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또 나중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의지가 준비되어 있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은혜를 할 수 있는 대로 약화시키려는 무리가 항상 지껄이듯이 먼저 올바른 선택의 능력이 우리에게 부여되고, 그 다음에 둘 중 자기가 원하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에 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요, 우리에게 있는 좋은 것은 모두 하나님의 지으신 것들로써, 옳은 의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빌 2:13, 고전 12:6, 엡 2:10절 말씀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이란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 인간이란 죄로 말미암아 구원에 관한 아무런 공로를 주장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따른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을 뿐이다. 칼빈은 이 외에도 엡 2:5, 시 100:3절과 같은 말씀을 이에 대한 근거 구절로 제시하고 있다.
2) 인간의 칭의 역시 자유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
신자라고 해도 구원의 원인은 물론이거니와 칭의에 따른 원인을 사람의 행위로 돌릴 수 없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영생이 행위에서 나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볼 때 우리는 인간의 행위에 따른 공로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들의 선행 때문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사람의 행위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그의 기독교 강요 제3권 14장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성경에서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닌데, 칼빈은 이에 따른 문제를 다음과 같이 풀어나가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혹은 영생을 얻는 동력인(the efficient cause, 유효적 원인)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며, 질료인(the material cause, 질료적 원인)은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이며, 형상인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the final cause, 최종적 원인)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이러한 네 가지 원인과 성경에서 영생이 선행(행위) 때문이라고 말하는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이 네 가지 원인은 주께서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으로 삼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영생을 상속하도록 자비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 인도하셔서 영생을 소유하게 만드실 때에 그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의 수단으로 그렇게 하신다. 그래서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롬8:30), 앞에 온 은혜를 다음에 온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신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을 찾아야 할 때에는 행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보게 하신다.190)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은혜 위에 은혜를 쌓아올리심으로써 앞에 있는 은혜를, 다음에 따르는 은혜를 첨가하는 원인으로 삼는 것에 대해 칼빈은 그의 종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베풀어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만사의 근원이며 시작인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택을 항상 주목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을 사랑하시지만, 그 선물들의 근원은 선택에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값없이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준다고 까지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후에 베풀어주시는 성령의 선물들을 제일 원인에 종속시키며, 그 선물들이 선택의 가치를 결코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칼빈의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회개 및 칭의에 대한 이해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해져 있는 웨슬리의 신학191)과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칼빈은 말한 동력인,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에 대한 성경의 실제적인 예로 요 3:16절을 들고 있다. 우리는 '저를 믿는 자마다'를 강조하여 마치 영생이 믿고자 하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우나, 칼빈은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동력인으로, '독생자를 주셨으니'는 질료인으로, 저를 믿는 '믿음'을 형상인으로 말한다. 이러한 이해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라 의롭게 된다던가,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는 엡 1:4-6절192)을 들 수 있는데, 칼빈은 이 말씀에 대한 주석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가 여기보다도 더 엄숙하게 선포된 구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193)고 말할 만큼 중요시 여기고 있다. 칼빈은 4절에 대한 주석을 통하여 구원의 근본적인 원인을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돌리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른 선택의 원인(동력인)에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5절에서는 동력인, 질료인 대한 두 가지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첫째로 동력인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양자로 삼으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를 예정하셨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납하셨다는 전체적인 문맥에 내포되어 있다. '예정하사'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 말에 순서에 좀더 주의해야 한다. 그 때는 우리가 아직 존재하기 전이다. 따라서 우리편에는 아무런 공덕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원인은 우리 인간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이 정도의 서술로써 만족하지 않고 '그의 안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이로써 그는 분명히 하나님은 자기 밖에서 원인을 찾으시지 않았고 다만 그의 뜻으로써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 끝으로 그(바울)는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이란 말씀을 보충하고 있다. 이 말씀은 마치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것처럼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어떤 공덕이나 이유에 근거한 사랑이 아니고 값없는 은총에 의한 사랑이며, 또 우리를 마음에 맞는 자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영원한 선택과 지금 밝히 드러난 사랑, 곧 질료인은 '그리스도'인데,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까지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했다.194)
이 뿐만이 아니라 7절에서는 먼저는 질료인에 대하여, 그리고 동력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요구를 만족시켜 드렸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질료인에 관한 내용이며, '그 은혜의 풍성을 따라'는 하나님의 풍성한 능동적 친절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 보내주셨다는 것을 말하기에 이것은 동력인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8절에서는 형상인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제 바울은 형상인의 복음전파에 관하여 서술하게 되었는데, 복음 전파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애가 우리에게까지 흘러 넘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의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되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양자의 은혜를 누리기 때문이다.195)
이러한 내용을 상고해 볼 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함에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것이 인간이 자유의지로 '현재 회개하고 믿음으로'라는 개념과는 근본적 성격이 다름을 배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이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에 대해서 칼빈은 더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택하여 주시고(동력인), 그리스도의 순종하신 은혜 가운데(질료인) 전하여 준 복음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형상인) 구원으로 이끄신 최종적인 원인(목적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엡 1: 13-14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3) 죄와 자유의지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잘못된 주장과 칼빈의 의견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칼빈이 질문 받았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그에 따른 칼빈의 답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도 동일한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을 제시해 보자.
① 궤변가라 불리운 자들과 칼빈
칼빈에 의하면 궤변가들이 칼빈을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고 한다. "순전한 은혜가 없이는 선을 조금도 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가르쳐서 사람을 마치 돌과 같이 만든다".
칼빈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수치스러운 행위라고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의지는 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악하여졌지만 하나님께서 재형성시켜 주실 때에는 선하게 되기 시작한다고 본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이도 어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경향성이 성령으로 지배되어질 때에 선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야 우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적용된다는 것과, 궤변철학자들의 교훈이 어리석다는 것, 그리고 은혜가 우리에게 제공되어 우리들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선을 택하고자 하면 할 수 있도록 하여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196) 따라서 칼빈은 사람을 돌과 같이 만드는 궤변가들의 주장을 일축시키고, 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선한 의지를 행사하도록 하는 분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② 롬바르드와 칼빈
다음 질문은 기독교 강요 제2권 3장 7항에 나오는 내용으로서 칼빈이 말하는 롬바르드의 주장이다. 롬바르드는 "의지가 그 본성으로는 선을 버리며 오직 주의 권능에 의해 전향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의지는 일단 준비된 다음에는 그 전향에서 독자적인 구실을 한다"고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이러한 롬바르드의 주장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왔다고 한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보면, 모든 선행에는 은총이 먼저 작용하며, 의지는 은총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종자로서 그 뒤를 따른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롬바르드의 주장은 잘못된 이해라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은총이 의지를 앞지른다는 의미에서 사람의 의지를 '수종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개조된 의지는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의지가 수종자가 되어 앞서가는 은총에 복종하는 것을 사람의 공로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인간의 의지를 은총의 수종자라고 한 어거스틴의 생각은 선행에 있어서 은총이 다음가는 임무를 의지에 배당하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구원의 제일 원인을 사람의 공로에 돌리는 펠라기우스의 극악한 주장을 반박하려는 것뿐인 것이다.
③ 크리소스톰과 칼빈
크리소스톰은 의지와 은총의 관계를 "의지가 없으면 은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은총이 없으면 의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크리소스톰의 의지와 은총에 대한 관계의 이해는 빌 2:3절에서 말한 '은총이 의지까지 움직인다'는 것을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칼빈은 지적한다. 나아가 크리소스톰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이끌리기 원하는 사람이다"197)라고 자주 반복하여 말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해 왔거나, 할 수 있는 표현처럼 보인다. 하지만 칼빈은 이 말을 물리쳐야 할 말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크리소스톰의 말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가르치며 믿어 왔을 정도로 칼빈 당시에도 만연했음을 그는 지적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수 백 년 동안 하나님께서 움직이신 후에 거기에 대한 복종이나 항거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라고 믿어 왔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고 우리가 그 도움을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과 같은 뜻이기에 사람들이 그 동안 잘못 생각해 왔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이다. 칼빈은 그럴 경우에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고 다음과 같이 자유의지의 성격을 재정립해 준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서 결심하시며 역사하실 수 없다면 자유의지가 얼마나 가련한 것인가를 사람이 실지로 분명히 보여 주었으니,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 이렇게 적은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희미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도가 가르치는 것도,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선한 의지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심정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인 듯이 성령으로 지시하며 굽히며 주관하며 지배하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198)
이러한 칼빈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는 크리소스톰의 주장과 같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이끌리기 원하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이미 친숙해져 있지 않은가?
B.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
1) 하나님의 섭리가 자유의지에까지 미친다고 해서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선을 조금도 행할 수 없는 돌과 같은 존재냐고 궤변가들이 칼빈에게 질문했다는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선인이건 악인이건 인간에 관한 한 그 계획, 의지, 노력, 능력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배 하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시며 또 원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제재하시기도 하신다'199)는 말씀을 오해해서 죄까지도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져야 된다고 할지 모르겠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는 죄까지도 미친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이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전능한 권능과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한 인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널리 나타나서, 저 처음 타락뿐 아니라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다른 죄에까지 미치며, 단순히 허락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가장 현명하고 강력한 제한과 정리와 지배를 여러 가지 조치로 첨가하셔서, 자기의 거룩한 목적에 합치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사태의 죄성은 피조물에서 오고 하나님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셔서 죄를 시작하시거나 죄에 찬성하시지 않으며, 그렇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200)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지은 죄까지 영향을 미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나 시인자가 아니라는 것은 칼빈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까지 동일하게 고백하였던 내용이다. 그러한 좋은 예로 창 45:8절201)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들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사람들이 '인간의 모든 노력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지 않고는 성취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기를 주저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정의가 불경스런 자들의 모독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일은 '도모하시기'만 하고, 또 어떤 일은 되도록 '허용하신다'고 구별하는 수를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이러한 타협을 인정하지 않는다.202) 이것은 단순히 칼빈의 사적인 견해라기 보다는 적정과 절도의 원리에 입각한 성경적 견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일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가도록 '허용하시기'만 하셨다면, 하나님은 요셉을 그의 아버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구원의 사역에 예정하신 것이 아닌 것이 되는데, 성경은 요셉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인에 대한 행동의 책임을 하나님께 물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수난을 이용하시어 놀랍게 역사하시며,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추행에서도 당신의 완전한 의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는 출 7:13203); 14:17204)절에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 군사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나온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바로 앞에서 이적을 보였음에도 그가 강퍅했던 것과, 애굽 군사들이 홍해의 이적을 보고 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홍해 가운데로 뒤쫓아 온 무지함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의 눈이 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행 2:23205)절에서는 성자의 죽음은 이미 성부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외에도 행 3:18206)절이나 4:27-28207)절의 말씀을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을 무시하고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 인용구는 이러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신비하여 우리로서는 다 이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의 방탕한 육체가 거기에 거역하려든다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러나 각별히 조심하여, 이 숭고한 표준을 우리의 치졸한 계산으로 끌어내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항상 이 같은 생각을 지니고 살자. 인간의 욕망이 날뛰어, 무절제하게 이리저리 사람을 몰고 다니더라도, 하나님만이 치자(治者)이시며, 은밀한 굴레로 인간들의 거동을 통제하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너무나 다르게 행동하시며, 하나님의 섭리 자체는 어떠한 사악함도 달라붙을 수 없으며, 나아가서 그의 길은 인간의 범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 또한 가슴깊이 간직해야 한다.208)
여기서 칼빈이 강조하는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지적한 잘못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칼빈의 지적처럼 부패한 인간의 욕망과 무절제 때문이다. 그것은 곧 인간의 죄악 때문인데, 칼빈은 불경건한 자의 죄악에 대해 '사탄의 역사'라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라도 죄악의 원인을 사람의 의지 밖에서 찾지 않고 있는데, 사람의 의지에서 악의 뿌리가 솟아나며, 사람의 의지가 사탄의 나라의 토대 즉, 죄의 토대가 된다고 한다.209) 따라서 칼빈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나 역시 자진해서 짓는 것이라 말한다.210) 김영규 교수는 죄에 관련한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칼빈의 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칼빈은 악의 현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죄 허용(permissio)이나 예지의 개념으로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하나님의 의지와 행위의 개념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때 3중 행위개념으로 설명되고 있다. 즉 성경의 여러 증거들과 특별히 욥기서의 근거에 의해서 인간도 친히 행하고 동시에(simul) 하나님도 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특별히 다른 방식으로 행하고 다른 목적에서 행할 뿐이라고 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사탄을 하나님의 협력자로 변명하거나 하나님을 악의 원인자로 돌림이 없이도 같은 일의 동인자로서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에게 돌릴 수 있다고 한 것이다211)
어떻게 사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들거나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만드는 일이 없이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같이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칼빈은 우선 행동의 목적을 생각하고 다음에 행동하는 방법을 생각하면 문제의 해결이 쉽다고 말한다. 먼저는 행동의 목적에 있어서, 주의 목적은 재난으로 자기의 종의 인내심을 단련하려는 것이었고, 사탄의 목적은 욥을 절망 상태에 몰아 넣으려고 애썼고, 갈대아 사람들의 목적은 법과 공의를 어기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이익을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행동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는데, 주님의 방법은 자기의 종을 사탄이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시며, 심부름꾼으로서 강대아 사람들을 택하여 사탄의 지배 하에 넘겨주셨고, 사탄의 방법은 독을 묻힌 창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자극하여 그 악행을 실천하게 만들었으며, 갈대아 사람들의 방법은 미친 듯이 범죄로 돌진해서 온 지체를 죄로 물들이며 더럽혔다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행위를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에게 돌리는 데는 조금도 모순이 없으며, 목적과 방법을 구별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아무 흠 없이 빛나며, 사탄과 사람의 추악한 행동이 그들의 사악함을 폭로한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이다.
우리는 이러한 깊은 성경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통해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죄의 문제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숙명론이나 운명론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방식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느 한 쪽을 포기하게 되는 것 같다. 자유의지를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를 이야기하다보면 마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운명론적 혹은 숙명론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을 운명에 맡겨진 그러한 존재로 말하지 않는다. 칼빈은 이러한 사고를 갖고 있는 스토아 학파와 같지 않다고 기독교 강요 제1권 16장 8항에서 잘 설명한다. 숙명론이 아닌 하나님을 멀고 먼 영원으로부터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지혜로 작정하시고 일단 작정하신 것을 지금은 권능으로 수행하시는 만물의 지배자요 통치자로 삼으며, 하늘과 땅 그리고 무생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의지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림을 받아 지정된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단언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빌어 운명론이 아닌 이유에 대해서 풍성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만일 무엇이든지 모두 운명에 맡겨 버린다면 세계는 목적없이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였고,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만사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자유 선택으로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주장했지만 곡 이어 그는 인간은 섭리에 종속되어 있는 동시에 또한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충분히 논증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동시에 또한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충분히 논증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하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다는 원리를 취하였다는 원리를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되는 대로 발생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212)
칼빈의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우연이나 운명을 내세워 피조물과 모든 자연의 질서를 설명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한다는 말과 같음을 깨닫는다. 나아가 칼빈은 어떠한 우연한 일도 인간의 의지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배척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칼빈은 우리의 아둔한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의 높이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의 참된 원인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다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깊은 내용은 앞에서 다룬 기독교 강요 다음에 나온다.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확실한 분배에 따라 제정되었으나, 그것들이 우리에게는 우연적이라고 생각될 지라도 하나님께서 만물을 되는 대로 두신 것이 아닌데, 이것들의 질서, 이유, 목적, 필연성은 그 대부분이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하나님의 의지로 발생하는 것들도 운명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이러한 칼빈의 섭리에 대한 이해는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만물의 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장 지혜로우시며 거룩하신 섭리에 의해 그의 정확 무오하신 예지, 또는 자유로우며 변함없는 자신의 뜻의 도모에 따라 가장 큰 것에서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과 행위들과 일들을 보호하시며, 지도하시며, 처리하시며, 통치하시어 그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하심과 긍휼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신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1)
이뿐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장 2항에서는 제일 원인이신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에 따라 만사가 틀림없이 변화가 일어나지만 같은 섭리에 의해서 하나님은 제이 원인213)의 성질에 따라 만사가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혹은 우연히 되어지게 정리하신다고 말한다. 칼빈이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었던 내용은 스토아 철학자와 같은 사고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귀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로 성경 전체를 이해한다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겸손한 우리의 모습을 찾고 깊은 위로를 받으리라고 생각한다.
Ⅳ. 결론
본인은 이와 같은 칼빈의 인간론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자리를 찾게 된다. 죄로 부패한 인간의 자리,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께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고백하는 자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섬겨야 할 자리를 찾게 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깨달아 알아 가야 할 은혜의 선물로 여겨야 마땅하다는 것을 배운다. 또한 칼빈의 학문은 단순히 성경을 연구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늘 그가 말했듯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먹고 마시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슬픔과 고통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음"214)을 배울 수 있다. 성경 안에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당시 로마 카톨릭의 부패를 부숴뜨리고 바른 신학의 내용을 토대를 쌓고자 했던 저항정신이 있었음을 본다. 오직 "주님만이 왕이시고 모든 것에 앞서서 그리고 모든 것 위에 그의 말을 들어야 되며 우리보다 높은 상전에게 복종하되 그 분 밖에서 복종해서는 안 된다"215)는 칼빈의 정신을 되새기며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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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윤, 칼빈이 본 인간, 신학정론 제13권 2호, 19995년 11월.
조종남, 새천년 성령 운동의 지표와 방향, 국제신학연구원 편, 2000.
미주
154) 칼빈, 이사야Ⅳ 주석, 성경주석 출판위원회 역, 성서교재간행사, 1990. pp. 124-125.
155) 김영규 교수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들의 지식이 상호 서로 관련되고 있다고 보더라도, 먼저 전자에 대해 논의하고 다음으로 내려가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라고 생각하고 있다"(김영규, 기독교 강요 강독 1, 미간행, 안양대학교신학대학원, p. 32).
156) Loc. cit.
157) 신복윤 교수는 칼빈을 비관적 인간관의 주창자로 생각되고 있지만 염세주의에 사로잡힌 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완고하고 부패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때에만 우리는 구원의 유익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칼빈은 일반적으로 철저한 비관적 인간관의 주창자로 생각되고 있다. 분명히 칼빈은 여러 곳에서 그러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칼빈은 인간을 '겨우 5척밖에 안되는 버러지'라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병적으로 자기를 혐오하는 우울한 염세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과학, 의학, 문학, 예술 그리고 다른 학문분야들을 매우 소중히 여겼던 인물이었다(신복윤, 칼빈이 본 인간 1, 신학정론 제13권 2호, 1995. 11. p. 330).
158) 김영규 교수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들의 지식에 대한 논의에 대한 1536년도 판과 1559년도 판의 차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논의 순서는 이미 1536년에 율법에 대한 해석을 다루기 전에 취급된 방식이다. 비록 하나님의 지식 없이 자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다는 사상이 1559년만큼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을지라도, 이런 순서가 그 본래적인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559년 판에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서 따로 다루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 책의 모든 근저로서 자리를 잡았어도 위의 1536년의 의도는 각 책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다만 1536년 판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던 실천적 의미가 후에 그런 조직화 때문에 외적으로 감추어졌다는 느낌을 얻고 있다"(김영규, 기독교 강요 강독 1, op. cit., p. 32-33).
159) Ibid., p. 30.
160) 시 97:7 :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161) 칼빈, 시편Ⅳ 주석, p. 169.
162) 김영규, 기독교 강요 강독 1, op. cit., p. 51.
163) John. Calvin, 기독교 강요Ⅰ, 김종흡,신복윤,이종성,한철하 공역, 생명의말씀사, 1994(1559판)(이후 Inst 라함). p. 183.
164) Ibid. p. 181.
165) Loc. cit.
166) Loc. cit.
167) 도르트 회의를 통해서 칼빈의 5대 교리라고 불리워지는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168) 서울신대 학장인 조종남박사는 인간의 전적 부패에 관해서 요한 웨슬리 신학 역시 같은 입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 인용문을 통해서 웨슬리가 인간의 전적 부패를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회개를 촉구하는 방식이 칼빈과 전혀 다름을 깨달을 수 있다. "웨슬리는 복음을 말함에 있어 먼저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 구원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웨슬 리가 인간의 죄를 심각히 인지한 점에서 종교개혁자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상실했고 영적인 생명의 관계를 상실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자유의 기능은 부패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과 순종은 자기사랑과 자기의지로 대치되었다.
그러므로 웨슬리는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고 보았다. '진노의 자식'이란 원죄의 죄책을 함축하는 말이다. 곧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책이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영아도 원죄를 물려받은 죄인이며, 따라서 결국 그리스도가 없다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말하기를 '이것이 이방종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첫 근거'라고 한다. 그리고 이 진리는 '은혜를 받은 영안'에만 알려진 진리요, 이방인과 눈이 먼 자연인은 식별치 못하는 진리로서, 이방인들은 자기의 부패를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기에 웨슬리는 '은총 만이요'를 주장하는 정통 신학자이다. 일부에서 웨슬리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 하여 그가 마치 자유주의 신학자이니, 인본주의 신학자이니 하는 말은 웨슬리를 올바르게 이해 못한 데서 나오는 주장이다.
웨슬리는 그의 동역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죄를 강조하는 면에서는 칼빈주의 끝에(very edge of Calvinism) 이르렀다고 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어떻게 역사 하느냐에서 머리칼 하나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여기에 우리는 웨슬리가 개진한 은총관의 특징과 그 선교학적 공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웨슬리는 그의 신학을 설교의 광장에서 개진했다. 그러므로 웨슬리의 신학은 선교와 직결되어 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가르침'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련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이런 출발점에서 웨슬리는 설교 도장에서 청중이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며 또한 동시에 듣는 자의 호응(회개와 믿음)을 호소하였다"(조종남, 새천년 성령 운동의 지표와 방향, 국제신학연구원 편, pp. 11-12).
169) Inst1.15.1.
170) Inst2.1.2. "자기의 참화와 빈곤과 벌거벗음과 치욕을 깨닫고 완전히 타도되며 압도된 사람은, 그렇게 됨으로써 자기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이 전진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도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한 그들에게서 자기의 것을 너무 많이 빼앗길 위험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 사람은 반드시 허무한 자신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여 신성모독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 참으로 이 욕망이 우리의 마음에 침입해서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강요한다면,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처음 조상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기를'(창3:5) 원하라고 권고한 바로 그 모사(謀士)가 우리에게 이 생각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게 하는 것이 악마의 말이라면, 원수의 충고를 듣고 싶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의 말을 용인해서는 안된다"(Inst2.2.10).
171) Inst2.1.2
172) Inst2.1.3.
173) Inst2.1.4.
174) "아담이 그의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에게서 멀어진 것은 영혼의 죽음이 되었다"(Inst2.1.5).
175) Inst2.1.8.
176) (롬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3: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77)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78)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179) (시53: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53:2)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53:3)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180) (시140:3)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셀라)
181) (시10:7)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182) (시36:1)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183) (사59: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184) 로레인 뵈트너, 칼빈의 예정론, 김남식·홍의표 역, 도서출판 베다니, 1996. p. 15.
185) 칼빈, 로마서주석, op. cit., p. 31.
186) 빌2:13 :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87) 고전 12:6 :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188) 칼빈, 고린도전서 주석, op. cit., P. 356.
189) 엡 2;10 :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90) 칼빈, 기독교 강요 중, op. cit., pp. 324-325.
191) 조종남 박사는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하여 강조할 성령운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를 말하였다. ① 교회의 강단은 복음적 전도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 웨슬리 운동에서 그랬듯이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전도 메시지가 분명하며 메시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② 성결 곧 성령 충만의 생활을 강조한 것이다 ③ 웨슬리는 성령충만의 본질을 완전한 사랑으로 강조하였다 ④ 교회를 새롭게 그리고 활기 있게 하기 위하여 웨슬 리가 했듯이 평신도들을 훈련하여 봉사케 하여야 한다 ⑤ 웨슬리의 갱신 운동에서 보는 것은 지도자 자신의 성령체험과 경건 생활이다.
조종남 박사는 여기서 두 번째 강조한 성령 충만의 생활과 관련하여, 예정론에 대해서 칼빈과 같은 이해가 아닌 다른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는 예정론을 다음과 같이 무시하고 있다. "일부에서 가르치는 대로, 인간이 악을 가지고 있기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거나, 또는 그러니까 신자는 죄를 지어도 예정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대로 참다운 갱신의 동기가 생기지 않는다. 여기서 웨슬리가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현재 여기에서 우리를 성령충만으로 마음을 깨끗케 하실 수 있다고 기대하는 가운데, 회개와 믿음으로 그 은혜를 사모하며 나갈 때, 새로운 부흥과 갱신이 있게 될 것이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는 성화의 역사는 바로 교회를 새롭게 하는 역사인 것이다"(조종남, 새천년 성령 운동의 지표와 방향, op. cit., pp. 37-50).
칼빈의 예정에 대한 다음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위의 내용과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은 현재 여기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선택은 신자의 삶을 방종하게 만드는 것도 아님을 배울 수 있다. "거룩함과 무흠함과 인간이 지닌 모든 미덕은 선택의 열매라는 결론을 짓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여기서 인간의 공덕을 중요시하는 생각을 뒤집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선택할 만한 가치를 예견하셨다고 하면, 그가 여기서 언급한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것을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말하기를 거룩하고 흠없이 사는 것은 무릇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증언하고 있는 대로 선택은 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서 바울은 그렇다고 선택이 방종의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은 선택한 자를 부르시고 또 의롭다고 하시기 때문에 선택의 은혜와 거룩한 생활을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예정설을 마치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처럼 생각하여 무섭게 여기고 피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예정설을 무익하고 온통 해독스러운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예정설을 바울이 여기서 다룬 것처럼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며, 또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도록 올바르고 진지하게 잘 다룬다면 이것보다 더 유익한 교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에 관한 지식을 넘치게 하는 참된 샘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핑계하려고 하지만, 선택은 자신들의 어떤 주장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저들의 입을 막아버린 것이다"(칼빈, 에베소서 주석, op. cit., pp. 261-262).
192) 엡 1:5-6 :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193) 칼빈, 에베소서 주석, op. cit., p. 263.
194) Ibid., pp. 263-264.
195) Ibid., pp. 265-266.
196) 칼빈, 빌립보서 주석, p. 505.
197) 칼빈, 기독교강요 상, op. cit., p.441
198) Ibid. p.441-442.
199) Ibid. p. 333.
200) A. A. Hodge,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해설, 김종흡역,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8. p. 132.
201) 창 45:8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202) 칼빈은 '허용'이라는 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어거스틴)가 자주 사용한 '허용'이란 말이 어떠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최고의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라고 그가 증명한 데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 확실히 그는 한가하게 높은 망대에 앉아서 이것저것 허락하기를 즐겨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공상하지는 않았다. 그가 간섭이라고 말하는 의지는 말하자면 현실적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원인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칼빈, 기독교 강요 상, op. cit., p. 320).
203) 출 7:13 :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204) 출 14:17 :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205) 행 2:23 :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206) 행 3:18 :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207) 행 4:27-28 :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08) 칼빈, 창세기Ⅱ 주석, p. 411-412.
209) 칼빈, 기독교 강요 상, op. cit., p. 451.
210) 이러한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칼빈은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이 든 비유를 인용한다. "어디선가 어거스틴은 사람의 의지를 기수(騎手)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과 비교하고 하나님과 악마를 기수와 비교했다. '만일 하나님이 타신다면 온건하고 수련된 기수시기 때문에 말을 올바르게 인도하신다. 느릴 때에 박차를 가하시며, 너무 빠르면 고삐를 당기시며, 너무 거칠거나 너무 광태를 부리면 억제하시며, 도중에서 인 가겠다고 앙탈할 때에는 억눌러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악마가 안장에 올라앉게 되면, 모든 미련하고 방자한 기수와 같이 말을 난폭하게 몰아 길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도랑에 처박으며, 벼랑에서 뒹굴게 하며, 찌르고 괴롭혀 결국 고집을 부리며 난폭하게 만든다.' 더 좋은 비유가 생각나지 않으므로 우선 이것으로 만족하겠다. 자연인의 의지는 악마의 세력에 예속되어 그 선동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당연히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노예들이 싫으면서도 복종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의지는 싫어서 반항하면서도 악마의 명령을 듣도록 강요를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반대로 사탄의 간계에 사로잡혀 있는 의지가 필연적으로 항상 시키는 대로 순순히 복종한다는 뜻이다. 주께서 자기의 영으로 인도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을 주님은 공정한 심판으로 사탄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신다"(Ibid., p. 451).
211) 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개혁 정신, 미간행, 1999. p. 33.
212) 칼빈, 기독교 강요 상, op. cit., p. 319.
213) 이러한 제이 원인을 무시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기독교 강요 제1권 17장 6항과 9항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만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발생되며 무엇 하나 우발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물의 근본 원인으로 바라보며 2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Ibid., p. 333).
214) 김영규, 엄밀한 개혁주의와 그 개혁 정신, op. cit.,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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