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
어거스틴은 바울 이후 신학을 가장 잘 집대성한 신앙인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적 이론에 대해 수세기 동안 비판이 있었지만 그의 사상을 훼손시키거나 변경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그의 이론은 도전을 받고 있지만 그 도전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전성기의 말기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로마는 전성기를 맞아 지중해의 무역 중심국으로 대제국을 건설하고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문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죽을 무렵에는 대제국의 면모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무너졌습니다. 그 시대 분위기는 로마인들조차 로마와 로마 지도자들의 위대함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가치있는 일을 시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는 닥쳐올 위험을 막연히 인식하면서 불안해하고 내적인 세계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에 거세게 반항하다가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후 로마의 식량 공급지로 전락한 북아프리카에서 A. D. 354년에 태어났습니다. 이 곳은 어거스틴이 교육을 받고 복음 사역을 감당한 어거스틴의 일생의 터가 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는 카르타고의 베르베르 종족인데 종족의 특징은 작은 키, 검은 피부, 넓은 어깨, 좁은 엉덩이의 신체 조건을 가졌고 성격은 신경질적이고 극성스런 기질을 갖춘 전형적인 전투사들이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세계로 영토를 넓히던 로마를 위협한 하니발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가난했습니다. 그의 성격은 수집어하는 편이었지만 명석하고 다소 괴팍스러웠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빨리 숙달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무관심하는 편으로 편집증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불성실하고 무뚝뚝하며 순각적으로 화를 내며 폭발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이 깊고 경건했으며 신중하고 모성애가 강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30년 기도로 어거스틴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남편도 말년에 개종시켰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고백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육신으로 나를 이 세상에 낳아주셨고 영적으로는 주님의 영원한 빛 안에 낳아주셨습니다."
그는 집안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출세의 수단으로 공부를 하려고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공부를 출세의 길로 여긴 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거스틴은 15세에 고등교육을 받기위해 고향 타가스테를 떠나 도시인 마다우라로 진학했습니다. 당시 마다우라는 거리마다 이방신들의 상과 신전이 즐비했습니다.
A.D. 313년에 '콘스탄틴 화약'을 통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었지만 이방신전과 상들이 교회당 옆에 건재했고 사람들은 임의로 신과 종교와 철학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서 어거스틴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언변만 늘었습니다. 마다우라의 교육은 '문학과 웅변술'을 강조했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수사학과 언변에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언변의 재료는 이방신들의 신화와 전설이고 여기에서 유추한 내용이 합리적인 설득방식으로 받아 들여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교육을 통해 신앙이 희미해져갔습니다.
결국 교회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출세와 여자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칭찬받으며 순진하게 신앙생활하던 그는 화려하고 다양한 것들을 맛 볼 수 있는 도시생활에 신앙을 잃어버렸습니다.
도시생활을 1년한 후 경제적 뒷받침이 없어 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목표를 상실하였고 그를 지도할 사람은 주위에 없었습니다. 이 기간에 행실이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더나아가 자신의 악행을 자랑하며 즐겼습니다. 후에 그는 고등 교육도 자신 속에 내재된 죄를 통제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행히 로마니아누스라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그의 후원자가 되어 카르타고의 교육을 받도록 비용을 대주었습니다. 카르타고는 국제적인 대항구도시였는데 온갖 불법과 성적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17살이면 결혼을 해서 안주할 나이였지만 세상 출세을 추구하는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출세에 대한 야심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수사학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우월감을 가질 정도로 세상에서 성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적 갈등 속에서 그는 열정을 쏟을 대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진리와 지혜를 열심히 찾고 이것들을 위해서 야심를 버리겠다고 결심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로마의 위대한 철학자, 정치가, 웅변가인 키케로의 사상에 심취되었고 '지혜를 연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으로' 보게되었습니다.
19살이 되던 때에 그의 부친이 죽었고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동거하는 여인을 얻게 되었습니다. 둘사이에는 아데오다투스(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카르타고의 3년 학교생활 후 수사학 교사로 귀향을 했습니다. 그는 키케로의 책 '호르텐시우스'에 심취되어 그 책을 강연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책에서 제기된 '행복으로 가는 탐구'라는 질문 때문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번역이 잘 못된 라틴어 성경과 구약의 전쟁 역사를 읽는 그는 성경를 더 이상 탐구할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카르타고에는 그리스도를 지혜의 원리로만 믿는 이성과 지성을 중시하는 마니교가 성행했습니다.
어거스틴같은 지식인이 매료당하기에 충분한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마니교는 자기의 죄를 변명할 수 있는 이원론적이고 구원이 지식과 깨달음에서 온다는 영지주위적인 종교였습니다.
그는 10년간 마니교에 심취되어 방황하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서 논쟁에 대한 열의와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는 순진한 고향 사람들에게 마니교를 가르쳐 신앙에 혼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귀향을 했지만 동거하는 여인과 아들 그리고 마니교를 가지고 갔으므로 어머니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모니카는 엎드려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기도를 해서 기도하는 곳마다 눈물로 적실 정도였습니다.
그 지방의 교회 감독은 마니교도로 자라 개종한 사람이라 모니카는 그에게 아들을 만나 줄 것을 거듭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만 기도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모니카는 끈질기게 간절히 감독에게 애원하였습니다. 감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습니다. "안심하고 가세요. 이렇게 눈물로 빈느 아들을 잃어버릴리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우정을 잘 지켰습니다. 이 재능은 힙포의 감독으로 새인생을 살 때 공동체의 생활과 사귐을 통해서 복음 역사에 쓰임받았습니다. 그는 귀향 후 동갑내기의 절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관심사가 동일한 둘은 매우 친밀하게 되었고 어거스틴은 친구에게 마니교의 이론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가 갑자기 열병에 걸려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고 살아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농담으로 생각했으나 친구의 신앙적인 단호한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며칠 후 이 친구는 열병이 도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친구를 아끼는 어거스틴에게 오랫동안 큰 슬픔이 되었습니다.
친구에 대한 슬픔을 잊기위해 그는 고향을 떠나 카르타고로 떬겼습니다. 그는 수사학 교사로서 상당한 사회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에서 성공하고 새로운 생활을 접하면서 어거스틴은 영혼의 갈증을 잊었습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고위층 사람들과 사귐을 갖기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어거스틴은 수학과 천체의 징조에 관한 서적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은 마니교의 중요한 소재였기도 하였고 당시 과학적 지식과 마니교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고민 끝에 마니교의 교주를 만나 궁금을 풀고자 했으나 핵심을 벗어난 화려한 미사여구식 답변에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철학적 진리와 고상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과학적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니교의 모순을 과학적 사실로 증명할 수 있게 되자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배격하다가 29세에 마니교를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절친한 친구의 죽음으로 고향을 떠났고 10년간 의지한 종교를 버림으로 방황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친구와 고위직 사람들에게 들은 말에 끌려 로마에 대한 동경심을 품었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로마로 떠났습니다.
로마는 학문과 문화의 발상지인 동시에 범죄와 폭력의 발상지이기도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예의가 바르고 온순했지만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사고방식으로 인간성이 삭막했습니다.
평생지기가 된 알리피우스를 만난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로마의 검투사 시합같은 퇴폐적 쾌락 문화에 빠져들어가는 그를 보고 고상한 이상과 확고한 의지를 가진 자라도 죄악된 본성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와 마니교에 혐오감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황제와 황사부 암브로스가 있는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마니교도들이 로마의 황제가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도록 보낸 전령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모든 신앙을 잃고 진리를 찾는 것에 절망을 느꼈습니다.
모니카는 남편의 유산을 정리하고 밀라노로 이사하여 어거스틴 곁에 왔습니다. 당시 어거스틴은 마니교를 버린 상태로 아직 진리를 붙잡지는 못했지만 마니교의 허위에서 벗어난 상태였습니다.
황제와 귀족을 상대하는 자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그는 법적 아내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15년간 동거하던 여인을 떠나보냈습니다.
그러나 결혼할 신부는 법적 결혼 연령에 못미쳤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2년간 동거할 새로운 여자를 맞이 했습니다. 밀라노에서 알리피우스와 네브리디우스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알기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모니카를 중심으로 카르타고인들이 모여 자기 것이 없는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스를 만났는데 그는 어거스틴의 아버지같이 그의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어거스틴보다 14살이 위였고 어거스틴 복음 사역의 본이 되었습니다. 암브로스는 훌륭한 선생이며 설교가였습니다. 또한 저술가이고 행정가이며 정치가로서 황제의 어머니에게 대항하여 기독교를 철저하게 수호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성령을 통한 성경 해석으로 율법과 선지서를 일관성있게 풀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과거 모순처럼 보이던 것들이 가장 이성적 진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설교에 빠져들었습니다.
마니교의 모순에 실망한 그는 성경의 진리에 들어가지 시작했습니다. 경건한 삶과 헌신으로 이루어진 일상 생활도 어거스틴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암브로스는 생활과 설교을 통해 금욕과 자제를 권면했는데 이것은 어거스틴의 정욕적 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주었습니다. 이즈음 어거스틴은 마음에도 없이 황제와 귀족들을 칭송하며 시를 띫조리는 삶에 혐오감을 느껴습니다.
그는 암브로스를 통해서 사람의 구원의 길은 성경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암브로스는 플라톤의 철학으로 어거스틴이 이원론적 사고 방식을 벗고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어거스틴은 내면의 죄욕구를 이길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철학과 교육으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고민을 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5장과 7장은 그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정욕의 쾌락을 포기하기 싫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게 순결을 주소서.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아직은 마옵소서." 갈등 속에서 그는 암브로스의 영적 아버지인 심플리키아누스와 상담했습니다.
심플리키아누스는 최고 의결기관인 로마 원로원의 수좌인 빅토리누스를 회심을 시킨 간증을 들려주어 어거스틴을 감동시켰습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서 어거스틴은 시간이 날 때마다 교회에 들렀습니다.
그러다가 폰티키아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성 안토니의 성결한 삶을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간증을 듣고 회개를 미루는 자신를 발견하고 죄를 결단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때 어린 아이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집어 읽으라. 집어 읽으라." 그는 이 소리를 성경을 펴고 읽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여겨져서 가지고 다니던 바울의 서신서를 폈습니다. 로마서 13장 13, 14절이었습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믈 도모하지 말라.
" 그는 이 성경 말씀으로 쾌락을 즐기던 죄악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33세에 모니카의 기도대로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내적 여행은 철학과 종교와 과학을 거쳐 기독교에서 마쳤습니다.
회심한 어거스틴은 돈을 벌고 출세하려는 야심을 버리고 밀라노의 수사학 교사라는 직분이 신앙과 상충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는 시골로 내려가 요양을 하면서 여자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는 휴양지에서 친구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색하고 글을 쓰면서 신앙 생활의 깊이를 더 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발전함으로써 글을 쓰고, 글을 씀으로써 발전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아카데미학파의 사람들에 대하여", "행복에 관하여", "질서에 관하여"란 3권의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 책은 공동체에 있었던 토론을 기초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는 신앙의 공동체가 지식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진리의 삶을 살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혼자 사색하는 것보다는 토론과 교회의 교제를 통해서 더 잘 깨달을 수 있다는 것과 토론과 모임 후에는 되새기며 생각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를 반드시 가질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독백"이라는 책을 통해서 하나님안에 있는 생명과 삶을 깨닫고 은혜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어거스틴은 휴양을 끝내고 영적 아버지인 암브로스에게 돌아갔습니다. 암브로스는 세례를 주기 전에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신앙을 그에게 가르쳤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축복 속에서 그는 아들과 친구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어거스틴은 매일 교회에 나가 암브로스의 말씀 강해를 들으며 은혜에 깊어 졌습니다.
어거스틴은 친구들과 가족과 상의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 신앙 공동체를 세우자는 합의를 하였습니다. 귀향 중에 모니카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이제 네가 세상이 줄 수 있는 행복을 쳐다보지도 않는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보았으니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 주셨고 그 외에 많은 것을 더 들어 주셨다.
" 어거스틴은 이제 어머니도 없고 세상의 지위도 없고 아내도 없는 상태로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어거스틴을 중심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공동체로 성장해서 훌륭한 신앙인들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절친한 친구 네브리디우스와 아들 아데오다투스가 다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와 공동체를 창설했던 친구들은 한 교부을 섬기는 감독이 되어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계속 지켜보면서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조직화하며 확고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명상과 연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그가 일생동안 추구한 철학과 학문을 두 번째로 떬겼습니다.
그리고 "참종교에 대하여"라는 책으로 플라톤이 추구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했다는 것을 주장하고, 당시 번성하던 마니교를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신도로 살기를 고집해서 40세까지는 감독이 없는 도시는 절대 심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구원하고 신앙 공동체를 건설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힙포에 갔다가 뜻하지 않게 그 곳의 감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침에 평신도 였다가 점심에 성직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힙포는 카르타고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는데 마니교에 의해 장악이 되어 기독교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도나투스주의도 기독교를 위협하는 큰 위험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성직자가 되자 힙포에 수도원을 세우고 임박한 영적 전투를 위해 성경 연구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힙포의 감독은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지도력과 전도에 열심을 부리지는 않았습니다.
이단에 대한 그의 대체는 소극적인 행정적 조치에 불과했고 이단 종교들은 계속해서 세를 확장해갔습니다. 논쟁에 익숙한 마니교도들은 힙포의 감독과 어거스틴을 공개 토론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토론회에서 승리하여 마니교를 추방했습니다. 또 다른 이단인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도 공개 토론회를 제의했지만 그들이 피하자 어거스틴은 그들의 전도방식인 유행가를 이용하여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개혁을 위해서 아프리카 교구의 총회에서 '바른 신앙과 바른 삶'에 관해 발표하여 교회 지도자들의 중심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수도원"을 세워 북아프리카 교회의 10명이나 되는 감독을 양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북아프리카의 기독교는 강성해졌고 이단들을 몰아내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41세에 힙포의 감독이 되어 34년을 봉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양무리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세로 봉사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여행을 아주 싫어 하였는데도 교회 모임과 심방에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감독들은 국가 고위 관리와 면담하고 지방 유지들과 모임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사소한 행정보다는 성경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신앙적인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는 점차 신앙인들과 그 사회에 영향력을 끼쳐갔습니다.
어거스틴은 공동체 생활에서 힘을 얻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공동체 생활은 그에게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10년의 공동체 생활 끝에 "어거스틴의 규칙"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신앙공동체 생활의 원리를 정리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설교에 전념하는 것과 저술에는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단과의 싸움에서 논쟁을 주로 사용하였고 논쟁에 일생을 바쳤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논쟁을 이용한 것은 로마 시대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의 문화가 논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문화를 이해했고 문화를 통해서 복음을 수호하고 전파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책은 신앙 생활과 복음 수호하기 위해서 발생한 실질적인 도전과 의문에 대한 진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순수 복음을 수호할 뿐 아니라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개종시키기 위해 열정으로 쓴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목소리가 작았지만 수사학 교사로서 웅변을 배웠기 때문에 훌륭한 설교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든지 할 수만 있다면 설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설교를 단순한 메시지로 그치지 않고 훈련된 제자가 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며 설득하는 것은 승리하는 것이다.
" 양들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 그리스도가 승리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이 말씀과 영적 세계를 쉽게 이해하도록 그들이 알고 있고 경험한 것을 예로 설교하려고 노력했으며 사람들의 소망과 마음에 말씀을 심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와 도나투스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로마는 그들을 유혈진압하여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결말에 회의를 느끼고 논쟁보다는 저술에 관심을 가륵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 율리안이 반대편에 서서 그를 반박할 때 교회를 위해서 끝까지 싸워 논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속에서 자신의 허물과 사역에 지쳤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더욱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 "본성과 은혜", "은혜와 자유 의지"을 통해 하나님의 설비와 경륜을 통한 전적인 은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거스틴은 나이가 많아 허약해지고 후계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간에 자신이 출간한 책들을 개정하며 서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심려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가운데 75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본래 약한 사람이었으나 은혜로 강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야심과 정욕으로 얼룩져서 좋지 못한 성품을 가졌으나 은혜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은사로 받은 열정적인 성향이나 논쟁을 즐기는 성향은 회심 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복음을 확장하고 수호하는데 쓰여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품과 직업을 통해 얻은 것을 그리스도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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