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시간/가정을 위한 글

자녀양육과 징계

에반젤(복음) 2021. 6. 15. 04:08

Rev. W. Pouwelse

박상현 역

 


1. 낡아빠진 제도인가?
본 장에서 나는 자녀 양육과 징계에 대한 몇 가지 측면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먼저 경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쟁점이 언급되어 있는 몇몇 성경 본문에 관심을 집중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징계가 사랑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순종해야 할 권위와 의무와 마주하는 모든 관계에 적용됩니다. 시민정부에 의해서 실행되는 징계는 교회 직분자들에 의해서 실행되는 권징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학교 교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징계를 시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권징 혹은 징계의 형태를 위한 기본적인 규칙이자 지침은 사랑하고, 도와주고, 교정하고, 교육하고, 심지어 다시 복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잠언 13장 24절은 “매를 아끼는 것”은 자녀를 “미워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합니다, 반면에 사랑은 부지런히 징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우리를 징계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베푸신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징계를 받지 않는 사람은 “사생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징계, 심지어 체벌(體罰)조차도 사랑에 토대를 두어야 하고 또 사랑으로 실행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징계는 한물 간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대 교육철학의 원리에 따르면, 자녀들은 자유분방하게 키워야 합니다. 아무런 도덕적 규범이나 가치들이 자녀들에게 부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녀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규범이나 가치 체계를 계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나 교사와 같은 어른들이 특정한 사상(ideas)을 자녀들에게 주입시킬 때에 자녀들이 자신들을 계발하는데 혼동만 더해줄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단지 사실적인 정보만을 제공받아야 하고, 또 심지어 이것은 자신의 기호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사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 지나치게 자녀들이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개인적으로 관심 있어 하는 것에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자녀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개성과 선과 악에 대한 자신들의 사고체계를 계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직관에 따라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적이고, 인본적인 자녀양육과 교육 철학입니다. 이 철학 속에 체벌은 제쳐두고라도 징계가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어떤 부모나 교사도 이와 같은 귀여운 자녀에게 자신의 사상을 부과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녀가 너무 거칠게 취급당해서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를 거칠게 다루게 될 때에 공의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이 지속적이고 불가피한 손상을 입어 좌절감이나 반감이나 반항심을 만듭니다.

 


이 모든 이론은 인류에 대한 인본주의적인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인류는 그 자체로 선합니다. 악한 생각과 행동은 환경적인 영향으로부터 초래합니다. 어떤 나쁜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을 홀로 남겨두면 완벽한 존재로 발전해나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적어도 사람은 그렇게 할 잠재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사상이 모든 곳에서 교육이라는 빌미로 선전되고 실행되어왔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어느 정도만 따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아주 극단적으로 모조리 따릅니다. 그러나 이런 교육 철학이 결코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 원리에 따라 교육을 받은 자녀 세대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전 세대보다 더 큰 책임을 자각하여 만족하거나 성숙하고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실망과 환멸과 공허감과 때때로 자포자기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미국 10대의 자살율이 일 년에 5,000명이라는 최고의 기록을 갱신했습니다, 반면에 등록된 개별 사안들에 대해서 백 명 가운데 약 오십 명이 자살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외에도, 전문가들에 의하면, 십대의 숫한 치명적인 사건들이 자살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자녀 양육과 교육방법과 실천으로 고무적인 결과 대신에 경종을 울리는 발전입니다.

 


2. 무정부 상태
현대 교육철학의 결과는 단지 십대들의 사생활에서만, 즉 통계상 자살율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공적인 생활 즉 학교나 가정에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공립학교 교사들 가운데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일부 공립학교 교사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문제들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교사들은 교실에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또 징계 조치를 내리거나 혹은 학생을 야단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일부 교사들은 자기방어 자세를 취했습니다. 일부 학교에서는 강요하는 규칙들이 거의 없어 무정부 상태가 될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동일한 일이 공중생활에서 일어납니다. 경찰력을 동원해서 법을 집행할 수 없습니다. 만일 경찰들이 범죄를 대항하여 처신한다면, 경찰은 종종 비평에 직면하거나, 저항을 받거나 또 관료주의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투표해서 선출한 시민정부에 의해서 시행되는 법률을 반대하는 군중 시위가 정부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법을 폐기할 수 있고, 제출할 수 있고, 변경시킬 수 있고, 심지어 현행법이 효력을 발생할 수 없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법이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여론이 옳은 것이 됩니다. 소위 여론이란 새로운 대중 매체로 대부분의 보도 내용을 이럭저럭 이끌어가는 목소리가 크고 또 공격적인 행동 단체나 혹은 집단의 소리입니다. 박애, 자유,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슬로건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유를 상실하고 또 침묵하는 다수 위에 가장 강력한 압력 단체의 규칙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정글의 법칙이며, 무법과 혼돈과 폭력과 혁명 정신을 초래했습니다. 최종적인 결과는 무정부 상태로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강탈, 유괴, 약탈, 살인, 가택 침범, 이전에 없었던 다른 숫한 폭력이 남무하고 있음을 듣습니다. 저녁 밤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다면, 어떤 지역에서는 대낮에도 거리를 안전하게 다닐 수 없습니다.


이런 수많은 범죄에, 십대들도 가담되어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7-20세 남자가 다른 연령대보다 살인행위를 포함해서 범죄 단체에 가장 많이 가담되어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은 새로운 세대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이들을 자포자기(自暴自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도덕적 규범의 퇴락은 경제 불황이나 높은 실업율(失業率)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 아닙니다. 무정부 상태를 일으키는 것이 빈곤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복함과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으로 시행되는 징계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3. 성경적인 지침들
본 장에서 저는 징계 가운데 몇 가지 측면을 다루고자 합니다. 나는 먼저 권위를 가진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또 권위에 순복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성경적인 과업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이 권위는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가정은 자녀들이 권위와 사랑으로 실행하는 징계와 맨 먼저 마주치는 곳입니다. 가정은 자녀들이 권위와 징계의 기본 규칙을 배워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만일 자녀들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something)으로 권위에 복종하고 또 사랑의 징계를 달게 받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그들은 결코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동시에 그 가치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9주일은 내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나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과 신실함을 보일 것과 마땅히 그분들의 선한 가르침과 권징에 적합한 순종으로 내 자신을 복종시킬 것과 또 그분들의 연약함과 단점에 대하여서도 인내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징계가 한 순간 불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징계가 사랑의 돌봄의 관계라는 것을 배워야 하고 또 경험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에서 우리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나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13:24), 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12:6)는 이 두 본문은 성경의 계속되는 가르침을 싣고 있습니다. 징계는 가혹(苛酷)이나 악의(惡意)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징계는 항상 애틋한 사랑으로 행하는 돌봄의 문제이어야 합니다. 징계는 심지어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위험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징계는 자녀를 바른 길 위에 있게 만들고 또 삶 속에 실제로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잠언 1장 7절에서 우리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며, 어리석은 자는 지혜와 명철을 무시하느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교훈과 징계의 기본적인 규칙이자 토대입니다. 이 본문의 “두려워한다”는 단어는 먼저 근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닥칠지도 모를 어떤 형벌을 두려워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주님과 주님의 계명들을 크게 존중하고 주목하여, 감사함에서 우러나오는 순복으로 주님께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을 아무런 징계도 없이 자유롭게 자라도록 놔둔다면,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잠언 13장 24절은 이렇게 하는 것이 자녀를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녀들이 누릴 기본적인 “권리들” 가운데 하나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징계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권징을 받지 않는 사람들은 “사생아”라고 불렸습니다.


부모들은 사랑으로 시행하는 체벌(體罰)이 자녀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라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잠언 23장 13,14절에서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분명합니다. 채찍으로 때린다고 할지라도 자녀들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정반대로 자녀들이 살게 될 것입니다, 음부에서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잠언 22장 15절에서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했습니다.


잠언 29장 15절 또한 사랑의 징계를 방편으로 받은 교육에 대해서 말합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 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19장 18절은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어린 나이에 “징계를 받지 않는 것”은 “그(자녀)를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징계는 항상 사랑의 행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부모들은 권징의 목적과 실행을 잘 인식하지 못할 때조차도 애틋한 사랑에서 나오는 돌봄으로, 공평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징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에서 우리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사랑으로 시행하는 성경적인 규칙을 고수할 때에, 자녀들은 금방이나 아니면 조금 후에 부모들이 권징을 실행할 때에 애틋한 사랑의 돌봄을 자신들에게 보여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권징이 없어, 불법, 무법과 자포자기라는 혹독한 열매 대신에,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권징에 대한 성경적인 규칙과 원리와 지침을 토론했으므로, 권징의 원리와 지침 몇 가지에 관심을 집중하고자 합니다.

 


4. 성숙하도록 자람
자녀들이 권징받기를 싫어한다는 말이나, 또 자녀들이 권징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나, 또 자녀들이 아무런 규칙이 없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는 말들은 분명히 진실이 아닙니다. 이전 단락에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매를 아끼는 사람은 아들을 미워하고, 오히려 아들을 사랑하는 자는 부지런히 그 아들을 징계한다”고 가르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자녀에게나 사회에 큰 해를 끼치지 않은 채로 이 신적인 규칙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이 증거합니다. 자녀들이 잠깐 동안 권위가 없는 채로 또 강제하는 규칙이 없는 채로 즐길 수 있다는 것도 진실일 것입니다. 자녀들은 잠시나마 한 때 탈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에 그들은 공정하고 일관된 징계가 있을 때에 안정감을 얻습니다. 자녀들은 자신들이 항상 옳은 일만 행하는 것이 아니며 때때로 자신들의 행동 결과들을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어떤 식으로든,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돌보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만일 설상가상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곁에 서서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자녀들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많은 실례를 들 수 있습니다. 만일 교사가 교실에서 질서를 유지 하지 못한다면, 잠시 자녀들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런 분위기에 지쳐서 시간만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지루하게 되고 또 상황이 통제되지 않습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 만일 교사가 엄격하게, 공정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질서를 유지한다면, 자녀들이 처음에게는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또 선생님이 “엄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에 그들은 선생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선생님을 존경하고 선생님의 징계를 즐거워할 것입니다.


동일한 사실이 부모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특정한 지침들과 명확한 규칙들을 부과하지 않을 때에 자녀들이 훨씬 더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만족스럽지 못하고 지루해져서 결국 반역적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규칙에 순종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심지어 협동하거나 특정한 규칙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놓쳤습니다, 그리고 규칙에 순종하는 것은 자기를 절제하고 또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리고 귀여운 식물은 아무런 지도받음이 없이 올바른 방향으로 자라갈 수 없습니다. 자녀도 사랑의 징계의 안내나 지도 없이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해갈 수 없습니다. 성숙하게 자라도록 하는 지침은 음식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십대들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은 그들이 성숙하도록 자라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인인 “사랑의 징계”를 부인했다는데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와 같은 권징은 공정하고 일관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다음과 같은 논점들이 있습니다.

 


5. 징계는 공정해야 한다.
모든 형태의 권위와 징계는 공정해야 합니다. 이 공정성은 부모들에게나, 교사들에게나, 법을 입법하고 집행하는 정부에게도 해당됩니다.


일반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에서, 징계가 공정한 한, 자녀들은 엄격한 징계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은 징계가 공정하게 시행되기를 강력하게 바랍니다. 만일 자녀들이 벌이나 징계의 수위가 공정치 않다고 느끼면, 교사가 됐든 부모가 됐든, 권위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징계 배후에 있는 근거를 설명해주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나 교사가 자신들의 [징계 수위의] 결정의 정확성에 대해서 논쟁을 열어두지 않습니다. 권징이 실행될 때에 많은 [권징의] 결정들이 이해되지 못하거나 찬동을 얻지 못합니다. 자녀들은 항상 더 많이 징계 수위가 조절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만큼 징계를 받을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게다가 조금 더 많은 자유를 원하거나 혹은 어떤 결정을 동의하지 않는 것은 징계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른 어떤 것입니다. 만일 자녀들이 여느 잘못된 일들에 대해 벌을 받았다면, 그들은 즉각적으로 그 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 게다가 만일 자녀들이 잘못되게 어떤 일에 대해 비난을 받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하지도 않은 일로 벌을 받았다면, 그들이 징계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징계를 받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데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나 교사들은 [자녀나 학생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사안 때문에 험악한 분위기에 있도록 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리고 자녀들이 자신도 모르게 권위를 가진 사람의 잠재된 분노의 희생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두 경우에 자녀들은 자신들이 공정치 못하게 취급당하고 있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첫 번째 상황에서 부모나 교사는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왜 아주 엄하게 대우받고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들이 행한 일이 한 가지 이유 때문이든 아니면 예외적으로 심각한 다른 이유 때문이든 지를 아주 분명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권징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만들고 동시에 불공평하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습니다.


벌이 지나치게 혹독하다든지, 아니면 심지어 공정치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나 교사가 죄책에 대해 잘못되게 추측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상황을 오판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이후에 자신이 내린 결정이 비난받을 만 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권위를 가진 사람은 주저하지 말고 가능한 최선의 조치를 취해야 하고, 판단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부모들은 만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권위가 손상을 입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오히려 자기 잘못을 바르게 인정하지 않을 때에 권위에 손상을 입습니다. 자녀들은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부모나 교사를 꼭 존경합니다. 자녀들은 단지 권위를 가진 사람들 역시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결국 공정하다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인정받게 되고, 그리고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로 부모나 교사는 계속해서 주도권을 쥐게 되어 심지어 이전보다 더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됩니다.


이 상황은 자녀가 권위에 도전하고자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자녀들이 권위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또 심지어 권위를 도전하는 것조차도 장난기 섞인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런 이유라면, 자녀들은 올바른 방식으로 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자녀도 자신 위에 있는 권위에 도전하지 않도록 어려운 방식을 찾는데 충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권위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것은 권위가 얼마나 “실재적(real)”인지를 볼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만일 자녀들이 권위에 도전할 수 있고 또 부모와 교사가 단념하고 “시련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간파한다면, 자녀들은 잠시나마 이 상태를 즐기는 것처럼 보일 것이고 또 이 상태를 승리로 착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들은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신뢰와 확신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안도감을 누리지 못합니다.

 


권위와 징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자녀들이 본 궤도에서 지나치게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 보호받아야 하고, 그리고 부모들은 자신들의 도덕적인 권위를 사용하여 자녀들을 도와 자녀들이 실제로 곤경에 처할 때에 벗어나도록 한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자녀들에 의해서 도전받음에 대한 시련을 견딜 수 없다면, 자녀들은 자신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실제로 이르게 될 때에 [권위를 행사하는] 그 사람을 대단히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다.

 


6. 징계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징계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일관성입니다. 이 점에서도 자녀들은 대단히 민감합니다. 일관성이 없는 것은 자녀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자녀들은 무엇을 기대해야 하고 무엇을 복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만일 자녀들이 규칙을 깨뜨리거나 권위를 무시할 때에 부모들이 모른 척하고 또 다른 어떤 때에 동일한 일에 대해서 엄하게 벌을 내린다면, 자녀들은 공명정대에 대한 의식을 상실할 것입니다. 자녀들은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자신들이 권위에 좌우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발달을 저해합니다. 자녀들은 규칙에 순복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규칙을 무시하여 초래하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만일 자녀들이 임박한 것이 무엇이며 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안다면 그들은 쉽게 이 교훈을 배울 것입니다. 일어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면 항상 혼돈스럽습니다. 이것은 공의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바른 견해를 자녀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어느 날 저는 일관된 징계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던 충격적인 한 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네 살 먹은 막내가 있는 한 과부가 아들에게 착한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고자 애썼습니다. 막내가 어떤 일을 저지르고 난 뒤에 자신이 잘못된 일을 했고 또 엉덩이를 맞을 짓을 했구나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다른 일에 마음을 쏟고 있어 막내가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저질러 놓은 일에 아무런 징계를 하지 않은 채 그냥 지나가버렸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 막내에게 혼돈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를 맞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맞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완전히 잘못된 결론을 내렸습니다. 얼마 후 어머니에게 가서 “어머니는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놀라서 “무슨 말을 하는 거니?”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의 반응은 어머니를 놀라게 했습니다. “제가 엉덩이를 맞을 짓을 했잖아요. 그러나 어머니는 저를 돌보지 않으세요.” 거의 있을 법하지 않습니다만, 이 반응은 분명히 일관성이 없는 징계가 막내를 불안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막내가 엉덩이를 마땅히 맞아야 할 때에 맞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당황했고 또 어머니가 일관된 방식으로 자신에게 사랑의 징계를 시행하지 않았을 때에 혼돈스러웠습니다.

 


7. 가치 체계를 가르침
가치 체계를 가르치는 중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는 나쁜 행실을 제거하거나 단념시키고 그리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좋은 행실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녀들에게는 연관된 가치체계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가치 체계는 발전되어져서 몸에 익어야 합니다. 이것은 바른 지침에 의해서 시행될 수 있습니다. 자녀들(teenager)이 독자적으로 가치 체계를 발전시키도록 방치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조성할 뿐 아니라, 그가 필요로 하고 또 마땅히 받아야 할 안내를 그로 하여금 부정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들을 대단히 위험하도록 만듭니다. 자녀가 자신의 경험의 부족으로 인하여 완전히 잘못된 가치 체계를 계발할지도 모릅니다. 그는 모든 것을 힘든 방식으로 배워야 합니다. 이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부모와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유일한 한 올바른 가치 체계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잠언 29장 15절에서 우리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가치 체계를 가르치는 데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즉 나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또 선한 행동은 하도록 북돋우는 것입니다. 두 가지 원리가 동시에 적용되어야 하고 또 균형을 갖춘 방식으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 없이 시행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징계와 벌은 나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시행되어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리들 가운데 하나는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이 많은 일들을 장난으로만이 아니라 재미로, 즐겁고, 바라던 결과나 행동들의 결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비록(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 직업을 즐기면서 일한다고 할지라도, 만일 그들이 주말이나 월말에 주급이나 월급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다면 결코 열정적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돈은 단지 보상만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존경받고 있다는 것 역시 만족을 줄뿐 아니라 사람들이 상당히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는 일을 하도록 고무합니다.


어떤 일은 행하도록 하고 어떤 일을 행하지 않도록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벌이 따라온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교통 법규를 지키는 것이나 세금을 내는 것은 우리의 선호에 의해서 결정되는 활동일 수 없으며, 오히려 시민 정부에 의한 법 시행은 딱지를 떼게 하거나 벌과금을 물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법을 지키도록 만듭니다. 이 역시도 결과들을 고려하는 문제입니다, 이 경우에 형벌에 의해 괴롭힘을 받지 않는 결과들을 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순종해야 하는 주된 이유는 우리가 권위를 받은 사람을 존경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는 벌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이나 보상은 사람의 행동에서 중요한 요인들입니다. 시편 19편 11절은 주님의 계명을 지킴에는 큰 보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잠언 11장 18절에서 우리는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이 문제를 취사선택의 문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는 전자와 후자에 다 해당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자녀들은 부모님께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주의 날 제39주일은 “내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존경과 사랑과 신실함을 보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할 때에 나쁜 행동을 저지하는 징계나 징벌과 똑같이 긍정적인 격려나 상을 사용해야 합니다.


8. 나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바람직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과정은 자녀 삶의 이른 시기에, 심지어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알기도 전에,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유아가 옳고 그름에 대해 희미한 생각도 가지지 않은 채 무언가를 행할 때조차도,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는 행동은 항상 좋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쁜 행동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 어떤 행동이 유쾌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 일을 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유아가 이 일을 깨닫지 못할 때조차도 일어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아이는 대체로 불안을 느낄 때에 웁니다. 아이가 울 때 마다 꼭 껴 안아준다면, 상당히 좋지 않는 활동과 어떤 즐거운 결과들과 연결시키게 될 것이고 또 이런 식으로 분명히 “의사소통”하려고 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자주 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기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원리가 거의 모든 상황에 해당됩니다.


징계는 벌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분명히 징계의 중요한 한 측면입니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이따금씩 나쁜 행동을 저지시키는 미묘한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나쁜 행동은, 그것이 좋지 않은 습관이든 상관없이,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의도되어 있거나, 아니면 자녀들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가벼운 벌로 때우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나쁜 행동이 칭찬을 듣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자녀들이 나쁜 행동이 훌륭한 시도가 아니라는 것과 또 나쁜 행동을 한 결과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나쁜 행동을] 포기하고 규칙에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9. 좋은 행동을 격려하기
우리는 이전 단락에서 징계가 나쁜 행동을 저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선한 행동을 격려하는 것은 가치 체계 교육에서 공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가 한 가지 간단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자녀들이 늦게 귀가하고 또 자주 늦게까지 밖에서 노는 것으로 인해서 일부 부모들이 걱정했습니다. 부모들은 귀가하는 특정한 시간을 설정하고 매주 외출할 수 있는 시간을 제한했습니다. 부모들은 이 규칙을 어길 때에 공정하고도 일관된 벌로 이 규칙을 시행했습니다. 만일 자녀가 늦게 귀가한다면, 몇 차례 저녁에 외출을 “금지시키거나” 아니면 몇 가지 특권을 보류시켰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책에 있는 대로” 하는 징계 방법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동전 양면 가운데 한 면에 불과합니다. 부모들은 취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항시 바람직한 행동을 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몇 날 저녁에 집에 있는 것으로 벌을 받았다고 [자녀들이] 생각해버리는 대단히 실제적인 위험이 있습니다. 부모들 역시 자녀들이 일찍 귀가해서 집에 있을 때에 자신들의 고마움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은 집에 머무는 것이 [자녀들에게] 더 매력적이도록 만들어야 하고 또 [자녀들이] “당위(must)”에 의해서가 아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기분 내키는 대로 칭찬을 합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꾸중을 들었을 때에 그들을 상당히 낙담시키게 됩니다, 또 그들이 잘못을 행했을 때에 벌을 받아야지, 결코 칭찬을 들어서는 안 되며, 혹은 그들이 올바른 일을 했을 때에, 꾸중을 들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고용주가 종업원에게 감사의 표를 하고 또 이따금씩 칭찬하면, 종업원은 훨씬 더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봉급 혹은 임금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간혹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것(칭찬하는 행위)은 분명히 강력한 도덕적인 자극제이자 격려행위가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자녀들이 아주 싫어하는 허드렛일들을 자녀들 자신이 이 일을 할 때에 부모님이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알 때에 쉬워집니다. 상을 통한 격려는 저지시키는 징계 효과 못지않습니다. 이와 같은 상이 반드시 납부 형식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도덕적으로 격려하고 또 정신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 직접적으로 벌을 주는 것보다 선호되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행복하도록 하는 만족감이 공히 중요할 것입니다. 게다가 상으로 여기지기 전에 고마움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잘못된 행실에 대한 (종종 의도적이지 않는) 벌입니다. 간단한 사례가 이 사실을 설명해줍니다. 만일 주일 공 예배 시에 자녀가 화장실에 가도록 허락받게 되면, 자녀는 이렇게 하는 것을 정말로 조용하게 앉아 있어야 된다고 인정된 시간에 마음껏 쉬는 시간으로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만일 부모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줄이거나 저지시키지 않는다면, 그 자녀가 설사 고의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행위를 멋지게 노는 시간으로 연결시킬지도 모릅니다. 이 일이 더 자주 일어나게 될 것이고 힘듦을 없애는 습관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결정을 무시하거나 도전할 때에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만일 부모가 이렇게 하는 것을 용인해버린다면, 자녀는 다시 이 일을 하도록 고무하게 됩니다.

 


10. 결론
a. 성경은 징계가 자녀 양육과 교육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라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부모들에게는 자녀들에게 바른 가치 체계를 가르칠 의무가 있습니다. 바른 가치 체계로 가르칠 때에 체벌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체벌은 죄로 오염된 세상 안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잠언 13장 24절은 “매를 아끼는 것은 자녀를 미워하는 것이나, 자녀를 사랑하는 자는 부지런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b. 모든 징계는 사랑의 돌봄에 토대를 두어야 하고, 그리고 또한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사랑의 문제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9주일에 의하면, 제5계명은 “내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존경과 사랑과 신실함을 보여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c. 자녀를 방치하면 결코 관련된 가치 체계를 계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녀는 자기 부모를 부끄럽게 만들 것입니다(잠29:15).

d. 징계의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은 공정하고도 일관되게 시행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정치 못한 벌은 자녀들을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흐려놓도록 합니다. 벌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해주어 자녀들이 벌이 공정치 않다고 생각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정의 정확성에 대한 토론의 형태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일관성이 없는 벌은 자녀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그리고 징계를 덜 효과적이도록 만듭니다.

e. 징계는 잘못된 행동을 벌할 뿐만 아니라 나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도 중요합니다. 징계는 항상 선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과 함께 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하고 또 많은 일들이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 받을 것을 기대하고 행해집니다. 선한 행실에 상을 주는 것은 자녀들로 하여금 계속 이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자극제이자 또 격려가 됩니다. 무의식적으로 그 결과(상 받는다는 생각)가 그 행동과 연관될 것입니다. 상과 자극은 직접적으로 “보상(payment)” 형식으로 즐겨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행동을 도출시키는 도덕적 혹은 정신적 만족으로 하도록 해야 합니다(참고. 시편19:11;잠11:18).

f. 모든 징계의 주된 근거와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는 주된 근거는 제5계명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9주일은 “내가 마땅히 이들의 선한 가르침과 권징에 적합한 순종으로 내 자신을 복종시킬 것과 또 그들의 연약함과 단점에 대해서도 인내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손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g. 주님께서 그리스도인 가정이 사랑의 권징과 교육의 첫 번째 원천으로 남아 있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자유분방한 교육은 이상적인 교육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잠언 29장 17절은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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