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남자와 여자에 대한 바른 이해
1, 남자와 여자
2, 결혼과 이혼
3, 신약 서신에 나타난 남자와 여자의 의미
4, 교회의 직분에 대한 오해
1. 성경에 언급된 아들(남자)과 딸(여자)의 기준
아들이란 그리스도께서 “너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 한 것에서의 아들이다.
이것은 남녀를 구분하는 성별적 의미일 수가 없다. 성경의 구원의 길이 여자만 제외하고 열린 것도 아니고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바울이 디모데를 “내가 낳은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잠언의 말씀에 “내 아들아” 혹은 “아들들아”라고 말하는 것에서 아들이 바로 성경의 아들이다.
또 성경에서 아들이라는 말은 다른 뜻도 있는데 사람의 입을 통하여 배운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지혜를 받아 말씀을 깨닫게 된 사람을 바로 아들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십계를 직접 받은 모세의 경우와 동일하다. 선민들은 민족 대 하나님의 관계가 먼저 형성되어 있었으나, 그리스도 이후에 구원의 문제는 개개인이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아들은 누구나 되어야 하기도 하고 또 될 수 있는 것이다.
선민들은 아들로 표현되며 그리스도 이후의 사람들은 “시온의 딸“이라고 표현된다. 딸이라고 표현이 되는 경우는 “낳음”의 역할 때문이다. 말씀의 전함을 받아 전도를 하여 다음 사람을 전도하면 그것이 바로 낳은 것이 된다. 전도에 성공을 한 사람은 낳은 자가 되어 "여자"가 되며, "시온의 딸"이 되는 것이다. 결국 바울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낳아졌으므로 아들이고, 또 디모데를 낳은 자로서는 그가 영적인 디모데의 어미이므로 딸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 모든 사람은 아들도 되어야 하고, 딸도 되어야 하며, 모두 형제이고, 또 자매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제자 삼음이 필요 없던 선민이 아들이고, 모세의 율법 다음에 낳아지고 제자 삼음을 실행해야 하는 만민은 딸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시온의 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진리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에서 남자와 여자는 모두 이러한 의미인 것이다. 이 영적인 관계의 호칭을 육체적인 형상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차별이라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경적 논증을 하기 전에 조금 더 이해를 하고 진도를 나가기로 하자.
< 성경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부여받은 산고와 수고 >
하나님은 여자에게는 아이를 낳는 고통과 남자에게는 밭을 일궈야 하는 수고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것을 육적인 경우로 본다면 오늘날 어떤 이는 무통 분만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나면서부터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나서 죽기까지 그 상태로 살다가 가는 이도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육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 "비진리"가 되는 것이다.
피전도자의 '낳음'을 희망하는 마음이 곧 여자의 마음이며,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 결국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을 알고 지혜를 구하고 전하는 수고를 행하는 마음이 곧 남자의 마음이다. 모든 사람은 이 두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그 두 마음 중에서 '자기 외적'인 마음의 원함을 충족시키려는 마음이 곧 여자의 마음이다. 이것을 행하다가 마음이 피전도자에게로만 집중이 되게 되면 곧 세상을 향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은 것으로 묘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마음은 다시 여자의 마음이 유혹하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고 여자의 마음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서 세상에서의 높음과 채움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듣고 예수께로 온 사람이 다시 세상으로 마음을 향하는 과정이 선악과를 따먹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두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두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명령을 따라서 낳음을 행하되, 자기를 부인하는 용도로 전도를 하고 핍박을 받으며 길을 가게 한 것이다. 그 과정을 이기고 승자가 되었을 때 사람의 마음에는 '여자의 마음' 이 없어지게 된다. 마음에 세상에 속한 것을 따라가려는 여자의 마음이 없어지면 그 마음에 남는 것은 남자의 마음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고, 또 되어야 한다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남자의 마음이 자란 만큼 여자의 마음을 덜 가지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늘 자기의 마음 밭을 갈아야 하는 수고를 하라고 하며, 지혜를 깨달음 받는 열매를 맺어 영의 양식을 먹고 남자의 마음을 자라가게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선이냐 악이냐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절대적인 일과 생각이냐 아니면 세상과 나와의 상대적인 일과 생각이냐로 구분을 하면 된다. 인생이 사고하는 육신이 살아 있는 한 그 밭 가는 마음, 남자의 마음을 쉬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육신이 살아 있는 한 여자의 마음이 인생의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따라가는 마음은 누구든지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그 선과 악의 비중은 '정지' 상태에 있을 수 없다. 악이 많아지면 선이 줄고 선이 많아지면 악이 줄어드는 것과 같다. 근본적으로 인생의 마음은 악을 행해 언제든지 내려갈 수 있는 무거운 추를 달고 사는 것과 같다. 부지런히 팔을 움직이지 않으면 가라앉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세상이다. 물론 점차로 장성하여 팔의 힘이 강해지면 보다 쉽게 물 위를 향해서 올라가고 또 올라간 상태를 유지하기도 쉬워진다.
그리하여 결국에 물 위에 온전히 뜨게 되면 예수님과 같이 ‘바다 위를 걷는 상태’, 남자의 마음만 가진 상태, 또는 궁극적 목표점인 ‘하나님의 안식에 든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안식이란 쉼이고 쉼이란 마음의 평안을 말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한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타인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화평한 상태가 아니면서 타인의 마음에 화평, 곧 하나님의 안식이 안주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엘리사의 이야기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종인 게하시에게 "평안하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이냐?"라고 게하시가 엘리사의 사람인가를 묻는 내용이 있다.
화평, 평안, 안식, 거룩함은 모두 같은 말이며, 이 말은 마음에 '여자'는 없고, '남자'만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곧 '아들'이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창조된 피조물과 육신의 상태는 단지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의 그림자로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전도서에는 "이미 한 것을 또 하며 인생들의 눈 앞에 보여지고 있으니 만물은 피곤하다."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선의 경주’는 이렇게 자기의 마음 안에서 하는 것이다. 이 남자와 여자의 마음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남자와 여자가 언급되어 있는 성경의 내용을 통하여 과연 성차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2. 결혼과 이혼
사람의 결혼과 이혼이라는 개념은 일단 비진리이다. 종이에 도장을 찍는 것으로 살고 안 살고를 결정한다는 것부터가 일단 진리일 수 없다. 사람들의 의식이 변함에 따라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또 아내라는 사람에게 남편이라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이혼서도 아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다음의 복음서의 내용은 4단계로 되어 있다. 마가에 하나, 마태에 두 단계가 있고, 누가에 다시 한 단계가 있다.
[마가 10:2-1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무슨 말인지 살펴보자.
선민들은 낳음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을 낳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었다. 모세의 율법은 그 당시의 선민에게 적용이 되었던 법이고 선민과 함께 있던 이방인들에게 적용되었던 법이다. 하지만 선민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는 그 법이 적용이 되지 않았다. 거기는 어두운 땅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땅은 어두운 땅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법은 산 자에게 해당하는 법이다.
여기에서 가르치는 것은 “너희가 나와 한 몸이 되었으므로 사람이 그것을 나누지 못한다”는 뜻이고, 이어서 제자들이 물었을 때에 답을 한 것은 “너희가 너희 산 자 낳음의 근원인 여호와를 버리고 세상과 간음을 했기 때문에 내가 온 것이므로 너희는 쫓겨나게 된 것이다.”라는 것이며, 또 “이제 나의 아내 되어야 할 너희가 만일 나를 버리고 버림받은 아들인 선민에게 시집을 간다면 그것 역시 간음을 하는 것이다.” 라고 가르치는 내용이다.
다음의 마태복음에서는 한 단계 심화된다.
[마태 5:31-32]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공관복음으로 표현되는 "마태, 마가,누가"는 같은 내용을 다른 시각에서 기록한 글이다. 메시지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가는 그리스도를 처음 알게 된 이방인에게, 마태는 그리스도를 이미 영접한 이들에게, 누가는 이전 유태인들에게 하는 말이 된다.
마가와의 차이는 “버린 여자”이다. 마가를 듣는 이방인들에게 있어서 선민은 아들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낳아지는 모든 사람은 딸이 된다. 그래서 시집을 간다고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마태의 경우는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제자 된 선민의 입장에서 율법을 씹어 삼킨 율법의 지킴이들이 ‘여자’인 것을 아는 상태이다.
좀 어렵겠지만 잘 따져 보기 바란다. 예언서에 “몽사를 말하는 부녀”라는 말로 이미 그들에게는 말씀이 증거가 된 뒤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서 버린 여자임을 마태를 듣는 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된 너희가 그 딸들에게 장가들면 그것이 간음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모세의 법에 추가하거나 혹은 모세의 법에 수정을 가하여 일부를 바꾸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천적으로 행위의 법이던 것을 마음의 법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온 것은 폐하려 함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다.”라고 한 말은 그 똑같은 법을 세상에서의 행위에 기준을 두지 않고 마음에 두게 하려는 것이 나의 임무라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이랬으나 이제부터는 저렇게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가 바꾸어 놓은 것을 다시 행위의 법으로 돌려놓은 셈인 것이다.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린다는 것은 선민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여호와가 이방인에게로 가는 음행을 한 적이 없는데도 그들 스스로 여호와를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음행 하는 일을 저질렀으므로 선민들에게 있던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민들에게 이런 말씀을 한다.
[이사야 50:1]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 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아내란 성령이다. 잠언에 젊어서 취한 아내를 기뻐하라는 말씀이 있다. "돕는 자"가 아내이며, 어두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리스도인을 도와 구원하실 분은 성령이고, 그가 아내인 것이다. 여호와와 성령은 택한 자에게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선민에게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함께했고, 우리에게는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는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라고 하지만 정작 다윗의 이야기가 있는 시편에는 성령은 없고 “여호와”만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위 이사야 내용을 정리해 보자.
선민인 너희는 음행한 연고 없는 너희의 "어미이기도 하며 또한 아내인 여호와"를 내어 쫓았다. 그래서 그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로 내려지게 되었으니 그것이 너희 입장에서는 간음인데, 그것은 성령 탓이 아니라 바로 선민, 너희들 탓이다. 이방인에게 성령이 내려지게 된 것에 대해 너희는 할 말이 없다.
다음의 마태에는 다시 내용이 추가된다.
[마태 19:3-1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한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여기서는 “본래”라는 말씀을 전제하고 원래의 뜻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신약의 서신 글을 보면 그리스도는 “아담”으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원천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신랑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열 처녀 비유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이 선민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짝 지워진 것이고,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음의 법을 짝 지워 준 것이다. 마지막에는 제자들이 여전히 못 알아듣고 사람의 일로 말을 하자 그 우문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고자가 되라는 말로 “내가 말을 한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느냐”는 뜻으로 현답을 한다.
다음의 동일한 누가의 가르침이 결혼과 이혼에 관한 가르침의 결론이다.
[누가 20:27-40]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세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사람은 모두 죽어 있으므로 거룩한 성경의 말씀을 이제는 더 이상 영이 죽은 자의 일에 결부시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전의 모세의 율법 역시 영이 죽은 이방인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영이 산 자인 이삭과 야곱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지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랬던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이 산 자의 대열에 들 수 없는데 나의 법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나의 법을 따라 오는 자”에게만 해당이 되며, 육은 무익한 것이고 내가 살리는 것은 영이므로 더 이상 육의 일에 나의 법을 적용하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 세 복음서의 가르침이 사람의 육체적 결혼이나 이혼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보았다.
성령을 버리고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성령에게 간음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도 견디기 힘들지만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버린다는 것에서 아내는 신부 된 택함을 받은 자며, 남편은 그리스도다.
다른 데로 시집을 간다는 것은 거짓 증인의 가진 것이 탐이 나서 그들과 입 맞추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잠언에는 그들의 진찬을 탐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또 역의 경우로 잠언 30장의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경우는 그리스도 이후에 구원을 원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가져다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쓰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역시 간음이다. 기독교 신학이 이렇게 간음한 여인의 상태라고 성경에 증거가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복음서가 아닌 제자들의 글인 신약 서신의 내용을 보자.
3. 신약 서신에 나타난 남자와 여자에 대한 언급의 본래 의미
교회 안에서의 남녀간 법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신약 중에 교회 안에서 먼저 된 자, 선민, 혹은 가르치는 자인 남자와 나중 된 자, 혹은 가르침을 받는 자인 여자의 본분에 대하여 설명을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내용에서 순리로 써야 할 것을 역리로 쓴다든지, 여자는 머리에 써야 하고 남자는 쓰지 말아야 한다든지 하는 모든 이야기가 이 원리의 바탕 위에서 한 말이지 사람의 성별을 구분지어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런 가르침을 주었다. “영이 산 자는 성별 상의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천사와 동등이며 장가도 시집도 안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엔 남자 여자를 구분하여 전하시는 메시지가 있을 수 없다.
신약에 언급되어 있는 남성과 여성의 규례를 이야기하는 곳이 일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하여는 바울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라는 뜻을 “이것은 명령은 아니고 권도다.”라는 말로 피력해 놓았다. 권도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말씀은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모두 먼저 된 선민과 나중 된 낳아진 이방인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성별로써의 남자와 여자를 구분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이후의 경우로는 낳은 자와 낳아진 자, 즉 전도자와 피전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고린도전서 7장]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여기까지의 말은 그리스도의 명령이 아니라 바울의 권도이다. 또 혼인의 목적을 정욕 해소 이외의 것에서 찾는 내용은 없다. 결국 사람이 혼인을 하는 것은 자기의 정욕을 따름이라는 증거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좀 미개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실은 이것이 인생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차원에서 위선을 빼고, 가식을 빼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옳은 진리이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볼 때 비진리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말이 권도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시대 상황에만 적용되는 말이라는 뜻이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진리와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가 설명한 “본래”의 의미의 여자이다. 구원을 받아야 할 모든 사람이 곧 여자이다. 사람에 대하여 남자는 율법이고 또 마음의 법이 된다. 다시 말해 '마음의 법을 먼저 받은 베드로나 바울'이 곧 남자이며, 그들로부터 '전도된 이방인'이 여자이다.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라는 것은 선민들에게로부터 성령 세례가 나오므로 갈리지 말라는 것이고, 또 갈리거든 그냥 지내거나 화합하라는 것은 바리새인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 이전에 바리새인을 남편으로 알고 살던 사람이 여자이며, 또한 바리새인이 남편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 이 갈림이고, 또 화합하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합하라는 것이다. 또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것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의 의미가 '돕는 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모든 먼저 된 자에게 있어서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의 열매에 해당하고, 그 열매가 있음으로 인하여 의를 행한 것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의 관계를 남편과 여자라는 표현으로 설명을 한 것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는 것처럼 선민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남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레미아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호세아 2:2 ]
너희 어미(선민의 조상)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이 용어들은 영적인 의미의 관계를 설명한 표현이지 육신의 관계를 표현한 말이 아니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여기에서 보면 할례나 무할례가 더 이상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하는 것 같이 사람의 결혼이나 이혼도 마찬가지라는 설명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이제는 사람을 통하여 낳아지는 낳아짐으로 구원을 받는 때는 지나갔다. 하나님이 살리는 것은 육이 아니고 영이며 그 구원이 각각의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종이란 어떤 사람 조직의 계열 하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아내가 있다는 것은 육체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므로 이제는 없는 자처럼 살고, 울거나 기쁘거나 돈을 벌거나 돈을 쓰거나 하는 모든 것은 세상 욕구가 마음에 들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그것을 증거 삼아 이제는 반대의 길로 돌이키라는 것이다. 그것을 향한 마음이 모두 하나님의 방향과는 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권도이며 장가를 가든지 말든지 그것이 더 이상 토론거리일 수 없다는 것과 인생에서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 있다. 바울은 자기처럼 혼자 살기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이 그 이유이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고린도전서 11:1-16]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각 남자란 모든 지혜를 받아 먼저 된 자이고 이들이 전도를 하여 사람을 낳으면 그 낳아진 자가 여자가 된다. 그 남자가 바로 교회로 세워진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려져 성경을 자기의 눈으로 읽는 과정에서 성경의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깨달은 사람이 바로 남자이다.
여자란 남자에게서 전도를 받아 또 다시 낳아야 하는 사람이 여자이다. 말씀을 씨로 받아 낳아지는 자가 여자이며 그것으로 또 다시 낳음을 하기 때문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남자는 그 교회를 이루는 지체며, 여자는 남자 되기 이전의 가지 상태를 말하며 그 가지에 열매가 맺어질 때 그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최종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종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이르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십자가만을 외치는 자들이 빼놓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수단이지 목적일 수 없다. 그리스도처럼 자기도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함을 깨닫게 하는 수단이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머리에 쓴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지혜를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거나 세상에 속한 것을 얻기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 곧 머리에 쓰는 것이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이란 그리스도의 몸 된 전도자에게 받은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그것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배운 대로 전하지 않는 것이 머리에 쓴 것을 벗는 것이다. 민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은 받은 바 성령을 무위로 돌아가게 한다는 의미이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쓰지 않거든 깎는다는 의미는 온전한 것으로 전하지 못할 정도라면 차라리 전하지 못하게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예언서에 머리를 모지게 깎은 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모지게 깎았다는 말의 뜻은 자기의 마음에 맞는 성경만 편식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깎거나 미는 것이 부끄러움이 된다는 말은 징계 차원의 “전도 금지 명령을 받게 되거든”의 의미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남자가 쓰지 않는 것은 직접 지혜를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라는 뜻이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여자는 또 전도자가 명령을 따라 전도의 열매가 맺어진 증거이므로 전도자의 영광이 된다. 난 것과 지음 받은 것의 순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들을 인하여”라는 것은 전도자가 천사이기 때문이다. 택함을 받은 모든 소자에게는 하늘에서 그에게 주어진 그를 돕는 천사가 있다는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하셨다.
그들에게 전도를 받았다는 표를 머리 위에 둔다는 것은 나는 저 전도자에게 전도를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계보처럼 자기의 계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는 교회에서 조용히 하고 물을 것이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한테 물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 남편이 바로 자기를 전도한 자인 것이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남자가 여자로 말미암아 났다는 것은 전도의 열매가 성공을 거둘 때 비로소 그가 교회로 세움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전도는 받았으나 자기는 전도를 하지 못하면 교회로 세움을 받지 못하는 것이어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는 되지만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한 것이므로 끝에는 달란트 비유처럼 악한 종으로 분류가 되어 쫓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택함을 받고 전도를 하고 성공을 하는 모든 것이 나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니 결국 남자와 여자의 관계 또한 사람이 스스로 만든 관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무리에서는 질서를 위하여 있을 수 있는 규칙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모두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이므로 교회에 그런 규례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영적인 의미의 교회(에끌레시아)이지 결코 유형적인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여자가 남자에게 배운 대로 말고 임의로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긴 머리란 스스로 지혜 많음을 사람에게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삼손의 머리털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삼손의 머리털이 긴 것은 말씀의 힘을 나타낸다. 길다 혹은 짧다는 개념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전도자는 사람 앞에서 자기의 머리가 길다는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 사이의 상대적 사고를 하는 것이므로 악한 것이다. 이것을 본성이 가르친다는 것은 “남자는 머리가 길면 안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자가 머리가 길면 안 된다는 생각은 남자의 본성에 없다.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이 악인 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 성령을 받아 지혜로 성경의 말씀을 깨닫는 “남자”로 선택이 된 사람은 자신의 '지리멸렬함'을 선택이 되기 이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본성이 가르치지 않느냐.”라고 당연하게 말을 하는 것이다.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여자, 즉 사람에게 배운 것이 많은 피전도자에게 있어서 지혜의 배운 바가 많은 것은 자기에게 영광이 된다. 그것이 차후 남자가 된 뒤에 다스릴 고을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앞에서 설명하였다. 규례가 없다는 것은 모두 서로 섬김의 대상일 뿐이라는 말이다. 피전도자에게 전도자는 그리스도이며 전도자에게 말씀을 받은 피전도자가 또한 전도자에게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로 섬김의 이치이다. 이것은 양과 염소를 나눈 심판의 비유에서 그리스도가 언급한 말씀이다. 모르는 사람은 성경을 찾아 읽어 보기 바란다.
다음의 말씀이 추가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3:27 - 29]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 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 4장]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것이 바로 바른 그리스도인이 맞이하게 될 현실이 된다. 역시 모든 용어가 육적인 용어가 아니라 영적인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갈라디아 5장]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적은 누룩이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천국이 고운 가루 서 말에 여자가 누룩을 집어넣은 것과 같다"는 말이 곧 이 말이다. 고운 가루 서 말이란 그리스도의 계보 열네 대가 세 번 반복이 되는 동안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의 기록인 성경을 말한다. 온 덩이란 성경 전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성경이 나에 대하여 말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라고 말씀을 한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요동케 하는 것이 율법을 들어 다툼을 일으키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한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를 따라 분쟁하는 일을 금해야 한다. 말하자면 동성애자를 힐난하는 일도 말아야 하고 또한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분을 품는 것도 금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모두 성령 안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산 자의 영으로 거듭나 이성이든 동성이든 모두 할 수만 있다면 고자가 되어 바울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디모데전서 2:4-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 아담한 옷: 절제된 마음으로 말씀을 배우는 것을 말한다. 옷이란 자기의 사고의 중심이 되는 생각을 말한다.
# 염치: 겸손한 마음이다. 전도자에게 낳아졌으므로 그 도움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아는 마음을 말한다.
# 정절: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하여 배반하는 행위, 즉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
# 땋은 머리: 지혜에 대한 욕심으로 말씀을 배우지 말라는 것이다. 땋은 머리란 욕심을 가지고 자기의 머리를 지나치게 길게 하여 남에게 보이기 위해 말씀을 배우는 것을 말한다.
#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 아직은 “열매를 위하여, 깨닫기 어려운 말씀을 깨닫기 위하여,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말씀을 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들 된 뒤에 행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전도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지만 과정에 따라 전도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달성해야 하는 목적은 모두 자기 속에 있는 자기를 이겨 자기를 부인하게 하는 데 있다.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제는 이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아직도 여자가 애 낳는 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을 하는 자는 없을 것으로 믿는다.
< 성경이 말하는 음행이란 영적인 음행을 말하는 것이다. >
성경이 말하는 음행이란 하나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말한다. 남녀간의 성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의 율법에 적용을 받을 때에는 '성민'들 사이에서의 육체적인 일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마음의 율법이 시행되는 그리스도 이후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경우나 결혼과 이혼에 대한 경우로 다시 가르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세상에서의 윤리적 선이나 사회적 준법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내가 그 해당 사회의 법을 따르고 도덕을 지키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도 아니고 양심의 문제 때문도 아니다.
내가 속한 사회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하나님의 선과 악의 섭리를 통하여 움직여지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나의 경기장이기 때문이다. 각 사람이 속한 사회는 모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 다른 가치관에 따라 어느 나라는 마약을 해도 되고 어느 나라는 안 되는 법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나라는 간통이 죄고 어느 나라는 죄가 되지 않는 이러한 각 사람이 처하고 있는 상황 윤리적 환경은 각각 하나님이 택한 그 사람에게 있어서 거룩함을 향해 가는, 혹은 하나님을 찾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이 된다.
악이 있을 때에만 선이 분별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있는 것이므로 그 각 사람이 속한 사회의 법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의 가치관이 변하면 법도 변하고, 전에는 지켰던 것을 법이 변하면 안 지켜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는 인생들의 가치관에 의하여 만들어진 사회적 법은 그렇게 나그네가 어떤 동네에 들어가서 그 동네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의미는 없다.
영적인 질서 상에서 아비란 먼저 된 자, 즉 전도자를 말한다. 어떤 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전도를 하게 되면 전도의 열매로 처음 맺은 피전도자는 전도자의 선택 받음을 증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성령이 그 전도자에게 함께했다는 표시가 바로 처음 전도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전도된 사람은 그 전도자를 돕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돕는 자'를 '아내'라고 성경은 표현한다.
가령 솔로몬이 "처와 첩을 많이 두었다."라는 표현은 '직접 돕는 자와 간접적으로 돕는 자를 많이 두었다'라는 의미가 된다. 한 개인을 돕는 성령도 그에게 있어서 아내로 표현되며, 피전도자도 아내로 표현된다. 그래서 "젊어서(전도자의 상태에서) 얻은 아내를 기뻐하라." 혹은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 "네 집 내실에 있는 아내"라는 말에서 '집'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지은 내 마음 안에 지어진 집이고, 그 집이 성전이 되게 해야 하며, 그 집이 성전이 되게 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집의 내실에 있는 아내는 성령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음행은 이러한 질서 안에서 남의 아내, 즉 남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전도자에게 돕는 자로 주신 사람이므로 그를 데려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정한 질서를 파괴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분파가 일고 서로 사람 빼앗기 경쟁을 하는 것에 대하여 "이런 음행은 이방인들도 안 한다"고 한 것은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며 사는 이들도 육신적으로 그와 같이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할 수가 있는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레위기에 언급되어 있는 음행에 관한 규례를 굳이 들여다보고 참고할 필요도 없이, 각 사람이 현재 가지고 있는 세상에 속한 육적인 가계도 안에서의 육체의 성적인 질서를 영적인 질서에 적용을 하면 바로 이해가 될 것이다.
육체적인 도덕적 양심이나 윤리적 선이나 사회적 법규를 하나님의 진리와 혼합하여 사고하며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육신으로는 가이사의 사회에 살므로 가이사의 법을 따르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사회에 살므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혼동했을 때 집총 거부니, 병역 거부니, 탈세니 하는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가이사의 것을 사용하고 있으니 가이사에게 가이사의 것을 주고 하나님의 사회에 사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으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면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것은 '유물'이 아니다. 이 말을 빌미로 헌금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불법이다. 하나님은 돈을 가져오라고 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가져오라고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을 빙자하여 하나님 앞을 막고 서서 인생이 자기의 육체적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육에 속한 것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헌금이라는 제도는 하나님 나라에는 있을 수 없는 불법인 것이다. 영적인 나라에 어찌 육적인 규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육체의 행위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 함께 폐한 것이다.
4. 교회의 직분에 대한 오해.
지금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그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 보자.
[디모데전서 3:1-15]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에 교회를 돌아보리요)
감독의 직분이란 무리 안에서 가르침과 훈계가 가능한 사람을 말한다. 본래 뜻을 알아보자.
1.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흠이 없음을 말한다. 무엇에 대한 흠이 없음을 말하는 것일까? 이 말씀으로 무엇이 흠이고 흠이 아닌지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모세의 율법일까?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마음의 법, 그것이 기준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법은 어디에 나와 있는 것일까? 모세의 법을 형이상학적으로 마음의 법으로 차원을 달리하여 해석해 적용을 하면 되는 것일까? 물론 맞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므로 설령 그것을 차원을 달리하여 적용을 한다 해도 역시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레위기에 있는 모세의 율법 외에 마음의 법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한 마음의 법이 성경에 있다.(이것에 관하여는 차후 설명을 접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법에 비추어 흠이 없는 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여성은 감독자가 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다. 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자가 되어 전도를 하여 가지를 뻗고, 그 가지가 자기를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리게 되면 그 처음 맺은 열매가 바로 그 사람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결국 스무 살의 여성이 예순 살의 여성을 아내로 맞을 수도 있게 되는 것이며, 스무 살의 여성이 또한 감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전도자가 첫 열매를 맺게 되면 그는 비로소 베드로처럼 자기 위에 교회가 선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자기 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형의 무리로서 교회가 있고 또 자기 안에 무형의 교회가 또 있는 것이다.
3. 절제, 근신, 아담, 나그네 대접, 가르치기 잘함,
스스로의 절제와 근신과 겸손을 겸비해야 하며 나그네, 즉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의 사람을 대할 때 그리스도이신 것처럼 대접할 수 있는 마음이 온유한 자이어야 하며, 또한 가르치는 기능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4. 술, 구타
술을 즐긴다는 것은 알콜을 즐긴다는 말이 아니다. 포도주는 말씀을 전하여 은혜로 얻어지는 모든 결과를 말하며 독주란 돈을 뜻한다. 그것에 대하여 즐김이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5. 관용, 다툼 없음.
용서의 의미를 아는 자이어야 하는데 사람은 용서를 하거나 말거나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이어야 한다.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는 말은 무제한을 말하는 것이다. 또 다툼이 없어야 하는 것은 사람과 다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라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 사이에 마음을 섞지 않고 사람을 삼가는 자는 다툼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6. 돈을 사랑치 않음
돈을 즐기는 것과 구분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억 원을 가진 자나 천만 원을 가진 자나 하루 세끼 먹는 것은 같다. 같은 세끼를 먹어도 뷔페 음식을 먹는 것이 돈을 즐기는 것이고, 세끼 먹을 것 외에 더 가지려 하는 자가 돈을 사랑하는 자이다. 돈이 수단이지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자가 돈을 사랑하는 자이다.
7. 자기 집은 앞에 설명했다.
자기 집 사람들도(무형의 자기 위에 선 교회 안의 사람들 : 자기가 전도한 자들)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유형 교회의 감독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관 복음서에 보면 “종을 가르치는 종”이 있고 “집 사람들을 가르치는 종”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 종을 가르치는 종이 여기에서의 감독이다.
외인에게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는 뜻은 인간의 법에 적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집사란 종을 다스리는 종이 아니라 집 사람을 다스리는 종이다. 물론 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도와 같은 사람들이 집사에 해당하며, 작은 의미로 사도가 세운 유형 교회 안에서 사도 같은 자를 감독으로 두고 그 아래에서 그 교회의 구성원인 여자(피전도자)를 다스리는 자가 바로 본 말씀의 집사에 해당한다.
목사나 집사나 교사 등이 모두 이 집사에 해당한다. 이것은 사람 사이의 직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일정 수준의 마음의 법을 깨달은 전도자 이상의 기준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며, 같은 수준에서 누구는 말을 잘해서 교사로, 누구는 행정력이 뛰어나 집사로, 누구는 지혜가 많아서 목사로 세워지는 것이다.
집사의 직분과 감독의 직분은 그 차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양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 범위의 차이이다. 감독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마음에 세상에 대한 것이 없음을 지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며, 집사는 여자(피전도자) 중에 전도자의 모습을 갖춘 자 이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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