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창/- 믿음의 사람

c.s 루이스

에반젤(복음) 2019. 7. 1. 08:43



철저한 무신론자에서 무신론자를 위한 사도로..

무신론자를 위한 사도라고 불리우는 클리브 스태플즈 루이스는 평생 거의 글로써 하나님을 전한 사람이었다. 

나님을 부인하는 영문학 교수에서 회심하여, 믿지 않았던 시절을 바탕으로, 무신론자들의 심리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라는 것을 명료한 필치로 증명해냈다. 그의 저서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 관한 전집은 말할 것도 없고 시집, 문학비평, 우화, 과학소설, 일반소설, 아동도서 등 매우 

광범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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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없다 

친구들 사이에서 잭으로 통하던 C. S.루이스는 1898년 11월 29일 북에이레의 수도 벨파스트(Belfast)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로 성공해서 넉넉하게 가계를 꾸려갔고,  1905년에는 벨파스트의 교외에 있는 

큰 집을 사서 가족 모두 이사하게 된다. 그런데 이사 후 얼마되지 않아 어머니가 죽고나서 루이스와 그의 

형 워렌(Warren)은  그 오래된 집의 널따란 다락에 올라가 몇 시간이고 둘이서만 지낼 때가 많았는데, 그럴때 마다 

그들은 스스로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에 깊이 젖어들곤 했다. 

루이스는 자라면서 유년기에 가졌던 기독교 신앙을 버리게 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영국군으로 

복무하고  그 후에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한다.  1919년에서 1923년까지 옥스포드 대학의 유니버시티 

컬리지(University College)에 있으면서 고전학과 철학을 전공하여 1922년에는 최고 우등생의 영예를 얻었고, 

이듬해에는 영어 전공으로 또 다시 최고 우등생의 영예를 차지한다. 

졸업 후 1925년 봄에 옥스포드의 모들린대학(Magdalen College) 평의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1946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했으며, 1954년 캠브리지 대학교에 신설된 중세 및 문예부흥기의 문학을 강의하는 영어 

교수직에 초빙되기  전까지 줄곧 모들린에서 지내면서 조용하고 학구적인 활동을 하게된다. 

그 후 회심하고 난 루이스는 곧 중세 및 르네상스 영문학 분야의 연구를 주도하는 권위자로 그 명성을 세워가기 

시작하면서 관계되는 여러 저서를 기술하였다. 루이스는 1963년 11월 옥스포드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나님은 있다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까지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러던 중 1920년대의 10여년간 그는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고 있었다.  그가 유년시절에 버렸던 신앙을 다시 찾게 
된 사건은 그의자서전 Surprised by Joy에 아주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씨름하다가  결국 지적으로 정직한 자세를 취할 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뒤 그는 회심하게 된다.  그의 의지는 그렇게하고 싶지 않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이 하나님을 받아들인 위대한 결단의 순간을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모들린 기숙사에 있을 때였다. 밤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라도 쉴라치면 내 편에서는 그렇게도 부딪치기를  

원치 않았던 그분이  무정하게도 끊임없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려워 피하기만 하던 바로 그분이 드디어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1929년 마지막 학기에 나는 드디어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어 기도했다."

펜과 종이로 하나님을 증거하다. 

회심한 후 그는 열렬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변화된다. C.S. 루이스는 그의 많은 글을 통해 어느 신학교 교수

보다 더 훌륭하게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을 일깨워주었다. 루이스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합리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명쾌하고도 확신에 찬 여러 권의 책들을 펴냈다. 

그의 저서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에 관한 전집은 말할것도 없고, 시집, 문학비평, 우화, 과학소설, 일반소설, 

아동도서 등 매우 광범위하다.  특히 무신론자였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에 대해 의심을 품고있는 

사람들이나 기독교인이 되길 원하지만 자기가 지닌 지식의 방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갖게 해주는 

훌륭한 전도자였다.  기독교의 진리를 의심할대로 의심해보고 따져볼대로 따져본 그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큼 

솔직한 태도로 기독교를 논한다.

C.S.루이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편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명료한 필치로 변론한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작품을 통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서 오늘날까지 많은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있다. 특히 그의 책을 통해 크게 영향력을 받은 사람으로 챨스 콜슨 (Charles W. Colson)을 들수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정치적음모의 중심 인물이었던 그는 레이테온회사의 사장이었던 톰 필립스(Tom Philips)의 권유로 루이스의 내가 믿는 기독교를 통해 완전히 회심하고 죄수를 선교하는 일에 헌신한다. 

그리고 루이스를 보지 못한 많은 이들이 지금도 그의 책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 

"하나님의 완고하심은 인간의 유연함 보다 더 부드러우며, 그분의 강제는 곧 우리의 자유인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처럼 놀라운 사실을 혼신의 힘을 다해 종이 위에 옮겨 놓았던 C.S.루이스의 필적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그의 펜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작품 세계  

그의 작품 중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Mere Christianity)는 그가 영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했던 내용을  모은 The Case for Christianity, Christian Behaviour, Beyond Personality 의 


본으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순전한 기독교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종교관과 

윤리학적인 차원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문체로 명확하게 설명한다. 
 
또한 그가 자신의 손녀를 위하여 서술한 나니아 왕국 시리즈(The Chronicles of Narnia)라는 동화는

요술의 나라에 들어가서 주인공들이 펼치는 흥미진진하고 신기한 갖가지 모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저자의 문학적 재능과 상상력이 돋보이며 많은 이들이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꼽는 작품이다.

C. S. 루이스는 그의 작품에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 즉, 불가지론자와 구도자, 성인과 어린이, 자유분방한 

사람들과 보통 사람들을 함께 묘사함으로써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었다.  1963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가 쓴 책들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에게 배운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은 기독교인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비기독교인 앞에서 그들이 전혀 익숙해하지 않는, 교회 내에서 통용되는 언어와 논리들을 나열하다가 결국 그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이끌기는커녕 마음조차 움직이지 못했던 씁쓸한 경험도 한번쯤 간직했으리라.

그럼에도 예수의 증인이 되어 이 세상의 영혼 하나쯤 나와 함께 은혜를 누리게 하고픈 간절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도전을 던지고 큰 힘이 되어준다. 물론 그의 쉽고도 논리정연한

신앙저서들은 비기독교인의 눈높이에 맞췄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태도와 삶을

바로잡아주게끔 도와주기도 한다.

알려졌다시피 영국의 영문학자이자, 20세기 대표적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1898~1963)는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는 지적 편견을 반박하고 기독교 사상의 타당성을 입증해 많은 기독지성인들에게 큰 명성을

얻었다. 게다가 최근 그의 상상력과 문학성을 동원해 기독교인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과 이 땅에서의 신앙적 삶을

더 풍성하게 해주는 동화 <나니아 연대기>가 미국 헐리우드에서 시리즈별로 판타지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지는 중이다.

국내에서도 C. S. 루이스의 삶과 저술들을 통해 그의 사상의 가치와 의미를 배우려는 움직임이 있다. 한국고등신학연구원(원장 김재현)은 미국 휘튼대학 웨이드연구소 소장인 크리스토퍼 미첼(Christopher Mitchell) 박사를 초청해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신촌의 창천교회에서 ‘C. S. 루이스와 함께 되돌아본 현대 기독교’를 주제로 연례강좌를

열었다.

영국 C. S. 루이스협회와 계약을 맺어 <순전한 기독교> <예기치 못한 기쁨> 등을 비롯해 <루이스와 프로이드>

<나니아나라를 찾아서> 등을 펴낸 홍성사와 창천문화쉼터 등이 후원한 이번 강좌에서 영문학자 및 복음주의 신학자․

목회자들의 뜨거운 관심이 엿보였다. 매시간 그의 사상이 당대 영국 지성계와 기독교계에 어떻게 평가 받았으며 그리고 오늘 한국사회와 기독교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다. 고등신학연구원은 향후 5년 동안

C. S. 루이스에 포커스를 두고 매년 강좌를 열 계획이다.

최소란 기자


자연주의 경도된 시대에 열정적 복음 전도

 


C. S. 루이스가 활동하던 20세기 중반 영국사회는 자연주의(Nationalism)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자연주의란 오직 자연만이 존재하는 것의 전부이고 어떠한 사물에도 초자연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고 믿는 신념을 뜻한다. 즉 우리가 감각적으로 파악하며 살고 있는 이 경험적인 세계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루이스는 확고한 초자연주의적 신념을 표현했다. 성경의 저자들이 쓴 영적인 실재들이 바로 우리의 경험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당시는 그러한 세계관이 전혀 인기가 없던 때였다. 그래서

루이스는 교수 생활을 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그 당시의 흐름을 지배하던 관점과 견해들에 맞서 자신의 생각을

변론하는 데 보내야 했다.

루이스가 초기에 저술했던 두 권의 시집을 제외하고 그의 모든 저작들 속에는 기독교세계관의 초자연주의가 나타나

있다. 루이스는 그의 탁월한 문학적․사상적 재능을 발휘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가

그곳에서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곳이 단순히 존재할 뿐 아니라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생생한 실재이고 아름다우며 광대한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무신론자에서 신앙인으로

루이스가 처음부터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 루이스는 1989년 11월 29일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신앙적 가르침을 받았으나, 그는 그 가르침들에 대해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15살 때부터

그는 불신앙과 비관주의에 빠져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로 그는 점점 더 신앙을 잃게 되었다.

루이스가 16살이 되던 1914년 대학입학을 위해 커크 페트릭 씨에게 개인지도를 받았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무신론자인 페트릭 씨는 그는 자신의 학생들이 사실이나 진리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도출해낼 수 있을 때까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루이스는 그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면서 논쟁의 기술에 숙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물질일 뿐이라는 자연주의 사상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더욱 견고하게 키워갔다.

1917년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신론자들이 가진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반박하는 저서들을

읽게 되었다. 그들은 학식이 풍부하고 분별력 있는 저술가들이었고, 그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 자연적인 물질 세상 배후에 또는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또 하나의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이처럼 좋은 교육을 받은 지성인들이 여전히 초자연적인 실재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무신론에 대한 루이스의 신념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 이후로도 12년 동안 무신론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30살이 되던 1929년 마침내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2년 후 그의 형인 위렌의 모터사이클에 달린 사이드카를 타고 함께 동물원에

가던 길에 루이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문학적 복음 전도자

그가 회심한 지 첫 해인 1931년부터 루이스는 복음을 전도하는 일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9년 그가 쓴

소설 <조용한 별 밖으로>를 읽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 속에 담겨 있는 기독교적 요소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비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저항감을 갖지 않게 하면서 흥미롭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루이스를 문학적인 복음 전도자라고 부르게 됐다.

중요한 것은 루이스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나아오라고 직접적으로 호소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은사는

기독교 사상을 공격하는 논증들의 허점을 찾아냄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지적인 편견들을 허물어뜨리고 기독교 사상의 타당성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또 루이스는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의 소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상상력에 자극을

주려고 했다.

기독교 사상의 대변자로서 루이스가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40년 <고통의 문제>를 출판했을 때부터

였다. 1941년 라디오방송에 고정출연해 기독교 사상에 대한 연설을 을 함으로써 그는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1942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출간되자 그는 더욱 크게 주목받는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다. 그 외에도 영국

공군이나 옥스퍼드대학교의 소크라테스 클럽모임이나 기독대학생단체 등 다양한 청중을 대상으로 기독교 사상을

위한 연설을 했으며, 때때로 설교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동료교수들에게 배척 받기도

  

루이스의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은 그의 친구들과 대학교 동료교수들 사이에서 긴장과 적대감을 낳기도 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인 오웬 바필드는 불신자들의 회심을 위한 루이스의 열정이 때때로 그를 성가시게

하거나 당혹스럽게 했다고 전했다. 사적인 차원에서는 루이스의 신앙을 기꺼이 인정해줄 수 있지만 그가 다른

이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공적인 영역에서 변증 활동을 하는 것까지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옥스퍼드대학교 내에서 루이스의 동료교수들 중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루이스의 그런 활동을 비웃었다.

루이스가 그의 신학저서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기독교 변증가로서 확고하게 선 것 만큼이나

그를 적대시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럼에도 루이스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그는 실재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특히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독교의 소망이 무신론자들이 가진 실재관보다 훨씬 더 탁월하고 아름답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의 생생한 비전을 뚜렷하게 표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기독교가 참 진리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 있는 자연적인 즐거움들이 하나님나라와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에 있는 더 크고 즐거움을

흐리게 하거나 가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