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창/- 믿음의 사람

조지 뮬러

에반젤(복음) 2019. 7. 1. 08:20



     조지 뮬러   65년간 5만번 기도의 응답을 받은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의 이름을 들으면 5 만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영국 고아의 아버지 라고 불리운다.

그는 수많은 예화의 주인공으로 오늘도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훌륭한 신앙인이 되어 영국과

전 세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으며 초 교파 공동체 운동인 "형제단"을 설립해 교회 개혁의 원형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뮬러가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주 무대는 영국 브리스톨의 고아원이었다. 뮬러가 고아원을 시작한

것은 고아들에 대한 연민 이상의 결심이 있었다. 뮬러가 살았던 19 세기 유럽은 인본주의 철학과

자유주의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신은 필요없다는 자만이 팽배했다. 뮬러는 이런 불신앙을 목격

하면서 하나님은 과거와 오늘 지금도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브리스톨의 작은 마을

"애슐리 다운"에 고아원을 설립하게 된다.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던 뮬러에게 기도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의 기도는 확신에

차 있었고 힘이 있었다. 그가 기도했을 때 전혀 알지 못했던 곳,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서 응답이 왔고

애슐리의 고아들은 한끼도 굶지 않았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의 승리를 직접 보여주는 데 성공

한 것이다. 뮬러의 신앙에 큰 감명을 받은 사람 중에는 허드슨 테일러가 있었다.

말년에 유럽 전역과 미국, 캐나다, 호주, 인도 등지로 복음을 전하러 다닌 뮬러의 모습을 보면서

허드슨 테일러도 오직 기도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갖고 중국 선교의 위대한 발걸음을 옮겼다.

 

조지 뮬러는 1805 년 "프로이센"에서 세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는 다녔지만 술꾼인

아버지 때문에 가정 환경이 펑탄치 않았다.  혼란스럽고 힘든 청소년기를 보낸 뮬러는 교도소까지

들락 거렸다. 경찰들도 그를 감당하지 못해 몇번이나 그냥 풀어주고 심지어 도망치는 법을 가르쳐 줄

정도였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뮬러는 "나는 도대체 기독교인이면서도 왜 이렇게 못된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가" 하는 생각에 남몰래 괴로워했다고 훗날 털어놓았다. 그의 회심은 갑작스럽고 순간적인

것이었다. 어느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나쁜 버릇이란 하루아침에 고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한번 당신의 자녀로 삼은 사람을 절대로

버리는 법이 없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죄와 싸우자"

한번 시작한 거짓말과 절도, 도박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뮬러는 그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 그 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자신과의 싸움을 벌였다. 구제 불능이었던 비행

청소년 조지 뮬러는 19세 되던  1824 년 "할레 대학교"에 신학생으로 입학한다.

 

할레 대학교는 경건주의 운동이 시작된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경건주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훗날

그의 생애를 변화시킨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를 배운다. 뮬러는 할레대학 모임에 참석했던

순간을 "마치 내가 한 마리의 새가 되어 푸른 하늘을 너울 너울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고 묘사한다.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뮬러는 졸업 후 영국으로 건너가 "데번" 항에서 잠시 목회를 한다.

그곳에서 기성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 교파와 계급을 초월한 성찬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의 베데스다

교회는 유아세례와 성직자 제도, 국가에서 받는 급료를 폐지하고 철저하게 개인의 고백과 헌싱에 기초

한 신앙 공동체 였다.

 

브리스톨에 교회를 개척한 뮬러는 고아들이 수용돼 있던 구빈원의 실상을 목격하고 고아원을 설립 하게

된다. 구빈원의 아이들은 먹지 못해 해골처럼 말라 있었고 병으로 퉁퉁 부어 있었다. 당시 뮬러는 이미

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학교는 가르치기만 하면 되지만 고아원은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하는 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것이냐"는 비난과 충고가 쏟아졌다.

이미 대학시절 학비와 생활비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물려지만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하나님께 너무 많은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시편 81편 10절 말씀에 그는 다시 용기와 힘을 얻었다.

 

하나님 제가 고아원을 하고 싶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제 마음에 불러 일으키신

소원임을 믿습니다. 저는 오직 당신의 종으로만 일할 뿐입니다. 뮬러의 태도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고아원 운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바자회를 열고 모금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뮬러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한번에 마련한 물질에 기대어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치 만나와 메추라기에만 의존해 40년간 광야의 식탁을 차렸던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원하는 사람들의 성금과 성물로 고아원을 운영하겠다는 것이 그의 기도였다.

 

고아원이 세원진 뒤 어려움을 계속 찾아왔다. 마지막 남은 밀가로로 빵을 만들어 저녁식탁을 차리면서

내일 아침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날들이 되풀이 되었다. 뮬러는 끊임없는 기도로 고아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간구했다. 그가 기도했던 물품과 음식은 언제나 어김없이 공급되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

까지도 그의 고아원을 찾았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아침 고아원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400명의  고아들과

함께 빈 식탁에 둘러 뮬러는 손을 맞잡고 식사기도를 드렸다. 그의 기도가 끝났을 때 한대의 마차가

고아원 문을 두드렸다. 그 마차에는 아침에 막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가 가득했다. 인근 공장에서 종업원

들을 위한 야유회에 쓰기 위해 주문했지만 폭우로 취소되자 고아들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뮬러는 이처럼 고아원을 운영한 65 년 동안 순간순간 기적적인 주님의 공급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가장 선한 것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믿었고 그 믿음은 늘 사실로

증명됐다. 그는 말년에 고아원 운영을 제임스 라이트에세 맡기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과 북미,

호주, 아시아 각국을 여행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다. 그이 메시지는 단순

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1898 년 3월10일 이른 아침 뮬러는 평온히 잠든 채 발견되었다. 전날까지 일상 업무에 분주했고 평상시

와 같이 기도회에 참석했던 그는 하나님을 만났던 그 순간처럼 ?은 시간에 아무런 고통도 없이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애슐리 다운 고아원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뮬러가 헨리 크레이크와 함께 개척한

베데스타 교회는 초대교회의 정신을 실천하는 "형제단 운동"으로 발전해 영국을 비롯해 유럽 전역과

미국, 호주, 등에 퍼져 있다. 산상수훈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형제단 운동은 갖가지 종파로 분열된

현대교회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신앙 공동체의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영국 형제단은 한국에도 찾아와

한국에 형제단 공동체를 설립하는 문제를 검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