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에 조건을 걸지 마라
(학 1:6)
"너희가 많이 뿌릴찌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찌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찌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위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경고를 말하고 있으며 재정적인 형통함을 기대하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건일 겁니다. 구멍이 뚫어진 지갑은 우리의 희생과 수고가 열매 맺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것을 말할 것이며 이로 인해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여러 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통한 재정적인 복을 간절히 기대하며 드리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드리지 않는다면 혹시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까봐 두려움에 휩싸여 드리기도 합니다. 아님 생각 없이 오랫동안 해온 종교적인 관행이기에 습관대로 드리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직책이나 직분의 책임감이나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서 드리며 목회자의 기대와 강요(?)에 못 이겨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드리는 아름다운 마음도 있습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생각으로 드리고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아 영혼뿐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에도 하나님의 형통한 축복이 임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일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세와 방법에 의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1. 십일조에 조건을 걸지 마라.
아침 신문에 어느 할머니가 20여년을 허드렛일을 해서 모은 600만원을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고 관계기관에 기탁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뭉클하였습니다. 20년간 모은 돈이 겨우(?) 600만원이라면 이 할머니의 수입이 그리 많지 않음과 오랫동안의 고단한 노동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20년 가까이 모은 돈을, 그것도 노동력을 잃어 더 이상 벌 수 없는 노후에 내놓았다는 것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3.1절 국경일에 국무총리와 기업가와 골프를 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국경일에 공무원의 수장이 골프를 친 게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과 기업인의 만남은 아무리 순수하게 포장을 하더라도 구린 냄새가 나게 마련이며 이들의 관계는 이권과 청탁의 그림자가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 재벌이 8,000억이라는 입이 딱 벌어지는 거액을 사회에 한원 하겠다는 엄청난 제의도, 천문학적인 액수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600만원보다 감동적이지 않는 것은 평소에 그 재벌의 행태를 보는 국민들의 눈길이 곱지 않아 눈치를 살피며 보험료의 성격 으로 정부와 국민에게 내는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 거액은 사업을 하면서 저지른 탈세나 편법 등의 비도덕성이나 파렴치한 행위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성격이 짙기 때문에 아무리 큰돈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선행은 조건이 없다.
(눅 6:34~35)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위 말씀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읽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떠오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나무는 인간에게 아름다운 풍광과 시원한 그늘, 편안한 쉼터를 제공해주며 심지어는 욕심에 가득 찬 인간이 땔감과 재목으로 쓰려고 톱으로 잘라 가져가도 그루터기를 남겨 서 탐욕스런 인간에게 편안한 의자를 제공해 준다는 내용으로 아낌없이 제 몸을 드려 희생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잘 그린 삽화와 함께 나타내고 있습니다.
똑같은 상품이라도 주는 이의 마음과 목적에 따라 선물과 뇌물로 나눠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뇌물은 거래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받은 이가 받은 만큼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기를 바라고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권이 걸린 청탁으로 주게 되며 값비싼 명품과 더불어 골프접대나 해외여행 등의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선물은 생일이나 입학, 승진 등의 특별한 날에 고마운 마음이나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서 드리는 상품을 말합니다. 그래서 뇌물은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 모두 즐겁거나 평안하지 못하고 부담을 느끼는 반면에 선물은 대가성이 없기 때문에 주는 사람도 즐겁고 받는 사람도 기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마음은 대가도 바라지 않고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가끔씩 신문에 등장하는 ‘얼굴 없는 천사’라는 제목도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박봉을 털어서라도 오랫동안 불우한 이웃을 돕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에 박수를 보내는 것도 선행에 대한 칭찬을 바라지 않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기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 불우한 이웃과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려는 자세로 훈훈한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아름다운 행위를 하기 이전에 먼저 거룩한 성품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당신의 자녀가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닮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기뻐하는 뜻을 온전히 좇을 때 흡족해 하시며 상을 주십니다.
기복(祈福)신앙은 하나님을 잡신으로 만든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입신양명하여 출세하고 가문을 빛내며 무병장수하게 사는 것을 바랐으며 인생의 위태로운 고비 때마다 귀신이나 산신령, 조상신 등에게 제물을 차려 좋고 복을 빌며 액운이 떠나가고 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몸을 가진 생로병사의 한계, 운명적인 신분, 막강한 국가의 제도와 엄청난 자연적인 환경을 이길 수 없기에 이러한 방법이나마 치성을 드리며 간절히 빌곤 했습니다. 지금도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면 푸닥거리를 하면 액운을 없앨 수 있다거나 귀신에게 치성을 드리면 사업이 잘되고 승진이 되며 자녀가 명문대학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그 무당이 섬기는 귀신의 특징은 자신을 무조건 섬기고 자신의 말을 복종한다면 그 대가로 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비는 사람이 복채로 두둑한 돈이나 고행 등의 희생만 정성껏 이행한다면 귀신이 흡족해 하면서 큰돈을 벌게 해주고 명예와 권력을 잡게 해주는 등 소원을 풀어준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도 교회에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고 헌금을 두둑이 드리면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 등의 정성을 드리기만 한다면 사업이 잘되고 부자가 되는 축복을 내려주신다면 앞서 말한 귀신들과 다름없는 잡신으로 끌어 내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예는 극단적인 태도를 가정한 것이지만 이와 비슷한 행위는 얼마든지 교회 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업이 잘되게 해주시면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겠다고 하거나 남편이 승진되거나 땅값이 오르기만 한다면 교회에 거액을 헌금하겠다고 기도하는 등의 내용일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이방인들이 섬기는 재물의 신으로 여겨서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광을 돌려드리기는 차치하고 잡신으로 여기는 행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는 고사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레 27:30)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십일조를 조건을 걸고 드리는 행위는 동등한 자격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십일조를 인색하게 드리는 행위의 잘못된 점은 십일조가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오랫동안의 시간과 애쓴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이라 할지라도 그 수입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데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세상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 인간을 만드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재물 역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소유이며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의 소유물도 하나님의 재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조상 아담에게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맡기셨고 자유의지를 주어 자발적으로 기쁘게 순종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걷어 들인 소득일지라도 우리에게 건강과 지혜, 지식 등의 능력을 주셔서 노동을 통해 얻게 하신 것입니다.
(신 8: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나의 소득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이 소득을 가지고 일용할 양식을 위해 사용하고 자식을 기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같은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거나 이를 인정하지 않고 마치 자신의 수입이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여 하나님과 거래하고 조건을 걸어 내 수입의 일부를 드리는 조건으로 성공을 얻고 부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소유인 종이 노력하여 재물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수입은 주인에게 돌아가며 그 종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여 재물을 얻었다 할지라도 나의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임을 인정하는데서 신앙고백이 시작되며 믿음이 출발하는 것입니다.
십일조 이전에 믿음이 필요하다.
십일조를 드리는 잘못된 태도의 근원은 올바른 믿음이 없이 드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정립되고 두터운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를 드릴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지 믿음이 없이 드리는 십일조는 불평과 부담의 씨앗이 되며 신앙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믿음을 가지려는 노력과 기도가 필요하겠고 하나님의 축복과 상관없이 기쁘고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고 난 후에 드려야 될 것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믿음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크리스천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지만 그 믿음을 가장 심하게 흔드는 것은 재물입니다. 재물은 우상처럼 일정한 형체나 교리를 갖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사탄의 교묘한 계략에 노출되어 재물을 미끼로 은밀하고 집요하게 유혹하는 공격대상이 되어 있는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우리가 섬기며 경배해야 될 대상도 하나님 한분이시지만 현대의 우상은 흑과 백의 뚜렷한 이분법으로 판단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등수학의 난해한 미적분이나 삼각함수처럼, 풀기에 이해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느냐? 아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재물을 이용하느냐? 하는 아주 단순한 판단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물론 이러한 간단한 결정도 깊은 믿음이 전제되어야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가며 재물을 잡을 수 있는 묘수(?)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 핑계나 변명, 복잡한 방법을 들이대며 감정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동기나 과정은 어렵고 복잡할지 몰라도 결국은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를 선택하는 단순한 선택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삶에 필요한 재물을 주시는 하나님
(마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생명유지에 필요한 것을 쌓아두고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또한 자녀들을 잘 교육시켜 자신의 명예를 빛내주기를 기대합니다. 즉,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충족시키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보수가 높은 직장을 선호하고 고소득을 올리는 자격증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재테크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유입니다. 또한 돈을 지출하는 것에는 되도록 억제하며 인색하게 굴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과 고된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이 새어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요청하는 십일조에 민감한 모습을 보이며 탐탁찮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자신과 가족의 삶에 필요한 돈을 보호하려는 마음과 수입의 십분의 일의 거액을 교회에 드려야 하는 상황에서 심각한 갈등을 빚으며 십일조의 행위가 부조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돈이 내 삶을 지켜줄 거라는 평생을 겪어온 인생의 경험과 하나님이 내 인생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사이에는 심각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가지도 놓칠 수 없기에 적당히 타협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지으시며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과 들에 핀 이름 없는 꽃들에게조차 그들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먹이와 영양분을 준비해 주셨는데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지 않겠느냐며 반문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먹을 것이 없어 산 아래 마을로 노루며 멧돼지들이 내려와 마을주민들이 먹을 것을 주었다는 기사가 얘깃거리로 실리는 것을 보면 평소에 그 동물들은 먹을 것이 충분히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렇지만 먹이가 풍부하게 있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찾아다니며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준비해 주셨지만 부지런히 일하는 노동을 통해서 얻게 해주십니다. 그러 므로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자세만 갖고 있다면 먹고 사는 일은 문제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富)의 조건
(마 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삶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외에 필요한 재물은 선교와 구제 등의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주시는 것인데 이는 준비되고 실력이 있으며 지혜와 충성을 보이는 자녀들에게 주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자격과 실력이 없는 자들에게 큰돈은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로또복권의 행운으로 수십억의 당첨금을 갖게 된 자들이 큰돈을 주체할 수 없어 흥청망청 쓰다가 패가망신하고 건강까지 잃게 된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로운 것도 아니며, 농토가 개발이 되어 보상금으로 거부가 된 사람들도 없어질까 두려움으로 안전하게 쌓아두고 죽어나서 자식들의 인생을 망치는 도구로 전락하는 이유는 큰돈을 관리할 수 있는 자격과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의 땀과 희생으로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로운 자연의 법칙과 원칙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게 하기도 합니다. 이는 크리스천이 아닌 세상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부를 얻는 자격을 얻으려면 충성스러운 믿음과 지혜가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기뻐할만한 믿음을 보인다면 지혜를 주시고 환경을 열어주셔서 재물을 얻게 하시며 하나님의 의를 위해 그 재물을 사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부를 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재물을 맡겨주시는 자의 기본적이며 중요한 자격입니다. 세상의 재물이 하나님의 것이며 이를 인정하는 행위로 수입의 십분의 일을 기꺼이 드리도록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드린다면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에 어떤 조건을 달아서도 안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조건을 거는 것은 십일조로 드리는 돈이 자신의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임은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부를 받아 의로운 사역을 위한 비전을 갖고 계시다면 기쁘고 즐겁게 드릴 수 있는 십일조의 믿음을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재물에 대한 시험에 거뜬하게 합격해서 세상에서 형통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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