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자료/종려주일 설교

[스크랩] 2013년의 `종려주일`입니다! (요 19:25-30)

에반젤(복음) 2021. 2. 21. 00:08

2013년의 '종려주일'입니다! (요 19:25-30)

한국교회는 오늘 종려주일, 혹은 고난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 동안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러니까 고난주간은 종려주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축하하는 주일입니다. 한때 이 주일은 '호산나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요12:12-13절에 보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상징하는 그런 나무입니다. 이 종려나무는 잘 시들거나 마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당시 군왕이 행차를 할 때에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또 종려나무는 사철 푸른 나무입니다. 시92:12절에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할/ 늘 푸른 믿음, 살아있는 믿음, 능력 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참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많은 사람들이'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시118:25절에 보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형통케 하옵소서'라는 뜻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쳐야 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 환란에서, 이 고통에서, 이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아멘!/ 마21:9절에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할/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하여 그 나라의 중심인 서울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의 서울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출세하시려고 올라가셨습니까? 아닙니다. 죽으려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려고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당하신 한 주간을 살펴보고,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십자가상의 칠언'을 살펴보면서 기독교의 바른 진리를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사람들은 대체로 나쁜 소식은 숨기면서 삽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자랑합니다. 자식이 잘 되면 자랑합니다. 사업이 잘되면 자랑합니다. 가정이 잘 되면 이런 것은 모두 자랑하고 의시 대며 뽐내게 됩니다. 그러나 나쁜 것은 숨기며 삽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예수가 저주의 십자가를 졌다고 전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야로 오신 예수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당시 최고의 저주의 형벌인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슬픈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전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사도들은 그 저주의 형벌로 죽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자랑하면서 전합니다. 맞습니다. 기독교의 심벌은 십자가입니다. 기독교의 자랑도 십자가입니다. /믿/ 우리도 이것을 증거하며 자랑해야 합니다. /아멘!/ 바울의 결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전2: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만 바로 알고 전하겠다는 일사 각오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지만 흉악한 죄를 지은 두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억울한 십자가였으며, 모함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인간이 당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당하는 구속의 십자가였습니다. /할/ 예수님이 이러한 인류의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데 한 바리세인이 왔습니다. 눅13:31절에 보면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오니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마십시오'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대한 분위기의 정보를 제공해 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눅13:3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도 비굴해 하시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를 당당히 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이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멘!/할/


영국의 국립박물관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수난을 당한 큰 그림이 걸려 있다고 합니다. 그림 제목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어느 날 그 그림 앞에 한 젊은이가 무릎을 꿇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젊은이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 깜짝 놀란 이 젊은이는 주님의 물음 앞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도 주님을 위해 한 평생 내 몸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그 고백대로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살았는데 그가 바로 영국의 그 유명한 '전젠돌프' 백작입니다. 그는 빈민을 구제하고 전쟁 피난민들을 도왔으며 전도사업에 힘을 썼으며 자기의 '생명, 재산, 권세'까지 모두 바쳐 '모라비안' 형제 단을 만들어 유명한 사랑의 실천자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할/ 십자가는 예수님 당시의 흉악범을 처벌하는 저주의 형틀이었습니다. 수많은 강도들과 살인범들과 로마의 반역자들이 십자가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어떤 사람의 십자가도 우리에게 기억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상징이요,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설교의 왕자 스펄전 목사님은 그의 설교 90%가 오직 예수요, 오직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하루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조용히 묵상하다가 십자가의 장면이 나왔는데 목사님 마음속에 십자가의 구속의 감격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한 이 십자가 앞에서 왜 나의 마음속에 감격이 사라진 것입니까?' 날마다 들어도 마르지 말아야 할 그 감격의 샘터!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향한 감격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신앙인의 최고의 영광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는 죄 사함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구원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할/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내게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자랑만 하고 끝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제자의 길은 십자가 없이는 갈 수가 없는 길입니다. 주님은 마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지신 그 십자가!' 우리도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아멘!/

 

①종려주일 오늘부터 한 주간의 예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인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대관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나 대통령이 즉위할 때,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그런데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어느 누구도 잔치를 베풀거나 대관식을 열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왕으로서의 대관식을 가지시기로 결정하고 나귀를 타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오래 전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슥9: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이 예언대로 왕으로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진정한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초라하게 입성하고 계십니다. /할/ 사무엘 하에 보면, 다윗이 처음 왕이 된 곳은 헤브론입니다. 이곳에서 유다 지파를 7년 6개월 다스렸습니다. 그가 통일 왕국의 왕이 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시온 산성 즉 예루살렘 성을 빼앗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 성에서 33년 간 다스렸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예루살렘에 성도를 세운 후 하나님께서 이 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후로 왕들이 이 예루살렘에서 통치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통치하는 곳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물입니다. 다윗은 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옴으로써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다는 것을 만 천하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법궤가 예루살렘에 오게 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참된 신정정치가 실현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가 들어오는 날 다윗이 그렇게도 기뻐했던 것입니다. /할/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통치자들이 많았습니다. 분봉왕도 있었고, 로마 총독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뜻만이 난무하고 인본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 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들어 가셨습니다.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초라한 나귀새끼를 타고 가셨을까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⑴나귀는 누구도 이끌 수 있고, 누구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나귀는 조그만 어린이들도, 노인들도, 여자들도 모두 끌고 다닐 수 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은 왕이신데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누구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왕이십니다. 죄인이든, 병든 자이든, 버림받은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어린아이까지라도 주님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할/ 이것이 축복입니다. /아멘!/


⑵나귀는 짐을 잘 집니다. 무거운 짐을 싣고 끌고 가는 인내가 한이 없는 짐승이 나귀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짐 진자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⑶나귀는 순종을 잘하는 동물입니다. 주인에게 죽기까지 복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내어놓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좇아 죽기까지 복종하신 참으로 나귀와 같은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⑷어린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전쟁터에는 말을 타고 나갑니다. 그러나 어진 임금은 나귀를 타고 백성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나귀는 겸손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힘이 있지만 언제나 약한 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겸손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할/


㉡최후의 만찬 식이 있었습니다. 다락방에서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하셨는데 이것이 유례가 되어 신약에서 성찬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성찬예식을 드렸습니다. 또 그 날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지금 거꾸로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본을 보여주신 산 교육입니다. 요13:14-15절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중요한 것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예수께서 체포를 당하셨습니다. 만찬이 끝난 후 곧장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힘쓰고 애써 기도하신 후에 가롯 유다를 앞세운 병정들에게 체포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밤에 체포되어 '안나스에게! 빌라도에게 그리고 헤롯에게! 다시 빌라도에게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이 날이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내 클라우디아의 간곡한 만류로 십자가형만은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유월절만 되면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는데 그 전례를 이용하여 예수를 살리려고 했으나 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군중들은 일제히 소리 지르기를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 때 일제히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고함을 지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몇 일전까지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겉옷을 땅에 펴던 사람들이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대환영을 했던 사람입니다. /할/


㉤예수님이 수치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형은 결정되고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희롱을 당하셨습니다. 이 희롱은 '가혹한 장난'으로, 야만인들을 가지고 노는 문화인들의 장난문화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장난으로 생각했지만 당하는 사람에게는 모욕이요, 수치요, 아픔과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옷 벗김을 당하셨습니다. 벌거벗음은 수치이며 모욕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의 수치를 가려 주시려고 당신의 피 묻은 옷자락으로 우리의 수치와 허물을 가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의의 흰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 벌거벗은 몸에 홍포를 입혔습니다. 홍포는 왕이나 황제들이 입는 옷이었습니다. 예수께 낡은 주홍색 외투를 입힌 것은 왕이라 불린 것에 대한 모욕입니다. 왕으로써 홍포를 입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써 입혔습니다. 그리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 납이나 뼈 조각을 달아 침으로 이 채찍에 맞다 죽는 죄수들도 있었답니다. 이사야는 말씀하시기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할/그리고 그 지친 몸의 머리에 가시로 역은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홍포를 입히고 금 면류관 대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씌우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난 받으신 그분이 인류의 영원한 구세주이십니다. /믿/ 그 앞에 군병들이 경배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무서운 회롱이요 모욕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과 같을 뿐입니다. 온갖 고난과 조롱과 멸시를 묵묵히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들려주면서 홀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홀은 왕권을 상징한 것으로, 왕은 왕인데 갈대처럼 연약하고 무력한 왕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연약한 왕이 아닙니다. 갈대 홀을 쥐어준다고 그 분의 왕권이 상실됩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영원한 우리의 왕이시며, 통치자이시며 장차 심판 주로 오실 분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을 그의 영원한 나라에 인도하실 분입니다. /아멘!/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언덕을 히브리어로는 골고다라고도 하고 라틴어로는 갈보리입니다. 골고다는 해골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이곳을 '골고다(해골)'라고 부르게 된 유래가 몇 가지가 있습니다.
⑴이곳 지형이 두개골 형상과 같은 뾰족한 바위에서 지명의 유래가 있다고 말합니다.
⑵예로부터 죄수들의 사형 집행 장으로 사용된 까닭에 해골들이 널려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해골들이 굴러 있는 무덤과 같다고 해서 골고다라고 불렀습니다.
⑶유대인의 전승에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아담의 무덤이 그곳에 있다고 하는 '오리겐'의 주장에 따라서 '인류의 조상 적부터 무덤이었던 곳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고다의 유래는 어느 것이 정확한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해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셨습니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 무려 열 네 번씩이나 쓰러졌습니다. 오늘도 그 길을 수많은 순례 객들이 올라가면서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배우고 있습니다. 저도 성지순례 때에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이 때 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 대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갔습니다. 비록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었지만 그의 아들이 주의 종이 되어 복음의 일군으로 쓰임 받고 성경을 빛나게 했습니다(롬16:13).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좌우 편에 두 강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래서 갈보리 산 위에 세 십자가가 섰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 때에 열두 시쯤부터 세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하늘과 땅이 어두워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며 영혼이 떠나가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나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히10:19-20).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며, 무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를 지키던 백부장은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둔 시각은 오후 세시였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지내셨습니다. 그 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니고데모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곧 세마포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주님을 장사지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장사를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숨은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이 모든 것을 다해서 예수의 시체를 모셨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의 모습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니고데모와 아라마대 요셉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관직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할/

②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번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칠언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 3마디 말씀을 하셨고, 오후 3시가 가까웠을 때 마지막 4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십자가의 칠언이라고 하는데 이 말씀 속에 기독교의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말씀하신 한 말씀, 한 말씀을 가슴에 새겨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곱 마디 말씀들은 우리들 위하여 주신 말씀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은 그 말씀들 때문에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고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된 것입니다. /믿/ 지금도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주님의 일곱 말씀을 바로 듣고, 마음 속에 받아 드릴 때 강도에게 임했던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할 것이고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에게 임했던 뜨거운 사랑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할/ 차례대로 상고해 보면서 깊은 은혜를 함께 새기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기독교는 용서받고, 용서하는 종교입니다. /아멘!/ 아주 옛날에는 돈 많은 사람이나 세도가 당당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기가 맞을 매를 종이나 매 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신 맞게 하고 그 삯을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그 죄의 삯은 곤장이었는데, 죄는 자기가 짓고 곤장은 가난하고 낮은 백성들로 맞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는 인간이 지었지만, 그 죄 값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신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한 베드로를 위한 말씀이고,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사울을 위한 말씀이고, 한 평생 주님을 무시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믿/아멘!/ 주님의 이 말씀 때문에, 이 기도 때문에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죄 사함과 구원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할/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은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버지여 아무 아무개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미워하는 아무 아무개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용서하며 살라는 교훈입니다. /아멘!/


⑴예수님에게는 속죄 권(사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마9:2절에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 명하시기를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니 즉시 나음을 받고 돌아간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보혈의 능력이 죄 사함의 능력입니다. 마26: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사도 바울은 엡1:7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고, 고전1: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할/


⑵원수들의 죄까지도 용서하신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용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을 내린 빌라도와 당시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와, 은 30에 스승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의 죄까지도 다 용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들의 죄를 다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은 의인들입니다. /아멘!/


⑶이제 우리도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선생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자, 주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21-22). 바울은 골3:13-14절에서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가르쳤습니다. /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기독교는 천국 가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좌편과 우편에는 각각 한사람씩의 강도가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들은 큰 죄를 범하여 당시에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달린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당신이 정말 구원자라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요' 하면서 비꼬듯 말했습니다. 그때에 우편 강도는 그 사람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당연한 값을 당하는 것이지만 이 분이 행하시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하면서 다시 예수님을 향하여 간구하기를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고 간청을 했습니다. 우편 강도는 자기의 죄를 명확히 알았습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자기 죄에 자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죄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강도는 신관이 확실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구원에 확신도 있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때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할/ 이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최초로 낙원에 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강도는 누구를 가르칩니까? 이 강도는 바로 우리이고, 나입니다. '내가 언제 강도 짓을 했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은 죄가 강도가 지은 죄 보다 더 크고 더러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세상의 모든 인생들이 다 강도와 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강도라도 다 같지 않습니다. 한 강도는 회개해서 구원을 얻었고, 한 강도는 예수를 부인하다가 지옥 음부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요, 천국 가는 종교요 영생의 나라에 가는 종교입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아무 아무개도 낙원에 이르게 하옵소서. 내가 미워하는 아무 아무개도 낙원에 이르게 하옵소서' /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있습니다. 그 아래에서 울고있는 여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제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유일하게 어린 사도 요한 만이 있을 뿐입니다. 역시 여자들은, 아니 어머니는 용감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 곁에 있는 여인들은 누구입니까?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여 성도들이 큰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도 '필라델피아'에 있는 장로회 여전도회에서 파송을 하고 그들의 소유로 선교사와 한국의 교회들을 섬겼던 사실을 우리 한국 교회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멘!/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이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는 그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시면서 잘 돌보아 주실 것을 부탁하십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셨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루살렘에 있는 시온 언덕에 자기의 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요한은 마리아를 11년 동안 모셨다가 마리아가 평안히 세상을 떠난 후에야 온 세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자여!'라고 하셨는데 흔히 우리는 왜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에게 존칭어를 쓰지 않고 '여자여!'라고 했는지 우리 문화권에서 보면 이상합니다. 요2장에서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원어의 뜻은 최대의 존경어로 '귀부인'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할/ 우리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는 불효 막심한 자들이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모르는 말씀입니다. 돌아가신 분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서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살아 계실 때 잘 공경하라는 종교입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처럼 실질적인 효도를 강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십계명 중에 인간에게 주신 가장 첫 번째 계명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입니다(출20:12). 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이별의 슬픔과 죽음의 아픔 가운데서 슬피 우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슬픔과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하여 '아무 아무개여 보소서 그대는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대는 나의 부모요 나의 자녀입니다.' /아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기독교는 자기를 부인하는 종교입니다. 때가 육시 우리의 시간으로 12시, 정오가 될 때,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 즉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는데,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를 지르시기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를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큰 고통은 육신적인 고통이기보다는 영혼의 고통이요,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버림당하는 고통의 절규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는 일이란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를 위한 절규였습니다. 우리 대신 부르짖은 절규였습니다. 내가 버림을 받아 비명을 질러야 하는 나의 비명을 대신 주님이 지르신 비명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우리도 내 속에 있는 죄로 인한 이런 절규가 있어야 하고, 죽어 가는 생명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는 절규가 있어야 하고,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영혼의 안타가운 절규가 있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 기독교는 자신을 버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인격이 새로워지고,영적인 능력이 임합니다. /믿/ 주님은 마16:24절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아멘!/ 루터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째서? 어째서?'라고 부르짖다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놀라와서 그는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벼락에 맞는 듯한 충격도 받게 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주님의 이 기도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믿/할/

 

㉤내가 목마르다!(요19:28) 기독교는 목마름에 종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목마름을 토로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목마름을 토로한 말씀입니다. 내가 목말라야 하는데 주님이 나 대신 목마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 대신 물과 피를 쏟으시고 목마르시므로 내가 생수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할/

⑴목마른 인생을 위하여 주님이 대신 목말라 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다 목마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갈증을 이기지 못해서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자신의 갈증을 해결할 샘을 파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돈의 샘을 파고, 어떤 사람은 권력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지식과 명성의 샘을 팝니다. 또 어떤 이는 쾌락의 샘을 파고, 어떤 이는 유행의 샘을 파고 있지만, 그러나 세상에서 주는 물은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맛보았던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하면서 인생의 목마름을 탄식했습니다. 이 헛된 인생의 근본이 어디서 왔습니까? 렘2:13절을 보세요! '내 백성이 두 가지를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인생의 갈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떠난 것이 절대적인 갈증의 원인이라는 말씀입니다. /할/ 주님은 이렇게 갈증을 느끼고 있는 인간에게 근본적인 갈증의 해소를 위하여, 대신 목말라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신 이 순간은 참 생명의 물줄기를 터뜨려는 순간입니다. 자기의 몸을 터뜨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줄기를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55:1절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했습니다. /할/


⑵목마른 인생은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요4장에 보면, 몹시도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명의 남자와 살아봤지만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인생의 목마름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여인은 우물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의 샘을 발견했습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기쁨을 찾은 것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암8:11절에서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을 들어보세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 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아모스는 외쳤습니다. /할/ '내가 목마르다' 이 말씀은 오늘 목마른 자들을 찾아가 생명의 생수를 주라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당부이기도 하십니다. /아멘!/

 

㉥기독교는 완성의 종교입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이 왔다가 갔지만 누구하나도 '나는 다 이루었다'고 승리의 개가를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후회하며 아쉬움을 남기면서 이슬처럼 사라질 뿐입니다. '나폴레옹'도 '세인트 헤르나'섬에 유배에서 '나는 칼로 세계를 정복하려 했으나 망했고, 예수는 칼 한번 쓰지 않고 사랑으로 세상을 정복하였다. 나는 실패자요 예수는 영원한 승리자'라는 고백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은 '완성했다. 끝이 났다. 마무리지었다. 마쳤다'란 어원입니다. 이는 모든 것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롬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3:10절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 이루신 분이십니다. 믿음의 완성이요, 사랑의 완성이요, 구원의 완성이요, 모든 것의 완성입니다. /할/ 우리네 인생은 100년을 살아도 '다 이루었다'는 완성자가 없지만, 주님은 짧은 생애를 사시면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기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가 믿음으로 가기만 하면 우리 모두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16:33절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고 골2:15절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또한 요일5: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니라' /할/ 나는 할 수 없고, 나는 다 이룰 수 없어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이룰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축복을 채워 주시고, 병든 사람에게는 건강으로 채워 주시고, 실패한 사람에게는 성공으로 채워 주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 채워 주시고, 무능한 사람에게는 능력으로 채워 주시며, 절망한 자에게는 소망으로 채워 주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제 우리가 이 고백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멘!/ 사도 바울은 빌4: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이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기독교는 의탁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 주님도 모든 것을 마치시고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이 뜻은 '아버지의 마음대로 내 영혼을 주장 하십시오'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 바로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 네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고 겸손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며 사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다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맡기면 우리 모두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전15: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아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들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스데반을 대신해서 드린 말씀이었고, 야고보를 대신해서 드린 말씀이었고, 베드로를 대신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미리 주님이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도 세상을 떠날 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도 박윤선 목사님도 세상을 떠날 때 이 말씀을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아멘!/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의 아침,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이 아침에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곱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말씀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2013년 3월 24일 종려주일(고난주간) 설교)

 

출처: 야곱의 우물가 원문보기 글쓴이: ♡겨자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