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자료/종려주일 설교

[스크랩] 종려주일에 의미-막11:1-10

에반젤(복음) 2021. 2. 21. 00:00

종려주일에 의미

막11:1-10

 

종려주일이란 부활주일 전주일이며 수난주일 첫째 날이다. 이 날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다윗이여 호산나 다윗이여 하면서 찬송으로 영접하였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한다.


종려주일은 헬라어로 쿠리아케, 피닉스라고 하는데, 여기서 피닉스란 종려나무를 말하고 쿠리아케는 주님의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종려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악마를 대적하는 상징물인 축복의 나무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주후 4세기 경부터 종려주일은 많은 성도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행진을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에게 축복이 있을 지어다"라고 외치면서 길거리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도 마가복음 11장 1-10절 말씀을 읽은 다음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앞장서서 걸어가면 수많은 성도들이 뒤를 따라오며 행진을 하므로 종려주일을 기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같은 교회 행사하는 요즘에는 사라지고 찾아 보기 힘듭니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행사보다도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에는 그 날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고 영적 체험에 중점을 두는데 많은 관심을 가져 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 종려주일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Ⅰ. 예수님은 나귀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을 보내면서 "맞은 편 마을로 가라고 하시며 거기에 가면 나귀가 놓여 있을 테니 그 나귀를 끌어오고 만일 그 일을 저지하는 자가 있으면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즐거운 마음으로 내어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부를 받들어 두 제자가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나귀를 풀고 끌고 오려고 하니까 "왜 허락도 없이 나귀를 끌고 가려고 하느냐?"고 하여서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즐거운 마음으로 그 고귀한 나귀를 아낌없이 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 이 나귀를 내어주지 않았다면 그 나귀는 짐이나 실어 나르는 일을 하다가 생애를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귀는 그 주인의 순종으로 주님께 드림에 주님께서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께 받으시는 찬양과 경배를 받는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성을 입성하실 때 백마타고 입성하실 수 있고 소나 아니면 마차 타고 입성하실 수있으나 나귀를 고집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주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예언의 성취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일 거수 일 투족을 움직일 적마다 임의대로 하시지 않았다. 성경적인 배경을 두고 활동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성경에 배경을 가지고 활동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2) 겸손한자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하였다. 주님은 겸손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이 땅위에 오신 것이 겸손이다. 하나님이 인간됨을 의미한다.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3) 평강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의 화평을 위하여 오셨고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는 평강의 왕으로 이 땅위에 오신 것이다.

 

나귀는 이 같은 주님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쓰여진 짐승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몸인데 이 몸을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내 고집대로 쓴다고 하면 그것은 별로 가치가 없게 되지만 내 몸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의 것이 되어져서 주님께서 우리를 귀하고 값있게 써주실 것이며 주님이 받으시는 영광을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몸을 불의에 병기로 바치게 된다면 마귀에게 종노릇하다가 결국 마귀가 가는 지옥에 함께 가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주님께 나귀처럼 드려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7장 13절에 '네 지체를 불의의 병기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잠언 3장 9절 이하에 '네 재물과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를 주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주가 넘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귀가 자신을 드려서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시는 이로 겸손하신 분으로 평강의 왕으로 오신 것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 같이 신앙인들은 주님을 증거 하되 주님은 말씀대로 오신 구세주가 되시며 겸손하신 분으로 이 땅위에 오셔서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오늘의 평화가 없습니다. 전쟁과 미음과 갈등으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이 같은 세상에 주님이 진정 평와의 왕이요 겸손한 분으로 말씀대로 오신 구주임을 증거 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무디에 일화
유명한 미국의 전도자 무디는 "전도함으로써 이 악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나에게 전 세계를 개혁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세상은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난파선과 같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구명대로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그 배로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독교인은 어디에서나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애써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속에서 구원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이 같이 신앙인은 나의 주어진 환경과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예수를 증거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드려 주님은 말씀대로 오신 구세주이시며 그 분은 겸손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은 땅위에 오셔서 음부까지 낮아지신 분임을 증거하여야 하며 그분은 인류와 하나님과 화목을 도모하신 분임을 증명하는 일에 사용되어지는 아름다운 성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Ⅱ.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반응은 흥분된 그들의 분위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에 대해 가졌던 그들의 기대가 이제야 비로소 이루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 둘씩 예수님의 행렬에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지금까지 그렇게 고대해 왔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흥분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대며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를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를 뜻하며 호산나는 비옵나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가 메시야로서 이제는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그들이 고대하던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하고 그를 통해서 자기들의 지난날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해소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그가 가진 힘과 능력을 가지고 로마 군대를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다윗의 나라를 재건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자 드디어 그 날이 온 것으로 여기고 몰려들었습니다. 메시야인 그분과 함께 거대한 로마제국과의 전쟁을 각오했습니다. 메시야인 그분이 신적인 권능으로 로마를 무찌르고 승리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누리게 될 다윗의 나라의 그 영광과 화려함을 기대했습니다. 바로 그런 기대감으로 터질 것 같은 분위기의 함성이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였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그들의 행렬은 주님과 함께하는 행렬이었지만, 그러나 실상은 주님과 상관없는 행렬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한 행렬이 아니라 자기들의 꿈을 위한 행렬이었고, 십자가와 고난을 위한 행렬이 아니라 영광을 위한 행렬이었습니다. 평화를 위한 행렬이 아니라 전쟁을 위한 행렬이었으며 섬김을 위한 행렬이 아니라 지배를 위한 행렬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노라 하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정작 주님과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상이몽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키 위해 섬김과 고난을 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영광과 지배를 위해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바로 영광을 위한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성공이나 축복 혹은 유명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죽음을 맞이하러 가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0:18~19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을 위한 입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를 위한 행렬이었습니다.


이를 400년 전에 선지자인 스가랴는 스가랴 9:9~10에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스가랴에 의해 예언된 권능 있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고, 죄악으로 인해 참된 평화를 잃어버린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예수의 고난과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분은 평화를 위한 봉사의 입성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영광의 보좌나 용상을 향한 걸음이 아니라 천대와 멸시 수욕과 창피함의 극치인 십자가와 골고다에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작은 나귀를 타시고 죽음의 골고다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 된 다른 사람을 위한 최대의 봉사의 일이며 자기 몸과 목숨을 즐겨 바치는 최대의 봉사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을 기록한 마태는 이 봉사의 정신에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제자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에게로 이어지는 봉사의 행렬을 상세히 그려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몰고 온 것도 봉사요 그 나귀 주인이 나귀를 쓰게 한 것도 봉사요 그 나귀 자신도 가장 귀한 봉사의 일을 담당했고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들의 겉옷을 깐 일도 봉사요 또 나뭇가지를 베어 깐 일도 봉사요 예수님의 행렬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따라간 사람들도 봉사요 또 행렬에서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따라간 사람들도 예수님을 위하여 봉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봉사의 행렬의 중심에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섬기는 일을 하시다가 이제는 그 목숨 자체를 십자가에 바쳐 섬김의 도로써 구속 사업을 완성하시고자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자신의 삶을 마가복음 10:14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무리들은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예수의 입성을 환영하였지만 주님은 그가 받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이제 곧 자기들의 꿈과 기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랐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를 통해 이루어지기만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로마와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항전의 자세를 가졌지만 예수님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이 힘에 의한 정복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고 드리는 섬김에 의한 지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자들과 무리들이 영광과 화려함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예수는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 행렬은 평화를 위한 봉사의 행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면서 과연 어느 행렬의 대열에 서 있습니까? 주님을 믿는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주님을 따르면서 순종의 길 섬김의 길 평화의 길 희생의 길을 외면하고 자기 영광만을 바라보면서 호산나를 크게 외치는 무리들은 아닙니까? 우리 주님은 영광이 아닌 고난의 길을 지배가 아닌 섬김의 길을 가셨습니다. 자기 이익이 아닌 봉사와 희생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여러분의 삶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라 주님의 행렬에 한 가운데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결단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Ⅲ. 주님이 원하시는 환영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 많은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할 때에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질타하며 "예수님이여! 이 사람들을 잠잠하게 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찬양하는 자들의 찬양이 정당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많은 군중 속에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무리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자리가 밀려나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대중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어떤 대중들의 군중심리로 인하여 예수님을 왕을 삼는 날에는 자신의 위치가 모호하게 되고 밀려나야하는 아픔을 격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들은 예수님이 하는 일이 옳은 줄 알면서도 찬양하는 백성들의 소리가 잠잠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입성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가는 행렬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려 가시는 것입니다. 이 행렬 속에서 주님의 구주됨을 바라보는 신령한 영안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성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구원받을 후예들에 외침과 찬양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하면서 찬양하는 소리가 거리에 메아리치지만 이들의 찬송은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달라는 아우성입니다. 이 같은 아우성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메시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찬양의 소리를 주님은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찬양이 진정으로 수많은 대중 속에 예수를 구주로 찬양하는 소리로 주님은 들으셨습니다.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에 귀에 세미한 음성으로 구주를 찬양하는 나의 찬송이 들려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손길을 의식하는 예수님
눅 8:-43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가운데서도 주님은 자신에게 손을 댄 여인을 알아봅니다. 수많은 대중가운데서도 예수는 나의 구주임을 찬양하는 찬양소리를 들으시는 주님임을 믿으시고 찬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임종 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월터리드 육군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께서 그 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 면회 시간을 30분으로 제한했습니다. 면회시간이 되어서 그는 찾아가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로 위로의 말씀을 드리다가 시간이 되어서 이제 나가려고 일어서니까 아이젠하워께서 말하기를 "좀 더 있다 가시지요?" 이제 빌 목사님은 "무슨 특별히 하실 말씀이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중하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이 아이젠하워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 때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기도교의 근본 교리를 간략하게 설명하게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의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잘한 일, 못한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슨 의를 잘했다고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은혜를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 됨을 하나님께서 확증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한참 기도하는 마음으로 묵상하다가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리, 감사하오.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소"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준비가 되었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나는 구주를 발견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수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 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아우성을 치듯이 찬양을 부르지만 구주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목청이 터지라 외쳐대는 찬양은 아닌지 한번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밀하게 외쳐대는 주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음성이 되어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