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자료/종려주일 설교

종려 주일에 일하신 예수님

에반젤(복음) 2021. 2. 21. 00:01

 

종려 주일에 일하신 예수님

 

 

(마 21:12-17)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곧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의 모습으로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셔서 가만히 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있지 않아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께서 담대하게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미래의 일을 모릅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는 게으름 속에 때로는 영적인 무감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운명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할 운명을 눈앞에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당히 현재의 일에 충실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은 늘 하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은 늘 하루뿐입니다. 내일도 내일 가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우리들은 매일 새롭게 결단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종려 주일에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12절 말씀을 다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마 21:12)

 

예수님께서 종려 주일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서 첫 번째로 하신 일은 바로 성전을 깨끗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신 후에 파격적인 일을 하셨습니다. 당시에 성전에서 했었던 일들은 오랜 전통에 의해 전혀 문제없이 진행되어 왔었습니다. 비록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 있었지만 그것들에 대하여 시비를 건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치와 종교는 하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이 없었고 그들이 하는 일은 곧 일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성전에는 환전소가 있었고 또 제사를 드릴 때 필요한 동물들을 팔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설들은 예루살렘 밖에 있었던 유대인들을 위한 불가피한 시설들이었습니다. 먼 지역에서 오는 유대인들은 제물을 데리고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동물들을 데려고 오는 일들이 무척 번거로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에 도착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러다 보니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제사 동물들을 파는 일들이 생겼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쓰는 화폐가 성 밖에서 쓰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환전소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유대인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제사장들과 밀착 되면서 장사꾼들은 자신들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을 제사장들에게 웃돈을 얹어 주었고 이로 인해 결국은 성전은 타락의 길로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집은 가족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어떤 형식이나 규율을 만들어서 틀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집처럼 편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편하게 쉴 곳으로 가는 곳이 바로 집인 것입니다. 집에는 서로를 위로하고 도와주는 가족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예배드리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영적으로 가족을 만나는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만나는 곳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들이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가지고 이웃 나라에 가서 그 재산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탕진해 버렸습니다. 그가 돈 잃고 남의 집 머슴으로 살다가 굶어 죽기 일보직전에 기억해 낸 것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길러 주시고 따스하게 대해 주셨던 바로 그 집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7-19)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크게 나무라거나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를 끓어 앉고 함께 기뻐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아무리 잘못하고 부족해도 아무 말 없이 품어주고 사랑해주는 곳이 바로 집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그런 개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곳에서 하늘의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도저히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만날 수 없는 그런 곳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신 것입니다. 어떤 틀과 형식, 그리고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 빈껍데기의 성전을 청소하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께서 이 땅에 임재하신 후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곳이 어느 곳이 되셨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건물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성령께서 거하신 성전이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이 바로 이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전이 앞으로 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성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부께서 심지 않은 것들을 뽑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 미움, 수군수군하는 것, 간계와 독선과 고집과 편견 등 마음의 성전에 있어서는 안될 것들을 모두 뽑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소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것은 뽑아내고 하나님의 것을 심을 때에 우리들은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병자들을 치료하셨습니다.

 

14절 말씀을 다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마 21:14)

 

예수님께서 성전에 두 번째 하신 일은 치유의 사역이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세상의 문제들을 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어떤 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까?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께 다가 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성격입니다. 예수님께서 능히 고치실 수 있다고 믿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와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와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실하게 자존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그것으로 인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그런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살아야지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내 노력이나 행위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나 노력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그 어떤 말보다도 더 믿고 신뢰하는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시각장애자 바디매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의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하면서 그를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예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10:51) 여러분, 우리들이 다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런 물음에 바디매오는 즉시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셨고 그는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았다고 하였습니다.(막 10:52)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가 잠잠히 그냥 예수님께서 자신의 처지를 다 아실 것이니 자신에게 오실 것이라도 생각하고 기다렸다면 그는 결코 눈을 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시란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의 꾸지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겉옷을 집어 던지고 예수님에게 달려갔습니다. 거지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그를 더욱 처량하게 만드는 액세서리 같은 것입니다.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더욱 동정심을 유발하여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집어 던졌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옛사람의 모습을 집어 던지고 앞으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믿음으로 다가온 그에게 네 눈이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의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항상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온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지만 아무도 그 피리소리에 춤을 추지 않습니다.

 

복음이라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이 세상에 충만한데, 누구든지 그 아름다운 음악소리에 자신의 마음을 열기만 하면 기쁨의 소식이 전달되는데 그 음악을 듣고도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세상의 자신의 일에만 반응하면서 영적인 일에는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주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적극적으로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젖먹이의 찬양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16절 말씀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 21:1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을 때 특별히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라고 높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른들은 체면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일이 일어났어도 잘 표현을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 표현을 너무나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영접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의 특성은 잘 믿는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산타크로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의 머리 곁에 양말을 꼭 걸어놓고 잠을 잡니다.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에 예수님이 들어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아이들은 정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가 오셨다고 믿었습니다. 어른들은 믿음 반 불신앙 반을 섞어서 예수님을 맞이했지만 아이들은 100%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구원자로서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소리가 온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에서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찬양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부르는 찬양이 부족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느낌이나 생각으로 찬양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믿음으로 찬양한다면 그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것입니다.

 

어느 아버지 앞에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외아들이기 때문에 그 아들은 그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잘못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들이 아버지 앞에 완전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이 비록 잘못을 했다지만 그것으로 인해 아버지의 아들이 되기에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했기 때문에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어떤 상황, 어떤 문제, 어떤 잘못 속에 있기 전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아들은 그 아버지의 아들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행위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그 관계는 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나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 값으로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이미 완전한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골 1:27-28)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모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완전한 자를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에 이미 완전한 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으로 깨우치려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마음속에 계신 것을 믿음으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계신 것을 믿는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찬양도 완전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와의 관계 속에서 그 찬양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관계이지 행위나 노력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입성하시는 그리스도를 어린아이와 같이 호산나 외치시며 맞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천 년 전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이시지만 지금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입성하셔서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주여 구원하소서, 호산나” 외치시면서 주의 이름을 높이시고 찬양하시며 승리의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윤은철 목사(갈릴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