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 영신/장년부 설교

[송년설교] 예루살렘에서 땅 끝으로, 그리고 하늘까지 / 행 1:1~11

에반젤(복음) 2020. 12. 30. 16:22

송년설교] 예루살렘에서 땅 끝으로, 그리고 하늘까지 / 행 1:1~11



매년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또 다시 결심을 하고 새로운 좌우명을 만들곤 합니다. 작년이라는 시간에서 불만스러운 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올해라는 새 시간을 깨끗하게 새로 출발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시간의 흐름이나 연월일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것을 과거와 미래로 나눌 때에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과거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그 제자들에게 바로 그와 같은 자기 인생의 일대전환기가 찾아왔습니다. 그전까지는 그저 예수님 가시는 대로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자기 길을 찾아가야 하는,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들이 그런 새로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스스로 찾아내려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의 새로운 인생을 어떻게 출발하고 영위해야 할 지를 간단명료하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이 사도행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택하신 사도」라는 특별한 단어로 호칭하기 시작합니다. 「사도」란 문자적으로는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 주님께서 당신의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새 출발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지시해 주셨는데, 바로 3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비록 ‘사도’는 아닐지라도, ‘보냄을 받은 자’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주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살도록 하신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주님께서 주셔서 살도록 하신 이 새해를 또한 맞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기독신자들은 어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입니까? 지나가 버린 과거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 받은 후에 우리가 새롭게 출발하는 인생은 과연 어떤 것이 되어야 합니까?

1. 우리 모두는 교회를 통하여 얻게 되는 성령 충만한 신앙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3절로 5절 말씀에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해 받으신 후」란 바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신 후’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완전히 엉망이 되었습니다. 도망치고 배반하고 부인하고 실망하고 흩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이후 우선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어」 주셨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당신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되어야 만이 그 ‘겁 많고 의심 많던 제자’들이 ‘담대하고 확신에 찬 사도’들로 바뀔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첫 번째 분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사도들이라 해도 본격적으로 복음 사역에 뛰어 들기 전에 우선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즉 성령이 임하셔야 만이 제자들 역시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동시에 그 하신 말씀과 행하신 사역들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그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 있어야 만이 성령이 임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서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승천 이후에 그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은 당장 예루살렘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쓰며’ 성령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자들 각자가 예루살렘 성 안 곳곳에 자기 마음대로 흩어져서 성령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를 중심으로 함께 기도함으로써 성령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있더라도 성령을 내려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도 상관없고, 제자들이 혼자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런 식으로 성령 받도록 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예루살렘 교회에 모여서’ 성령 받기를 기다리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성령 충만’이라는 것을 꼭 자기 혼자서 무슨 신비한 체험 가운데 누리게 되는 것인 줄로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혼자 무슨 환상을 본다든지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무언가 아득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식으로 성령이 임하게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성령 충만은 성도들이 교회에 함께 모여 있을 때 가장 크게 일어나고 가장 강력하게 체험되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혼자 골방에서만 경건생활하게 하지 않으시고, 교회에 모여서 함께 찬송하며 기도할 때 ‘땅이 진동하는 듯한’ 성령의 은혜가 넘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혼자 성경 읽으면서 혼자 예배드리도록 하지 않으시고, 교회에 모여 함께 목사의 설교 말씀을 들을 때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여튼 교회 중심의 생활을 하면 할수록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행실에 더욱 크게 역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 받은 성도의 변화된 인생은 일단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즉 철저히 교회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이 그 교회 안에서 ‘성령 충만함’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찾아 와야 아무래도 십분이라도 더 뜨겁게 기도할 수 있고, 교회에 모이기를 자주 해야 한 절이라도 더 많은 성경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고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거기서 성령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사람 사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적으로는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간에 신자가 영적으로 꼭 붙어살아야 할 곳은 오직 교회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꼭 같이 기초를 쌓고 시작해야 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새해에는 더욱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는 새 출발을 결심하고 실천함으로써 더 큰 성령의 충만을 입고 매사에 그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입고 승리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와 선교로 자신의 남은 인생을 채워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6절로 8절 말씀에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모든 사도들과 그 외에 예수님 따르는 무리들이 함께 모였을 때란 말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이제야말로 우리가 로마 군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회복할 때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은 모든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통하여 소망하고 있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셨겠다, 또 예수님 따르는 많은 사람들도 한 자리에 모여 있겠다, 분위기도 무르익었겠다, 그 질문한 사람에게는 모든 조건이 지금 당장 혁명을 일으키기에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고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다.’라고 단호히 일축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는 말씀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이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그들에게 가장 급한 현안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일이 맞추어 주시는 분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 보기에는 아무리 ‘지금 당장이라도 이렇게 되어야 마땅할 텐데.’라고 여겨지는 일이 있어도, 이 세상 역사의 모든 사건들은 오직 당신이 정하신 「때와 기한」에 따라 이루어 나가시는 절대주권하신 하나님께만 그 모든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유대인으로서 지금 남의 속국이 된 자기 조국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마음을 쏟고 생명을 바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후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가까운 이웃을 향하여 전도하고, 먼 나라에 이르기까지 선교하는 이 복음 전파의 사명이야말로, 적어도 예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된 사도와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그 어떤 일보다 최고로 급하고 최고로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애족심보다는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이 백배 더 뜨거워야 하고 애국심보다는 예수님 위해 증인이 되고자 하는 열정이 천배 더 강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모의 유언을 지극히 존중합니다. 평소에는 불순종하고 불효하다가도 그 부모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원을 하나 남기면 그래도 그것만큼은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자식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아니 자기 부모가 아니라 해도 그렇습니다. 사형수조차도 마지막으로 누구 한번 보고 싶다든지 무엇을 먹고 싶다든지 하면 가능한 대로 그 소원을 들어주려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의 유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이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부모나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까지도 그렇게 존중하고 들어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면, 하물며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단 하나의 유언과 같은 말씀을 그 주님 따라가며 산다는 신자들이 어찌 순종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일들이 다 내 뜻대로 되기만을 바라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세상 살 동안 해야 할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신자 된 자들에게 있어서 그 대답은, 아니 그 명령은 이미 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해방이나 물질적 구제나 도덕 윤리적인 선행보다도,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해내는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도가 전 인생을 다 바쳐 헌신 충성해야 할 최대의 사명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관계없이, 교회 안에서 맡은 직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관계없이, 일단 신자 된 자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최고의 힘과 정성을 쏟아야만 할 일은 오직 전도와 선교뿐인 줄 알고, 남은 인생을 오직 이 사명을 수행하는 보람과 열매로 가득 채워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재림하실 주님을 만나 천국 생활을 할 소망을 끝까지 지키면서 자신의 인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9절로 11절 말씀에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마지막 명령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셨습니다. 「저희 보는 데서」 그 몸이 문자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이었습니다. 구름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가린 후에도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이별하게 되는 것을 지극히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목을 길게 뽑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흰 옷 입은 두 사람」 즉 두 천사가 나타나서 그들을 정신 차리게 해 주었습니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하늘을 보느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승천하셨고 완전히 승천하셨으므로 이제는 아무리 목을 뽑고 눈을 가늘게 뜨고 보려 해도 더 이상 아무 쓸데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대신 지금 하늘로 올리우신 그 예수님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천사들이 증거해 주었습니다. 다시 꼭 같은 장면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니까 조금도 아쉬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그 승천하실 때 가지셨던 육신, 즉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그대로 가지시고 오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님 재림 역시 우리 사람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장면이 될 것이라는 뜻도 함께 포함됩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멋진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소망 있는 까닭에, 우리는 사도들처럼 그 예수님의 멋진 승천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조금이라도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그런 장면을 직접 보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의 배경에는 그저 구름 몇 조각만 떠 있었고 천사가 두 명밖에 없었지만, 예수님 재림은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동원하고 모든 천군천사를 다 대동하신 지상 최대의 광경, 아니 이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 전무후무한 사상 최고최대의 장엄하고도 화려하고도 멋진 대장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구름 사이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려고 목을 길게 뽑았지만, 오늘 우리들은 그처럼 크고 화려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주님을 학수고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만이, 우리의 인생은 진정한 그리고 정말 멋있는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생전에 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장차 재림하실 주님을 성도들과 함께 영광 중에 들리어져서 공중에서 영접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면, 아무리 제 딴에는 화려하고 부유하고 만족하고 멋있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 인생은 철저한 실패작이 될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재림하실 것을 믿고 그 소망 간직한 채 이 땅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생애를 마감하는 신자는, 그 생명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하늘나라의 영생으로 직통됩니다.

실로 완벽한 인생의 종점이 아니겠습니까? 매사가 그렇듯이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물론 시종일관 다 좋은 것이 가장 좋지만, 시작은 좀 시원찮고 중간 과정도 좀 어설프다 해도 끝만 좋으면 그래도 용두사미 인생보다는 백번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얼마나 형통하든지 아니면 고생하고 살든지, 얼마나 오래 살든지 아니면 어떻게 일찍 죽든지 간에, 인생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소망 만큼은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 믿고 중생 받은 복된 삶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의 인생은 ‘수고와 슬픔’ 가운데 지나가는 날들입니다.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다가와 무거운 짐 주께 맡겨 벗을 날도 멀잖네’라는 이 소망을 늘 간직하면서, 언제 날 부르시더라도 항상 기쁘게 주님 맞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생애를 완벽하게 마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어떻게 인생을 살까?’하고 많은 고민들을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짧은 인생을 값있게, 보람 있게, 낭비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완벽한 인생일까?’하고 끝없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시대가 가고 해가 바뀔 때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그런 질문이 다시 솟게 됩니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 예수님보다 더 훌륭한 조언자가 어디 다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원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친히 화육하셔서 우리의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다 겪어보기까지 하셨으니, 이 분만큼 우리 인생을 완벽하게 이해해 주시고 또 잘 지도해 주실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최고의 ‘인생 좌우명’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비단 올 한 해뿐 아니라 매년 꼭 같이 반복해서 되새겨 보아도 조금도 진부하지 않을, 아니 매 순간마다 상기하면서 자신의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마땅한 귀중한 교훈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능력을 입어 신앙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무엇보다도 전도와 선교 사명에 최우선으로 쓰여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보람 있고 낭비 없는 생을 사는 최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 끝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 천국 소망 만큼은 꼭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전 인생에 대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는 완벽한 생의 마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세대에 살든지 신세대로 살든지, 아파트에 살든지 셋집에서 살든지, 좀 길게 살든지 좀 짧게 살든지 간에, 우리의 인생길은 반드시 이 세 과정을 거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자신의 나머지 생애를 오직 땅끝까지 이르는 증인의 사명을 살던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함께 하늘나라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알기 쉬운 인생의 ‘바른 길’이며 ‘최단의 직선 코스’이며 ‘멋있는 종착점’이 아니겠습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인생 길,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가며 천국에까지 이르는 이 복스러운 금세와 내세의 길을, 이 새해와 전 생애를 통하여 확신과 충성과 소망 가운데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