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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도신경 연구 - 6

에반젤(복음) 2020. 10. 9. 00:59

사도신경 연구 - 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1. 배경 이해

헬라어 퀴리오스란 말은 영어로는 Lord, 우리말로는 주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러면 이 말의 사용 예를 살펴보자.

 


1) 일반적인 사용 예

이 말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노예가 자기 주인을 부를 때 쓰던 호칭이었다. 이것이 조금 확대해서 사용되어 제자가 스승을 부를 때, 존경하는 웃어른을 부를 때 퀴리오스란 말을 사용했다.

조금 후대로 넘어가면 이 말이 정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황제를 숭배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황제에게만 붙여지는 이름으로 쓰였다. 처음에는 죽은 황제를 지칭할 때 이 말을 썼는데 나중에는 살아있는 황제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했다. 마치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위대한 수령이란 말을 사용했던 것처럼 사용했다.

 


2) 성경에서의 사용 예

성경에서도 이 말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었다.

 


a. 구약에서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이름을 직접 부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서 성경에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아도나이라고 읽었다. 여기서 아도나이란 말이 히브리어로 주란 말이다. 이 말을 나중에 헬라어로 번역할 때 퀴리오스란 말이 사용되었다. 주전 약 3,4세기에 유대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때 아도나이란 말 퀴리오스란 말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 한 예를 살펴보자. 신 6:1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신약시대에 인용할 때 눅 4:8에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했다. 여호와란 이름 대신 퀴리오스란 말을 쓰고 있다.

 


b. 신약에서

우선, 일반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부를 때 퀴리오스란 말을 썼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퀴리오스라고 불렀다. 물론 이 때는 아직 예수님이 구세주인 줄을 몰랐을 때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퀴리오스란 말에 자기들 나름대로의 극진한 존대의 의미를 담아서 사용했다.

그 한 예를 살펴보자 요 13:13을 보면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여기서 주란 말은 당시 일반적인 관점에서 통용되던 말을 받아들여서 쓰던 말이다.

다음, 신학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을 지칭할 때 퀴리오스란 말을 썼다. 이 퀴리오스란 말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뒤에 초대교회가 시작되면서 이 말에 신학적 의미가 담기게 된다. 특히 바울 서신에서 이 말이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여기서 사용된 주란 말은 앞에서 살펴본 요 13장의 주란 말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구원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사용되었다. 이제 단순히 예수님을 존경하여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그 자체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10:10을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고, 10: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다.

과거에는 예수를 다만 존경하는 의미로 불렀지만 이제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고백할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뜻을 담아 고백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주라 고백할 때 바로 이런 관점에서 퀴리오스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2. 주라는 말의 의미

1) 인간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것은 곧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a.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시 64:8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우리 인생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그 뿐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피로 우리를 사셨다. 주님은 그의 은혜 안에서 재창조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주가 되신다.

b.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요 10:11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선한 목자라고 가르쳐주셨다. 목자가 양을 기르듯이 우리를 기르시고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주가 되신다.

 


2) 만물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만의 주가 아니시다. 모든 피조물의 주인 곧 주이시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발견된다.

 


a.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히 1:2을 보면 “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라고 했다. 창조는 성부의 계획에 의해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신 것이다. 따라서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래서 만물의 주가 되신다.

 


b. 만물을 섭리하시기 때문에

히 1:3을 보면 “주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섭리하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가 되신다.

 


3. 주라는 고백의 의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때 어떤 의미가 있는가?

 


1)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신약시대 초반에는 주란 말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다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여 높이는 말로 사용되다가 후에 초대교회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 말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도나이, 퀴리오스로 인정했다가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퀴리오스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을 동등한 분이라고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요20:28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의 저 유명한 신앙고백이 기록되어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말과는 격이 다르다. 베드로의 고백에서 사용된 주라는 말은 아직 신학적인 의미가 담기지 않은 선생님의 더 높임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마의 고백에 사용된 주란 말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아도나이라 고백했던 것과 같은 말이다.

 


2)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고백한다는 뜻이다.

바울 서신에 보면 예수를 구주로 부른 대목이 많이 나온다. 여기서 구주란 구원자란 말 헬라어 소테르란 말과 주란 말 퀴리오스란 말을 함께 쓴 것을 우리말로 붙여서 구주라고 했다.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때는 그 분이 우리의 구원자란 뜻이 내포되어 사용된 것이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묶어서 익투스라는 말로 요약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물고기란 말이다. 이 말은 예수 크리스토스 테우 휘오스 소테르란 말의 앞 자를 따서 만들어진 말이다. 예수는 그리스도이고, 테우 휘오스 즉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고 소테르 구원자라는 뜻이다. 물고기 표시로 나타내는 우리 기독교의 신앙 고백의 핵심은 이렇게 세 가지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고 즉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이고, 하나님 아들 즉 거룩하신 신성을 가진 분이시고, 그리고 구원자 즉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퀴리오스란 말은 세 번째 구원자라는 의미와 연관된다. 예수를 주라 고백할 때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예수를 주라 고백할 때 그 분이 죄에서 나를 건지셨고, 그 분이 영원한 멸망 가운데서 나를 살리셨고, 지옥을 향하던 나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셨다는 고백이 담겨져 있다.

 


3) 예수님이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쓰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28번, 우리 주 예수를 9번,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라는 표현을 3번 사용했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의 주라는 생각이 온통 자신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예수와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를 의미한다.

먼저, 바울은 예수가 그 피로 자신을 값 주고 사셨다고 생각했다. 이제 주인이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처럼, 자신은 이제 예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 만나고 나서 자신이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했고, 나의 나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도 영으로 예수와 하나되어 산다고 생각했다. 주님이 머리이고 자신은 그 지체로 지금 살고 있고, 지금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말했다.(고후 4:10)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