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직 신학 >>>/- 성 령 론

신령한 자란?

에반젤(복음) 2020. 3. 1. 14:28



신령한 자란? (1)

고전 2:10~3:3                                                                     정진국 목사

오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정을 밝히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흔희 성령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능력을 행하도록 하는 어떤 능력이라는 개념으로 많이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능력을 받아야 된다는 의미로 성령 받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신 이유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더 깊은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6장에 걸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16:13)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일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오늘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성령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배경.


여러분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읽으시기 전에 먼저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로 유명하고, 또 은사문제 때문에 시끄러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은사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성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는 성령에 대해, 은사와 관련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로 저들은 은사를 주목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이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방언이나 신유나 예언과 같은 은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고린도교회는 오늘날 한국교회와 매우 흡사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역시 성령에 대한 첫 번째 관심사를 은사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았다고 하면, 일차적으로 성령 받은 증거가 방언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현상과 그 현상에 대한 체험들, 그리고 그 현상과 체험을 확증해주는 은사. 이것들이 함께 나타날 때 그것을 성령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곧 능력자가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았으면 이제는 능력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실제로 고린도교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능력 중에서 어떤 능력을 받았느냐? 다시 말해서 성령을 받음으로 은사의 능력을 행하게 되었는데, 그 중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이 더 큰 능력자냐 하는 은사비교의식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아주 심각하게 일어났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크며, 자신처럼 큰 은사를 받아야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더 많이 받고, 성령의 능력을 더 깊고 크게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한 외적인 확증으로 은사를 비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 때문에 아주 시끄러웠습니다. 아주 분쟁이 많았습니다.


또한 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냐면, 성도들 사이에서 심각한 파벌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 교회에는 아볼로파, 바울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 이렇게 크게 4종류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구약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것을 입증하고 유대인들과 논리적으로 맞상대를 해서 이길 수 있었던 사람이 바로 아볼로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말씀에 뛰어난 유능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아볼로는 오직 말씀 중심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에는 아볼로가 어떤 능력을 행했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없습니다. 아볼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역을 했던 특별한 사역자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내에서 “뭐니 뭐니 해도 말씀이 최고다”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볼로파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볼로파는 쉽게 말해 말씀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상대적으로 베드로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베드로는 수석사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오순절에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회개시킨 위대한 설교가 입니다. 특히 베드로에게서 나타난 것이 뭐냐면, 굉장한 파워입니다. 베드로는 배운바가 없기 때문에 논리성 같은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에 비해 떨어지지만, 베드로는 3년 반이나 주님을 직접 모신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현장감 있게 전할 수 있고, 아주 파워풀하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소위 말하자면 오늘날의 부흥사 타입이었습니다. 괄괄하게 책망도 하고, 때론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설교가인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시켜서 이끌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사람들의 감성을 이끌어내고, 의지적 굴복을 시키면서, 강력하게 분위기를 주도해가는 스타일의 설교자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비교적 다혈질적이고, 화통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베드로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베드로파로 형성된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바울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사람입니다. 체험도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 말씀에 논리적 체계도 가진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 베드로와 아볼로를 적절하게 섞은 스타일의 설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런가하면 체험도 있고 능력도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도 약점이 있었는데, 그가 글을 쓰면 참 논리적으로 잘 썼지만, 말에는 졸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후 11:6) 사실 바울이 말을 못했겠냐마는 상대적으로 아볼로나 베드로에 비하면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파가 또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볼로를 통해서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베드로를 통해서 분명하게 동기부여를 받고, 바울을 통해서 말씀과 체험의 균형 잡힌 신앙생활의 시스템을 배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의 목자는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교회 안에서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은사문제로 인해 시끄러웠고, 또 이렇게 자기 취향의 목회자를 선호하는 파벌문제로 인해 시끄러운 교회가 고린도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와 매우 흡사한 것입니다. 말씀을 강조하는 장로교, 체험을 강조하는 순복음, 그것들을 적절하게 합친 감리교나 침례교. 또 한편으로는 오직 복음만을 강조하는 브래들린 처치(형제회). 이런 분파들이 골고루 있어서 저마다 “우리가 최고다”라고 외치는 모습이 고린도 교회와 매우 흡사합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바르게 교정하기 위해 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사역 - 예수를 계시함.


그런데 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은 성령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전 2:10~11)


성령이 은사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기보다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신 분으로서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통달하신 분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분이 성령인 것입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12)


성령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는 목적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시는 그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하고 이해시키려고 성령이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가?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것들을 밝히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는 일을 하기위해서 오신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을 다른 말로 주의 영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는가? 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야만 했는가?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릴 위해 무얼 하셨는가? 그리고 그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성령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우리로 하여금 밝히 깨닫도록 하기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즉 성령의 주된 중요한 사역은 어떤 능력이나 은사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해서 올바르게 깨닫도록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와 같이 성령에 대해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은사나 능력의 개념으로 성령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정작 성령이 본질적으로 원하셨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계시하시고,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우리로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이 사역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도 소흘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무지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한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그 사실을 먼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기억나게 하고,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령은 이 시대를 주도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다.


그 다음에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은 능력을 행하기 위한 어떤 힘, 은사를 주기 위한 어떤 작용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고 주도해 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기운이나 능력이나 힘이 아니고, 인격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아멘.


여러분, 보십시오. 구약 시대에는 누가 우리를 이끌어가셨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를 주도해가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보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성부의 명령을 구약시대 사람들은 순종하고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신약시대의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자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제 구약시대가 끝나고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심을 통해서 이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성자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아서, 당신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4복음서에서 살펴보면 성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가셨다면,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 성자 예수님이 오셨을 때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만 믿을래요”하면, 이건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자는 나를 믿는다고 말씀하셨어요. (요 12:44)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별개가 아닌 것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만 다를 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이 역사적 사역의 전면에 나타나셨고,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는 성자 예수님이 사역의 전면에 나타나신 차이뿐이지, 실제로 그 배후에는 성부와 성자가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성자 예수님의 시대가 왔을 때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하신 방법으로 섬기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직접적으로 섬겼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시고 난 이후로는 이제 방법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제사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서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제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성자시대가 오고난 이후로는 더 이상 구약의 제사들이 다시 행하여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변화를 주도하시고, 이제 그런 변화의 중심에 계신데, “아니다 나는 하나님을 여전히 제사를 통해서 만나겠다”하면 이때는 하나님이 안 만나 주십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오시고난 다음부터는 제사를 통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것입니다. (요 14:6) 그러니까 예수시대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부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성부하나님을 섬기고, 성부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자 예수님께서 이제는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너희를 떠나야 다른 보혜사가 와서 너희를 진리가운대로 이끌 것이다.”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고하신 그 사건은 오순절에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령 하나님이 오셨으므로, 성부하나님과 성자예수님을 섬기던 방식에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이점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여전히 예수님을 통해서 섬기고,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데 능력을 주시고 도움을 주시는 보조자로서의 개념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이 돕는 자라는 뜻인데, 이 돕는 자라는 말이 보조자라는 개념은 아닙니다. 돕긴 도와도 주도적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이고, 보조하면서 도울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성령 이전에 또 보혜사가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 이전의 보혜사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스스로를 보혜사로 여기고 말씀하신 그때, 보혜사가 보조자라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전면에 주체로서 나서셨잖습니까? 똑같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겠다”하셨을 때, 그 또 다른 보혜사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가고 주도해갈 보혜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성령시대에는 그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시대에는 우리가 성령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보는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


여러분, 보십시오. 구약의 성부 하나님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에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구약시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유가 뭡니까? 이때는 예수님이 안 오셨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는 겁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아도 문제될게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 14:14) 그러니까 여전히 기도의 대상은 성부하나님인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성자 예수님이 오시고난 후로는 성부의 이름만을 부르며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성령시대가 시작된 후로는 이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기도의 대상이요,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모든 기도를 영 안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고 하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삼박자가 다 이루어져야 하는 겁니다.

 

성부시대에는 예수 이름 안 부르고 그냥 하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그 기도가 영으로 하는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는 겁니다. 그럼 성자시대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하나님께 기도하되, 예수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이제 기본 전제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가 왔을 때는 거기에 새로운 방식이 첨가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는, 성부하나님께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영으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오늘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니까, 고린도교회처럼 성령을 그저 능력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성령님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여호와가 말씀 하셨다거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지시하시고,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내용만 나옵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너무 많습니다. 오직 성령을 예수님의 종속적 개념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독자적인 하나님으로서의 사역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능력이나 은사를 주시는 그런 힘의 개념으로만 성령을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예수님이 그러셨듯이 이제 이 시대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성자시대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마치 성자시대가 왔는데도 성부시대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마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말입니다. 이제 성자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 하나님의 시대가 왔습니다. 그럼 이제 성령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령시대에도 성자시대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시대의 구분 -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갈라집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은 사람으로 갈라집니다. 그럼 성령시대는 어떻습니까? 성령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눠집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여기 육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성령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2:15)


여기에서는 신령한 사람이 나옵니다. 신령한 사람이란 그 안에 성령이 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살았던 것처럼, 성령님의 지시를 받고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1)


그럼 육신에 속한 자라는 말은 뭘까요? 육신에 속한 자는 그 안에 성령이 있습니다. 구원을 받으면서 성령을 받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전혀 받지 않는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육신에 속한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구원을 받았으니까 성령은 있는데, 저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스림을 받으며 살진 않습니다.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것은 상당히 은사를 많이 받고, 은사중심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꼭 신령한 사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2장 1절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잖습니까? 그렇게 은사를 많이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육신에 속한자요,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거꾸로 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은사가 많은 사람이 영적으로 충만하고, 영적으로 신령하고, 영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방언도 못 받으면, 정말 믿음도 없는 사람이라고 취급받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방언은 기본으로 받아야 신령한 사람으로서 첫걸음을 내딛은 것 같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체험을 경험하면서 조금씩 더 신령한 사람이 되는 거 같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니 신령하다는 개념은 성령의 은사체험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삶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됩니까? 그러니까 성령시대에는 성령을 좇아 사는 겁니다. 성부시대에는 성부를 좇아살고 성자시대에는 성자를 좇아 살듯이 성령시대는 성령을 좇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시대에는 이렇게 사람이 구분됩니다. (표1 참고)


성령시대

성령이 없는 사람

성령이 있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자연인)

거듭나지 못한 사람

마귀의 자녀

지옥에 가게 될 사람

영에 속한 사람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자녀

천국에 가게 될 사람

(표 1)

신령한 자란?(2)

성령시대에 사람들은 크게 “성령이 없는 사람”과 “성령이 있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표1 참고) 성령이 없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는 자연인이라고 합니다. 태어난 그 상태 그대로 있는 사람을 말하죠. 아담 안에서 태어난 그 상태 그대로를 자연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령시대에는 성령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이 없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 3:5) 그럼 성령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아직 마귀의 자녀입니다. 결국 육에 속한 사람은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롬 8:14) 하나님의 아들을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은 결국 어디로 갑니까?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결국 이들은 천국에 가게 됩니다. 반면에 거듭나지 못한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지옥에 갈 사람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렇게 구분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다는 말은 결국 육에 속했다는 말이고, 육에 속한 상태에서 거듭나지 못하고, 여전히 마귀의 권세 아래에 마귀의 자녀로 남아있어서 결국 지옥에 가게 될 사람. 즉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반면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요, 거듭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결국 천국에 가게 될 생명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을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아멘.

 

 

 

성령시대의 구분 - 신령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

 

여기까지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의 구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안에서 할 수 있는 세부적인 구분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표2 참고)

 

성령시대

성령이 없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성령이 있는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종교적인 사람

악한 사람

착한 사람

신령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사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의 인격)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열심이 있는 사람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열심이 없는 사람

-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사람

- 육신의 요구를

제어하는 사람

-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

예배 OK

충성 OK

전도 OK

가치관 OK

성령체험 OK

은사 OK

-> 그러나

인정을 못 받음.

자기 욕망,

자기 욕심,

자기 생각 대로

사는 사람

(육에 속한 사람과 다를바가 없다.)

(표 2)

 

성령이 없는 사람 중에도 악한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잖습니까? 예수 안 믿으면서도 착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성령이 없는 사람은 다 악하다고 한다면, 그건 잘못된 표현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들 중에서도 악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한 착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복음 안에서 생명 안에서 갈라내는 것은 “악하냐? 착하냐?”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영이 있느냐? 없느냐?”의 개념은 “악하냐? 착하냐?” 의 개념과는 무관하다는 것.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령하다는 개념을 너무나 잘못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구분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예수 믿는 착한 사람이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악한 사람들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구분을 하기 때문에, 이 구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에게도 악한 사람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다. 아시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성령이 있는 사람은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있는 사람, 즉 영에 속한 사람은, 신령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럼 신령한 사람이 무슨 뜻입니까? 신령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것이 오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령한 사람이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게 신령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신령하다는 말은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럼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이 말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도 없고, 세상중심으로 자기중심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 믿어도 여전히 악한 사람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예수의 성품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성품이 그의 삶에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사람이요, 육신의 요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제어하는 사람이며, 궁극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이 그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롬 8:4, 갈 5:17, 갈 5:22~23)

 

그런데 육신에 속한 사람을 보십시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과 육신에 속한 사람은 개념이 틀립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예 성령이 없는 사람을 말하고, 육신에 속한 사람은 성령은 있지만 그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이 육신에 속한 사람은 성령은 받았어도, 성령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육신에 속한 사람 안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이 있는 사람과 열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분명해져야 육신에 속한 것과 영에 속한 것의 구분이 분명해진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에는 성령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역사하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열심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열심은 있지만,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 모두 신령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령하다는 말은 “영의 인도하심을 받느냐? 안 받느냐?”의 개념이지,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느냐? 없느냐?”는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회심하기 전, 그는 성자를 깨닫지 못하고 성부에 대한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성자와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빌 3:6) 그리고 로마서 1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롬 10:2) 그러니까 열심히 있다고 할지라도 성자에 대한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 열심은 구원도 못 받고 인정도 못 받는 열심입니다. 오늘 이 문제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열심은 가질 수 있지만, 그 열심히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열심은 육신에 속한 열심인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성령시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신령과 같은 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도, 열심히 예배 충성 전도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도,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도 성령체험이나 은사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럼요.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육신에 속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 있고, 올바른 가치관에 체험도 있다고 해서 자기는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신령의 본질은 아니고, 신령하다는 것은 영의 인도하심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신령으로 드려지는 예배. 즉 영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여야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찬양도 내가 내 열심으로 부르는 찬양과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부르는 찬양이 다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 자기의 열심으로 하는 모든 것들은 그저 종교적 열심에 불과합니다. 마치 불교신자들이 불상 앞에서 열심히 뭔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열심을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없는 육에 속한 사람 중에도 종교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불교신자나 아니면 다른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그럼 이들도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을 향해서, 그리스도인들만큼 열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이상의 열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만 이들이 가진 열심과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열심에서 차이점은 신앙의 대상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태도와 자세와 열심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없어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육신에 속한 열심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열심 있는 것이 곧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오해이며, 또한 고린도 교회가 가졌던 큰 오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과 경건은 틀린 겁니다. 신령과 도덕은 틀린 것이며, 신령과 윤리도 틀린 겁니다. 신령은 오로지 한가지 개념입니다.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그것이 신령이지, 다른 무엇도 신령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제 영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사는 삶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는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내 안에서 성령이 나를 이끄시고 주관하시며 내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 앞에, 우리가 순종하며 따라가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 그 삶을 우리가 새 언약의 삶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렘 31:33)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삶이야말로 새 언약의 완성이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객관적으로 완성하신 그 모든 사역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주관적으로 성취하셔야 비로소 새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완성된 모든 사역이 성령 안에서 인 치신 것입니다. (고후 1:22) 그래서 오늘 우리는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을 좇아 살면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우리 안에서 절로 열매가 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열매 맺는 삶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령을 좇아 살면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좇아 사니까 저절로 열매가 맺어지는 겁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