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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방언을 해야 하나-케네스 해긴

에반젤(복음) 2020. 3. 1. 14:23



왜 방언을 해야 하나?- 케네스 해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마가복음 16:17)

사도 바울은 방언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많이 서술하였읍니다. 그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전서 14:18)"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그가 설교한 것을 또한 스스로 열심히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나 또한 내가 규칙적으로 방언을 말함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신도들 또한 마찬가지로 매일 매일의 삶 속에 나타나는 축복이자 권능의 원천인 방언의 은혜를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본서의 목적은 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꼭 해야하는가 하는 중요한 이유들을 제시하고, 또 신도들로 하여금 매일 성령의 능력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축복을 깨닫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1)첫 번째 이유 - 방언은 첫 표적이다. (Tongues the Initial Sign)

사도행전 2장 4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as the Spirit of God gives utterance) 방언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세례의 첫 증거이자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것이 성령의 내주를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에 왔던 유대인 형제들이 성령의 은사가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것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들 유대인들이 고넬료의 가속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을 알았을까요?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 10:46). 방언을 말했다는 사실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도 같은 은사를 받았다는 것을 믿게한 초자연적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2)둘째 이유 - 방언은 영적 계발을 위한 것이다. 영을 강하게 한다.
(Tongues For Spiritual Edification)


고린도전서 14장 4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edifies himself) . .

고린도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은 영적 계발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써 하나님께 대한 찬양중에나 혹은 개인적 기도중에 방언으로 말하기를 힘 쓸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헬라어 학자들에 의하면 "덕을 세우다 (edify)"라는 표현보다 더 현대어에 맞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충전하다 (charge)"라는 것입니다. 즉, 마치 축전지(battery)를 충전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 절을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마치 축전지와 같이 자신을 충전시키며 일으켜 세운다"라고 바꿔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처럼 놀랍고 초자연적인 영적 계발의 수단이 - 정신적 혹은 신체적 계발이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든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웨이머스(Weymouth)의 번역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의 비밀 (divine secrets)을 말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자신과 교통할 수 있는 신성하고 초자연적인 수단을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4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나의 영이 기도한다"라고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확장번역본 (Amplified Bible: 헬라어 원어의 의미에 충실하게 폭넓게 해석한 성경)에 의하면, "내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에 따라 나의 영이 기도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영이 그 또한 영이신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신성하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과 대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구절들을 놓고 볼 때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해야 되는 가치를 모르겠다고 의문을 갖는 것을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만약 하나님 말씀에 방언으로 말함이 귀중한 것이라 한다면 귀중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방언이 덕을 세운다 하시면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방언이 그 자신과 교통하게 되는 초자연적인 방법이라 하시면 그 자신과 교통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신도들이 방언을 말해야 한다고 하시면 모든 신도들이 방언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저 소수가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하시지 아니 하셨습니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들'은 복수이며 모든 이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중의 한 표적이 바로 "저희가 새방언을 말하며 . . ." (마가복음 16:17)라는 것입니다.

3)셋째 이유 - 방언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상기시킨다. (Tongues Remind Us of The Spirit's Indwelling Presence)


요한복음 14장 16-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는 여러 해동안 영국 하나님의 성회 (Assemblies of God)의 감독이셨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오순절파 성경학교를 세우신 분인데, 그분이 강조하시기를 방언을 말함은 성령충만을 받을 때 나타나는 최초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계속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을 말함은 결코 마르지 않으면서 우리의 영적인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것입니다. 계속하여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면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우리가 항상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내가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매일 같이 의식하고 살 수 있다면 내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번은 12살된 목사님 딸이 성질을 못이기고 자기 엄마에게 거칠고 적대적인 감정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방문중에 있던 설교자가 그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 소녀가 고개를 들어 그가 자기의 성질부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을 깨닫고는 너무 부끄러워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고 말한 것을 목사님께 보여주게 되어 너무 죄송해요"라고 울먹였습니다. 그러자 그 설교자는 말했읍니다. "얘야, 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너를 보고 듣고 계시단다. 너 그리스도인이지 않니?" "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지?" "네." "그러면, 성령님께서 네 안에 계신거야.

그는 네가 말한는 것과 행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단다. 그러나 네가 뉘우치면 주님께서 다 용서해주실 거야." 그들은 함께 기도했고 소녀는 회개하였으며 이내 방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설교자는 소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 여기 네 성질을 억제할 수 있는 비결이 있지. 만약 네가 매일 방언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면 네가 성령님이 네안에 계신 것을 항상 잊지않을 수 있게 될 거야. 네가 성령님이 네안에 계신 것을 기억하게 되면 전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거야." 몇 년 뒤 그 설교자가 같은 교회에 설교를 하기 위하여 들르게 되었을 때, 목사님의 딸이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을 잊지 않았어요. 지난 몇 년간 매일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였더니 제가 한번도 제성질을 부린 적이 없었어요."

불행하게도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아직도 성질을 부리고 못할 말을 입에 담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는 오로지 마땅히 성령안에서 동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의 실재를 의식하지 않고 있으면 흥분하거나 또는 화를 품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적으로 시간을 내어 주님과 교제하면 우리는 그가 내안에 계심을 항상 의식할 수 있게 됩니다.
4)넷째 이유- 방언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뜻에 따라 기도할 수 있다.
(Praying in Tongues is Praying in Line With God's Perfect Will)


로마서 8장 26-27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느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방언기도는 우리가 이기적인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자기 생각이나 머리에서 나오는 기도는 비성경적인 기도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종종 우리의 기도가 어느 늙은 농부의 기도와 같이 되기도 합니다 - "주여 나와 나의 아내, 내 아들 존과 그 아내 이렇게 네사람만을 축복해 주소서".


위에 인용한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며 이는 올바른 기도방법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하는지 안다고 해서 내가 온당히 구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 . .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학자인 P.C. Nelson은 헬라어 원문을 문자그대로 읽으면, "성령이 명확한 음절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명확한 음절의 말 (articulate speech)'이란 우리의 일상적 언어를 뜻합니다. 그는 계속하여 지적하기를 헬라어 원어의 뜻이 우리의 입술로부터 나오는 신음과 같은 기도뿐만 아니라 방언을 통한 기도도 일컫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또는 확장번역본에 따르면 "내안에 계신 성령의 도움으로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라고 한 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당신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당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신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할 내용 (또는 소리, utterance)을 주시고 당신은 그것을 영으로부터 내어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은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즉, 온당히 기도드려야 할 내용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께서 이를 우리와 동떨어져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신음은 우리의 속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것이며 우리의 입술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대신 해주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혜사(helper)로서 그리고 중보자(intercessor)로서 우리안에 내주하시도록 보내셨습니다. 그는 우리 기도생활이 잘 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책임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함은 성령께서 소리를 주시는 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하여 인도된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이기적으로 될 가능성을 제거해 줍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 기초하여 기도 드림으로 인해서 실제로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최상의 응답도 아닌 것을 받게 됩니다. 만약 성도들이 어떤 일이 특정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를 고집할 때,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것이 그들을 위한 최선이 아니고 그의 온전한 뜻이 아닐지라도 종종 그들이 원하는 대로 허용하시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계속 왕을 달라고 고집하였기 때문에 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완전하신 뜻이 아니었읍니다.

5)다섯 번째 이유 - 방언으로 기도하면 믿음이 제고된다.
(Praying in Tongues Stimulates Faith)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다서 20절)

방언기도를 하면 믿음이 제고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좀더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나의 기도하는 말을 인도하신다고 한다면, 방언으로 말하기위하여 반드시 믿음을 사용해야 합니다.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일지 내가 알 지 못하므로 오로지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줄을 그를 의지하여 구하고나면 다음 줄을 위해 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젊은 침례교 목사로서 나는 동네교회에서 목회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감리교 부부의 집에서 거하고 있었는데, 그 부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매우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위궤양을 앓고 있었고, 의사들은 그것이 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염려했습니다. 그 남편은 돈을 잘 벌었으나 모든 돈을 병원비로 다 써버린 상태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치료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녀의 믿음을 그 수준에 이르도록 높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연한 음식과 우유만 마셨지만 그나마 편한히 소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녀가 성령의 충만함(성령세례)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평소에 전혀 먹을 수 없었던 음식들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치유도 받았어요. 나는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일들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치유가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방언으로 말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제고시켜주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일들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것을 쉽게 해주는 것입니다.

6)여섯 번째 이유 - 방언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의해서 오염되는 것을 막아준다.
(Speaking in Tongues, A Means Of Keeping Free From Worldly Contamination)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린도전서 14장 28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말해야 하는 여섯 번째 이유는 이것이 불신앙과 신성모독과 직장에서 또는 바깥세상에서 우리가 듣는 모든 세속적인 말들이 주는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순수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위 말씀구절에서 우리가 자신에게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바울이 말하기를 교회 예배중에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 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린도전서 14:27,28)" 만약 우리가 교회 예배중에 우리자신과 하나님께 말할 수 있다면, 직장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한테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발소에서 사람들이 음란한 농담을 할 때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나자신과 하나님께 방언으로 말합니다. 기차나 버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께 방언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당신 자신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세상적 오염으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해 주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7)일곱 번째 이유 -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가 모르는 이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
(Praying in Tongues Enables Us to Pray For the Unknown)

방언기도는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수 없는, 더 나아가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일들에 대하여 기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께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모를 때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에 더하여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 육신의 지각으로 전혀 아는 바 없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도 기도를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사역중인 한 영국 선교사가 휴가차 집에 와서 어떤 선교대회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한 여인이 그에게 일기를 쓰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년전 어느날 밤 갑자기 기도를 해야할 마음의 부담 때문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래서 침대에서 나와 방언으로 말하면서 무릎을 꿇어앉았습니다. 한 시간 동안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치 제가 레슬링을 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저는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상속에서 당신은 원주민들이 둘러싸고 있는 조그만 초막 안에 있었습니다. 당신은 아팠고 이내 사망했습니다. 저는 원주민들이 시트를 당신 머리위로 덮고는 애도하며 초막을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당신이 초막에서 나와 그들 한가운데 서있었고 모든 원주민들이 기뻐하였습니다.

선교사는 그 여인에게 일기를 쓰고 있느냐고 묻고는 일기를 그날 오후에 갖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두 일기를 비교하면서 영국과 아프리카의 시차를 고려해보니 그 여인이 기도의 부담을 느낀 시간과 그 선교사가 치명적인 열병을 앓고 있던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동역자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는 원주민들과만 있었습니다.
그녀가 환상에서 본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선교사는 죽었었고, 원주민들이 시트를 그의 머리 위로 덮어주었으며, 갑자기 그가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성령님의 역사하심 때문이었습니다.

1956년 나의 아내와 내가 캘리포니아에 있었을 때였는데, 갑자기 밤에 내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꼭 마치 누가 나에게 손을 얹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고 내 가슴은 급하게 뛰었습니다. 주여, 무슨 일입니까? 어디엔가 무슨 문제가 벌어진 것을 제가 알겠습니다. 제안에 계신 성령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 마음속 뿐만 아니라 당신은 세상 어느 곳에든지 계십니다. 무엇이든지 제가 이문제에 대해 (방언으로 기도할) 말을 주옵소서. 라고 저는 외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한시간 동안 방언으로 기도한 후 웃으며 방언으로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기도하게 될 때는 언제나 찬양을 드려야 하겠다는 마음의 암시를 갖게될 때까지 계속 기도하십시오. 만약 그런 상태에 이르고 나면 당신이 기도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내가 기도를 드린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응답을 받았으므로 나는 다시 잠자리로 들어갔습니다.

꿈속에서 루이지애나에 있던 나의 막내 동생이 심각하게 아픈 것이 보였습니다. 구급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면서 동생을 병원으로 옮기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꿈속에서 나는 병실문밖 복도에서 서 있었습니다. 병실 문은 닫혀 있었는데, 의사가 거기서 나오더니 뒤로 문을 닫고는 내손을 잡으며, 죽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니오. 의사 선생님,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안 죽었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죽지 않고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말에 의사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저를 따라 오시면 그가 죽은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사람이 죽었는지 아닌지도 분간 못할 정도로 경험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내팔을 잡고는 동생의 병실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는 침대로 걸어가더니 시트를 확 제꼈습니다. 그 순간 동생이 눈을 번쩍 떴고, 의사는 동생이 숨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의사는 더듬거리면서 당신, 제가 모르는 무언가를 아는 분이군요. 그가 살아있잖아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꿈속에서 내 동생이 침대에서 건강하게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바로 그것을 위해서 내가 그토록 기도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3개월 뒤 동생이 텍사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내 동생이 나를 찾아와서는 형이 없는 동안 내가 죽을 뻔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동생에게 그가 루이지애나의 모텔에 묵고 있을 때 밤에 공격을 받고 병원으로 급송된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동생은 누가 나에게 그 얘기를 해주었나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동생에게 기도의 부담과 꿈 이야기를 해주자 동생은 말했습니다. 모든게 정확히 그대로예요! 병원에서 뒤에 말하기를 내가 40분 동안 죽었다고 생각했었다는 거예요! 방언기도는 우리가 자연적으로는 전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일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8)여덟 번째 이유 -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이 새롭게 된다.
(Praying in Tongues Gives Spiritual Refreshing)

이사야서 28장 11-12절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의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무엇이 위에서 말하는 안식이며 무엇이 상쾌함일까요? 방언으로 말함입니다. 간혹 의사가 안식을 위한 여러 가지 처방을 해주지만 나는 이세상에서 최고의 처방을 알고 있습니다. 흔히들 휴가를 갖다와서도 다시 직장에 나아가기 전에 집에 와서 쉬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안식의 처방을 매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안식이요 .. . 이것이 상쾌함이라 . . .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긴장된 이 세상 속에서 이러한 영적 소성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9)아홉번째 이유 - 감사를 위한 방언 (Tongues For Giving Thanks)

고린도전서 14장 15-17절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바울이 16절에서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라고 한 것은 영적인 일들에 대하여 배우지 못한 자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만약 저녁식사에 초대받아 가서 감사 기도를 드려주십시오 하였을 때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다른 사람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전혀 은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그런 자리에서 '마음으로 기도하는 (pray in understanding - 이해할 수 있는 기도)'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방언으로 기도했다면 내가 또한 통변을 해서 듣는 자가 무엇을 기도했는지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기도가 가장 완벽한 기도와 감사를 드리는 방법이 된다고 바울이 말한 것을 주목하십시오. 왜냐하면 17절에서 이르기를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 . .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적인 일들에 무지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은혜 받을 수 있도록 이해되는 말로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10)열번째 이유 - 방언으로 말하면 혀를 복종시킬 수가 있습니다.
(Speaking in Tongues Brings the Tongue Under Subjection)

야고보서 3장 8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를 성령님께 순종시켜서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함은 우리 육신의 모든 지체를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시키는데 이르는 큰 한 걸음 (a giant step)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혀라고 하는 가장 다스리기 힘든 지체를 순종시킬 수 있다면 육신의 어떤 다른 지체도 다스릴 수 가 있습니다.

방언의 공적인 측면 (The Public Side of Tongues) 지금까지 주로 신도 개인의 신앙생활 속에서 방언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루었는데, 방언을 함에도 공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결론 삼아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을 때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방언을 말하게 됩니다.
둘째, 공공집회에서도 통변과 함께 방언을 말하면 덕을 세워서 교회 전체가 은혜를 받게 됩니다. 바울이 명백히 말한 대로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고린도전서 14:3)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또 말하기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린도전서 14:5). 바울은 통역이 따르는 방언과 예언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방언을 통역하여 전체 교회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아듣게 된다면 예언이 더 낫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오전짜리 동전 두 개는 십전짜리 동전 한 개와 같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은 십전짜리 동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십전짜리 동전 한 개 (예언)이 오전짜리 동전 한 개 (통역이 없는 방언)보다 나은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통역 (또 하나의 오전짜리 동전)이 따라오면 두 개의 오전짜리 동전이 한 개의 십전짜리 동전과 대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언은 설교와 다르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예언이 설교와 같다면 설교를 위해서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고 준비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 . .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Study to shew thyself approved unto God)(디모데후서 2:15)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방언으로 말하거나 통역하기 위해서 공부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공부를 해야만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오는 것입니다. 물론 설교도중에 갑자기 성령의 감동으로 자기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말들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감동이며 예언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통역과 함께 하는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통역이 따르는 방언을 들을 때 믿지 않던 자가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믿게 되고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 구원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이름으로 귀신을 붸아내며 (마가복음 16:17). 이것은 은밀하게 사적으로 벌어질 수도 있고 공개적으로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18절). 이것도 사적일 수도 있고 공개적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표적은 새 방언을 말하며 (17절). 이것 또한 사적일 수도 공개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중에 방언으로 오래 동안 기도하는 것을 원치는 않습니다. 통역이 없다면 회중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전혀 은혜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제단앞으로 나와 모여 기도드릴 때는 자신이 덕세움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원하는 만큼 오래 기도를 드려도 좋습니다. 예배중 회중이 손을 들고 다같이 기도드릴 때 자기가 방언으로 기도드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나도 매일밤 연단에 서서 그런 식으로 방언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회중의 기도가 끝나면 나도 방언기도를 마칩니다. 그런 경우에 내가 나 혼자 계속 방언기도를 하고 있다면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가장 유익하도록 사용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원제:Ten Reasons Why Every Believer Should SpeakinTongu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