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영적인 요구가 있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목적을 위해서 지음받은 내 영혼이 나의 실체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육신이 자기의 전부인줄 알고 좋은 것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간수를 잘 합니다. 건강식품이나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조금만 아프면 약도 먹고 얼굴도 단장하고 주름살을 펴보려고 성형수술도 하고 육신의 치장은 잘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영혼은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기 때문에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고 자기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였을 때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 12:19-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의 요구는 물질적인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짐승은 먹을 것이 있고 환경이 편안하고 암컷과 수컷이 있어서 새끼를 낳고 살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육체의 조건만 이루어지면 그 이상의 요구는 없습니다.
사람은 육신적인 조건이 다 주어진다 할지라도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온 가족이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훌륭한 문화 시설을 즐기고 산다면 행복할 것 같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육체 외에 영혼이 있어서 영적인 요구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요구는 육체적인 만족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인 갈등을 육신적인 것으로 해결해보려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함으로 온갖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라는 말씀대로, 사람은 몸(body)과 혼(soul)과 영(spirit)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요구는 식욕, 성욕, 명예욕 등이고 혼은 마음, 생각, 정신 등의 활동을 말하는데 이러한 혼의 요구는 지식과 사랑, 그리고 고상한 사상 같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영의 요구는 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9절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신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짐승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습니다. 원숭이가 사람과 비슷하게 흉내는 내지만 영적인 요구는 없습니다.
또한 영의 요구에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로마서 2장 15절에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라는 말씀처럼 사람은 죄를 지으면 양심이 송사를 합니다. ‘이 나쁜 놈아, 남의 것을 가지면 안돼. 도둑질을 하면 안돼. 나쁜 짓을 하면 안돼’ 하며 죄를 지적하는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그래서 양심을 “마음에 새긴 율법”(로마서 2:15)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양심은 선을 추구합니다.
마지막으로 영의 요구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포함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 육신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이고 육신적이며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지만 영은 영원하고 완전하며 신령한 것을 찾습니다. 이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처럼 되기 전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옛날 중국에 서태후라는 황후가 중국을 40 여 년간 통치를 할 때, 북경에 인공 호수를 만들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바다와 같은 호수를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파서 만들었습니다. 옛날에 굴착기(포크레인)나 자동차가 있지도 않았을 그 때, 호수를 만들고 그 흙을 전부 파서 산을 만들고 거기다 엄청난 궁궐을 지어 놓았습니다.
자금성은 옛날 중국 황제들이 살던 궁궐인데 그 안을 구경해 보니 방만 9999개라고 합니다. 방이 1개만 더 있으면 만 개인데 하나님만 만 개이고 인간은 한 개가 모자란답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기 전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면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적인 욕구가 있음을 알지 못하여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하며 영혼을 육신적인 것으로 자꾸 달래는 것은 비단 그 부자만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우는데 ‘울지 마. 사탕 줄께. 장난감 줄께’하면서 사탕을 입에 넣으면 너무 달아서 잠깐은 엄마 생각을 잊을 수 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엄마를 부르며 울어서 사탕을 입에 넣어 주니 사탕을 뱉어 내고 장난감도 집어 던지면서 엄마만 찾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엄마를 만나 엄마 품에 안기기 전에는 마음에 평안과 만족이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데 세상의 온갖 것으로 자기 영혼을 달래봐야 죽을 때까지 달래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리석고, 육신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 영혼을 달래보려는 자도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사람은 몇 천 년이나 몇 만 년이나 살 것처럼 계속 쌓아 놓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밤이라도 영혼을 도로 찾아가실 수 있습니다.
대통령직을 물러난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평생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받을 테고,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잘 대우받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풍부하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할 텐데, 수 천 년을 살며 자손만대로 물려줄 것인 양 엄청난 재물을 쌓으려는 것은 무슨 연고일까요?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빌딩이 한 개 있으면 두 개를 갖고 싶고, 두 개를 갖고 있으면 열 개를 갖고 싶고, 신형자가용을 갖고 있으면 더 좋은 신형외제차를 갖고 싶고, 자가용 비행기 등 온갖 것을 다 갖게 되면 만족이 있을 성 싶지만 막상 그런 것을 다 가져도 만족은 없습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는 아름다움과 부귀, 영광, 권세 등 모든 것을 한 몸에 가지고 있었지만 그 사람도 행복하지 못했고 결국 수치스럽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 일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무엇을 해봐도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기 전에는 만족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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