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영성 ("한국 장로신문" 974호에 게재됐던 원고임)
1. 최근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이 "영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영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마디로 정의하기 매우 막연하다.
그러면 과연 "영성"이 무엇인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에서 "영"이라고 하는 말은 "숨결"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루아흐)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했다"고 할 때 여기 "생기"는 "숨을 불어넣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은 "영을 불어넣었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너희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영성"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서로 마음이 잘 맞고 손발이 잘 맞을 때 "호흡이 잘 맞는다"고 한다. 말하자면 영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호흡을 잘 맞추며 사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유명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성이란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했다. 즉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며, 그리스도와 일체 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기독교 본래의 모습, 교회의 본래의 사명에 돌아가려던 종교개혁과 같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2. 오늘 성경(삼상3:1-21)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과도기에 사무엘이 등장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무엘은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유명한 지도자이다. 그를 통하여 왕정이 수립되었고, 초대 왕 사울, 2대 왕이요 가장 유명한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다.
그러면 사무엘의 영성은 어떤 것인가?
(1) 1절에 "아이 사무엘이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다(2:11, 18).
여기 "섬겼다"고 하는 말은 종의 신분, 종의 위치를 말한다. 사무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종이다. 이 말은 사무엘이 누구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는 사무엘의 정체성을 밝혀 준다. 여기 사무엘의 영성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엘리와 대조가 된다. 엘리는 그냥 성소에서 종교적인 직분만 감당하는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없이 그냥 성전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만하고 있다. 소명은 없고 하나의 기능만 있을 뿐이다.
또 엘리의 아들들을 보면 성전을 통하여 육신적인 쾌락을 누리고 즐기는 일에 빠져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안중에 없다. 하나님은 우선 순위에 있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아니 맨 꼴찌였는지도 모른다. 오직 자기 쾌락에만 몰두해 있다. 교회라든지 직분이라든지 하는 것이 전부 자기만을 위해 필요한 장식물일 뿐이다. 이런 엘리와 그 자녀들은 지금 몰락해 가고 또 사라져 가게 된다.
(2) 사무엘은 하나님이 제일이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일에 충실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a.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3:1 하 반절에 "그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했다. 여기 "희귀하다"는 말은 흔하게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사무엘이 역사에 등장하던 그 시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 이런 시대에 사무엘은 성전에 누워 자다가 여호와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것,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한 것은 사무엘의 인생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영성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시작한다.
b. 다음으로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했다.
그는 당장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기도요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여기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가 있다. 이것이 영성이다. 이 영성이 사무엘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게 했다.
도무지 기도생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기도는 꽤 우직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비록 인간 세상에서는 세련되게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어있다. 그 영성이 죽어있다. 나무에서 잘린 가지나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다. "태초에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있었더라"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할 때 이런 운동력이 우리 안에서와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된다.
(3) 오늘 3:19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고 했다.
눅2:에 보면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랐다"고 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다. 삼상2:26에도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했다. 사무엘이 자랐다고 하는 것은 물론 그 신체적인 성장을 말한다. 그러나 더 깊은 뜻이 있다. 그의 영성이 성장한 것을 말한다. 그는 더욱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더욱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일이 더욱 더 성장해 갔다. 이렇게 성장하여 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오늘 우리의 신앙적 성장은 어느 정도인가? 얼마나 물질의 복을 받았느냐, 얼마나 건강의 복을 받았느냐, 얼마나 자녀의 복을 받았느냐 그런 말이 아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는가? 얼마나 말씀을 더 사모하고, 말씀에 익숙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얼마나 더 기도생활 하느냐 하는 것이다. 얼마나 교회와 사람들을 더 잘 섬기느냐 하는 것을 말한다. 얼마나 더 겸손해 졌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라야 한다. 키가 자라듯 지혜가 자라고,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에 자라고,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자라야 한다.
그러면 사무엘이 그랬듯이 그가 하는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 지도력이 세워지고, 그 기도가 상달하고,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이런 사람을 들어 쓰셔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시게 된다.
- 김오동 목사 (서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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