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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은사에

에반젤(복음) 2020. 2. 26. 22:39



성령의 이적적인 은사 가운데 방언의 은사가 있다. 이 은사는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히 매력있는 은사이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이 신기한 현상을 직접 경험하고 싶어한다. 어떤 교단은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비로소 참된 신자라고 말할 정도이다.

1900년대 들어서 미국의 교회들에 소위 ‘방언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창시자는 찰스 파렘(1873-1927)이라는 사람이었다. 물론 어떤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것은 단지 한 사람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일어나는 것이다.

찰스 파렘은 성령세례를 받으면 자연히 방언을 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언을 받아야만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믿게 되어서 열심히 방언을 구했다. 당시 미국전체가 이 운동으로 들썩거렸는데, 미국의 언론들은 이 운동을 가리켜 신교와 구교를 넘어선 제3의 세력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 운동은 이후 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여 전세계의 교회들에 영향을 미쳤다. 이때 우리 한국교회도 영향을 받아서 한때 성도들 가운데 방언을 사모하는 열기가 매우 높았다.

오늘날 방언 운동은 많이 시들어졌지만 이 은사에 대한 신비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이 은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방언에 대해 기록한 신약성경의 본문을 검토해야 한다. 사람들의 체험담은 뒤로 미루고 일단 모든 신약의 본문을 검토하자. 그런 후에 방언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고로 듣는 것이 좋겠다.

2. 방언을 기록한 신약성경 본문

1) 막 16:17 :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으로서 방언을 언급한다.
2) 행 2:1-13 :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 때 사람들의 입에서 방언이 나왔다.
3) 행 10:44-48 :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하자 방언이 나왔다.
4) 행 19:1-7 :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방언이 나왔다.
5) 고전 12장 :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서 방언을 언급한다.
6) 고전 14장 : 방언에 대한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여기서 일단 마가복음의 기록은 예언이지 현실이 아니므로 제외하자. 그러면 사도행전과 고린도 전서만 남는다. 그런데 이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 전서의 방언이 다르다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은 사람들간의 언어 일치현상이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의 방언은 사람에 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전혀 다른 차원의 말이다.

이에 대해 조용기 목사는 사도행전의 방언은 ‘표적의 방언’으로서 성령세례를 받을 때 따라오는 것이고, 고린도 전서의 방언은 ‘은사의 방언’으로서 성령충만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는 표적의 방언은 단회적인 것이나 은사의 방언은 반복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표적의 방언을 보유한 사람이 은사의 방언을 같이 가지게 된다고 한다.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모든 신자가 방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성령 강림 사건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행전의 기록을 볼 때 성령을 받으면 반드시 방언을 했다는 것을 근거로 방언 운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세례라는 것 자체가 중생과 같은 시점에 일어나는 것이며,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은 역사상 단 한번의 사건이지 반복되는 사건이 아니라는 개혁주의 전통을 따를 때 사도행전의 언어일치 현상은 오늘날 우리가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3. 사도행전의 방언

이제 사도행전의 방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언어가 일치하는 이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이 일로 대단히 흥분했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언어일치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지 신기해했다. 그들의 놀라는 모습이 2:1-13에 매우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왜 오순절 성령강림 때 언어가 일치하는 현상이 일어났는가?

그것을 우리는 바벨탑 사건과 관련지어서 이해해야 한다. 창세기 11장에는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탑을 쌓아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였다. 이때 하나님은 인간들을 심판하셨다. 그의 심판의 도구는 언어의 혼잡이었다. 주님은 인간들의 언어를 나누셔서 그들을 흩으셨다. 언어가 다르면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 그래서 인간들은 나누이게 되었다.

오순절에 언어가 일치되어서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대화가 일시적으로 통했던 것은 바벨탑의 심판이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성령님의 오심은 회복의 사건이다. 주님은 과거에 인간들로부터 떠나시겠다고 하셨으나 이제 인간들 속에 거하겠다고 하신다.

바벨탑 사건으로 심판을 받은 인간은 성령님의 오심으로 회복되었다. 이때의 표적이 언어의 일치였다. 말이란 인간사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말이 안 통하면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이 없다. 천국의 공동체는 서로 말이 통하는 공동체이다. 계시록 7장과 14장에는 그들이 한 자리에서 같은 언어로 주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에 언어의 일치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이방인을 서로 굉장히 적대시했으나 이제는 모두가 한 형제요 한 자매라는 생각이 싹트게 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우리는 10장과 19장의 방언을 이해할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구분 짓는 선이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언어일치는 예수님의 재림 이전까지는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 때로 한번도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유창하게 외국어를 구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이적일 뿐이지 사도행전의 방언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의 방언, 즉 언어일치 현상은 어떤 특정한 나라의 말이라기 보다는 그냥 언어가 서로 일치한 기적이며, 또한 일시적이었지 지속적이지 않았다.

계시록 7장과 14장에는 많은 민족들이 동시에 한 자리에 모여 주님을 찬송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천국에 가면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나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의 언어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언어의 일치를 회복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며, 천국의 그림자로 이해해야 한다.

4. 고린도 전서의 방언

우리가 이제 주의 깊게 살펴보려는 것은 고린도 전서의 방언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은사로 받는 방언은 고린도 전서의 방언이다. 이 방언의 은사는 인간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고린도 전서 14장을 통해 방언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1)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2절 상).
이로 보아서 이것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분명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2)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2절 하).
이 부분은 조금 난해하면서도 중요하므로 14절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자.

3)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3-5절).
고린도 전서 14장은 예언과 방언을 대조하면서 예언의 우월성을 말한다. 이는 방언이 예언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동일한 은사이다. 다만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차원에서 볼 때 예언이 방언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예언이란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다.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므로 개인에게 매우 유익하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유익한지를 말하기는 성경 자체로 볼 때 어려우나 방언을 말하는 것은 분명 유익하다.

그러나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사람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신다. 바울도 모든 사람이 다 방언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따라서 억지로 방언의 은사를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다.

빌리 그래함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으나 현재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전도자이다.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4) 방언은 통역이 필요하다(6-13절).
만일 방언통역이 있다면 예언과 같이 교회의 덕을 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기능상 같다는 차원이 아니라 중요도에서 같다는 것이다. 즉, 방언 자체가 신비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역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 덕을 세운다는 의미이다.

5) 방언은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14절).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2절에서도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14절에서 방언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의 구조를 3개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방언을 3분설과 연결시킨다. 그들은 인간이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방언은 혼을 거치지 않고 영이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여기서의 영은 인간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다. 물론 “나의 영”이라는 표현 때문에 약간 혼동이 되겠지만, 이는 성령을 내가 모셨기 때문에 나온 표현이다. 14장 전체에서 영이란 대체로 성령을 가리킨다. 영어 성경(N.E.B.)은 이를 잘 번역했다. 거기에는 “내 속에 있는 성령께서는 기도하시나 내 지성은 쉬고 있다.”로 번역되어 있다.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결국 성령의 말씀이 입으로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입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방언을 하는 것은 사람이 통제할 수 있으나 방언의 내용은 사람이 통제할 수 없다. 자신도 무엇을 말했는지 전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15절). 15절의 강조점은 오히려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즉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6)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된다(22-33절).
방언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하지만 방언은 개인적으로 조심해서 해야지 온 성도가 전 교회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23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미쳤다고 오해할 것이다. 우리는 건전하고 깨끗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방언은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아무도 없을 때 혼자서 해야 한다. 그것이 방언 받은 자들이 가장 주의할 점이다.

5. 결론적 교훈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소극적으로 긍정한다.” 이는 그것이 개인에게는 도움이 되지만 교회 전체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주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시면 받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니므로 거기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람이 있다.

또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으면 그것을 자랑하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 듣는데서 해서는 안된다. 고린도 교회는 그것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오늘도 그런 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다.

본인은 성도들이 방언에 대해 이 정도만 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만 나아가고 성경이 멈추는데서 멈추어야 한다. 방언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들은 그냥 참고로 듣고 넘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