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절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
1.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인 말씀
) -->
은총의 방편 뜻은 보통 교회와 말씀의 전도, 성례전, 안식일, 기도 등 신자의 영적 향상을 위해 시도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특수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 `은혜의 방편`으로 말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례전이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라고 한다.
이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성도들을 통해서 온 세계에 소개될 수 있으며 또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2.말씀과 성령
) -->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의견이 언제나 동일하지는 않다.
펠라기우스파와 이성파들은 말씀의 지능적, 도덕적 사역이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데 지극히 충분한 것으로 보았고 성령의 추가적 사역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반면 신앙 지상론자(Antinomian)들은 : 모든 물건을 성령의 사역에서만 온다고 하였다.
) -->
또 내적말씀 또는 내적 광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외적 말씀은 전혀 필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말씀만은 신앙과 회개에 충분하지 못하며 역시 성령도 일반적으로 말씀 없이는 역사하지 않는다.
구역 사역과 실시함에 있어서 말씀과 성령은 합작하는데 성령은 말씀을 그의 기구로 하여 역사하신다.
3.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말씀의 두 부분
1)율법 :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율법은 먼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게 하며 (롬3:20)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에 무력함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목적이 있다.(갈3:24)
또한 율법은 신자들의 생활규칙이므로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준다.
2)복음 :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구원의 방편의 뚜렷한 표현이다. 복음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오게 믿고 회개하도록 권고하며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구원의 모든 축복을 약속해 준다.
또 복음을 믿는 모든 자를 위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3)복음과 율법의 차이
흔히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 관계에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것은 대립적 관계에서 보는 사람들은 율법을 계약의 조건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국면을 인식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율법이 은혜의 방편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성격과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율법 안에서 복음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복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맨 앞에 뚜렷이 나타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복음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
율법은 우리가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요청하고 있으며 또한 복음은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요청하고 있으며 또한 복음은 우리들 생활에 있어서 율법의 성취를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율법은 신약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마5;17~19, 약2:8~11).
제 2절 성례전의 일반적 고찰
1. 말씀과 성례전과의 관계
) -->
하나님의 말씀은 성례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은총의 수단으로서도 완전한 것이지만 성례는 말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말씀 없이는 완전할 수도 없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반대되는 견해인데 로마 카톨릭은 성례가 구원에 필요한 전부라고 가르친다.
말씀과 성례의 차이점
① 말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성례는 그렇지 않다.
② 말씀은 전 세계를 대상한 것인데 반하여 성례는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을 위해서만 시행되는 것이다.
③ 말씀은 믿음을 일으키며 믿음을 강하게 하나, 성례는 믿을 강하게만 한다.
2. 성례라는 말의 기원과 뜻
) -->
성례라는 말은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라틴어의 Sacramentum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원래 뜻은 서로 소송하고 있는 두 편이 공탁한 금액을 가리키고 있는 말이다.
법정에서 판결을 내린 후 승소자에게 돈을 돌려주고 패소자의 돈을 제신(諸神)에 대한 일종의 제물로 몰수되는 것이다.
이 말이 기독교 적으로 사용된 전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군인들이 그의 사령관에게 복종을 서약하는 엄숙한 군인의 선서를 가리키고 있는 군사적용법을 말하고 있다.
) -->
2) 그리스어의 `신비`를 번역한 라틴어 벌가타(Vulgata) 라는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
성례란 : 복종과 신비의 두 가지 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거룩한 법도이며, 그 법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감각적 표시로서 점찍어지며 그것을 그러한 표시로 믿는 사람에게 적용되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과 순종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 성례의 구성 요소
) -->
1)외적 가견적 표시
성례는 각각 외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이 외적 요소는 세례에 있어서는 물이며, 성찬에 있어서는 떡과 포도주이다.
이 외적 요소만을 받는 자는 성례를 받았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성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받은 것이 아니며, 성례의 가장 중요한 것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내적, 영적 은혜의 표징
이 표징은 성례가 의미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성례의 내부적 요소이다.
이 요소는 믿음의 의 (롬4:11), 사죄(막1:4), 믿음과 회개(막1:4, 16:16)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다.
3)표시와 표징과의 연합
이것은 사실상 성례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성례가 믿음으로 받아지는 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동반된다.
성례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정된 거룩한 제도로서 이 제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감격적 표시에 의하여 신자들에게 제시되고, 확증되고, 적용되는 것이며, 한편 신자들은 하나님께 그 들의 신앙과 순종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4)성례의 수
구약 시대에는 두 가지 성례 즉 할례와 유월절 예식이 있었다.
할례는 아브라함 시대에 제정된 것이었으며, 유월절은 모세 때에 시작된 것이다.
신약교회에서도 두 가지 성례 즉 무형 예식인 세례와 성찬이 있었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희생을 드린 후에는 더 이상 피 흘림이 필요 없게 되었다.
로마 교회는 부당한 방법으로 견진, 고해, 신품, 혼배(결혼), 종부 등을 추가함으로 성례의 수를 확대 시켰다
4. 구약 성례와 신약 성례의 비교
) -->
구약 성례는 단순한 예표에 불과하므로 받는 자의 법적 위치에만 영향을 주고, 받는 자의 영적 상태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받는 자의 신앙에 의해 영향이 좌우된다고 보고 있다.
) -->
신약 성례는 받는 자의 영적 상태와는 상관없이 다만 성례 행위에 의해서 받는 자의 심령에 영적 은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질상의 차이는 없다.(롬 4:11).
그러나 다음 몇 가지의 차이가 있다.
) -->
1) 구약 성례는 영적 의미 이외에 국가적 국면이 있다.
2) 구약 성례는 장차 올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시하는 것인데 비해 신약 성례는 완성된 희생의 최고이며,
3) 구약성례는 성례를 받은 자에게 신약성례가 주는 정도의 영적 은혜의 풍부한 양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제 3절 세 례
1. 세례의 제도
) -->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즉 그가 속죄 사업을 완성하신 후에 성례를 제정하셨다.(마28:19).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 -->
예수님은 세례의 형식에 대하여 규정하려고 하지 않으셨지만 교회가 그 필요성을 느꼈을 때 이 제정의 말씀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형식은 2세기 초 이전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 -->
개신교에서는 공인된 목사에 의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으로 시행되는 세례를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데 반하여 로마 카톨릭은 세례를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어린 아이가 위독할 때는 신부 이외의 다른 사람가지도 특히 조산원에게도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하고 있다.
2. 세례의 적절한 양식
) -->
침례교회는 물속에 들어가서 완전히 몸을 담가 버리는 것이 오직 세례의 유일하고도 있음직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또한 이러한 양식으로서만 신자의 영적 죽음과 부활을 상징시켜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성결이 세례의 상징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요3:25~26, 히10~22).
또한 세례는 침수와 마찬가지고 물을 뿌리는 형식이나 붓는 형식에 의해서도 상징될 수 있다.(레14:7, 민8:7).
따라서 세례의 양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세례는 침수의 형식에 의해 침례 될 수 있으며 붓는 형식이나 뿌리는 형식에 의해서도 침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침례파는 신약 성경이 침례에 의한 세례만을 정당시한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증명할 수 없다.
예수께서 세례의 어떤 양식을 제정하지 않으셨고, 성경은 어떤 양식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예수께서 사용하신 세례라는 말은 담그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씻어 정결하게 한다는 뜻이다.
3. 세례의 합당한 대상
1)성년 세례
세례는 신자와 그의 후손을 위해 시도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세례의 과정을 말씀하실 때 성인 세례를 마음에 두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그들의 전도 사업을 성인들에게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교훈은 신앙고백이 세례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막16:16)
) -->
오순절에 베드로의 말씀을 청중한 자들이 세례를 받았다.(행2:41, 8:37).
그러므로 교회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모든 성인들에게 신앙 고백을 요구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백이 이루어지면 그 진실성을 의심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한 교회는 그 고백을 표면적 가치로 받아 들여야 한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유아기적 세례는 성인이 되어서 본인의 신앙을 고백 받고 입교란 형식으로 완성 짖는 것이다.
2)유아 세례
침례교회는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부인하는데 그 이유는 유아들이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며, 신약은 유아에게 세례를 주리는 명령이 없으며, 그런 세례의 단순한 예를 기록한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 세례가 비성경적이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⑴유아세례의 성경적 증거
① 유아 세례는 성경의 단일한 구절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성경 사상의 산물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것이 국가적 국면이기는 했지만 주로 영적인 언약이었다. (롬4:16~18).
② 이러한 언약은 아직도 유효하며 본질상 현대시대의 새 언약과 동일한 것이다.(롬4:13~18)
③ 할례는 신약에 와서 언약에 들어가는 표와 증표로서 세례에 대치된다.(행2:39).
④ 새 언약은 옛 언약보다 은혜로운 것으로 성경(사54:13)에 나타나 있으므로 새 언약은 유아를 종처럼 배제하지 않는다.
⑤ 유아들은 언약의 축복에 참여하였으며, 할례의 표를 받았으며, 이스라엘 회중의 한 부분으로 계산되었다.(대하20:13).
⑥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는데 여기서 유아가 제외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행16:15,33)
⑵유아 세례의 근거와 작용
개혁파 계통의 어떤 학자는 유아가 가정적 중생에 근거해서 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하며, 또 어떤 사람은 유아는 중생의 약속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총괄적, 언약적 약속에 근거해서 세례를 받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후자의 견해가 보다 받아드릴 가치가 있다.
언약 적 약속은 유아 세례의 확실한 객관적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유아 세례가 어떻게 영적 생명을 강하게 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능을 발휘 활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나는 데, 그 대답은 유아들이 세례를 받을 때 중생하였다고 하면 세례는 그 시행 시에 중생의 생명을 강하게 하는 것이며, 세례의 의미가 보다 명백히 이해된 후에는 믿음이 더 견고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의 작용이 세례의 시행 순간에만 필연적으로 제한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 -->
제 4절 성 찬
1. 성찬의 제정
성찬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지 전 유월절에 제정한 것이다(마26:26~29).
이 새로운 성례는 유월절 음식의 중심적인 요소와 직결된다.
양고기와 함께 먹는 떡은 새로운 용도로 봉헌되었으며, 축복의 잔이라고 칭하는 제3의 포도주잔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
떡과 포도주는 주님의 찢어진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니, 이런 것을 먹고 마심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열매에 대한 영적 유용성을 지적해 주는 것이며, 그 성례 전체는 그의 구속적 죽음에 대한 계속적인 기념인 것이다.
2. 표징과 인침으로서의 성찬
1)표징
다음은 성례와 마찬가지로 성찬은 하나님의 표징이다.
표징은 떡과 포도주의 유형적 요소일 뿐 아니라 그런 것을 먹고 마심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 표시(고전11:26)이며,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과 능력에 참여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 -->
또한 성찬은 참여하는 자의 고백행위인 것이다.
성취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을 고백하며 그들의 왕 되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고백하는 것이다.
2)인침
성찬은 표징만이 아니고 하나의 인침이다.
이것은 그 표시하는 사물에 부착되어 그 실현의 보증이 되는 것이다.
성찬은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에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서 보여 주신 그 위대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며, 언약의 모든 약속과 복음의 모든 풍요함이 그들의 것임을 확신시켜 주며, 더 나아가서는 구원의 축복이 실제 소유에 있어서 그들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3.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임재
1)로마 교회의 견해
로마 교회는 성찬에 있어서 육체적 의미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말한다.
`이는 내 몸이니라`라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해서 볼 때, 실상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한다.
) -->
그러나 이 견해는 몇 가지 반대 주장을 면치 못한다.
① 육신으로 제자들 앞에 서계신 예수께서 그가 그의 손에 자신의 살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할 수 없다.
② 성경은 떡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할만한 때에도 그것을 떡이라고 말했다.(고전10:17)
③ 떡과 포도주의 모양과 냄새와 맛인데 그것은 실제 살과 피라고 믿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것이다.
2)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떡과 포도주는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의 전 인격 즉 살과 피가 그 요소(떡과 포도주)들 속에 , 그 요소들 밑에, 그 요소들과 함께 임재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손에 떡을 가지셨을 때, 그가 자기 몸을 그것과 함께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는 내 살이니 " 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떡 받는 모든 자는 그가 신자이건 아니건 간에 살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 -->
이 견해는 로마 교회의 교리를 크게 발전시킨 것이 못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는 내 몸을 동반한다는 부당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3)쯔빙글리파의 견해
쯔빙글리(Zwingli)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지만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신앙 속에 영적으로 임재 한다고 주장한다.
쯔빙글리에 의하면 성찬은 주로 하나의 단순한 표징이나 상징 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념한다.
믿는 자들 편에서 하나의 고백 행위에 불과하다.
이 견해는 성찬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위해 행하시는 단순한 날인과 보증으로 간주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4)개혁파의 견해
칼빈은 중간적 입장을 취한다.
칼빈은 육체적 장소적 임재 대신에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가르친다.
칼빈은 쯔빙글리와는 달이 성례의 깊은 의미를 강조한다.
칼빈은 성찬을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보증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위해 행하시는 날인과 보증으로 보았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덕과 효과는 성력의 능력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임재하며 실제적으로 전달된다고 볼 수 있다.
4. 성찬과 그 참여자
성찬은 무조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제정될 것이 아니라 성찬의 영적 의미는 이해하는 신자들만을 위해서 효과 있는 것이다.
아직 분별할 수 있는 연령에 이르지 못하는 아이들은 성례에 참례함이 합당하지 못하다.
진실한 신자일지라도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영적 상태 하에 있게 될는지도 모르므로 자신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고전11:28~32).
불신자는 자연히 성찬에서 제외된다.
이 성례에서 받은 은혜는 말씀의 도구를 통해서 받은 은혜와 종류로 보아 다를 바 없다.
성례는 단순히 말씀의 효과와 이미 받은바 은혜의 분량에 부가된 것뿐이다.
이 성례의 영적 유익의 희열은 그 참여자의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다.
'<<< 조직 신학 >>> > - 교 회 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발점에서 조명해 본 교회론 (0) | 2020.02.25 |
---|---|
성경적 교회관 (0) | 2020.02.25 |
교회론 (0) | 2020.02.25 |
(김균진) 敎會論 1 (0) | 2020.02.25 |
(김균진) 敎會論 2 (0) | 2020.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