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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교회관

에반젤(복음) 2020. 2. 25. 13:31



성경적 교회관 
최낙재목사 
주님의 뜻을 따라 봉사해야 할 사람으로서 교회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거기에 들어가서 바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학교에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많이 배웠겠지만 그럴지라도 배운 결과가 확실히 이런곳이 교회다 하는 뚜렷한 지식이 있어야지 효과적으로 또 바르게 주님의 종으로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 중에서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따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요약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의 몸이라 또 성신의 전이라 또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혹은 새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 그런 이름으로 부른다. 진리의 기둥의 터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때는 그 교회의 통일성이라든지 그 유기성, 또 교회가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고 어떤 숙명적인 관계로 머리와 몸이라는 그런 관계로 연결되었다는 관계로 표시하는 것이고, 성신의 전 또는 하나님의 전이라고 할 때에는 교회의 거룩함을 가리킨다. 교회의 신성성 그리고 감히 누가 침범하지 못한다 하는 뜻이 있다. 
또 위에 있는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예루살렘이란 말로 표시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룹사이에 좌정하신 곳이다. 하는 뜻이 있다. 그래서 거기에서 자기 백성과 만나신다. 
도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할 때는 진리의 옹호자요. 진리를 전파하는 그런 임무가 있고 진리의 보호자라 그런뜻에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고전 12장 12~13절) 
여기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고 많은 지체가 모여서 몸을 이루는 것 같이 이것은 사람의 몸을 가리킨 것이다. 짐승의 몸도 그런 특징이 있지만 어느 사람의 몸을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몸은 하나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지만 그것이 한 몸을 이룬다. 그와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지체의 각 부분으로 삼아서 한 몸을 이루신다 하는 말씀이다. 
여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없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란 것은 없지만 교회가 그런 몸과 같다 하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러하니라’ 그랬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을 한다. 다른 곳에서 여러곳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는 곳이 있다. 여기서도 그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신다. 27절에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요. 각 부분이라” 고 분명히 애기했다. 
교회란 민족의 차별과 사유신분에 차별이 없이 누구나 믿는자는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고 서로간에 연합이 되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13절 “우리는 유대인이나...... 한 몸이 되었고:” 이것은 분명히 교회를 두고 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한 몸이 되었다. 그것은 교회를 두고 한 얘기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민족의 차별없이 종이나 자유자나 사회에서 어떤 신분의 차별이 없이 “너 한 성령으로 세례를 ....한 성령으로 마시게 하였느니라” 교회의 큰 특징을 들어서 여기 설명을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것에 대해서 이런 지체에 특별히 거기에 관심을 두고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여기 이 말씀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대로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한 이런 말을 우리의 일상생활 그리고 감각적인 말을 통해야 우리는 아는 것이니까 이 오갑을 통해서 흡수해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마신다’는 말을 사용했지만 여러분이 다른곳 성경에서 배운대로 성령을 어떻게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마시면 우리 몸에 들어와서 우리와 한 살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성령께서 우리몸에 들어와 계신다는 것을 섬세하게 표시한 말이다.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능력이 있고 뛰어나신 분이다. 
성령님은 그렇게 때문에 우리의 이해를 위해서 이런 감각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표시를 했지만, 그는 창조주시고 세계를 우리의 생명, 호흡을 다 주장하시는 분이다. 그런것을 성경 가운데서 뚜렷이 알기 때문에 이런 말을 사용하고 우리가 그것을 읽을때에도 결코 오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 구절만 가지고 본다면 무슨 물질에 비교할 것이다. 성경을 그렇게 이해할 수가 없다. 다른데서 충분히 가르치신대로 성신께서 아니면 이 세상이 이렇게 질서가 유지되고 우리가 제대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성신께서는 창조주시고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질서를 유지하셔서 우리를 그 안에 살게하신다. 일반 모든 문화를 다 그의 손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장성해 가는 모든 과정을 예수님의 모든 은혜를 적용 시키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형언할 수 없이 능력이 많으시고 지혜로우시고 그렇다,. 그분에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몸이 되었다. 그랬다. 그러면 성신의 세례의 증거는 무엇이냐?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할때는 특수한 부위의 사랑을 가리킨 것이다. 교회에 들어온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가. 그랬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사도가 하는 이야기다.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고 고린도전서 처음에 보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고전 1:2-3) 그 사람들에게 지금 하는 말씀이다. 우리에게는 성신의 증거가 있다. 성신의 세례를 우리가 받았다. 그런데 그 증거는 뭐냐하면 우리라는 데도 있는 것이고 몇절 앞에 12:3에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에 보면 분명히 이야기 했다. 예수를 주라고 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성신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 주를 주라고 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주다’ 몇마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하기에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아주 약해서 병상에 있는 사람도 한마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간단하지만 아무라도 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주시다’ 하는 말은 그것 정확하게 바로 알고서 누구든지 지나가다 ‘예수님은 주다’고 하면 구원을 받는다더라 하고 좋은 것이다 하면, 구원이 뭔지도 모르고 하여튼 좋은 것이다 하면 그러면 나도 해야겠다. ‘예수님은 주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신이 있다거나 구원을 받았다는 그 말은 아니다. 그래도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지 알고 그 의미대로 ‘예수님은 주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신의 세례를 받은거고 성신이 그 안에 계신것이다. 그 말이다. 
성신과 관계가 있어서 그 가르침과 그 영향하에서 ‘예수님은 주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다 하면 벌써 2000년전에 팔레스타인 땅에 오셔서 살고 가르치신 분이다. 그런데 그분이 주시었다가 아니고 ‘주시다’는 것이다. 지금 ‘그분이 주님이시다’ 주님이라 할때에는 많은 교훈이 담은 뜻이다. 누구를 가리켜서 주시라 할 때에는 나는 그의 명령에 따라서 순종하여 산다는 것이 같이 포함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누가 내 주이든 간에 땅속에 묻히신 사람을 주라고 할 사람은 없다. 어떠한 사람들에게 주시었다든지 훌륭한 선생님이었다는 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주시다’ 이야기 할때는 현재의 관계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지금 주님이시다. 그 말이다. 
‘주’는 큰 의사요 능력과 권세를 발휘하는 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재도 그렇고 그래서 나나 누가 되었든지 그와 주라는 관계를 가진 모든것이 그에게 그 영향세력에 복종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라 할 때에는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서서는 한 인물을 가리킨다. 분명히 이세상에서 사신분, 그분이 나의 주시다 할 때에는 이것은 보통 이야기가 아니다. 
얼마전에 이 세상에서 산 사람으로서 지금도 “주”에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그건 반드시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0년전에 이 땅위에 사시다가 지금도 살으신 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오직 예수 뿐이다. 거기에는 뭐가 또 포함되느냐 하면 그분이 그러면 땅 위에서 살다가 어떻게 되었는가 십자가에서 그 목숨을 거두었고 그런데도 다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분이 나의 주님이시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럼 보통분이 아니신데 죽음을 이기신 그런 분인데 그분이 무엇하러 땅에는 오셔서 예수란 이름을 가지셨느냐 ; 결국은 묻게 되는 것이고 해답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것도 없이 그냥 2,000년전에 세상에 태어나고 그분이 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신다. 그것이 이해가 안가는 것이다. 사람은 다 부모님에게 태어날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지만 예수님이 그랬으리라고 하면 이해가 잘안된다. 비범한 분ㅇ인데 보통분이 아닌데 지금도 살아계셔서 여기 주라고 할때는 나뿐 아니고 엡,빌에서 말할때에 ‘만물위에 뛰어나게 하셨다’ 
만물위의 주로 세우신 것이다. 그래서 나도 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만물중에 하나로 무엇때문에 오셨느냐 만물중에 하나로 태어나신 그것이 제일 시초냐? 그것이 이해가 안되는 것이다. 벌써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이전에도 살아계셨고, 그러면 왜 오셨느냐? 
거기에 거룩한 사연을 가지고 죄인을 구원하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서 활동하시고 가르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속죄를 이루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것이다. 최소한도로 이렇게 아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그 분이 나의 주님이시다 고백하면은 아주 이제 기초적인 것이다. 그게 복음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한 사람은 그는 성신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신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라는 것이다. 
아주 신비한 면을 거기 이야기 했다. 그래 그런 고백이라는 것이 간단하지만 세상 아무도 자기의 지혜로는 그런 고백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의 노력으로도 안되는 것이다. 애써서 그렇게 하면 좋다더라 하고서 자기의 똑똑한 정신으로서 그렇게 말할수 있느냐 절대로 그렇게 안된다. 오직 거듭나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생각하는 바가 아주 바꿔져야 한다. 변화되어야 한다. 큰 변화, 초자연적인 변화 거듭난 일을 하지 아니하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 성신의 세례라 할 때에는 그와같은 변화를 이야기 한다. 자기 지식에 있어서까지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되고 영혼의 기능이 그렇게 변화를 받는 것이다. 이 내용을 바꿔서 말하면 우리가 믿을때 성신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세례로서 이것을 표상을 하고 또 인을 쳐주는 것일 것이다. 그 사실을 두고 지금 고전 12장에서 말한다. 모든 문서에 도장을 찍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인을 쳤으면 이제 확정이 된다. 세례로서 그와같이 확정을 하는 것인데 그만큼 우리는 믿고서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결국 예수는 주시라 할 때에는 나에게 그마한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셨다. 살아나시는 큰 변화를 겪으시는데 그러고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도 그것 믿을 때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를 주시라고 전에 같으면 전혀 할 수가 없는데 믿고난 뒤에는 그렇게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아니라고 하면 도저히 수긍할수가 없는데 믿고난 뒤에는 그렇게 할 수가 있나는 말이다. 아니라고 하면 도저히 수긍할 수 없이 어떻게 아니야 하고 이제 말하게 된다. 
롬 6장 3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세례의 의미를 그렇게 표시했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큰 변화가 나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내가 연결이 된 것이다. 
롬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의 죽음이 단순히 죽음에 그친것이 아니고 내가 믿을 때에는 나도 그 죽음과 연합해서 나에게도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다. 예수에게 죽음이 왔을때 예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 것 같이 그와 비슷한 그런 변화가 나에게도 있는 것이고, 그가 부할할 때 아주 찬란한 몸을 영광스러운 몸을 입으셨다. 그와같이 나에게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롬 6장 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와같이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다. 
롬 6장 8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6장 9절 “만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아니라” 
결국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했다는 것은 그의 죽으심과 연합한 것이고 그의 살으심과 연합한 것인데 그런 사람에게는 또한 성신께서 그 안에 계신 것이다 성신께서 그 안에 계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모든 효과가 발생하게 하신다. 
예수의 신인 성신께서 우리안에 와서 우리와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는 것이다. 이게 신비한 연합을 가리킨다. 이것 없이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아무도 애기할 수가 없다. 이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믿을때에 성신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인데 그와 동시에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표상하는 것이 또한 세례이다. 세례를 받음으로서 이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다. 표시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표상하는 것이 또한 세례이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 사람이 교회의 정식으로 가입한 것을 여러분 잘 알 것이다. 믿음이란 것은 이와같이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이고 그의 몸인 교회와 연합을 시키는 것이고 그것을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표시하고 인치는 것이 세례이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 사람은 만천하에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고 교회에 연합이 되었다 하는 것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그것으로서 그 사실을 종결짓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아주 기본적인 큰사실이고 체계인데 여기에서 몇가지 축출해 낼수 있는 사실을 본다면, 사람이 성신으로 말미암아서 믿고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구원을 얻는 것이다 하는 사실을 거기에 뚜렷이 가르치고 있다. 로마 카톨릭계에서 말하는 계층이 있는 성직자들에 있어서 그들이 베푸는 성령을 통해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과 교통을 가진다. 그게 아니고 사람은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으면 직접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세때에 개혁자들이 크게 깨닫고 외친것이 아닌가? 복음을 들으면 사람은 즉시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고 하나님의 모든 복을 받고 또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 있는 것이다. 
어떤 성직계습이 있어야만 그들의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성신께서 큰 권세를 가지고 전권을 가지고 복음을 사용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그리스도와 연합을 시키신 것이다. 다른 어떤 인간적인 존재가 있어가지고 매개를 시킨것이 아니고 성신께서 전권을 가지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교회를 중요한 도구로 쓰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 교회가 전혀 없는 가운데서 성령님께서 그런일을 하신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교회를 사용하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중보의 역할을 한다든지 또는 교회에 가입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말할수는 없는 것이다. 그럴정도로 교회내에서 할 일을 못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주권을 가지고 누구든지 구원하고자하시면 복음을 듣게해서 혹은 때에 따라서는 복음없이도 하신 것이다. 복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돌글 믿고 순종하고 연합이 된다고 할 때에는 통상적인 말을 들어서 복음이란 것을 들어서 깨닫고 할수 그런 경우를 보통 사람은 통하는 방법이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지, 아주 갓난 아이라든지 또 도무지 깨닫기에 지력이 없는 사람들(정신이 흐릿해서 제대로 생각을 못하는 사람 등)그런 사람들은 그럼 어떻하나? 그런 사람들은 전혀 구원의 길이 없느냐? 그런 우리가 단정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틀림없이 다 구원하신다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할 지 모른다. 단정할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통상적으로 못한다는게 아주 분명하다 들어가서 깨달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서 믿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런 말이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몸에 질병이 있으니까 그 사람은 전혀 구원의 길이 없다고 단정 못하는 것이다. 
그런 왜 그러느냐 하면 성령께서 큰 권세를 가지고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 모르지만 바람이 지나갈때는 큰 일을 이루고 지나간다. 그와 같다고 했다. 성신으로 난자는 이와 같은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는 대과하지 못하고 사람구실을 못하고 그럴지 몰라도그러나 일단 생명이 들어가면 그것이 마침내 영원한 그 나라에서 아주 영원한 삶으로 영광스러운 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이 인간의 어떤 지혜로가 결정적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 강권을 쥐고 있는 것 같이 그렇게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고 성신께서 하실려면 다 하신다로 우리가 이해해야 그것이 뚜렷한 것이다. 사람이 이와같이 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인데 그러나 이와같이 하나님의 큰 능력과 순전히 은혜와 그러니까 거기에는 무슨 사람의 지혜라든지 뜻이 개입하지 않는다. 사람의 공로가 일체 배제된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사람이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것인데 이제 첫째 우리가 기억해야 될 진리이고 그러나 그와같이 연합이 된 사랑이다. 
사람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는 연합이 되었는데 아직 교회와는 연합이 안되었다든지,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모르겠다든지 혹은 그리스도에게 연합이 되었으니까 이제 할 일은 다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와 연합이 되면 좋고 안되어도 뭐 별로 아쉬울것이 없다든지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으면 반드시 그의 몸에 연합이 되는 것이고, 연합이 또한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구원은 받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구원에 이르는 그것은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람은 잘못하면 그렇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 점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는 것을 빼고 그것없이 그리스도에게만 연합되기만 결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그렇게 일하시기로 정하신 것이다. 교회에 연합된 일 없이 그리스도에게만 혹은 하나님에게만 연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 복음하면 보통 생각하기를 그 복음을 들어서 예수님을 알고 그와 연합되면 되는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서 그렇게 생각하고 말기가 참 쉬운데 그래서 교회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기가 쉽다. 이에 생각컨데 카톨릭의 불필요한 너무 과대한 정도로 너무 지나치게 교회를 강조한데 대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복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한 나머지 교회를 소홀히 해도 좋다는 생각을 아마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개혁자들은 결코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루터의 글을 읽어보아도 교회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쳤다. 칼빈도 마찬가지이도. 
교회를 그렇게 구차적으로 소홀히 생각한 것이 아니다. 카톨릭과 맞서서 교회를 개혁할 때에는 개혁교회란 것이다. 프로테스탄트가 교회로 대해 보자고 일어난 것이다. 물론 복음이 갈리었을때 복음을 현명하게 채우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교회를 개혁하자는 것이다. 개혁교회라 할 때는 주로 중요한 것이 교회를 개혁하자는 것이다. 교회론이 그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과제였다. 복음만 이야기 하고 교회는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주 거기에 집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복음을 이야기 하자면 거기에 교회는 어떤 곳이냐. 교회는 어떤 것이 바른 것이냐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주 거기에 집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복음을 이야기 하자면 거기에 교회는 어떤 곳이냐 교회는 어떤 것이 바른 것이냐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을 믿었으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동시에 그의 몸에 연결이 된다. 교회와를 연결이 안되고 그냥 그리스도에 연합되어서 복을 받고 구원을 얻겠다. 그건 자기 생각이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을 안세우셨는데 그런일이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만 반절만 에누리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인가 도대체 이해가 안가고 위험한 것이다. 큰 오류가운데 큰 유혹가운데 들어간 것이다. 깜깜한 가운데 교회가 그렇게 무시 당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를 빼놓고 구원이란걸 생각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겠는가?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내가 거룩해져서 그리스도를 닮아서 구원을 받는가? 결코 자기가 교회와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이지 그걸 떠나서 개인적으로 구원받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법이 있나를 성경을 뚜려지게 보아도 반드시 구원을 받았으면 그리스도와 연합된 동시에 얼마 있다가도 아닌 동시에 그의 몸인 교회와 연합을 시키는 것이다. 거기에서 구원이 발견되는 것이지 떠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우리가 여러가지로 알수 있지만 한가지 아주 잘 알수 있는 방법이 있다. 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큰죄에서 죄책에 용서함을 받고 또한 죄의 씻음을 받아 거룩하게 하시는데 그건 보통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해서 참 괴로운 죄를 떨쳐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감사하고 산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런 구원받는 사람이 살자면 그것이 처음에 그 복음을 받았을 때 그 감격과 그 좋은것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얼마지나면 몸이 법이 오고, 자기 몸으로서 죄를 짓고 그런 괴로움이 따라온다. 하나님게서 만물을 아끼시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과 함께 만물을 다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고생을 하는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큰 고난을 맛보아 되느냐? 부활이란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면서 이 모든것을 잘 극복하고 세상 사람들이 조롱이나 그런것들을 다 넘어서도록 그런것에 대해서 괴로움을 받지 않도록 다 했는데 그러나 나는 왜 요즘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왜 부활을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지 않으시는가?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셨으니까 죽음으로 말미암아 고생하라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직은 죽어가고 고생한다. 초상집에 가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슬퍼하지 아니하고 소망을 가지라고 위로하지만 그러나 역시 초상집에 가면 슬픈것은 사실이다. 왜 이렇게 슬퍼해야 하느냐? 그런데 언제 부활한 것을 소망하는가? 예수그리스도 재림시 그때 어떻게 부활하는가? 아무 차별이 없이 동시에 부활시킨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세우신 것이다. 교회구원의 완성이 없이 나 혼자만 구원의 완성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 그 모습에서 우리는 개인주의적인 것을 완전히 소제당할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아니하고서 다른데 가서 무슨 철학을 해서 아니면 무슨 수양을 해서 이 개인주의를 뽑을수 있는줄 아는가? 이 세상에는 양극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여러가지 혼란과 괴로움을 받고 있는데 사람들이 자꾸 개인주의로 빠져서 외칠수도 없고 세상 경쟁 사이로 들어가는데 그렇게 되거나 그게 못쓰겠으니까 이걸같이 위해서 타일르거나 교육하는 것이 한도가 잊지 그것이 안될 때에는 이제 전체주의가 나올 것이다. 전체주의가 나와서 강제적으로라도 사람들 거짓된 자유 방종에서 규제를 해서라도 사회를 통치한다는 그 말이다. 그러니까 개인주의로 가다가 또 극단적인 전체주의로 나갔다가 이렇게 역사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것 아닌가. 이제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니까 중간을 시도한 사회도 있지만, 경험이란 것은 그렇다, 그렇게 가만히 놔 두면 극단으로 흐르는 경험이 타락한 사람들에게는 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발달했다는 이 20세기에 와서 독일이나 일본같은 정치궁금주의가 문명이 발달되었다. 20세기에 그런 악한 그런 정치체계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악한 경향이 결국 하나님의 은혜안에서만 고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지 않았을때에 옛 사람이었을때 그 개인주의적인 생각 그것이 하나님의 구권을 받는 과정에서 다 제거되고 고침을 받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뒤에도 개인주의로 살려고 한다거나..........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 전체를 구원하신 가운데서 또한 우리 하나 하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성하셨다. 결코 하나님께서 또한 전체주의를 지지하고 주장하는 분은 결코 아니다. 양이 백마리가 있을지라도 한마리를 잃어버리면 한마리를 귀하게 생각해서 아흔아홉마리 양을 놔두고 그걸 찾도록 찾아 다니시는 분이다. 무슨일을 할 때 획일적으로 일을 처리해 버리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께는 말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시고 그것 살리시고 이해하시고 우리를 각각 다르게 같은 사람이지만 다 다르게 일로 모양이 다 다른것과 같이 특성들이 다 다르게 지으시는 그분이기 때문에 또 다스리는 면에 있어서도 구원하시는 면에 있어서도 각각 다르게 우리를 지도하셔서 개별적으로 또한 사랑을 다 베푸신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을 때는 반드시 그의 몸인 교회와 연합이 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 은혜를 베푸셔서 그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은혜를 받도록 하신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통해가지고 그건 신비주의에서나 있는 것이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은혜받을 길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교회가 망하면 나는 어디 수도원에나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아야겠다 하는 그 따위 생각을 하는 것이 벌써 틀린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하신 모든 일들을 보면 결코 그런 방식으로 하시지 아니한다. 
교회에 한 지체로서 은혜를 받고 자라가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확실히 배워야 할 진리가 뭐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이 큰 은혜인데, 사람들이 왜 불행한 가운데 있느냐 죄의 큰 결과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다.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이 그들이 살았다 하지만 죽어있는 큰 무서운 현실인데....... 그런데서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생명되신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이 우리에게 그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으로 그친것이 아니고 그의 몸인 교회와 연결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는 말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로운 사실이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자는 반드시 세례를 받고 교회에 가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꼭 세례받고 교회에 가입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으면 그 즉시 하나님의 교회에 가입이 되어 있다는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어느 교회에 가서 등록을 하고 절차를 밟아서 세례를 받고 그래서 가입을 하고 그런 것을 지금 이야기 한 것이 아니다. 복음을 들으면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고 동시에 반드시 그의 몸인 교회에 연합이 되는 것이다. 하는 말은 그 이전의 얘기다. 이미 하나님께서 해 주신다. 내 의사 여부가 상관이 없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뚜렷이 가르친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우리가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가입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차후의 문제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 이전에 우리는 연합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우리가 안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니까 성신의 세례를 받았으면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있으면 당연히 자기는 그리스도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에 속한 징표로서 물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신의 세례를 받았으면 그 증거로서 물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보이는 교회 안에서도 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것 아닌가? 교회에 가입을 안하면 누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는지 누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세례를 받고 어느 교회에 정식으로 가입할 때에 비로소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아 저 사람도 우리와 함께 한 지체가 되었구나 하고 알고 자기도 안다. 또 알고 사회를 이루어서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가 이 당에서 받을 분이고 살 때에는 아주 필요한 일이고 아주 긴요한 일이다. 그러지 아니하면 누가 한 형제이고 누가 같은 지체인지 알 수 없다. 성경에서는 한 지체를 이룬것은 뜻이 있어서 이룬것인데 그렇게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살도록 우리가 그리스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떨어져서는 살 수 없듯이 성도와 긴밀한 관계를 서로간에 누리고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만들어 주셨는데 그런 뚜렷한 표가 없으면 누가 지체인지 서로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관계를 가질수가 없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그러므로 교회에 가입이 되고 그러므로서 새사람으로서의 생활을 거기서 시작하고 성도의 교제가 거기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시편 1편을 꼭 보면 복있는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복있는자는 왜 복이 있느냐 그 하는 모든 행사가 형통한다. 잘된다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또한가지 우리가 놓치기 쉬운 중요한 사실을 뭐냐 하면 마지막에 가보면 의인의 회중에 들어간다는 것을 발견한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복있는 사람이 의인의 회중에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알수 있다. 거기 복있는 사람이 의인의 회중에 들어간다는 말은 없지만 악인과 의인 즉 복있는 사람을 대조해서 기술해 놓음으로서 악인을 묘사한것은 의인에게는 해당이 안되고 복있는 사람을 묘사한 것은 악인은 거기에 전혀 참여할 수 없는 것으로서 대조시켰다. 그래서 거기에서 우리가 말하지 아니한 것도 추측할 수 있는데 거기보면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그래서 참 불행하다 하는걸 가르치는데 복있는 사람은 결국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는것은 우리가 배우게 된다. 의인의 회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큰 영광이고 큰 복이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이 의인의 회중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의인이라 할 때에는 물론 예수와 같이 한번도 죄를 짓지 아니한 그런 분을 말한다. 그러나 노아가 의인이라든지 또한 당대에 의인이라 그런 말은 죄의 흠이 초점도 없다는 그런뜻은 아니다. 그가 땀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존경하고 죄인일지라도 회개하여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산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의인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시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다. 그와같이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그리스도에 속하게 되었으면 이 교회에 세례를 받고 가입을 하는 것이고 그것도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복된 의인들의 회중에 성도중의 하나도 들어가는 것이 다 그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받고 교회에 가입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의무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키셨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해야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정상적인 생활인이라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의무인 동시에 말할수 없는 복인 것이다. 교회가운데 연합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복이라는 것이다. 눈동자같이 아끼시고 귀중하게 여기시는 그 성도들의 무리가운데 내가 참여한다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고 복이라는 것이다. 그런것을 볼 때에 세례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새 생활, 영생이 이땅위에 발휘되어서 나타나는 생활의 시발점이 된다.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사회에 들어가 한 일원으로 거기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새 나라의한 시민으로서 거기서 살아간다. 그렇게 생각할 때 예수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일이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참 복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해도 볼 수 있고 햇빛도 볼수 있고, 안 태어났으면 도저히 이 세상을 보거나 누리거나 할 수 없는데 그러나 이것은 거기에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러나 어느 가정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사람에게는 또한 말할 수 없는 복이다. 어느 고아원에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자 물론 복이다. 세상에 안 태어난것 보다도 그러나 가정에 태어난 것과 비교해 보라. 비교가 안된다. 그래서 고아원에서 자란 어떤 사람들은 비관하면 내가 왜 태어났는가 하는 심정까지 가지게 된다. 거기에 비해서 가정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사회에 속해서 내가 사느냐 하는 것이 사람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개인으로 구원을 받아서 그런 복을 누린다든지, 생각할 수도 없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하고 하나니므이 자녀들로서 된 이 거룩한 이 모임에 자기가 태어나서 같은 일원으로 태어나서 거기에서 거룩한 생활을 해 가는 것하고는 배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세례란 것은 그런 생활의 시발점으로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세례를 아무나 준 것이 아니고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주는 것인데 그 고백을 들어야 한다. 교회도 한 사람을 맞이 한다는 것은 큰 기쁜 일이고 하나님의 복이다. 말할 필요도 없다.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면 가정 모두가 기뻐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이 사람을 우리와 함께 하게 하셨다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울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온 교회가 세례를 줄 때에는 기쁨을 가지는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아무나 길가는 사람을 잡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고백을 듣고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알아보고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내리시고 변화를 시켜놓은 것을 보고서 환영해서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할 일은 저 사람에게 변화가 있느냐 그것만 보면 된다. 사람이 막 믿고 변화를 받았을때 그것으로 완성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지식이라든지 그 사람의 성품에 있어서 완전한 것을 찾는것은 결코 아니다. 죄에 대해서도 찾을수가 있고 지식에 있어서도 모자람이 많이 있을수 있다. 그럴지라도 그에게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세례문답을 할 때에는 그런 것을 묻는다. 아까 우리가 다 이야기 했다. 적어도 성신이 그 안에 계시냐? 하는 것은 무엇이느냐 하면 예수를 주라고 하느냐 그걸 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의 이름이 몇명이나 이들의 이름을 대어보아라 그런것 알아 가지고 무엇하겠는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재주있는 사람만이 대답을 한다고 한들 무엇하리 재주있는 사람만 모으는 곳이 아니다. 
교회란 이 세상에서 권우있는 자를 모으고 지위가 놓은 사람을 모아서 자 봐라 우리도 이만하다 그런걸 과시할려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나 민족이나 아무 차별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라고 시인하느냐 새 생명을 받아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기초가 되어 있느냐 그걸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중시미을 보시는 것이지 사람은 중심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하나님께서부탁하신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넌 내에서 그걸 알아보고 성실하게 거기에 따라서 하라 그것이지 하나님처럼 꿰뚫어 보는 마음을 가지고 판단하라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그 사람이 정직하게 고백을 하면 그것으로서 충분히 알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는 실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고의적으로 어떤 많은 사람들을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사람은 실수가 있으니까 아무렇게도 한다 그건 실신한 종의 태도는 아니다. 자기가 알 수 있는 한 정직하게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비밀 경찰을 두어서 그 사람과 고백과 동일한 가를 일일히 찾으라는 것은 아니다. 그냥 정직하게 단순하게 물어서 고백하면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실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 사람이 착오가 날 수가 있다. 그렇기 대문에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한 교회이지만 그런 용어가 생긴 것이다. 불가불 그건 그렇다. 하나님게서 그걸 다 인정하신다. 그래서 사람은 분명히 고백을 했으니까 세례를 주고 무슨 사심이 없이 정당하게 했지만 고백하는 사람 자체도 자기가 믿는줄 알았는데 나중에 가면 안 믿고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듣는 사람도 판든을 잘못하고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에게 거듭난 징표로 세례를 주었다. 겉으로만..... 
그런 묘한 것이 발생해서 이 거룩한 사회에 거룩하게 보존되지 못하고 흐린 요소들이 들어온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의 교회와 사람이 보게되는 그 교회가 어느정도 원이 엇갈리듯이 그러나 공통되는 그러한 교회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일을 맡겨서 하신 관례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고 우리로서는 정직하게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데까지는 알아서 세례를 주고 정당한 관계를 가지고 교회에서 살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 뜻을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것이다. 그렇기 대문에 묻는 내용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다. 묻는 내용을 이런 뜻을 따라서 정직하게 작성을 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누구신가와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와 그렇게 해서 거기에 나는 대답대로 해서 정당하게 하는것이 좋지 세례받으러 오는 사람이 대개 어느 학교나 기관에서 시험보는것 같이 통과를 시키면, 인심서 주는 것 같이 그렇게 생각할 아무 이유가 없다. 
이건 의사가 진단하는 것과 비슷하다. 의사가 그 사람에게 병이 있는데도 없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이 아니고 병이 없는데도 조심하게 하기 위해서 그냥 병이 있다든지 그랬다가는 큰일일 것이고, 정직하게 판단하는 대로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세례를 줄 수 없읍니다. 하면 되는 것이다. 다른 시험하고는 다르다. 시험이 아니다. 고백을 하면 그런 고백 가지고는 안된다든지 그렇게 판단만 하면 된다. 아니면 옳다든지 그렇게만 해 주면 된다. 그것이 선심쓰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말하게 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사심없이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걸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사람 한사람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중요하기 때문에 한사람 한사람을 물어 가지고 그 대답을 듣고 좀 귀찮다 이 바쁜 세상에 여러 사람을 상대해야 하고, 또 특별히 많은 수를 갖고 가입을 시키면 그만큼 일하는 활동의 실적이 나타나서 성공의 표준도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냥 한사람 한사람 묻고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으니까 그런 생각에서 그런지 몰라도 무슨 단체 세례같은 것이 있는데 거참 성경 말씀에는 없는 일이다. 다른것 보지 말고 고백을 보고 그 영광스러운 교회에 가입을 시키라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살게하라 하는 것이 주님의 분부 아닌가? 최소한도 그걸 잘 지킬려고 해야하는 것이다. 어떻게 세례를 단체 세례를 주는가? 이것이 전혀 없었는데 70년대에 와서 생겼는지. 교회에서는 그런일이 없다. 군대에서나 혹은 학교에서 그런일이 있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책임이 없다 그럴 수 있겠는가? 이게 교회일이 아니면 결코 학교나 군인도 교회에 와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그 세례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어떻게 해서 그 영향이 가서 그 다른 싱각이 유혹되어가지고서 그런데서 이렇게 해도 될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그걸 엄격히 생각해서 그걸 신중히 한다면 감히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는가? 공연히 쓸데없는 일을 자기들이 그렇게 할려고 하겠는가? 공연히 쓸데없는 일은 자기들이 그렇게 할려고 하겠는가/ 분명히 이것은 교회에서 그런 형식으로는 안 나왔지만 세례에 대하여 소홀히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취급하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주님의 뜻대로 거행하고 교회르르 거룩하게 유지할려고 노력했다면 적어도 그런 현상은 없었을 것이다. 이게 거룩한 모임에 들어오는 관문인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사회와 교회와 분간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교회가 될 수 없다. 세상이지 서로 혼탁하게 되어 버린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통일이 있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교회의 큰 성격이 있는데, 무엇이 교회이겠는가. 그렇게 되면 세례를 그렇게 무더기로 해 버리면 한사람 한사람 신중하게 해야 하는데 무더기로 하면 교회의 성격이 유지되겠는가 그런 현상들이 이땅위에 있다는 것을 알라, 무서운 현실이다. 여러분이 가서 봉사하려고 하는 교회가 그런 상태에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왜 이런 괴이한 일이 생겼는가? 이런일이 생기면 결국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일에 대한 어떤 대책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가? 그 근본적인 것을 알아서 거기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해결할 것이 아닌가? 그것이 없으면 그런 세례는 계속해서 갈 것이 아닌가? 그리고서 교회를 세울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결코 이룰수가 없다. 무슨 직업 종교는 될 수 있다. 성공했다는 말도 들을 수 있다. 무얼 성공이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많이 모이게 하고 돈만이 나오게 해서 무슨 사업을 많이 하고 그런것인지는 몰라도.... 
그런 무슨 사업가가 될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종은 될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그렇게 되니까 교회가 교회의 진실된 모습을 찾지를 못하고 잃어버린 것이다. 교회란 몸이라 했을때에는 몸뚱이 모양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통일된 의사를 가지고 활동하는 그런 생명체를 가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경 엡 2:15에 보면 한 새사람을 지었다 그랬지요? 그건 어떠한 사람이 믿어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새사람이지만 엡에서 말한것은 교회를 가리켜서 한 새사람이라 한 것이다. 거기 앞에 보면 이방인과 유대인을 합해 가지고 한 새사람을 만들었다 그랬다. 보편의 교회를 가리키지 않고 다른 것을 가리켜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4장에서도 보면 우리가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른다. 어떤 한 사람이 장성한데까지 이르는 것을 애기했다. 물론 우리 개개인이 다 그리스도를 믿는데서 충실해 가지고 진리를 바로 알고 그래서 어른스러운 그리스도의 인걱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엡 4:11~12에서 이야기 한 것은 개인의 성장함을 애기한 것이 아니다. 물론 개인이 성공하여야 교회도 성장하겠지만 깊이 관련이 되어 있지만 여기서 걱정 애기한 것은 교회의 성장을 애기한 것이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나 교사를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랬다. 
그러면 교회가 이와같이 하나의 유기체로서 하나님의 인격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도 애기하고 동서양을 물론하고 흩어져 있는 옛날도 지금도 있는 이 보편의 교회를 두고도 애기한다. 하나님의 교회란 이런 것이다 하는걸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나의 인격체로 움직일만큼 되어야 한다. 
많은 지체가 모였지만 한 몸을 이루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각층에서 모여 오지만 이것이 한 유기체 한 인격체를 이루어서 살아가도록 그렇게 사는것이 교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개인이 그렇지 않고는 안된다. 각 개인이 그리스도의 풍성을 닮고 그리스도를 알고 자기의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개인적으로 살 때에도 그리스도의 어떤 빛을 나타내는 그런 인격을 자기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성신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이런 . 그런이 다 하나의 열매이다. 그런것이 서로 연관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있는데 화평은 없고 화평은 있는데 사랑은 없다든지 그건 있을수가 없다. 다 연결된 하나의 성품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런것이 다 연결된 그런 성품이 드러나는 생활을 해야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지체들이 다 모여서 하나의 공동의 생활을 할 때에는 거기에 또한 이들이 다 통일이 되어서 하나의 인격을 나타낸다. 성신의 열매를 맺을 때는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나타나서 아 저 사람이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다 하는 걸 그것이 분명할 때에는 다른 사람도 안다. 물론 잘못알때에도 더러 있겠지만 .. 그러나 알게 된다. 속일수가 없다. 
처음부터 당신이 예수믿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다 느낌다 그런데 이 여러지체가 모여 함께 살때에는 특별히 거기 사랑과 온유와 평안의 매는 줄이다하는 것이 엡 4장에 있다. 
이런 성신의 열매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모일때에는 매는 줄이 되어서 여러 사람이 모였지만 하나로 뭉쳐지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흩어지지 않고.....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이지만 통일된 하나의 단체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의 인격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세례를 받고 교회에 가입은 해서 교회에 생활을 하게 되면 이러한 것을 목표로 하고 가입을 하는 것이고 가입한 결과는 그런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 어두운 세상이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빛은 보게되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했다. 거기에 그런 아름다운 성품이 있고 참 지식이 있고, 엡 4장에서 강조한 것이 이 큰 두가지가 아닌가.? 
사랑과 온유와 평안이 매는 줄. 그런 성품이 있어서 통일되는 것이다 하는 것이고, 또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고 그랬다. 교회내에 이와같이 사랑과 진리가 확고하게 있어야 교회로서 서는 것이고 세상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를 소홀히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그냥 교회에 쑥 들어오면 교회가 결코 그런 통일을 이룰 수 없는거고 아주 혼탁하게 되어버려서 세상과 교회가 구별이 없게 된다. 아무리 이론으로는 교회와 세상이 구별이 된다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무슨 현대 신학자들이 나와 가지고 세속화 해가지고 무슨 교회와 세상을 구별없이 만드는 것이 그런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런것은 크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이론으로 반박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실재로 교회가 세상처럼 되어버리면 겉잡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 자체가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그렇게 되어 버린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고치겠는가? 그거야 말로 무서운 일이다. 
하나님의 일이 아주 망가뜨려지게 되는 일이다. 겉잡을 수 없이 그 교회를 버리고 다시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세상이 되어버렸는데 그것 가지고 어떻게 하겠는가. 그만큼 이 세례란 것은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교회가 거룩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 변화를 받는 사람이 가입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때에는 세례가 그 관문으로서 중요한데 또 중요한 것은 이명이다. 이명, 이 교회에서 저쪽교회로 옮아갈때에 이를 잘 돌보지 아니하면 큰 피해를 보는 것이다. 이명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누가 왔는지, 누가 갈른지, 왜 갔는지? 왜 오는지, 거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몸이란 것은 그렇게 취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주 조그마한 지체라 할지라도 평소에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지체라 할지라도 새끼 손가락이 떨어져 보아라 얼마나 불편한가? 엄지발가락 지금껏 지나고 살면서 전혀 거기서 관심을 안 가진 사람들이 허다할 것이다. 엄지발가락 잘라지면 어떻게 될까? 당장 큰 불편이 생길 것이다. 
교인 하나하나가 이 지체임을 알아야 한다. 왔으면 왜 왔는지 알아야 한다. 왔으면 왜 왔는지 알아야 될 것 아닌가? 떠났으면 왜 떠났는지 알아야 할 것이고 다른 교회도 마찬가지 이니까 그곳에서 잘 생활하면 안심하고 만일 위험한 곳에 갔으면 거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 어디 갔든지 아무 관심이 없다. 자기 사업과는 상관이 없으니까 그렇게 교회를 자기 사업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 
이게 하나님의 일이다 생각하면 한명 가입시키기가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정성이 들어 갔으니까 그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다. 돌보고 언제까지 나의 교회에 형제이냐 하면 그쪽 교회에서 받았다고 통지가 있을 때까지는 나의 책임하에 있는 것이다. 행정상으로는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그 교인도 다른 교회로 가서 접수될 때 까지는 먼저 있었던 교회의 관활을 받고 그래야 할 것이다. 
엡 4:25에 보면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말하는 것도 참 말을 하라는 것이다. 이건 세상에 사는 도덕이다. 교회뿐만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교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친 말이다. 특별히 교회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여기서 가르친다. ‘우리가 지체가 돔이니라’ 로 알수 있다. 그래서 다른 믿는 사람하고 사귈때에는 정직을 두고 사귀어야 한다. 왜 그러느냐 하면 서로 지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지체끼리 속이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일수는 있지만 손이 발을 속일수는 있겠는가. 그건 몸이 아니란 말이지 한 지체가 되었다면 그런일은 없는 것이다. 괴물이라면 몰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정직히 살아라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도 한다 만약 세상사람이 거짓말을 하지 말라 정직히 행하라 - 너희는 한 지체니라 - 그러면 앞에 말은 듣겠는데 한 지체라서........하면서 뒤에 말은 못 알아듣고 웃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한 지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서로 대하는 것이 세상 원리하고는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살아갈 때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대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분명히 사람이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과 같이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별한 관계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 떠난다든지 들어온다는 것에 대해서 오는가 보다 가는가 보다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만일 10사람 이상이 교회를 떠났다면 아이구 큰일났다 하고 무슨 대책을 세울지 모르지만. 그런데 10사람 이상이 들어왔다. 그러면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도 나아질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렇게 대할수 있는 것인가. 지체를 대할때 그렇지 않은 것이다. 떠난 사람이 귀중하다. 어디로 갔는가. 맞이하는 사람도 귀중하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 그걸 무슨 상품처럼 무슨 실적처럼 통계로만 해서는 안된다. 관심이 없다. 생각해 보라.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겠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리라 하셨다. 
다른 교회에서 그 사람이 매는 일이 있어서 딴 교회로 갔다면 그게 옳은 일일까? 언제나 해결될 수 있을가? 
땅에서는 자기 생각이 됐을지 몰라도 하늘에서는 매이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도 매였으면 땅에서도 매였다는 것을 그 사람에게 알려 주어야 그 사람이 회개할 기회가 있는 것이지 하늘에서는 매였는데 땅에서는 괜찮다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사람은 멸망하게 된다. 회개를 안했다. 그럼 땅에서의 생활은 다 헛되게 된다. 끄렇게 무서운 현상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허다하게 일어난다. 아무리 큰 교회를 지어놓고도 뻔뻔하게 여기만 교회냐 하고 딴 교회로 간다. 딴데서는 물어보지도 않고 왜 이 사람이 오게 되었는가를 물어 보지도 않고 하나 불었으니까 좋다 하는 형식으로. 또 자기 교회로 끌어가려고 까지 하는 세상인데. 
교회는 어디서 한번 정당하게 하나님 말씀 위에서 그 사람이 빗글러서 안된다고 하고 매었으면 매는 것이다. 악의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도 않은데 하나님 말씀을 살되지도 않고 그냥 함부로 그 사람을 매장시키려고 했다면 하늘에서 안 매이니가. 그런 것이야 아니지만 분명히 그 사람이 진리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으면 회개를 해야지 그렇지도 않고 잘 평가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있을때는 그런것을 잘 살펴서 하나님 앞에서 받들어야지 그러지도 않을 바에야 땅에 있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땅에 있을 구실이 전혀 없는 것이다. 교회는 웅대하게 크게 짓고 많은 사람이 올지라도 교회의 구실을 못하면 교회가 아니지 무엇이겠는가? 동양 최대의 교회당을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칭찬받을 일을 했다교ㅗ 할 수 있겠는가? 교회를 세우는 일은 결코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좋은 교회를 세우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그 일에 충실히 해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교회 세우는 일에 참여를 해야되는 것이다. 갈대도 그렇고 한 사람이 들어 왔으면 그 사람을 지체로서 귀하게 맞이해야 할 것이고 들어온 그 사람 자신도 자기가 지체 의식을 가지고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엡 4:16에 보면 ‘그에게 온 몸이.......스스로 세우느니라’ 
그 몸이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결이 되었는데 은혜를 어떻게 해서 내리느냐 하면 각마디를 통해서 도움이 된다. 그렇기 대문에 서로간에 마디로서 잘 알아야 서로 연결이 되어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것이다. 
저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이 한 지체다 하는 것을 알고 자기도 표명을 하고 서로간에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표명하지 아니하면 서로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이게 참 중요하다. 머리에서 물론 은혜가 오는데 지체가 서로 연결이 되어서 도움이 오고간다. 그래서 가입하는 자는 자기가 지체라는 것을 의식하고 다른 지체와 연락하고 서로 사랑하는 그런 마음의 준비를 가지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야지 예수와 연합하였으면 된다. 그것 가지고는 아주 불충분하다. 예수와 연결되었으면 되었지 교회가 연합하면 시끄럽고 서로 마음을 헤아려 되고 인간 냄새가 나는 그래서 귀찮고도 직분을 맡기기도 하고 돈을 내리고도 해서 귀찮다 하고 교회에 가입을 하지 않겠다 하는 그런 일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또 잘못 생각하면 난 무형교회에 속했다. 난 유형교회와는 상관하지 않겠다. 조금 어디서 신학용어를 들어가지고 그렇게 빠져갈려고 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조금 안다는 것이 참으로 큰 병이 된 것이다. 유형교회를 그렇게 무시하면서 어떻게 무형교회에 속할 수 있는지 결코 유형교회를 무시하고 무형교회가 존재하라고 유형교회를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유형교회를 떠나서 우리가 어떻게 무형교회와 연결될 재주가 없는 것이다. 누구를 통해서 그 도움을 주고받고 하겠는가. 이 교회란 하나님께서 부족한 죄인들을 다 불러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거룩하게 되도록 지으신 참 은혜로운 기관이다. 복이 사람들에게 임할 그런 곳으로 세운 곳이다. 죄인들을 불러서 하는 과정에 있기 대문에 아직도 여러가지 불이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여기에서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이다. 이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그렇게 영광스러운 일이고 거기서 하나님의 일이 잃어난다. 이 유형교회를 떠나서 따로 공중에 무형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판단은 하나니믜 판단과 같이 정확하지는 못해서 유형교회란 말을 쓰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그것을 나눠 가지고 생각한다는 것이 너무나 무모한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단체이다. 성신께서 이 일을 위해서 우리안에 와 계신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합한 관계로 거룩해야 하고 또 죄사함과 칭의를 받을 수 있는 곳이고 그런 거룩한 곳에서 새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곳이다. 거기서 생의 새원칙을 배우고 새힘으로서 거룩한 길은 걸어나가는 것이다. 성신께서 오셔서 이런 모든일을 행하시고 거기에서 말씀이 전파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기서 지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큰 명령 그걸 지킨다 하고서 선교사가 되겠다 그리고 복음을 하겠다 하는 것은 참 좋은데 그것을 부분적으로 이해하면 나중에 큰 실망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가서 모든 족속으로 내 제자를 삼아서 세례를 주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행하게 하라 그랬다. 그것이 대 명령의 말씀이다. 
내가 분부한 모든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가 여기 적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복음만 전하면 다 한 것 같이 어떻게 죄살함을 받고 천국에 간다든지 그것만 이야기하면 다한것 같이 땅끝까지 가서 그것을 전할려고 한다 그 말이다. 그걸 전했으면 반드시 그 사람이 새 사람으로서 어떻게 사는가 ‘ 내가 분부한 모든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 했는데 그것은 무시해도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같이 생각해서 교회와는 상관이 없이 어디 달려가서 복음만 전할려고 한다. 성경은 그렇지 않았다. 반드시 전했으면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그렇게 해야만 자기 할 일을 한 것으로 알지 교회는 어떻게 부패하고 그래도 선교사와는 상관이 없는것 같이 생각한다. 자기를 파송하는 교회가 세상이 되어온 자기는 가서 자기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이 되겠는가? 그런 사람을 볼때 무엇이 생각나느냐 하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할대 너희가... 
거룩한 백성으로 세워 나가는 것이다. 그런 교회가 엄연히 있고 교회에서 나가서 또 그런 교회를 세우고 그래서 연결시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지 거룩한 교회에 대한 생각이 전연없이 어디가서 무엇하겠다는 것인가. 출발부터 그것을 생각해야 된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하면 사람을 출발부터 다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기가 나가서 일하려는 그 목표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주님의 종으로서 나아가서 일을 할려면 주님이 분부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아 거기에 따라서 해야할 것 아닌가. 
전연 거기에 대한 준비가 없이 저 저기 원주가 갔다 오너라 예 갔다 오겠습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원주에 갔다 왔다. 어디 갔다 왔느냐? 원주에 갔다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인의 뜻을 이룰수 있겠는가? 야! 이놈아 내가 원주에 보낼때는 무슨뜻이 있어서 보낸게 아니나 무얼 하라고 원주에 보낸지 그것을 알야야 할 것 아니냐 당장에 꾸짖을 것이다. 적어도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님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시려는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잘 알아야 이 험악한 세상 가운데서 그 주님을 거스리는 세상에서 잘 해쳐 나갈 것이다. 교회일 주님의 일 세상 사람들이 눈에게 보고 있다. 이럴때 착착 잘 해 나가야지 준비없이 한다는게 참 가소로운 일이 될 것이다. 
교회일이란 얼마나 귀중한지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그리소 아브라함에게 복의 약속을 하신 것이다. 그 사실을 놓고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기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창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느라고 부지런히 하고 한동안 일이 잘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탑을 다 무너뜨리신다. 그리고서 많은 사람들이 흩어져서 살때 아브라함을 주셨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을 주신 사실은 개인적으로 아브라함을 취해서 복을 주시겠다 하는 일로만 생각할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개인적이다. 한 사람에게 약속한 일인데.. 
네 이름이 창대케 한다는 것이 그 사람을 아주 사랑해서 그렇게 크게 한다 하는 것을 우리가 인상을 받기 쉬운데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한 내용을 우리가 잘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그랬다. 결국 교회를 향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생각하며 생각하신바로 그걸 마침내 수세기를 거쳐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 변치 아니하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세상의 이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시고 지금 세워 나가시는 것이다.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이 교회를 세우셨다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교회의 건립이란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고 하나님의 유일하고 귀중한 일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함이라’ 하는 말씀이 에베소서 1장에 있는데 결국 교회를 두고 하는 이야기다. 교회로 말미암아 교회를 통해서 마침내 그것을 이루시겠다. 우주적인 일이다. 전 세계에 미치는 일이다. 바벨탑을 무너뜨리실때에는 이유없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그 기초에 인생의 목표를 잃고 자기들의 이름을 낼려고 그랬고, 하나님을 떠나서 바벨탑을 쌓은 그 기초 그 큰 일의 기초가 불의하다.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으로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성을 쌓기를 시작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무너뜨려 버리셨다. 그리고서 이 교회를 세우는 일을 미묘한데서부터 한 사람을 붙들고 약속을 하고 그 사람을 키우시고, 보호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그런 일을 그 다음에는 그 후손이 많게 되었을대 모세를 통해서 법을 내리시고 여러가지 반역들을 다 참으시면서 그들을 이끌고 자꾸자꾸 향상시켜 나가신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걸친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바벨탑이 세계적인 규모로 쌓아진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이 교회도 세계적인 규모의 것이다. 죄를 제거하시고 거룩한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세상과 아주 구별이 있는 것이다. 아주 새로운 일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성격을 알고 그 주님의 뜻을 아주 확고히 달아서 그것을 내가 깨달았다면 주님을 사랑해서 그것을 이루고자 자기를 드려서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허다히 교회를 세운다는 이름으로 바벨탑을 쌓는 경우가 된다.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이 무너뜨려 버리셔야만 참 그런일을 쌓아가고 세워가고 거기다가 노력하고 하는 그런 불쌍한 처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그게 주님의뜻을 미처 잘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이 세상의 요구,자기가 맡은 사업에 그 요구는 아주 급해서 하루도 쉴수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것할라, 저것할라 정신없다. 처음에 전도사로 그 다음은 강도사로 부목사로 있을때까지만 해도 그냥 정신 없다. 자기가 무엇을 차분히 생각해서 할 틈이 없다. 그렇다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미처 차분히 생각해 볼 틈이 없이 막 뛴다. 사회가 그런데 교회도 그렇게 되었다. 교회는 특별히 다른 성격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러던 것이 아니고 사회현상이나 교회현상이나 큰 차이가 없게 되어 버렸다. 참으로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공연히 명목만 가지고서 주의 종이란 명목만 가지고서 주님 하신일을 천리만리 딴데가서 딴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마태 7장 22~23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내게서 더나가라 하리라’ 이건 많이 읽어도 대체 이럴수가 있을까. 어떻게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쩣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기까지 한 사람인데 이것은 주님이 그게 아니다. 왜 거짓말 하느냐 그게 아닌가. 그걸 인정한듯이 말씀했다. 그런데도 그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너를 모른다’ 그런 현상이 있으리라. 그러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일이 없다고 단정 못한다. 
자기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이 그런 일들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무서운 일이다. 스스로 속고서 평생을 지날수도 있다는 것이다. 주님게서는 아주 지혜로운 분이셔서 악인을 또한 제 때에 잘 쓰시는 분이다. 
구약에 보면 구로스 사이로스 왕은 큰 권세를 가지고 크게 활동한 왕이지만 자기가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종으로 표시되었다. 악인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이다. 권능의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전부 주관하고 쓰시는 것이다. 마귀도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한계가 다 있어서 그의 허락 안에서 활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어떠한 일을 해서 효과가 났다. 그러니까 바로 나는 주님의 종인 것이다. 그런말 못하는 것이다. 자기가 분명히 주님가 바른 관계를 가지고 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의 뜻을 충실히 행하는 그런 증거가 드러나야지 되는 것이지 다만 결과만을 가지고서 어떤 일을 성취했으니까 주님의 종이다 라고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단정을 못하는 것이다는 말이다. 주님과의 관계는 아주 빗글려서 엉망인데 그래도 자기가 어떻게 해서 얻은 지식으로 그대로 활동을 해서 주님이 그것을 쓰셔 가지고 좋은 결과를 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관계가 정당하다든지 주님의 충실한 종이라든지 그걸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사랑이 있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분명히 ㅇ받은 그런 확증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안에서 자기가 해야할 일을 분명히 받아 가지고 충성스럽게 일을 해야만 그게 종으로서의 자걱이 있는 것이고 종으로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많은 준비가 있어야만 이 어두움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하늘에 계신 주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룰 것이다. 이 세상이라고 그랬는데 그러니까 교회하면 이 세상을 벗어나서 그곳은 거룩한 곳이고 거기는 어두운 면은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해서는 오해다. 지금까지 말씀드린것 같이 교회안에도 세상 세력과 같이 세상의 무지와 세상의 하나님을 거스리는 이런 사상과 세력들이 다정하게 알려와서 지금 세상인지 교회인지 구별하게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주님의 뜻은 전에 생각지 않고 자기 사업의 계획에만 몰두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교회에 가득해서 자기 일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거룩해질 수 있을까? 자동적으로 간판만 걸으면 거룩해 지는가. 거기에 있는 사역자가 진실되게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정신을 차려서 주님의 뜻을 받들어가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게 보통일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창조적인 일이다.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이 세상에 새로운........................ 
바벨탑도 상당히 거기에 지혜와 필요성이 있어서 하는게 아닌가? ‘우리가 흩어져서는 안되겠다’그래서 아주 질서있는 사회를 이룰려고 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인생의 목표를 그릇되게 잡아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기들의 이름을 위하여 였다. 통일된 인간의 세상을 내자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새로운 의로운 죄가 없고 죽음이 없고 그런 거룩한 나라를 세우시려고 한다. 이게 보통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최고로 우수한 사람들의 힘을 모아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면 바벨탑은 쌓을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지어서 안될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최대의 힘으로도 안될일을 지금 우리가 하러 간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된다는 것을 알고.................... 
그러면 우리가 뭐하러 하나님의 종으로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다 하실텐데 그럵수도 있는 그런게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하시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일을 지켜보고 이해하고 따라가고 심부름시킬때 그것을 순종하고................. 
그러니까 그런 큰 능력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발휘하실때 거기에 참여해서 거기에 종노릇을 하는 그런 긴장과 각오와 주님을 순종하는 그런 마음의 태도, 자기를 통해서 이 세상이 낼 수 없는 그런 능력이 나가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이 일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교회는 못 세우는 것이다. 
교회란 사업은 부족함 없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교회를 세우는 일이란 것은 그렇게 준비없이 안되는 것이다. 결코 교회라는 이름하에 예배당을 짓는 일이라든지 혹은 카톨릭 선교사로 온 사람들이 그렇지만 무슨 사회의 일, 사회를 향상시키고 평화롭게 하는 일, 무슨 무길글 교환하자 하는 일들, 사회의 공평과 정의를 수립하자 하는 일 그런 정도의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게 교회의 일이 아니다. 
예배당을 크게 지어가기고 과시하는 것, 그것은 위대한 일은 위대한 일이지만 교회일은 아니다. 사람들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은 아니다. 사람이 합심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예배당은 세계 최대의 예배당을 지어서 성공했다고 할지 몰라도 그렇게 하고서 하나님의 일은 전혀 하지 않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하고서 하나님의 일은 전혀 하지 않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나선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그렇기 위해서 준비시킨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작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이 세상의 세력 . 이 세상의 그릇된 생각들과 맞서서 그서들을 이길만한 그런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살아 갈만한 그런 준비가 다 되어 있어야 나아가서 일을 성취하는 것이다. 
미약해가지고 준비없이 도저히 나아가서 벽돌 한장도 못 놓는다. 교회가 쌓아질려면 신령한 교회를 이야기 하는건데 신령한 교회를 쌓아갈려면 그걸 이해하고 그걸 바로 알아야 거기 벽돌 하나라도 놓는 수고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순종한 마음이 없으면 결코 이 세상의 물결에 교회라고 간판이 있는 그 세사의 물결에 들어가서 바벨탑을 쌓는 일을 하고 그러고서 세상을 더나고 말 것이다. 결코 주님이 종의 일을 하고서 세상을 지나는 사람이 못될 것이다. 왜 그러느냐 하면 교회에 휩쓸어 넣은 세상적인 생각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알기 대문이다. 공연히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이 한시간 여러분을 긴장시킬려고 하는 말이 아니고 당장 여기를 나가보면 그 현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것을 이기고서 하나님편에 서서 하나님의 종으로 일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도 이 거대한 세상을 물리치고 일을 하려면 20년 30년 이 긴 시간이 아니다. 굉장히 힘든 일이기 때문에 겨우 한 귀퉁이 일을 이룰까 말까 주님의 뜻을 이룰까 말까 하는 것이다. 이 캄캄한 가운데서 반딧불처럼 조금 빛이 비췰까 말까 하는 것이다. 인생을 다해도 그것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준비가 없고 각오가 없이 그냥 태연하게 가서 목사 노릇을 잘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할수 있느냐? 계산이 잘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이만큼 강한 말로서........................ 
어떻게 신학교를 졸업하고서 나가는 사람들에게 바벨탑을 쌓는다고 하느냐 하지만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준비가 없으면 틀림없이 바벨탑을 쌓고 만다. 하나님의 종이란 사람은실컨 바벨탑;을 쌓고 주님은 그것을 다 허물어 뜨리고 그러면 얼마나 비극인가? 충성되게 잘하고 있다가 충성된 종아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하는 그런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기도 :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게 되고 그 주님의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또한 거룩하신 뜻을 따라서 그의 순종해서 종이 되려고 그동안 수련을 받았사옵나이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볼 때에 주님의 일은 거대하고 거룩한 일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룰수가 없는 일이요. 또 사랑이 부패하고 사람이 모인 세계가 또한 암흑세력 가운데 굳어지고 강해서 이것을 도한 사용해서 마귀는 강력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대하는 이러한 현실 가운데 저희가 살게 되어서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룩한 일을 행하실 때 우리가 거기에 참여해서 해야 되겠는데 참으로 이 일을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하지 아니하면 오히려 반대세력에 끌려서 힘된 일을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무너뜨리는 일이될까 두려운 마음이 생기나이다. 
주님! 저희가 과연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았다면 그 은혜에 배반되는 일을 않게 하여 주시면 오직 주의 거룩하신 듯을 잘 파악해서 거기에 의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그 일을 저희들은 다쓰셔서 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럼으로 저희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일이 무엇인가를 더욱 자세히 살펴서 온전히 파악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그것을 주님게 준비함을 받아서 나아갈 수 있게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저희가 하는 일이 바벨탑을 쌓는 일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그 거룩한 교회 곧 벌써 옛날부터 구약의 성도들에게 나타내시고 이루어오신 그 거대한 계획의 일부로서 거기에 우리가 참여해서 거룩하고 주님의 뜻을 저희의 생애 가운데서 있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히려 거절당하는 일이 이 세상에는 있는 일이다.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노회에서 장로고시가 있었는데 여러 목사님들이 계셨는데 어느 목사님이 장로 후보자에게 물었다. 교회의 주인이 누구입니가?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이 교회의 주인이예요?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시지. 아 그럽니까? 그러고 나갔다. 그런데 다른 후보자가 나와서 교회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니까 종입니다. 그래서 아니 종이에요? 그리스도이지. 아 그럼니까? 하고 나갔다. 끝나고 나서 문제가 있었는데 그 고시는 혼자 한게 아니고 여러 목사님들이 함께 했다. 다른 목사님들이 그 목사님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해 가지고 그렇게 대답을 했는가? 목사가 주인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두지 그랬느냐고 주의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고 우리나라 교회성격에서 참 음미해보아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란 것같이 그런 자명한 진리가 없는데도 이런일이 교회에서 생기는 것이다. 목사의 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위안에서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권위가 희미해진데서 목사의 권위가 밝을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렇게 할려고 한다. 목사를 앞세우고 하지 않으면 심지어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리우고 까지라도 목사의 권위를 내세우지 아니하면 안되겠다 하는 그런 심리가 교회를 세우는데 종으로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게 어느정도 교회가 멀리 진리가 떠났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신 것이고 그리스도가 계셔야 하는 곳이고 계시지 아니하면 교회가 세워지지 아니하고 저주에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에 그리스도께서 주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처리하신다 하는 사실을 무시하면 어떤일이 발생하느냐 하면 반드시 어떠한 사람이 권세를 행하려 하는 것이 나타난다. 더욱이 시골에서 목사들이. 
여러가지 사람의 술책을 써서 교권을 꽉 잡는다. 왜 그런 교권이 생기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권세를 모르기 때문에, 무시하기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장로들이 목사를 불러오기도 하고 쫓아내기도 하고 자기 맘대로 한다. 그런다고 평신도들이 목사도 그렇고 장로도 그렇다 해 가지고 세울려고 하면 그것이 되느냐 하면 혼란만 생기지 서지를 못한다. 그런 현상들을 많이 볼수가 있는데 결국 근원지 따져보면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실때에는 그 안에서 각각의 다 역할이 있고 주시는 그 권세가 다 있어서 목사가 되도록 권세를 행사하는 것이고 장로는 그런 것이고 평신도도 거기에 발언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제대로 권세를 발휘하시지 아니하면 결국에 교회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그러니까 믿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고 그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를 믿고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두가지를 강조했는데 이와같이 그리스도를 믿고 연합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 서로간에 지체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지체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자기가 된다는 것이 따라온다. 그래서 엡 4:25 같은데 거기보면 정직하게 서로 대하여야 한다. 거짓말을 안해야 한다. 하나의 지체를 인정을 하는데에만 터를 두고서 이야기 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 지체가 됨이니라” 
그래서 자기가 지체라는 사실과 또는 다른 사람도 지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지체로서 귀히 여기는 것이 교회가 유기체로서 존재해 가는데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빌 2:3에 보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했다. 빌 2:2-3에 보면 ‘마음을 같이하여 ..... 남을 낫게 여기고’여기서 교회에서 상호간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갈 6:10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착한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은 특별히 알아서 더욱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라는 것은 좋은데 안 믿는 사람과는 구별을 하라는 것이 아니냐? 구별짓는 것이다. 구별지을 정도로 믿는 사람에 대해서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대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럴정도로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으로 인정을 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믿는 사람들끼리 더 존대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결코 불신자들을 멸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경계하라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믿는 사람을 특별히 대하라는 말이다. 구별해서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은 불공평하다. 그리고 하나님도 불공평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불공평한가? 믿는 사람을 구별해서 존대하는 것이. 
같은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예로 일반 사회에 형제간에 우애를 하고 사는 가정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들끼리만 사랑한다 그러면서 비난하는가? 아니다. ‘그 형제간은 참 우애도 깊다. 그렇게 칭찬을 한다. 
대체적으로 형제간에 잘하는 사람은 다른 친척이나 친구간에도 잘한다. 형제우애 하는 사람치고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혹독하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 경우도 간혹 있겠지만. 그러나 특별히 형제우애를 한다고 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꼭 형제간에 다른 사람에게 대한 만큼만 대하라 그런 법은 없다. 제니가 훨씬더 긴밀하게 알고 서로 가까이 하고 형제애를 가지고 사는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사람과는 다른 관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맺어 주셨으니까. 그런 관계를 인정을 하고 더욱 가까이 하고 그를 더욱 사랑한다는 것은 .................. 
그런걸 가지고 불평을 한다든지 차별대우라고 말을 하면 말의 용어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다는 그런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선한 것을 교회에도 또 하나님께도 불공평하다고 한다. 
예수님도 말쑴하셨다. 포도원 주인이 아침일찍 밖에 나가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만큼 주겠다. 하고 또 정오에도 마찬가지, 또 오후 3시쯤에도 마찬가지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다. 일을 다 마친후 제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 정오쯤 온 사람에게도 $, 아침 일찍 온 사람에게도 $의 삯을 주니 아침일찍 온 사람이 불평을 했다. 그럴때 포도원 주인이 ‘왜 불평을 하느냐, 내 것을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못하겠느냐. 너와 약속한 것은 $가 아니냐? 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심지어 죄인들의 마음은 어떠하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사랑하지 않고,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을까? 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게서는 다 구원하지 않고 왜 어떤 사람들만 선택해서 구원하시는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사람이라도 구원할 아무 책임과 의무가 없는 것이다. 한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구원하셨다면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이 의무가 있어서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나라와 백성 가운데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면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비록 나에게 은혜를 안 베풀어 주셨을지라도 그런 사실을 옆에서 보았으면 오히려 그것도 찬송을 해야 마땅할 것이다. 사람들이 쓰는 그 공평. 그 공평대로 한다면 다 멸망하는 것이다. 다 구원을 받는게 아니라 다 멸망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나님이 한 사람이라도 구원했다면 찬송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만민을 구원한다면 그거야 말로 감사하고 찬송할 일이지 어떻게 그것을 불공평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믿음의 가정을 알아서 그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물론 안 믿는 사람에게도 구제의 손길을 펼것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먼저는 믿음의 가정에 할지니라 그랬다. 이것이 지체로서 마땅히 생각하고 행해야 할 일이다. 
옛날에 스토아 학파등이 사람들은 사회동포주의를 부르짖으며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할 것을 이야기 했다. 그러면 그런사상, 그런사랑에 이 그리스도의 사랑, 교회의 사랑은 못 미치는 것이냐? 한번 대조를 해 보라. 여러가지 면으로. 
기독교의 사랑과 세상 천인들이 말하는 사회동포주의라든지, 그것과 비교를 해보라는 것이다. 어느것이 우수한가?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서 요구하신 교회를 가르치신 그 사랑이야 말로 세상 어디에다 내 놓아도 부끄럼없이 항상 배울만 하고 공경할만한 그런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처지에서건 주시면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그 긴밀한 관계를 잘 나타내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그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것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다.같이 태어난 형제는 그만큼 하나님께서 가깝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형제는 형제로 알고 더 우애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는 전혀 그런 사랑은 베풀지 아니하면 서 형제끼리는 그렇게 사랑하느냐 하고 아무도 그것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불신자도 귀한 사랑이라고 칭찬한다. 
한 20년전에 들은 이야기지만 저희 어머님과 안면이 있던 사람인데 ‘믿는 사람들은 참 좋더라. 초상난 집에 가면 잘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 집에도 가서 잘 도와 주더라 그래 친하게 지내서 좋더라’ 살아보면 동네에서도 초상나면 부자집만 찾아 다니며 도와주고 가난한 집에 초상이 나면 잘 도와주지도 않고 찾아 가지도 않아 슬픔집이 더욱 슬픔이 된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가난한 집에도 찾아가서 잘 도와 주는게 좋더라는 것이다. 그런것이다. 하나님께서 다 하나님의 자녀로 같은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까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람의 어떤 교육으로 어떤 운동으로 그런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겠는가? 
신약시대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부터 나타난 것이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렇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도처에 하나님 말씀 가운데 나타난다. 
한 예로서 신 15:12~18 
여기보면 종을 결코 사지 말라 그런 말씀은 없다. 종의 제도를 암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제 칠년에는 자유를 주라 그랬다. 더구나 공수로 가게 하지 말라 그랬다. 사랑의 관계를 가질 것을 이야기 하면서. 히브리 나라에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는 종이 제도가 영구히 있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다. 현실을 감안해서 일시적으로 철폐하지는 않했지만 그걸 선도해서 하나님 나라에는 종의 그런 약한 제도라는 것은 없게 만드실려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출발을 하신 것이다. 이 문제는 여러가지로 고찰해 볼 점이 있지만 얼른 이걸 판단해가지고 종의 제도를 인정했다. 이렇게 쉽게 판단하지 말라. 노예제도를 당장에 철폐해 버린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반드시 그것이 이 사회를 다스리는 것이 가장 우수한 방법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속단이다. 
그런 얘기가 있다. 남북전쟁때 1860년대에 노예가 해방이 되었다. 우리 보통 교과서에 링컨 대통령이 북부를 아주 위대한 싸움을 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또 한가지 생각해야 할 면이 있는 것이다. 남북의 노예가 해방이 되어서 북부의 사람들이 고맙다 하고서 북부로 갔다. 그런데 가서 자기가 할 일은 별로 없고 그개서 구걸을 하고 사는데 북부 사람들이 인심도 별로 안좋아서 아이구 이것 안되겠다 하고서 다시 남부로 내려가서 종의 노릇을 했던 그 집에가서 은총을 받고 살았다는 애기도 있다. 노예제도를 일시에 다 철폐한다고 해서 그게 노예에게 참 이익이 되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노예를 인정했다 하고서 한 마디로 단정해 버릴것이 아니고 왜 이랬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우리가 배울수 있는 것은 노예제도를 일시적으로 인정을 했지만 노예제도의 악질적인 것은 다 빼어 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히브리 사회에 자구 거룩한 사회로 이끌어 가실려고 했다는 것을 여기서, 
잘 연구해 보면 히브리 사회에서는 히브리 동족간에는 노예제도가 없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출 21:1~6 ; 레 25:39~46 
이게 다 같은 종에 대한 내용이고 그런데. 여기서는 이방인과 동족인은 서로 구별한 것이 드러난다. 옛날종은 재산처럼 사고 팔고 그랬다. 악했었는데 그러나 여기 보면 구별했다. ‘너희 동족기리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고용관계를 많이 이야기 했다. 
그러나 이방인은 종으로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방인의 너희 종으로 취할 수 있다고 구별했다. 자기 형제와 타 민족간에 구별이 거기에 있다. 구약시대 부터 이렇게 구별이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같은 성질의 구별이 쭉 있어오는 것이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다르니까 신분이 다르다. 다르니까 구별을 지으라는 것이다. 그것 뿐이다. 결코 노예제도가 이스라엘 밖에 있는 것을 좋다고 여긴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노예제도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히브리 민족을 나가서 있는 악한 노예제도를 철폐할가.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쁜이지 그 노예제도가 좋다고 인정을 하지는 않았다. 
이 말씀은 특별한 계시인데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고 ‘너희가 어떻게 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지향하고 나갈 바를 가르친 것이지 그 이외에 세상의 어떤 일을 하라고 주신 말씀은 아니다. 특별 계시는 항상 그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거기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는 무슨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을 우리5가 배워야 할 것이다. 세상에 나가서 세상을 개선하고 개조하고 좀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임무인가. 
우리나라 교회사 가운데 일정시대에 적어도 일본 사람들에게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한 일에 교회가 잠잠하지 않고 한 몫을 했다 하는 것으로서 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위대한 일을 쓸려고 하는데 그것이 교회 사명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연 그게 교회 역사 가운데서 위대한 발자취인가? 아니면 자기의 할 사명을 이조 단 짓을 할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럼 이 인간 사회에 하나님께서 전혀 무관심하고 어떻게든지 전혀 상관않는 것이냐? 그건 아니다. 그건 그것대로 연구해 보면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악한 사람들,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들의 세상도 다 하나님이 관찰하에 있는 것이고 다 죄 가운데 있지만 그러나 더 깊은 죄 가운데 빠지느냐 그렇지 않으면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느냐. 
그 사회가 하나님의 의에 좀더 가깝게 있느냐 멀리 떨어져 있느냐에 하나님은 기은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있어서 도한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도 대책을 달리 취하시는 것이다. 소돔 고모라는 멸망시켰지만 다른 나라들은 이기게 하시는데에도 이유가 있다.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아무리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멸망할 백성이지만 죄 가운데 있는 백성이지만 그 밖에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죄의 상태를 하나님은 보신다. 
도저히 이 땅에서 두어서 아노디겠다고 판단되는 그 때에는 멸망 시킨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두신다. 그래서 하나니믜 거룩한 계획을 그들을 쓰셔서 이루기도 한다. 그렇기 대문에 노예제도 같은 것을 이 세상에서 누가 반대하고 철폐한다면 기뻐하시지 그걸 쓸데없는 일이라고 하시지 않는다. 사회를 개조하고 개선시키는 것을 사회를 악하게 하는 것보다는 좋은 것이다..사회를 위해서 힘써서 일하는 사람하고 스탈린 같이 또는 히틀러 같이 비참하게 사람을 죽인 사람하고 하나님께서 똑같이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건 그럴지라도, 
교회의 가장 궁극적인 사명을 논할때에 또는 하나님의 백성이 마당히 어디를 가야 할지를 가르칠 때에는 그런것에 비해서 이야기 하기보다는 보다더 중요하고 가까운데가 있어서 여기에서는 다만 그런 것은 언급을 안한 것이다. 다만 너희들 가운데서 어떻게 할 것을 주로 이야기 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결코 이 시대에라도 히브리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정복해서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고, 다른 민족을 착취해서 살아가. 그런적은 없고 기뻐하신 적도 없다. 싸움을 할 때는 정당한 싸움을 하게 했고 그래서 정복해야 할 필요가 있을때는 정복을 하기도 했지만 결코 그런것을 먼저 앞에서 하라고 하시지는 않았다. 이미 있는 죄의 결과로 그 악한 그 노예제도를 그냥 철폐하고 개혁한다는 의지를 거기서 표시 안한것 뿐이다. 그리고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희중에서는 좋지 않다’ 하고 ‘너희중에’라는 말을 항상 관심을 가지고 너희중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항상 관심을 가지고 가르쳤다. 이건 구약에서 뿐만 아니고 신약에도 계속되는데 ㅂ교해보면........ 
빌레몬서 14절에 보면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무슨의미인줄 알지? 
13절에 보면 “저를 내가 머물러 두어 내 .... 섬기게 하고자 화라”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다. 도망하여 갇혀 있다가 회개하고 믿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주면서 하는 이야기이다. 
‘네 주인에게로 돌아가라’ 했으니까 이미 있는 그 노예제도를 철폐하는 대신에 그것을 인정하고 그 제도를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돌아가서 먼저대로 그 상태로 있게 하지 아니하고 거기 어떤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했다. 그런데 그것을 강제로 철폐시킨 것이 아니고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그랬다. 내가 지금 너에게 부탁한 일이 선초 일인데 그것이 억지가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어떤 제도를 개혁해서 거기에 따라가도록 한 것이 아니고 네 마음에서 새로운 인식을 노예 주인에게 줄려고 했다. 
전에는 소유같이, 자기의 재산같이 어떻게 아무렇게나 취급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사람이다라는 그 인식을 바꾸어서 적어도 이제 사랑이다. 그뿐이 아니고 형제라 인식하도록 인식을 바꿔주는 것이다. 제도문제 이전에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다. 그것이 노예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다. 제도의 해결책이다. 롬 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 내게 하듯하고” 바울사도는 지금 하나님의 사도로 빌레몬이 알기를 하늘같이 안 사람이다 스승으로 알고 자기 생명의 은인으로 안다. 그런 사도인데 ‘나같이 대하라’ 했다. 
예수님이 자기의 종을 어떻게 대했는가?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고 햇다. 
이제 개인적으로 한 것 뿐 아니고 엡에도 보면 6:5-8종들의 인식도 새롭게 했다. 종의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터를 주를 섬기는 일터로 변화시키셧다. 또 9절에 보면 외으로 보자면 주종관계이다. 옷입은 모양새 또는 사회적인 신분 이런것이 다 외모 아닌가! 이런것으로는 주종관계이다. 
그러나 여기 엡에서 가르치기는 그들을 똑같은 선상에 둔 것이다. 주님 밑에서 똑같이 주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똑같은 선상에 두었다. 서로 역할이 다를 뿐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이나 아내가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같은 위치에 있지만 그러나 역할은 서로 다르다. 남편은 가장이고 여자는 배필이고. 그것가지고 불공평이라고 한 것은 기계적인 공평을 추구하는 것이된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지혜적인 법이 있고 아름다운 법이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서 사회가 아름답게 잘 조화가 되는 것인데......... 
히브리 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이 뒤에 문에 와서는 같은 노예제도를 취급을 하는데 세상이 벌써 훨씬 달라졌다. 이때에 와서는 하나님의 일이 전진이 되고 계시도 전진이 되어서 히브리 민족간에만 그런것이 아니고 그때 눈으로 볼때는 이방인들인데도 이 사람들에게 이런 인식의 변화를 주신 것이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노예제도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는 말이다. 이런것은 ‘개혁’이란 말로 부족하다. 이건 새로운 창조인 것이다. 히브리 민족에게만 국한되었던 하나님의 듯이 이방인에게까지 번져 나갔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해당이 된다. 그리고 그 자유를 주라는 선에서 구약의 율법은 제정되었는데 신약의 말들을 보면 물론 구약에서도 잘 보면 사랑의 관계가 있다. 아름다운 주종관계가 벌써 구약에서 바라보고 그걸 목표로 하고 쓴 것이다. 
내가 이 주인을 사랑하여 평생종으로 되겠습니다 하고 나설대에 주인과 종과의 관계는 아주 긴밀하게 사랑으로 얽혀진다. 그건 이 세상에서 말하는 노예제도가 결코 아니다. 주인이 이익을 위해서 돕는 그런 동역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희미하게 겨우 자유인의 위치에 동등한 위치에 가도록 한건데 그러나 빌레몬서에 보면 ‘나를 대하듯 그를 영접하라’고 했다. 
빌레몬서 이야기를 하다가 엡의 종의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그쳤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볼것 같으면 그 제도 자체를 외부에서 그냥 철폐하는 것으로 하지 않고 그건 왜 그랬느냐 하면 그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새로운 지식, 인식을 변경시키고 사랑을 불어 넣어서 사랑의 힘으로 내부에서 부터 변화를 시키셨다. 거기에 참 인간관, 인간관 뿐만 아니라 참 교회관을 가질때에 자체 내에서 스스로 변화된 것이다. 내부에서부터 철폐되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사회에 나아가서 거기있는 어떤 악한 제도를 두드려 부수고 혁명을 일으키고 개선을 하고 그런 방법은 취하지 않았지만 먼저 교회내부에서 서로간의 관계부터 변화시키는데서 해결한 것이다. 밖은 그걸 변화시킬려면 여러가지 요인이 필요하다. 이 성숙화될때가 되면 그 제도가 변화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도 하나님의 목적이 이 세상을 무슨 유도되어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 세상을 무슨 유도되에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놔두고 주안에 있는 무슨 제도를 좀 개선하고 살기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충붆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리스도안에 들어온 사람간에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그 관계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약 1:9~10에 보면 낮은 형제는 .......지나감일가 
이 사회적 신분이나 그러니까 죄인이라든지 종이라든지 혹은 부자라든지 가난한자라든지 이런 빈부에 대한 인식 가치관을 아주 새롭게 해주신 것이다. 이것이 교회내에서는 인정이 되고 실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앙가운데서 그렇게 되어야 옳다. 그런데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어떤 권세있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장이라든지 무슨 장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또 부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과 구별해서 높이둔다. 오직 그 이유로 교회내에서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면 당연하지만. 
단순히 사회적인 지위가 높다든지 돈이 많다든지 한다고 다른 사람과 구별을 한다면 그게 뭐 교회인가. 그건 세상이 그대로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집사나 장로는 조건이 있다. 거기에 맞으면 세우는 것이지 세상의 지위나 무슨 부 이런것이 조건이 되어가지고 집사나 장로를 세운다면 그게 무슨 교회인가>그리스도안에 그런것을 다 철폐한 것이다. 민족이나 사회적인 신분이나 심지어 남자 여자 구별까지도 그리스도안에서는 다 하나라고 그랬다. 그게 교회이고 하나님께서 엄연히 그것을 가르치고 명하시는데도 (신분이나 빈부차등) 그런것이 여전히 교회에 있다면 결국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사회를 그대로 교회에 옮겨 놓은것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관게를 교회안에서 창조하신 것이다. 이상으로 간단히 교회와 신자. 교회와 지체의 관계. 또 지체끼리 관계에 대해서 생각했는데 그런 관계를 잘 인식하고 그것을 잘 지킴으로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유기체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것이 없이 자연히 교회가 서질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만 많이 모이고 건물만 아주 짓는다고 해서 결코 교회가 설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에서도 몇백배로 건물은 크게 지을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것이 무슨 하나님 나라에 큰 일인것처럼 자기의 정력을 다 바치고 다 짓고 나서 감사합니다.하고. 교회가 필요하면 지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의 진행에 있어서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있어서............ 
교회를 세운다고 하니까 예배당짓는 일인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1시간 강의한 것 헛것된다.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성경에 분명히 있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아주 독특한 의미이다. 풍부한 의미가 들어있다. 인생을 다 바쳐서 해도 귀퉁이 조금 이룰까 말가 하는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오늘도 해를 뜨게 하신 이 거대한 일이 무엇 때문이냐. 잘 따지면 결국 교회를 세우려는 일이다. 왜 이 오만불순한 사람들이 세상이 우글우글 찾는데 심판하시지 않고 참으시느냐는 말이다. 독재자가 나와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자유를 억압하는데도 당장에 치우시지 않고 참고 보시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떤 뜻을 이루실려고 이 악한 세대를 참고 계시는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교회를 거룩하게 세우실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 가운데서 이 교회를 세워나갈려고 하시는데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사람들이 그 종이라는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서는 맹목이고 소경이다. 교회를 세운답시고 딴 일을 하고 있다. 그래 바벨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동양 최대의 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그것이 교회를 세운 것인가? 
그것은 누가 부를수 있겠는가? 이세상의 무엇으로도 부셔버릴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교회를 흐리는 일은 있고 방해하는 일도 많이 있지만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이래 역사에 면면이 교회가 한번도 망한일이 없고 서 온 것이다. 인간의 죄악이, 부패가 있어서 교회의 모양이 영광스럽게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이 역사상에 나타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가하셔서 그 교회를 다시 순결하게 다시 하시고 쓰시고 그래서 교회는 망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교회와 지체간의 관계라는 것은 아주 긴밀한 것이고 이 지체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고 도 자기 지체끼리 정당하게 인식하고 자기 지체라는 인식하에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 가는데에 교회로서의 모습을 다 지니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유기체라는 성격을 잘 수행한다는 말이다. 지금 개인으로만 두고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교회와 개인 그러나 여기에 이어서 교회와 가정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첫째 가정은 교회내의 한 단위와 사회로서 가정의 거룩한 것이 교회의 거룩한 것과 아주 긴요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 교회가 구성하고 있는 개인개인이 거룩하지 아니하고 교회가 거룩하게 될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가지를 잘 염두해 두어야 한다. 교회의 거룩한 것과 내가 또한 거룩하기를 힘쓰는 것. 
가정이 거룩하지 않고 교회가 거룩하여 질수가 없는것을 알아야 한다. 가정은 부부로 시작하고 부모와 자식관계로 번져나가는데 이 부부를 놓고 볼것 같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이 온전한 가정이 많을수록 그 교회는 사랑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가정이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가정으로 서면 그런 가정이 교회안에 많이 있게되면 교회는 아주 튼튼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가정이 없이 어떻게 교회가 거룩해질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봉사하려는 사람이라면 가정에 대해서 아주 주의할 필요가 있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이 서신서는 다 교회의 거룩을 기해서 쓴 책이다. 교회에서는 글인데 결국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해서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잘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서신서내에 가정에 관해서 교훈한 내용이 있다. 엡 5장도 가정관계를 이야기 했다. 엡 5장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교회의 거룩함을 위해서 목적하고 쓴 책인데 그러는 도중에 가정에 대해서 가족관계에 대해서 가족관계에 대해서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돌보는 목사라면 특히 가정을 돌보아야 되고 가족관계는 돌보아야 한다. 가정을 세워주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딤전 3장을 보면 장로의 자격을 지적한데가 있고 또 집사의 자격을 지적한 곳이 있다. 그런데 그 조건중의 하나가 자기의 집안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한다 라고 했다. 장로는 목사를 가리킨게 아닌가? 물론 장로도 포함되고 ..... 성경에서 장로라 했을때는 우선적으롬 고사이다. 장로교에서는 지금도 목사가 장로이다. 자꾸 목사 목사하고 장로는 구별해서 말하니까 목사는 장로가 아닌줄 알지만 엄연히 장로이다. 구별해서 다스리는 장로, 가르치는 장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자기의 집안을 잘 돌보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돌보리요 하는 것이 큰 원칙이다. 그만큼 가정의 중요성이 있다. 
교회를 정당하게 세우려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종이라면 반드시 사람들의 가정을 잘 세우려는 마당이 있어야 하고, 가족관계가 원활히 되도록 돌보아주고 가르치고 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럴려면 자기 자신이 먼저 그것을 잘 알아서 자기 집안을 잘 돌보고 다스리는 그런일을 게을리 할 수 없고 그런일을 잘 함으로서 다근 사람의 모범이 되어서 그 교회내에 모든 가정이 튼튼하게 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일을 무시하고 어떻게 교회를 튼튼하게 세울수가 없다. 무슨 예배당을 짓는다등 시간이 없어서 가정을 돌보지 않고 그건 주님의 일이 아니고 가정의 일이다 하고서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 주님의 일을 무너뜨리는 일이 된다. 이런일을 소홀히 하고서 하나님의 교회가 튼튼히 설수가 없는 것이다. 
가정이 거룩하고 가정이 튼튼해야 교회가 튼튼하고 거룩하다 하는 것이 한가지 큰 원칙인데,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거룩하게 하려고 쓴 이 글 가운데서 잊지 않고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을 염두하라. 가정관계를 주의해서 성경에도 기록했다. 아내들이여! 남편들이여! 하는 말을 혼인할때만 쓸려고 생각하지 말고 일반 교회 생활가운데서 목회 계획가운데서 읽으라는 말씀이다. 엡 전체를 읽는 가운데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전체의 말씀이 교회를 세우려는 말씀인데 그러는 가운데 가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원칙을 가르쳣다. 어느한때만 떠들어 보고서 주례할때만 사용할려고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런데 또 반대로 가정을 바로 세울려면 교회가 건전하고 교회가 거룩해야만 건전한 가정이 서고 거룩한 가정이 선다는 것도 진리이다. 교회와 가정은 서로 상호관계가 있다. 
그 사실이 어디서 뚜렸이 나타났느냐 하면 정당한 부부관계를 여기서 가르쳤는데 엡 5:24“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하듯하라....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5“남편들아......흠이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부부의 도리를 정당한 부부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근거해서 교훈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정당한 부부관계에서부터 부부가 출발하는 것인데 이런 가정이 출발할려면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근거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교회가 아니고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 “남편들아 아내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렇게 교회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 많고 사랑을 배푸시는 일이 많은데 이런데에 근거해서 남편들이 할 일을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거룩한 교회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거룩한 교회가 아니고는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날리가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 바르지 아니하고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타나겠는가? 
자유주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가 어떤분이란걸 나타낼수 있는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도리가 있겠는가? 그러면 그 교회에서는 남편이 어떤 남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정당하게 못가르친다.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세상의 어떤 도덕적인 교훈으로서는 가르칠지 몰라도 성경을 근거한 하나님 말씀을 보면 남편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못 가르친다. 거룩한 교회가 아니고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을 바로 알고, 사랑을 품고 사는 것이다. 교회안에 바른 지식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못나타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못 나타내면 바른 남편들을 길러 낼수가 없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인데 이런 방식을 거룩한 교회가 아니고는 택할수가 없는 것이다. ‘ 자 그리스도를 봐라 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남편들이 행하라’ 이렇게 가르쳐야 될텐데 가르칠 그리스도가 없으면 어떻게 가르치겠는가? 모델이 없다. 
남편이 그릇되면 가정을 쓴다. 먼저 남편이 바로 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는 교회가 튼튼히 서지 아니하면 가정은 서지를 못하는 것이다. 겨우 이런저런 교훈을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가지고서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이 아니고 주워모은 진리의 파편들을 가지고 어떻게 나가는 아주 구차한 가정을 세울수 있겠지,,,,, 
라디오에서 들은말 잡지에서 읽은말 신문에서 무슨 말들을 주워가지고 맞추어가지고 아주 저속한 가정 말고 조금 나온 가정의 사랑을 가르치고 교회내에서도 세울수 있겠지.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훌륭한 목표를 세운 가정. 우리는 일시에 못한다. 해볼려고 하면 결코 하루 아침에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평생을 두고라도 목표는 목표인 것이다. 평생을 두고라도 그런 가정을 세울려는 가정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 다 모든 가정은 그래야 한다. 그래야 향상이 있는 것이고 교회내에도 지금은 향상이 안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10년후에는 훨씬 향상하는 교회가 될 것 아닌가. 그런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10년이 가도 20년이 가도 가정다운 가정이 어떤것이라고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무식한대로 있는 것이다. 전국 교회에 복음이 들어온 것이 백년이 되었다고 자연히 성장하겠는가? 하나님의 가르침이 없이는 걸코 성장은 않는 것이다. 주저앉아 있다. 다른 교회 세상의 풍조, 교훈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교회가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지의 까닭도 알 도리가 없다. 그가 어데로 가든지 다라가는 것이 교회다 하는 것은 거룩한 교회가 아니고는 가르칠 수가 없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말로는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실효가 없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에 들어가고 생활을 지배한 만큼 될려면 그런 교회로 서 있어야 교회는 이런 곳이다 라고 강조할 수가 있다. 교회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다 한 마음이 되어서 여러 사람이 각양각색의 사랑이 모였지만 이렇게 한 몸처럼 그런 정신으로 나간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께서 가신다면 간다. 이건 거룩한 교회만 하는 것이다. 다 세상의 욕심에 사로잡혀서 불신의 동기로 가득찬 교회는 도저히 쌓아가는체 하다가 그냥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상당히 거리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란 어디까지 따라간다. 그런 교회가 있을대는 아내는 어덯게 해야 한다는 걸 가르치기가 참 쉬운 것이다. 이런 교회처럼 네 남편을 순종하라. 교회의 한 멤버이고 그 교회 나가고 있기 때문에 기분이 상당히 가깝게 느낀다. 교회가 이런데 나도 이래야지 하고서 남편에게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모델이 없이 무엇으로 아내들을 가르치려고 할까? 한국의 전통적으로 있던 가정과 관련해서 칠거지악이란 말 알지? 남의 집에 가정을 세우러 들어온 여인이 이러이러한 일곱가지 잘못이 있으면 그 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 다시 친정으로 가라했다. 부모공경 못한것. 아들 못 낳는것. 음행. 투기. 도적. 구설등 그런것이 있으면 쫓겨난다. 그것이 아내의 조건이었다. 서양에서는 이런 것이 상관없었지만 비슷한 것 동등권을 주장하고 여권 운동을 하는데... 
그 교회에 가르침에 대해서 항상 남편에게 복종하고 어떤것이 60년대 70년대 와서 싹 빠지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렉슨이 결혼할 때는 복종한다는 말은 쏙 빼었다. 동양것은 다 나쁜것이 아니고 서양 사람들이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에 있는 효 사상이 참 좋다 하고서 그걸 본받는 경향도 있다. 
특별히 노예문제가 서양에서 큰 문제로 대두 되어서 걱정들 하고 있는데 동양에서는 그런 문제를 잘 해소한다 하고 큰 장점으로 선전을 하고 그런데 ....그러나 칠거지악같은 것은 우리 시대에 좋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서양에 가정관이 틀렸다 하면 서양은 그런것이 해이해져 가지고 이제는 이횬율이 얼마나 많은지 큰 문제가 되고 있는데 ..... 하여튼 동서야 이런 가정관이 틀렸다 하면 특히 한국 전통적인 가정관이 틀렸다 할것 같으면 그것을 대치할 만한 가정관을 누가 제시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부관계를 갖어야 한다 하는 또한 시간이 없어서 다 이야기 못하지만 어버이와 자식관계는 어떤 관계를 갖어야 할 것이다. 이것도 작지 않는 문제이다. 
깊이 생각하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것을 소홀히 함으로서 얼마나 가정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교회의 발전이 더딘줄을 아는가? 그렇다면 이런 것에 대해서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든지.... 
적어도 교회서 새로운 것을 대치할만한 새로운 가정관을 가르치고 수립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런것은 성결한 교회가 아니고는 결코 못한다. 성결한 교회만이 교훈의 터가 될만한 그런 모델을 제시할수가 있다. 과연 이런 것을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런것 없이 교회를 세우겠다고 교회를 봉사하겠다고 하면 무모한 일인 것이다. 무엇으로서 교회를 세우려는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심지 아니하면 거두시는 분이 아니다. 
어떤 훌륭한 거둘실려면 반드시 심으시는 것이다. 죄악적인 사람들이 그냥 놀고 먹을려고 하고 일하지 않고 무슨 결과를 얻을려고 하는 습성들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게서는 그렇게 일치하시는 법이 없다. 항상 심고서 거둔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고 새하늘과 새 땅을 지으시려는 계획을 세우신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그것을 이룰만한 요인을 이땅에 심으신 것이다. 심으시고 그렇게 거두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사랑은 하나님의 방법을 택하고 하나님의 뒤를 따라가야지...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데, 나는 내 힘으로 한번 해 보겠다. 될 일인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안하고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 교인이 다 손을 맞잡아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린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과연 이런 준비가 있느냐? 어떻게 하면 이런 준비를 하고서 나아가서 정말로 하늘에 계신 주님의 뜻을 내가 조금이라도 이룰 수 있느냐 하는 준비가 있어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합당한 일인줄 안다. 
질문 
성전;성전이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그래서 거기 갈 때는 하나님이 계신것을 느끼고 그래서 함부로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로 가고 하는 것이 구약시대부터 성전에 미친 개념이다. 성전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성막의 형식으로 있었고,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땅위에 그런 제한된 한 백성 가운데 가까이 오셔서 계신다는 표였다. 하늘은 그의 보좌와 땅은 그의 발등상이다. 그게 사실이고. 
예루살렘 성전이야 그야 하나님께서 높이 계시지만 그 백성가운데 가까이 와서 함게 계시고 그 백성은 인도하신다는 사랑의 표시였다. 그래서 그 실체가 이루어질 때는 예수께서 땅에 오셔서 그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하나님 백성 삼으시고 교회라 세우시고 그 가운데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와 계시도록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지금 쭉 말한 교회 건물로서 교회가 아니고 그 백성으로 구성된 그 교회를 성경은 성전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디나 사람들이 교회가 어느 지역을 택해서 함께 모여서 하나님게 예배하기 위해서 한 장소를 하나님께 바쳐서 구별해서 거기서 모이기로 하면 성전이 된다. 그런 의미로서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건 어디든지 사람들이 건물이나 장소가 거룩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서 그것은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가 없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거룩한 곳도 되고 그렇지 않는 곳도 된다. 예배당이 예배 처소 거룩한 곳도 되고 때로는 무기고도 된다. 이북에서는 지금 무기고로 사용하는데 무기고도 된다는 말이다. 거룩할리가 없다. 
우리가 그런 의미를 가지고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2차적인 의미로. 그러니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그 장소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사용할때 그래서 예배당은 다른 목적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게 예배하는 목적으로 쓰자 그랬으면 그게 성전이 되는 것이다. 
교회당 예배당 이게 좋다. 거기에 이곳은 보통 장소가 아니고 신성한 곳이다. 특별히 예배를 위해서 구별한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코 성경 신약에서 어디든지 그런 장소를 성전이라고 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성전이라고 했지 결코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성경 아무데서도 성전이라고 한 곳이 없다. 어느 장소든지 사람들이 구별해서 쓰면 그것이 성전이 되니까. 가정에서도 그럴수 있고 어느곳에 따로 지어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2차적인 의미로 성전이라고 쓰면 무방하지만 오해할 장소에서는 교회당 예배당 하면 더 좋다. 
질문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나님게서 직접 통치를 하시니까.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그 주권이 모든 면에 있어서 다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https://lewisnoh.tistory.com/entry/성경적-교회관?category=425824 [Post Tenebras L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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