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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점에서 조명해 본 교회론

에반젤(복음) 2020. 2. 25. 13:34



시발점에서 조명해 본 교회론                                 

                                                                                

                                    정    훈   택(총신대 신학대학원,신약학 교수)


I. 들어가는 말


교회란 무엇인가? 최근에 이 질문은 교회 내부에서 더 자주 제기된다. 외부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교회의 모습은 비교적 단순하다. 교회(敎會)란 이들의 눈에는 “종교신앙이 같은 사람들의 조직체”이거나 “주로 기독교에서 종교 신앙의 가르침을 선포하며 예배 의식이나, 종교적 회합을 하기 위하여서 상설한 건물”을 가리킨다.1)

교회 안의 사람들이 왜 계속해서 “교회”에 관하여 질문을 던지곤 하는가? 그들이 찾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첫번째 질문에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분석함으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태어난 시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 소위 그들이 처한 한 역사적 상황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둘째 질문과 관련된 답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인다. 1. 자주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한 모형”을 선택하여 그것과 현실을 비교하며, 그 때 발견되는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고 긍정적인 면을 닮아 가려고 한다. 2. 한 모형을 선택하기 보다는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교회의 “원형” 혹은 원리를 재구성하고 현재의 교회를 이것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많은 교회지도자들은 예루살렘교회가 - 자주 예루살렘공동체로 불리운다 - 이 모형으로써의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 방법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른다.2)

예루살렘교회 다음으로 빈번히 언급되는 것은 열 두 제자들이다. 그러나 이들과 관련하여 “교회”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교회이므로 열 두 제자들을 교회의 모형으로 지목하는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순절 사건 이전에도 이들이 교회란 집합명사로 불리웠다고 가정하거나, 이 때 그들은 그러한 집단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혹은 이들을 통해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이 열 두 제자들을 후대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의 모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과 그 후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아주 중대한 차이점이 가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3)

기존교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하며 교회론을 통해 교회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때, 이러한 교회 개혁을 위해 교회의 이상형을 “교회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찾고자 할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그 시발점으로 돌아가 교회가 형성되는 발자국을 더듬어 보고 여기서부터 영구히 적용될 수 있는 “교회의 원리”를 뽑아내는 것이다. 교회사의 진행과 더불어 나타나는 여러 요소들은 - 이런 요소는 물론 시초에도 있었다 - 부수적인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개혁자들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의 현재를 그 자체로나 그들이 자라온 교회의 전통으로 저울질하지 않고 곧 바로 교회의 시작으로 끌어가서 비교, 비판, 재확립하였다.4)

비슷한 연구를 우리는 최근에 예를 들면 A. Nolan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5)6)7)8)9)

한국교회는 날이 갈수록 중세 돌아가  Roman Cathoric 교회를 닮아 가는 듯한 인상을 점점 강하게 풍긴다. 한 교회나 한 교역자가 특정한 교단에 소속되는 것이 중시되거나, 한 신자(信者)가 어떤 특정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조짐이라 할 수 있다. 성경위주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특수한 신학사상 중심의 신앙생활로 변모한다. 장소로서의 교회 건물로서의 교회가 강조되고 있다. 직무중심의 교역자상이 퇴조하고 한 인간이 신성시 되고 그의 권한이 거룩한 위력을 발휘하는 듯이 행동하는 예를 자주 보게 된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고유의 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공동체, 그 구조, 조직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다. 특히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눈덩이 처럼 불어나며 스스로 군림하기도 하고 세속적인 세력과 자주 야합하기도 하며 어마어마한 힘을 마구 이곳 저곳에 뿌리고 돌아 다닌다. 이 구조는 또 스스로 굴러가며 개인의 특성과 자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통제, 억압하기도 한다. 정치력이, 금력과 권력이 어느 틈엔가 교회에 밀려와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공리주의적 사고 방식이 교회에 팽배해 있다. 역사의 흐름은 어차피 이렇게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 없고, 또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 없을찌라도, 억지로 시발점으로 돌아가 보는 것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용기만 있다면 물길을 잡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10)

이상의 과제와 병행하여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신학적 연구의 출발점은 항상 언어, 문법적 고찰임은 자명하다. 우리에게 이것은 신약성경에 사용된  κκλησ α란 단어를 찾고 그것이 사용된 문맥과 그 배경을 따져  κκλησ α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칠십인경(LXX)에서 이 단어가 주로 ㄹ하카이나 ㅎ더의 번역어 임을 확인하고 이 두 단어의 문맥과 배경을 살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정으로 말해진다. 교회론은 또 통상적으로 신.구약성경 모두를 통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 단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요소를 내포할 수도 있다. 'Eκκλησ α가 비록 LXX에서 ㄹ하카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κκλησ α와 ㄹ하카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본 연구는 따라서  κκλησ α란 단어나 그 용례에 치중하지 않고 이 단어가 실제로 적용되었던 집단에 촛점을 맞출 것이다. 이 집단을 설명하기 위하여 채용되고 도입되는 여러 개념을 살피려는 것은 이 논문의 의도가 아니다. 이러한 설명, 예를 들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는 개념은 일단 교회의 존재를 예상하고 그것이 과연 어떤 성질을 가졌고 어떤 역활을 하는가를 보여준다. 본 논문의 목적은 교회란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그 응집력으로 작용하는 것, 즉 교회를 구성하는 원리를 찾아서 이것과 오늘의 교회를 비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다음의 의문점들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1. 어디를 교회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가? 2. 이 출발점에 이르는 필수적인 경과 과정이 있는가? 3. 이 교회는 구약성경과 (혹은 구약 공동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마지막 질문은 1번의 대답으로 구약시대의 어느 한 시점이 제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2. 교회의 시발점


L. Berkhof와11) 박형룡은12)13)의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 부름을 받은 피택자들의 단체(coetus electorum vocatorum),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단체(coetus vocatorum), 혹은 신자들의14)15) 

구약성경의 ㄹ하카과 신약성경의  κκλησ α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약성경의 집회, 회중이나 “하나님의 총회”는 그 자체로는 구약적인 특수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란 다른 한 개념을 그 배후에 깔고 있다. 즉 ㄹ하카 자체는 그 집단의 성격을 완전히 규명해 주지 못하고 이스라엘이란 혈연과 이 혈연에 결부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택, 약속에 기초하여서만 그 의미가 살아나게 되어 있다. ㄹ하카이나 ㅎ더는 선민인 이스라엘이, 혹은 이스라엘 중에서 일부가 특수한 목적에 의해 지정된 때에 지정된 장소에 모인 것을 (모인 그 사람들을) 의미한다.

'Εκκλησ α도 헬라세계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 전체나 그 일부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공적으로 소집되는 경우에 있어서 그 모임 자체나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κκλησ α였다.16)

우리가 “교회론”을 거론할 때는 이런 종류의 모임을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신약의 교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들의 신분, 결속력, 소속감, 특수 상황 등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이런 무엇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사람들이  κκλησ α란 단어에 의해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구별되고 있다. ㄹ하카이나 ㅎ더는 이스라엘이란 울타리 안에 또 하나의 울타리를 만드는 개념인데 반해,  κκλησ α는 이 단어가 적용되는 사회에 최초의 울타리를 쳐서 그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κκλησ α를 갈라 놓는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물론 이 말은 ㄹ하카과  κκλησ α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나 어떤 계속성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또 “ κκλησ α”가 “ㄹ하카”이나 “ㅎ더”의 특성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질 때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회중일 수는 없다.17)

교회를 넓게 “믿는자들의 교통”18)19)20)21)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공동체”22)23)

'Εκκλησ α의 시발점을 우리는 당연히 예수와의 관련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디를 지적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일치된 의견이 나오지 않고 있다. 통상적인 견해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강림을 출발점으로 꼽는다. 그것은 이 때 예수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교대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24)25)26)

교회란 단어는 예수와 관련된 것이면서도 막상 그 촛점은 예수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맞추어진 표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위에 제시된 오순절이나 예수의 죽음, 부활이 과연 그의 제자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기에 이것을 교회의 시작으로 삼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차라리 교회의 시작을 예수의 생애 자체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비슷한 관점에서 F.M. Braun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교회조직의 시작을 발견했다.27)



3. 최초의 “교회”


신약성경의 각 문서들이 기록된 연대순을 따를 때 “교회”란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바울 사도이다. 그는 약 50년경에 아마 고린도에서 한 편지를 쓰면서 이 편지를 “데살로니가人들의 교회에”(τo  κκλησ Ζ  εσσαλξνθκ  ν, 살전 1,1; 살후 1,1) 보낸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편지 이곳 저곳에 이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 만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교회들”(고후 8,1), “갈라디아의 교회들”(고전 16,19)이 존재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살후 1,4은 데살로니가서를 쓰는 당시에 아가야 지방에도 여러 교회가 세워졌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해본다면, 늧어도 50년 경에는 “ κκλησ α”란 단어가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무리 없이 기독교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28)

물론 이것은 데살로니가人들의 교회가 최초의 교회라는 말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살전 2,14에서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았던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τ ν  κκλησθ ν τξ   εξ  τ ν ξ σ ν  ν τo  Θξυδα Ζ)을 언급했다(갈 1,22 참고). 그는 유대에 적지 않은 교회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 “교회”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또 자신이 회심하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었다”고 회상한다 (고전 15,9; 갈 2,13). 그가 이 말로 예루살렘교회를 회상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9)

62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도행전에 자주 “교회”란 단어가 사용되고, 또 여러 교회가 등장한다고 해서, 사도행전은 그 내용이 보여주는 실제시대보다 훨씬 후기의 (아마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18세기 이후 신학자들이 자주 제시해 온 이 시간적 간격은 그렇게 엄청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울서신을 고려할 때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 사도가 그의 서신에서 예루살렘공동체를 “교회”로 부르는 시기와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예루살렘공동체의 탄생시기 사이의 간격은 가장 멀리 잡아도 17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50년경에 “교회”란 단어가 바울이 전도하는 전지역에서 어려움 없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예루살렘공동체가 바울사도에 의해 “교회”로 불리우는 것과 사도행전에서 “교회”로 불리우는 것 사이에는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30)

사도행전이 시작되면, 누가는 예수와 열 한 사도를 무대에 올린다(cf. 1,2).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있었던 일과 예수의 마지막 당부가 간략하게 소개되고 예수의 승천 사건이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사도들”이란 명칭이 2절에 한 번 사용된 것 외에는 아무 다른 명칭도 사용되지 않았다. 갑자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에게 나타나 “갈릴리 사람들아”( Αν ρεζ Γαλθλα ξζ)라고 부른다(11절, cf. 2,7). 왜 그들을 이렇게 불렀을까? 그들의 출신지역을 의미한다고 실제적으로 해석하든지 그 집단에 대한 통속적인 별명이라고 하든지, 이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는 별 의미가 없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직후부터 사도들은 주님이 부탁하신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떤 여인들(γυναθπ ν)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도 같이 했다 (14절).31)

오순절 이후에야 구성원에 변화가 온다.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나서 그들이 모여 있던 집을 울렸고, 불꽃이 갈라져 각 사람 위에 머물렀으며,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대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사건이 터지자, 디아스포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개종자들이 놀라 모여 든다. 이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가 즉석설교를 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큰 감명을 받아 즉시 세례를 받았는데 그 결과로 (원래 있었던 120여명의 영혼에) “약 3000명의 영혼이 더해졌다”(ορξσετ  ησαν ψυχα   σε  τρθσχ λθαθ, 41절).

오순절에 있었던 변화를 우리는 다음의 두 갈래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 원래 예수를 믿고 따르던, 그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충만이 있었다. 그들은 방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말했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사도들의 특수한 사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2,14.42). 2. 이 공동체에 들어 있지 않던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다가 마음에 찔림을 느끼고,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Μετανξ σατε  κα  βαοτθσ  τ ...)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그리고 다른 말들을, cf. 40절) 받아 들여 세례를 받았다(41절).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베드로의 권고대로 회개했다는 것일까? 삼천명 가량의 영혼이 증가했다는 기록은 이 새 구성원들이 원래 구성원과 똑 같이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누가가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회개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삼천명의 증가는 신자의 증가가 아니라 (현대적 의미로) 교인의 증가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제한할 근거가 사도행전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죄용서”와 성령의 선물은 여기서는 명령된 것이 아니라 약속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긍정적으로 명령에 순응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에 관해 더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들도 이제 다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동일한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의 삶에 끼여 들었다는 점이다(2,42-47).

이 공동체의 삶을 누가는 단적으로 “믿는 사람들 모두가(ο ντεζ ξ  οθστε σαντεζ) 한 곳에 있었고 모든 것을 함께 사용했으며 ...”(44-45절)라고 묘사하고 있다. “함께 있었다”, “함께 사용했다”, 소유를 팔아서 “필요에 따라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설명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즉 이 공동체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준다. 반면에 “믿는 자들”이란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정체를 알려주는 말이다. 즉, “믿는다”는 개념이 이 공동체의 구성조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 우리는 삼 천 여명의 새 구성원들이 회개를 했다고 결론을 내렸었는데, 여기서는 그들도 “믿는 자들”이었다고 확정할 수 있다. 삼천 명이 첨가되어 삼천 백 이십 여명으로 불어난 이 집단은 믿는 자들의 집단이었다. 혹은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란 표현에서 이 믿음이 예수와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된다. 47절에는 살아 계신 주님께서 이 믿는 자들의 집단에 매일 “구원얻는 자들을”(τξ ζ σιωξμ νξυζ) 더해 주셨다는 새로운 개념이 첨가된다. “믿는 자들” 혹은 “구원얻는 자들”이 전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베드로사도가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이 동기가 되어, 그는 또 한 번의 설교를 하게 된다. 이 설교에서 그는 예수에 관하여 주로 말했지만, 그의 명령 (회개하라, 3,19)과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믿었다, 4,4)은 앞의 사건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천 여명의 새로운 “믿는 자들”이 생겼다. 이들이 별도로 있었는지 아니면 먼저 번 처럼 즉시 공동체에 흡수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아무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들도 곧 공동생활에 가담했다고 보는 것이, 즉 4,23의 τξ ζ  δ ξυζ로 표현되는 사도들에 의해 이끌리는 집단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사건 진행 기록상 자연스럽다. 모두가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한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성령 충만과 그 결과 담대한 증거생활이 있었다는 누가의 보도는(31절) 분명히 이 점도 강조한다. 이들은 “믿는 사람들의 무리”(τξ  ολ  ξυζ τ ν οθστευσ ντ ν, 32절)라고 불리우며, 삼 천 명이 갑자기 늘었을 때 처럼 긴급한 필요에 의해 소유를 나누는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32)

이 믿는 자들의 집단을 누가는 자연스럽게 “교회”라고 부르며 - 내용적으로는 여기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교회가 탄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 서서히 독립된 한 집단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5,11의 “온 교회”와 “듣는 자들”의 대조를 주의하라).33)



4. 열 두 제자들


사도행전과 복음서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열 두 사도들 만은 아니다. 아무런 자격여부를 따짐이 없이 예루살렘교회의 설립교인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에는 적어도 120명 가량이 있었다. 바울 사도의 증언을 따르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 백 여명이나 되었다(고전 15,6). 부활 후의 예수는 자신을 그의 (현재나 미래의) 제자들에게만 나타내셨다는 점을 계산하면34)

그러나 열 두 제자들은 사도라는 독특한 사명과 역할을 부여 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반면에 교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관찰하려고 하는 집단은 이런 특수한 것이 아니라 아주 일반적인 것, “사도”라는 이름을 떼어 내고도 충분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와 동일한 원리가 혹시나 복음서에서 열 두 제자들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가고 살피려면 우선 그들에게서 그들의 특수한 면을 분리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에만 특수한 사명, 즉 사도성 없이도 예수를 추종했던, “믿는 사람”이 되어 교회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다른 제자들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사도들의 이 일반적인 모습을 찾는 작업은 사도행전에서 그들이 때로는 특수한 역할을 하면서도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 없이 “믿는 자들”이라고만 불리우는 사실에서 충분히 그 정당성을 입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열 두 제자들에게 처음부터 존재했던 이 일반적인 요소에 관심을 집중할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을 따르면 베드로와 안드레는 함께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고, 잠시 후에 요한과 야고보가 또 함께 부르심을 받는다(마 4,18-22//막 1,18-20). 이 때 그들과 예수의 만남은 최초의 만남이라는 느낌을 준다. 누가복음에서는 아무래도 구면이라는 인상이 짙게 풍기는 한 사건(눅 5,1-11)의 끝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다. 이 사건 진행을 자세히 읽어 보면, 안드레, 요한, 야고보도 베드로와 함께 있었고 거의 동시에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11절: “καταγαγ ντεζ...  φ ντεζ     κξλξ ησαν”). 고기잡는 사건 때문에 시몬이 예수 앞에 꿇어 엎드리어 죄인이란 고백(= 회개?)을 하는 장면도 특이하다.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가 먼저 등장한다. 그는 처음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요한의 소개를 받고 예수를 따르지만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는 것이 역시 실제적인 출발점이 된다.35)

이 네 명을 제외하면 예수와 만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는 것은 공관복음서의 레위(마태)와 요한복음의 빌립 뿐이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느닷없이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36)

결론적으로 요약해 보자. 열 두 제자들은 모두 예수께서 “따르라”고 부르심으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이 예수의 부름을 받았을 때, 1. 그들은 생면부지의 한 나그네를 만났으며 그의 권위적인 요구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거나, 2. 이미 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어린 양,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심을 알고 그의 부르심에 반응을 나타냈거나, 3. 아니면 1과 2 사이의 어떤 수준에서 예수를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의 추종자들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지 확실한 것은, 이 때 그들은 부활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처럼 그렇게 풍부한 혹은 완전한 기독론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위의 2번에 요약된) 요한복음의 경우와 같이 그들이 예수를 이스라엘의 메시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알고 따르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이 결론은 변함이 없다. 그들의 믿음에는 예수의 십자가, 부활, 그리고 이에 관한 구속론적인 의미들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37)38)

제자들을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의 목표 자체는 아니었다. 목적은 다른 데 있었는데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는 것”이었다. 열 두명 각자의 경우마다 이 점이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열 두 사도를 임명하시는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부르심-어부로 만듬”의 도식이 열 둘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와 함께 걷는 삼 년은 예수께서 이들을 어부로 만드시는 기간, 혹은 이들이 어부로 교육받는 기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주 자신을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 천국의 자녀를 모으는 추수군, 구원자로 묘사하고 있다. 즉 예수 자신이 천국의 어부가 되어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 가셨다. 그가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이렇게 보면 자신의 일을 그들에게 위임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따르라”는 부름에는 일반적인 요소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이 요구를 사도들과 관계된 특수한 것으로 일단 취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수의 “따르라”는 부르심과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름”,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의 연결성은 후대의 교회 구성원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요소라는 뜻이다.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다른 이유는: 1. “따르라”는 명령이 모든 경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2. “따르라”는 명령이 없이도 (예를 들면 호기심에서 혹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주님을 믿는 자들도 있었음을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다; 3. 부활절 이후에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따름은 문자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개념이 되고 말았다.

“따르라”는 예수의 명령과 “따랐다”는 제자들의 반응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요소를 추출하기 위해 우선 보통 무리에게 사용된 “따름”이란 단어를 살펴 보자. 사람들이 예수에게 모여들었던 것은 대개 들려오는 소문에 자극받은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직접 오기도 했고 더러는 병자들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몰려 왔던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고 보고 듣기도 했다. 그의 사역과 가르침에 매혹된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그를 따랐다. 이들의 태도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예수께 적개심을 보이거나 적대행위를 보이는 유대 지도자들과는 크게 달랐다. 또 예수를 “따랐던” 이 사람들은 단순히 병을 고치기 위해서나 호기심만으로 주님을 애워 싸고 있었던 무리와는 같지 않았다. 예수의 사역의 결과가 어느 정도는 그들에게 나타나고 있었다고 평해야 한다. 즉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따름”이란 행동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생생한 응답인 것이다. 하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이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도 달랐다. 제자로 불리우는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이들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렇게 예수를 따르는 것이 믿음에 이르게 되는 지름길이 된다고... 그렇다면 예수를 향해 언젠가 결정적인 태도를 표명하지 않는 한 이들의 따름은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따른 무리들은 그들이 주님을 따랐다는 사실 보다는, 이렇게 따름으로 언젠가 그들의 생애의 한 결정적인 전환기를 맞아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이란 점에서 가치있는 것이다.

제자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예수를 따른 것은 예수의 명령 “따르라”에 의한 것이었다. 예수의 부르심에 그들은 “따름”으로 응답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따름”은 그 자체가 순종(의 행위)이다. 이 행동에는 그들을 부르신 분에 대한 강한 믿음이 깔려 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얻을지 재어보지 않았다.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따라 오라”는 말씀에 그들은 모든 것을 놓고 무작정 그를 따라 나섰다. 어디로 가시든지... 언제든지... 그들은 살아 움직이시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예수의 손에 맡긴 채 ... 비록 실수하고 오해하고 때로는 야단을 맡기도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적어도 그를 따를 수 있는 데까지는, 계속해서 그를 따랐음을 복음서가 증언한다. 이 제자들에게 믿음이란 단어는 자주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믿는 자로 취급되고, 믿는 자에게 적용되는 천국의 축복이 약속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부르신 분에 관해 비록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강한 믿음이 있었다. 앞 서 가시는 분을 어린 아이와 같이 신뢰함이 있었다. 이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서술할 때 우리는 믿음을 이렇게 “인격적 의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앎이나 지식, 혹은 인정으로 이해하지 않고 신뢰, 맡김, 인격적 의존으로 이해할 때 살아계신 예수를 향한 믿음이란 곧 제자들의 가장 큰 특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어 외에 다른 무엇으로 제자들을 이렇게 특징있게 한 마디로 묘사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그들의 실패나 오해, 그들에게 향한 책망 등을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이 예수와 함께 걸었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의 한 부분으로 회상하고 있다. 제자들이 보인 이 부정적인 면들은 그러나 의존으로 풀이되는 믿음이 없었거나 없어졌기 때문에 야기된 현상은 아니다. 가끔 여러가지 내부적, 외부적, 심리적 요인들로 흔들리기는 했지만, 인격적 의존이란 이 본질적 관계에  지울 수 없는 선이 그어진 때문은 아니었다. 예수는 그들을 부르셨고, 사도로 선택하셔서, 자신이 세운 목표로 그들을 이끌고 계셨다. 그들은 아직은 주연이 아니었다. 그들의 역할은 조연이었고 배우는 것, 익히는 것,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모습은 복음서에 소극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어떻든 주님의 생애가 완성되기까지 그들이 주님을 변함없이 따랐다는 것이 예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확고했다는 증거이다. 그들의 부정적인 모습은 그들이 이렇게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예수, 그들의 주님을 사실은 그들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불완전했던, 역사의 진행과정 즉 계시의 진행과정에 있었던 기독론적인 지식의 한계가 빚어낸 것이었다.

열 두 제자들도 예수의 승천 이후의 믿는 자들 (=그리스도인들) 같이 예수를 전혀 모르는 지식의 백지상태에서 출발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실제로 만남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반해, 후대의 신자들은 예수를 직접 만나지 못하고 복음을 듣는 것으로, 그리고 언제가 살아계신 예수를 영적으로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열 두 사도들은 예수를 만났을 때,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를 때, “믿는 자”로 변하지만 그들의 기독론적 지식은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에 대한 반응, 즉 실제로부터 얻은 지식이었다. 그들은 실체와 함께 있었다. 실제로 예수와 함께 했기 때문에 그들의 적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확실히 믿는 것이 가능했다. 그들은 살아계신 예수와 함께 있었다. 그 분 앞에 무릅 꿇는 것이 그들의 강한 믿음을 증명하는 시기였다. 그들이 그 분에 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과 상관없이 그분을 온 마음과 온 뜻과 온 정성을 다하여 섬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 믿음이란 관계 위에서 그들의 지식은 점점 증가하고 확실해졌다. 그들에게는 이 점진적인 과정에 신속히 적응하는 태도가 함께 요구되었다. 믿음은 완전했으나 새로이 벌어지는 기독론적이요 구속론적인 현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은 실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기독론적인 지식의 불완전성은 예수의 생애가 완성되자 금방 해소된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 승천이 가져온 변화는 불신자들을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불완전했던 지식, 구속사 이전의 지식이 완전한, 역사적 지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열 두 사도의 믿음에 관한한 복음서들에 수록된 부활절 이후의 보도와 사도행전의 첫부분에서 아무런 변화도 발견되지 않는다.  

부활 이전에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 특별히 12 제자들의 부활절 이전의 상태를 기술할 수 있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그러나 사도로서 받은 사명과 역할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또 부활절 이후의 변화와 차이를 감안한다면 제자들을 특징지을 수 있는 단어는 결국 “예수를 믿음” 하나 뿐이다. “믿음”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서신서들을 관통하는 개념이며,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인간편의 유일한 긍정적 반응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교회를 매개체로 하여 교회의 구성원리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잡은 것은 따라서 교회의 출발점이 오순절보다 훨씬 이전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준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나, 믿는 자들이 나타났을 때 이미 교회는 그 모습을 역사상에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교회는 그를 믿는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진작부터 12제자들을 교회라고 부르지 않고 오순절 이후에나 이 단어가 그리스도인 집단체에 기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이 질문과 관련하여 교회란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나오는 마태복음 16,13-28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이 보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분해된다. 1. 예수의 질문, 베드로의 고백 그리고 이 대답에 대한 칭찬(13-20절). 2. 고난, 죽음, 부활에 관한 첫 예고(21-23절). 3. 예수의 충고(24-28절). 똑 같은 순서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구에서 발견된다. 우리가 관찰하려는 부분은 1과 2의 상관관계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 사건이 시작된다. 예수는 그들의 개인적 소견을 물어보신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들 모두의 합의된 견해를 듣고 싶어 하셨다.39)40)41)

이유없이 베드로가 부각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제자들 앞 서 예수를 그의 주로 고백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 고백이란 너무 형식에 치우친 개념이요 겉으로의 행동을 연상시키고 그 내면적 동기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기 때문에 -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신 기독론적인 확신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표현된 것은 다름 아닌 기독론적인 지식이므로 예수께서는 무엇보다 그의 지적 요소를 크게 평가하신 것이라고 제한하는 것은 잘못이다.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제자들은 그들이 부름을 받은 그 때부터 가이사랴 빌립보 途上의 이 때까지 계속해서 예수를 따르는, 따라서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그를 의존하는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기독론적 지식과 그 지식이 지시하는 그리스도에의 신뢰는 뗄 수 없는 상관개념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이런 식의 분리를 찾으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의 얘기가 가능해 진다: 베드로는 그의 신앙고백 때문이 아니라 이 신앙고백을 만들어 낸 그의 내면적 확신, 그리고 이 확신에 근거한 인격적 신뢰 때문에 특별한 칭찬을 받은 것이다. 이 믿음은 제자들의 모든 사역의 출발점이요 목표가 된다: 즉 바로 이 믿음 위에 “예수의 교회”가 세워진다. 예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곧 교회의 기초, 구성원리로 제시되었다.42)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이 사건이 있은 직후에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예고하시기 시작하셨는가? 그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일”(τ  τξ   εξ , 23절)이요 따라서 그대로 일어나야만 한다(21절의 δε 를 참고하라). 이 십자가의 길을 방해하는 것은 “사람의 일”(τ  τ ν  ν ρ ο ν)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을 교회의 기초로 제시하시면서도 그의 믿음에 아직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들어 있지 않음을 아시고, 미래에 이러한 내용이 믿음의 지적인 요소로 첨가될 때 그가 교회의 기초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의 예고는 또 하나의 필연성을 알려 주시는 역할을 한다: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믿음에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란 최소한도의 기독론적 지식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 지식 만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청난 오해이다. 복음서가 보여주는 제자들의 확신 그 근저에는 구속역사가 완성된 후에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그 의미가 실제적인 지식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지만, 교회란 기독교적 의미의 집단체로 불리우는 데는 불완전하고 부적당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사역을 보고 듣고, 그러고도 계속하여 그를 따르며 모든 것을 맡기는 이 제자들을 이제 완전한 교회로 취급하신다: “볼찌어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교회는 예수의 출현과 함께 태동하기 시작하여, 12제자에게서 어느 정도의 윤곽을 얻은 다음에 예수의 지상사역이 끝나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 복음의 전파와 이 복음을 받아 들이고 복음이 지향하는 바 살아계신 예수를 의존하는 믿는 자들이 있는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시며(마 18,20 참조) 그렇게 예수의 교회가 세워진다.



5. 교회의 흔적과 그 부정적 부분


우리가 발견한 “교회”( κκλησ α)의 출발점: 예수의 출현(부름)과 그를 믿는 사람들(응답),에 돌아가 보면 예수는 처음부터 제자들 개인보다는 그들이 모인 집단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이것은 복음서기자들의 일반적 경향이기도 하다.43)

예수는 그의 사역 초기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서 별도로 12명을 사도로 임명하셨다(마 10,1-4//막 3,13-19//눅 6,12-16).44)45)

복음서에는 제자들을 한 집단체로 취급하는 많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한 구체적인 예로 제자들을 “양 무리”(마 26,31; 요 10,26; 21,15-16; 눅 12,32 등)로 표현한 것을 들 수 있다. 특히 마태복음은 이 면에 괄목할 만한 강조점을 보여 준다. 신학자들이 기독론과 함께 교회론을 마태복음의 두 가지 대 주제로 꼽는 것은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46)

예수께서는 애당초 교회를 염두에 두고 계셨다고 주장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아니면, 좀 더 정확히 표현해 본다면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과 함께 사역을 하시다가 자신이 “떠나신 후” 그들에게 계속되는 사역을 맡기려고 그의 이름으로 뭉칠 한 집단, 즉 사람들을 낚는 어부들의 집단을 계획하셨는데 이 집단에 후에 “교회”( κκλησ α)란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같은 주장을 천국과 관련지어 말할 수 있다. 이 개념 “천국”을 설명하는데는 세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구속사역의 주체인 하나님 (혹 예수), 그 대상인 (천국의) 백성, 이 사이를 연결하는 끈인 “하나님의 주권” 혹은 “하나님의 통치”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비교하면 교회는 두번째 요소인 “백성” 혹은 “천국의 시민”이라 불리우는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천국민을 불러 모으셨다거나,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천국의 자녀들을 이 세상에 심고 계셨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천국의 자녀들이 눈에 보이게 되는가? 조직신학적 언어로 불가시적(不可視的) 교회, 이상적 교회(ecclesia latens), 진정한 교회, 천상의 교회 혹은 승리적 교회가 역사 속에서 가시적(可視的) 교회, 경험적 교회, 전투적 교회, 현상적 교회로 변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교회를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일고 있다. E.G. Jay는 이런 분류법은 Platon의 Idea論에서부터 온 것이지 결코 순수한 기독교적 발상이라고 보지 않았다.47)48)

예수께서 열 두 사도들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으며 남다른 권한과 책임을 주셨지만, 그러나 그 전체가 긍정적으로만 다뤄지지는 않는다. 사도직이란 구조가 자동적으로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의미이다. 사도 중에도 배반자가 있었다. 그는 예수를 파는 역할을 담당했다. 교회를 탄생시키는 과정의 한 어두둔 부분이었다 (요 6,70; 17,12을 참조하라). 적극적으로 말해지던 이 집단, 천국의 백성 혹은 교회에 이러한 부정적 부분이 있다는 것은 예수의 교훈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인자가 뿌리는 천국의 씨앗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태도여하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낳는다(마 13,3-9.18-23과 병행구).49)50)

교회 안에서 발생한 몇가지 사건으로 예증을 할 수도 있다. 사도행전 8,9-24에 마술쟁이 시몬에 관한 사건이 수록되어 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할 때에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다( ο στευσεν κα  βαοτθσ ε ζ  ν ορξσκαρτερ ν, 13절). 그러나 그는 잠시 후에 돈을 주고 성령받게 하는 은사를 사려고 한다. 베드로의 저주와 “이 도에는( ν τl λ γι τξ τι)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도 없다”는 선언이 잇따라 나온다(21절). 믿고 세례를 받은 긍정적인 면 후에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난 경우이다. 교회 안의 부정적인 어떤 상(象)은 그러니까 20세기에 와서 생긴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 시대에부터 있었다. 그 시초를 우리는 아마 갸롯 유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요일 2,19에는 교인 중에서 빠져 나간 적그리스도에 관한 경계가 보인다. 교회라는 예수의 목표, 그의 구속사역의 결과와 관계하여서도 이런 치부가 섞여 있다는 것은 교회사와 현실의 교훈이기도 하다.

심판의 경고가 (교회 밖의) 불신자들 만이 아니라 (교회 안의) 신자들에게도 주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마 7,21-23에서는 예수를 향해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51)52)

교회의 혹은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의 이 부정적인 부분에 어떤 이름이 적당하고 어떤 해석을 동원해야 하는가? 아직 일치된 학설을 찾기는 힘들다. 가장 쉽고 흔한 방법은 이것을 다만 “가시적 교회”의 불가피한 현상으로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 부분이라고 해명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분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해답을 위장했다거나 속였다거나 아니면 스스로 속았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회개한 사람을 진정한 교회로, 외면상, 형식상 회개했을 뿐인 사람을 진정한 교회를 물들이는 사탄의 가시로 구분한다. 진정한 신자와 명목상의 신자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밝힌대로 신약성경이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어려움이 있다. 하늘에 참된 신자들의 목록이 있고 이 목록에 따라서 사람들이 믿음으로 와서 믿는 자가 되는데 간혹 이 목록에 전혀 들어 있지도 않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교회 속에 들어와 물을 흐린다는 입장은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너무 이론적이요 인위적이며 설득력이 약하다. 물론 예수께서도 양의 가죽을 쓰고 들어오는 이리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신다거나 일단은 긍정적으로 평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무엇보다 교회란 용어는 이렇게 애매하게 사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교회란 믿는 사람들이다. 혹은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 κκλησ α)란 개념은 긍정적으로만 쓰일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믿는 듯이 보이는 무리는 아니다. 믿는다고 공언하는 무리들도 아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믿는 듯이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진정한 믿는 자들이,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 주님께 모두를 맡기는 사람이 ”교회”( κκλησ α)가 된다. 양으로 가장하는 이리나 위에서 다룬 것과 같은 부정적인 모습들에는 이 교회란 명칭이 적용될 수 없다.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교회란 예수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 구조나 조직에서보다는, 또 교회의 역할이나 특성의 설명에서 보다는 그 구성원리에서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소위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의 구별이 나온다. 신약성경적인 용어를 선택한다면 참된 교회 만이 “교회”( κκλησ α)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성질상 항상 교회이기 위한 - 불신자들의 사회에서 믿는 자로 자신을 구별하여 그리스도에게 깨끗하게 바치기 위한, 혹은 믿는 자들에게서 믿지 않는 자들을 구별하여 배제하기 위한 - 몸부림을 수반하고 있다.



6. 맺는 말: 교회의 확인근거


한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교회가 자신의 진실성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큰 차이가 없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는 - 믿음은 앎이 아니라 기독론적 지식을 기초로 하여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신뢰하는 것이다 - 사람들인 것 처럼, “교회”( κκλησ α)란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개념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인”이나 “교회”란 단어의 定意 내릴 수 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개별적 명칭이요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집합적 명칭이다.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인 이외의 교회가 있어서도 안된다. 교회는 즉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란 표현이 사용되는 그 근거: 즉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구성하는 그 원리: 즉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들이 가진 주님을 향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가? 어떻게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쉽게 “주님만이 아신다”는 식으로 문제를 피해갈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교회”란 결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이 되고 우리는 불가지론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온갖 불의와 타락, 부정과 부패가 교회를 휩쓸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주님만 아신다”고 뒷걸음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께서 아시는 것 처럼은 알 수 없겠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서 “믿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서 그리스도인임을 확인할 수 있을까? 우선적으로 “믿음”이란 단어를 성경, 특히 복음서가 보여 주듯이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안다”는 고백이나 “인정한다”는 고백 혹은 “정말 그렇다”는 고백을 배제할 수 있다. 이러한 고백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적인 믿음으로 간주하기에는 핵심이 빠지기 때문이다. 정말 성경적 용법으로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으면 충분할까? 믿는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요 인격적 의존이기 때문에, 또 인격적으로 의존해야할 그리스도는 이미 지상사역을 종결하고 하나님 우편에서 영적으로 이 세상을 통치 하시기 때문에, 이런 심리적인 차원에서 표현되는 고백은 여기 저기 많은 헛점을 남길 수 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원수요 교회의 적으로 활동하는가! 고백은 진정한 믿음이 있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데 고백 만으로는 그 믿음을 확인하기에는 수 많은 장애 요소가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믿음과 행위, 나무와 열매의 관계로부터, 우리는 개개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확인 근거를 배우게 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 처럼, 맺어야 하는 것 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열매를 교회는 교회 다운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고백과 행위로 그 자체를 계시”한다.53)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거나 “그들의 행위로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다”고 하신 예수의 교훈은54)











1). 한국어 대사전, 한국어사전편찬회편, 서울: 현문사 1976, p. 183.




2). 자세한 것은 정훈택, 「예루살렘공동체: 이상적인 교회?」, 한국교회,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부설 교회문제연구소, 11(1990), p. 9-11을 참고하라.




3). 이 문제에 관하여 정훈택, 「열 두 제자들: 그리스도인의 모형?」, 총신원보 제 71호 (1990)을 참조하라.




4). P. Rieger는 Anf‟nge der Kirche im Neuen Testament, G ttingen 1967(신약의 교회개념, 복음주의 신학총서 29, p. 96에서 재인용)의 편집자 서문에서 이러한 방법을 종교개혁적 사고의 원칙이라고 이름붙였다. 




5). Albert Nolan, Jesus before Christianity, New York 1978 (=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정한교 역, 서울: 분도출판사 1980).




6). 위의 책, p. 223을 보라.




7). Jacques Ellul, La Subversion du Christianisme (= 뒤틀려진 기독교, 서울: 대장간 1990).




8). 위의 책, p. 25.




9). A. Loisy, l' Evnagelie et l' Eglise, 1902, p. 111 (H.N. Ridderbos, De komst van het koninkrijk, Kampen 1950, p. 291에서 재인용). 이 말의 의미와 이에 대한 비판을 E.F. Harrison, 사도교회의 역사와 성장, p. 94에서 읽을 수 있다. 천국과 교회의 관계는 배타적이거나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인 관련성이 있고 또 상호보완적이다.




10). C. Graafland, "Enkele notities over de kerk", in: Theologia REformata 20 (1977), p. 104-105는 이 교회의 시발점이 교회의 기초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현교회의 모습을 비평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De kerk moet zich altijd weer richten naar haar oorsprong, haar bijbelse oorsprong. Haar oorsprong is dan ook tevens haar criterium. In dit toetsingsproces zal zij juist ware kerk belijken te zijn en met een eigen door God haar verleend gezag en authenticiteit in deze wereld actueel zich manifesteren. Niet in haar aanpassing aan de tijd maar in haar gebondenheid aan het woord Gods ligt haar kracht en haar indentiteit". Cf. A. Noordegraaf, "De kerk in het Nieuwe Testament", in: Theologia Reformata 6(1963), p. 109.




11). L. Berkhof, The Doctrine of the Church and of the Means of Grace = 교회론, 신복윤 역, p. 36-37.




12). 박형룡, 교의신학 교회론, 박형룡박사 전집, VI, 서울 1983, p. 30-31.




13). Berkhof는 이 괄호 안의 문구를 제목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설명에서는 덧 붙이고 있다.




14). 두 저자는 모두 이것이 어떤 종류의 믿음인지에 관하여는 말하지 않지만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아마 신론적 믿음을 의미한다고 판단된다.




15). A. Noordegraaf, 앞의 글, p. 111. 비슷한 견해를 E.P. Clowney, 성서적 교회론, 성광문화사 1981, p. 29-31을 참고하라: “하나님의 교회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이 계신 그의 백성들 한 가운데 있다”(29); “교회는 라오스(λ ξζ)인데 그것은 참된 이스라엘로서 육적인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 그것은 새 언약의 백성들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들이다. 그것은 할례받은 자들이다. ...”(32).




16). E.G. Jay, 교회론의 역사, 주재용 역, 서울: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6, p. 14.




17). Harrrison, 앞의 책, p. 192는 유사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평했다: “신약성서의 교회와 같은 제도로서의 교회가 구약성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예언되어 있지도 않다.”




18). 박형룡, 교회론, p. 28.35 등; W. Huber, 교회, 이신건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0, p. 16 등등.




19). J.f. Balchin, What the Bible teaches about the church, Wheston 1979, p. 11.




20). 같은 책, p. 15. 그는 교회를 "Christian Community"라고 정의한다.




21). Jay, 교회론의 역사, p. 15.




22). G. Johnston, The Doctrine of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 Cambridge 1943, p. 58 (Jay, 교회론의 역사, p. 18에서 재인용).




23). Harrison, 앞의 책, p. 193에서 그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다음의 세가지를 지적했다: 1. 열두제자의 선택과 훈련; 2.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약속; 3. 선전과 예수의 관계.




24). Balchin, Ibid., p. 20. 그러나 그는 이 둘을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25). Jay, 교회론의 역사, p. 75에서 재인용.




26). A. Schlatter, The Church in the New Testament, trans. P.P. Levertoff, 1961, p. 4-5.




27). F.M. Braun, Neues Licht auf die Kirche 1946, p. 93.




28). 통속적으로는 이 단어는 자주 어떤 장소나 건물 등 그리스도인들의 모임과 관계 있는, 눈에 보이는 무엇을 지시했다. 그러나 원초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자체를 지시하는 단어이다.




29). 고린도전.후서나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자주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는데 틀림없이 예루살렘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 판단된다.




30).  Εκκλησ α가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B.C. 2세기경부터 보편적으로 쓰이던 단어 임을 근거로 S.Kistmaker는 예수님께서 마 16,20에 이 단어를 사용하셨을 수 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현대의 복음서 연구, 신성종.최갑종 역, 엠마오 1985, p. 124-126). 지금 우리가 논하는 것은 이 단어의 그리스도교적인 의미가 실제로 한 단체에 적용된 역사적인 경우이다.




31). 이 14절에서부터 120명이 함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은 11사도와 여인들(어떤 학자들은 이들을 사도들의 부인들로 추측하기도 한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 만이 등장한다. 15절은 새로운 장면의 시작을 알려준다고 판단된다. 




32). 그들의 공동생활은 필수적이거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일시적이요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앞에 언급한 「예루살렘교회: 이상적인 교회?」를 보라.




33). 극소수의 사본에는 2,47에 교회란 단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34). 마 23,39: “내가 너희에게 (= 예루살렘, 유대인들) 이르노니 니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시는 것이 아닐까?




35). 요 1,39: “와 보라”를 참고하라.




36). 마 9,9-11//막 2,14-22//눅 5,27-38




37). 요한복음은 그들의 (유월절과 부활 이전의) 믿음에 이러한 요소들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표적(σημε ξν)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38). 마 16,21-28; 17,12.22.23; 20,17-19; 막 8,31; 9,1; 눅 9,22-27 등을 참고하라.




39). 예수의 질문은 “τ να λ γξυσθν   ”(13절), “ με ζ δ  τ να με λ γετε ε ναθ”(15절)였다. Λ γξυσθν이나 λ γετε는 마음에 품은 생각 이상의 무엇을 지시한다.




40). H.N. Ridderbos, Matthe?s II, in Korte Verklaring, Kampen 1946, p. 11.




41). 이것에 관해 Harrison, 위의 책, p. 45를 보라.




42). 위의 책, 같은 쪽.




43). 복음서 기자들의 눈을 거치지 않고서는 우리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현 복음서들을 연구하려 한다면 따라서 어차피 그들의 의도를 따라 예수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 복음서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되어 우리는 연구의 기반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44). 눅 6,13에는 이점이 다른 어떤 복음서에 보다 더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 κλεπ   μενξζ  ο  α τ ν δ δεκα). 막 3,13(ορξσκαλε ταθ ξ ζ   ελεν α τ ζ)도 비슷한 상황을 묘사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마 10,1에는 열 두 제자가 열 두 사도로 임명된다는 면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마 “제자”(μα ητ ζ)의 개념과 용법이 복음서기자에 따라 다른 것 같다. U. Luz, "Die J?nger im Matth‟usevangelium", in: ZNW 62(1971), p. 141-171을 참고하라.




45). Bachin, 앞의 책, p. 15-19를 보라.




46). 이 주제와 관련하여 정훈택, 산상설교, 로고스 연구원 1990, p. 139-168; Idem, Aan hun vruchten zult gij hen kennen, Kampen 1989, p. 24-29를 보라.




47). Jay, 앞의 책, p. 76-80.




48). A. Noordegraaf, 앞의 글, p. 114.




49). 이 비유가 무엇의 비유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 진다. 이것이 씨의 비유인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인지, 아니면 밭의 비유인지가 아직도 토론되고 있다.




50). 49절의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도 우리에게 중요한 설명이 된다.




51). 이 부름의 진정한 의미에 관하여는 여전히 신학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관한 주석으로는 정훈택, 「신약성경에서의 기독교윤리의 근거와 그 의의」, in: 성경과 신학 7(1990), p. 187-189를 보라.




52). 벧전 4,17이나 히 12,5 등도 참고하라.




53). 박형룡, 앞의 책, p. 30. J.F. Balchin, 앞의 책, p. 51도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The only test we have for the genuineness of anyone's profession is the evidence of their lives."




54). 정훈택, 「신약성경에서의 기독교 윤리의 근거와 의의」, p. 162-191과 Vruchten, p. 310-344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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