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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본회퍼의 교회론3.

에반젤(복음) 2020. 2. 25. 12:26



본회퍼의 교회론3.

 

 

3. 성숙한 세계에서의 타자를 위한 교회 - "윤리"와 "옥중서간"을 중심으로 

 

 ?정치참여와 새로운 세상의 이해/

1939년 6월 미국으로 이주하였던 본회퍼는 1939년 독일로 다시 돌아와 계속적으로 '집단 목회 훈련'의 지도자로 고백 교회 운동을 지속하여 갔으나 나찌의 교회 탄압이 더 심해지자 지금까지의 나치와 독일적 크리스쳔들에 대한 투쟁 방법인 교회 투쟁에서 나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직접적 정치투쟁으로 변신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교회는 다만 차바퀴 아래 있는 희생자들에게 붕대를 감아 주는 것만 아니라 미친 사람이 몰고 있는 자동차의 바퀴를 멈추게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이렇게 본회퍼의 정치적 투쟁을 가능케 했던 그의 신학적 전제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그의 이해였다. 

이전까지는 세상과 교회와는 구별되어지는 것으로 보았고 그의 관심은 '세상'보다는 '교회'의 내적 문제, 즉 신학적 문제에 더 치중되어 있었다. 그는 "옥중서간"에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옥중에서 생활하면서 히틀러의 탄압 속에서의 삶은 '하나님 부재', '하나님 경험의 상실'임을 경험하였고 옥중에서 경험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무종교의 사람들, 또한 히틀러와 나찌 도당들을 경험하면서 그는 이러한 시대, 세상을 '성숙한 시대, 성숙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하나님이 필요 없는 자율적 인간, 세계를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교회와 세상, 교회와 인간의 변증법적 통일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 통일의 원리, 기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는 이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신의 현실성과 세계의 현실성을 통합시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현실의 인간에 대한 심판지의 냉혹한 긍정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는 자로서 자비로우신 긍정임을 강조하였고, 바로 이 긍정 안에 이 세계의 생명과 희망 전체가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새로운 세상적 개념은 이 세상의죄와 악의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긍정은 오직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그 출발점이다. 


 ?교회와 세상의 변증법적 통일/

 

   (1)세상에 대한 교회의 네 가지 위임 - 

그는 성서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통하여 '거룩'과 '세속'의 도 영역을 갈라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보면서 '하나님의 현실'을 강조한다.  즉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 세상은 공허한 것이며,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세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교회와의 변증법적 통일을 하나님의 '위임들'로서 설명하고 있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위임들을 '노동', '결혼', '정부 혹은 문화', '교회'의 네 가지 위임임을 성서를 통하여 발견하고 이 위임명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명이라고 보았다.  그는 '위임'이란 말을 하나님의 위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공인과 위임장이라 보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의한 세상에의 일정한 통치권의 요구, 점령, 형성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위임을 맡은 자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자로 행동한다고 보고 있다.

 

본회퍼는 창세기 2장 15절에 근거하여 노동의 위임을 말한다. 이 노동은 타락이후에도 하나님의 훈련과 은혜를 위한 위탁 명령으로 남아 있었다고 하며 인간은 땀 흘려 노동해야 하는데 농업, 경제, 학문, 예술 등 각 부분의 모든 인간생활에서 해야만 한다. 이러한 인간의 노동을 통하여 인간의 세계와 가치의세계가 창조되는데 이것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 위에 새로운 사물들을 만들어내는 행위로서 인간은 노동의 위탁명령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계획하고, 그리스도를 항하여 개방되고, 섬기며, 영화롭게 해야 한다. '결혼'은 단지 아이를 낳는 일만이 아니라, 부모로서 자녀들을 하나님에게 복종케 하는 교육을 위임담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남녀의 결혼으로 이해했다. 

 

노동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든 결혼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새 생명들을 창조한다. 정부의 위탁명령은 노동과 결혼을 전제로 하며 의존한다.  정부는 창조된 것을 보존할 뿐이며 하나님이 부과하신 과제를 통하여 부여받은 질서 속에서 법과 칼을 사용하여 창조된 것을 유지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위임이나 결혼의 위임이 국가권력, 정부의 위임 안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그는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위임은 위의 세 가지와 다르다.  교회의 위탁 명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을 교회의 설교와 조직,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실현시킨다고 보았다.  앞의 세 위임과 교회의 위임은 인간에게 있어서 동시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노동자이며 가정의 상대자이며 정부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2) 대리와 책임 -

본회퍼는 '성숙한 시대와 세상', '무신의 세계'속에서 관심을 갖고 교회와 기독교인의 세상에서의 삶의 스타일은 바로 '책임적 삶'이어야 나며, 세상의 죄와 고난을 대신 져 주는 '대리직'으로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책임적인 삶의 형태는 두 가지 요소에 의해 조건 지어 진다고 인정한다. 즉 하나는 삶은 인간과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자신의 삶은 자유하다는 것이다. 책임을 지는 것, 즉 대리 역할을 하는 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대리 역할의 모범적인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행동을 말하고 있다. 예수는 결코 스스로가 완전성에 도달하려 한 단독자가 아니다.  단지 자신에 의해서 모든 인간의 '나'를 받아들이고 감당하신 분으로 사신 것이다. 그의 생활, 행위, 노력의 전제는 대리이다. 그는 인간이 자기의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완전히 희생하는 데에서만 대리와 책임이 성립된다고 보며, 대리적인 생활과 행위로서의 책임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인간에 대한 관계라고 보고 있다. 

또한 책임과 복종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책임 안에서 복종이 행해진다고 보고 있다. 본회퍼는 책임적인 삶이 실현되는 장소로서 '소명'을 논한다.  그는 신약성서적인 면에서 소명이란 세상적인 제반 질서의 성화가 아니며 그것들에 대한 긍정은 동시에 항상 강한 부정, 즉 세상에 대한 예리한 항거를 내포한다고 보았으며, 루터가 수도원으로부터 세상, 즉 소명에로 귀환한 것은 위시 기독교 이래로 이 세계에 대하여 취해진 가장 격렬한 공격이요 타격으로 보았다.  그는 소명에 있어서 책임이란 오직 그리스도의 부름에 따르는 깃이라고 보면서 한 개인의 책임의 한정, 확장은 하나의 원칙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면서 그 근거는 오직 예수의 구체적인 부름이라고 말한다.

 

  (3)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

그는 교회와 세상의 적극적인 관계를 말하기 위해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에 대하여 논한다. 죄인된 인간이 의롭게 되는 사건은 궁극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가능하다. 이러한 궁극적인 말씀은 단 한 번 결정적으로 모든 인간의 궁극 이전의 것을 배제해 버린다.  그것은 바로 용서의 말씀이고 다만 용서만으로 의롭게 되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은 가능하다고한다. 인간은 궁극적인 길의 전 과정을 횡단해야 하며, 이 과정 속에서 개개인은 무거운 짐을 지고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궁극적인 것을 위하여 궁극 이전의 것이 말해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궁극적인 것'과 '궁극이전의 것' 사이의 관계문제는 두 개의 극단적인 해결의 형태가 주어질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단지 궁극적인 것만을 고려함으로써 궁극이전의 것은 완전히 무시하는 배타적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궁극이전의 것의 파괴자요, 원수가 되며, 궁극 이전의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적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말씀은 궁극적인 말씀에 대항하는 모든 저항을 분쇄하는 냉혹한 율법이 된다. 다른 방법은 '타협'이다.  궁극이전의 것은 그 자체의 자리를 유지하며, 궁극적인 것에 의해 위협을 받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존석하고 종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궁극이전의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행해야 할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둘을 극단적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 세상의 현실을 강조한다. 그는 궁극적인 것은 십자가에서 모든 궁극이정의 것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러나 동세에 궁극적인 것의 심판에 굴복하는 궁극이전의 것을 위한 은총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된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본회퍼는 당시의 암울하고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열려있는 긍정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와 세상의 변증법적 통일의 가능성을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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