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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본회퍼의 교회론4.

에반젤(복음) 2020. 2. 25. 12:25



본회퍼의 교회론

  

4. 타자를 위한 교회

 

  본회퍼가 말하고 있는 성숙한 세계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떤 교회이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떤 것인가? 본회퍼는 "옥중서간"의 끝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성숙한 세계 속에서의 교회는 '남들을 위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을 특징적으로 강조한다. 이 '남들을 위한 교회'는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범으로서 보여져야 할 교회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는 오직 남들을 위해서 존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곧 예수는 오직 남들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경험 안에서 인간 존재의 완전한 전환이 일어난다. 본회퍼는 기존 교회(고백교회를 포합해서)를 가리켜 자기 보존만을 위해 싸우는 데 급급한 교회라고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기존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근원을 찾는 방법과 학문, 교회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는 일에만 관심한다. 

기존교회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인격적 신앙은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는 성숙한 교회에서 무력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다.

 

본회퍼는 지난 1900년데 서구 그리스도교의 선교와 신학은 인간의 종교적 선험성 위에 있었으며, 기독교는 항상 종교의 한 형태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종교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성숙한 세계가 된 것이다.

본회퍼는 성숙한 세계에서 교회가 종교적인 하나님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간의 한계, 죄와 죽음, 약함에 집착하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삶의 한복판에서 생명과 선에서 하나님을 말하려 한다.  즉 성숙한 세계 속에서의 교회는 모법을 통해서 보여지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인간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을 요구한다. 그들은 인간의 모든 능력이 쓸데없게 될 때 신에 대해 말한다. 그러한 신은 작업가설의 신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심으로 인간을 도우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그의 전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연약함과 고난에 의해서이다.

 

 

정 리

  이때까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본회퍼의 신학적 형성기라 할 수 있는 1926-32년 동안에 본회퍼는 '교회'공동체의 존재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면서 구체적으로 보이는 교회를 강조하였고, 그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와 사랑이 경험되어지는 곳으로서의 공동체를 주장하였다.

 

둘째, 그의 교회투쟁기라 할 수 있는 1933-39년 사이에 그는 초기의 교회의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나찌즘과 독일적 크리스찬들이라는 참된 교회의 적들을 대항하여 고백교회 운동을 펼쳐 나가면서 그의 교회론을 한창 더 발전, 심화시켜나갔다. 

이 시기에 그가 이해한 교회는 '제자직'으로서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임과 동시에 세상과 구별되어지는 교회였다. 이것은 교회는 세상이 갖지 못하는 비범성과 거룩함을 내적으로 다지며, 타락되어진 세상과 투쟁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회퍼의 신학과 삶은 큰 전환을 가져왔다. 그것은 바로 그가 정치투쟁에 직접 가담하면서부터 일어난 전환의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교회와 세상을 대립되거나 모순된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교회의 세상성'을 강조하면서 성숙한 세상을 향하여 교회는 나가야 하며,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타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교회가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인간의 삶, 성서적 비종교적 해석과 신앙의 비밀 훈련, 성실한 기도와 책임적인 행동,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예배와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삶이라는 두 가지 신학적 기둥을 갖고 교회론을 전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교회론은 신학적 도그마로 혹은 단순히 인간화를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서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존재 기반으로 하며, 성경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시키는 능력을 힘입어 교회는 악마로서의 세상과는 구별되어지면서도 세상을 향하여, 타인을 위하여 고난까지도 담당해 나가는 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교회론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그가 당시에 처해 있던 시대적 상황이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음에 철저한 제자직으로서의 교회 강조, 전투의 교회, 희생의 교회, 즉 십자가의 교회를 강조함은 이해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희망, 또한 성경의 내재하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확신과 기쁨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너무 약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본회퍼가 강조하였던 교회의 존재근거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기 정체성, 존재 기반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삼음으로써 불필요한 분쟁이나 분열을 막고 참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가 주장하였던 교회는 세상 안에서 존재하면서도 세상과 구별되어지는 존재라는 명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의 급변하는 변화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면서도 결코 일반 사회의 이념, 가치관, 사상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메시지를 던져주는 참된 교회로 남아 있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본 훼퍼

1906. 2. 4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1945. 4. 9 바이에른 플뢰센베르크.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개요] 에큐메니컬 운동을 지지했으며, 세속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의 역할에 대한 견해로 중요한 인물이다. 아돌프 히틀러를 타도하려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투옥되어 처형당했다. 그가 죽은 뒤인 1951년 출판된 〈옥중 서간 Widerstand und Ergebung〉은 그의 신념이 담긴 가장 심오한 글이다.


[초기교육] 아버지 카를 본회퍼가 정신의학 및 신경의학 교수로 있던 베를린대학교의 학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923~27년 튀빙겐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대학교에서는 아돌프 폰 하르나크, 라인홀드 제베르크, 카를 홀 같은 역사신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카를 바르트가 스위스에서 주창한 새로운 '계시신학'에 크게 매료되었다. 비판적 입장에서 바르트에 동조한 그의 태도는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 Sanctorum Communio〉(1930, 〈The Communion of Saints〉로 1963년 영역)에 담겨 있는데, 그는 이 논문에서 교회를 사회학적·신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행위와 존재 Akt und Sein〉(1931)에서는 선험철학과 존재론, 지식과 존재에 대한 칸트 철학 및 칸트 이후의 이론들이 개신교 신학과 가톨릭 신학에 끼친 영향을 추적했다. 1928~29년 바르셀로나에서 독일인 교회의 부목사로 일한 뒤 뉴욕 시에 있는 유니언 신학교에서 1년 동안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1931년 독일로 돌아와 곧 베를린대학교 조직신학 강사로 임명받았다.


[나치에 대한 항거]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초창기부터 반(反)유대인주의를 공언한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1933~35년 런던에 있는 조그만 독일인 교회 두 곳에서 목회를 하느라 18개월 동안 독일을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에 대한 개신교 저항운동의 중심이었던 고백교회의 지도적인 대변자가 되었다. 1935년 핑켄발트(포메라니아)에 고백교회를 위한 신학교를 새로 설립하고 책임자로 임명받았다.

 

이 신학교는 1937년 정권에 의해 폐교당했지만 1940년까지 위장된 형태로 존속했다. 이 신학교에서 본회퍼는 자신의 책 〈공동생활 Gemeinsames Leben〉(1939)에 명시해놓은 기도의 실천, 개인고백, 공동규율을 실행했다. 이 기간에 산상수훈에 관한 연구서인 〈나를 따르라 Nachfolge〉(1937)를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개신교 교회들(특히 루터파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값싼 은혜'를 비판했다. 값싼 은혜는 하느님이 제한 없이 용서를 베푼다고 믿음으로써 사실상 윤리적인 방종을 은폐하는 태도를 말한다. 본회퍼는 처음에는 이렇게 엄격하고 심지어 금욕적인 모습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이 모습은 훗날 그가 주장한 '그리스도교의 세속성'과 모순되지는 않지만 대조를 이룸). 이 시기에 그가 국제문제에 대해 취한 입장은 평화주의에 가까웠다.


1931년 케임브리지에서 열린 에큐메니컬 대회에 참석한 뒤 '교회를 통한 국제우호증진 세계연맹'(World Alliance for Promoting International Friendship through the Churches)의 유럽 청년부 간사로 임명받았고, 독일에 민족주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는 가운데서도 에큐메니컬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다른 나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독일교회가 벌이고 있는 투쟁의 중요성을 알리려고 노력하던 중 영국 치체스터 주교 G.K.A.의 지지를 받았다.

1938년 변호사인 매형 한스 폰 도나니의 소개로 히틀러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단체를 알게 되면서부터 본회퍼는 점점 더 정치성을 띤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39년 미국 망명을 고려했으나 뉴욕 시에서 불과 2주 동안 체류하다가 후원자인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에게 "만일 지금 내 동포와 함께 시련을 당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삶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쓰고 독일로 돌아왔다. 그에게 가해지는 온갖 제약에도 불구하고 군사정보국에 위장 취업하여 저항운동을 위한 역할을 계속 수행했는데, 사실상 이 군사정보국이 저항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42년 5월 스웨덴으로 가서 벨 주교를 통해 저항운동가들의 평화협상안을 영국 정부에 보냈으나, 이러한 희망은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정책 때문에 좌절되었다.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체포되어 베를린에 수감되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본회퍼가 암살음모에 직접 관여했음을 밝혀주는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고문을 받고 결국 처형당했다. 수감되기 직전 약혼을 발표했지만 결혼은 못했다.


[윤리 및 종교 사상] 1940~43년 그리스도교 윤리학에 관한 책 1권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썼지만 일부밖에 완성하지 못했으며, 그 내용은 사후에 〈윤리학 Ethik〉(1949)으로 출판되었다. 본회퍼는 '두 영역으로 나누는 모든 사고방식', 즉 이원론적으로 교회와 세계, 자연과 은총,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을 거부했다.

그는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에 관한 교리)에 근거한 통합적이고 구체적인 윤리를 요청했고, 노동·혼인·정부를 창조질서로 보기보다는 하느님이 부여한 역동적인 임무나 기능(위임)으로 보는 윤리를 요구했다. 그리스도교와 휴머니즘이 현대의 전제정치에 대항해 손을 잡는 것을 환영했고, 개신교 사상에서 '자연적인 것'의 개념을 재발견하라고 주장했다.

옥중에서 쓴 글들은 1951년 〈옥중서간〉으로 출판되었는데, 문화적인 생활과 영적인 생활에 대해 두드러지게 많은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를 끌며, 본회퍼가 친구이자 훗날 그의 글을 편집하고 전기를 쓴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펼쳐보인 신학적 주제들 때문에 관심을 끈다.


그는 르네상스 이래 서구의 세속화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신이라는 가설 없이도 인간이 자기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점차 키워온 것은 그리스도교가 이제까지 토대로 삼아온 '종교적 전제'가 쇠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교회가 인간 지식의 결함들을 찾거나 인간의 연약함을 그리스도교 변증론의 기초로 강조하기보다는 '성인이 된 세계'에서 사는 인간의 성숙함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세에 치중하고 개인 구원에 몰두하는 '종교'의 껍질을 벗어버리면 그리스도교는 실제로 해방되어 유대교의 뿌리와 마찬가지로 현세를 중시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회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특권들을 포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인간'이었던 예수를 본받아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에 일어난 교회와 목회의 개혁운동들, 영국 울리치 주교였던 A.T.로빈슨이 시작한 '신에게 솔직히' 논쟁, '세속적인 그리스도교' 또는 '복음의 세속적 의미'를 주창하려는 노력들, 1960년대에 일어난 '신 죽음'의 논쟁, 그리고 좀더 다른 관점에서 보면 '희망의 신학'의 등장에 영향을 끼쳤다. 본회퍼의 주요저서들 가운데는 위에 언급한 것들을 제외하고도 〈창조와 타락: 창세기 1~3장에 대한 신학적 해석 Creation and Fall: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1933)과 짧은 글들을 엮은 〈전집 Gesammelte Schriften〉(5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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