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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론(뻘콥. 조직신학) 고영민 역.(1)

에반젤(복음) 2020. 2. 23. 21:15


교회론(벌콮 저 고영민 역): 기독교문사.

 

 

 

역자의 말

 

본서는 미국 칼빈 신학교 교장이며 조직신학 교수였던 고 루이스 벌콮(L. Berkhof)교수의 <조직신학>(SYSTEMTIC THEOLOGY)을 우리 말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는 한국 교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보수 정통신학의 태두(泰斗)로서 그의 저서들 중의 일부는 이미 한국교계에 소개되어 애독(愛讀)되고 있습니다.

조직신학은 기독교의 신앙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여 신앙의 의의(意義)를 명시하는 신학범주의 <알파>와 <오메가>이며, 또한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을 그 예비학, 보조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신학 전반에 걸쳐 그 역사적 이해와 신학적 방법, 문제성과 위치를 논리적 합리성에 근거를 두고 종합, 체계화 시킨 독자적이고 특수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국교계는 짧은 선교역사에 비해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적적인 신앙의 부흥을 이룩하였고, 그 지속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세계 선교의 꿈을 알차게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의 신학적인 현실과 급변하는 시대적 신앙사상의 조류를 직시할 때 말씀의 청지기 된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철저한 신앙과 신학적 재무장이 절실히 요구됨을 모두가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덧 우리들에게는 신신학, 사신신학, 세속화 신학, 정치신학등은 결코 낯설은 용어는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긴박하고도 찰라적인 시대상황의 현실적 요청이 본서를 번역하려는 새로운 사명감을 불러 일으킨 동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절대(絶對)무오(無誤)의 계시임을 철저히 인정하는 개혁파 보수정통 신앙의 전제하에 폭넓은 학문적 연구과정을 거쳐 성경에 근거한 진리의 핵심(核心)을 간략하면서도 체계있는 논리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서는 독자 여러분의 좋은 신학의 길잡이가 되리라 믿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출판하는 일에 호의와 격려를 보내주신 미국 어드만 출판사 어드만(WM. B. Eerdmans, Jr)사장님께 감사드리며 또한 오늘의 나로 키워주시고 늘 힘겨운 출판을 도맡아 주시는 한 형제 장로님과 물심양면으로 협조해 주신 김 병삼 사장님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1978년 8월 15일

역자 고 영 민.

제 1 편 교 회

 

 

서 론

 

 

그리스도의 공로드르이 적용 교리는 자연히 교회론에로 인도하는데,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구원의 축복들에 참여하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혁파의 개념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사역에 의해 사람들을 그 자신과 연합시키며 그들에게 참된 신앙을 주시며 그리하여 자신의 몸인 교회 즉 “신도 또는 성도의 단체”(conunio fidelium or sanctorum)을 구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교회의 논의가 다른 어떤 것보다 선행한다. 교회는 성경을 산출하는데 있어서 도구였으며 따라서 성경보다 우위를 차지한다고 말해지며, 더욱이 교회는 모든 초자연적인 은혜의 분배자이다.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는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교회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강조점은 신도의 단체(communio fidelium)로서의 가견적 교회에 있다. 종교개혁은 이 로마 교회의 교회관을 깨뜨려 버리고 다시 한번 영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주의를 집중하였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역과 성령의 새롭게 하는 활동을 떠나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의 논의는 논리적으로 교회론의 고찰 보다 선행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미국의 탁월한 장로교 교의학자들( 두 Hodges. H. B. Smith, Shedd, Dabney)은 그들의 교의학 저서들에서 교회에 특별한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실상 그것에 거의 유의하지 않겠다는 사실이 오히려 특별한 것처럼 보여지기 쉽다. 어떤 학자들(Thornwell Breckenridge),의 저서들 만이 이 규칙에 예외이다. 이것은 그들의 견해상 교회론이 교의학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렇지 않으니, 이는 그들 중의 한사람도 그것의 포함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투레틴(Turretin)과 그것들의 스코틀란드의 지지자들(그 기초에 그들은 세우고 있다)은 교회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워커(Walk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아마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각종 교회문제들이 광범위하게 논의된 나라는 세계에 없을 것이다.”(Scothsh Theology and Theologians, p. 95: cf, McPherson, The Doctrine of the Church in Scottish theology, pp, 1 ff.).

또한 마지막으로 하지(A.A. Hodge)박사는 그의 아버지가 실제적으로 전체의 근거를 망라한 교회론의 주제들에 대하여 그의 여러 강의실에서 강의하였으며 또한 교회론을 그의 조직신학의 제4권으로 완성하려고 의도하였지만 노년에 생긴 취약함 때문에 능히 이 일을 하지 못하였다고 알려주고 있다(Preface to Hedge's work on Church Pelity). 뎁니(Dabney)는 말하기를, 그가 교회론을 생략한 것은 이것이 그가 봉직한 신학교의 다른 분야에서 유능하게 취급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Lect. on Thel. p. 726).쇄드(Shedd)는 자기의 체제를 제시하면서 교회가 은혜의 방편과 연관되어 고찰된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은혜의 방편에 대해 거의 유의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교회론을 논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스미드(Smith)의 저서(System of Christian Theology)의 편집자는 이 저서에 다른 저서들에서 표현된 저자의 교회관을 삽입하였다.(pp.590. ff).

 

 

I, 교회의 성경적 명칭과 역사적으로 본 교회론

 

 

A, 교회에 대한 성경적 명칭

 

 

1, 구약에서

 

구약은 교회를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즉 “부르다”를 의미하는 체제된 어근 <칼>에서 비롯된 <카할>과 “지정하다” 또는 “지정된 장소에 모이거나 만나다”를 의미하는 <야아드>에서 비롯된 <에다>이다. 이 두 단어들은 종종 분별없이 사용되지만, 맨 처음에는 엄격하게 동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에다>는 원래 지명에 의한 회집이며, 이스라엘에 적용될 때 이스라엘의 자녀나 그들의 대표자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 그 자체를 나타낸다. 한편 <카할>은 원래 백성의 실제적인 회집을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종종 <케할 에다> 즉 “회중 총회”라는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출12:6, 민14:5, 렘26:17). 실제적인 모임은 종종 백성의 대표자들의 모임이었던 것처럼 보인다(신4:10, 18:16, 비교. 5:22, 23, 왕상8:1,2,3,5, 대하5:2-6).

<에다>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여호수아에서 훨씬 더 공통적인 단어이지만, 신명기에는 전혀 없으며 후기 책들에서 드물게 찾아 볼 수 있다. <카할>은 역대서의 에스라, 느헤미야에 많이 있다. <수나고게>는 70인역에서 <에다>에 대한 통상적이고 거의 보편적인 역어이며, 역시 모세오경에서 <카할>의 통상적인 역어이다. 그러나 성경의 후기 책들에서 <카할>은 일반적으로 <에클레시아>로 해석되고 있다.

슈에러(Schuerrer)는 주장하기를, 후기 유대주의는 이미 경험적 실제로서의 이스라엘 회중의 명칭인 <구나고게>와 이상적으로 고찰된 동일한 회중의 이름인 <에클레시아> 사이의 구별을 지적하였다고 했다. 바빙크(Bavinck)박사는 이 점에서 그를 뒤따르고 있지만, 크레머-퀘겔(Cremer Koegel)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홀트(Hort)는 말하기를, “포로기 이후에 <카할>이란 말은 그것과 <에다>에 속한 의미의 희미한 뜻을 합친 것같이 보이며 결과적으로 <카할>의 본래 헬라어 역어인 (엑클레시아)는 자연히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총회만큼이나 이스라엘의 회집을 의미할 것이다.”고 한다.

 

2, 신약에서

 

신약도 역시 70인역에서 유래된 두 개의 단어들을 가지고 있는데, 즉 <엑클레시아>(불러내다)와 <수나고게>(함께 오다, 함께 모으다)이다. 후자는 독점적으로 유대인의 종교적인 모임이나 또는 그들이 공공적인 예배를 위해 모였던 건물들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다(행13:43, 계2:9, 3:9). 그러나 <엑클레시아>는 일반적으로 신약 교회를 나타내지만, 몇 군데에서 그것은 보통 사회적인 모임을 나타낸다(행19:32, 39, 41). <엑클레시아> 에 있는 <엑크>라는 전치사는 종종 “백성의 일반 대중에서부터” 를 의미하며 <엑클레시아>의 성경적 용법과 연관하여 교회가 인간 세계에서부터 부름을 받은 피택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오히려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전치사는 본래 단순히 헬라 사람들이 그들의 집들로부터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적인 성경적 개념이 하나님의 계시 속에 있는 말씀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부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것이 실제로 행해졌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복합동사 <엑칼레오>는 결코 그렇게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엑클레시아>는 결코 기자의 마음에 그 특수한 사상이 임재 하였음을 암시하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이즈만(Deissmann)은 하나님을 소집자로 간주함으로써 단순히 <엑클레시아>를 “(소집된) 회합”으로 번역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개념은 다양한 면을 가진 개념이기 때문에 거기에 적용된 <엑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언제나 정확하게 동일한 함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예수님은 신약에서 이 말을 사용한 분이셨으며 또한 그는 그 주위에 모여 (마16:18) 그를 공적으로 그들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 나라의 우너리들을 받아들인 무리들에게 이 말을 적용하셨다. 그것은 참 이스라엘인 메시야의 <엑클레시아>였다. 후에 교회가 확장됨에 따라 이 말은 다양한 의의를 얻었다. 지교회들이 각처에서 설립되었고 역시 <엑클레시아>로 불리웠는데, 그것들은 한 개의 보편적 교회의 형편이었다. 다음에 나오는 것들은 이 말의 가장 중요한 용법들이다.

 

a, <엑클레시아>는 가장 흔히 어떤 일정한 지역, 즉 지교회에 있는 일단의 신자들(그들이 예배를 위해 모였든지 아니 모였든지의 문제에 관계없이)을 나타낸다. 몇몇 구절들은 그들이 모였다는 추가된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행5:11, 11:26, 고전 11:18, 14:19, 28, 35). 또 그렇지 않은 구절들도 있다(롬16:4, 고전16:1, 갈1:2, 살전2:14 등).

 

b, 어떤 경우에 이 말은 소위 가정 교회, 즉 어떤 개인집에 있는 교회를 나타낸다. 아마도 사도시대에 부한 자나 중요한 인물들이 종종 신적인 예배를 위해 자신들의 집에 큰 방을 마련해 놓은 것 같다. 이 말이 사용된 실예들은 롬16:23, 고전16:19, 골4:15, 몬2에서 찾아 볼 수 있다.

 

c, 만일 티센돌프(Tisschendorf)의 독법이 정확하다면(현재 일반적으로 인정 되는대로), 이 말은 일단의 교회 즉 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 교회를 나타내기 위해 적어도 한번 단수형으로 사용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렇게 사용된 구절은 행9:31 이다. 자연적으로 이것은 그것들이 소위 교파와 같은 조직체를 구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교회와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가 다른 장소들에서 만나는데 습관화되어 있는 몇몇 단체들을 구성하였을 수 있다.

 

d, 보다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전 세계를 통하여 임명된 직원들의 지도하에 예배의 목적을 위해 외적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조직체를 구성한 자들의 전체 단체를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그 단어의 이러한 의미는 어느 정도 고린도 전서에서 전면에 나타나 있지만(10:32, 11:22, 12:28),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때, 비록 그 편지에서 영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강조되고 있지만, 그의 마음에도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특별히 엡4:11-16을 참조하라).

 

e, 마지막으로 이 단어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하늘에서나 지상에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었거나 연합될 신실한 자들의 전체 단체를 의미한다. 이 단어의 이러한 용법은 바울의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종종 전자에서 사용되고 있다(엡1:22, 3:10, 21, 5:23-25, 27, 30, 골1:18,24).

 

“Church”, “Kerk”와 “Kirche” 라는 명칭은 <엑클레시아>라는 말에서 유레 되지 않고 “주님께 속한”을 의미 하는 <퀴리아케>에서 유래되고 있다. 그것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고유성(property)에서 유레되고 있다. <토 퀴리아콘>이나 <헤 퀴리아케>라는 명칭은 맨 처음에 교회ㅏ가 모였던 장소를 나타내었다. 이 장소는 주님께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또한 <퀴리아콘>이라고 불리 웠다. 그러나 ㅡ장소 그 자체는 공허하였으며 또한 실제로 교회가 예배하기 위해 회집하기까지 <토 퀴리아콘>으로 나타나게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단어는 교회 그 자체 즉 하나님의 영적인 건물에게 이전 되었다.

 

 

3, 교회의 기타 명칭

 

신약은 교회의 몇몇 비유적인 명칭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각기 교회의 어떤 특수한 면을 강조한다.

 

a, 그리스도의 몸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이 명칭을 신약교회의 완전한 정의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의도하고 있지 않다. 이 명칭은 행1:23, 골1:16에서 처럼 보편적 교회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고전12:27에서 처럼 단일한 회중에도 적용된다. 이 명칭은 지교회나 보편적 교회나를 막론하고, 교회적 연합을 강조하며, 특별히 이 연합이 유기적이라는 사실과 또한 교회의 유기체는 그 영광스러운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b, 성령 또는 하나님의 전

 

고린도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으로 불리우고 있다. 행2:21,22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서로 연합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하실 집”으로 함께 지어진다고 언급하고 있다. 거기에서 이 명칭은 보편적 교회적인 미래의 이상적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또한 베드로는 산돌인 신자들이 “신령한 집”으로 지어진다고 말하고 있다(벧전2:5). 그 문맥은 분명히 그가 성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내주는 교회에서 높은 성격을 부여 한다.

 

c, 위에 있는 예루살렘, 또는 새 예루살렘, 또는 하늘의 예루살렘.

 

이 세가지 형태들은 모두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갈4:26, 히12:22, 계21:2, 9절과 10절 참조). 구약에서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장소 또는 그가 상징적으로 자기 백성과 접촉하신 장소로 표현되고 있다. 신약은 분명히 교회를 구약의 예루살렘의 영적인 유사물로 간주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에 동일한 이름을 적용하고 있다. 이 표현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로서,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에서 그와 교제하게 된다. 또한 이 처소는 부분적으로 여전히 지상에 있지만 하늘의 영역에 속한다.

 

d, 진리의 기둥과 터.

 

이 명칭이 교회에 적용되는 곳이 단 한군데 있는데, 즉 딤전 3:15절이다. 이 명칭은 분명히 일반적으로 교회를 언급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의 각 부분에 적용되고 있다. 이 비사(比辭, figure) 는 교회가 진리의 수호자, 진리의 이성, 하나님 나라의 모든 원수들에 대항하는 진리의 옹호자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B, 역사적으로 본 교회론

 

 

1,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론

 

a, 교부시대에

 

속사도 교부들과 변증가들은 교회를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소유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그의 백성된 성도의 단체(communio sanctorum)로 표현하였다. 구별을 지을 필요성은 즉시 명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2세기 후반부에 눈에 뛸만한 변화가 있었다. 이단들의 출현은 “진정한” 공동교회(catholic Chutch)가 알려질 수도 있는 어떤 특성들을 명명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외적인 현현에 주의를 집중시키려고 하였다. 교회는 사도들의 직접 계승자인 감독에 의해 지배되며 참된 전통을 소유한 외면적 조직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공동성(catholicity)은 오히려 강조되었다. 지교회들은 많은 구별된 단위들로 간주되지 않고 단순히 한 보편적 교회의 부분들로 간주되었다.

날로 증가하는 교회의 세속성과 부패는 점차적으로 여러 종파들, 즉 2세기 중엽의 몬타너스주의(Montanism), 3세기 중엽의 노바티안 주의(Novatianism),4세기 초엽의 도나티스주의(Donatism)의 경향을 일으키게 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러한 종 파드릉ㄹ 대항하여 싸우는데 있어서 교회의 감독체제를 점차적으로 강조하였다. 키프리안(Cyprian)은 감독교회의 교리를 충분히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감독들을 사도들의 참된 계승자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그들의 제사적 사역의 효능에 의한 제자장적 특성을 그들에게 돌렸다. 그것들은 감독단(episcopate)으로 불리운 하나의 사단(college)을 형성하였는데, 그것은 교회의 통일을 구성하였다. 교회의 통일은 이와같이 감독들의 토일에 기초되었다. 감독에게 예속하지 않은 자들은 교회의 교제와 그들의 구원까지도 상실하였는데, 이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교회관에 있어서 전적으로 일치되지 못하였다. 그의 도나티스주의자들과의 투쟁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성질에 대하여 보다 깊이 반성케 하였다. 한편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영을 가짐으로써 참된 사랑으로 특징지워지는 선택받은 자의 무리, 즉 “성도들의 단체”(communio sanctorum)로 간주하는 예정론자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각되는 교회의 살아있는 회원이 되고 단순한 외적 의미로 그것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는 키프리우스적인 교회관(적어도 그것의 일반적인 면에서)을 지지하는 교회인(the Church-man)이다.

참된 교회는 공동 교회이며, 거기에서 사도적 권위는 감독직의 계승에 의해 지속된다. 참된 교회는 신적인 은혜의 보관자로서 성례들을 통하여 그것을 나누어 준다. 오늘날에 이 교회는 선한 회원들과 악한 회원들이 하나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혼합된 지체이다. 그러나 도나티스 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는 앞의 두 회원들은 동일한 의미로 교회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 하였다. 그는 역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로마 카톨릭과의 견해를 위해 길을 예비하였다.

 

b, 중세기에

 

스콜라주의자들은 교회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키프리안과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된 교리적 체계는 상당히 완전한 편이었고 그것의 최종적 발전을 위해 약간의 마무리하는 손질을 요할 뿐이었다. 오튼(로마 카톨릭 역사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체계는 중세기의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해 취해졌으며, 그 다음에 그들에 의해 실제적으로 그들이 받았던 동일한 상태로 트랜트 회의 이후에 온 그들의 계승자에게로 전달되었다”(Manual of History of Dogmas, II, p, 214). 우연히 몇가지 요점들이 어느 정도로 더욱 발전되었다.

그러나 교회론 에서는 거의 발전이 없었다고 할찌라도 교회 그 자체는 실제적으로 긴밀하게 조직된 결합(close-knit)과 절대적 교권정치로 더욱 더 발전되었다. 이 발전의 종자들은 이미 키프리안적인 교회관과 어거스틴이 제시한 교회의 한 국면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위대한 교회 교부의 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 “성도들의 단체”(communio sanctorum)로서의 교회관은 일반적으로 투시되어 잠자고 있었다. 이것은 스콜라주의자들이 영적인 요소를 전적으로 부정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적절히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면적인 조직체로써의 교회가 명확하게 강조되었다. 성 빅톨 유고(Hugo of St. Victor)는, 교회와 국가는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두가지 권력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둘은 체제에 있어서 왕정적(monarchical)이지만, 교회는 보다 높은 능력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들의 구원을 관장하지만 국가는 단지 그들의 현세적인 부귀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왕이나 군주는 국가의 머리이지만, 교황은 교회의 머리이다. 교회에는 좋게 정의된 권리들과 의무들을 가진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으니, 곧 한 단위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한 교직자들과 또는 전혀 구별된 부류를 구성하는, 생의 각 분야에서 온 백성들로 구성된 평신도들이다.

교황의 교리는 마침내 교황이 실질적으로 절대적인 군주가 되기까지 점차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교리의 성장은 카톨릭 교회는 지상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였으므로 로마의 주교 관구(管區)라는 개념의 발전에 의해 적지 않게 후원되었다. 가견적이고 조직화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이러한 동일시는 중대한 결과들을 가지고 있다. 즉 (1) 이것은 만사를 교회의 통제하에 둘 것을 요구 하였는데, 가정과 학교, 과학과 예술, 상업과 공업등이 다 그러하였다. (2) 이것은 구원의 모든 축복들이 오직 교회의 법규들을 통하여, 특별히 성례드릉ㄹ 통하여 사람에게 이른다는 개념을 포함 하였다. (3) 이것은 교회의 점진적인 세속화에로 인도하였는데, 이는 교회가 죄인들의 구원보다는 정책들에 보다 더 주의를 집중시키기 시작하였으며 교황들은 마침내 세속 주권자들에게 대한 통치권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2, 종교개혁 기간과 그 이후의 교회관

 

a, 종교개혁 기간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교회관 을 깨뜨렸지만,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서는 그들 가운데 의견상 의 차이가 있었다. 성례들을 통하여 구원을 나누어주는, 무오하며 성직자적인 교회관과 특별한 제사직의 개념은 루터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영적인 교제로 간주하였으며 모든 신자들의 제사직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회복하였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을 주장하였지만, 그것의 두 국면 즉 가견적 인 것과 불가견적인 면을 구별하였다. 그는 이것들이 두 교회들이 아니라 단순히 동일한 교회의 두 국면 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기에 유의하였다. 불가견적인 교회는 가견적 이 되는데, 이는 감독들과 주교들의 규칙에 의하거나 교황의 주권에서가 아니라 말씀과 성례들의 순수한 통치에 의해서이다. 그는 가견적 교회가 언제나 경건한 회원과 사악한 회원의 혼합을 포함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국가에 대해 통치권을 가진다는 로마 카톨릭 개념에 대한 반동으로 다른 극단에로 나아갔으며 또한 실질적으로 교회로 하여금 말씀 전파 이외의 모든 것에서 국가에 예속케 하였다. 재침례파는 그의 입장에 불만을 가졌으며 또한 신자들의 교회만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많은 실예들에서 심지어 가견적 교회와 은혜의 방편들을 비웃었다.

더욱이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였다. 칼빈과 개혁파 신학자들은 교회가 본질적으로 성도들의 단체(communio sanctorum)라는 것을 고백함에 있어서 루터와 동일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루터파와 같이 직분들, 말씀, 성례들과 같은 교회의 객관적인 법규들에서 본질적으로 교회의 통일성과 거룩성을 추구하지 않고, 대개신자들의 주관적 교제에서 추구하였다. 그들도 역시 비록 다소 상이한 방법에서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가견적인 면과 불가견적인 면 사이를 구별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말씀과 성례의 참된 시행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권징의 신실한 시행에서 교회의 참된 표식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칼빈과 17세기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어느 정도로 교회에 알려졌던 것보다 더 큰 정도로 교회의 독립과 능력을 만들었던 교회에서의 통치 형태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루터파와 개혁파 신학자들은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밖의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간과하였다.

17세기의 소니안파와 알미니안파는 비록 가견적인 교회에 대해 말하기는 했지만 현실생활에서는 그것을 전혀 망각하였다. 전자는 기독교를 단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로 간주하였지만 후자는 교회를 본래 가견적인 사회로 삼았으며, 권징의 권리를 국가에 넘겨주고 또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의 회원들을 경고하는 권리만을 교회가 보유함으로써 루터교회를 뒤따랐다. 한편 라비드주의자(Labadisists)들과 경건주의자(Pietists)들은 신자들의 교회만을 추구하고 선과 악의 혼합되어 있는 제도적 교회애 무관심하고 예배집회에서 교회를 추구함으로써 가견적 교회를 무시하려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a, 18세기 동안과 그 이후

 

18세기 동안에 합리주의는 교회론에도 그 영향력을 끼쳤다. 합리주의는 신앙의 일들에 무관심 하였으며 그것이 다른 인간 단체들과 같은 수준에 두었던 교회를 위한 열심히 없었다. 그것은 심지어 그리스도께서 받아들여진 의미에서의 교회를 건립하려고 의도하셨다는 사실까지도 부인하였다. 감리교회에서는 합리주의에 대한 경건주의적 반동이 있었지만 감리주의는 교회론의 발전에 아무 것도 공헌하지 못하였다. 어떤 경우에 합리주의는 기성교회에 강한 반발을 보였으며, 그 밖의 경우에서 이 교회들의 생활에 그 자체를 순응하였다. 슐라이어막허에게 있어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기독교단체, 즉 동일한 영에 의해 활기를 뜨게 된 신자들의 단체였다.

그는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사이의 구별을 거의 짓지 않았으며 또한 교회의 본질을 기독자의 교제의 영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영이 기독자들의 집단에 침투하면 할수록 그 구별들은 더욱 적어질 것이며 또한 그것들은 그것들의 중요성을 더욱 상실하게 될 것이다. 리츌(Ritschl)은 불가견적인 교회의 가견적인 교회 사이의 구별 대신에 왕국과 교회 사이를 구별하였다. 그는 왕국을 사랑의 동기에서 동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집단으로 간주하였고, 교회를 예배를 위해 모이는 동일 집단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명칭은 “예배의 한 기능에 있어서의” 외면적 조직체에 제한되며 또한 이 기능은 단순히 신자들로 하여금 서로간의 보다 더 친숙한 교제를 가질 수 있게 할 뿐이다. 이것은 확실히 신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기(planting)보다는 오히려 단순한 사회적 중심, 즉 인간의 제도로서의 현대 자유주의의 교회관에로 곧 바로 인도하고 있다.

 

 

 

II, 교회의 성질

 

 

A, 교회의 본질

1, 로마 카톨릭의 개념

 

 

초기 기독자들은 교회를 “성도의 단체” (communio sanctorum)로 언급하였으며, 그리하여 비록 그 일을 사려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교회의 본질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제2 세기의 말엽에 이단들이 일어난 결과로 참된 교회에 관한 문제는 그들을 강제하여 그들의 주의를 외면적인 체제로서의 교회의 어떤 특징에 고정시키게 하였다. 키프리안(Cyprian) 시대로부터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본질을 점차적으로 그 외면적인 가견적 조직체에서 탐구되었다. 교회 교부들은 카톨릭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든 참된 지류들(branches)을 이해한 것으로 또한 외면적이고 가견적인 통일성(이것은 그 통일화하는 유대를 감독들의 단체에 가지고 있다)에 함께 묶여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외면적 조직체로서의 교회관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것의 성직 정치적(hierarchical)인 조직체에 대해 점점 강조하게 되었으며, 입석(capstone)은 교황의 체제로 첨가 되었다.

로마 카톨릭파는 현재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즉 “세례를 받아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며 동일한 성례들에 참여하며 또한 하나의 가견적 지상의 머리(역주:교황)아래 그들의 법적인 목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모든 신실한 자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교훈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교훈 받는 교회”(ecclesia audiens), 즉 “치리, 교훈, 건덕하는 자들로 구성되는 교회”와 “교훈, 통치, 성례들을 받는 교회”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교훈받는 교회” 가 아니라 “교훈하는 교회”이다. 후자는 교회의 영광스러운 속성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만, 전자는 단지 간접적으로 그것들의 수식을 받는다. 카톨릭파는 기꺼이 교회에 불가견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교회”라는 명칭을 신자들의 가견적 교제에 대한 것으로 마련하였다.

그들은 종종 “교회의 영혼”에 대해 말하지만, 이 용어의 정확한 함축적 의미에 대해서는 한가지로 일치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데바인(Devine)은 교회의 영혼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로 부름 받고 초자연적인 선물들과 은혜들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있는 자들의 단체”로 보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대개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육신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 회원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독특한 기능을 수행케 하는 널리 퍼지는(pervading)원리이다. 교회의 영혼에 속하는 것은 신앙, 동일한 목적에 대한 모든 것의 공통적인 열망, 우월한 사람들이 불가견적 권위, 성화의 내적 은혜, 초자연적인 덕(德)들, 그 밖의 은혜의 선물들이다.” 라고 하였다(Handbook of the Christian Religion, p, 103). 데바인은 교회의 영혼을 어떤 자격있는 인격들(사람들)로 보고 있지만, 월머즈는 전체에 퍼지는 원리 즉 사람 안에 있는 영혼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파가 무엇을 승인하려고 하든지 간에 그들은 소위 “불거견적 교회”가 논리적으로 가견적인 교회 보다 선행한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을 것이다.

메흘러(Moehler)는 말하기를 “카톨릭은, 가견적인 교회는 처음이며 그 다음에 불가견적인 교회가 오며, 전자는 후자를 낳는다고 가르친다” 고 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신자들의 단체”(communio fideium) 이전에 “신자들의 어머니”(mater fidelium)임을 의미한다. 어쨌던 메흘러는 “내면적 교회”가 외면적 교회보다 선행한다는 한 의미가 있다. 즉 우리가 전자에 속하기까지는 후자의 “살아있는” 회원들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저서(Symbolism or Dectrinal Differences, Chap. V. 특히 XL>VI_XL.VIII에서) 그 둘이 서로간에 대해 가지는 관계의 전 주제를 논의하고 있다. 그는 가견적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동일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곧 “그러므로 여기에서 취해진 견해에서 볼 때 가견적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히 자신을 사람들 가운데 영구하게 새롭게 되고 영원히 젊은 인간의 형태 즉 성서에서 신실한 자 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불리우는 것처럼 동일한 자의 영구적인 성육신으로 나타내고 있다”(p. 59).

 

2, 헬라 정교회 개념

 

헬라 정교회의 교회관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회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그것과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에서 차이가 있다. 헬라정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그 영예를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밖에 없으며 그 교회는 헬라 정교회라고 한다. 이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보다 더 명백하게 교회의 두가지 국면 즉 가견적인 것과 불가견적인 것을 인정 하면서도, 외면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강조점을 둔다. 헬라 정교회는 본질을 성도들의 단체인 교회에서 찾지 않고 교황직을 반대하면서도 그것이 보유한 감독 교직단에서 찾고 있다. 교횡늬 무오성은 주장되지만 이 무오성은 감독들에게 있으며, 따라서 교회의 회의와 대회들에 있다.

가빈(Gavin)은 말하기를, “불가견적인 교회는 신적인 은사들과 능력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류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변형시키는데 이바지한다. 가견적인 교회는 공통된 신앙을 고백하고 공통된 관습들을 준수하며 은혜의 가견적 방편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한다. 동시에 “구별된 조직체들로 형성되고 ‘교회들’로 자칭하는 기독자들의 다양한 단체들이 부분적이며 미완성적인 체현(體現) 들인 불가견적이고 이상적인 교회의 개념”이 거부된다. 교회는 “현실적이고 실체적이며 가견적인 실재(entity)이며, 비현실적이고 실현될 수없는 이상이 아니다” (Creek Orthodox Thought, pp. 241-242).

 

3, 개신교의 개념

 

종교개혁은 일반적으로 로마교회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이었으며, 특별히 그 형식적인 교회관에 대한 반동기도 하였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본질이 교회의 외면적(형식적)인 조직에 있지 않고 성도들의 단체인 교회에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전면에 내세웠다.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단지 성도들의 단체, 즉 그리스도를 믿고 성화되며 그들의 머리이신 그와 결합된 자들의 단체였다. 이것은 역시 개혁파 신앙고백 표준서들에서 취해진 입자이다.

벨직 신앙고백서(the Belgic Confession)는 말하기를, “우리는 한 공통적 또는 보편적 교회를 믿고 고백하나니,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신들의 구원을 기대하며 그의 피로 씻음받고 성령에 의하여 성화되고 인쳐진 참된 기독자들의 거룩한 모임이다.” (제27 조) 라고 하였다. 제2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불리워지고 모여진 신실한 자들의 모임 체요, 모든 성도들 즉 성령의 말씀에 의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신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올바르게 예배하며 섬기는 자들과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어진 모든 선한 은혜들에 참여한 자들의 단체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동일한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17장). 또한 교회를 선택의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불가견적인 공통적 또는 보편적 교회는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 하나로 모여진, 모인, 모여질 선택받은 자의 배우자요 몸이요 충만이다.”(25장).

보편적 교회, 즉 하나님의 존재하며 단지 시대의 진로에서만 성취되는 교회는 시간의 과정에서 영생에로 부르심을 받은 선택받은 자의 전체 몸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상에 실제적으로 존재 하는 대로의 교회는 성도들의 단체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간주된 것은 불가견적 교회 뿐 만 아니며, 가견적인 교회도 그러 하였다. 이것들은 두 교회가 아니라 한 교회이며, 따라서 단지 하나의 단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둘이 다 “본질적으로” 성도들의 단체이지만, 불가견적인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대로의 교회, 즉 단지 신자들만을 포함하는 교회이지만, 가견적인 교회는 사람이 보는대로의 교회로서, 자기들의 자녀들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공언하는 자들로 구성되며 따라서 성도들의 단체로 판단된다. 이 교회는 아직 중생되지 않은 자들을 포함할 수 있고 또 언제나 포함하지만 -알곡에 쭉정이가 있을 수 있다-, 공공연한 불신자들과 사악한 사람들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경험적(empirical) 교회들에 자신의 서신들을 쓰고 있으며, 그들을 “성도들”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으며, 역시 사악한 자와 불순종하는 자들을 그들 가운데서 내어쫓을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전5:, 살후3:6,14, 딛3:10).

교회는 그리스도가 신적인 머리가 되시는 영적인 통일체를 형성하게 되며, 한 신앙을 고백하고 한 소망에 참여하며 한 왕을 섬긴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전달하는 진리의 아성이며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구속사역에 나타난대로의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되어 있다. 이상적인 의미에서의 교회 즉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며 장차 한번 실현될 교회는 지식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신앙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 고백은 “나는 하나의 거룩한 공동적 교회(공회)를 믿나이다”이다.

B, 교회의 다양한 특성

 

 

교회를 말함에 있어서 몇가지 구별을 고찰하게 된다.

 

 

1,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현 세대의 교회는 전투적 교회이다. 다시 말하면 이 교회는 거룩한 싸움을 하도록 불리워지며 또한 실제적으로 그 싸움에 종사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교회가 그 자체의 힘을 자멸시키는 큰 싸움에 소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교회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간에 그 자체를 나타내는 각종 형태에서의 적대하는 세계와 모든 흑암의 영적 세력들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싸움을 수행해야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자체의 모든 시간을 기도와 묵상에만 사용해서는 안되며(비록 이것들이 필수적이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의 영적 기업의 화평에만 만족해서도 안된다. 교회는 마땅히 공격적이며 방어적 이며 방어적인 전투를 싸움으로써 그 주님의 전투를 전력을 다하여 싸워야만 한다.

만일 지상에 있는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라면, 하늘에 있는 교회는 승리하는 교회에이다. 거기에서 검은 승리의 종려로 바꿔지고 전투의 함성은 승리의 노래로 바꿔지며, 십자가는 왕관으로 대체된다. 싸움은 끝나고 전투는 승리하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존재의 이러한 두 단계들에서 교회는 그 하늘에 있는 주님의 겸손과 승귀를 반영한다. 로마 카톨릭과는 전투적이고 승리적인 교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고난받는” 교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이 교회는 지상에 있지 않고 아직 하늘의 즐거움에 들어가지 않고 지금 연옥에서 그들의 남아있는 죄의 정화를 받고 있는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고 있다.

 

2, 가견적 교회의 불가견적 교회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한편으로는 불가견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루터는 최초로 이 구별을 지었으며, 기타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역시 교회에 적용하였다고 말해진다. 이 구별은 언제나 적절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을 반대한 자들은 종종 그들이 두 구별된 교회들이 있음을 가르친다고 비난하였다. 루터는 아마도 가견적인 <엑클레시아> 안에 있는 불가견적인 <엑클레시올라>에 대해 말함으로써 이러한 비난을 들을만한 구실을 제공한 것 같다. 그러나 그와 칼빈은 그들이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에 대해 말할 때 두 가지 상이한 교회들에 언급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 교회의 두 국면들에 대해 언급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가견적”이라는 용어는 (a) 승리하는 교회, (b) 마지막 때에 있게 될 이상적이고 완성된 교회, (c) 사람이 능히 볼 수 없는 모든 땅들과 모든 장소들, (d) 핍박의 날에 감추어져 말씀과 성례들을 박탈당한 교회에 적용되는 것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그런데 승리하는 교회는 지상에 있는 자들에게 불가견적이며 또한 칼빈의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이것이 불가견적인 교회에 포함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 구별이 의심할 여지없이 본래 전투하는 교회에 적용되기로 의도되었다. 대체로 개혁파 신학에서도 그렇게 적용되고 있다. 이것은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가 가견적임과 동시에 불가견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교회는 불가견적인데, 이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육신과 눈으로 분별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누가 교회에 속하였고 누가 속하지 않았는지를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적인 연합이며, 그들을 연합하는 성령은 불가견적인 띠(tie, 끈으로 묶다, 매다)를 구성하고 있다. 중생, 순수한 회심, 참된 신앙,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와 같은 구원의 축복들은 모든 장녀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교회의 실제적 “형식” (forma)(이상적 특성)을 구성한다. “불가견적”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만 한다는 것은 종교개혁 시대에 있던 가견적인 교회와 불가견적인 교회 사이의 구별의 역사적 기원에서 볼 때 분명하다.

성경은 어떤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교회에 돌리고 있으며 또한 교회를 구원적이고 영원한 축복들의 매개체로 표현하고 있다. 로마교회는 이것을 외면적 조직체로서의 교회, 보다 특별히 구원의 축복의 분배자로서의 대표교회(ecclesia representativa)또는 교직 단체에 적용하였으며, 그리하여 인간적인 중보적 제사장직을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둠으로써 그들 사이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교제를 무시하고 부인하였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이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교회가 외면적 조직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현제에 본질적으로 불가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으로서의 교회(비록 그것이 가견적인 교회에서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체현을 가지게 되어있지만)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근절하려고 했던 오류이다.

 

불가견적인 교회는 자연적으로 가견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육신에 적용되고 그 자체를 육신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다. 단순히 영혼뿐만 아니라 영혼과 육신들을 가진 인간적 실유들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외면적 조직체(이것을 통해 그것은 그 자체를 표현한다.)에서 가견적 형태를 취한다. 교회는 기독교 신앙고백과 행위에서, 말씀과 성례들의 사역에서, 외면적 조직체와 통치에서 가견적이 된다. 불가견적 교회와 가견적 교회 사이를 이와같이 구별함으로써 맥퍼슨(McPherson)은 말하기를, “프로테스탄트 주의는 로마교회의 개념의 마술적 또는 초자연적인 형식주의와 열광적 또는 종파적 유심론(spiritualism) 의 특징적인 모든 외면적 의식들의 과도한 경시(저하) 사이의 적절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썼다”고 하였다(Chr. Dogmatics, p. 417).

비록 불가견적인 교회와 가견적인 교회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는 있지만 둘은 각 요점에서 균형이 잡혀있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견적인 교회에 속한 어떤 사람이 죽을 때에 회심하는 전도받은 환자처럼 가견적인 조직체의 회원들이 결코 될 수 없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잠시 동안 가견적 교회의 교제를 끊은 그릇된 신자들처럼 그것에서 일시적으로 제외될 수 있다. 한편 외면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그를 믿는 참된 신앙을 가지지 않은 중생치 못한 어린아이들과 성인들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자들은 그들이 그러한 상태에 있는 한 불가견적인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 가견적 교회의 불가견적 교회에 대한 훌륭한 정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3,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이 구별은 종종 행해지는 대로 앞서 언급한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가견적” 교회에 적용되는 구별이며 또한 가견적 단체로 간주된 교회의 두 개의 상이한 국면들에 유의하는 구별이다.

교회가 단지 직분들, 말씀과 성례들의 시행에 도한 교회 통치의 어떤 형태에서만 가견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오류이다. 비록 이러한 모든 일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신자들의 자치생활과 신앙고백에서 또한 세상에 대한 그들의 공동적 반대에서 오히려 가견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찰 하에 있는 구별이 가견적 교회 안에 있는 구별이라는 사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우리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죄직체(역시 apparitio 와 institutio로 불리움)로서의 교회가 불가견적인 교회에 그것들의 영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어쨌던 비록 이것이 한 가견적 두 개의 국면들이라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중요한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령의 유대로 연합된 신자들의 단체(coetus fidelium)이지만,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신자들의 어머니(mater fidelium), 구원의 방편, 죄인들의 회심과 성도들의 완성을 위한 행위자(대리자)이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카리스마적*charismatic, 권위적)으로 존재한다. 거기에서 각종 선물들과 재능들은 현현되고 주의 사역에 이용된다. 한편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조직하신 직분들과 방편들을 통해 조직적인 형식과 기능에 존재하고 있다. 둘은 어떤 의미에서 동등하지만,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기도 한다. 조직체로서의 교회(mater fidelium)는 목표에 이르는 한 방편이며 또한 이것은 유기체로서의 교회, 즉 신자들의 단체(coetus fidelium)에서 발견된다.

 

 

C, 교회의 다양한 정의들

다양한 실제(entity)인 교회는 자연적으로 여러 관점에서 정의되어 왔다.

 

 

1, 선택의 관점에서

 

 

어떤 신학자들에 의하면 교회는 선택받은 자의 단체(coetus electorum)이다. 그러나 이 정의는 다소 그릇되기 쉽다. 이것은 단지 “이상적으로 간주된” 교회, 즉 그것이 하나님의 개념에 존재하며 또한 그것이 마지막 때에 완성될 교회에만 적용되며, 현재의 경험적 실제로서의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선택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자들(그것에 대한 그들의 현재 실제적인 관계에 상관없이)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태어나지 않거나 그리스도에 대해 낯선 자 또는 교회의 범위 밖에 있는 선택받는 자는 “보다 진정한” 교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2, 유효적 소명의 관점에서

 

 

앞서 진술한 정의에 대해 제기된 반대를 피하기 위하여 교회에 속하는 자들의 어떤 주관적인 영적 특성, 특별히 유효적 소명이나 신앙의 관점에서 선택에 추가된 이러한 특성을 명명함으로써 또는 그것을 선택으로 대체함으로써 교회를 정의하는 것이 점차적으로 습관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선택받은 자들의 단체(coetus electorum vocatorum)로, 유효적으로 소명된자들의 단체(coetus vocatorum)로, 또는 보다 통상적으로 신실한 자들이나 신자들의 단체(coetus fidelium)로 정의되었다. 이 정의들 중에서 첫 번쩨 둘은 교회를 그 불가견적인 본질에 관해 나타내는 목적에 기여하지만, 그것이 역시 가견적인 면을 가진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마지막에 명명된 정의에서 지시되고 있는데, 이는 신앙이 그 자체를 신앙고백과 행위에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세례와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세례와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세례를 받고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단체로 또는 “자기들의 자녀와 함께”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단체로 정의되어 왔다. 이것은 그 외면적 현현에 의한 교회의 정의임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가견적인 교회를 정의하기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공언하며 세례에 의해 이 신앙에로 가입되며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교리와 자선에서의 자신들의 일치를 입증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동의하며, 그 말씀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정해진 사역을 유지하는, 세계에 흩어진 사람들의 무리들”이라고 하였다.

 

 

D,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

 

 

1, 하나님의 왕국의 개념

 

 

하나님의 왕국은 본래 종말론적 개념이다. 성경에 있는 왕국의 근본적인 개념은 전천년설자들이 주장 하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회복된 신정적 왕국(그것은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의 왕국이다)의 개념이 아니며, 또한 현대 주의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보급되고 선한 법칙들이나 문명, 교육, 사회 개혁등과 같은 외면적 방편들을 통하여 사람에 의해 실현된 새로운 사회 상태도 아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근본 개념은 구원의 무한한 축복을 보증하는 성령의 능력있는 중생케 하는 영향력에 의해 죄인들의 마음에 설립되고 인정된 하나님의 규칙, 즉 원리적으로 지상에 실현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견적이며 영광스러운 귀환시에 비로소 그 절정에 이르게 될 규칙이다. 이 왕국의 현재 실현은 영적이며 불가견적이다. 예수님은 이 종말론적 개념을 굳게 붙잡고 그것을 자신의 교훈속에서 두드러지게 하였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 왕국의 현재 영적인 실현과 보편적 특성을 가르쳤다. 더욱이 그는 친히 전무 후무한 정도로 그 실현을 성취하셨고 하나님 왕국의 현재 축복들을 크게 증가시켰다. 동시에 그는 그 왕국이 미래에 외면적 영광과 구원의 완전한 축복들로 나타나리라는 축복된 소망을 제시하셨다.

 

 

2, 왕국의 역사적 개념

 

 

초대 교부들은 지고선(至高善)인 하나님의 왕국을 본래 미래의 실재 즉 교회의 현재 발전의 목표로 간주하였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은 그것을 메시아의 도래하는 천년 통치로 간주하였지만, 역사는 어떤 천년설의 기자들이 자신들의 수에 관해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을 지지하고 있지 않다. 어거스틴은 왕국을 현재의 실재로 보았으며 그것을 교회와 동일시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본래 경건하고 거룩한 자 즉 신자들의 단체로서의 교회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역시 그것이 감독제로 조직된 교회에 구현되었다고 보는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들을 사용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의 왕국과 그것들의 교직단체와 동일시하였으나 종교 개혁자들은 그것이 현세대에서 불가견적 교회와 동일시되는 견해에로 환원하였다. 칸트 특별히 리츌의 영향아래 이것은 그 종교적 특성을 박탈당하였으며 종말의 윤리적인 왕국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것은 현제 사회에 도입되어 그것을 그 모든 관계들에서 변형시키도록 되어있는 새로운 원리 또는 사랑의 동기에서 오는 행동을 통한 인류의 도덕적 조직체, 즉 창조의 최종 목표로 정의된다.

 

 

3, 하나님의 왕국과 불가견적 교회

 

 

하나님의 왕국과 불가견적 교회가 어느 정도로 동일시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주의깊게 구별되어야만 한다. 한편에서의 시민권과 다른 편에서의 회원권이 동등하게 중생에 의해 결정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서의 교회에 있지 않고서는 하나님 왕국에 있을 수 없다. 동시에 신자들이 왕국이라고 불리우는 관점과 그들이 교회라고 불리우는 관점 사이에 구별을 지을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왕국을 구성하며 또한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세상으로부터 분리하고 서로 간의 유기적 연합에 있어서는 교회를 구성한다. 교회로서의 그들은 일들의 이상적인 질서를 위해 길을 예비하고 또 그것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을 받으며 또한 왕국으로서의 그들은 그들 중에서 이상적 질서의 처음 실현을 나타낸다.

 

 

4, 하나님의 왕국과 가견적 교회

 

 

로마 카톨릭파는 분별없이 하나님의 왕국과 교회의 동일시를 주장하였으므로 그들의 교회는 사회적 정치적 조직체와 마찬가지로 과학과 예술 또는 상업과 공업 같은 생(生)의 각 방면에 대한 권세와 지배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전혀 그릇된 개념이다. 어떤 개혁파 기독자들이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그릇된 개념 때문에 기독교 학교 단체들, 기독교 원리들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청장년들의 자발적인 조직체들, 기독교 노동조합들, 기독교정치조직체들은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현현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또 다시 그들을 가견적 교회의 영역과 그 직원들의 직접 통치 아래로 데려오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이것은 교회가 이러한 조직체들에 관해 아무런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들이 하나님 왕국의 현현들이며 거기에서 기독자의 단체들은 그 왕국의 원리들을 생의 각 방면에 적용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가견적 교회와 왕국은 역시 어느 정도 동일시 될 수 있다. 가견적 교회는 분명히 왕국에 속하며, 그것의 한 부분이며, 심지어 왕국의 세력들의 가장 중요한 가견적 체현으로 말해질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 왕국의 실현을 위한 방편으로서의 불가견적 교회(둘은 하나임)의 특징에 참여한다. 이것은 밀과 가라지, 그들의 비유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가견적 교회가 왕국의 설립과 확장에 도구가 되는 한 물론 그것은 목적에 이르는 방편으로서의 이것에 종속된다. 왕국이 교리보다 더 광범위한 개념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생(生)의 모든 현현들이 완전한 통치만을 목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의 각 방면에서의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E, 여러 세대에서의 교회

 

 

1, 족장 시대에서

 

 

족장시대에는 신자들의 가족들이 종교적인 모임을 구성하였으며, 교회는 족장들이 제사장으로 섬겼던 경건한 집안에서 가장 잘 설명되었다. 비록 창4:26ㅇ의 주의 이름으로 공적으로 불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정규적인 예배의식은 없었다. 하나님의 자녀와 사람들의 자녀 사이에는 구별이 있었는데, 우리가 점차적으로 상위를 차지하였다. 홍수 시에 교회는 노아의 가족에 보관되었고 특별히 셈의 계통으로 계속되었다. 그리고 참된 종교가 또 다시 없어지려는 시점에 있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고 그에게 언약의 징표를 주셨으며, 그와 그의 자손들을 세상에서 분리시켜 그 자신의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셨다. 모세 시대에 이르기 까지 족장들의 가족들은 참된 신앙의 실제적인 보관소였으며, 거기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주님을 봉사하는 것이 계속적으로 살아 있었다.

 

2, 모세 시대에서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한 국가로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가족적 헌신이나 지파적(支派的) 신앙 뿐 만 아니라 국가의 종교가 표현될 수 있는 제도들을 풍성하게 소유하게 되었다. 교회는 아직까지 독립적인 조직체를 얻지 못하였으며 그 제도적인 존재를 이스라엘의 국가 생활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취했던 특별한 형태는 교회국가(Church-State)의 형태였다. 우리는 둘이 완전하게 합일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국가의 한계 내에는 구별된 공민적(公民的) 종교적인 관직들과 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체 국가는 교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교회가 이스라엘의 한 국가에 제한되었지만, 외국인들은 국가에 입적함으로써 교회가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시대에 교회의 두드러진 발전, 알려진 종교적 진리의 양적인 증가, 전적 이해에 있어서 보다 큰 명백성이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매우 상세하게 규정되었으며, 대부분 제례적(祭禮的), 의식적(儀式的)이였으며 또한 하나의 중앙 성소에 집중 하였다.

 

 

3, 신약에서

 

 

신약교회는 본질적으로 옛 세대의 교회와 하나이다. 그것들의 본질적인 성질에 관한한 그것들은 참된 신자들 만으로 구성되고 있다. 또한 그것들의 외면적인 조직에 있어서 둘은 선과 악의 혼합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몇몇 중요한 변화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된 사역에서 비롯되었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국가 생활에서 분리되었으며 또한 독립적인 조직을 획득하였다. 이것과 연관하여 교회의 국가적 합계는 철패(鐵牌) 되었다. 지금까지 국가적인 교회였던 것이 이제는 보편적(普遍的)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한 세계적 확장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것은 구원의 복음을 세계 모든 국가들에 전파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었다. 더욱이 과거의 의식적 예배는 신약의 더 큰 특권들과 조화되는 보다 영적인 예배로 대체되었다.

앞에서 제시된 표현은 교회가 옛 세대와 새 세대에 존재하였으며 또 한 인정된 제도적 또는 관할적 상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세대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였다는 추측을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고백 표준서 들과 조화 된다.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은 27조에서, “ 이 교회는 태초부터 있어 왔으며 그 종말까지 있을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가 영원한 왕이시며 신하없이 그가 왕이 되실 수 없다는 사실에서 명백하다”고 하였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이것과 완전히 일치하게 “주일” 항 21조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전 인류로부터, 세계의 시초에서 종말까지, 자신의 영과 말씀으로, 참된 신앙의 통일성에서, 영생에로 선택된 교회를 스스로 모으시고 방어하시고 보존 하신다”고 하였다.

교회는 앞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본질적으로 신자들의 단체이며 또 한 이 단체는 옛 세대의 시초로부터 현재까지 존재하였으며 또한 계속하여 세상 끝까지 지상에서 존재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세대주의의 영향아래 교회는 오로지 오순절 날에 성령의 부으심이 있기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천년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지상에서 옮겨지게 될 신약의 제도라고 주장한 전천년 자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은 교회를 특정적인 신약의 명칭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하기를 좋아하며, 또한 그것이 매우 결정적으로 구약의 맛을 가진 명칭들인 “하나님의 전” 과 “예루살렘”으로 불리운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이 보인다(참조, 고전3:16,17, 고후6:16, 엡2:21, 갈4:26, 히12:22). 우리는 “교회”라는 명칭(히=<카할>, 70인역에서는 <에클레시아>로 번역됨) 이 구약에서 반복하여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수8:35, 스2:65, 욜2:16). 우리 성경이 원문을 구약에서 “회”, “회중”, “총회”로 번역한 사실(신약에서는 “교회”로 번역됨)을 이 점에 대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지만, 그 사실은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원어는 하나님의 백성의 총회 또는 회집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교회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가 장차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마16:18). 그것을 이미 존재하는 제도로 인정하셨다(마18:17). 스데반은 “광야 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행7:38). 그리고 바울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영적인 통일성을 명백히 입증하고 있다(롬11:17-21, 엡2:11-16).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조직하였지만 그 외면적 체계는 신약에서의 교회의 체계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F, 교회의 속성들

 

 

개신교에 의하면 교회의 속성들은 본래적으로 불가견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돌려지지만, 다만 부차적으로 외면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돌려진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교는 그것들을 자신들의 교직적 체제에 돌리고 있다. 전자는 세 가지 속성들에 대해 언급하지만, 후자는 이 세 가지에 한 가지를 더 첨가하여 언급한다.

 

 

1, 교회의 통일성

 

a, 로마 카톨릭교의 개념

로마 카톨릭교는 통상적으로 단지 교직적으로 조직된 <엑클레시아>만을 교회로 인정하고 있다. 이 교회의 통일성은 만국의 교회를 포함하려고 목표하는 그 위압적인 체계에 조직에 그 자체가 표현된다. 그것의 진정한 중심은 신자들에게 있지 않고 동심원(同心圓, concentric circles)을 가진 교직단에 있다. 맨 먼저 낮은 성직자 즉 사체들과 그밖의 하급적 직원들로 된 넓은 원이 있고 그 다음에 감독들의 보다 좁은 원이 있고 그 다음에 대주교들의 더욱 좁은 원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추기경들과 가장 좁은 원이 있으며, 그 맨 꼭대기 원에는 전 조직의 가견적 머리인 교황이 있는데, 그는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자들에 대한 절대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 이와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매우 위압적인 체제를 눈앞에 제시하고 있다.

 

b, 개신교의 개념

 

개신교는 교회의 통일성이 본래 외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내면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모든 신자들이 회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의 통일성이다. 이 몸은 교회의 왕이신 한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통괄되며 한 성령 즉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된다. 이 통일성은 교회에 속한 모든 자들이 동일한 신앙에 참여하며, 사랑의 공통적인 유대에 의해 함께 결합되며, 미래에 대한 동일한 영광스러운 전망을 가진다는 것을 함의 한다. 이 내적 통일성은 비교하여 말하자면 외면적 표현을 신자들의 신앙고백과 기독자 행위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동일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공적 예배에서, 도한 그들의 동일한 성례들에 참여하는 것에서 찾으며 또한 획득한다.

성경이 불견적 교회의 통일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가견적인 교회의 통일성도 주장한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의심이 있을 수 없다. 고전12:12-31에 있는대로 몸의 비유는 이 통일성을 함의하고 있다. 더욱이 바울이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는 엡4:4-16에서 그는 역시 분명히 마음속에 가견적 교회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그가 교회에서 직분가진 자의 임명과 교회의 이상적 통일을 위한 그들의 수고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통일성 때문에 한 지교회는 다른 지교회의 필요성을 공급하도록 권고 받았으며, 또한 예루살렘 회의는 안디옥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로마교회는 가견적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였으며, 그것을 그 교직체제로 표현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회와 분리할 때에 그들은 가견적 교회의 통일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였다. 어쨌던 그들은 연합(통일)의 유대를 교회의 정치 조직에서 찾지 않고 말씀의 참된 전파와 성례들의 올바른 시행에서 찾았다.

이것은 역시 벨직 신앙고백에서도 마찬가지이다(27-29조). 우리는 단지 그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진술들을 인용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하나의 공동적 또는 보편적 교회를 믿고 고백하나니, 이 교회는 자신들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대하고 그의 피로 씻음 받고 성령에 의해 인침 받은 참된 신자들의 거룩한 회중이다”(27조). 참된 교회가 알려지는 표식들은 다음과 같다. 즉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거기에 전파된다면,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성례들의 순수한 시행을 주장한다면, 만일 교회 권징이 죄를 범하는 것으로 수행된다면, 간단히 말해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따라 수행된다면, 거기에 배치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다라 처리된다면, 거기에 배치된 모든 일들이 거부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된다. 이로써 참된 교회는 분명히 알려질 수 있는데, 거기에서 어떤 사람도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29조).

가견적 교회의 통일성은 후기 종교개혁 시대의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해 가르쳐졌고 도한 언제나 스코틀란드 신학에서 강조되었다. 워커(Walker)도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들이 서로가 병립(竝立)하여 구별된 통치들을 가진 구별된 조직들을 형성하는 것은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나 일시적인 편의(便宜)때문이 아니라면 그들(스코틀란드 신학자들)에서 전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여 졌다.” 고 하였다(Scttish Theology and Theologians, pp.97 f.). 화란에서 이교라는 근년에 교회의 다형성(多形性, plurifomity)이 역사적 사실과 현존하는 상태에 따라서 강조되었을 정도로 침식되었다.

오늘날 그것은 또 다시 어떤 널리 알려진 논의들에서 강조되고 있다. 교회의 현재 분파들의 견지에서 볼 때 이것이 가견적 교회의 통일성의 교리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자연히 불러일으킨다. 이에 답변하여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장소나 언어의 차이에 의해 야기된 어떤 분파들은 완전히 교회의 통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리적인 왜곡이나 성례적인 악용에서 비롯되는 분파들은 참으로 그 통일성을 손상시킨다. 전자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에서 결과 되지만, 후자는 죄의 영향 즉 이해의 어두워짐, 오류의 세력 또는 사랑의 완고함에서 기인되며 따라서 교회는 이것들을 극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불가견적 교회가 한 단일한 조직체로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을 명백히 요구한다고 말해질 수는 없으며 또한 역사가 이것이 실행될 수 없음과 무가치함을 보여주었다. 전체교회를 하나의 외면적 큰 조직체로 연합하려고 했던 유일한 시도는 좋은 결과 들을 내지 못함이 입증되었고 오히려 형식주의, 의식주의, 율법주의에로 인도 하였다. 더욱이 교회의 다형성은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인도와 합법적인 방법으로 결과되는 한에 있어서는 프로테스탄트 주의의 특징이기도 한 다형성은 가장 자연적인 방식으로 일어났으며 또한 차별의 법(그 법에 의하면 유기체는 그 발전에 있어서 동(同)에서 이(異)에로 진화한다)과 전적 조화가 된다. 교회의 유기체의 고유적인 부귀들이 단일한 외면적 조직체에서보다는 교회들의 현제 다양성에 더 낫고 충분한 표현을 찾고 있다. 물론 이것은 교회가 더욱 큰 분량의 외면적 통일성을 위해 노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이상(理想)은 언제나 가장 적절한 표현을 교회의 통일에 제공해야만 한다.

오늘날 오히려 강력한 교회 연합 운동이 있지만, 이 운동은 오늘까지 발전되는 것을 보아 비록 의심할 여지없이 어떤 사람 편에서 칭찬할 만한 동기에서 비롯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가치가 의심스럽다. 외면적 연합이 어떻게 실행되든지 간에 그것은 현존하는 내적 통일성의 자연적 표현이어야만 하지만 현재의 운동은 “자연적인 불일치를 연합하려는 인조적인 집합(artificial aggregation)은 그 집합 안에 있는 분파들의 싸움에 대항하여 한 보증을 제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내적인 통일성이 발견되지 않는 외면적인 연합을 꾸며내려고 하고 있다.

이 운동은 진리(眞理)를 희생하고 연합을 추구하고 종교에 있어서 주관주의(主觀主義)(subjectivism)의 물결을 타는 한 비성경적이다. 이것이 “진리에 있어서” 색깔을 바꾸고 더 큰 연합을 추구하지 않는 한 참된 연합을 산출하지 못하고 다만 단조합(uniformity)만을 산출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교회를 사무적인 관점에서 더욱 능률적이 되게 할 수 있지만 교회의 참된 영적인 유효성에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바르트(Barth)는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올바른 의견을 피력한 것 같이 보인다. “교회의 연합을 위한 탐구는 실제로 교회의 구체적 머리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탐구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야만 한다. 연합의 축복은 축복을 주시는 자와 구별될 수 없으며, 그 분 안에서 그것은 그 근원과 실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제시되며 또한 신앙 안에서만 그것은 우리 가운데서 하나의 실재가 될 수 있다.”(The Church and the Churches, p. 28).

 

2, 교회의 거룩성

 

 

a, 로마 카톨릭교의 개념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로마 카톨릭교의 개념은 역시 본래적으로 외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성령의 성화케 하시는 사역을 통한 교회의 회원들의 내면적 거룩성이 아니라 전면에 놓여있는 외적인 의식적(儀式的) 거룩성이다. 데바인(Devine) 신부에 의하면 교회는 우선적으로 “그것의 교의에서, 그것의 도덕적 교훈에서, 그것의 예배에서, 그것의 권징에서” 거룩하며, 이것들에서 “모든 것은 순수하고 비난받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악과 사악함을 제거하고 가장 숭고한 덕을 조장하도록 계획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나”고 한다. 단지 부차적으로 교회의 거룩성은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디할베(Deharbe)신부는 말하기를, “교회가 거룩한 것은 그 안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 거룩성을 이적들과 특별한 은혜로 확증한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b, 개신교의 개념

그러나 개신교는 교회의 거룩성에 대해 상이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가 객관적인 의미에서 즉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간주됨으로 절대적으로 거룩하다.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의로움의 효능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으로 간주된다. 상대적 의미에서 그들은 역시 교회가 주관적으로 거룩한 것으로 즉 그것의 내적 생활 원리에서 실제적으로 가룩한 것으로 도한 완전한 거룩에로 예정되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으로 성도들의 단체로 불리워질 수 있다. 이 거룩성은 우선적으로 내적 인간이 거룩성이며, 역시 외적 생활에서도 표현되는 거룩성이다. 따라서 거룩성은 역시 부차적으로 가견적인 교회에 돌려지고 있다. 그 교회가 그것이 하나님께 봉헌된 세계와 구별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룩한 회심을 목표하고 원리적으로 성취한다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거룩하다. 가견적 지교회들은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들로 구성되므로 그들은 모든 공공연한 불신자들과 사악한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바울은 그들을 성도들의 교회들로 서슴치 않고 부르고 있다.

 

 

3,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

 

 

a, 로마 카톨릭교의 개념

 

보편성의 속성은 마치 로마 카톨릭 만이 오직 보편적(catholic)이라 불리울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것에 의해 전유(專有)되고 있다. 교회의 다른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의해 가견적인 조직체에 적용되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는 하나의 실제적인 보편적 교회(the one really catholiic Church)로 간주되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그 교회가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그 자체를 모든 국가들과 각종 형식의 정부들에 저굥되고 있으며, 처음부터 존재하였고 종파들이 오고 가는 동안에 언제나 신도들도 신실한 자녀들을 가졌으며, 사람들에게 분배되기로 예정된 권리와 은혜를 소유하며, 회원들의 수에 있어서 함께 취해진 모든 반대 종파들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b, 개신교의 개념

 

또 다시 개신교는 이 속성을 본래적으로 불가견적인 교회에 적용하고 있는데, 이 교회는 보다 참된 의미에서 혀존하는 조직체 중의 어떤 하나(로마교회는 예외가 아니다)보다 보편적인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교가 이 속성을 자기들의 교직 단체에 전유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 교회가 어떤 독특한 신간에 지상에 있는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역시 복음화된 세상의 모든 국가들 가운데 자체의 화원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든 단계 (국면)에서 사람의 전체 생활에 대한 통제적인 영향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부차적으로 그들은 역시 보편성의 속성을 가견적 교회에 돌리고 있다.

가견적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종교개혁자들과 개혁파 신앙고백서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보편적인 가견적 교회에서 표현하였다는 사실이 이미 명백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 의견은 비록 최근에 화란이나 스코틀란드, 미국의 개혁파 신학자들에 의해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언급되어 왔다. 이 교리가 오히려 해결을 요하는 많은 난문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만 한다. 이 하나의 보편적인 가견적 교회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1) 이 교리가 헨리 반 다익(Henry Van Dyke)박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교파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정죄를 수반하고 있는가? (2) 그것은 어떤 한 교파가 “참된” 교회요 다른 교파들은 “거짓된 교회”임을 의미하는가? 혹은 보다 더욱 순수하게 형성된 교회와 덜 순수하게 형성된 교회 사이를 구별하는 것이 좋은가? (3) 어떤 점이 지교회 또는 어떤 교파로 하여금 하나의 가견적 교회의 필수 부분이 되는 것을 중지시키는가? (4) 단일 한 외면적 제도 또는 조직체가 가견적 교회에 필수적인가 또는 아닌가? 이것들은 여전히 더 많은 연구를 요하는 문제들이다.

 

 

 

G, 교회의 표식들(Marks)

 

 

1, 교회의 표식들(개관)

 

a, 이러한 표식들의 필요성

 

교회가 명백히 하나였을 동안에는 이러한 표식들에 대한 필요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단들이 일어났을 때 “참된” 교회가 인식될 수 있는 어떤 표식들을 지적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필요성에 대한 의식은 이미 초대교회에 있었으며, 자연히 중세기이는 덜 분명하였지만, 종교개혁 때에는 매우 강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하나의 현존하던 교회는 두 개의 큰 종파들로 구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자체도 몇 개의 교회들과 종파들로 구분 되었다. 결과적으로 참된 교회가 거짓 교회로부터 구별될 수 있는 어떤 표식들을 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점차적으로 느껴졌다. 종교개혁 사실 그 자체가 개혁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보존 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고 교회의 경험적 채현이 그릇될 수 있으며 진리를 더날 수 있고 전적으로 쇠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가 적응해야할 진리의 표준이 존재한다고 추측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 표준으로 인정하였다.

 

b, 개혁파 신학에서의 교회의 표식들

 

개혁파 신학자들은 교회의 표식들의 수에 관하여 의견을 달리하였다. 어떤 사람은 하나의 표식 즉 복음의 순수한 교리의 전파(Beza, Alsted, Amesius, Heidanus, Maresius)에 대해 말하였고, 어떤 사람은 두 개의 표식을 즉 말씀의 순수한 전파와 성례들을 올바른 시행(Calvin, Bullinger, Zanchius, Junius, Gomarus, Mastricht, a Marck), 또 어떤 사람은 이것들에 세 번째로 권징(훈련)의 신실한 수행(Hyperius, Martyr, Ursinus, Trelcatius, Heidegger, Wendelinus)을 첨가하였다. 이 세가지는 역시 화란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29조)에서도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에 대해 언급 하고 난 다음에 그 신앙고백서는 “간단히 말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따라 처리된다면”이라고 말함으로써 그것들 전부를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특별히 스코틀란드에서 교회의 “존재”(being)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특성들과 단지 그 “안녕”(well-being)에 필요한 특성들 사이에 구별이 지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권징(훈련)이 교회의 건강에 필요하다고 할찌라도 권징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례들의 정당한 시행에 관해 동일한 것을 느꼈는데, 이는 그들이 침례파나 퀘커파가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의 결과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보여지는데, 이 고백서는 “참된 종교의 신앙고백”을 교회의 “존재”에 필요불가결한 유일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교리나 예배, 권징의 순수성과 같은 그 밖의 일들을 특별한 교회들의 품질들(그것에 의해 그것들의 순수성의 정도가 측정될 수 있다)로 언급하고 있다(제25장 2, 4, 5조).

카이퍼(Kuyper) 박사는 단지 “말씀의 전파”(praedicatio verbi)와 “성례의 시행”(administratio sacrameti)만을 교회의 진정한 표식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그것들 만이 (1) 특별한 것, 즉 교회의 특성이며 다른 어떤 단체의 특성이 아니며 (2) 그리스도께서 교회에서 자신의 은혜와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도구이며 (3) 교회의 조직에 가입하는 형성요소이기 때문이다. 권징(훈련)은 역시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며, 이 두 가지와 동등이 될 수 없다. 그는 이것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권징의 신실한 수행을 결정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례들의 올바른 시행은 역시 교회의 한 진정한 표식이다. 비록 권징의 수행이 교회의 독특한 것이 아닐지라도 즉 교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교회의 순수성에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2, 교회의 표식들(각론)

a, 말씀의 참된 전파

 

이것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식이다. 이것(말씀의 참된 전파)은 성례들과 관계 없지만, 성례들은 그것과 관계가 있다. 말씀의 참된 전파는 교회를 유지함과 교회로 하여금 신실한 자들의 어머니가 되게 하기 위한 큰 방편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큰 방편이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의 특징들 중의 하나라는 것은 요8:31, 32, 47, 14:23, 요일4:1-3, 요이 9절과 같은 구절들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 표식을 교회에 돌리는 것은 교회에서의 말씀 전파가 그것이 참된 교회로 간주될 수 있기 이전에 완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와같은 이상은 지상에서 도달될 수 없다. 단지 교리의 상대적 순수성 만이 어떤 교회에 돌려질 수 있다. 교회는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자체의 참된 특성을 충실하거나 거짓된 교회가 되지 않고서도 진리를 오전(誤傳)하거나 부인하는데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떤 한계가 있다. 이것이 일어나는 것은 신앙의 근본적 조항들이 공공연하게 부정되고 교리와 생활이 더 이상 하나님 말씀의 관할아래 있지 않을 때이다.

 

b, 성례들의 올바른 시행

 

성례들은 말씀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것들 자체의 내용을 가지지 않고 그것들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사실상 말씀의 가견적 전파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성례들은 신적인 제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의 합법적인 사역자들에 의해 시행되어야만 하며 또한 상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 즉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시행되어야만 한다. 복음의 중심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자연히 성례들의 적절한 시행에 영향을 미치게 할 것이다. 또한 로마 교회는 성례들을 말씀에서 떠나게 하고 일종의 마술적 효능을 그것들에게 돌리며 또한 필요할 때에 산파들로 하여금 세례를 베풀도록 허락함으로써 분명히 올바른 방식에서 떠나고 있다. 성례들의 올바른 시행이 참된 교회의 특징이라는 것은 말씀 전파와 그것들과의 불가분리적인 연관성과 마28:19, 막16:15,16, 행2:42, 고전11:23-30과 같은 구절들에 의해 추측된다.

 

e, 권징(훈련)의 신실한 수행

 

이것은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성례들의 거룩성을 보호하는데 매우 본질적이다. 권징에 등한한 교회들은 조만간 그것들의 범위 안에 진리의 광명의 인식(eclipse)과 거룩한 것의 오용(誤用)을 발견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급적으로 자체의 이상에 참되려고 하는 교회는 기독자의 권징을 수행함에 있어서 근실하고 양심적이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의 적절한 권징을 주장하고 있다.

(마18:18, 고전5:1-5, 13, 14:33, 40, 계2:14, 15, 20).